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클라이버 Anna Kleiber
알폰소.싸르트르 작
정진수 번역
작가
기자 1
기자 2
불평을 토로하는 여인
불평을 들어주는 남자
접수계원
한쌍의 남녀
급사
안나. 클라이버
알프렛 머튼
촬스 - 코헨
프롬프터
배우
베르너
병정 1
병정 2
안나와 동숙하는 청년
댄스하는 남녀군과 병정들
[막] 1 幕 (막)
(이 극은 '바르셀로나'에 있는 가상의 '여인호텔'과 구라파의 여러 도시를
무대로 전개된다. 막이 오르면 무대는 '여인호텔'이다. 때는 성탄절의 늦은
오후, 크리스마스 츄리에는 오색불이 반짝이고 있다. 무대 위에는 쳐들고
있는 신문 너머로 하품을 하고 있는 접수계원과 작가, 기자 1, 2 및 불평을
토로하는 여인과 이를 듣고 있는 남자가 있다. 이들의 대화는 동시에
진행된다.)
[기자 1] 싸스트르 선생님! 내년엔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작가] 에--- 내년엔 두편의 희곡을 써볼 생각입니다. 이미 작품의 구상도
되어 있읍니다.
[기자 2] 사회적인 주제를 다룰 생각인가요?
[작가] 글쎄올시다.
[여인] 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요.
[남자] 이제 그만 진정하구료. (접수계원은 신문을 읽는다)
[기자 1] '붉은 대지'를 상연하실 생각이신가요?
[작가] 나도 모르겠오. 몇 가지 난점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여인] 나는 지꺼리고 싶단 말이요. 그러니 계속해서 지껄이겠어요. 당신은
그저 듣기만 해요. 그뿐예요! (흐느낀다.)
[남자] 쉬--- 좀 조용하구려--- 딴 사람들이 보지 않소. 좀 진정하구려.
(접수계원은 하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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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2] 금년에 상연된 선생님의 작품에 대해서 만족하십니까?
[작가] 네. 그 '주둥아리'라는 작품은 성과가 아주 좋았읍니다.
[기자 1] 그야 여러 층이 있으니까요.
[여인] 뭘 어떻게 진정하란 말예요.
[남자] 자! 여보---
[여인] 당신은 비열한 사내예요.
[남자] 당신 내가 정말---
(접수계원은 머리를 끄덕거리며 존다.)
[기자 2] 연극상 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작가] 전연 실효성이 없읍니다.
[기자 1] 처음으로 상연된 선생님의 작품은 어떤 것이 있읍니까?
[작가] 1945년에 상연된 실험극이었읍니다.
[계원]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집어든다) 네--- 네--- 알겠읍니다. 네
( 전화를 끊고 담배를 만다. )
[기자 1] '마드리드'에서 상연되었나요?
[작가] '마드리드'의 '뻬아트리스 극장'에서 상연되었죠.
[여인] 당신은 날 버리지 못해요. 평생을 살다가 이제와서---
[남자] 하지만 내 입장을 좀 이해해 주구료. 우리집 사람이---
[기자 2] '죽음의 무리' 라는 선생님의 작품을 만족하게 생각하십니까?
[작가] 네.
[여인] 여편네는 욕심덩어리예요.
[남자] 그 사람은 병을 앓고 있소!
(접수계원은 담배를 피운다.)
[기자 1] 그런데 왜 공연이 계속되지 못했읍니까?
[작가] 몇가지 애로가 있었죠.
[기자 1] '바르셀로나'에 오신 목적을 좀 말씀해 주시겠읍니까?
[작가] 몇가지 처리해야 할 사무가 좀 있어서요.
[여인] 그게 저하고 무슨 상관이라도 있단 말예요? 병은 나도 들었어요.
[남자] 집사람은 엊저녁에 발작을 일으켰오.
(한쌍의 남녀가 층계에서 걸어 나온다. 남자가 접수계원에게로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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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1] 아직 미혼이죠.
[작가] 그렇소.
[여인] 아마 술에 취한게죠.
[남자] 술취한게 아니오. 그 사람은 병세가 몹시 위중해요.
[남자] 수고하십니다.
[계원] 안녕하세요? 성탄을 축하합니다.
[남자] 고맙소. 열쇠 여기 있오. 수고하세요.
[계원] 안녕히 다녀 오십시오.
[기자 2] 결혼하실 의향은 없으십니까?
[작가] 그야 두고보면 알게 될테죠.
[여인] 나는 줄곧 혼자 지냈어요. 처량했죠.
[남자] 나도 알고 있오. 허지만 낸들 어쩌겠오?
[남자] 갑시다! 여보. (두 남녀는 팔장을 끼고 출구로 향한다.)
[여인] 비와요?
[남자] 아니. (두 사람 퇴장한다.)
(접수계원은 담배불이 꺼진 것을 알고 성냥을 찾는다.)
[기자 2] 연애를 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작가] 모르겠오. 그저 난---
[여인] 내게 좀 들려요. 난 크리스마스이브도 혼자서 보냈어요. 난
밤새도록 울었어요.
[남자] 알고 있오. 그걸 왜 모르겠오? 아델르. 허지만 난--- 이것참! 나도
걱정이오.
(접수계원은 성냥을 찾아내서 불을 붙이곤 담배를 피우며 다시 신문을
본다.)
[기자] 사랑을 해 보신적은 있으십니까?
[작가] 그런것 같소.
[기자] 개인적인 일화같은 것을 좀 소개해 주시지요.
[작가] 글쎄 그것이--- 기억되는 것이 없소이다.
[여인] 걱정이라구요? 왜 좀 진작 걱정을 하시지 않았어요? 당신이 날
집에서 끌어내어 길바닥에 팽개쳤을 때에 말에요. 난 무엇하나 꺼릴게 없는
버젓한 여자였어요. 나도 떳떳하게 결혼해서 애도 낳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 있었단 말이예요. 그런데 이젠--- 오!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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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흐느낀다.)
[남자] 진정하구려 진정해. 어떻게든 되겠지! 뭐.
[기자 1] 그럼 무슨 재미있는 얘기라도.
[여인] 도대체 날 어쩔 셈이예요!
[남자] 내 생각으론---
(접수계원은 이들 남녀를 흘낏 쳐다본다)
[기자 2] 선생님께선 왜 비극을 쓰십니까?
[작가] 낸들 알턱이 있오.
[여인] 왜 대답을 못하세요? 왜 그렇게 파랗게 질리세요?
[남자] 내 생각엔--- 애를 낳아선 안되겠오.
[기자] 인생을 어떻게 보십니까? 우울하게? 혹은 슬픈 것으로?
[작가] 아뇨. 그렇고 그런거죠.
[여인] 뭐라구요? 난 무서워요.
[남자] 의사한테 가봅시다. 이런일을 처리하는 의사가 하나 있다고 들었오.
[계원] (급사가 거리로부터 들어온다) 다녀왔구나. 춥더냐?
[급사] (손을 부비며) 네! 좀 추운편예요.
[기자 1] 희극을 쓰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작가] 없소이다.
[여인] 절 죽이고 싶은거죠? 그게 소원이죠? 내가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죠?
죽어버렸으면 속이 시원하겠죠.
[남자] 조용히 해! 사람들이 있지않소. 전부 여길 쳐다보고 있단말요.
[기자 2] 그 이유는?
[작가] 나도 모르겠오. 다만 내가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할 수 있는지
의문이요.
[여인] (목소리를 낮추어) 날 버리지 말아요--- 제발 버리지 마세요.---
부탁예요.
[남자] 그럴리가 있오. 난 당신을 버리진 않겠오. 그건 당신의 어리석은
생각일 따름이오.
[기자 1]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작가] 그렇소.--- 어떤 면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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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당신은 절 사랑한 적이 있었죠.
[남자] 그걸 말이라고 하오. (시계를 들여다 본다.)
[계원] 거기 루돌프 있더냐?
[급사] 네. (접수계원이 무엇인가 끄적거리는 동안 휘바람을 불다 그친다)
[기자 2]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작가] 생각 나름이겠죠.
[여인] 내가 젊고 아름다왔던 시절에 당신은 나를 사랑하셨죠? 기억하세요?
당신은 줄곧 내 뒤만 쫓아다니곤 했어요.
[남자] 그렇소.
[기자 1] 가장 싫어하는 비평가라면 누구를 지적하시겠읍니까?
[작가] 지금은 생각이 나질 않는군요.
[여인] 그런데 지금은 모든게 변했어요. 당신은 나하고 있을때면 어떻게
해서든지 빠져나갈 구멍만 찾고 있어요.
[남자] 그런게 아니오. 시간이 늦어서 그래. 그만 가봐야겠오.
[계원] 크리스카스 잘 지냈니?
[급사] 네. 우리 아버지가 약간 저기압이었던 것만 빼 놓곤.
[기자 2] 그러시지 말고 털어 놓으십시오.
[작가] 아! 원! 천만에요.
[여인] 어딜 가시려고 그러세요?
[남자] 애들에게 줄 장난감을 사려고---
[계원] 어제 몇 시에 잤니?
[급사] 세시에요. 식구들도 그때 같이 잤어요. 아주 재미있게 놀았어요.
누나는 술까지 취하고 얼마나 우스웠다구요. 다른 여자들도 전부 담배를
피워대고---
[기자] 왜 다른 작가들이 어리석다고 생각하십니까?
[작가] 방금 얘기했다시피 난 어리석다고 말한 적이 없소이다.
[기자 2] 자꾸 빼시지만 말고 솔직하게 얘기해 주십시요---
(이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막 들어선 여자에게 시선을 향한다.)
[여인] 당신 애들이라구요? 걔네들만 자식이고 내뱃속에 들은 애는 자식이
아니란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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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그 얘긴 나중에 합시다. 나중에 만나서 천천히--- 구체적으로
얘기합시다. 그동안 좀 생각을 해보고 차근차근히 그 문제를 우리 같이
상의하잔 말이요. 아델르 (방금 들어선 여자에게 시선이 쏠린다. 그 여자는
실내를 휘둘러 본다.)
[계원] 지금 시간에 손님이--- (머리를 숙여 새로온 손님에게 인사를 한다)
(안나 클라이버가 거리로부터 들어온다. 피로해 보이는 여인이다. 자그마한
가방을 들고 있다. 들어와 서서 주춤거린다. 곧 쓰러질듯 하며 한 손으로
눈을 가린다.)
[안나] 저 좀 도와주세요. (작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나에게로 다가간다.
접수계원은 접수대 뒤에서 앞으로 나온다.)
[작가] 왜 그러십니까, 부인! 편찮으십니까?
[안나] 아녜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고맙습니다. 들어서는 순간 약간
피로하다고 느꼈을 뿐예요. (안나는 계원의 부축을 받아 접수대로 다가간다.
작가는 로비중앙에 선채 안나를 바라본다. 안나는 접수대로 다가간다. 안나는
접수대에 기댄채 눈을 감고 가만히 있다. 계원은 안나를 쳐다보고 어쩔줄
몰라한다. 작가에게 도움을 청하듯 바라보나 그는 말이없다. 마침내 안나가
눈을 뜨고 입을 연다.) 저--- 방 있나요?
[계원] 네! 부인 숙박부를 기입해 주시겠읍니까?
[안나] 네. (만년필 뚜껑을 열고 쓰려고 한다. 손이 떨린다.) 전---
(자신을 변명하는 미소를 띄운다.) 전--- 약간--- 신경이---
[계원] 제가 대신 기입해 드리죠. 성함은?
[안나] 안나 클라이버.
[계원] (쓴다) 케이, 엘, 아이
[안나] 아녜요. 케이, 엘, 이, 아이 버
[계원] (보여주며) 맞습니까?
[안나] 녜. 맞아요.
[계원] 국적은?
[안나] 스페인.
[계원] 그렇지만--- (미소한다.) 이런 이름을 가지고 말입니까? (그는
미련스럽고 상냥해지려고 노력한다.)
[안나] 아버지가 독일 사람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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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원] 아! 네--- 출발지는?
[안나] 빠리.
[계원] 목적지는?
[안나] 빠리
[계원] '바르셀로나'에 체류하실 생각입니까?
[안나] 글쎄 그게--- 모든 일이 내일이 돼봐야 알겠어요. 아시겠어요?
[계원] 아! 네 그러면 '바르셀로나'로 기입해 두겠읍니다. 아무래도
마찬가지니까요. 그러면 여행목적은? 뭐라고 기입할까요? 상용---? 혹은 사적
용무---?
[안나] 아! 네 사적--- 아무렇게나 하세요.
[계원] (다쓰고 만년필을 돌려준다) 여기에 서명해 주시겠읍니까?
[안나] 네. (싸인한다.)
[계원] 방으로 올라 가실까요?
[안나] 네. 가서 좀--- 쉬어야 겠어요. 내일--- (말을 그친다.)
[계원] 66호실 입니다. (열쇠를 내준다.)
[안나] 아니--- 저--- 다른 방은 없나요.
[계원] 없는데요. 66호실도 좋은 방입니다. 부인.
[안나] 모를 일이예요.
[계원] 가 보시면아주 마음에 드실겁니다. 부인.
[안나] 그런게 아니라--- 이상한 일이군요--- 내가 전에 있던 방도
66호였어요. 66호와는 불쾌한 인연을 가지고 있어요. '베를린'의
'콜로니아호텔'이었어요. 아세요?
[계원] 제가요? 모르겠는데요. 부인.
[안나] 그 때문에 다른방을 달라고 한거예요. 뭐 (실내를 휘둘러 본다.)
상관없어요. 어쨌든 '바르셀로나'에 오게 되어서 다행이예요. 내일이 오면
모든게 달라지겠죠. 기뻐요. 난 한잠도 못잘것 같아요. 내일 아침 아홉시에
꼭 깨워주세요. 아주 중요한 약속을 위해서 평생을 기다려 왔으니까요.
깨워주시겠어요?
[계원] (놀라고 당황한다.) 아, 네 부인. 염려마십시오. (가방을 들고 섰는
급사에게) 66호실을 안내해 드려. (급사를 따라서 안나는 엘리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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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로 가서 탄다. 급사가 문을 닫으면 엘리베이터는 올라간다. 나머지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고 서 있다. 작가는 천천히 파이프의 불을 붙이고
객석을 향해 걸어 나온다.)
[작가] 안나.클라아버는 그 이튿날 약속을 지키지 못했읍니다.
안나.클라이버는 그날 밤 66호실에서 사망했읍니다. 이튿 날 아침 객실문을
열어 보았을 때 그 여자는 침대 위에서 반나의 시체로 발견되었읍니다. 그
여자는 미지의 호텔객실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홀로 가엾게 죽어 갔읍니다.
