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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롱베이, 하노이 기행
2011.5.4일 10.30분 베트남항공으로 김해공항에서 하노이로 출발하다.
『베트남 면적은 330,991㎢로 한반도의 1.5배이며 인도차이나 반도에 위치하고, S자형으로 총길이1,600㎞, 해안선은 무려 3,260㎞달하고 인구는 약8,000만명,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80%정도이며 북쪽은 고온다습한 아열대성기후이고 남쪽은 열대성기후다. 우리나라와는 1992.12.22.일 수교가 이루어 졌다.』
베트남시간은 한국과 정확히 2시간의 시차가 있어 8:30분이다. 이후로는 베트남시간으로 이야기 하고자 한다(한국은 경도 135도 베트남은 105도 베트남의 표준시차가 2시간 늦다).
5.4일 15:00 하노이공항의 첫 인상은 공산주의(사회주의)국가라서 그런지 웃음기라곤 전혀 없는 출입국 관리직원의 녹색군복과 계급장에서 무표정하고 딱딱함이 이 나라에 대한 선입감을 무겁게 느껴지게 한다. 5월은 우기로 접어드는 시기이기 때문에 후덥지근하게 더운데 전력난 때문인지 공항로비는 승객들을 배려한 앉을 자리는 많지 않고 에어컨도 신통치 않아 사람을 쉽게 지치게 한다.
우리 가이드는 오00(40세)인데 부산 00동에 부모가 살고 있고, 태국지사 근무당시 차마고도 가이드 중 추락사고로 중상 입원 중에 지금의 베트남부인(28세)의 지극한 간호로 감동받아 결혼했고 베트남에서 외국인이 정착하기는 상당히 불편하다고 한다. 매일 일거수일투족이 공안에 보고된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났는지? 베란다에서 담배피우는 일상의 모습까지 보고된 것을 알고 아주 실망했다고 한다. 장인은 공안간부인데 집이 7채나 있는 갑부라고 하면서 묘한 표정을 짓는다.
하노이 공항에서 하롱베이까지는 130킬로미터인데 소요시간은 3-4시간 걸린다. 하노이시내도로는 오토바이, 자전거, 승용차, 사람, 인력거가 뒤섞여 제멋대로 움직인다. 중형이상 승용차는 대부분 도요다며, 트럭과 승용차 중형일부와 소형은 한국차가 많다. 버스는 대부분 현대차 중고인데 oo교회, ** 유치원 등 한국상호를 지우지 않는다. 중국현대가 아닌 오리지날 한국현대차라는 표시고, 더 비싸다. 웃기는 일은 한글을 모르다보니 상표를 거꾸로 새긴 차도 간혹 있다고 한다.
목이 막힐 정도의 매연으로 마스크 차용자가 많으며, 귀가 멍멍할 정도로 시끄러운 엔지소음, 경적소리로 혼돈스럽다.
오토바이는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재산목록 1호다. 세워놓은 오토바이를 건들이면 비상 소리가 요란하다. 오토바이가 많은 이유는 프랑스가 만든 좁은 도로, 자전거, 오토바이가 다니기 편한 평탄지형, 차를 살수 없는 경제적 한계, 낮은 보행자권리, 불편한 대중교통수단 등 때문이다. 베트남의 도시는 하천이 많은 평야지대에 위치하므로 지반이 연약하고 방수가 어려워 지하철을 만들어도 공사비가 많이 들어가므로 채산성이 없다고 한다.
오토바이가 2,500만대(60%) 차 370만대 (40%:등록된 것은 150만대: 세금 때문에 미등록이 많다고 함)인데 교통량의 80%를 오토바이가 장악하고 있다.(베트남여행에서 오토바이를 빼고 이야기 하는 것은 눈알을 그리고 점을 찍지 않는 것과 같다)
베트남은 교통사고 세계 제1위다. 도중에 사고 현장을 목격했는데 피가 질펀하다. 공안에게 신고하면 뒷돈을 주어야 하고, 판정이 객관적이지 못하므로, 쌍방이 자체적으로 해결한다고 한다. 공안이 돈을 받는 장면이 적발되었는데 TV에 공안 고위간부가 나와서 공안은 급여도 적은데 돈을 받은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반문하고 아무 일 없이 해결되었단다.
