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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스크랩 스크랩 참고자료 살아있는 종이 한지, 천년세월을 견디다
열린한지 추천 0 조회 334 09.01.28 21:3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살아있는 종이 한지, 천년세월을 견디다

 

 

 

우리의 종이 ‘한지’ ? 살아 숨쉬며 천년을 견딘다

 

닥나무로 줄기를 삶아 닥풀을 만들어 종이로 떠냈다

 

 

 

 

 

닥종이가 생산되면서 한국의 창호는 나무틀에 닥종이를 발랐는데

채광과 통풍성이 좋아 널리 사용되었다.

 

창호지는 바람과 빛을 통과시키고 습도를 조절하는 3가지 특성을 갖고 있다. 습기가 많으면 그것을 빨아들여 공기를 건조하게 하고, 공기가 건조하면 습기를 내뿜어 알맞은 습도를 유지하게 하는 신축성을 갖고 있었다. 단열효과 역시 뛰어났다. 그래서 창호지를 흔히 '살아 있는 종이'라고 하기도 한다. 창호지가 자연 현상에 이처럼 순응하는 성질은 모두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1997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라이프』는 지난 1천 년 동안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그 첫번째로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해 성경을 찍어낸 것을 꼽았다. 당시 귀족과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이 그의 인쇄기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보급되면서 결국 서양 문명이 현재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인의 문화적 자존심을 한껏 높여주는 증거도 된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751년)과 구텐베르크보다 70여 년 앞서 금속활자로 찍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일명 직지심경, 1377년)을 한국의 선조들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직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秒錄佛祖直之心體要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秒錄佛祖直之心體要節)은 줄여서 ‘직지’라고 한다. 고려의 승려인 백운화상이 역대의 여러 부처와 조사(祖師)의 게송(偈頌), 법어(法語) 등에서 선(禪)의 요체(要諦)를 깨닫는 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 저술한 책이다. 직지는 백운화상이 사망한지 3년 뒤인 1377, 그의 제자들이 금속활자로 인쇄한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이다. ·하 2권으로 나누어져 있는 ‘직지’는 현재 상권의 행방은 묘연하며 하권은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소장되어 있다.

 

 

지난 1천 년 간 가장 위대한 발명 또는 세계를 변화시킨 1백대 사 중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인쇄술이 언급될 때마다 우리들은 선조들이 일구어낸 눈부신 인쇄술 덕분에 더 높은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목판과 금속 인쇄물을 발명한 사실은 내세우고 있지만 그와 비견하여 결코 떨어지지 않는 우리 종이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구텐베르크의 성경은 발간된 지 55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지질의 보관에 문제가 있어 열람조차 불가능한 암실에 보관되어 있다. 반면에 한지는 천 년 세월을 견뎌낸 것은 물론 삭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다. 


1997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라이프』는 지난 1천 년 동안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그 첫번째로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해 성경을 찍어낸 것을 꼽았다. 당시 귀족과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이 그의 인쇄기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보급되면서 결국 서양 문명이 현재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인의 문화적 자존심을 한껏 높여주는 증거도 된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751년)과 구텐베르크보다 70여 년 앞서 금속활자로 찍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일명 직지심경, 1377년)을 한국의 선조들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1천 년 간 가장 위대한 발명 또는 세계를 변화시킨 1백대 사 중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인쇄술이 언급될 때마다 우리들은 선조들이 일구어낸 눈부신 인쇄술 덕분에 더 높은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진설명] 파피루스.


그러나 세계 최고의 목판과 금속 인쇄물을 발명한 사실은 내세우고 있지만 그와 비견하여 결코 떨어지지 않는 우리 종이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구텐베르크의 성경은 발간된 지 55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지질의 보관에 문제가 있어 열람조차 불가능한 암실에 보관되어 있다. 반면에 한지는 천 년 세월을 견뎌낸 것은 물론 삭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다.


◆ 한지의 역사

학자들에 따라 종이의 기원을 이집트의 파피루스로 간주한다. 파피루스는 지중해 연안의 습지에서 자라는데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 식물 줄기의 껍질을 벗겨내고 속을 가늘게 찢은 뒤, 엮어 말려서 다시 매끄럽게 하여 파피루스라는 종이를 만들었다. 이집트가 세계 최고의 문명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로 파피루스를 꼽는 학자들도 많이 있다.


