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글에서 보았듯이 십일조에 대한 규정들이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명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십일조가 세 가지 용도로 쓰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으며, 셋째만 다른 십일조로 보며 결국 두 가지 십일조가 있었다고 이해하는 자들도 있으며 또 물론 각각 독립적인 세 가지의 십일조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열심히 많았던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세 가지의 각기 다른 십일조를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가장 보편적인 종교인이라 할 수 있는 바리새인들의 십일조를 따른 다면, 사실은 매년 10의 2를 드려야 했으며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와 절기와 제사를 위한 십일조- 더구나 제3년에는 '구제의 십일조'를 포함한 세 가지 십일조를 다 드려야했기에, 매 3년째는 거의 십분 삼을 십일조로 내어야 했으며 실지로 그들은 그렇게 십일조에, 아니 십이조와 십삼조에 열심을 냈었습니다. 이 점을 보아도 역시 오늘 한국교회들의 십일조는 그 근거가 모호함이 다시 한번 더 분명해 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저것도 버리지 않는(마 23:23)" 십일조를 한다면 사실은 최소 2/10 이상을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더 나아가 토지 소산과 가축의 십일조뿐만 아니라 화폐를 포함한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한 예로 누가복음 18:12에 보면 자신의 종교행위를 자랑하며 기도하는 바리새인이 나오는데 그는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말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개역성경에는 '소득' 앞에 나오는 '판타(모든)'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가 빠져 있는데, 원래는 '판타'가 있어서 '모든 수입'이라고 해야 하며, 공동번역과 표준 새번역은 그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즉 이 바리새인은 다른 백성들은 토지 소산과 가축의 십일조만 드리지만 자기는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백성들은 1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금식하지만 자기는 일주일에 월요일과 목요일 두 번이나 금식한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바리새인들은 물건을 살 때조차도 산 값의 십일조를 떼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물건을 판 사람이 십일조를 떼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는데, 이 정도면 거의 십일조 노이로제 환자들 아닙니까?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논쟁과 마찬가지로 십일조 논쟁을 오랫동안 치열하게 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식물이 어느 정도까지 자랐을 때 십일조의 대상이 되는 지, 자생 식물이나 양념류도 십일조를 해야 하는 지, 또 자생 식물에서 씨를 얻었을 때도 십일조를 내야 하는지 등등을 따지고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짓들이지요. 그러나 이게 그 옛날 바리새인들만의 모습이라 생각하십니까? 은행 이자에 대해서 십일조를 해야 하는 지, 십일조를 제한 후 받은 용돈에 대해서도 자녀들이 또 십일조를 해야 하는 지... 그래서 한 라디오에서 상담하는 목사님은 바로 그렇게 골치 아프고 율법적(?)이 되기 때문에 아예 십이조를 하라고 권고하기도 하더군요. 그런데 그 같은 상담의 결과를 제시하는 것이 다만 그 목사님만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 역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꼭 같은 십일조 노이로제 환자들을 양산하고 있음이 자명합니다. 한 사람을 전도하여 구원하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고 나서는 그 다음부터는 십일조 도둑으로 몰아부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은 잠시이고 십일조 도둑의 불명예는 아예 영원하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마태복음 23:15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 여기서 '지옥 자식'을 '도둑 자식'으로 바꾸면 꼭 오늘 우리의 이야기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한 술 더 떠서 예수님께서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고 더 큰 소리를 칩니다. 그러면 아무리 '도둑 자식'이 되어도 꼼짝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일조를 하라고 하셨는데, 뭐 달리 더 할 말이 있겠습니까? '도둑'의 멍에를 쓰고라도 십일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진정 그렇게 가르치셨던가요?
이것이냐? 저것이냐?
예수께서도 십일조를 하라고 가르치셨다고 그토록 강조하고 있는 말씀은 누가복음 11:42과 마태복음 23:23입니다. 같은 내용이기에 마태복음 23:23을 기본 본문으로 택하여, 과연 예수께서 그렇게 가르치셨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늘 그래왔듯이 먼저 문맥을 봐야겠지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문맥을 보면 80%가 보입니다. 쉽게 알 수 있듯이 마태복음 23장은 그 한 장이 통째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이 전체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화 있을진저'로 시작하는 그 무서운 책망의 말씀에서 '십일조를 하자'는 그 엄청난 '긍정'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귀 있는 자만 들을 수 있는' 엄청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엄청난 긍정을 하자고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까? 그랬다면 바리새인들은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들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 뛸 만한 격려를 받은 셈이 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첫 포문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23:2)"로 시작됩니다. 누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가? 누가 율법을 알고 진리를 안다고 말하며 가르치려하고 있는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칭 선생이며 지도자라고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데, 과연 그들이 율법을 제대로 알고 있으며 과연 그들이 진리를 가르치고 증거하는 선생과 지도자의 자격이 있는지를 따져보자는, 아주 논쟁적인 서두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23장 전체는 이 서두에서 밝히신 논점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논쟁이 계속됩니다. 즉 그들의 성경해석이 옳은가 라는 것입니다.