그 날은 바로 성탄절이었읍니다. 저는 '바르셀로나'에 갔다가 우연히도
기이한 안나.클라이버의 애화를 증언하게 되었읍니다. (접수계원이 큰소리로
기침해다.) 왜 그러시오?
[계원] 아! 아닙니다--- 제 생각엔--- 대단히 실례인것 같습니다만
선생님께서 얘기의 순서를 혼동하고 계신 것 같아서요.
[작가] 뭐라구요? 무슨 말씀이죠? (기자들 사라진다.)
[계원] 죄송합니다만 싸스트르 선생님. 먼저 그 여자의 사망 경위와 그때
우리가 받은 인상부터 얘기하기로 합의한 것 같은데요.
[작가] 아 그렇군요. 시작하시죠.
(남자. 여인에게 작별하고 나간다. 여인 층계로 올라가 사라진다.)
[계원] (관객을 향해서) '여인호텔'에는 수많은 기이한 인물들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사실 안나.클라이버가 성탄절 오후 여기에
나타났을때에도 각별히 독특한 인상을 준 것은 아니었읍니다. 저는 숙박부에
그 여자의 이름을 기입하고는 곧 그 여자의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읍니다.
그것은 저의 버릇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숙박하는 모든 사람들의 일을 낱낱이
염두해 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읍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 방에서 울고
있을지도 모르며 또 어떤 사람은 이런일 저런일을 근심을 하고,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32호 아니면 24호
혹은 120호의 어떤 손님은 자살을 결심하고 있을런지도 모릅니다. 허지만
이런 데까지 일일이 신경을 쓰다가는 돌아버리기 십상이겠죠. 그래서 저는 그
젊은 부인의 일에 대해서도 그 이튿날 아침이 오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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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전혀 생각이 미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작가] 당신은 그 여자의 방에 전화를 걸었었죠.
[계원] 네. 66호실을 바꿔달라고 교환에게 말했읍니다.
[작가] 해 보십시오.
[계원] 네?
[작가] 해보십시오. 그대로 전화를 걸어 보십시오.
[계원] 아, 네. (수화기를 집는다.) 66호실 대줘요. (사이) 받지
않는다구요? 좀 더 벨을 울려요. (사이) 대답이 없어요? 그러면 깰 때까지
계속 벨을 울리고 시간을 가르켜 드려요. (전화를 끊고 작가에게) 지금 보신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몇 분후에 전화가 걸려왔읍니다. (벨이 울린다.) 나는
수화기를 들었죠. (든다.) 뭐라구? 그래요--- 알았어요--- 좀 이상한데요---
(끊는다.) 교환의 얘기로는 수차에 걸쳐 벨을 울렸는데도 여전히 대답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방으로 접객원을 보내고 저도 올라가 봤죠. 문은
안쪽으로 걸려 있고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지배인에게 말씀드리고 마스터키를 사용해서 문을 열기로 결정했읍니다.
실내의 광경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였어요. 선생님께서도 보셨죠.
[작가] ( 객석을 향해 ) 제 방은 마침 같은 층에 있었읍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났었는지 금방 알 수 있었읍니다. 저는 66호실에 가보았읍니다. 거기서
저는 가련한 정경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계원] 그리고 으례 있기 마련인 절차가 따랐죠. 경찰이 오고 심문이
오가고, 약간의 조사가 행해지고,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았어요. 그 가엾은
여자는 연고자도 없었어요. 그 여자는 천애의 고아였어요. 사망을 통지해 줄
사람하나 없었죠. ( 잠시 침묵, 작가는 파이프를 털고는 집어 넣는다. 엄숙한
어조로 말을 한다. )
[작가] 그러나 '바르셀로나'에서 그 여자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있었어요.
[계원] 그 머튼이라든가 하는 친구 말이죠.
[작가] 알프렛.머튼, 알프렛 머튼은 그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알프렛.머튼은 그 여자가 찾아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읍니다. 안나는
빠리에서 기차에 몸을 싣고 이 사람을 만나려고 온 것입니다. 그리고 머튼은
그의 방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읍니다. 그 엄청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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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와 오랜 고통끝에 두 사람은 마침내 영원한 동반자가 되기로 약속했던
것입니다. 알프렛 머튼은 그의 작은 방에서 그 순간까지도 그들을 거부했던
안나와 그 자신의 행복한 결합이 약속된 새로운 생활을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약속한 날은 밝았으나 끝내 안나.클라이버는 그의
방문을 노크하지 않았고, 머튼은 또 한번 실패했다고 생각했읍니다. 그의
사랑은 저주받았다고 생각했읍니다. 그 여자는 약속을 잊어버린 것이라고
믿었읍니다. 그래서 그는 아침신문에서 안나.클라이버라는 여자가 바로 그의
품안으로 돌아오기로 되어 있던 그 여자가 호텔객실에서 사망했다는 기사를
발견하기 직전까지 해도 자살을 결심하고 있었읍니다. (접수 계원에게)
이것은 무엇보다 사랑의 얘기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계원] 네. 정말 그렇습니다. 선생님의 얘기는 아주 훌륭합니다. 저는 거의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어요.
[작가] 장례식이 있던 오후에 우리가 알프렛.머튼을 만난것을
기억하시겠죠. 조객이라곤 우리들 서너사람하고 호기심으로 따라온 웬 낯선
사람 하나 뿐이었읍니다. 날씨는 매우 쌀쌀했죠. 저는 사람들이
안나.클라이버의 관 위에 흙을 덮고 있는 동안 생각에 잠겨 기도를 올리고
있었읍니다. 바로 그 때, 내 뒤에서 한 사내가 울음을 터트렸읍니다. 그는
알프렛.머튼이었읍니다. 그 사람이 우는 것을 보았읍니다.
[계원] 그 때, 저는 가슴이 찡했읍니다. 그렇게 우는 남자를 처음
보았읍니다.
[작가] 그는 마치 상처입은 야수처럼 울었읍니다.
[계원] 그 여자를 지독히 사랑했었나 봐요.
[작가] 그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모조리 그 사랑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계원] (생각에 잠겨) 그런것 같아요.
[작가] 나도 감동을 받았읍니다. 내가 제 정신을 차렸을 때 당신은
가버리고 없더군요.
[계원] 네. 감히 선생님한테 말을 할 생각이 나질 않더군요. 무슨 말을 한
것도 같은데 못들으신것 같더군요. 잘 기억이 나질 않아요.
[작가] 그래서 우리 둘만이 남게 되었읍니다. 그 사람하고 나하고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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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클라이버의 무덤곁에 서 있었죠. 저는 알프렛.머튼의 목소리를
들었읍니다. 그는 안나.클라이버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었읍니다. 저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읍니다. (조명 흐려진다. 깃을 세워 오바를 입고 주머니에 양손을
찌르고 서 있는 알프렛.머튼의 모습이 희미한 스폿.라이트 밑에 나타난다.
그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알프렛] 안나 당신은 가버렸오. 신은 우리의 해후를 원치 않았던 거요.
나는 평생을 두고 당신을 기다렸오. 당신을 꿈꾸었오. 그리고 언제나 당신의
것이었오. 참호속에서도 난 당신을 생각하고 당신을 위해서 울었오. 난
당신이 누구와 사귀든 누구와 키스하든 술에 취하든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나를 위해 눈물로 벼개를 적신 것도 나는 알고 있오. 또 당신이 얼마나
기이하고 그리고 훌륭한 여자였던가도 나는 알고 있오. 당신은 그렇게까지
목숨을 버리려고 자신을 심연 속에 던지려고 애쓸 필요는 없었오. 이제
당신은 모든 것을 떨쳐버렸소. 안나--- 난 왜 그토록 애를 태웠는지
모르겠오. 당신에겐 평화나 고요한 가정따위 애당초 어울리지도 않았던
거요--- 당신은 줄곧 달아났었지--- 그러나 이제 당신은 나의 것이오. 당신은
죽었오. 이젠 안나, 달아날 수가 없오. 당신은 이렇게 내 곁에 있지않오.
모든 것이 새로이 탄생할 날도 머지 않았오. 당신은 더이상 광기를 부릴 수도
없을거요. 그리고 나는 비로소 당신을 완전히 소유할게 될 거요. 그때까지
죽음이 당신을 지켜줄 거요. 죽음과 함께 당신은 평화를 지속할 수 있을거요.
난 이제 당신 때문에 속을 태우지 않아도 되는거요. 당신은 내것이니까. 나
이외엔 아무도 안나클라이버에게 키스할 수 없오. 아무도 당신의 허리를
껴안고 살갗을 어루만질 수 없소--- 잘 자오, 안나! 머지 않아 당신 곁으로
가겠오. (조명이 비치지 않는 쪽에서 작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의
실루엣만이 희미하게 보인다.)
[작가] 나는 그의 팔을 잡았읍니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읍니다. 그는
나를 바라보았읍니다. 나는 그를 데리고 그 자리를 떠났읍니다. 그는 순순히
응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묘지를 벗어날 때까지 그는 침묵을 지켰읍니다.
이미 날도 저물었읍니다. 우리는 카페에 들어가 두잔의 찐을 시켰읍니다.
날씨는 몹시 추웠읍니다. (작가는 이말을 끝내고 알프렛.머튼에게 다가가서
그의 팔을 붙든다. 그는 조용히 돌아다 본다. 그들은 걷기 시작한다. 그들이
다운스테이지를 가로 질러가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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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계원이 테이블과 푸른 갓을 씌운 램프를 갖다 놓는다. 급사가 의자둘을
테이블가에 갖다 놓는다. 작가와 알프렛이 테이블에 다가와 코오트를 입은 채
앉는다.)
[계원] (여기서는 웨이터의 역할을 한다.) 뭘 드릴까요?
[작가] 당신은--- (알프렛 어깨를 으쓱한다.) 나는 찐을 들겠오. 같이
하시겠오?
[알프렛]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작가] 찐으로 둘.
(계원 사라진다. 실내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전축에서 음악이 들린다.
'마드모아젤'이라는 불란서 노래가 연주된다. 알프렛 놀래는 몸짓을 보인다.)
[알프렛] 저게 뭐죠?
[작가] 글쎄올시다--- 잘 모르겠군요--- (귀를 기울인다.) '마드모아젤'
이군요. 아십니까? '면도날'이라는 영화의 주제곡이었죠--- (낮은 목소리로
노래한다.) "날 버리지 마오--- 내 품을 떠나지 마오--- 마드모아젤"
(콧노래로 계속 흥얼거린다.) 좋은 노랩니다.
[알프렛] 듣고 싶지 않아요.
[작가] 듣기 싫으면 꺼달라고 제가 부탁을 하죠.
[알프렛] (여전히 들으며) 아니 괜찮아요. 아무래도 상관없읍니다. (계원이
나타나서 찐을 따라준다. 알프렛은 단숨에 들이킨다.) 이상한--- 일인데요.
저는 빠리에서 이 노래를 들은 적이 있어요. 제겐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는
자리였어요. '날 버리지 마오'--- 이젠 생각이 나는군요. 듣고 있을수록
기억이 점점더 확실해 집니다. 아니에요. 그것은 단지 기억이 아니에요---
(눈을 감는다.) 노래를 듣고 있으려니 그 때가 현실로 되살아 나고 있어요.
나는 안나.클라이버의 허리에 팔을 감고 있었어요--- 그 여자의 아름다운
허리를---
[작가] (한 모금 마신다.) 이상한 일이군요.
[알프렛] 무엇이 말입니까?
[작가] 이 도시 '바르셀로나' 말입니다.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알프렛] 그 여자에 관한 얘기입니까?
[작가] 그렇소. 그런데 어떤 결과가 발생했는지 아십니까? 바로 그
[페이지] 015
여자가 이 도시에 있더라는 말입니다. 아니죠. 사실은 있지 않습니다.
무슨말인지 아시겠어요?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도 그 여자를 상기시켜
주지 않는 것이라곤 없읍니다. 나는 함정에 빠진듯한 기분입니다. 나는
함정을 벗어나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 여자는 어디든지 존재합니다.
'바르셀로나'에 온 것이 후회가 되는군요.
[알프렛] 선생은 마치 우리가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기라도 한 것처럼 제게
털어 놓으시는군요.
[작가] 우리는 어느날 오후, 멀고 낯설은 도시에서 만난 외로운 두
남자입니다. 무슨 얘긴들 못하겠읍니까?
[알프렛] 우린 이미 친구나 다름이 없어요. 저는 선생님의 존함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절친한 친구와 마주앉은 것처럼 편안합니다. 선생과 자리를
같이 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작가] 때로는 명확한 설명이 필요없을 때가 있는 법이죠. 안나.클라이버가
어디서 죽었는지 아십니까?
[알프렛] '여인호텔'에서 였죠.
[작가] 66호실이었읍니다. (알프렛 놀라서 작가를 쳐다본다.)
[알프렛] 확실한가요?
[작가] 저는 같은 호텔에 투숙하고 있읍니다.
[알프렛] 제가 기억하는 66호실이 또 있읍니다.
[작가] 이 도시는 반복시켜 주기 위해서 만들어진것 같군요. 망각이
불가능한 도시입니다. 안나.클라이버도 같은 말을했읍니다. "이상하군요---
제가 전에 살던 방도 66호였어요" 라구요.
[알프렛] 그런 말을 했읍니까? 그 여자가 도착했을 때 거기계셨나요?
[작가] 당신도 조금전에 이런 말을 했었죠. "이상한 일인데요. 전에
빠리에서 이 노래를 들은 적이 있어요. 제겐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는
자리였어요."라고 말입니다. 여기서는 모든 일이 기억을 되살려주고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알프렛] 그 여자가 도착 했을때 계셨나요?
[작가] 그렇소.
[알프렛] 무슨 말을 하던가요?
[작가] 약간 아픈것 같았어요.
[페이지] 016
[알프렛]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가요?
[작가] 이튿날 누구를 만나야 한다고 하더군요.
[알프렛] 바로 접니다.
[작가] 그 약속을 위해서 평생을 기다렸노라고 하더군요.
[알프렛] 그런 말을 했었나요?
[작가] 그렇소
[알프렛] 그 밖엔?
[작가] 아무 말도 없었읍니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올라갔어요.
[알프렛] 그것이 최후였군요.
[작가] 말하자면 그렇죠.
[알프렛] 죽어서 절 만나러 왔군요.
[작가] 있을 수 있는 일이죠. 특별한 경우는 아닙니다.
[알프렛] 적어도 저한테는 그래요. 오늘밤 제가 겪는 고통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읍니다.
[작가] 누구나 각기 자기의 고통을 짊어지고 있읍니다. 이점에 있어서 피차
거의 도움을 줄 수 없읍니다. 난 당신의 고통을 나눠 가질 수는 없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귀를 기울이고 듣는 것 뿐입니다.
