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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밀양아리랑 -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 中에서
*대한민국헌법총강
제2조 :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말은 형식적인 헌법조문처럼 들리지만 더이상 빈말이 아니다. 민주의 가장 기본적인 정치현상은 양당정치가 실현되고 있고 선거에 의한 평화로운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 평소에는 국민들이 청와대에 누가 앉아있는지 별 관심이 없으며 기업인들도 이제 차떼기 상납에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며, 길거리에 지나가는 경찰을 보고 가슴을 덜컥 내려앉는 일은 없다.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있으며 보수언론도 할 말 안할말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또 그만큼 진보진영이라 하는 사람들도 과거에 비하면 놀랄만큼 할 말을 하고 산다. 학자의 논문에 비친 순수한 사상경향 때문에 감옥에 가는 일은 이제 없다.
그런데 나 도올이 60평생을 살아온 감각으로 말하자면, 이런 이야기들은 꿈에서 조차 불가능하게 보였던 유토피아의 모습들이다. 지나가는 경찰만 봐도 순사라 하여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고, 부모님은 어린아이라도 정치와 관련된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그런말은 입밖에 내서는 아니 된다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의를 주고 또 주었다. 영국은 의회 민주주의를 만드느라고 800년을 고생했는데 우리는 해방후 60년만에 의회민주주의가 지니는 모든 장점을 거의 주체적으로 수용했다.
중국도 일본도 우리 한국의 정치의식에는 미치지 못한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맨하탄에 살고 있는 미국인들 보다도 더 폭넓은 삶의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고, 나는 확언한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피눈물나는 우리 독립운동사와 무관하지 않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 했다. 이승만정권을 무너뜨린 4월의 혁명으로부터 최근 민주혁명에 이르기까지 피끓는 젊은학생들이 집요하게 한 사회의 대변혁을 주도해 나간 역사는 세계사에서 그 유래를 찿아 볼 수가 없다.
젊은 대학생들의 희생이 한 역사의 변혁의 주동세력이 된 그러한 역량의 원천을 우리는 우리의 젊은 독립운동사에서 찿지 않으면 안됀다. 20세기 조선의 역사는 젊은가슴의 항거의 역사였다. 70~80년대의 민주화운동을 한번 생각해 보자. 담배를 태우고 카페에 앉아 고준담론을 일삼거나, 아주 레디컬한 시를 읊거나, 고상하게 합리적인 사회변화의 정론을 펴거나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겠지만, 결국 역사의 변혁을 가져온 주체세력은 길거리에서 경찰의 곤봉에 피흘리며 쓰러져간 수많은 젊은이들 이였다고 말 할 수 밖에 없다. 의식화라는 말은 대학생을 가진 부모들에게는 공포의 언어였지만, 나중에는 그 부모들조차 당신의 자녀들의 행동에 정당성을 인정하고 길거리로 나섰다. 혁명의 나무는 피를먹고 자란다. 일제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이론적으로 논거한 사람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시대사의 변혁을 가져온 주체세력은 일제와 직접투쟁하면서 피흘린 수많은 지사들 그 무장투쟁론의 실천가들이었다고 확언할 수 있다. 구한말 의병, 안중근의 총탄으로부터 시작된 우리독립운동사의 주류는 무력항쟁의 역사였을 뿐이다. 무력항쟁은 역사에 대한 관념성을 거부한다. 오로지 실천만을 강조하며 '나'존재에 대한 모든 아집을 벗어버려야 한다. 대의를 위하여 소아를 희생하는 대아적인 인간이 아니면 진정한 무력항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20세기 우리독립운동사에서 무력항쟁의 위대한 기수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가장 조직적으로 가장 지구력있게 가장 열렬하게 그리고 타협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한 한 사람을 들라고 한다면 나 도올은 서슴치 않고 저 밀양사람 약산 김원봉장군을 들겠다.