그러므로 종이와 유사한 재료는 동양이 이집트보다 한참 뒤에 발명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집트에서 파피루스를 사용하는 기간에 동양에서는 문자를 표기하기 위하여 다양한 형태의 소재들, 예를 들어 소나 돼지의 뼈, 거북의 등껍질, 청동 그릇, 나무판자, 얇은 대나무판, 판석 등을 사용했다.




[사진설명] 이집트 제19왕조의 『사자의 서』. 기원전 10세기에 제작됐으며 파피루스 줄기로 만들었다.


기원전 2세기 말부터는 대나무가 주로 사용됐다. 그러나 대나무판은 과거의 어떤 문자판보다 실용적이고 견고한 책 모양새를 갖추긴 했으나 무거운데다 부피 또한 만만치 않아 대중적으로 사용하기에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죽간(竹簡) 2세기 초엽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널리 사용된 서사재료(書寫材料). 종이 이전의 종이라고 할 수 있다. 죽간을 만들려면 우선 대나무의 마디를 잘라낸 다음 마디 사이의 부분을 세로로 쪼갠다. 이렇게 해서 된 대나무패를 불에 쬐어 기름을 뺀다. 이것은 글씨를 쓰기 좋게 하고 벌레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길이는 2025 cm이며, 너비는 몇 cm로 한 줄밖에 못 쓰기 때문에 여러 장을 합쳐서 가죽 또는 비단으로 된 끈으로 편철(編綴)한다. 이와 같이 몇 장의 간(簡)을 편철한 것을 책(策) 또는 책(冊)이라고 불렀다.

 

죽간은 그 실물이 20세기에 들어와서 중국 북서쪽 볜징[邊京]에서 유럽의 학술탐험대에 의해서 한대(漢代)의 것이 발견되었으며, 1951년 이후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등지에서는 그 이전인 전국시대의 죽간도 잇달아 발견되고 있다. 또, 죽간을 모방해서 만든 목간(木簡)도 사용되었는데, 이것을 찰(札) 또는 첩(牒)이라고 불렀다. 중국의 북서쪽 볜징에서 발견된 것은 거의 목간이었으며, 약(藥)의 처방전(處方箋) 등이 적혀 있는 죽간이 약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기원전 4세기 이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비단 두루마리 서책(書冊)도 있었다. 비단 두루마리는 비교적 가볍고 사용하기가 편리한데다가 섬세한 글씨를 쓰기에 유리한 털로 만든 붓이 출현하자 더욱 활발하게 활용되었다. 그러나 비단은 가격이 너무나 비싸므로 경전이나 국가의 연대기, 문학적인 걸작들이나 그림들로 장식된 회화서에 한정되어 사용됐다.

공식적으로 종이는 『후한서』 환관열전에서 '105년 환관 채륜이 나무껍질, 마 등을 원료로 종이를 만들어 황제에게 바쳤다'라는 글을 근거로 채륜이 서기 105년에 나무 껍질, 마, 창포, 어망 등 식물 섬유를 원료로 하여 만들었다고 알려진다. 채륜의 종이 발명 연대는 고구려 태조왕(太祖王) 53년, 백제 기루왕(己婁王) 29년, 신라 파사왕(婆娑王) 26년에 해당된다.

 


중국에서 종이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50∼40년대인 전한(前漢)시대로 보고있다.

종이의 원료로 나무껍질이나 마 등을 손질해서 사용했다.

 

채륜(蔡倫)은 후난[湖南] 출생의 환관으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을 발달시켰다. 중국은 필기의 재료로 비단이나 간독(簡牘 대쪽과 얇은 나무쪽) 등을 썼으며 전한(前漢) 시대에는 이미 풀솜이나 마를 펴서 만든 종이를 사용하였다. 당시 궁중의 집기 등을 제조·관리하는 상방령 (尙方令) 이란 직책을 맡고있던 채륜은 이 기술을 발전시켜 나무껍질, 베옷, 고기잡이그물 등을 합쳐 분쇄하여 종이를 값싸게 만드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 발전된 종이를 '채후지(蔡侯紙)'라 불렀다. 채륜(蔡倫)이 발전시킨 제지법은 동아시아에 확산되어 학문이나 예술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채륜(蔡倫)은 114년 용정후(龍亭侯)로 책봉되어 장락(長樂:福建省) 태복(太僕:卿)이 되었으나, 안제(安帝) 즉위 후에 정쟁에 말려들어 음독 자살하였다.  