베트남 국경도시 랑선에서 하노이까지 2차선 고속도로로 시속60-80㎞로 달릴수 있다. 아시아 개발은행(ADB) 9억달러 한국 2억달러 등 재정지원을 받아 건설된다.
베트남의 고속도로는 차량전용이 아니라 바퀴가 달린 것이면 아무것이나 올릴 수 있고, 사람, 소도 다닐 수 있다. 중간 중간에 일본이 무상 지원하여 건설한 도로구간(베트남기와 일장기가 표시되어 있음)이 많은 데, 말이 무상원조이지 일본차, 오토바이를 팔아먹기 위해 도로를 건설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
중간 중간 삼성,LG,현대, 기아, 금호타이어,오리온(초코파이는 유명함),롯데리아(지점 전국적으로 100개가 넘는다고 함) 등 한국진출기업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하노이에만 약 2,700개의 한국기업이 진출해 있다한다. 소형 마트에 가면 한국 과자류도 많이 있다.
베트남은 도로변 건물은 전면(약 4m)이 아주 좁게, 옆면(약 20m)이 아주 긴 구조로 건축하고 옆면은 도색하지 않고(옆집에서 붙여지음으로 칠할 이유가 없다) 창이 없는 형태가 대부분이다.
통일전쟁 후 국가유공자에게 국가에서 집을 지어 주었는데 그때 전면규모가 4m로 이규모 초과 건물에 대해서는 지을 수는 있지만 세금이 매우 비싼 이유로 전면을 아주 좁게 짓는 것이다. 맨 위층은 조상을 모시는 신당이나 불당으로 꾸며져 있다. (불교인구가 80-90%다. 약 90년을 프랑스가 지배했는데 생각보다 카톨릭이나 기독교도가 적다)
- 한 동이 아닌닌 3동-4동의 건물이다.
08:30분 하롱베이에 도착하여 한국 교민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미나리, 상추와 소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고 단체 마사지를 받았다. 사회주의 국가 탓인지 매사 사무적이고 서비스정신은 거의 없다. 팁으로 3불을 지급했는데 마사지 만족도는 별로다.
21:00분 경 그랜드하롱베이 4성 호텔에 짐을 풀고 호텔 앞 가설무대 연극을 보러 간다. TV로 볼 것이 많지 않아서인지 웃고 즐기는 모습이 우리나라 60-70년대를 연상하게 한다.
베트남의 화폐는 동전은 없고 지폐만 있는데 전부 비닐성분이라 구겨지지도, 물에 젖지도, 찢어지지도 않는다. 열대지방이고 비가 많이 와서 그런 모양이다. 전면은 반드시 호치민의 인물초상이 들어간다. 환율은 20,800동이 1달라다.
구경을 마치고 오는 길에 호텔 앞 노상주점에서 세계적인 맛으로 유명한 ‘하노이’맥주를 병당 1달라에 사서 마셨는데 좋은 느낌이다. 매춘녀를 실어 나르는 오토바이가 왔다 갔다 한다. 공안문제 상 잡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가게 주인집 딸이 고 3인데 하롱베이 ‘동방신기’동호회 회장으로 우리들 앞에서 이어폰을 꼽고 열심히 동방신기 안무연습을 하고 있다. 정작 나는 동방신기가 누구인지, 노래제목도 모르는데 이억만리 타국에서 한국의 위상을 보는 것 같아 가슴 뿌듯하다. 호텔 시설은 괜찮은 편이고 피곤함으로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제2일 5.5일 아침 베트남 국수를 중심으로 아침을 때우고 하롱베이(下龍灣)로 떠난다.
하롱베이는 1994.12.7.일 유네스코지정 독특하게 아름다운 경치의 진정한 인류 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유래는 4-5천년 전 중국이 하롱베이를 침입하여 하롱베이가 함락되었을 때 용(龍)이 하강하여 구해주었고 지금도 지켜주고 있다고 한다.
30여명이 타도 될 배를 우리일행 9명이 전세 낸 것처럼 편안하다.
하롱베이 지형은 석회암지대로 수천만년동안 침식당하여 기암괴석지대가 되었고 3,500여개의 섬이 있고, 한 달 내내 보아도 전부를 볼 수 없다.
많은 섬으로 인하여 파도가 막혀 호수처럼 잔잔하고 수심은 2-3미터로 얕고 물빛은 회색으로 탁하다.