그의 족적은 독립운동사를 통해 통틀어 너무 폭넓은 행보였다. *최필수 (밀양고교 역사교사)
최필수 : 제가 국사를 가르치고 있는데 수업중에 독립운동부분을 가르치다가 내가 존경하는 독립투사가 계신데 그분이 약산 김원봉선생이라고 하니까...갑자기 한 여학생이 엎드려 우는 거에요. 왜 우느냐고 물어봤더니. '자기는 중학교때 그...김원봉 장군에 대해서 선생님한테 이분을 아시냐고' 선생님한테 여쭤봤더니...그 선생님께서 '아! 그 빨갱이!' 하면서 김원봉선생에 대해서 안좋게 얘기를 하시더래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한번도 김원봉 장군에 대해서 말을 못하고 지내왔는데, 오늘 수업시간에 갑자기 그 얘기를 듣게 되서 울게 됐다니까. '왜 그러냐?' 고 묻게 되었더니, 김원봉 선생의...장군의 막내 여동생이 바로 자기 친 할머니(姑)라고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김용옥 : 아 김학봉 여사! 최필수 : 예, '학봉여사님의 친 손녀' 그렇게 알게 되서, 아! 이래선 안돼겠다. 우리 역사선생님들 마저도 김원봉선생에 대해서 너무 왜곡되게 알고 있는것이 아닌가 싶어서, 이걸 좀 알려야 되겠다 싶어서 제가 교지에...우리 밀양여고 교지에 김원봉장군의...선생에 대한 글을 썻습니다.
최필수 : 그래서 밀양지역에 사람들이 김원봉선생에 대해서 좀 알게된 계기가 됐습니다. 김용옥 : 아~~
<밀양 부북면 제대리 송악마을 공동묘지> 약산 김원봉은 1948년 8월 자진 월북했다.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의 고문으로 사흘 밤낮을 통곡하다 북으로 갔음) 김구의 남북협상 제의에도 불구하고 남한 단독으로 제헌국회가 성립하고,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직후였다. 그래서 그는 밀양의 어느 역사선생의 의식에서조차 '빨갱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혁명가는 빨간곳에서도 하얀곳에서도 설 자리가 없다. 약산은 북한에서도 결국 장개석의 스파이로 몰려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비운의 최후였다. 그래서 약산의 무덤은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그의 고향 밀양에는 그의 부인 박차정여사 묘소만 쓸쓸히 남아있다.
*손정태 (밀양사학자)
손정태 : 약산 김원봉 장군의 처 박차정여사의 묩니다. 최필수 : ... 손정태 : 근데 이분을 흠모하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갖다 놨습니다. 그나마도 이 묘가 황폐되있지만은...표석이라도 하나 세운것은, 그...당신의 모교 지금은 동래여곱니다. 동래여고 후배들이 세운 겁니다.
최필수 : 부산에서 태어나셔서 그 동래여고 전신은 일신여학교를 졸업하시고 국내에서 1927년 죄우합작으로 만들어진 여성단체로 건우회에서 활동을 하시다가... 김용옥 : 아! 신간회하고 쌍벽을 이루던...여성단체죠? 최필수 : 네...그곳에서 활동하시다가 서울에 뭐 신병치료차 가신다고 말씀하셔놓고 그 길로 상해를 통해서 중국으로 망명을 하셨습니다. 김용옥 : 어...어디로 해서요? 상해로 ? 최필수 : 상해를 통해서 남경으로.
박차정 (朴次貞 1909 ~ 1944) 부산. 동래여고 졸업 여성독립운동단체 근우회 선전부장. 조선여자의용대를 조직
김용옥 : 그러면 약산하고 이 양반은 여기서 안게 아니고 중국에서 만난 거에요? 손정태 : 그렇습니다. 그저...원래 박차정여사의 오빠되시는 박문희(의열단)씨가 약산장군하고 친구지간 입니다. 김용옥 : 아~ 의열단원이에요?
손정태 : 그렇습니다. 의열단원이고 친구지간인데 약산이 거...조선청년혁명간부학교를 할 때 박문희씨는 국내의 인재 모집책이였죠. 그러니까 친구지간에 자연히 동생이...돼서 그래서 결혼하게 된 겁니다.
김용옥 : 그러니까 중국에서 투사로 만나서 어...당당하게 아주 투사대 투사로 만나서 결혼한 겁니까? 손정태 : 당연합니다. 그...간부학교를 할 때는 누나처럼 그런 역활을 하셨고. 약산이 그 조선의용대를 만들었을때는 이분은 전시부녀복무단을 만드셔가지고 직접 그...단장을 맡으시고 전투에도 참여 하십니다. 전투에 참여 하시고...
김용옥 : 근데 이 양반이 어떻게 돌아가셨어요? 손정태 : 인제 30년대말에 그...조선의용대가 곤륭관전투(1939.2)에 그 국민당 정부군하고 참여할 기회가 있었을 때 어깨에다 총을 맞았던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런 후유증에다가 신경통이라고 하는 그...신병이 있어가지고 생활을 오래 한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1944년 5월 27일날 돌아가셨어요.