 

중국에서 종이를 만든 공식기록은 『후한서』 환관열전에서 '105년 환관 채륜(蔡倫)이 나무껍질, 마 등을 원료로 종이를 만들어 황제에게 바쳤다'라는 글을 근거로 서기 105년경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근래 고고학 발굴에 의하면 종이의 기원은 늦어도 기원전 50∼40년대인 전한(前漢)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므로 채륜이 종이를 최초로 발명했다기보다는 채륜이 황제에게 종이의 제조 과정을 보고한 이후 종이를 문서 표기의 대중적인 소재로 사용하도록 결정했다는데 큰 의미를 둔다.


그러나 근래 고고학 발굴에 의하면 종이의 기원은 늦어도 기원전 50∼40년대인 전한(前漢)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므로 채륜이 종이를 최초로 발명했다기보다는 채륜이 황제에게 종이의 제조 과정을 보고한 이후 종이를 문서 표기의 대중적인 소재로 사용하도록 결정했다는데 큰 의미를 둔다.

한반도에서 종이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2세기∼7세기 사이에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2세기에 전래되었다는 설은 현재까지 한지의 주원료인 닥에 대한 음운론적 접근에서 비롯된 것이다. 닥은 한자로 ‘저(楮)’로 쓰이는데 중국에서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 사이에 ‘tag’ 혹은 ‘tiag’라는 음으로 읽혔다고 한다. 그러므로 닥은 ‘저(楮)’의 음이 ‘닥’으로 읽혀지고 있던 시기에 종이 원료로서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3세기 설은 1931년 조선고적연구회에서 발굴한 낙랑시대의 유적지인 평남 대동군 남정리 채협총에서 권자본(卷子本)의 질통(帙筒)으로 보이는 채문칠권통(彩紋漆卷筒)과 먹가루[墨粉]가 묻어 있는 벼룻집, 오수전(五銖錢), 화천, 동경(銅鏡) 등이 발견됨으로서 당시에 이미 종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사용된 종이가 중국에서 수입해온 것인지 아니면 국내에서 생산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 다른 설의 근거는 백제의 아직기가 서기 284년에 일본에 천자문을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채륜이 종이를 만든 지 180년 뒤의 일이므로 한반도에서 이미 종이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사진설명] 구례 화엄사 오층탑에서 발견된 8세기 신라시대 종이유물.

그러나 당시에 사용된 종이가 중국에서 수입해온 것인지 아니면 국내에서 생산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 다른 설의 근거는 백제의 아직기가 서기 284년에 일본에 천자문을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채륜이 종이를 만든 지 180년 뒤의 일이므로 한반도에서 이미 종이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왕인박사(王仁博士)가 도일(渡日)하여 일본천황(日本天皇)의 사부(師傅)가 되어

황족(皇族)들에게 학문(學問)을 가르치고 있는 모습을 그린 ‘학문전수도(學文傳授圖)’

 


아직기(阿直岐)는 백제의 학자로서 《일본서기(日本書紀. 니혼쇼키)》에는 아직기(阿直岐)로 되어 있으나 《고사기(古事記, 고지키)》에는 아직길사(阿直吉師)로 나와 있다. 근초고왕(近肖古王)의 명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 왕에게 말 2필을 선사한 후 말 기르는 일을 맡아보았다. 그 후 일본 왕은 그가 경서(經書)에 능통한 것을 보고 태자(太子, 娠道稚郞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또한 백제의 박사(博士) 왕인(王仁)을 추천하여 일본에 한학(漢學)을 전하게 하였다. 뒤에 아직사(阿直史)라는 일본의 귀화씨족이 나타났는데, 그는 이 씨족(氏族)의 선조이다.


4세기 설은 3세기 말부터 4세기 말까지 중국 대륙에서 난리를 피해 우리나라로 온 이주민들이 많아 이들 가운데 종이 만드는 기술자가 있었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4세기 말이라는 견해는 동진의 마라난타가 384년 백제에 불교를 전파하였는데 이때 많은 책과 제지술도 함께 전해졌을 것이라는 데서 비롯된다.

6세기 말∼7세기 설은 영양왕 21년(610)에 고구려의 담징이 종이·먹채색·맷돌을 전해주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과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발견된 두루말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두루마리는 석가탑이 완성된 751년에 넣어진 것으로 생각되므로 이때 이미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맷돌 등을 이용하여 섬유를 잘게 갈아 종이를 만들었으므로 담징이 함께 전했다고 하는 맷돌은 종이와 관련한 용구로 추측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제지에도 맷돌을 사용하였고 이는 우리나라의 제지법이 중국의 종이 기술과 동일하다는 것을 추측하게 해준다.