[알프렛] 그건 그다지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에요.
[작가] 나는 당신과 같이 마시고 이 밤을 같이 취할 수는 있읍니다. 그것이
내가 당신의 슬픔을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죠.
[알프렛] 감사합니다.
[작가] 나는 울어드릴 수도 있읍니다. 안나.클라이버를 위해서, 잃어버린
사랑을 위해서, 악단이 '마드모아젤'을 연주하던날 밤에 피어올랐던 희망을
위해서---
(침묵. 알프렛 작가를 응시한다.)
[알프렛]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작가] 내가 누구이건 그것은 상관 없읍니다. 그러나 언젠가 당신의 얘기를
쓰겠읍니다. 그리고 안나.클라이버의---
[알프렛] 추악한 얘기도
[작가] 비극적인 얘기죠. (웨이터에게 손짓한다.)
[계원] 부르셨읍니까?
[작가] 두잔 더. (계원 사라진다.) 그 연극은 안나.클라이버가 호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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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 여자는 엘리베이터로 사라지고 로비에
있던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관객을 향해 그날밤 일어난 사건을 설명합니다.
그리고는 묘지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나는 거기서 당신을 발견하고 우리는
자그마한 카페로 갑니다. 평범하며 약간 난잡한 음악이 들리고 당신은 기억을
더듬게 됩니다. (음악 커진다. 계원 찐을 가져온다. 두 사람은 잔을 마주
들고 마신다.) 얘기해 주시겠읍니까?
[알프렛] 관객이 이런 슬픈 얘기에 흥미를 느낄까요? 선생님의 작품은
실패작이 되어버릴텐데요.
[작가] 그건 두고 봐야겠죠. 시작 하시죠.
[알프렛] 한 잔 더하고 싶습니다. (작가의 손짓에 계원이 다가와 잔을
채운다. 알프렛 들이킨다.) 내 이름은 알프렛 머튼입니다.
[작가] 계속 하세요.
[알프렛] 내 이름은 알프렛.머튼입니다. 내가 안나를 처음 만났을 때, 난
철학도였읍니다. 열등한 학생이었죠. 나는 빠리에 살고 있었읍니다.
[작가] 어떻게 해서 그 여자를 알게 되었읍니까?
[알프렛] 어느날 밤이었읍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아침부터
술에 취해 있었죠. 차가운 가을 밤이었읍니다. 그 여자는 다리 위에 가로등
불빛 아래 강물을 내려다 보며 서 있었어요--- (알프렛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작가 . 계원 . 테이블과 의자들은 어둠에 싸인다. 알프렛은 다운 스테이지에
서서 관객을 향해 대화를 하듯 말한다.) 그 여자는 레인 코트를 걸치고
칼라를 세우고 베레모를 쓰고 있었읍니다--- (반대편 다운 스테이지에
알프렛이 묘사한 대로의 차림을 한 안나의 자태가 스폿라이트레 잡힌다. 강을
바라보고 있으나 실상은 관객을 향하여 시선을 주고 있다.) 나중에
생각이지만 내가 그날 밤 그 여자를 무심코 지나쳤더라면 하는 생각을 가끔
해 봅니다. 모르긴 하지만 인생은 지금과는 퍽 달라졌을테죠. 어쩌면
오늘날엔 소박하고 한가로운 지방대학의 철학교수쯤 되어 있을런지도 모르죠.
그러나 난 그여자에게로 다가갔던 것입니다. 인생이란 그런거죠.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읍니다. 애당초 시작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그 기이한 사랑이
말입니다. 이 여자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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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극한적인 무엇을 궁리하고 있는 것일까? 자살? 이 여자는 아직도 젊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난 다가갔읍니다--- (다가가서 안나 뒤에
선다.) 무슨 일이라도 있읍니까? (대답이 없다. 못 들은것 같다.) 초면에
대단히 실례합니다--- 전 그저 지나는 길에 우연히 당신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잠시 얘기라도 나눌 수 있을까요?--- (안나 돌아선다.)
[안나] 가세요.
[알프렛] 저--- 방해를 할 생각은 없읍니다--- 친구와 어울려서 한잔하고
집으로 가던 길입니다. 그저 지나가다 당신을 보고---
[안나] 여보세요--- 가 주시겠어요?
[알프렛] 울고 계시는군요. (사이) 뭔가 심각한 일이 있었나 보죠. 잠시
외로움을 느끼시다 보면 극단적인 생각에 빠질 수도 있읍니다. 어떤 걱정이
있으신지는 저는 모릅니다. 아마 저는 미련하고 주제넘은 바보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다만 그저 지나칠 수 없었던 겁니다. 제가 느낀 인상을
말씀해 드려도 괜찮을까요? 당신은 아마도 무슨일 때문에 고민하고는 있지만
착한 여자일거라고 생각했읍니다. 그뿐입니다. 지금 당장은 도저히 이겨낼것
같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안나 운다.) 우십시오. 한결 기분이 나아질
겁니다 .
[안나] (처절한 목소리로) 전 자살을 하려던 참이었어요. 전 오늘밤 죽고
싶어요.
[알프렛] 그렇다면 제가 마침 잘 온 셈이군요. 이젠 자살을 못하십니다.
[안나] 날 내버려 두세요. 가세요.
[알프렛] 지금은 죽지 못하십니다.
[안나] 가세요.
[알프렛] 저를 따라 오세요.
[안나] 싫어요. 절 내버려두세요. 혼자 있겠어요.
[알프렛] 저하고 같이 있어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안나] 전 오늘밤 몹시 불행해요. 전 지금 대단히 혼란돼 있어요.
[알프렛] 알겠읍니다. 저는 슬픔이란 어떤 것인지를 압니다. 우리 같이
갑시다. 전 한마디도 안하겠읍니다. 방해를 하진 않겠읍니다. 당신은 당신의
일을 생각하고 저는 제생각만 하겠읍니다. 마치 내 자신이 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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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치 않기로 하는 것처럼--- 오늘밤을 같이 보냅시다--- (침묵. 안나
하늘을 쳐다본다)
[안나] 비가 많이 와요.
[알프렛] 네. 저는 비를 좋아합니다. (자기를 잃어버린 듯한 기분으로 )
폭풍까지 불면 더욱 좋아요.
[알프렛] 네--- 바람이 머리칼을 휘날리고 걸음을 옮기기 힘들 정도로 불
때, 바람을 뚫고 걸으면 기분이 상쾌하죠.
[안나] 그래요. (안나는 부드러우나 우롱하는 듯한 투로 알프렛을 본다.)
누구시죠?
[알프렛] 제 이름은 알프렛.머튼입니다.
[안나] 뭐하는 사람이죠? 늙은 학생인가요? 뭘 하시죠? 주정이나 하시나요?
[알프렛] 그렇습니다. 난 열등생입니다. 나는 스스로 무용지물이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렇지만 저로서의 고민도 있읍니다.
[안나] 당신의 고민거리라니 가소롭군요. (알프렛 정색을 하고 안나를
쳐더본다.) 화낼 것 없어요. 저는 당신의 고민이란게 가소롭다고 했을
뿐에요.
[알프렛] 웃으세요. 절 비웃으십시오. 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웃으면 좀
기분이 좋아질 겁니다.
[안나] 우스워요. 무슨 고민이죠? 아빠가 돈을 부쳐주는 것을
잊어버리기라도 했나요?
[알프렛] 그럴지도 모르지요.
[안나] 그렇지 않으면 애인한테 버림을 받았나요?
[알프렛] 전 애인이 없읍니다.
[안나] 그렇지 않으면 창녀하고 연애라도 하나요?
[알프렛] 꼬집으세요. 마음대로 헐뜯으십시오. 전 가만 있겠읍니다.
[안나] 그렇지 않으면 학교에서 낙제를 하셨나요? 우스워요.
[알프렛] (부드러우나 슬프게) 퍽 안됐읍니다. 당신은 제 힘으로는 도저히
도와드릴 수 없는것 같군요. 실례했읍니다. (칼라를 세우고 안나에게서
떨어져 간다. 안나는 돌아가는 그를 보고 겁에 질린다.)
[안나] (소리친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말아요. 어딜 가세요. 가지 말아요.
(알프렛 멈춘다.) 전 무서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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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렛] (멀직이서) 빗줄기가 점점 심해지는군요. 비를 피할만한 적당한
장소를 알고 있읍니다. 저를 따라 오세요.
(안나 따라간다. 알프렛의 팔을 낀다. 스폿트 라이트가 조그마한 테이블을
비춘다. 몇 쌍의 남녀가 희미한 불빛 아래 춤을 추고 안나와 알프렛 자리에
가 앉는다.)
[알프렛] 자살을 하려던 참이었다구요?
[안나] 네.
[알프렛] 그럼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저하고 같이 갑시다.
[안나] 저는 극단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저는 배우였어요.
[알프렛] 누구시냐고 여쭤 보진 않았어요.
[안나] 전 오늘 아침에 그만 두었어요.
[알프렛] 저도 직업이 없읍니다.
[안나] 그 극단의 지배인은 촬스.코헨이란 사람이에요.
[알프렛] 이름을 보니 유태인인가 보군요.
[안나] 네. 어젯밤 그 사람과 파티에 갔었어요.
[알프렛] 그래서요?
[안나] 그 사람이 제게 잔뜩 술을 먹였어요. 그래서 전 만취가 되었죠. 그
작자가 어떤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어요--- 오래 전부터 제
꽁무니를 쫓아다녔으니까요--- 전 알면서도 자꾸 마셔댔어요. 전 제 자신을
잃어버리고 싶었어요.
[알프렛] (슬픔에 싸여) 알겠읍니다.
[안나] 전 아주 외로웠어요.
[알프렛] (얼굴을 찌프린다.) 네.
[안나] 그 늙은 코헨이라는 작자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지만 전 몸을
내맡겼던 거예요. 내가 어느만큼 타락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었어요. 전 그
작자를 애무해 주었어요. 그러나 애무하면 할수록 그 작자가 몸서리가 나게
싫었어요.
[알프렛] 그만.
[안나] 제 이름은 안나.클라이버예요. 저하고 같이 가시겠어요? 이래도 더
사귀고 싶으세요? 안나.클라이버는 저속하고 더러운 것에 매력을 느끼는
여자예요. 그 여자의 내부에는 악마가 들어있어요. (무섭게 알프렛을
노려본다.) 무섭지 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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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렛] 아뇨. 전 그제 제가 아는 한 가엾은 여자를 동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여자의 이름은 안나.클라이버라고 하죠.
[안나] (거칠은 음성으로) 난 누구도 저를 동정해 주기를 원하지 않아요.
[알프렛] 동정이라기보다 오히려 슬픔이죠.
[안나] 슬픔이 아니고 공포겠죠. 저한테 공포를 느낀 남자는 당신뿐이
아니예요. (사이) 오늘아침 전 제 자신에 대해서 구역질을 느꼈어요.
[알프렛] 어젯밤 일을 후회하고 계신거예요.
[안나] 아니예요. 단지 제 자신에 대한 구역질이었어요. 그래서 전 극단을
그만 두었어요.
[알프렛] 당신은 스스로를 구원하신 겁니다. 그건 당신에겐 너무나 참기
어려운 일이었읍니다. 당신같이 착한 사람에겐 도저히 참기 힘든 일이었어요.
[안나] 이번이 처음은 아니에요. 항상 끌려가고 말아요. 내 속의 악마가
나를 붙들고 놔주지 않아요.
[알프렛] 처음이 아니라구요?
[안나] 어리석기 짝이 없으리 만큼 전 동물적인 욕망에 이끌려 제 자신을
수치와 무가치의 타락에 빠뜨리고 타락의 극한까지 줄달음치곤 해요.
[알프렛] 안나.클라이버는 그런 여자이던가요? (안나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안나] 오늘밤---
[알프렛] 전 당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절망한 나머지 스스로의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광기였어요. 고귀한 광기인 겁니다.
[안나] 그렇지 않아요. 그 악마가 시킨거예요. 오늘밤 저는 죽음의
밑바닥에 다달았던것 같아요. 죽음이 저를 잡아 당기는 것 같았어요. 것은
찬란한 현기증이었어요.
[알프렛] 그만해요 안나. 그만 그쳐요.
[안나] 당신도 현기증을 느끼시죠? 당신은 두려운 거예요. 저하고 같이
있음으로해서 두려운 거예요. 다른 사람들도 그런 얘기를 했었죠. 저하고
같이 있으면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것 같다구요. 전 항상 웃어대죠. 그러면
사람들은 얘기해요. "그만해요 그만해. 난 당신이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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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워"그럴땐 전 아주 재미있어요.
[알프렛] 안나, 당신 곁에 있으면 아무도 행복해질 수 없을거요.
[안나] 아무도.
[알프렛] 누구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겐 불행만이 약속되어 있을
뿐이오.
[안나] 그래요. (운다) 그렇지만 진정 제가 소원하는 것은--- 한 남자를
행복하게 해 주고--- 영원히 평화롭게 내 모든 것을 바쳐서 그 사람에게
소속하고--- 그 사람을 위해 죽어가고--- 그 사람의 아이를 품에 안아보는
것만이 진정 아나.클라이버의 꿈이에요. ('마드모아젤'연주된다. 남녀군 춤을
춘다.)
[알프렛] 안나. 난 당신이 나와 결혼하겠다고 말할 때까지 당신을
쫓아다니겠오. 당신을 사랑하오.
[안나] 가세요--- 당신은 아직 늦지 않았어요--- 어서 달아나세요.
[알프렛] 난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당신을 쫓아다니겠오--- 당신이
나와--- (일어난다.) 우리 춤을 춥시다. (두 사람은 찰싹 달라 붙어서
춤춘다. 키스한다.)
- 幕 (막) -
[페이지] 023
[ 막 ] 2 幕 (막)
(전막에서 키스한 채로 있다. 여전히 '마드모아젤' 연주된다. 춤추는
남녀군은 사라지고 없다.)
[알프렛] 나와 결혼하겠다고 말할 때까지 나는 당신의 뒤를 따르겠소.
(안나 알프렛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운다.) 울지마오 안나, 당신이 울고
있으면 난 괴롭소.
[안나] 전 두려워요.
[알프렛] 나도 두렵소--- 어린시절부터 두려움은 내 생활의 가운데 자리를
잡아왔오. 우리는 손을 마주잡고 이 어둡고 악의에 찬 세계속에서 두려움을
극복해 나갑시다. 우리는 더이상 외롭지 않소. 둘이서 살아 나간다는 것
얼마나 좋은 일이오--- 외로운 짐승의 고통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오......
난 그것이 어떤지를 잘 알고 있오.