일명 뽀뽀바위 보는 각도에 따라서 떨어져 보이기도하고 붙어 보이기도 한다. 귀여운 푸들 강아지 두 마리가 서로 사이좋게 영겁을 두고 정을 나누고 있다.
부산의 오륙도처럼 가까이서 보면 떨어져 있고 멀리서보면 붙어있다.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 非人間 : 도연명)의 수묵화속에 자연과 내가 합일된 무아지경을 느끼게 한다.
점심 식사는 해상 어패류 판매장에서 횟감, 조개류, 등 점심요기꺼리를 산다. 회는 열대지방이라 쫄깃쫄깃하지 않고 탄력이 떨어진다. 한국 해산물이 훨씬 맛있다. 관광 온 사람들의 80%는 한국 사람들이고 우리 돈을 지불하고, 한국말로 이야기하면 대충 다 알아 듣는다.
멀리 보이는 섬 위의 누각은 호치민과 스탈린이 베트남과 미국 전쟁 시에 만나 무기 지원을 약속받았고, 스탈린이 대가로 이 섬을 별장용으로 자기에게 달라고 간청했으나 호치민은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석회 동굴로 크기가 수백 명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다. 옛날 어부가 배가 고파 먹을 것이 있나 올라가보니 원숭이들이 도망가고 한 마리도 안보여 어디로 도망 쳤는지 찾아다니다가 동굴을 발견했다고 한다. 커다란 종유석들이 기기묘묘한 자태로 바로, 거꾸로 매달려 있다.
동굴의 형성은 수천만년전 전부터 현재까지 석회암 지질에 빗물이 스며들어 침삭되어 동굴을 형성하고, 빗물에 석회암 성분이 녹아 고드럼 처럼 천정에서 바닥으로 내려오는 것은 종유석이며, 바닥에서 천정으로 올라가는 것은 석순이다. 종유석과 석순이 서로 부딪혀 기둥을 형성하는 것은 석주다. 대체적으로 100년에 2.5cm정도 자란다고 한다.
석회수라 물색은 흐리고, 고기들은 살지 않으며 먼 바다에서 잡아오는 것이란다. 하나 같이 기암괴석으로 똑같아 보여 조금은 식상하고, 차라리 우리나라 한려수도나 홍도의 자연풍광이 더 아름답고, 더 맑고, 더 깨끗하고, 각각이 더 수려한 것 같다.
기념품으로 진주가 유명한데 선상에서 진주목걸이1개를 1만원에 선물로 샀다. 나중에 도착해서보니 한보따리에 1만원에 사란다.
하롱베이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 연간 관광객 수입만 하더라도 엄청나다.
야시장을 들렀는데 수십 개의 점포가 정돈은 잘되어 있으나 파는 물건이 똑같다. 분업화, 특색화 하면 훨씬 나을 것으로 생각된다. 살만한 물건을 없다.
주위에는 많은 분재가 있었는데 가격표는 최고 비싼 것이 우리나라 돈으로 1억5천만원이란다.(가격표에는 2,750,000,000동이라는 가격표가 붙어있다.)
5.6일 아침 다시 하노이로 가는 길이다. 2모작 직파 벼농사를 주로 하는데 들판, 상점에는 대부분 여성들이 일하고, 남성들은 카페(다방)나 그늘에 모여 잡담으로 세월을 보낸다.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고 묻자 가이드는 일확천금을 잡는 이야기 즉, 복권 당첨이야기 등으로 세월을 보낸다고 한다. 남성은 천국이고 여성은 지옥이다.
장례는 매장이고, 논 한 쪽 구석에 비석을 세우고 매장하며, 논이 팔리고 새 주인이 요청하면 파묘하여 지게에 지고 자신의 다른 농지로 이장한다고 한다.
- 어릴 때 우리나라 모내기하는 장면과 똑 같다. 농토는 비옥하여 1년 4모작이 가능하지만 국가에서 3모작을 장려한다고 함.
3-4모작을 할려면 얼마나 고될까?
머리에 쓴 모자는 ‘농라’로 베트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모자로 일반적으로 ‘농:Nohn’으로 불리며 더위는 참을 수 있어도 따가운 햇살을 참을 수 없다. 여성용은 끝이 뾰족하고, 남성용은 둥그렇다. 가이드가 하나씩 사줘서 여행내내 요긴하게 사용하다가 집에 가지고 와서 잘 보관하고 있다.