위의 사실을 종합해보면 2세기에서 늦어도 4세기까지는 우리나라에 종이와 그 제조술이 전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대세이고 아무리 늦어도 7세기 이전에 이미 상당한 기술의 축적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중국 황제의 진적은 고려 종이로

우리나라의 종이는 예로부터 명성이 자자했다.

송나라 손목(孫穆)이 지은 『계림지(鷄林志)』에 '고려의 닥종이는 윤택이 나고 흰 빛이 아름다워서 백추지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고반여사(考槃余事)』에는 '고려 종이는 누에고치 솜으로 만들어져 종이 색깔은 비단같이 희고 질기기는 마치 비단과 같은데 글자를 쓰면 먹물을 잘 빨아들여 종이에 대한 애착심이 솟구친다. 이런 종이는 중국에는 없는 우수한 것이다'라고 적었다.

중국에서 진귀하게 여겨졌던 신라의 백추지 혹은 경면지(鏡面紙)는 긴 섬유의 종이를 몇 겹으로 붙여서 이를 두드려 광택을 낸 것이다. 백추지는 두드려 만든 하얀 종이라는 뜻이며, 경면지는 두드려 거울처럼 빛나게 한 종이라는 뜻이다. 중국에서 질긴 것이 요구되는 우산, 부채, 책 표지 등의 용도에 우리나라의 종이가 인기가 있었고 그림이나 글씨에는 두드려서 광택이 나는 것을 즐겨 사용했다.

중국 역대 제왕의 진적을 기록하는 데에 고려의 종이만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 종이의 명성은 조선으로 이어져 한지가 중국과의 외교에 필수품으로 여겨졌다. 한지의 질이 명주와 같이 정밀해서 중국인들은 이것을 비단 섬유로 만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한지는 중국과의 외교에서 조공품으로 많이 강요되었다.

문종 34년(1080), 고려가 송나라에 보낸 국신물(國信物) 중에는 대지(大紙) 2천 폭과 먹 4백 정이 들어 있으며 송나라로의 수출품 중에는 백지와 송연묵이 많이 들어 있었다. 그뒤 원나라에서도 고려지를 불경지(佛經紙)로 쓰기 위해 구했는데 한 번에 10만 장이라는 막대한 양의 종이를 수입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전상운 박사는 적었다.

조선 영조 때 서명웅(1716∼1787)이 지은 『보만재총서』에는 '송나라 사람들이 여러 나라 종이의 품질을 논하면 반드시 고려지를 최고로 쳤다. 우리나라의 종이가 가장 질겨서 방망이로 두드리는 작업을 거치면 더욱 고르고 매끄러웠던 것인데 다른 나라 종이는 그렇지 못하다'라고 적고 있어 한국 종이의 우수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 요긴한 닥나무

고려시대의 종이가 다른 것에 비하여 질이 좋았던 이유는 종이의 원료로 닥나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종이의 원료에는 채륜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나무 껍질이나 솜, 마 등 여러 가지가 사용됐다. 그러나 마(麻)섬유로 된 종이는 필기하는 데 껄끄러운 감이 있고, 종이의 원료 공급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지극히 과학적인 사고를 통해 다른 종이 재료를 찾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닥이었다.




[사진설명] 닥나무. 닥나무 잎은 한줄기라도 그 형태가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사진 encyber.com).


닥나무 재배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고려사』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는 사찰과 유가에서 서적 출판(대장경, 『삼국사기』 등)이 성행했기 때문에 대량으로 종이가 소요되었다. 『고려사』에는 인종 23년(1145)에서 명종 16년(1186)에 종이 생산에 필요한 닥나무를 전국에 재배할 것을 명했다고 적혀 있다.

조선 시대에도 제지업을 매우 중요시하여 많은 지방에 닥나무 밭을 만들게 하고 닥나무 재배를 시켰다. 또 중국에 제지공을 파견하여 제지술을 배워오도록 하여 국내 제지술 발전에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 조선 시대 후기에 와서는 종이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나라에서는 사찰에서도 종이를 만들어서 바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이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또 요구되는 규격과 질을 보장할 수 없었으므로 태종15년(1415)에 서울에 제지 공장이라고 볼 수 있는 조지소(造紙所)를 설치한다. 『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조지소에 대해 적혀있다.