[안나] 난 두려워요. 당신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해를 끼칠것을
생각하면--- 당신이 나 때문에 고통을 받을 것을 생각하면---
[알프렛] 두려워 할것 없오. 얼마든지 나를 해치구려. 난 아무렇지도 않소.
[안나] 그렇지만 당신은 불행할 거예요. 나 때문에 불행해질 거예요.
그렇게 되면 전 참을 수 없어요. 전 당신을 두고 떠나겠어요.
[알프렛] 난 곧 쫓아갈거요. 당신은 결코 도망칠 수 없을거요. 난 영원히
당신 곁에 머물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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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당신은 지옥에 한 발을 들여 놓았어요. 내 속의 악마는 또 하나의
희생자를 찾아낸 거예요.
[알프렛] (흥분하여) 겁날것 없오. 우린 둘인걸! 우리 둘을 당해낼 수
있을지 두고 보라지.
[안나] 내 곁에 있으면 안돼요. 저를 문둥이로 알고 피하세요. 저는.....
안돼요 안돼! 이 모든 일이 불가능해요. 어리석은 짓이예요. 제가 얘기한 것
말고도 또 있어요. 저는 모두 얘기하진 않았어요.
[알프렛] 또 무엇이 남아 있든지 난 상관없소. 무슨 얘기를 해도 난 겁나지
않소.
[안나] 가세요! 가버리세요! 더이상 당신을 보고싶지 않아요. 이젠 당신이
보기 싫단 말예요!
[알프렛] (격렬하게 안나의 팔을 휘어 잡는다) 안나! 안나! 정신 나갔오!
[안나] 놓으세요.
[알프렛] 여기서 나갑시다. (안나의 팔을 끼고 객석을 향해 말한다)
[알프렛] 우린 카페에서 나왔읍니다. 비도 그쳤읍니다. 우린 걸어서
공원까지 갔읍니다. 야경꾼들이 화톳불을 피우고 있었읍니다. 그 불빛에 비친
안나의 얼굴은 부드럽고 마성적으로 보였읍니다. (붉은 조명이 두 사람의
얼굴에 떨어진다) 그 여자의 전신은 움츠러 들고 내 품에 피난처를 구해
왔읍니다--- (두 사람은 꼭 껴안는다)
[안나] ( 중얼거린다 ) 알프렛--- 편해요. 당신곁에 있으니 이를데 없이
편해요 알프렛--- 전 당신을 깊이깊이 사랑하겠어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알프렛 안나에게 키스한다) 가지 마세요. 이젠 아무데도 가지
마세요. 전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이 없으면 전 끝없이 타락할 거예요.
당신의 억센 힘은 저를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었어요. 저를 버리지 마세요.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떠나지 마세요. (두 사람 포옹을 푼다.
접수계원과 급사가 테이블을 안나앞에 갖다 놓을동안 알프렛은 천천히 다운
스테이지로 걸어 온다. 그들이 의자를 갖다놓고 안나가 자리에 앉자 알프렛은
관객을 향해 말하기 시작한다.)
[알프렛] 팔일간은 꿈결같이 흘러갔읍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나날이었읍니다. 우리는 자그마한 방에서 같이 살았읍니다. 어느날 밤, 제가
집에 돌아와 안나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기 까지는 말입니다. 그 여자
[페이지] 025
는 가버렸읍니다. 한 장의 편지만을 남겨 놓곤 사라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최초의 이별이었던 것입니다. 하나의 이별을 거쳐갈 때마다 제
가슴속에서는 무슨 파편쪼각이 떨어져 나가는것 같았읍니다. 전 아직도 그
편지를 간직하고 있읍니다---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 접은 낡은 편지를
꺼낸다. 안나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 놓는다. 안나는 편지를 집는다)
이 편지를 읽을 때마다 저는 그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습니다. 그
가늘고 처절한 목소리를--- (그대로 선채 듣는다)
[안나] (읽는다) "사랑하는 알프렛! 잘 있어요. 전 더이상 당신곁에 있을
수 없으리만큼 당신을 사랑하게 됐어요. 어떤 슬프고 구역질나는 이유때문에
당신을 떠나야할 때가 오기전에 당신에게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기전에 그리고
제 약한 마음이 우리들의 생활을 지옥으로 밀어넣기 전에 저는 제 자유의지로
당신곁을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저는 고통과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안고
당신곁을 떠납니다. 제가 당신곁을 떠나는 것은 오직 당신을 위하는
생각에서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의 이별은 아름답고 처절하며 저를 아는
사람들은 가장 안나.클라이버다운 짓이라고 말할거예요. 저는 제 행동을
스스로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 지금제 기분은 아주 상쾌하며 이 순간처럼 제
자신을 순수하게 느낀적은 없읍니다. 저는 당신의 조국인 독일로 순회고연을
떠나는 극단에 가입했읍니다. 저는 가는 도시마다 거리마다 당신의 숨결을
기억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알프렛, 저는 두번 다시 당신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세상의 아무것도 이 슬픔만은 달래주지 못할 것입니다.
안녕. 마지막 키스를 드립니다. 안나. 클라이버 올림."
[알프렛] 그러나 저는 그 여자의 일방적인 이별을 용납할 수 없었읍니다.
저는 그 여자를 찾으러 떠났읍니다. 조국인 독일에 돌아와 그 여자의 행방을
뒤쫓았읍니다. 그 당시 저의 조국은 정치적인 분쟁으로 들끓고 있었으며,
'나치'의 세력이 급속히 팽창하고 있었읍니다. 그리고 '히틀러'의 인기는
날로 상승하고 있을 무렵이었읍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저에게 관심 밖의
일이었읍니다. 저의 유일한 관심사는 안나를 찾는 일 뿐이었읍니다. 그리고
경위야 어쨌든간에 저는 안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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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내고야 말았읍니다. 안나가 속해있던 극단은 한 지방 극장에서
통속적인 연극을 공연하고 있었읍니다. (계원과 급사가 분장대를 갖다
놓는다. 안나는 거울앞에 앉아서 분장을 지우고 있다.) 저는 가득찬 불안을
안고 그 여자의 방으로 올라갔읍니다. 안나는 그 방에 있었읍니다. 저는
노크도 하지 않고 방문을 열었읍니다. (분장대가 놓여진 장소에 들어선다)
오랫만이요 안나. 내가 왔소.
[안나] 알프렛!
[알프렛] 그렇소, 나요. 기억하오? 언젠가 내가 평생을 두고 당신을
쫓아다니겠다고한 말?
[안나] 네. (눈을 감는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당신을 떠나온 뒤로 저는
기다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찾아오리라곤
생각지 않았어요. 당신이 찾아오건, 오지않건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어요.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어요. 제가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는 나머지 전 당신이 제 곁에서 저를
행복하게 해 줄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던 거예요. 그동안 저는 훌륭하게
살았어요. 전 제가 오래전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어린시절을 되찾았어요.
'마드리드'의 공원에서 뛰놀고, 이웃 사람들이 저를 가리켜 저 독일아이는 참
귀엽게 생겼어 하며 귀여워 해주던 어린아이로 돌아간 거예요. 착하고 소박한
아이로 돌아온 제가 대견스럽지 않아요, 알프렛?
[알프렛] 내일 여기를 떠납시다. '뒷셀도르프' 에 가서 어머니 한테 당신
선을 뵈드려야겠오. 그리곤 마을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립시다. (안나
물기어린 눈으로 알프렛을 바라본다) 나와 같이 가겠오?
[안나] 네. (퉁명스럽게 돌아서서 Aacting area를 빠져 나온다. 안나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알프렛 관객에게 얘기한다.)
[알프렛] 그 여자는 동의했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은 거행되지
않았읍니다. 그날 밤 우리들 앞에는 수분전 까지만 해도 전혀 예측하질
못했던 가공할 일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앞에 마련된
최악의 시련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저는 바로 안나의
분장실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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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읍니다. 공연이 끝나고 그 여자와 같이 그 여자의 방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읍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잠시 후
살해되리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채 말입니다. ( 알프렛 안나에게로 돌아가서
먹기 시작한다. 노크소리. 안나와 알프렛 마주본다. )
[안나] 들어오세요. (촬스.코헨이 불켜진 장소에 들어선다. 키가 훤출하고
뚱뚱하며 입가에 웃음을 흘리고 다닌다)
[코헨] 안나! 잘 있었오? 이거 참 반갑구려.
[안나] 촬스---
[코헨] 여기서 날 만나게 돼서 놀라지 않았소?
[안나] 난 몰랐어요---
[코헨] 난 극단을 이끌고 순회공연을 하던 중이었는데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소식을 풍문에 듣고 이렇게 만나려고 달려온거요.
[안나] 이제 절 만나셨으니 돌아가세요.
[코헨] 안되지, 안나. 당신과 얘기나 하면서 하룻 저녁을 즐길
생각이었는데, 이거 우리 얼마만이더라 그러니까--- 맞았어. 그날밤 본게
마지막이었군 그래. 안나 ! 당신은 왜 극단을 그만 두었오? 당신이 떠난 뒤로
우리가 얼마나 섭섭했는지 아오?
[안나] (안절부절하며) 알프렛.머튼씨를 소개하겠어요. 이분은 저의 전
지배인 코헨씨예요.
[코헨] 이거 참 반갑소. 젊은 양반. (손을 내민다. 알프렛 손을 잡지 않도
가만히 앉아 있다.) 안나는 정말 대단한 여자요. 변덕장인데다가,
외고집에다가 정말 놀라운 여자이지. 그래서 사람들이 안나를 좋아한다오.
내키기만 한다면 누구나 재미있지만, 때로는 고양이처럼 발톱을 들어낸다오.
우리 단원치고 안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 내말 알겠소? 안나는
사람들에게 사치스럽고 요란한 옷차림에다가 변덕쟁이며 반 미치광이로
통하지요. 하지만 난 그런 이면에 안나가 얼마나 상냥스러운 여자인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오.
[안나] 촬스, 제발 좀 그만 두세요.
[알프렛] (냉정하게) 아니, 난 더 듣고 싶소. 재미 있는데. 이분은 당신의
초상을 아주 훌륭하게 그리고 있소. 안나가 얼마나 상냥한 여자인가 하는
대목까지 말씀하셨소.
[코헨] 우리는 삼년동안 함께 블란서의 극장들을 순회했었죠. 그 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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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은--- 기억하오? 아, 참 아메리카에 순회공연을 간 적도 있었지.
생각나오 안나? 그땐 정말 신바람이 났었지. '부에노스아이레스',
'산디에고', '칠레'
[알프렛] 당신이 아메리카에 갔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데.
[안나] 갔었어요. 넉달동안.
[코헨] 옛추억이 새로워지는데. 당신이 그때 입버릇처럼 하던 얘기
생각나오? 우리는 인생을 사랑한다고. 정말 그랬지. 당신은 모든것을
신기하게 여겼고 꼭 끝장을 보고야 말았거든. 어느날 밤, '보카'에서의 일이
생각나는군. 우리는 얼큰했었지. 정말 곤드레 취했더랬으니까. 그리고 우린
새벽무렵까지 클럽에서 탱고를 추었오.
[안나] (침묵을 간청하는 듯한 목소리) 촬스---
[코헨] 젊은 친구, 당신이 안나와 사귀고 싶어한다면, 난 진심으로
축하하겠소. 정말 훌륭한 여자요! 사내치고 탐을 내지않는 녀석은
없었으니까. 그렇지 않소 안나! 뭇 남성들이 꽁무니를 줄줄 따라 다녔지.
그런데도 당신은 그들을 우롱하기만 했었어. 그 독특한 스타일로 말이야. 난
안나의 그런 스타일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어. 인생을 속속들이 아는 여자가
아니고는 풍길 수 없는 스타일이야. (안나는 자포자기로 주저앉는다)
[알프렛] 무수한 남성들을 우롱하고 다녔다구? 하지만 그 자식들은
행운아인 셈이군.
[코헨] 그 자식들이라니? 안나에게 그런 모욕적인 언사를 하다니, 안나
그래 이런 소리를 듣고도 가만있소? 안나는 털끝만큼도 비난을 살 만한 짓을
하지 않았소. 적어도 우리 연극인들의 윤리관에 비추어 말이요. 젊은 양반,
우린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시오. 당신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는거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오. 인테리겐차나 뭐 그쯤 된다고
합시다. 그러나 딴 세계의 사람이 우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애당초 가망이
없는 일이요. 당신네 부르조아가 우리의 하황방탕한 생활의 아름다움이나
자기 희생 그리고 죄의식을 이해한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일이요. 당신은
안나를 질책할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는거요. 안나는 어질고 언제나
초연하고--- 그리고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면 아무런 댓가도 요구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바치는 그런 여자라오. 그것이야말로 안나. 클라이버가 경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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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여자로 불리우는 이유이기도 하지. 오, 안나는 친구를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목숨까지도 내버릴 수 있는 여자라오. 내 말의 뜻을 조금이니마
알아듣겠소? 듣고 있소? 이런 얘기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 말이오?
[알프렛] (냉정하고 창백하게) 알았으니 그만 나가 주시오.
[코헨]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요. 안나 당신은 그래---
[알프렛] 나가 주십시요.
[코헨] 안나! 말 좀 해 보오. (안나는 듣지 않는다)
[알프렛] 나가지 않으면 죽여버리겠소. (테이블 위의 칼을 집어든다) 내
신경이 지금 곤두서 있소. 만일 나가지 않는다면 정말 가만 두지 않겠소.
[코헨] 이러지 말고 그 칼일랑 내려 놓으시지. 바보같이 굴지 말고.
[알프렛] 나가! ( 코헨 신경질적으로 웃어댄다. )
[코헨] 이러지 말래두, 거 무슨 농담이오--- (웃어댄다.) 농담이 좀
지나치지 않소.
[알프렛] 당신이 하는 짓이 하나같이 보기 싫소. 난 당신을 죽여버리고
싶소. (코헨 여전히 웃는다.) 어디 마음대로 웃으시지. 웃을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테니가.(코헨에게로 다가간다. 노려보자 코헨은 웃기를
멈춘다)
[코헨] 잠깐, 정신 나갔어. (물어선다. 테이블을 짚고 손이 칼에 닿자 움켜
잡는다.) 그만두지 못해. 바보같은 수작은 집어 치우시지. (알프렛
코헨에게로 달려들어 두사람 칼부림 끝에 알프렛의 칼이 코헨의 배에 꽂힌다.
코헨은 바닥에 쓰러진다. 알프렛 꼼짝않고 서 있다. 안나, 앉은채 그대로
있다.)
[알프렛] (갸날픈 목소리로 겁에 질려) 안나.
[안나] ( 움직이지 않고 ) 일을 저지르셨군요.
[알프렛] 사람을 죽였소.