- 농라 모자를 쓰고 맨발로 농사짓는 베트남 여성의 억척스러운 생명력(우리나라도 60-70년대에는 이렇게 꼴을 베었었지?)
- 꼴 망태기에 낫을 쟁겨 꼽아 놓은 것도 어릴 때 우리와 아주 흡사하다.
하노이는 인구 약 600만 명인데 호수와 숲이 많다. 길은 낼 때 큰 나무가 있으면 나무를 베지 않고 둘러 길을 낸단.
일종의 택시격인 툭툭이(인력거)를 타고 20분 정도 시내구경을 했는데 차량에 부딪히거나 뒤집힐 위험이 있고, 까맣게 그을리고 뼈가 앙상한 중년사내의 힘든 운전에 내돈주고 타지만 미안함을 느낀다. 곧 툭툭이도 폐지될 것이라 한다.
베트남 국회와 공산당 본부건물 건너편 넓은 바딘(호치민)광장에 짙은 대리석으로 된 사각형의 웅장한 건물이 “독립” “통일”이라는 두 가지 과업을 이룩해낸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는 호치민(1890.5.19.-1969.9.3.)의 묘소다.
시신은 오전 8시 일반에게도 공개한다고 하는데 보지 못했고, 주기적으로 방부처리하기 위하여 모스코바로 떠났는지 모른다고 한다.
호치민은 죽으면 화장하여 베트남의 동서남북 끝자락에 뿌려달라고 유언했는데, 남은 사람들이 유언을 지키지 못하고 호치민의 이름을 정권안정차원에서 계속 이용하고 있는 것이란다.
-호치민 묘소: 방부처리되었음. 방부처리된지도자(레닌.모택동.김일성.김정일.호치민.....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호치민을 영웅으로 만든 것은 8할이 시대상황 이라한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인들은 베트남의 카톨릭교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858년 베트남을 침공하여 1884년 식민지 인도차이나를 건설했다. 호치민 21살 때 프랑스 기선의 주방보조로 취직하여 베트남을 떠나 프랑스로 가서 사회주의 운동에 몸담게 되었다. 1924.6월 모스크바 제5차 코민테른 대회에 프랑스공산당 대표로 참석한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군이 점령하게 되고 1945.8.15. 우리나라는 독립하였으나 베트남은 독립하지 못하고 1945.9.2. 베트남이 일본군을 강제 무장해제 시켰으며 따라서 이날을 독립기념일로 하고 있다. 독립선언서의 80%는 미국독립선언서와 형식과 내용이 같다고 한다. 이유는 미국을 잘 구슬러 독립에 대한 보장받고자하는 국익을 위해서 일 것이라고 했다.
일본이 패퇴하자 프랑스가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북위 17도를 경계로 북쪽은 프랑스가 남쪽은 미국이 지배하기로 밀약 한다.
미국이 프랑스에 전비를 대고 프랑스와 베트남은 8년 동안 전쟁(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돌입하는데 베트남이 함몰 직전인 1954.3.13일 여름 디엔비엔푸전투에서 기사회생으로 프랑스군을 격퇴하고 프랑스가 항복하면서 국제적인 체면을 생각하여 자진 철수하는 것으로 협약하고 프랑스는 물러난다.
미국은 그동안 투입한 전비에 대한 본전 생각으로 남쪽을 계속 지배하고자 하여 사이공(현재: 호치민)을 수도로 하는 월남을 지원하고, 하노이를 수도로 하는 월맹 간에 내전(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호치민으로서는 통일이 문제였는데 1964.8월 통킹만 사건(공산주의자가 미국상선을 불 지른 사건 : 전쟁구실을 삼기위한 미국 측의 조작이라고도 한다)으로 시작된 베트남 전쟁은 1975년까지 베트남을 온통 피로 물들인 현대사 최고의 비극이었다.