십일조가 언급된 23:23의 말씀은 "화 있을진저!"라고 시작되는 7개의 문장 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화 있을진저!"라고 번역된 헬라어 '우아이(ouai)'는 구약의 선지서에서 자주 나타나는 표현으로 '고뇌 혹은 절망의 외침' 그리고 '확실한 저주와 심판의 선포'가 선언되어질 때 내뱉는 '선지자의 독설'적 표현으로, 그 당사자를 이미 저주와 심판 받아 죽은 자로 여기고 그들 앞에서 향을 피우고 곡(哭)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정도의 아주 강력하며 분명한 저주와 심판의 선언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이 본문에도 7번을 거듭 "화 있을진저!"라고 선언하심으로 이 선언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7'이라는 그 숫자가 암시하듯이 완전한 저주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네 번째 화를 중심으로 첫 번째와 일곱 번째, 두 번째와 여섯 번째, 세 번째와 다섯 번째 화들이 상호 대칭적 관계를 이루어서 구조적으로도 '완벽한 화'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A. 첫째 화(13절) -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아니함
B. 둘째 화(15절) - 해를 더 끼치는 형식적인 열심
C. 셋째 화(16-22절) - 성경을 잘못 사용함
X. 넷째 화(23-24절) - 더 중한 것을 의도적으로 배척함
C'. 다섯째 화(25-26절) - 성경을 잘못 사용함
B'. 여섯째 화(27-28절) - 해를 더 끼치는 형식적인 열심
A'. 일곱째 화(29-33절) - 선지자를 배척하는 자들의 자손(즉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음)
이와같은 대칭적 구조에선 항상 가운데 있는(X) 말씀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담겨 있으며, 이는 성경에서 자주 발견되는 구조입니다. 즉 첫째, 둘째, 셋째 화가 주로 그들의 외식과 위선을 '포괄적'으로 겨냥한 책망이었다면, 중심에 있는 네 번째 화는 그와 같은 외식과 위선을 낳은 '원인적' 이유 즉 '율법의 본질인 의와 인과 신을 버리고 형식만 의도적으로 취한'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그러므로 넷째 화인 23절의 말씀에서 십일조는 그저 '율법에서 더 중요한 의와 인과 신을 버린' 대표적인 잘못의 한 예로 든 것인데, 이 말씀에서 오히려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결론을 끌어오는 것은, 아! 정말 대단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솔직히 필요한 표현을 못찾겠습니다.
그리고 23절 그 말씀을 좀 더 자세하고 꼼꼼하게 살펴보면, 먼저 예수께선 그들이 하고 있었던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예로 들고 계신데 -누가복음에는 박하와 운향과 채소- 도대체 박하와 회향이니 운향과 근채니 이런게 무언지나 아십니까? 사전을 찾거나 영어 단어와 비교해 보시면 이것들이 민트, 허브 등의 향신료 종류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여기서 언급된 품목들은 위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해야 하는가의 문제로 논쟁하던 바로 그 품목들인데, 하나같이 개인의 밭에서 정성 들여 김매고 키우고 하는 것들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씨만 뿌려 놓거나 아니면 들에서나 산에서도 구할 수 있는, 우리로 말하면 파, 마늘, 깻잎, 들깨 뭐 이런 양념 종류들과 심지어 들풀에 대한 십일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까지 당시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는데, 이것을 예수께서 기특하게 여기셔서 황당한 '양념'의 십일조를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주장도 말이 안되는 소리지만, "이것들도 버리지 말고 저것들도 행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예수께서 십일조를 지지하셨으니 우리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황당하다못해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십일조를 강조할 구실을 찾긴 찾아야 할텐데... 고민하다 결국 찾아낸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었기에 앞 뒤 가리지도 않고, 게다가 가장 권위있는(?) 예수님의 말씀이니 더욱 금상첨화였겠지요. 그래서 냅다 예수께서도 십일조를 해라 하셨다고 소리 지른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헬라어 원문을 읽어보면 이 말씀에서 '이것'과 '저것'을 지칭하는 지시사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형태라는 사실도 쉽게 알게 됩니다. 즉 복수형 '타우타(이런 것들)' , '카케이나(저런 것들)'로 되어 있는데, '이런 것들도 행하고 저런 것들도 버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의와 인과 신'을 지칭함을 쉽게 알 수 있으니 그렇다면 '저런 것들'은 무엇을 가리키겠습니까? 표면적으로야 '박하와 운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가리키지만 그건 '십일조'라는 한 가지 아닙니까? 더구나 그런 십일조는 십일조 노이로제 환자들인 바리새인들이 지어낸 얼토당토않은 것이기에 그렇다고 수긍하기도 힘듭니다. 결국은 문맥 전체를 보는 것이 타당한데,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신 '버릴 수 없는 저것들'은 십일조를 포함하여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는 다양한 제사 행위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예수께선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종교 생활 전체를 책망하기 위해 여러 왜곡된 신앙 행위들 중에서 특별히 십일조를 한 예로 드신 것 뿐입니다. 즉 예수께선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번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와 각종 예물을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었다는 것이며, 실지로는 그와 같은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문맥인 23:16-22에 보면 예수께선 여전히 제단과 성전을 인정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제단과 성전을 인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십일조를 비롯한 여러 제사 행위들을 인정하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께선 율법 아래 나셔서 난지 8일만에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으셨고 12살이 되었을 때는 율법에 따라 성인식 결례를 치르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셨으며, 유월절이나 여러 절기들을 지키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도 몇 번 올라가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베드로와 함께 성전세로 은전 1세겔을 바치기도 하셨습니다(마 17:24-27). 오히려 십일조는 예수께서 직접 바치셨다는 기록이 없지만 성전세는 자신의 몫인 반 세겔을 바친 기록이 있는데, 왜 한국교회서 성전세를 바쳐야 한다는 소리는 없는 지 모르겠습니다.