김용옥 : 그러면, 약산 김원봉선생이 돌아가신 당신에 그 부인에 유골을 들고, 여기 밀양에 해방후인 46년에 오셨을 때, 그 유골을 모시고 와가지고 여기다 본인이 와서 직접 무덤을 묻으신 거구나...이야~! 아! 눈물겨운 얘기네 이거...
김용옥 : 그럼 약산 김원봉...을 그야말로 있게한 배후에 어떤 그...든든한 지지세력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손정태 : 옳습니다. 우리 약산장군에 대해서 독립정신, 애민정신을 키워준 분이 두분 계시는데, 한분은 밀양의 선각자로서 교육사업에 종사 하시던 을강 전홍표 선생이 계시고, 또 한분이 바로 이 백민 황상규 선생 입니다.
김용옥 : 전홍표 선생님 밑에서 그...약산선생하고 그...석정 윤세주 그런 분들이 직접 배우셨단 말이죠. 손정태 : 예 동화학교를 다녔습니다. 그쪽에서는 약산, 석정 그리고 밀양경찰서 폭탄사건을 일으켰던 최수동열사도 그쪽에서 문하에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또 같은 의열단원인 김상윤선생도 역시 을강선생의 문하에서 배웠습니다. 아...그...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백민선생께서 그...창녕군의 인근에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소작료를 걷어들인 1년치 소작료를 그...관리인을 회유해 가지고 그 1년치를 몽땅 빼 가지고, 상해임시정부에 헌납한 사실이 아주...그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김용옥 : 그니깐 결국은...그 밀양에서 이룩한 그...게...그 암울한 시기에 이렇게 열렬한 그리고 아주 정신이 투철한 분들이 배출되게 되는 배경에는 그야말로 아까 말했듯이 그 점필재 김종직의 그 사림의 맥이 쭉~ 이어내려 오는 데다가...또 임란때 사명대사 같은 분들이 여기서 또 출생하신 분이라고...그렇게해서 결국은 이 백민 황상규선생과 을강 전홍표선생 그 두분의 에...지도하에서...그 밀양의 청년들이 깨이게 되고 그리고 그 깨인 방향이 어설픈 방향이 아니라 확고한 무장투쟁을 통해서 우리가 독립을 쟁취하는것 밖엔 없다. 적당한 타협은 있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약산 김원봉하면 테러리스트로 알고 있다. 약산을 테러리스트라고 말한다면 물론 김구도 테러리스트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말해서는 아니된다. 이들은 일본의 날강도짓에 대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효율적인 전쟁수행의 방편으로 테러라는 방법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한 무차별적인 공격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테러리즘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의열투쟁이라는 말을 쓴다. 그리고 이 의열투쟁에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을 '의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친일외교관 스티븐슨을 저격 살해한 장인환, 전명운 (1884 ~ 1947), 이완용을 저격한 이재명 그리고 이등박문을 쏜 안중근, 이 모든 의사들의 개별적 활약이 있었지만 이러한 의열투쟁을 조직적인 투쟁으로 만든 사람은 바로 김원봉이였다.
*이재명의사 (1890 ~ 1910) 평북선천사람 15세에 미국이민, 이완용 암살실천, 교수형으로 순국
후일 김구의 의열투쟁도 김원봉의 의열단 활약상에서 자극받은 것이다.
"극 비밀문서인데...한국당파가 어떻게 되있냐?" "그래서 국민당 외교부 정보사연구실에서 1944년 4월에 내놓고 있는 문섭니다. 그러면 여기 분석해논 것들이, 한국독립당, 당의 연혁이라든가 당의 구성분자 에... 이런 것들을 쭉 해놓고, 제2장에는 그러니깐 앞에꺼 김구중심이고 이게 김원봉중심의 '조선민족혁명당' 딱 나오고 있죠. 그럼 여기 쭉~~ 당의 연혁이라든가, 구성체에...." -중략-
김원봉과 김구는 오랜 세월의 라이벌이였다. 물론 김구는 김원봉보다 한세대가 위다. 22살이나 차이진다. 김구를 19세기형 인간이라고 말한다면, 김원봉은 20세기형 인간이였다. 김구는 김원봉을 아들처럼 바라봤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무게는 장개석정권에 있어서 막상막하였다. 그리고 김원봉은 항상 김구를 앞질러 갔다.