자유와 공산진영의 2분화되었던 냉전시대에서 인류 보편의 자유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공산주의의 남침을 막기 위하여, 또는 지지 지리도 못 살았던 현재의 북한처럼 비참했던 가난(1964년 참전당시 1인당 국민소득 103달러)을 타개하기 위하여 미국의 용병으로 참전(8년간 5,000여명이 전사 또는 실종)을 했던, 이유야 어찌되었던 그러나, 내전에서 월맹이 이김으로 해서 참전의 의미도 같이 퇴색된 것이 아닌가?(월남이 이겼다면 은혜의 나라로 존경받았겠지만) 덕분에 한국으로서는 경제개발의 윤활유(무역액 1조달러:세계8위, 국민소득 2만불시대)로 현재의 발전을 이루는데 엄청 기여된 측면을 부인할 수 없지 않는가? 한국의 위상이 세계 10위권인 현재에 있어서 베트남 참전도 여러각도에서 재정립한 뒤에 베트남에 대한 관계를 설정해 나가는 것이 상호 우의와 인류 공영에 이바이 하는 것이 아닐까? 일본이 한국에 대한 역사를 왜곡, 은폐함으로 인하여 영원이 양국관계가 친선치 못함을 반면교사해야 하지 않을까?
1969.9.2.일 호치민은 그토록 열망했던 조국 통일을 보지 못하고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여행지에서 호치민 사진엽서를 몇 장 구입했는데 담배를 물고 피우면서(늘 담배를 물고 있다) 어린 학생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장면으로서 꼭 시골아저씨가 옆집학생에게 상을 주는 것처럼 친밀감이 느껴진다. 국민들은 “호 아저씨”라 부른다고 한다. 호치민은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는데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한다. 결혼은 하지 않았는데 죽으면서 자서전에 53세 때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조국독립이 우선이어서 결혼하지 않았다고 한다. 호치민의 숙소는 간부들이 식민지시절 프랑스총독부를 사용하라고 했더니 그렇게 큰 것을 쓰면 국민들이 무어라고 하겠느냐며 평범한 주택을 개조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권력을 통해 어떠한 부귀영화도 누리지 않은 지도자로서 평생 우리나라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걸레가 되도록 머리맡에 두고 보았다고 했다. 너무나 가슴 뿌듯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 1945.9.2일 호치민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선포함.
통일이후 1976.7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 1975-1977년 공산화 베트남정부의 대학살, 보트 피플, 공공연한 처형, 강제수용소 등등 공산화이후 1년 동안 죽은 사람이 전쟁 10년보다 두 배가 많았다고 하고 전쟁 후에도 부패가 공산화 전보다 더 심한 것으로 보면 역사의 평가가 어느 쪽으로 무게를 두어야 하는 건지 만만하지가 않다. 통일 후 외국원조의 단절, 낙후성, 심각한 전쟁후유증, 미국과 서방의 제재 및 봉쇄정책, 이웃 강대국과의 관계악화, 캄보디아 크메르정권의 침공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현재 베트남은 호치민의 생각과 달리 개혁 개방으로 공산화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1986년 “도이 모이”라는 슬로건 하에 외국인 투자 보호법 등 개혁 개방의 실용주의적 경제정책을 도입하여, 경제성장 율 연 7%, 국민소득 3,500달러, 조선건조 량 세계11위의 산업국으로 매진하고 있고 이를 뒷받침 하는 30세 이하의 인구 60%가 아주 생동감 있고 약진감 있는 도약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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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박물관 바로 옆 베트남 국보 1호 일주(한 기둥)사원이다. 작은 연못에 기둥하나를 바침으로 하여 세운 아주 작은 사원인데 당초에는 나무로 되어있었으나 프랑스군이 파괴하여 지금은 시멘트기둥으로 되어있다. 베트남은 풍수사상을 깊이 믿는 나라로 베트남의 모든 기운이 여기서 출발한다고 하며, 기둥은 남자를, 연못은 여자를 상징한단다.
북부지방이라서 그런지 키도 생각보다 작지 않고, 피부 색깔도 우리와 닮았다. 남자와 여자들 의상은 우리나라 여름 옷차림과 비슷하고, 사회주의 국가라서 치마와 미니스커트차림의 여성은 거의 없다. 월남 전통의상 아오자이(아오: 옷 자이: 길다)는 흰바지를 입고 겉옷을 원피스 차림으로 늘어뜨린 옷인데 비행기에서 본 스튜디스의 옷은 주황색이었었고, 여러 가지 색깔의 옷들이 보인다. 옛적부터 유래한 한 것은 아니고 1,800년대 수상의 시종녀가 걸레로 마루를 닦는데 괜찮다고 느낀 수상이 패션쇼를 통하여 베트남 의상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베트남 여행 특산품으로는 라텍스, 커피(생산량이 브라질과 버금간다. 프랑스 식민지시절 프랑스 장교가 이디오피아에서 종자를 가져다가 대규모농장을 개간하고 유럽의 입맛에 맟춰 맛과 향을 개량했다고하며, 베트남 커피의 질은 세계 최고라고 한다.)가 유명하다고 하고 중간 휴게소에서 사기도 했다.