근데 아니나다를까 일종의 성전세를 요구하는 곳도 있긴 있습니다. 바로 제가 속한 장로교 합동 총회는 '세례교인 의무금'이라는 게 몇 년 전부터 생겨서 실시되고 있는데, 그 취지가 성전세와 비슷합니다. 말 그대로 세례 교인으로서 의무금을 총회에 낸다는 것인데, 1년에 5000-10000원을 '의무적으로' 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례 교인이라고 의무금을 총회에 낸다는 발상 자체가 우선 황당합니다. 그게 구약 시대에 성전세를 냈던 것이나 아니면 중세 때 면죄부를 거두었던 논리하고 뭐가 다릅니까? 더구나 위대하신 우리 총회는 의무금을 노회별로 할당해서 독려하고 또 제대로 의무금을 안 낸 교회에는 행정적인 제약을 줘서 각종 증명서류들을 발급해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실지로 의무금을 안냈다고 한 개척교회 목사님은 소속 증명서를 거절당했으니까요. 아무리 썩어빠진 국가라도 아직 세금 안냈다고 국민에게 호적 등.초본을 발급해 주지 않았다는 소리는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의무금이 신학교나 신학생들을 위해서 일정 부분 정확하게 쓰여진다든지 아니면 농어촌 교회들과 개척교회들을 위하여 쓰여진다든지 하는 명확한 사용근거라도 있으면 기꺼이 내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도 밝히지 않고 내랍니다. 그리고 안내면 조직의 쓴 맛을 보여 주겠다는 건데, 이건 완전히 조폭의 논리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고 그야말로 '강도의 굴혈'입니다. 그런데도 수십 수백 억이 집행되는 이러한 일들이 아무런 공론화의 절차없이 일방적으로 시행되고, 사정이 이래도 그대로 순응하며 착착 의무금을 내고 있는 모습은, 가히 '조직의 힘'이며 솔직히 저로서는 종교가 타락하는 최종 단계인 '집단 최면 현상'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전세 때문에 글이 좀 샜습니다만, 아무튼 예수께선 살아 계셨던 동안에는 율법과 성전을 부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십일조는 지적하고 계시지만 십일조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도 시대적인 문맥에서 파악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할례를 받았으니 우리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셨으니 성전이 없는 지금도 성전세를 내자고 할 것이며 그리고 나병 같은 병이 나았으면 예수님이 시키신 대로 지금도 제사장에게 아니면 목사에게 가셔 보여야 한다고 할겁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으니 우리도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그렇게 예배하는 '안식교'를 이단으로 분별하는 것은 잘 하면서 왜 십일조는 여전히 드려야 한다는 것인지 참으로 모르겠습니다.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 말씀으로 억지를 부리며 기를 쓰며 십일조를 주장하는 분들에게 또한 꼭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이 그렇다면 그 십일조 행위를 통하여 예수께서 먼저 지적하셨던 '이것도 행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가르치신 십일조 - 의(義), 인(仁), 신(信)
예수께선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물질을 드리는 것 보다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먼저 행하라고 가르쳐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곧 이은 뒷 절에서 이 두 차이점의 간격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풍자하여 말씀하시길,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킨다'는, 제 기억으론 예수님의 말씀중 가장 엽기적인 표현으로 이 지독한 모순을 강조하여 비판하심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즉 들깨나 깻잎 따위를 십일조 하려는 그 사소한 일에는 목숨을 걸었지만 정작 중요한 본질인 정의(justice)와 자비(mercy)과 신의(faithfulness)는 안중에 없었던, 소탐대실(小貪大失)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목구멍으로 낙타를 삼키는 -더구나 낙타는 부정한 짐승으로 취급받던 동물이었습니다-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의 십일조와 그들의 종교 행위를 바라보셨던 예수님의 판단은 이와같이 분명한데, 다시 또 낙타를 삼키는 일을 강요하는 '소경된 인도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우리들의 현실이 실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십일조의 본질 나아가 모든 율법의 본질은 예수께서 명확하게 지적하신 것처럼 의(justice)와 인(mercy)과 신(faithfulness)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병행되는 구절인 누가복음에선 11:42에서는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지난 글(32호) "하나님을 알아 가는 십일조"에서 살펴보았던 세 가지의 십일조가 함의하고 있는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하기도 합니다.
십일조는 안식년 제도와 함께 땅의 주인되신 하나님께 대한 고백으로 우리의 모든 소유와 소산이 주께로부터 말미암았음을 고백하는 신(信, faithfulness)의 행위이며, 나아가 '경제 정의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 방편이었으며 그 실천 윤리였기에 의(義, justice)의 행위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의 나눔에 가장 기본적인 취지가 있었으며 또한 특별히 셋째 십일조를 따로 제정하실 만큼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사랑과 나눔을 강조하셨던 인(仁, mercy)의 행위로 '나눔의 삶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편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같이 십일조를 바르게 행함으로 '평균케 되는 삶의 원리가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 즉 '의와 인과 신'이 그 중심되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담긴 행위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소경된 인도자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켜버림으로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사라져버리고 '박하와 회양과 근채'를 붙들어서 그 푸성귀 몇 포기에 자만과 위선과 탐욕을 담도록 인도하고 있었으니, 예수께서 분노와 안타까움으로 "화 있을진저!"를 일곱 번씩이나 외치셔야만 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기를 쓰며 강조하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십일조는 과연 '의와 인과 신'을 행하는 '이것도 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인과 신'이 지배 원리가 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강자가 약자를 무참하게 짓밟는다거나 많이 가졌다고 해서 가지지 못한 자를 무시하고 유린하며, 그러고도 더 가지기 위한 불의와 불법만이 성행함으로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는...(딤후 3:2)" 삶으로 가득차 있다면, 그곳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공정하고도 정당한 선의의 경쟁과 도리어 양보하고 손해보는 것까지라도 할 수 있는 미덕과 그리고 피차 신뢰하며 존중할 수 있는 진실과 사랑이 지배하는 사회가 바로 그 땅의 빛이요 소금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청결하고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임, 그곳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있는 사회이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기도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십일조를 행하라고 명령하셨을 때는 바로 이와같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그 소망이 구체적으로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주신 조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한번 더 강조하셨던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꿈꾸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는 바로 그렇게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율법의 행위인 십일조로는 그 소망을 한번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고 그나마 성전이 완전히 붕괴됨으로 그 최소한의 명분마저도 사라진 지 이미 2000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선 '의와 인과 신'이 이미 사라졌기에 성전을 거두어 가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2000년이나 죽어있던 불씨를 다시 살려내며 역시 2000년전과 동일한 모습으로 '의와 인과 신'은 버리고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게' 하는 '소경된 인도자'는 또 누구입니까?