[안나] 그 사람은 그저 별다른--- 죽일것 까지는 없었어요.
[알프렛] 이제 어떡하지? (문 두드리는 소리. 알프렛 낮고 겁에 질린
목소리로) 가만 있어---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해야 해. 조금 있다가 몰래 빠져
나갑시다--- (몸을 떤다)
[안나] (노골적인 경멸의 시선을 준다.) 몹시 겁이 나시는가 보죠. 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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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하시는군요. 태연한 척이라도 하세요. 어울리지 않아요.
[알프렛] 내 정신이 아니였소.
[안나] 그런것 같았어요. (문을 연다. 프롬프터가 서 있다. 안경을 쓰고
깡마른 이상한 사내이다)
[프롬] 미스 클라이버---!
[안나] 들어오세요. (들인다. 시체를 보여준다.)
[프롬] 촬스.코헨이로군요.
[안나] 네. 죽였어요. 경찰을 부르시지요.
[프롬] 그럴 생각은 없소.
[안나] 무슨 말씀이죠?
[프롬] 그럴 필요는 없소. 누가 죽였소?
[알프렛] 접니다. 사고였읍니다. (몸을 떤다)
[프롬] 코헨은 당의 숙청대상이였소--- 우리를 미워하는 유태인이기
때문이죠.
[알프렛] 뭐라구요? 무슨 말씀이죠?
[프롬] (광신도적인 말투는 더욱 야릇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저는 민족
사회당의 당원입니다. 아돌프.히틀러가 우리의 영도자이시죠---우리는 최후의
승리가 올 때까지 투쟁을 계속할 것입니다.
[알프렛] 최후의 승리가 올때까지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프롬] 우리가 권력을 장악할 때까지 말이요. 그땐 우리를 미워하는
유태인들이 공포에 떨 것입니다. 나를 따라 오시오. 두려워할 필요는
없읍니다. 우린 지금도 세력이 강하답니다. 그렇지만 아무일도 없을거요.
당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선--- 오히려 축하를 드리겠소. 이것을 같이 좀
운반합시다. 극장밖으로 끌어내야 하오.
[알프렛] 누가 보면 어떡하죠.
[프롬] 모두 가고 아무도 없읍니다. 거리는 조용합니다. 좀 거들어 주시오.
(그들은 코헨의 시체를 들고 나간다. 안나 혼자 남는다.)
[안나] (생각에 잠긴다. 손이 떨린다.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얘기한다
) 그인 겁쟁이에요. 계집애처럼 파들파들 떨고 있었어요. 그인 코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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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막기 위해서 살인까지 저질러야했어요. 코헨의 얘기를 듣는것이
겁이났던 때문이죠. 사내답게 태연히 들을 수 있는 용기가 없었던 거예요.
그인 저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있거든요. 그래요. 코헨의 얘기는 모두
사실이었어요. 그러니 어쨌다는 거죠? 저는 그 따위 코훌쩍이 청교도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 우리 마을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립시다 "?
그런 교회같은 건 자기나 실컷 다니라지. 나는 나하고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으로 만족해. 타락과 광란의 세계! 난 그 세계가 좋아.
구역질나긴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해서 누가 비난할 자격이 있느냐
말야? 아무도 없지. 안나는 뭐든지 제맘대로 하는 여자라고. 안나는 바로 이
세계의 일부인 걸. 아름다운 추억이지--- 그 옛날 배우들의 카페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으례 " 저기 가는게 안나.클라이버가 아닌가? " 하곤 수군대곤
했었어. 세상에 어느 녀석이 우리를 이해할 수 있단 말이야? "어머니한테
선을 뵈드려야겠소"? 그깟 선 누가 본댔나? 나는 나야! 나는 이대로가
좋단말이야. 내가 속할 곳은 진정--- 진정 여기 뿐이란 말야. (울음을
터트린다. 알프렛 돌아온다.)
[알프렛] 안나.
[안나] 왜 그러세요.
[알프렛] 이젠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소.
[안나] (아이러니칼하게) 정말이세요?
[알프렛] 그 친구가 적당히--- 칼을 치워버리겠다고 했소. 그리고 여기---
핏자국도 없지않소. (방안을 휘둘러 본다) 싸운 흔적도 안보이는데. 그리고
코헨이 이리로 오는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오. 이젠 염려할 것 없오.
[안나] 어디다 치웠어요?
[알프렛] 저 강물에 던졌소 극장뒤로 강이 흐르더군. 그런데--- 그 사람
이름이 프롬프티라고 하던데 누구요?
[안나] 히틀러 광신자예요.
[알프렛] 알고 있소. 그런데 어떤 사람이오?
[안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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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렛] 보건데 좀 미친것 같았소.
[안나] 그런지도 모르죠.
[알프렛] 오늘 저녁은 모든게 무섭기만 해. 어쩌다가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어.
[안나] 저도 그 점은 이해가 안돼요.
[알프렛] 그저 입을 막으려고 했을 뿐이오.
[안나] 저도 봤어요.
[알프렛] 그 작자가 당신에 대해서 그렇게 지껄이는 것을 참을 수 없었소.
[안나] 어떤 투였는데요?
[알프렛] 뻔뻔스럽고 건방진 태도였잖소.
[안나] 그저 지난 얘기를 했을 뿐인데요.
[알프렛] 안나!
[안나] 즐거웠던 옛시절을 회상했을 뿐이죠.
[알프렛] 즐거웠던 옛시절이라구!
[안나] 네.
[알프렛] 당신은 내 비위를 건드리려는 거지. 화를 내고 있는거지.
[안나] 전 사실은 당신을 그다지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알프렛] 안나!
[안나] 난 당신 없이도 얼마든지 편안히 살 수 있어요.
[알프렛] 무슨 소리요.
[안나] 나가세요. 옷을 갈아 입어야 겠어요.
[알프렛] 안나,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안나] (피로한듯) 나가 주시겠어요.
[알프렛] 싫소.
[안나] (피로한듯한 몸짓을 하고 옷을 벗기 시작한다. 속치마 바람이
되었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들어오세요.
[알프렛] 아니, 속옷바람으로 사람을 들일 생각이요?
[안나] (좀더 크게) 들어와요. 그런건 상관없어요. 우리는 수치라는걸
몰라요--- 그 늙은 프롬프티의 순진성을 더럽힐까봐 그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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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렛] 안나. (프롬프티 들러온다. 안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얘기를
한다. 안나는 여전히 옷을 갈아입는다)
[프롬] 이제 다 끝났소--- 복잡한 문제도 없어졌고--- 완전무결하게
해치웠소. 이제 남은 일은 당신 문제뿐인데, '베를린'의 당수를 찾아가면
되는거요. 내가 편지를 써 드리겠소--- 지금 써 드리죠--- (앉아서 펜을
꺼낸다)
[알프렛] 당수를 찾아가라구요!
[프롬] 그렇소. 우린 당신같은 젊은이가 필요하답니다. 당을 위해서 유능한
일꾼이 될거요.
[알프렛] 하지만 전 가고싶지 않은데요.
[프롬] (침착하게 편지를 쓰고 있다.) 가셔야 합니다. 당수를 만나십시요.
크게 환영받을 것입니다--- 코헨을 죽인것으로 훌륭한 입당자격을 갖춘
셈이죠.
[알프렛] 제가 꼭 가야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선생께서 저를 도와
주신것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하지만 뒷처리를 끝냈으니까 경찰에
발각될 위험도 없고---
[프롬] 위험은 아직도 남아 있읍니다. (계속해서 쓴다.)
[알프렛] 우선 시체를 찾아내야 할 것이고--- 조사를 시작하겠죠. 그렇지만
그때쯤이면 전 여기를 빠져 나갈테고---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프롬] 알아낼 수 있읍니다.
[알프렛] 어떻게요?
[프롬] (잠깐 쓰는것을 중단하고) 내가 고발하겠읍니다.
[알프렛] 당신이!
[프롬] 그렇게 어렵게 생각지 마시구료. 우린 당신같은 젊은이가
필요합니다. 가시겠소?
[알프렛] 싫소!
[프롬] 그럼 안됐지만 경찰을 부르겠소.
[알프렛] 이 더러운 배신자 같으니!
[프롬] (부드럽게) 오늘밤 '베를린'으로 떠나십시요. 행운을 빌겠오!
(어깨를 두드린다.) 그저 당의 지도자들을 만나기만 하면되는거요. 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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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버양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소? 우린 내일 '브레슬라우'로 가서 이주일
동안 머물게 될거요. 그러면 우린 이틀후에 거기서 다시 만날 수 있을거요.
어떻소? 여기 편지있소. 그만 가보겠오. 잘자요 미스 클라이버! 아 ~ 그리고
내일 아침엔 일곱시에 출발합니다--- 하마트면 잊을뻔 했오. 일곱시
잊지마십시오--- (나간다. 안나와 알프렛만이 남는다.)
[알프렛] 어떡하지?
[안나] 가세요. 다녀오시면 되잖아요.(약간 아이러니칼하게) 가서 마나기만
하면 된다지 않아요. 그리고 편히 쉬면서--- 보호를 받아 안전해지면 행복해
질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은 살아가는데 안전하고 확실한 것이 필요해요. 가서
찾아보세요, 저는 이도시에서 저도시로 방황하겠어요---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겠죠. (미소짓는다) 그것이 제 인생이예요. 자,
베를린으로 떠나세요.
[알프렛] 곧 돌아오겠소.
[안나] 물론이죠.
[알프렛] 내가 간다고 화내는건 아니겠지?
[안나] 아뇨. 제가 왜 화를 내죠.
[알프렛] 그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어떤 친구들인지를 모르겠는데--- 어쨌는
그 쪽이 경찰에 잡혀가는 것보다는 나을테지. 이틀이면 된다니까 다녀
오겠소.
[안나] 그러세요. 오실 때는 미리 연락하세요. 분장실에서 지방 한량들과
어울리고 있을때 만나는건 싫으니까요. 우리 순회극단이 도착하면 쭉 뻗은
한량들이 으례껏 여배우들 주위에 모여들거든요. 갖은 아첨을 다떨고 나선
우릴 밖으로 초대하죠. 그럼 우린 따라 나가요. 그래선 아무런 부담없이 피차
즐기곤 하죠.
[알프렛] 안나 무슨 농담을 하는거요--- 난 이해할 수가 없오.
[안나] 제가 두려운것도 바로 그 점이예요. 당신이 저를 이해할 수
없다는것 그런 얼굴로 쳐도보지 마세요, 웃음이 나올려고 한다니까요. 당신
표정이 아주 희극적이예요.
[알프렛] 안나 '브레슬라우'로 가겠소.
[안나] 그러세요. 기다리겠어요. 알프렛 빨리 오세요. (묘한 웃음을 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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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며) 당신없인 못산다는 것 아시죠.
[알프렛] 잘 있소 (나간다.)
[안나] 알프렛!
[알프렛] 왜?
[안나] 이대로 가시는 거예요?
[알프렛] 이대로라니?
[안나] 오늘밤 제가 묵고 있는 여관방에 당신하고 같이 들어간대도 놀랄
사람은 없을거예요. 으례 그런 여자려니 하니까요. 오늘 밤 같이 지내요.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시체를 그렇게 금방 찾아내진 못할테니까요.
[알프렛] 당신 무슨 소리를 하는거요? 난 사람을 죽였단 말이요. 오늘밤
(부르르 떤다.) 난 살인을 저질렀소. 그런데 당신은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고 농담을 지껄이다니.
[안나] 놀라셨어요? 저를 아직 모르셨던가요? 저는 아주 냉정하거든요.
그것도 모르셨어요? 알프렛 이대로 가지마세요 (바라보며) 키스해 주세요
(알프렛, 움직이지 않는다) 지난 날들이 생각나는 군요. 황홀했던
일주일이였어요. 그때처럼 행복한 적은 없었어요 (눈을 감는다.) 뭘 하시는
거예요? 어서 키스해 줘요. 어디 계세요. 이렇게 기다리고 있잖나요? 겁내지
마세요. 예의 바르고 정직한 양반, 겁낼것 없어요. 저를 생각하기조차 마세요
그저 당신은 갈보집에 있거니 생각하세요. 그리고 전 천하고 보잘것 없는
창녀거니 그것도 과하면 언젠가는 그렇게 될테지만 더러운 똥갈보려니
여기세요. (알프렛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고 방을 나간다. 안나 눈을 뜬다.)
알프렛 (대답이 없다. 처량한 얼굴. 담배를 붙여 물고 스타킹을 신는다.
알프렛 무대 한쪽에 나타난다.)
[알프렛] 그날 밤, 저는 안나에게서 도망쳤읍니다. 그 이상한 여자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대신 저는 뛰쳐 나왔던 것입니다. 후에 깨달은 일이지만 그
당시 제가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한 공포는 사실은 그 지옥에서 탈출하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읍니다. '베를린'에서 저는 안나를 잊어버리기 위해서
일부러 바쁘게 지냈읍니다. 저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돌아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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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은 욕망이 끓어올랐읍니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다른 일거리를 통해서 분산시키곤 했읍니다. 저는 - (슬픈 미소를 지으며)
'베를린'의 당 지도자들을 만났읍니다. 그들은 이상하고 열광적인
젊은이들이었읍니다. 저는 그들의 투쟁에 가담함으로써 안나에게서 저 자신을
해방시켰읍니다. 그것은 제가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읍니다. 저는
안나에게 돌아가지 않았읍니다. 그 시기에 안나는 어떤 생활을 영위했을까요?
나중에야 알수 있었읍니다. 그리고 전 관대하지 못했던 저 자신을 무한히
질책했읍니다. 왜냐하면 안나는 저를 필요로 했었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안나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평생 비겁한 사내였읍니다.
어느날 안나는 제게 그런말을 했읍니다. (안나가 반대편 다운 스테이지에
나타난다. 알프렛을 보지 않고 말한다.)
[안나] 알프렛! 당신은 일평생 비겁한 사내였어요.
[알프렛] 안나! 나를 용서해 주구려. 당신은 무엇이든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소.
[안나] 저는 '브레슬라우'에서 당신을 기다렸고, 당신은 오지 않았어요.
저는 당신때문에 퍽 걱정을 했어요. 프롬프티는 아무것도 모르더군요. 저는
당신에게 무슨일이 일어난 줄 알았어요. '브레슬라우'에서의 공연도 끝나고
극단은 다른 곳으로 떠났어요. 우리가 지나는 곳마다 당신이 오기를
고대했어요. 끝내 당신은 오지 않았구요. 저는 미칠것 같았어요. 그래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요. 안나.클라이버는 알콜의 신비를 탐험하고 싶었던 거에요.