-농라 모자와 아오자이를 입은 과일파는 여인들
베트남 여성의 적령기는 17-23세이며 17세 무렵은 신랑지참금이 우리 돈 약 1,500만원으로 가장 비싸고, 나이가 올라가면 값은 떨어지고, 30세가 넘어가면 공짜란다. 결혼 후 3년간 처가살이 후에 분가한다고 한다. 결혼지참금을 빚을 내는 바람에 쪼들린 청춘이 많단다. 결혼하면 노동은 대부분 여성의 몫이고 남자들은 나무 밑에서 잡담으로 세월을 보낸다고 한다.
베트남 여성은 가족을 무척 사랑하고, 책임감이 강하여, 형님, 누나가 자기의 희생으로 동생들과 가족을 부양한다. 한국인과 결혼하면 이런 이유(지참금, 3년 처가살이 대가)로 매월 2-30만원을 친정으로 보낸다고 한다. 결혼 후 한국남편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심지어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정말 나쁜 일이다. 친정 베트남으로 갈 때는 동네 부끄러워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 9시 이후에 몰래 들어간단다.
일주사원 옆에 핀 베트남의 꽃
머리가 좋고 손재주가 비상하며, 주변국들 중 가장부지런하여 아침일찍 일어나 능동적으로 일한다. 동남아시아의 지정학적 중심거점으로서 전세계적 다국적기업이 몰려들고 있고, 사회간접자본확충과 중공업개발에도 열심이다. 현재는 동남아시아 12개국 중 4위지만 발전가능성은 무한하다.
동남아시아에서 천년자원이 가장 풍부하고, 통일 전쟁전 우리나라에 쌀을 무상원조했던 나라 베트남, 전쟁이 없었더라면 입장 바뀌어 베트남이 잘살고 우리가 못 살았을 수도 있다. 20년전 수교초기에는 남쪽 베트남 사람들은 그네들을 대신하여 우리가 피흘려 싸워주었음으로 우호적이지만, 북쪽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군(청룡,맹호,백마 등)의 용맹성에 대한 기억 때문에 얼굴이 굳어졌었다고한다.
현재는 한국사람들에 대해 아주 긍정적이고 우호적이다. 다만, 국내에서 베트남 부인들에 대해 부당한 학대에 대한 사고 소식이 현지 tv, 신문 등 매체에 나올때면, 현지 교민들은 자부심이 강한 베트남 사람들의 기질 때문에 테러를 당할 수도 있어 한국정부는 방관하지만 교민들 협회에서 기금을 조성해서 도와주어 무마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중국은 역사적 악박국이고 영토분쟁을 일삼아 아주 싫어하고, 프랑스는 1884년 부터 2차대전까지 베트남을 식민지화 지배했지만 베트남 글자를 만들어 주어 좋아한다고 하며, 2차대전 때 일시 점령했던 일본과 통일전쟁 때 파병했던 한국의 평은 아직은 유보적이다.
2012.12.22일은 한국♡베트남 수교 20주년이다. 우리와 비슷한 반도국가로서의 지형과 통일전쟁을 격었고, 부지런하고 책임감 강하며, 자녀교육에 열성적이고, 유교적 윤리관에 뿌리를 둔 선량한 국민적 기질 등 우리와 유사한 점이 많은 베트남과의 우호 선린 관계가 더욱 발전되기를 기대해 본다.
1박 2일의 베트남 여행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5.6일 18시 20분 하노이를 출발하여 앙코르 와트사원이 있는 캄보디아 씨엠립 공항으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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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너무 멋지옵니다^^
후기가 너무나 생생하여
제가 다녀온듯 하네욤
저도 앙코르왓트~꼭 함~
가볼계획임돠 ㅎㅋ.
감상 잘 했습니다
그리고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