‘조지소는 창의문 밖에 있다. 표전지, 자문지 및 여러 가지 종이를 만드는 일을 맡는다. 사지(司紙)1명, 종6품 별제(別提) 4명을 두었다. 설립 당시의 기록을 보면 지소에는 2명의 제조(提調)가 행정적인 책임과 기술적인 책임을 맡아보도록 배치되었고 사지, 즉 제지 기술책임자 1명과 별제라는 담당 관리 4명, 85명의 지장(紙匠), 즉 제지 기술공과 95명의 잡역부가 배치된 200명 가까운 인원을 가진 큰 공장이었다. 또 지방에는 모두 698명의 지장이 각 도에 소속되어 있었으니까 이것 또한 큰 인력이었다.’

15세기 초에 종이를 만드는 일에 거의 1천 명이 종사했다는 사실은 조선이 동시대에는 세계적인 종이 생산국이라는 것을 뜻한다. 조선은 제지 기술공들이 법적으로 우대받도록 규정하고 그들에게 생활을 보장해주는 특권도 부여했다.

국보 제196호 신라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755년경)의 종이를 조사한 오오가와란 일본 학자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종이는 매우 희고 광택이 있으며 표면은 평활하고 강한 광택이 있다. 티라든가 풀어지지 않은 섬유 덩어리도 적은 아름다운 종이이다. 얇은 종이임에도 불구하고 먹이 번지지 않는다. 비추어보면 전체적으로 조화 있으며 만지면 파닥파닥하며 치밀하고 밀도가 높은 종이로 보여진다. 종이의 색이 매우 하얀 것을 보면 하얀 종이를 만들기 위해 꽤 노력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종이의 밀도는 0.64g/cm3으로 보통 닥나무 종이 2배 정도의 밀도를 보이며 표면에 먹이 스며드는 것을 관찰하면 종이 표면에 먹의 침투를 막기 위한 무엇인가를 바르고, 다듬이질, 문지름 등의 가공을 했다고 생각된다. 이 종이는 원료의 닥 껍질에서 최종 가공까지 일관되게 정성 들여 만든 것으로 보이며 제지 기술의 뛰어남을 볼 때 고대 한국에서 만든 종이로 보인다.'

한지 제조의 정확한 유래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지만 상술한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에는 한지 제작 과정을 말미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절에서 쓸 종이를 마련하기 위해 닥나무를 재배할 때는 그 나무 뿌리에 향수를 뿌리며 정결하게 가꾸고, 그것이 여물면 껍질을 벗겨 삶아 찧어 종이를 만든다.'

바로 닥나무의 껍질로 한지를 만들었음을 알려주는 단서이다. 배도식은 『한국 민속의 현장』에 다음과 같은 설화를 수록하였다.

'신라시대에 경남 의령군 봉수면 서암리 뒷산 국사봉에 대동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설씨 성을 가진 주지승이 살고 있었다. 이 절 주변에는 닥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하루는 이 주지승이 닥나무를 꺾어 지팡이 삼아 가지고 다니다가 절 앞의 반석에 앉아 지팡이를 두들겼다. 그리고 다음날 와보았더니, 닥나무의 껍질이 반석에 말라붙어 얇은 막처럼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를 본 주지승은 일부러 닥나무의 껍질을 벗겨서 돌로 짓이겨 반석에 늘어놓고 다음날 다시 와보았다. 그가 예상한 대로 이 껍질 역시 엉겨 붙어서 말라 있었다. 여기서 착상한 주지승은 이를 발전시켜 한지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한지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닥나무는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나 자랄 수 있다. 닥나무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낙엽성 관목으로 학명은 브루소네티아 카찌노키이다. 크기는 3미터 정도이며 밭 가장자리, 길가, 둑 등 다른 나무를 심기 어려운 곳에서도 잘 자라서 비탈에 흙의 무너짐을 막기 위하여 심기도 했다.

낙엽성 관목인 닥나무는 여러 해 동안 매년 줄기를 잘라내도 계속해 새 줄기를 만들 수 있는 나무이다. 어미 나무의 뿌리에서 많이 생겨나는 맹아를 포기나누기나 삽목으로 번식시킬 수 있으며, 추위에 비교적 강하지만 햇볕이 잘 들고 부식질이 많은 곳에서 잘 자란다. 특히 직물의 원료로 한 번 소요되고 난 후 버려야 하는 일년생 풀인 마보다는 재료 공급 면에서도 뛰어나다. 한지의 원료로는 보통 3년이 지난 줄기를 사용하는데, 옮겨 심은 후 5~7년 지난 줄기에서 가장 많은 섬유를 얻을 수 있다.