소수의 의열투쟁도 앞섰고 정규군 무력투쟁도 앞서갔다. 광복군의 창설도 조선의용대의 창설과 활약상에 자극받은 것이다. 이러한 나의 기술을 괘씸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찌 김구와 약산을 어깨를 나란히 해서 말할 수 있을까 보냐' 라고... 그러나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는 너무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 중심으로 기술되어있다. 그리고 김구의 위치가 너무 부풀려 있다. 김구의 위대성을 조금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김구라는 한 스타 때문에 타인의 위대성을 폄하해서는 않됀다. 장개석은 김구와 약산을 같은 무게로 취급했다. 그것은 내가 국민당자료로서 확인한 것이다.
약산은 황포군관학교를 다녔고 그 시절부터 장개석과의 연줄을 확보했다. 약산은 폭넓은 신.구의 교양을 구비한 뛰어난 인텔리였다. 한학의 소양이 깊고, 중국어를 탁월하게 잘했다. 그리고 문장력이 있었다.
김구는 우직한 사람이였고, 약산은 날카로운 사람이였다. 김구는 덕의가 있었고, 약산은 이지적이였다.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은 자기생애에서 만난 가장 존경스러운 인물로서 약산을 꼽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썻다.
약산은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홀로 행동했다. 거의 말이 없고, 웃는법이 없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에 열중하였다. 똘스또이의 글은 모조리 읽었다. 그는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가씨들은 그를 멀리서 동경하였다. 그는 빼어난 미남이였고, 로맨틱한 용모를 가졌기 때문이다. 친구들에게는 지극히 젊잖고 친절했지만, 또 매우 가혹할 때도 있었다. 혈관속에 뜨거운 피가 흐르지 않는 사람은 의혈 투쟁을 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희생의 순간에 자기를 잊어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천진의 덕화학단으로 입학하였다가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으로 입학한다. 그리고 다시 서간도로 올라가 이회영, 이상용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동지들을 규합한다. 약산은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정규군을 길러 일본군과 투쟁하는것은 궁극적으로 불가능 할 뿐만 아니라, 비효율적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학교교육을 바꿔 앉아있을 것이 아니라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시급하게 급격하고도 직접적인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주변의 학생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목숨을 아끼지 않는 열혈지사를 규합하여 적의 군주이하 고관과 적의 기관등에 폭탄을 던져 싸우자는 방안을 제시했다. 8명의 학우들과 함께 길림으로 튀었다. 지금 바로 약산이 의열단을 결성한 길림이다.
후일 약산은 북경에 가서 단재 신채호를 만났다. 단재는 약산보다 18살이 위다. 약산은 단재가 투철한 민족의식을 지닌 역사학자로서는 알고 있었지만 역시 구시대에 속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는 김원봉 입니다.' '반갑소, 동지의 활약상은 익히들어 알고 있소. 참 장한 일이요.' 만나는 순간 약산은 단재야 말로 이 세상에 어느 사람보다도 젊은 피가 끓는 열렬하고도 급진적이며 과감한 인간이라는 것을 감지한다. 그리고 단재를 의열단의 고문으로 모신다. 후일 성균관대학을 설립한 심산 김창숙도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의 고문이였다. 이러한 석학들이 약산을 지원했다. 단재는 곧바로 의열단을 위하여 6천4백여자에 이르는 '조선혁명 선언'을 집필한다.' 나 도올은 확언한다. 내 평생 고금의 많은 문장을 접했으되, 이 단재의 조선혁명선언만큼 나의 젊은 피를 끓게 만드는 정의로운 글이 없었다. 만고의 명문장이다.
"여기가 길림성의 광화로 라는 길인데... 우리독립운동사에서 획기적인 분수령을 기록하는 의열단이 결성된 곳 입니다. 의열단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바 대로, 밀양의 열렬한 청년들이 모여서 만든것인데 그것을 주도한 인물은 약산 김원봉이죠. 약산 김원봉은 그 3.1운동을 경험하면서 평화로운 시위로서는 도저히 조선에 독립은 이룩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 낭비다. 오로지 우리가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는 유일한 길은, 무장투쟁밖에 없다고 하는 그 자각 그것은 자기들만의 자각이 아니라 이 자각을 민중화 시켜야 된다고 하는 그러한 열렬한 의지를 가지고 결성한 것입니다."