알콜속의 비밀이란, 그 술병밑에 감춰진 신비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엄청난 유혹이었어요. 저는 제 자신을 송두리채 바쳤어요. 동료배우들은 제가
어떤 꼴로 무대에 등장하는지를 잘 알죠. 스캔들이 퍼지기 시작했어요.
심지어는 동료들마저 저를 수치스럽게 여겼어요. "안나 제발 술 좀 작작 마실
수 없어? 그게 얼마나 흉한 것인지나 알아? 그러다간 언제고 죽고 말거야"
이런 말들은 저의 주벽을 북돋우어 주었을 뿐이예요. 아시겠어요?
죽는다는것, 그것은 오랜 꿈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런식의 비열한 죽음,
술에 골아떨어진 여자, 그것은 추악한 것이겠죠? '에드가.알란.포'의 소설에
이런 얘기가 있죠. 알콜의 황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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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경지, 그는 알콜에 의한 정신착란으로 발작을 일으켜 죽었대요. 저는 그
정신착란에 퍽이나 매력을 느꼈어요. 저도 해보고 싶었어요. 저는 그 발작이
일어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어요. 정신착란 상태에서 흔히 나타나는 기괴한
야수들이 제주위를 방황하는 것을 보고 싶었어요. 저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어요. 내 생명을 소모하는 것, 내 생명을 불태워 버리는 것.
저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했던 거예요. (이상하고 소름끼치는 웃음을
터트린다.) 이것 봐! 늦진 않았겠지. (막 등장한 배우를 향해 말한다.) 날
제쳐놓고 너희들끼리 공연을 시작한다는 건 있을 수 없지. 암 날 빼놓고 막을
올린다는건 있을 수 없어. 나한테 그따위 더럽고 시시한 배역을 주다니 나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단말야! 아무래도 난 좋아. 내겐 제일 짧고 시시하고
슬픈 역을 줘. 그게 나한텐 어울리거든. 난 다른 사람들하곤 틀린단 말야.
(웃어댄다.)
[배우] 안나! 또 술을 마셨군 그래.
[안나] 또? 또라니, 난 항상 마시지. 아유 우스워, 웃기는 얘기 말라구.
우스워 죽겠어. (웃어댄다.)
[배우] 얘길 못들었군 그래. 공연은 끝났어. 등장시간 직전에 대역을
썼다구. 안나, 베르너씨가 좀 보재.
[안나] 베르너씨 따위가 뭐란 말야!
(스폿라이트가 책상앞에 앉아 있는 베르너를 잡는다. 안나, 그에게
다가간다.) 안녕하신가요, 베르너씨! 무슨 일이죠? (베르너 고개를 든다.)
[베르너] 오늘부로 당신과의 계약을 해약합니다. 여기 지난 주 봉급이
있으니 가져가십시요.
[안나] 제가 겁날 줄 아세요.
[베르너] 내가 알바 아닙니다. 나가 주십시오.
[안나] 저하고 얘기하고 싶진 않단 말씀인가요? 제가 취했다고 생각하세요?
[베르너] 천만에. 당신 기분을 상하게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원하신다면 다음에 얘기합시다.
[안나] 저를 멸시하시죠? 저를 내쫓으시려는 거죠. 전 당신이 구역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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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난 그런말을 한적 없오. 단지 당신과의 계약을 취소한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오. 당신을 도와드리고 싶었소. 난
당신의 재질을 인정합니다. 당신은 훌륭한 배우가 될 소질이 있오. 그러나
우리 극단은 더이상 당신을 고용할 수 없게 되었오. 당신의 행위는 고려의
여지가 없소. 연극은 최대의 수련과 진지성이 요청되는 예술이오. 사명감과
헌신이 뒤따라야 하는 겁니다. 때로는 그렇게 보일런지 모르나 결코 건달이나
부랑자의 집단은 아닙니다.
[안나] 훌륭한 설교예요. 베르너씨. 정말 배꼽을 잡게 하시네요.
[베르너] 내게 어떤 불만이 계신진 모르지만 난 항상 매사에 공정을
기해왔읍니다.
[안나] 당신은 우리들 모두를 경멸하시죠!
[베르너 미스 클라이버! 내 생애에 꼭 한가지 실수가 있었다면 그것은 내가
연극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점일거요. 나는 연극하는 사람들과는 공통된
구석이 하나도 없소. 벌써 수십년이 됐지만 난 아직도 배우들틈에 섞이면 나
자신이 이방인같은 느낌을 면치 못합니다. 난 한번도 당신네들을 이해하는데
성공한적이 없소.
[안나] 그 이유를 가르켜 드릴까요? 당신은 자신의 과거때문에 우리를
증오하는 거예요!
[베르너] 그만 두시오.
[안나] 당신의 부인께서 여배우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시죠? 당신이 우리를
증오하는 것은 바로 그 여자때문이죠?
[베르너] 닥치시오!
[안나] 저는 쫓겨나는 신세예요. 이 기회에 진상을 밝혀놓겠어요. 제 말을
들으세요.
[베르너] (일어난다.) 나가 주시오.
[안나] 그래요! 부인께선 어떤 배우하고 눈이 맞아서 달아났죠. 연극하는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당신은 그 사실을 용서할 수 없는거예요.
[베르너] (창백해져서) 나가지 못하겠소?
[안나] (웃어대며) 아, 베르너씨가 화를 내실때도 있던가요? 당신이
여배우들에게 불친절한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 웃는다. )
세상이 다 아는 일인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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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나가! 어서 나가!
[안나] 나가겠어요. 우스워요. 안녕히 계십시요.
[베르너] (앉으며 맥을 풀며) 안녕시 가시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조명 꺼진다.)
[안나] 드디어 저는 평화롭게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었어요. 아무의 방해도
받지않고 실험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던 거죠. 남은 돈을 꾸려 가지고 저는 '
베를린 ' 으로 갔어요. 저는 어떤 의상실에서 모델로도 일했지만 또 쫓겨났죠
- 모든 직업이 제겐 너무 고상해서 걸맞지 않았던 거예요. 그 뒤론 직장을
구할 생각은 단념하고 그럭저럭 되는대로 살았어요. 당신이 정치라는 것에
휘말려 있을동안 전 그렇게 지냈어요.
[알프렛] (여태까지 꼼짝않고 서있던 자리에 그대로 서서) 한번도 당신을
잊은 적이 없었소.
[안나] 당신은 내게 있어서 먼 꿈이거나 군데군데 헤어진 추억이 되었어요.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당신의 모습을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한번도성공하지
못했어요. 저는 발작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술을 마셨어요. 저는 병원으로
끌려 갔어요. 거기서 끔직한 몇 밤을 보냈어요. 공포와 고통에 찬 야수같은
울부짖음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곳이었어요.
[알프렛] 내가 당신을 찾아 냈을때, 당신은 형편없이 여위고 핼쓱해있었지.
[안나] 그래요. 자기파괴의 오랜 과정끝에 생성된 흉한 여자가 되어
있었어요.
[알프렛] 우리가 만난것은 우연이었다고 기억하오? 공원이었지. 화사한
봄날의 '티르가르텐' 은 정말 아름다웠소.
[안나] (웃는다.) 내가 당신을 발견한 순간 웃음을 터트렸던 것 생각나요?
[알프렛] (따라 웃는다.) 그래 제복을 입은 내 모습은 내가봐도
우스꽝스러웠지.
[안나] 우리는 같이 허리를 잡고 웃었어요.
[알프렛] 그간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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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마치 우리가 숨바꼭질이나 하다가 모퉁이에서 마주치기나 한것처럼.
[알프렛] 무엇에 놀라서 서로 부여안기라도 한것처럼.
[안나] 철없는 두 어린애들처럼.
[알프렛] 마치 우리가 금방 태어나기라도 한것처럼. 그래서 우리를 괴롭힐
아무런 과거도 없었던 것처럼.
[안나] 쓰라림도 고통도.
[알프렛] 그리고 아무런 설명도 필요 없었소. 아무도 서로를 정당화할
필요도 없었소.
[안나] 우린 다시 만났어요. 우리가 다시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다른것은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졌어요.
[알프렛] 우리는 웃으면서 서로를 포옹했소.
[안나] 당신은 마치 우리가 불과 몇 시간전에 헤어졌던 것처럼 "안녕 안나"
라고 말했죠. 당신이 그처럼 기쁘고 쾌활했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알프렛] 나는 우리가 그때 처음 만났다면 좋았을거라고 생각했소.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불행했던 것도 우리가 불길한 순간에 만났던 때문이라고
생각했소. 우리는 정말 행복해질 수 있었던 거요.
[안나] 허지만 당신은 그다지 행복하진 않았어요. 전 뒤늦게 깨달았어요.
[알프렛]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지.
[안나] 당신의 살인 때문이었어요.
[알프렛] 아무도 모르는 범죄가 우리를 괴롭히고 있었던 거요.
[안나] 우리는 결코 그날 밤 제 분장실에서 일어난 일을 잊을 수 없었던
거예요.
[알프렛] 최소한 모르는 척은 할 수 있었지.
[안나] 우리는 애써 잊은척 했었어요.
[알프렛] 당신은 훨씬 더 자연스러웠소. 당신은 바로 내가 바라던 그러한
평범한 여자였소.
[안나] 제 건강이 회복되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한 것처럼 보였죠.
[알프렛] 난 그런 당신을 사랑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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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그래서 우리들 사랑의 두번째 황금시기에 접어들었죠.
[알프렛] 처음 것보다 더욱 오래 갔고 더욱 황홀했었지.
[안나] 그 시기동안 당신은 한번도 결혼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어요.
[알프렛] 당신은 그것은 원하지 않았잖소?
[안나] 모르겠어요.
[알프렛] 당신은 부르죠아식의 결혼을 멸시했었지.
[안나] 모르겠어요. 감히 바랄 수 없었던거죠.
[알프렛] 그러나 당신은 나의 아내였소.
[안나] 그래요.
[알프렛] 우리는 가정을 이루었던 거요.
[안나] 저는 평화를 맛보았어요. 저는 거의 제 자신을 모범적인
가정주부라고 말할 수 있었어요.
[알프렛] 허지만 당신은 그전 생활을 그리워했지
[안나] 네 때때로. 전 찬란했던 순간들이 문득문득 그리워지곤 했어요.
분노에 몸을 떨고, 욕망을 불태웠던 순간도 있었어요.
[알프렛] 그래서 우리의 평화로운 생활은 언제 끝장이 날지 모를 위기를
안고 있었던 거요. 당신이 언제 자취를 감출런지 몰랐으니까.
[안나] 허지만 그럴 틈도 없었어요. 그날 밤을 기억해요?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충격적인 뉴스를 듣던날, 1939년 가을이었어요.
[알프렛] 그렇소.
[안나] 당신은 거리에서 신문을 사들고 왔어요. 저는 책을 읽고 있었어요.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한다. 알프렛신문을 들고 다가온다.)
[알프렛] 안나!
[안나] 왜 그러세요.
[알프렛] 아무것도 아니요. 지금까지 우리가 애를 써온 모든 일은 아무런
중요성도 취할 수 없게 되었소. 우리의 무가치한 고통말이요.
[안나] 알프렛, 오늘 저녁은 웬일이세요?
[알프렛] 지난 수년동안 우리 말고도 수많은 사랑의 얘기들이 엮어져
왔을거요. 어느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서로를 이해하려 들고---
서로를 괴롭히고--- 고통을 안고 헤어지고--- 심지어는 자살조차도 결심을 해
보고--- 그리곤 어느날 다시 만나--- 마침내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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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발견하고 모진 고통을 물리친 이러한 이야기들이 지난 수년동안
언제나 그렇듯이 일어났던 거요.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곡절을 타넘을 때마다
이 고통. 이 슬픔이야말로 가장 무섭고 가장 절실한 것이라고 믿어 왔소.
이러한 모든 것들의 가치를 철저히 무시하는 새로운 재난이 준비되고
있었던거요. 새로운 재난이---
[안나] 무슨 일이 일어났군요.
[알프렛] 그렇소. 안나 전쟁이 일어났소.
[안나] 예상했던 일이예요.
[알프렛] 그래도 희망은 있었소.
[안나]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벌써 알고 있었어요.
[알프렛] 이제 눈앞에 닥친거요. (신문을 가리킨다.) '폴란드' 침공이
개시되었소. 이젠 틀렸소.
[안나] 당신네들과 당신네들의 지도자가 전쟁을 원한것이에요.
[알프렛] 난 내가 무엇을 원했었는지 모르오. 허지만 이제 와서는---
우리들 자신을 희생하는 일밖엔 없소. 도살장에 끌려가 당의 일원으로서
싸우게 될거요. 아마 나는 전쟁 영웅이 될는지도 모르오. 그들이 명령하면
피할 도리가 없는거요. 안나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말이오? (안나의 얼굴이 삽시간에 변모한다.)
[안나] 저는 기뻐요.
[알프렛] 안나.
[안나] 네. 전 기뻐요! (이상한 흥분에 사로잡혀) 전쟁이 터져군요---
드디어.
[알프렛] 안나. 무슨 소리요?--- 무슨 말을.
[안나] 무시무시한 일이 터졌어요. 세상을 온통 뒤 흔들어 놓을만한 일이
아름다와요.
[알프렛] 당신은 제 정신으로 말하는게 아니요. 당신이 늘상 말하던 그
악마가 발동한거요--- 기쁘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요---
[안나] (흥분에 싸여) 저는 기뻐요! - 우리는 또한번 격렬하게 사는거예요.
알프렛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저는 마치 오래전에 죽어버리거나 한것처럼
늙고 무기력한 기분이었어요.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가 없었어요.
그렇지만 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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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게 달라지게 됐어요.
[알프렛] 나는 가봐야겠소.
[안나] 가는 것이 두려우시죠, 알프렛! 그러실 거예요. 제말 듣기
싫으세요? 제가 당신을 위해서 통곡하는 것을 원치 않으세요? 모든것은
죽어가고 있었어요 알프렛! - 그리고 당신은 제게 있어서 다만 달콤한 습관이
되어가고 있었어요 - 제가 당신을 위해서 통곡해본지도 퍽 오래됐어요.
당신이 보고싶어서 당신을 잃어버릴것 같은 위기감에 사로잡혀 울어본지도 퍽
오래됐어요. 당신은 너무나 안전하게 제곁에 계시기에 거의 당신의
중요성조차 망각할 지경이었어요. 알프렛 - 당신이 제게서 떠나는 것은
무서운 일이에요. 저 홀로 남게 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에요. 아! - 전
얼마나 이 순간을 사랑하는지 몰라요. 이순간이야말로 다시 제 생명은 뜨겁게
불붙기 시작하는 거예요.
[알프렛] 안나. 이번은 그전 같지만 않을거요. 이번엔 우리 영영 다시 못
만나게 될지도 모르오.