[사진설명] 한지로 만든 부채.


◆ 천년의 비밀

한지가 천 년을 견뎌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립중앙과학관 과학기술사연구실> 정동찬 실장의 「전통 과학 기술 조사 연구」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닥나무를 잿물에 넣어 삶아낸 섬유나 그 섬유소(C5H10O5)의 굵기가 균일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내산 한지의 경우 중국 닥을 사용하여 만든 한지나 중국 수입 화선지, 일본 화지에 비하여 섬유의 폭이 매우 작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한지의 경우 다른 나라의 종이와는 달리 섬유의 조직 방향이 서로 90도로 교차하고 있는데 이러한 이유로 전통 한지는 매우 질긴 성질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종이에 방향성이 존재하는 경우 종이가 잘 찢어지는 방향은 섬유의 방향과 같으므로 종이의 강도는 방향성이 없을 때보다 떨어지기 때문이다.

둘째는 독특한 불순물 제거 방법이다. 제지 과정에 불순물의 제거는 질 좋은 종이의 생산에 필수적인 과정이다. 제지 원료에 들어있는 전분, 단백질, 지방, 탄닌 같은 불순물을 충분히 제거하지 않으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종이가 변색되거나 품질이 저하되기 때문이다. 한지는 화학 펄프에서 사용하는 산성 화학 약품을 쓰지 않기 때문에 중성지의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알칼리성에 비교적 강한 섬유의 특성을 충분히 살려 알칼리성 용재인 나뭇재나 석회를 불순물 제거제로 사용했다. 그래서 한지는 산성을 띤 펄프지처럼 화학 반응을 쉽게 하지 않는 중성지의 성질을 갖고 있다.

신문지나 오래된 교과서가 누렇게 변색되는 이유는 사용된 펄프지에 약간의 불순물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 불순물 중에는 화학식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C18H24O115과 C40H45O18로 추정되는 고분자물질 리그닌(lignin)이란 성분이 있는데 셀룰로우스가 화학적으로 안정한 반면 리그닌은 불안정하기 때문에 대기 중 산소나 수분, 자외선과 쉽게 반응해 퀴논(quinone)과 같은 물질로 변하면서 색도 노랗게 바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불순물을 가진 종이를 산성지(ph4-5.5)라고 부르는데 변색을 막으려면 책이 자외선이나 수분에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한지의 지질을 향상시킨 셋째 요인은 식물성 풀에서 찾을 수 있다. 한지는 섬유질을 균등하게 분산시키기 위해서 황촉규(닥풀)이라는 독특한 식물성 풀을 사용했다. 황촉규는 아욱과에 속하는 1년생 초본식물로 뿌리에 점액이 많아 종이를 만들 때 지통에 섬유가 빨리 가라앉지 않고, 물 속에 고루 퍼지게 하여 종이를 뜰 때 섬유의 접착이 잘 되도록 한다. 그래서 닥풀은 종이의 가도를 증가시키며 얇은 종이를 만드는데 유리하고 순간적인 산화가 빨라 겹친 젖은 종이가 떨어지기 쉽게 하므로 낱장으로 종이를 말리는 데도 안성맞춤이었다.

한지는 닥풀의 뿌리에서 추출된 점액을 사용함으로써 섬유의 배열이 양호해졌고, 강도가 증가했으며 광택도 좋아졌다. 또 닥풀의 사용은 종이를 얇게 뜰 수도 있게 하였고 습지의 분지를 용이하게 해주었다.

세종 15년에 편찬된 『향약집성방』 85권에, 종이 뜰 때 점제로 사용하는 닥풀에 관한 언급이 나오고 있어, 1433년 이전에 이미 닥풀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대개 펄프만을 사용해 만든 종이는 흡수성이 좋아 필기나 인쇄 시 잉크가 번진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종이를 만들 때 펄프에 내수성이 있는 콜로이드 물질을 혼합해 섬유의 표면이나 섬유 사이의 틈을 메우게 되는데(사이징) 닥풀이 이러한 작용을 한다.

넷째는 표백 방법이다. 순백색의 우량 종이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잡색을 띤 비섬유 물질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을 표백이라고 하며 전통 한지는 천연 표백제를 사용했다. 냇물 표백법이 그 대표적인 방법으로 옛날부터 한지를 생산하는 곳에는 맑은 물이 항상 필요했다. 천연 표백법은 섬유를 손상시키지 않고 섬유 특유의 광택을 유지하면서 그 강도를 충분히 발휘시킬 수 있게 만들어준다.