그리고 그렇다면 십일조 없는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의와 인과 신'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나라,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가는,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리고 성전을 거두심으로 십일조를 그치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젠 어떠한 방편으로 '의와 인과 신'을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하나님의 뜻인 '의와 인과 신'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방편으로 우리에게 주셨을까요? 다음 글 <헌금하는 사람, 연보하는 사람>에서 십일조에 대해 써 왔던 지금까지의 글에 대한 결론을 맺으며 십일조를 넘어서 의와 인과 신을 이루어가야 할 '연보'를 그 성경적 대안으로 제시하겠습니다.
*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둔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음성을 빌어 헌금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말씀은 마태복음 6:19-21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그래서 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곧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적용하며 강조합니다. 그러나 과연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곧 보물을 하늘에 쌓는 행위일까요?
그 말씀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유지하시고 다스리시는 영역 즉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네 삶의 방향을 맞추라'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이란 또 무엇입니까? 예수께선 요한복음 6:29-30의 대화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즉 밝혀주신 그대로 하나님의 일은 '믿음에의 투자' 즉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에 투자하고 힘쓰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보물이 있는 곳'이란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또는 '우리의 가치관과 우선순위'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물은 꼭 돈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그 어떤 것'으로 '보물=돈'이라는 공식은 사실 너무 단편적이며 물질주의적인 이해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보물은 돈이 아니라 우리 삶의 우선 순위와 가치관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본문의 바른 이해입니다. 즉 지금 예수께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을 아는 일에 너의 보물-너의 우선 순위와 가치관-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이어지는 뒷 절의 말씀을 또한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뒷 절의 말씀은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을 것이니..." 라는 말씀인데, 아니 갑자기 웬 시력(?) 이야기가 나옵니까? 이 말씀은 눈 나쁜 자들을 상당히 기죽이는 말씀으로 들리는데 그렇습니까? 이 말씀은 앞에서 말씀하신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는 말씀에 대한 부연 설명의 말씀입니다. '마음'은 우리 존재의 중심이며 마음이 바르게 정해져야 인격 전체에 건강과 온전함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앞 말을 부연하고 이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자 예수께선 우리의 '심안'과 '육안'을 비교하고 계십니다. 눈이 성해야 온 몸이 밝을 것입니다. 즉 바른 관점을 가져야 모든 것이 밝게 보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모든 것을 본연의 가치와 관계 속에서 보게 되지만, 반대로 땅에 속한 것을 보물로 삼은 자는 그 시각이, 그 가치관이, 그 우선 순위가 왜곡되어 사실상 모든 것을 오도하게 되고 영적 어두움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보물을 돈으로 보는 시각'이야말로 오히려 '눈이 나빠서 어두움에 빠져있는' 대표적인 모습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또 이어지는 24절은 더 분명하게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며, '땅'과 '하늘'중 네가 분명히 선택하라고 다시 다그치고 계시지요. 그리고 이어지는 25-34절의 말씀도 꼭 같습니다. 그래서 결국 6장은 19-34절까지가 같은 주제로 하신 말씀인데, '너의 가치관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이 그 주제이며, 이 모든 것의 결론적인 말씀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땅의 보물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큰 문맥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그 말씀을 바르게 본다면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말씀으로 무작정 헌금을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본문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하며 아전인수격으로 오용하여 헌금만을 강조한 결과, 오늘 한국교회 성도들은 헌금은 잘하고 있는 지 모르겠지만 그 삶과 가치관은 전혀 변화가 없는 이상한 그리스도인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가치관과 삶의 자세가 하나님의 관점과 하나님의 나라에로 완전히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바뀐 가치관과 삶의 자세로 열심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산다면 내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보물이 되어 하늘에 쌓이는 것이지 내가 낸 돈들이 하늘에 쌓여 천국 통장의 잔고가 늘고 내가 천국에서 더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사이비 종교의 가르침이지 참된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보물을 하늘에 쌓기 위하여 먼저는 나 자신의 삶의 자세와 모든 가치관들을 그리고 나아가 이 세상의 소중하고 중요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진리 앞에 쳐서 복종시켜 이 모든 소중한 만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도록 내가 맡은 자리와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입니다. 제발 좀 그 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가장 비성경적이며 또 모든 악의 근원이기에 하나님께서도 미워하시는 바로 그 돈으로 하나님을 팔며 신앙을 팔고 있는 그 추악한 행위들을 그쳐야 합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와 평강 누리시길 바랍니다.