[안나] 그래요.
[알프렛] 난 죽을지도 모르오.
[안나] 알프렛! 알프렛! 당신은 죽을지도 몰라요! 제가 우는 것이
보이세요? 그건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예요. 저는 그 사랑을
잊어버릴뻔 했어요. 그런데 저는 지금 이렇게 울고 있어요 - 당신을 사랑해요
-
[알프렛] (껴안으며) 안나, 안나!
[안나] 제가 우는 것이 보이세요?
- 幕 ( 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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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 ] 3 幕 ( 막 )
(어둠, 화톳불이 피어오른다. 불 주위에 군인 몇 사람이 둘러 서있다.
알프렛이 끼여있다.)
('릴리 마를렌느'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노래가 끝나자 한 군인이
알프렛에게 말한다.)
[병정 1] 이봐 알프렛 자넨 왜 노래를 안하지?
[알프렛] 난 듣고 있었네.
[병정 1] 우리 같이 부르자구.
[알프렛] 그 노래를 들으니 슬퍼지는데.
[병정 1] 한잔하게 (취사용 컵을 내민다.)
[알프렛] 곡은 아름답지만 슬픈 노래야.
[병정 2] 두고온 애인 생각이라도 하나? 자네 애인 이름이 뭐지?
[알프렛] (중얼거린다) "호롱불 아래 철조망 곁에서 나는 나를 기다리는
그대의 모습을 생각하네. 언제쯤 다시 보게될까?"
[병정 1] 뭘 말인가?
[알프렛] '베를린'의 가로등 말일세. "그 밑에서 그대는 사랑을
고백했었지. 나의 영원한 릴리.마를렌느여!"
[병정 2] 자네 제법 로맨틱한 데가 있어.
[알프렛]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오"
[병정 1] 이봐! 자네 취했나보군. 마시긴 제일 적게 마시고 혼자 취했네
그려. (마신다.)
[알프렛] "그대를 품에 안고 어루만지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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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정 1] 대단히 취했군 그래.
[알프렛] "그대의 다정한 모습 꿈 속에 아른거리네"
[일동] (노래한다) "불빛속에 나의 릴리여. 나의 릴리 마를렌느여"
(왁자지껄 웃는다. 돌연 침묵에 싸인다.)
[알프렛] 아름다운 노래야. 그런데 슬프단 말이야. 오늘밤 아마도 릴리는
'베를린' 의 가로등 밑을 다른 남자와 거닐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낯설은
사내가 그 여자의 허리에 팔을 감고서.
[병정 1] (유쾌하게 웃으며) 자네 얘기가 재미있는데 그래.
[알프렛] 우린 너무 멀리 있어. 아무도 우릴 생각해주지 않는거야. 우리는
잊혀진 사람들이지.
[병정 2] 이제 그만해두게.
[알프렛] 사람들은 우리를 제쳐놓고 생활의 설계를 꾸미고 있어 어차피
우리는 죽을 목숨들이니까. (멀리서 대포소리 들린다.)
[병정 1] 자! 이제 그만 가세. (팔을 감고 눕는다.)
[병정 2] 그러지. 눈 좀 붙여보세. (화톳불 꺼지고 어둠이 병정들을
휩싼다. 조명이 무대한쪽을 비춘다. 안나가 한 청년과 함께 자기 방으로
들어온다.)
[안나] (오바를 벗어 의자위에 동댕이 치며) 이게 내 방이에요. 6호실이죠.
기억해 두세요.
[청년] 방이 이쁘군요.
[안나] 마음에 드세요? 잠깐 있어요. 술 가져 올께요. (조명을 벗어났다가
술병을 들고 들어와서 두 잔 따른다.)
[청년] 안나, 당신을 위해서
[안나] 고마워요. (같이마신다.) 방이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예요. 편안해
보이죠.
[청년] 그렇군.
[안나] 라디오를 켜죠. (다이알을 돌린다. 음악이 흐른다.) 앉으세요.
[청년] (앉으며) 안나, 이렇게 당신과 마주앉으니 퍽 행복하오, 알겠지만
난 당신을 사랑하오.
[안나] 이봐요. 우린 사귄지 일주일 밖에 되지않아요.
[청년] 그게 무슨 상관이요.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소.
[안나] 당신은 무척 정열적이에요--- 그리고--- 솔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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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당신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요. 그 순진한 구석이.
[청년] 난 당신과 결혼하고 싶소.
[안나] 이봐요. 무슨 바보같은--- 한잔 더 하겠어요?
[청년] 주구려. (같이 마신다.)
[안나] 당신은 곧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게 될거예요. 나를 보세요. 난 그런
일을 잘 알아요. 나도 당신에게 퍽 호감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지만 난
미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사랑이란 이상한 거예요. 처음엔
그것이 평생동안 지속될것 같아 보이지만 - 얼마 안가서 달라지죠. 그리고
사랑이란 구름처럼 변한다는 것을 알아. 그것이 사랑이라 불리우는 기이한
현상인 거예요.
[청년] 아니. 변할리가 없소. 진정한 사랑이라면 영원히 지속되는거요.
[안나] (거칠게 웃는다.) 아주 훌륭한 생각이예요. 여자를 얼마나
겪어봤어요?
[청년] 꼭 알고싶다면 말하지만--- (수줍어서) 한번도 없었소.
[안나] 차차 여자를 알게되겠죠. 그러면 자기자신도 알게될거예요. 당신은,
정말 귀여워요. (청년 안나의 손에 키스한다.) 부드럽고 순결하고, 나같은
여자를 미치게 만들기에는 딱 좋은 사내예요 당신은 내가 죄많은 여자라는 걸
알고 있어요?
[청년] 당신에게 무슨 죄가 있겠소. 당신을 사랑하오.
[안나] 나는 죄많은 여자예요 - 이렇게 당신과 같이 있느것도 죄악이에요.
[청년]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안나] 당신은 어린 소녀와 손을 잡고 공원을 산책해야 할텐데, 이렇게
당신을 타락시킬런지도 모를 여자의 방에 앉아 있으니까요.
[청년] 날 놀리는 거요?
[안나] 그리고 나는 당신 아닌 한 남자, 지금은 멀리 있는 그이를 두고
당신과 즐기고 있으니 나쁜 여자에요. 난 남자가 필요해요. 그이가 없는
동안은 어떻게 해서든 메꾸어야 해요. 난 그런 여자예요.
[청년] 그 사람이 떠난지가 얼마나 됐소?
[안나] 퍽 오래됐어요. 그이를 마지막 본 것이 이년 전이예요 그이가
휴가를 나왔을 때죠. 지금은 동부전선에 나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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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뭐하는 사람이요? 군인?
[안나] 장교예요. 제복을 입은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요.
[청년] 그 사람을 사랑하오?
[안나] 그이 외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요.
[청년] 그렇다면 나하고는 같이 있을 수도 없지 않소?
[안나] 그렇지만 이렇게 같이 있지 않아요? 뭘 생각하시죠? 난 당신과 같이
있는것이 아니에요. 난 당신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저 당신이 매력이
있기 때문에 같이 있는것 뿐이에요. 당신이 내게 상관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청년] 당신은 이상한 여자요.
[안나] (가볍게 하품한다.) 그래요? (싸이렌이 울린다.)
[청년] (일어서며) 공습경보요.
[안나] 그렇군요
[청년] 방공호가 어디 있소?
[안나] (침착하게) 난 방공호에 숨지 않아요. 이대로 방에 앉아 있어요.
[청년] 위험할텐데.
[안나] 불을 끄세요. (청년 불을 끈다. 어슴프레한 속에서 안나에게
다가간다. 후면에 섬광이 하늘을 비춘다. 그는 성냥을 켜서 그 불빛으로
안나의 얼굴을 비춘다.)
[청년] '프리베르'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나는데 - 들어 본적 있소?
[안나] 없어요.
[청년] '밤의 빠리'라는 시였소.
[안나] 들려 주세요.
[청년] "어둠 속에서 세가치의 성냥에 차례로 불이 붙는다."
[안나] 그래서요?
[청년] "처음것은 그대의 얼굴을 보기 위함이요" (얼굴앞에 켜댄 성냥이
타다가 꺼진다. 또 한가치를 켜댄다) "둘째 것은 그대의 눈동자를 보기
위함이며" (버리고 다시 새 것을 켜댄다.) "세째 것은 그대의 입술을 보기
위한 것" "그리고 어두움은 (성냥을 불어서 끈다.) 그대를 품에 안고 그대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리기 위함이네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꼭 껴안는다.
알프렛의 목소리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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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렛] (소리) 1943년 가을, 전 가슴에 부상을 입었읍니다. 얼마동안 전
병원신세를 지고 휴가를 얻어 독일로 돌아왔읍니다. 저는 안나를 보려고
'베를린' '콜로니알'호텔 66호실을 찾아갔읍니다. 그날 밤 무서운 일이
벌어졌읍니다. (조명 안나의 방, 안나와 알프렛이 있다.)
[알프렛] 생각해 보구려 - 의식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오--- 눈이
내려 쌓이고--- 나는 많은 피를 흘렸소. 그대로 내버려진채 있었다면---
[안나] 결국은 구조되었군요 -
[알프렛] (장황하게 설명한다.) 들어보라니까. 전투중에 난 쓰러졌소.
그리고는 조그마한 연못까지 엉금엉금 기어갔소. 우리 부대가 적에게
패주하여 후퇴하자 난 곤경에 빠졌소. 왜냐하면 난 적군 점령지에 남게
되었거든.
[안나] 그러다가 구조되었군요.
[알프렛] 그렇소. 제 3대대장이 살려냈지. 그 친구는 거물이요. 작전을
같이하는 동안 알게 되었지. 키가 훤출하고 단단한 친구였어. 아마 지금쯤
죽었는지도 모르겠소.
[안나] 왜요?
[알프렛] 몇일 후에 내가 후송되고 나서 그 부대는 적군에게 섬멸되고
말았거든. 생존자가 불과 몇명안된다던데.
[안나] 그렇지만
[알프렛] 그날 부상만 당하지 않았던들 나도 아마 죽었는지 모르지.
[안나] 그런 생각은 그만 하세요.
[알프렛] 생각이 자꾸 나는걸. (안나를 바라본다.) 내 얘기 재미 없소?
[안나] 재미있어요.
[알프렛] 당신은 내가 어디에서 어떤 곤경을 치루었는지 이해해 주어야
하오. 내 얘기에 전혀 관심이 없소?
[안나] 관심이 있다니까요.
[알프렛] 난 우리가 만났을 때 지금 하곤 좀 다를걸로 상상하고 있었소.
[안나] 그래서 실망하셨겠군요.
[알프렛] 그렇진 않소. 허지만 당신은 좀 쌀쌀해진것 같소. 하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어딘가 쌀쌀하고 남같은 느낌이 드는구려
[안나] 아니에요. 당신이 그렇게 느낄뿐이에요. 전쟁터에서 오래 계셨기
때문에 보는 눈이 변해서 그런거예요.
[페이지] 049
[알프렛] 그럴지도 모르지. (사이) 우리가 전쟁터에서 곧잘 부른 노래가
있지.
[안나] 무슨 노랜대요?
[알프렛] '릴리.마를렌느'라는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당신 생각을 했소.
[안나] 어떤 노래인데요? 사랑의 노랜가요?
[알프렛] 병정들이 맥주잔을 들이키며 불러대는 노래요. (약간 아픈 시늉을
하며 가슴에 손을 댄다.)
[안나] 아프세요?
[알프렛] 아니 조금, 총탄을 뽑아냈으니까--- 이제 나아지겠지--- 좀
있으면 가라앉을 거요.
[안나] 고비는 넘겼어요?
[안나] 그리곤 다시 전쟁터로 끌려갈테지.
[안나]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쟁!
[알프렛] 생전 끝날것 같지 않소. (일어선다.) 당신은? 당신얘긴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 편지도 몇통 받아보지 못했소. 당시은 나무라는게 아니오. 가끔
편지가 유실되기도 하니까. 벌레처럼 땅에 구멍을 파고 들어 앉아 있는
우리한테까지 편지가 배달되기는 어렵지.
[안나] 제생활이라고 해야--- 별것 없었어요--- 그저 우울하고
[알프렛] 전쟁이 당신을 속였나보지. 당신이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격렬히 살지도 못한것 같구려.
[안나] 처음에는 그랬어요.
[알프렛] 언제?
[안나] 헤어질 때 말이에요. 저는 몹시 괴로웠어요. 처음 한달은 내내
긴장속에서 살았지요.
[알프렛] 그리곤
[안나] 끝까지 그럴순 없었어요. 그러한 상태가 오래 계속되다 보니 습관이
되어 버렸거든요.
[알프렛] 나없이 혼자 사는 것이 습관처럼 익숙해졌단 말이지.
[안나] 그래요.
[알프렛] 그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망각할 정도의 습관이
되었겠지.
[페이지] 050
[안나] 정 알고 싶으시다면 말하지만 사실 그랬어요.
[알프렛] 고요하고 거의 달콤한 습관 거기서 끝나지만은 않았을 테구?
[안나] 전 꾸며댈 수가 없어요.
[알프렛] 물론이지.
[안나] 전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어요. 쉬운 일이에요 - 제가 항상 당신을
그리며 고통에 차있었다구요.
[알프렛] 그럼, 구태여 거짓말까지 해야할 필요는?
[안나] 여자는 이럴때 곧잘 거짓말을 해요. 거짓말이라기 보다는
피상적으로 얘기한다 뿐이죠. 그러면 남자들은 만족해 해요. 그 여자를 탓할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여자의 임무는 항상 남자를 만족하게 하는
일이니까요.
[알프렛] (이상한 어조로) 그게 당신은 아니지. 당신은 그 이상이니까.
[안나] (알프렛의 어조에 놀라서) 저---
[알프렛] (냉정하게) 당신은 말하자면 초--- 여자요. 당신은 모든 전통,
습관따윈 비웃어 버리지.
[안나] 알프렛
[알프렛] 내가 없는동안 단지 나를 기다리는 것만으로 수년동안을 살 수는
도저히 없었을거요. 내게 바친 시간이 얼마나 되오? 일주일--- 한달? 그리곤
금방 싫증이 났겠지?
[안나] 내가 그런말을
[알프렛] 들으나 마나야지. 그리곤 당신은 지쳐버렸지. 너무 힘에
벅찼거든. 그리고 단조로왔으니까. 내생각만 하고 내걱정만 해주고 나만
기다려 준다는것. 그것처럼 단조로운 일이 또 어디 있겠소? 처음에는
그런데로 재미있었는지도 모르지. 아름답기조차 했겠구--- 당신은 항상
색다른 것을 좋아했으니까. 얼마만큼이나 괴로워 했겠소? 얼마동안이나? 나를
위해서 괴로워 하는 일에 매력을 잃을 때까지 였겠지. 그리곤 무감각해지고
일종의 무관심 상태에 이르렀고 당신이 빠져있던 심심하기 짝이없는 꿈
속에서 자신을 구출해줄 수 있는 새로운 격정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을테구---
내말이 틀리오? 어떻
[페이지] 051
소? 내가 당신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았소?