주로 표백 단계에서 제거되는 성분은 냉수, 온수, 알코올-벤젠 및 당류와 분자량이 적은 탄수화물 등이다. 이중에서 당류 성분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당류가 많으면 종이가 햇빛에 노출되었을 때 변색되기 쉽고 완성된 종이의 강도가 약하며 벌레가 생기기 쉬워 종이의 수명이 짧아지기 때문에 가능한 한 당의 함량을 낮추는 것이 좋다. 전통 한지의 수명이 오래 가는 이유는 2차에 걸친 표백으로 닥나무에 존재하는 당류가 거의 빠져 나오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한지의 질을 더 높여주는 조상들의 비법은 또 있다. 한지 제조의 마무리 공정인 도침(搗砧)이 그것이다. 도침은 종이 표면이 치밀해지고 평활도를 향상시키며 광택을 내기 위해 풀칠한 종이를 여러 장씩 겹쳐놓고 디딜방아 모양의 도침기로 골고루 내리치는 공정을 말한다. 이는 무명옷에 쌀풀을 먹여 다듬이질하는 것과 동일한 원리이다. 이 도침 기술은 우리 조상들이 세계 최초로 고안한 종이의 표면 가공 기술이다.

이와 같은 여러 공정을 거쳐 한지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종이로 빛을 발한다. 한지의 강한 특성은 한지를 몇 겹으로 바른 갑옷의 예에서도 볼 수 있다. 옻칠을 입힌 몇 겹의 한지로 만든 갑옷은 화살도 뚫지 못한다고 한다.

한지가 이렇게 강한 이유 역시 닥나무 껍질의 인피 섬유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화학 펄프로 사용하는 전나무, 소나무, 솔송나무 같은 침엽수의 섬유 길이(3밀리미터)나 너도밤나무, 자작나무, 유카리 같은 활엽수의 섬유 길이(1밀리미터)보다 훨씬 긴 섬유 길이(10밀리미터 내외)를 닥나무의 인피 섬유는 갖고 있다.

구한말 러시아 대장성의 조사 보고서인 『한국지』에는 조선 종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종이는 섬유를 빼어 만들므로 지질이 서양 종이처럼 유약하지 않고 어찌나 질긴지 노끈을 만들어 쓸 수도 있다. 종이에 결이 있어 그 결을 찾아 찢기 전에는 베처럼 베어지지를 않는다.'

숙종 9년에 '근래 한량들이 종이 신 신는 것을 멋으로 알아 이를 만들어 파는 자가 많아지자 사대부 집에서 서책(書冊) 도둑질이 심하니 이를 단속해야 한다'는 상소까지 있다. 조선 종이로 노끈을 꼬아 만드는 종이 신뿐만 아니라 종이 등잔, 물을 담는 종이 물통, 종이 대야, 종이 요강까지 있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종이로 만들 수 없는 세간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 단열 효과의 백미 창호지

[사진설명] 창호지문(사진 오뚜기).


한지의 우수성은 창문용으로 사용되는 창호지의 열적 성능에서도 잘 나타난다. 필자는 한옥에서 사용되는 창호지와 현대 기술의 산물인 창유리와의 열적 성능을 비교하기 위하여 <표 1>과 같이 시료를 제작하였다.

이것은 현재 주택에서 주로 사용되는 방법을 채택한 것으로 시료 1은 2중 창문, 시료 2는 외측이 유리창이고 내측은 창호지 문을 설치한 경우이다. 시료 3은 외측은 2중 유리창문(페어 그라스)에 창호지 문을 내측에 설치한 경우이고 시료 4는 외측은 단 창에다 내측은 2중 창호지 문을 설치한 것이다.

이들의 상관 관계를 비교하기 위한 단위로서는 K값(열 관류량, Kcal/m2.hr.°C)을 사용하였다. 측정값을 비교 분석하면 유리창만을 사용한 2중 창(시료 1)의 K값이 5.31이었으나 같은 조건 하에 유리창 한 장과 한지(창호지)를 복합해서 2중 창으로 만든 시료 2의 경우 K값은 4.87로 9%의 열적 상승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유리창으로 된 2중 창에 창호지 문을 내부에 설치한 시료 3의 K값은 2.86으로 시료 1번보다 1.8배의 열적 효과가 있었으며 유리 단 창에 창호지만으로 된 2중 창을 더한 4번 시료의 경우 K값은 2.61로 1번 시료보다 무려 2배 이상의 열적 효과를 얻었다.