십일조 바르게 읽기(4) - 헌금하는 사람, 연보하는 사람
헌금하는 사람
혹 여러분이 출석하시는 교회의 헌금 종류가 몇 가진지 헤어보신 적 있습니까? 십일조헌금, 일반감사헌금, 각종 절기감사헌금, 건축헌금, 선교헌금 등의 봉투는 아마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기본으로 비치하고 있을 것 같고... 좀 더 많으면 구제헌금, 장학헌금, 주정헌금, 생일감사헌금, 신년 감사헌금 등이 아마 추가되고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근데 왜 헌금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헌금하라고 한번이라도 말씀하신 적이 과연 있습니까? 죄송하지만 성경에선 한 군데서도 헌금하라는 말씀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알다시피 우선 십일조가 있지만 십일조는 돈을 드리는 것이 철저하게 아니었음을 이미 살폈고 돈을 드렸던 것으로 성전세가 있었지만 성전세는 그 이름에서 이미 알 수 있듯이 일종의 세금이었고 강제적이며 의무적인 성격이었기에 헌금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각종 제사들 역시 제사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형편에 맞는 제물을 준비해 오는 것이었지 돈으로 제사 준비를 했던 것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제물에 대해서도 처음 그 법을 명령하고 있는 율법서에서나 이러 이러한 제물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을 뿐 다른 말씀들 특히 선지서에 이르면 "제발 그런 헛된 제물들을 가져오지 말라(사 1:11-15)"는 말씀이 오히려 주된 음성이지, 왜 내게 제물을 바치지 않았느냐고 다그치신 적은 한번도 없음이 분명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돈을 드린다는 생각은 결코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어, 그래요? 그래서 컴퓨터 성경으로 '헌금'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봤습니다. 성경에서 '헌금'이라는 단어가 몇 번쯤 나올 것 같습니까? 신.구약 전체를 통틀어 '헌금'이라는 단어는 단 두 번만 나옵니다. 그것도 누가복음 21:1-4의 한 사건을 설명하는 가운데 두 번 나오는 것이 전부이니 사실은 단 한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바를 것 같습니다. 지금 성경을 펼쳐서 확인해 보십시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연보궤에 드린 것과 부자들이 헌금한 것을 비교하여 예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바로 그 본문에서입니다. 그리고 그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연보궤'라는 단어가 나오며 그 연보궤에 부자들은 '헌금'하고 있다는 뉘앙스로 글이 쓰여져 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과부에 관해서는 단순히 '넣었다'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반하여 부자들에 관하여는 1절과 4절에서 두 번 다 '헌금'이라고 그 돈의 성격을 밝히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헌금하고 있었습니다. 정치 헌금을 하는 것과 또는 어떤 단체에 기부 헌금을 하는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헌금'을 그들은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누가복음에서만 단 두 번 사용되고 있는 이 헌금도 결코 긍정적인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판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면 결국 성경엔 헌금이 없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선 헌금을 요구하신 적도 없고 헌금을 인정하신 적도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 돈을 드린다는 의식을 가지고 헌금을 하는 것은 성경에서 비롯된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에는 연보궤가 있었습니다.
성전의 바깥뜰인 여인의 뜰에는 각각 다른 용도가 표시된 열세 개의 나팔 모양을 한 연보궤가 늘어서 있었는데 성전에 예배하러 왔던 사람들이 성전 입구에 서 있는 이 연보궤에 연보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부자들은 연보궤를 돌아가면서 주루룩 주루룩 소리가 나도록 -특히 모양이 나팔 모양이고 당시는 다 동전이었기에 그 소리가 아주 요란했다고 합니다- 각종 동전들을 집어넣으며 자신의 행위를 과시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누가는 '연보'가 아니라 '헌금'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문맥을 보면 사실 누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헌금이 아니라 탈취물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를 또한 읽을 수 있습니다.
바로 앞 전문맥인 누가복음 20:45-47을 보십시오.
예수께선 특별히 서기관들에 대하여 경고하시면서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한다(47절)"고 말씀하고 있는데, 바로 뒷 장면에서 그렇게 가산을 탈취 당한 과부는 그래도 자신의 전 재산인 두 렙돈을 연보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이 어떻게 과부의 가산을 삼켰을까요? 간단합니다. 서기관들은 레위인이었기에 십일조를 받았는데 마땅히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들에게까지 전달되어야 할 십일조를 자신들이 다 챙긴것이지요. 그래서 당시에는 일부 소수가 십일조를 독점하였기에 같은 레위인이라도 권력을 쥐지 못했던 레위인들은 거의 거지 신세로 살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간단한 예로 예수님의 제자였던 레위 마태가 있지않습니까?
그의 본 이름은 레위이며(막 2:14) 마태는 제자가 된 후 예수께서 주신 이름입니다. 그가 가진 이름 '레위'는 물론 함부로 가질 수 없는 이름입니다. 그것은 그가 레위 지파였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는 세리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십일조로 생활을 했어야 할 레위인의 입장에서 세리가 된다는 것은 분명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죽했으면 그가 세리의 일을 하고 있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하신 "나를 따라오라"는 단 한마디의 말씀에 그는 당장 그 세리의 자리를 박차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것이 당시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서기관들을 포함한 부자들은 불의한 돈을 가지고 오히려 행세하며 헌금하고 있었지만 그 헌금은 예수께서 인정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가난하고 약탈당한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했고 오히려 자신보다도 못한 이웃을 생각하여 두 렙돈을 연보했던 과부의 연보만 예수께서 인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황당하고 가관인 것은 이같은 성경의 말씀을 갖고 오늘날 설교하는 자들의 태도입니다. 다 아실 겁니다. 뭐라고 설교하고 있는지. "이 과부를 봐라. 아무리 가난해도 헌금은 꼭 해야한다. 이 궁색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할 수 있었다면 대부분의 우리들은 더 많은 헌금을 해야 마땅하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복을 내리신다". 과연 이렇게 설교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강조되는 것이 "많이 넣는" 부자들의 헌금이지 적게 넣는 가난한 자들의 헌금이 분명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본문을 갖다 대든 오직 헌금 많이 해서 복 받자는 결론을 끄집어내는 이런 왜곡된 설교들이야말로 오늘 한국교회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뒤에서 다시 강조하겠지만 헌금을 많이 하면 복 받는다는 생각 자체가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그건 하나님을 맘몬으로 대체하는 또 다른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행위이지 결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돈 몇 푼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며 그 같은 행위로 하나님을 시험해서도 안될뿐더러 하나님께선 한번도 헌금을 원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께 돈을 드리는 것 만큼 왜곡되고 거짓된 가르침은 없습니다. 구약에선 왜 한번도 헌금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고 또 오히려 돈으로 십일조나 헌물을 드리지 못하도록 특별한 조치까지 취하고 있을까요? 신에게 돈을 주는 행위는 돈 받고 복을 팔았던 당시 이방신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을 향하여 돈 드리는 행위를 원치 않고 오히려 경멸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령 죄를 속하는 희생 제물을 돈으로 대신해서 드릴 수 있다고 한다면 제사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뿐더러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히 9:22)'는 구속의 원리를 가르칠 수 없었기 때문에 돈으로는 결코 제물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십일조 역시 토지의 소산으로만 바치게 했던 이유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관심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 알아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가장 일반적인 종교 행위였던 돈으로 드리는 헌금을 오히려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헌금을 많이 드림으로 축복을 받는다는 논리는 얼토당토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돈이나 얄팍한 인간들의 행위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자멸을 재촉하는 길이라면 오히려 맞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단호히 거부하는 것은 그릇된 동기로 하나님께 돈을 드리는 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성경에선 오히려 헌금이라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기에 그 헌금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우리가 헌금을 하면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생각으로 헌금을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꼼꼼히 새겨 읽으십시오. 하나님께 드린다는 생각으로 헌금을 하시면 안됩니다. 구약시대가 아니라고 해서 이제는 돈을 드려도 된다는 근거가 전혀 없고 또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의 속성상 돈을 숭배하는 맘모니즘이 더욱 더 견고한 이 시대의 가치관이 된 지금, 그 돈으로 하나님이 평가되고 인간의 삶이 평가되기를 하나님은 더욱 더 원치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돈을 드릴 수는 없지만 교회의 사역을 위하여 그야말로 '헌금'하는 것은 오히려 정당합니다. 지상의 교회는 땅에 속한 한 기관이요 일정한 비영리 조직이기에 헌금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하여는 헌금하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헌금하는 것은 일종의 기부행위요 또 내가 속한 조직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책임이기에 그저 기꺼운 마음으로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린다는 생각이 개입되면 그 순간 그것은 자기 의가 되고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과시하는 것이 되기에 바리새인들의 행위처럼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온전한 마음과 믿음의 삶이지 돈이 아닙니다. 돈은 그저 교회를 위하여 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위하여 드리면 됩니다. 그리고 십일조와 헌물들을 대신하여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헌금'이 아니라 '연보'입니다.