*사진 김원봉 (의열단사건 공판기사 1923년 4월 12일 동아일보 호외)
"이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 결성이야 말로, 향후 모든 우리나라 무장독립투쟁의 모범이 되었고 그것이 바로 원류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깐은 결국 따지고 보면 후대의 광복군결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20세기의 무장투쟁론이 이 의열단으로부터 시작됨을 우리가 명백히 알아두지 않으면 안돼겠습니다."
"약산 김원봉은 1923년 단재 신채호선생에게 그...의열단 조선혁명선언 이라는 것을 에...집필하도록 부탁합니다. 바로 이 조선혁명선언이야말로 제가 생각하기에 20세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명료한 논질을 가진 최상의 명문이 아닐까?
저는 아주 소신껏 우리 국민에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거기 보면은 처음에 그...단재 신채호 선생에 정말 그...아주 뼈져린 가슴아픈 그것은 그...하나의 문장이라기 보다는 정말 피로 쓴 그러한 대문호의 글인데, 여기 에...거기에 보면은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하며' 하고 인제 시작이 되는데...
'쇠사슬 채우기, 단금질, 전깃줄 바늘로 손톱밑과 발톱밑을 쑤시는, 코구멍에 물붓는, 생식기에 심지박는 모든악형...곧 야만 전제국의 형률사전에도 없는 갖은 악형을 다 당하고 죽거나, 요행히 살아서 나온데야 종신불구의 폐질자가 될 뿐이다.' 그 일본의 만행을 소개한 후에, 결국 이 양반이 하는 말이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의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강도 일본을 살벌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일본강도정치하에서 문화운동을 부르짖는자가 과연 누구냐!' 이렇게 호통을 치시면서 강도일본을 구축을 주장하는 가운데도 또 다음과같은 논지들이 있다. '그것이 첫째는 외교론(이승만)이요, 둘째는 준비론(최남선)이다. 우리가 준비해야 되는데? 무슨 얼어빠질 준비냐? 이러면서 이상의 의에 의하여 우리는 외교 준비등의 미봉을 버리고 민중직접혁명의 수단을 취함을 선언하노라. 그 혁명의 제 일보는 민중각오의 요구라! 그럼 민중은 어떻게 각오해야 돼느냐? 민중보고 각오해라, 각오해라, 도산 안창호가 아무리 외쳐봐야 그건 헛소리다' 이거에요. '그것은 민중이 스스로 각오해서 민중스스로 협력을 해야 한다.' 하고 말씀하시고 제일 제가슴에 와서 닿는 말씀이 그 유명한 말이! *혁명의 길은 파괴로부터 개척할 지니라! 뭐를 파괴하느냐 1. 이족통치를 파괴 2. 특권계급을 파괴 3. 경제약탈제도를파괴 4. 사회적 불평균을 파괴 5.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 에...그렇게 해서 모든 일제를 파괴 시켜야 한다. 그러면서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혁명의 무기다. 강도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 지니라!
"이것이 그 유명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혁명선언'의 요지 올시다. 우리민중이 다시한번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폭력이 평화의 유일한 수단이였습니다.
푸른날이 쓸데없으니 칼아! 나는 너를 위해 우노라!
단재는 서슬이 퍼런 칼날같이 살았다. (1880 ~ 1936) 충남 대덕군 산내면 출생 청원에서 성장. 민족사학의 대두
그리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임정요원들을 모두 쓰레기같은 놈들이라고 비판했다. 결국 그는 아나키스트 국제활동을 하다가 대만에서 잡혔다. 그리고 10년형을 받고 안중근이 수감되었던 여순감옥에서 8년을 살다가 보석도 거부하고 죽었다. 1936년 2월 21일 이였다. 감옥에 있을때 '조선일보'에서 그의 명저 조선사를 연제하자 그것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당시 신문이 쇼와연호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쇼와연호는 곧 일본역사를 인정하는 것이다. 정말 일천의 타협을 모르는 칼날같은 인생이였다. 단재의 이러한 삶은 약산에게 두고두고 영향을 주었다.
약산 김원봉은 정통적인 공산주의자인 이동휘나 아나키스트인 단재나 우당과도 좀 생각이 달랐다. 그는 어디까지나 현실주의자였다. '현실속에서 어떻게 가능한 투쟁을 하느냐?' 하는것이 항상 그의 문제의식이였다. 이념에 대한 일관된 헌신보다는 항상 현실적 투쟁을 먼저 생각했다. 현실적투쟁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여러 단체들의 통합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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