이 실험 결과는 에너지 파동 이래 많은 건물에서 사용되고 있는 값비싼 2중 창문(페어 그라스)보다 단순하게 한지(창호지)를 사용한 2중 창호지 문의 열적 효과가 높다는 것을 뜻한다.
창호지는 한지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분야 중 하나이다. 창호지의 가장 큰 장점은 현대 문명 기술이 만들어낸 어떤 종류의 창문 재료보다 실용성이 높다는 점이다. 창호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구멍이 있어 방문에 발라두면 환기는 물론, 방안의 온도와 습도까지 자연적으로 조절된다. 온돌에 장판을 발라서 생활했던 우리의 주생활은 방안에 습기가 많은 것이 문제점이었으나 이 습기를 창호지를 통하여 자연적으로 배출되도록 유도하여 쾌적한 생활 공간이 되도록 했다.




[사진설명] <표> 실험시료의 구성.


창호지는 바람과 빛을 통과시키고 습도를 조절하는 3가지 특성을 갖고 있다. 습기가 많으면 그것을 빨아들여 공기를 건조하게 하고, 공기가 건조하면 습기를 내뿜어 알맞은 습도를 유지하게 하는 신축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창호지를 흔히 '살아 있는 종이'라고 하기도 한다. 창호지가 자연 현상에 이처럼 순응하는 성질은 모두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신라시대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한지 기술이 탁월했다는 것은 문화재청이 2000년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영인본과 해제본을 전통 한지 기법으로 만들었으나 결과는 신라 종이의 정교함을 따를 수 없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한지를 직접 만들었던 기술자도 제품이 마음에 안 들어 물에 여러 번 풀며 도침도 7번이나 했음에도 보푸라기가 유난히 많이 일어났다고 실토했다. 닥풀이나 닥나무 등 당시의 재료가 현재와 다른 면도 있겠지만 신라시대의 종이를 만들지 못한 것은 또 다른 면에서 선조들의 기술이 탁월했음을 보여준다.

외국에서는 우리 한지를 최고의 종이로 인정하고 있는 반면에 우리들은 오히려 질이 좋지 않은 종이라 천시하고 한지에 비하여 질이 떨어지는 외국의 펄프 종이가 좋다고 여기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일본의 화지는 우리 전통 한지에 비하여 거칠고 강도도 떨어진다는 사실과 외국의 값싼 닥나무를 수입하여 아무리 전통 한지 흉내를 내려고 해도 실패한다는 사실에서도 전통 한지의 우수성을 알 수 있다.

특히 시중에 나와 있는 창호지 품질은 그 생산 제조 과정에 따라 현저히 차이가 나는데, 일반적으로 수초지와 기계지로 나뉜다. 수초지는 전통 한지 제작법에 의해 만드는 것임에 반해 기계지는 목재 펄프를 사용하여 만들므로 가격이 싸며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목재 펄프를 많이 사용하면 창호지의 경우를 보더라도 색상이 희고 빳빳하며 엉킨 섬유가 없이 외관이 균일하여 고급품으로 착각되나 전통 한지 제작법으로 만든 창호지보다 강도가 낮고 내구력이 떨어진다. 외관만 보고서 질을 평가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한지의 특징이기도 하다.

참고적으로 과거에 많이 사용된 두루마리 종이의 이음부분 비밀은 2003년 경북 문경시 영순면 영순 초등학교의 6학년 장건일(12살)과 임병호(12살)군에 의해 밝혀졌다.

고려대장경(일명 팔만대장경)을 인쇄한 닥나무 종이 연결부위가 900년 동안 떨어지지 않고 있어 과학자들도 그 이유를 잘 몰랐는데 그 비밀은 발효 콩풀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밝힌 것이다. 발효 콩풀은 청국장을 만드는 것처럼 삶은 콩을 발효시켜 으깨 만든 풀이다.

종이를 이은 부분에 사용한 발효 콩풀은 색깔 냄새 촉감이 좋지 않고 물에 약하지만 온도변화에 매우 강하고 개미가 싫어하며 특히 발효 콩풀 속의 고초균은 항생물질을 만들어 곰팡이를 방지한다는 것도 알아냈다. 이들은 2003년 제49회 <전국과학전람회>에서 화학분야 학생부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종호(과학저술가)

 

 

http://blog.naver.com/himammo/90038809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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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11.09 14:55

    첫댓글 많은 정보에 감사드리며 아름다운 한지을 널리알려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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