연보하는 사람
앞선 누가복음에서도 등장했었지만 예수님 당시의 성전에도 연보제도가 있었으며, 구약에선 역대하 34:9,14에서 '연보'한 돈으로 성전을 수리하는 일에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연보는 물론 십일조와 성전세와는 다른 돈으로 요즘 헌금으로 비교한다면 일종의 건축헌금인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의 성전에는 이렇게 성전건축을 위한 연보, 구제를 위한 연보 등의 각각 다른 항목이 적힌 13개의 연보궤가 놓여 있었고 성전에 출입하던 백성들은 자유롭게 연보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율법서에서 구체적으로 연보하라는 명령을 찾을 수는 없지만 꽤 오랜 시간동안 관례적으로 연보를 해 왔던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로 이르면 신약성경에선 '연보'라는 단어가 12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헬라어로는 조금씩 단어가 다르지만 한글로는 다 연보라고 번역하고 있고 단어는 달라도 그 행위들은 다 연보였습니다. 즉 아직까지는 '연보'라는 단어가 특정한 고유명사를 갖진 못했으나 연보한다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선 연보(捐補)라는 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연보(捐補)'의 연(捐)은 원래 '버린다'의 뜻으로 사용된 말인데 '주다, 바치다, 내놓다, 기부하다'라는 뜻으로 발전했습니다.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림으로 타인에게 내 놓거나 바치거나 기부한다는 뜻인 셈입니다. 그리고 연보의 '보(補)'는 원래 '깁다'라는 뜻을 가진 말인데 '고치다, 보태다, 돕다'라는 뜻으로 발전했습니다. 결국 한자로 된 연보를 원래의 단어 뜻대로 해석하면, 자기 것을 버려서 헤어지고 떨어진 곳을 기워준다는 뜻이 됩니다. 참 좋은 뜻의 단어이며 원어의 의미도 잘 살린 아주 좋은 단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한글번역은 일관되게 '연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교회에서도 과거에는 연보를 드린다고 했지 헌금을 드린다고 한 것은 사실 최근의 일입니다. 한국 땅에 처음 복음이 전파되고 모두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구성되었을 때 우리는 의례히 '연보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모두들 살림살이가 조금씩 나아지고 특히 좀 산다는 사람들 중심으로 교회가 구성되기 시작하면서 슬그머니 연보는 사라지고 어느 듯 헌금으로 대체된 것이 한국 교회사에 나타난 헌금제도의 변천사입니다. 결국 연보궤에 헌금을 넣는 서기관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연보는 우선 고전 16:1,2에 "성도를 위한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 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는 말씀을 먼저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 두 번 사용되어 연보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로기아'인데 영어로는 collection, 즉 모금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연보는 당시 흉년을 만나 어려움에 처했던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모금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이 구절을 근거로 매 주일 모일 때마다 '헌금'을 하지만 자세히 보시면 그렇게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매 주일 교회에다 헌금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번씩 스스로 저축을 해 두었다가 바울이 오면 따로 연보하지 말고 지금껏 자신들이 저축한 그것으로 연보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을 보면 '저축하라'는 단어 뒤에 'by himself'라는 '자기 스스로, 혼자서'라는 어구가 있어서 이 말이 공적인 헌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준비를 뜻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식으로 이해하면 초기 교회야 지금의 구역모임과 비슷했으니까 매 주일 첫 날에 각 가정에서 가정 헌금 형식으로 연보를 모아두었다가 그 모아진 것을 가지고 바울이 왔을 때 연보를 해서 예루살렘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즘 같으면 바울같은 '대부흥사'가 왔는데 큰 부흥회를 개최하여 아마도 넘치게 헌금을 거둘 수 있었을 테지만, 바울은 오히려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했고 또 연보의 참된 의미를 살리기 위하여 그런 즉흥적이며 충동적인 헌금을 못하도록 오히려 "내가 갈때에 연보하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그 연보의 사용처도 기근을 당한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기에, 오늘 한국 교회들의 헌금은 이런 여러 점에서도 성경의 가르침과는 달라도 한참이나 다르며 성경에서는 그 모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살펴 볼 단어는 헬라어 '하프로테토스(고후 8:2, 9:11, 9:13)' , '하드로테스(고후 8:20)' , '유로기아(고후 9:5)'로 단어들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영어로는 generosity, generous gift, liberality gift로 번역되고 있는, 모두가 구제를 염두에 둔 관대한 나눔의 의미를 담고 있어서 '연보'의 의미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울에 의하여 주로 언급된 연보들을 정리해 보면 몇 가지로 뚜렷해지는 연보의 원리들을 세워볼 수 있습니다. 이같은 원리들을 제시하는 성경 구절들을 꼭 찾아서 읽어보십시오.
① 연보는 있는 대로 형편대로 하면 됩니다. (고후 8:11-12)
② 연보는 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고후 9:5)
③ 연보는 마음에 정한대로(자율적으로) 해야 합니다. (고후 9:7)
④ 연보는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고후 9:7)
⑤ 연보를 통하여 평균케 되는 삶이 나타나야 합니다.(고후 8:14-15)
연보가 십일조를 대체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와같은 연보의 원리가 십일조의 원리인 '의와 인과 신'의 원리와 같기 때문입니다. 특히 십일조를 통하여 나눔의 삶이 실현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함께 평균케 되길 하나님은 원하셨기에, 연보는 십일조의 가장 기본적인 그 뜻을 이룰 수 있도록 오늘 우리에게 주신 방편이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공유함으로 평균케 되는 것은 구속의 역사에서 항상 따라오는 첫 원리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 즉 구속함 받아 광야에서 배웠던 첫 원리가 만나를 통해 "많이 거둔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는(고후 8:15)" 평균케 된 삶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광야에서 하나님은 율법을 주심으로 광야에서 누렸던 그 평균케 된 공유의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안식년과 십일조의 제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없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사역이 필요했던 것이며 십자가와 부활의 사역으로 성령을 주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던 구속받은 그 성도들의 삶은 또한 어떻습니까? 사도행전이 우리에게 보여 주듯이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있는(행 2:45, 4:32)", 역시 공유의 삶이며 평균케 되는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구속의 진리를 가르쳤던 바울 사도가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케 하려 함이라(고후 8:14)"고 지적하며 연보를 권고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가르침이며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혁할 때가지 맡겨 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는 십일조라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으며 그리고 헌금이라는 말도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당연한 것이 십일조와 헌물은 제사 제도에 종속된 것이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제사 제도와 성전이 필요 없게 되었고 또 실지로 사라진 지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9-10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장막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예물과 제사'는 폐지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 값을 십자가상에서 대신 치러주실 때, 우리가 일생 동안 바쳐야 할 십일조와 헌금까지도 다 바치심으로 십일조 예물과 헌금 예물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냥 폐지하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심으로 폐지하셨습니다. 왜 이 사실을 믿지 않습니까? 처음부터도 그랬지만 이제는 참으로 하나님께 돈을 일체 바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왜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그 잘난 돈 몇 푼으로 하나님을 시험하며 스스로의 무덤을 파고 있습니까? 도대체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믿는 다는 말입니까? 참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왜 여전히 나의 행위로 뭔가를 과시하고 이루어보려고 합니까? 제발 좀 예수 믿고 삽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구원에 관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예물과 제사는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히 7:12)"
모든 것이 이미 다 변했고 모든 것이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십일조는 이미 폐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돈을 드릴 이유는 처음부터 없었거니와 물론 지금은 더더욱 없습니다. '개혁할 때가지 맡겨 둔 것'들이 개혁된 지는 이미 지나도 한참을 지났으며, 모든 것이 이미 다 이루어졌고 다 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헌금한다고 말함으로 자멸의 구덩이를 제발 파지 파십시오. 헌금은 그냥 교회의 운영과 선한 사업들을 위하여 그대로 하면 됩니다. 그것 자체가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재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빌 4:18)"입니다. 빌립보서의 이 말씀도 빌립보 성도들이 복 받을려고 충동되어서 바친 헌금들이 아니라 바울의 선교사역을 돕기 위한 연보였고 선교헌금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와같은 연보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헌금을 필요로 합니다. 그 헌금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동기가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동기가 아니라 바울과 그의 선교 사역을 단순히 돕겠다는 선한 동기였기 때문입니다. 제 말은 하나님께 한다는 거짓 가르침에 속아 억지로나 또는 생색내며 헌금하지 말라는 것이며, 이제는 그 십일조와 헌금에서 마땅히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고 말했던 바울의 말씀처럼 이제는 자유해야 하며 더 이상 십일조와 헌금이라는 또 다른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어지는 6장에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고 말씀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기복주의와 무속신앙으로 점철된 인간 종교의 역사는 끊임없이 신에게 뭔가를 제공함으로 신으로부터 그에 따른 수혜(복)를 입을 수 있다는 패러다임을 유지해 왔습니다. 구약에서 그토록 경고하고 있는 우상 숭배가 바로 그러한 이방종교들의 패러다임에 대한 경고였으며,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그토록 강력한 비판을 받았던 것도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들의 행위를 내세우며 자기 의에 빠진 모습들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셨고 예수께서 다시 반복하신 말씀들은 이와같은 일반 종교의 패러다임에 대한 전복(顚覆)이었으니 즉, 네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이웃을 향하여 나타내라는 것이었으며, 십일조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고백인데 그 표현은 레위인과 객들과 과부와 고아들과 나눠 먹는 것으로 표시되어야 했습니다. 즉 돈은 신(神)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는 가히 모든 종교의 페러다임을 깨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고 싶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지 말고 그것을 오히려 네 이웃에게 주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으며 물론 동일하신 예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 돈을 바치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번도 없으며, 예수님의 줄기찬 메시지는 "네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마 19:21, 막 10:21)"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 받는 유일한 조건이 있다면 사실 이 말씀 속에 있습니다. 십일조를 철저히 하고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주어야 하냐면 눅 6:38 그 말씀의 전문맥을 보면 '원수'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 달라며 교회에 바친다고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원수에게 주는 것이 오히려 복의 조건인데, 그토록 복을 좋아하고 갈구하면서 왜 이 말씀은 큰 소리로 가르치지 않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예수를 만나고 성령으로 충만했던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은 이 말씀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져,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셨으며 그 가운데 한 사람도 핍절한 자가 없지(행 2:44-45, 4:32-35) 않았습니까? 심지어 고넬료는 이방인었고 로마의 군대장관이었으며 아직 성령을 알기 전이었지만 그의 '구제와 기도(행 10:31)'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시지 않았습니까?
교회는 구제단체가 아니고 자선기관이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주라!"고 명령하시는 예수님의 음성 앞에서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는, 인색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었기에 율법으로는 되지 못하였고 결국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이며, 초대교회의 역사가 보여 주듯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음으로 마침내 가능하지 않았습니까? 성령의 충만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니 하나님이 원하셨던 대로, 하나님께 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돈을 나누는 모습으로 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구원을 받고 성령과 동행하는 우리에겐 우리에게 복으로 주시는 물질들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일만이 남게 된 것이며, 이것이 진정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며, 이 일을 행하는 도구가 바로 연보입니다.
그러므로 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연보를 통하여 이웃에게 나눠져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기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45)"는 말씀이 아니었습니까? 거기 심판대에 선 자들은 하나님을 몰랐던 자들이 아닙니다. 염소의 자리인 왼편에 선 자들의 대답(25:44-45)을 들어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대접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자들이 아니라 그들이 몰랐던 것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는 바로 이 사실을 몰랐기에 그들은 결국 염소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이었습니다.
종말의 심판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비유가 등장합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열 처녀의 비유와 달란트의 비유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인데, 한결같은 공통적인 메시지는 하나님을 알되 잘못 알고 있는 자들이 심판대 앞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신랑이 온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신랑이 이렇게 더디 올 줄은 몰랐던(25:5)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인을 알았지만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몰랐고(마 25:24-26) 그저 자신의 생각대로 그 주인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염소의 자리에 선 그들도 하나님을 대접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접하는 방법, 즉 그것이 바로 이웃을 향하여 '주는' 것이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섬기길 원하는 지 목사인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다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어려운 형편에도 하나님께 헌금하는 일에는 늘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래서 더욱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 순수함을 등쳐먹으면서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들은 엉뚱한 길로 인도하는 소경된 인도자들(마 23:13)' 아니 그 사기꾼 인도자들에게 분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금하라고 엉터리로 가르치며 협박까지 하면서 정작 오늘 우리가 연보 해야 할,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인, 우리의 이웃들을 향하여는 귀 막고 손 접게 만들었던 그 인도자들에게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을 복채를 챙기는 우상신으로 전락시키는 발람의 후예들이 교회에서 판을 치게 해서는 안되며, 하나님께 돈을 바친다는 샤마니즘적인 관념을 우리들의 머리 속에서 하루 빨리 뽑아 내야 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 하며 그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물론 대부분의 교회들이 어쨌든 많이 헌금된 그 돈을 바르게 잘 쓰고 있으며 특히 이웃을 향한 섬김과 구제의 손길에도 사실은 다른 종교들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통계도 가지고 있습니다. 실지로는 불교와는 비교할 수도 없고 카톨릭 보다도 사실은 개신교가 월등히 더 많은 돈을 나눔과 구제에 지출하고 있습니다. 물론 총액을 기준으로 한 것이기에 가장 돈이 많은 교회가 앞섰고 전체 헌금 중 비율로 따진다면 그렇지도 않지만. 아무튼 그런데 왜 교회는 이웃을 향해 귀 막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평가되고 있겠습니까? 꼭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설교를 통해 선포되는 메시지들의 기복적인 편향성이 그런 인식을 낳은 것 같으며 특히 대형 교회들의 행태가 그러한 문제들의 중심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실지로는 80%에 육박하는 목사님들과 사역자들이 생계의 곤란을 겪으면서 사역하고 있고 대부분의 성도들이 어렵고 힘들게 헌금하고 있는 형편을 보면, 저의 이런 글이 필요할까 싶은 생각을 수 백번도 더 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그렇기 때문에 바르게 밝혀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열심히 헌금하고 있지만 그 열심들이 바른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면(롬 10:2) 결국은 헛되기 때문이며 또 참으로 어렵고 힘들게 사역하는 많은 사역자들에게 바르게 사용되는 연보의 몫이 돌아가서 그들에게 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부자들의 교회가 되어 버린 교회에서, 헌금 많이 못한다는 부끄러움을 안고 그러나 신실하고 소박한 믿음으로 꿋꿋하게 신앙 생활하는, 참으로 작고 소중한 성도들에게도 이제는 바르게 사용되는 연보의 몫이 돌아가서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참으로 잠시나마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해 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예배 잘 드리면 된다고 우기시는 분도 있겠지만 결코 그것만이 아닙니다. 성경이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은혜와 자유의 복음을 소유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헌금과 십일조라는 장애물 때문에 전도의 문이 닫혀 수많은 영혼들을 잃게 된다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무엇보다 '복음'이 온전하게 '복음'으로 선포되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만이 예수의 피로 구속받은 우리의 유일한 소명이며 자랑이며 소망이라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기울어 가는 교회를 바라보며 그 기둥을 다시 부둥켜 안고 세워야 할 소임을 부여받은 작은 목사로서 참으로 잠 못 이루는 밤들을 보내며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답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잊혀진 것, '복음을 다시 복음되게 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비록 정답을 알아도 그 여정이 순탄치는 않겠지만 '복음'이 진정 '복음'되어야 한다는 이 정당성 앞에 무릎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옭아맸던 그 무수한 속박들을 끊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그 자유를 가지고 이제는 예수의 가르침 앞에 순복하는 또 다른 굴종입니다. 그것이 내 힘으로는 될 수 없는 일들이기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아름다운 굴종입니다. 이 복음의 진리 안에서 함께 은혜와 자유와 평강 누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