[안나] 그래요.
[알프렛] 그것 보오. 난 당신을 잘 알거든 안나--- 당신은 나를 속이지는
못해. 나는 당신의 그 이상한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꿰뚫어 볼 수 있어.
[안나] 마음대로 얘기하세요.
[알프렛] 그러나 오늘은 당신의 그 이상한 영혼을 비웃어주고 싶구료!
안나.
[안나] 당신 왜 그러세요?
[알프렛] 나는 지쳤오.
[안나] 저한테 말씀이죠.
[알프렛] 그렇소. 당신의 심리구조에 난 진저리가 나오. 공연히 심각한
것처럼 구는 엉터리 영화만큼이나 싫증이 나오.
[안나] 당신은 제게 그런 식으로 말할 권리는 없어요. 싫증이 났으면 가면
되잖아요.
[알프렛] 가겠소. 허지만 그 전에 대답을 듣고 가겠소. 나없는 동안 어떻게
지냈소?
[안나] 얘기할 게 없어요.
[알프렛] 대표적인 에피소드 같은것이 있을법도 한데--- 새로운 낙이라도
찾아내지 않았소? 그렇지 않으면 자기 파괴의 욕망으로 되돌아 갔소? 자신의
타락의 한계를 측정하고 싶어하지는 않았소? 어디 안나.클라이버의 소식 좀
들어 봅시다.
[안나] 없어요.
[알프렛] 자! 그러지 말고 말해봐.
[안나] 얘기할 게 없다니까요.
[알프렛] 몇 명의 사내가 이방에 올라 왔었소? 내가 띄운 가련한 편지 수
만큼이나?
[안나] 미쳤어요?
[알프렛] (팔목을 움켜잡는다.) 어서 말해 보오.
[안나] 이 팔 놓으세요. 아파요. (알프렛의 얼굴이 굳어진다.)
[알프렛] 말하라니까. 바보같으니 당신의 그 이상한 모험담을 들려 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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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오. 그래서 나를 좀 즐겁게 해주구려.
[안나] 놓세요. 제발.
[알프렛] 어서 말해 어서. 난 농담을 하고 있는게 아니야. 내겐 볼만한
춘화소설이 한 권도 없소. 그러니 당신의 생활을 들려 주구려.
[안나] (눈물이 쏟아지려 한다.) 알프렛--- 놔줘요.
[알프렛] 당신에겐 이제 구역질이 나오. 난 평생 바보였어. 당신을
잠시나마 진심으로 대할 수 있었던 나 자신이 지금도 이해가 안돼. 당신은
그저 잠시 더불어 희롱할 상대밖엔 되지 않아--- 그 이상은 될수 없지.
[안나] 알프렛!
[알프렛] 왜? 내말이 거슬리오? 진정 내말이 거슬리오? 당신에게도 조금은
부르죠아의 체모가 남아 있었군 그래--- 그렇지만 당신같은 자유분방하고
수수께끼 같은 여자에겐 어울리지 않아. 마침내 난 오늘밤 당신을 비웃어줄
수 있게됐소. 그리고 나 자신마져도, 나의 지난 고뇌, 항상 안나.클라이버가
주연했던 지난 날의 악몽까지도 이제 모든 것이 끝났소. 그리고 난 웃을테요.
나 자신을 실컷 웃어줄테요. (흐느낀다.)
[안나] 당신이 모두 옳아요. 알프렛--- 당신의 잘못은 저같은 것에게
중요성을 부여했던데 있어요--- 저는 결코--- 저는 흔해빠진 잡년이에요.
[알프렛] 당신 말이 맞소.
[안나] 그렇지만 그건 처음부터 확실했어요--- 당신도 알고 계세요.
말씀드렸지만 저의 내부에는 저를 타락으로 끌어 당기는 무엇이 있어요.---
[알프렛] 그것은 당신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자신이오.
[안나] (눈을 감는다.) 실컷 저를 모욕하세요. 그것이 오히려 저를 조금은
순화시켜줄런지도 모르죠. 저를 벌하세요. 저는 지독한 형벌이 필요해요,
알프렛.
[알프렛] 내게 부탁하지 마오. 그런 것일망정.
[안나] 제게 벌을 주세요.
[알프렛] 내가 알 바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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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약간 비웃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당신의 모욕이
필요해요--- 알고 싶으세요? 그래요 당신이 한 얘기 그대로예요. 전 당신이
없는동안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았아요. 전 당신이 없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어요. 당신을 보지 않고 당신을 그린다는 것은 비상한 상상력이
필요했어요. 실상 그런 상상을 해본 것도 몇번 되지 않아요. 현관 수위에게
제가 사내를 끌어들인 적이 있었는지 물어보세요. 물론 저는 그랬어요. 우린
같이 술을 마시고 춤도 추고 당에 관한 얘기도 했어요--- (알프렛, 안나의
뺨을 때린다.)
[알프렛] 계속해! 자! 어서!
[안나] (운다. 소리친다.) 하겠어요! 저는 흥분제가 필요했어요. 저는
즐기고 싶었어요. 그래요. 제 충실성의 밑바닥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오직
죽음과 공허, 그리고 권태와 슬픔만이 있을 뿐이었어요.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도 미칠듯이 단조로운 생활속에서 하루 시들어 가고 있었어요. 알고
싶으세요! 저는 그 사랑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내자신을 타락시켜야 했어요.
그렇게 함으로써 내 기억속에 당신을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감히
나는 바라볼 수도 없는 고귀한 존재로서의 당신을 내 자신의 추한 모습에
비추어 문득 기억에 떠올리 수 있으니까요.
[알프렛] 더 계속해. 정말 구역질이 나는군.
[안나] 나는 별짓을 다 했어요. 지옥에를 내 집처럼 드나들었어요.
[알프렛] 당신에겐 집보다는 훨씬 편한 곳이지. 당신은 무엇보다도 그 말을
하는데 쾌감을 느끼니까.
[안나 (낮고 진지한 어조로) 어느날 밤의 일이 생각나요--- 저는 빠에
갔었어요. 우연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전 추악하다고 느꼈어요--- 한
사내가 제게 다가올 때, 저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입술연지를 칠하고
있었어요. 그 작자는 내게 입에 못담을 더러운 소리를 지껄여댔어요, 저를
길거리의 창녀로 알았던 거예요.
[알프렛] 옳게봤군 그래.
[안나] 그런데 저는 화가 나는 대신 재미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맞장구를
쳤어요. 재미있는 게임같이만 생각되었어요. 우리는 흥정을 했어요. 그리곤
계약을 했죠--- (웃는다) 재미있지 않아요? 우린 진지하게 계약을
했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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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렛] 그래! 아주 재미있군.
[안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우리는 이리로 왔어요. 재미있잖아요?
[알프렛] ( 눈을 가리며 ) 그래--- 이젠 됐어--- 그만해 둬.
[안나] 그리고 여기 66호실에서 그 놀이는 끝장을 보았던거예요---
(신경질적으로 웃어댄다. 아프렛은 일어나서 천천히 안나에게 다가간다.)
[알프렛] 그만 닥치라고 했잖아. (벽난로에서 부지깽이를 집어든다.)
[안나]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어요--- 얼마든지요---
[알프렛] 이제 그만 닥치라니니까 닥치지 못하겠어!
[안나] 알프렛! 아니! 알프렛! 어쩔려고 이러세요! 알프렛!
[알프렛] (알프렛 부지깽이를 들어 안나를 친다. 비명소리. 조명 어두워
지면서 '마드모아젤' 연주된다. 푸른 갓을 씌운 램프가 켜지면서 1막에서와
같이 작가와 알프렛이 마주 앉아 있다.)
[작가] 하마터면 죽을뻔 했구료
[알프렛] 네.
[작가] 그래서 어떻게 되었읍니까?
[알프렛] (피곤한 기색을 보인다.) 찐 하잔 더 주십시오. (작가 계원을
손짓하여 부르자 그는 다가와서 잔을 채우고 나간다. 알프렛 마시고 나서
얘기를 한다.) 저는 체포됐죠. 안나는 살아난 것을 알았읍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 전선으로 끌려갔읍니다. 그, 후론 안나를 두번 다시 보지 못했읍니다.
[작가] 그리고 당신은 그전보다 더 안나를 그리워 하셨군요.
[알프렛] 그렇습니다.
[작가] (가벼운 어조로) 이상한 사랑이군요.
[알프렛] 전쟁이 끝난뒤 저는 본국을 떠났읍니다. 저는 이주일 전에
'바르셀로나'로 왔읍니다. 저는 모든 것으로 부터 도망치고 싶었읍니다.
러시아인과 독일 경찰과 그리고 나 자신으로 부터. 그런데 막상 이곳에 와
보니 잊어버리기는 커녕 모든 것이 하나하나 기억속에 되살아나는
것이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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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 도시에선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알프렛] 저는 안나에게 편지를 띄웠읍니다. 그리곤 기다렸죠. 저는 12월
26일에 만나자고 썼읍니다. 만일 오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알겠다고 했읍니다. 저는 극도의 불안속에서 기다렸읍니다.
[작가] 그 여자는 이곳으로 오기 위해 떠났던 것이군요. 그래서 크리스마스
날 오후에 '여인호텔'에 도착했죠---
[알프렛] 그때 선생님께서 계셨다니 말씀해 주십시오. 아주 자세하게 알고
싶습니다.
[작가] 로비에는 사람이 뜸했읍니다. (조명이 텅빈 로비를 비춘다.) 저기
(접수대를 가르킨다.) 에 접수계원이 앉아서 신문을 읽고 있었읍니다. ( 계원
들어와서 앉는다.) 저쪽에선 웬 남녀가 앉아서 얘기를 주고 받고 있었죠.
(남자와 여인 들어와 앉는다.) 그때 안나가 들어 왔읍니다. (안나 들어선다.)
그 여자는 곧 쓰러질 듯이 문간에서 잠시 주춤거렸읍니다.(안나 비틀거리다가
한 손으로 눈을 가린다.)
[안나] 저 좀 도와주세요. (작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나에게로 다가간다.
접수계원은 접수대 뒤에서 앞으로 나온다.)
[작가] 왜 그러십니까, 부인? 편찮으십니까?
[안나] 아녜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고맙습니다. 들어서는 순간 피로하다고
느껴졌을 뿐이에요. (안나는 계원의 부축을 받아 접수대로 다가간다. 작가는
로비 중앙에 선채 안나를 바라본다. 계원은 안나를 쳐다보고 어쩔줄 몰라
한다. 작가에게 도움을 청하듯 바라보나 그는 말이 없다. 마침내 안나가 눈을
뜨고 입을 연다.) 저--- 방 있나요?
[계원] 네. 부인. 숙박부를 기입해 주시겠읍니까?
[안나] 네. (만년필 뚜껑을 열고 쓰려고 한다. 손이 떨린다.) 전---
(자신을 변명하는 미소를 띄운다.) 전 약간--- 신경이 피로해서---
[계원] 제가 대신 기입해 드리죠. 성함은?
[안나] 안나. 클라이버.
[계원] (쓴다.) 케이, 엘, 아이.
[안나] 아녜요. 케이, 엘 , 이, 아이, 버
[페이지] 056
[계원] (보여주며) 맞습니까?
[안나] 네. 맞아요?
[계원] 국적은?
[안나] 스페인.
[계원] 그렇지만 (미소한다) 이런 이름을 가지고 말입니까? (그는
미련스럽도록 상냥해지려고 노력한다.)
[안나] 아버지가 독일사람이에요.
[계원] 아, 네--- 출발지는?
[안나] 빠리
[안나] 목적지는?
[안나] 빠리
[계원] '바르셀로나'에 체류하실 생각이십니까?
[안나] 글쎄 그게--- 모든 일이 내일이 돼봐야 알겠어요. 아시겠어요?
[계원] 아, 네. 그러시면 '바르셀로나'로 기입해 두겠읍니다. 아무래도---
마찬가지니까요. 그러면 여행 목적은? 뭐라고 기입할까요? 상용---? 혹은
사적 용무---?
[안나] 아! 네 사적---. 아무렇게나 하세요.
[계원] (다 쓰고 만년필을 돌려준다.) 여기에 서명해 주시겠읍니까?
[안나] 네. 가서 좀 쉬어야 겠어요. 내일--- (말을 그친다.)
[계원] 66호실입니다.
[안나] 아니--- 저--- 다른 방은 없나요?
[안나] 없는데요. 66호실도 좋은 방입니다. 부인.
[안나] 모를 일이에요.
[계원] 가 보시면 아주 마음에 드실겁니다. 부인.
[안나] 그런게 아니라--- 이상한 일이군요--- 내가 전에 있던 방도
66호였어요. 66호와는 불쾌한 인연을 가지고 있어요. '베를린'의
'콜로니아호텔'이었지요.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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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원] 제가요? 모르겠는데요. 부인.
[안나] 그 때문에 다른 방을 달라고 한 거예요. 뭐 (실내를 휘둘러 본다.)
상관 없어요. 어쨌든 '바르셀로나'에 오게 되어서 다행예요. 내일이 오면
모든게 달라지겠죠 기뻐요. 난 한 잠도 못잘것 같아요. 내일 아침 아홉시에
꼭 깨워주세요. 아주 중요한 약속을 위해서 평생을 기다려왔으니까요.
깨워주시겠어요?
[계원] (놀라고 당황한다.) 아, 네 부인. 염려 마십시오. (가방을 들고
서있는 급사에게) 66호실을 안내해 드려.
(급사를 따라서 안나는 엘리베이터로 가서 탄다. 급사가 문을 닫으면
엘리베이터는 올라간다. 알프렛 안나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바닥에 엎드려
흐느낀다. 작가는 그에게 가서 어깨에 손을 얹는다.)
[작가] 이것이 그 날 저녁에 일어난 일입니다--- 저는 이것을 연극으로 쓸
생각인데 끝부분을 처음부분과 똑같이 끝맺을 작정입니다. 안나.클라이버가
'여인호텔'에 들어와서--- 잠시 접수계원과 얘기를 나누고 엘리베이터로
사라지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나면 당신이 지금 한것처럼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이 될 것입니다. 단지 안나.클라이버가 사라졌다고 해서 인생이 끝난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밤에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악몽과 불안에 가득찬 긴 밤은 지났읍니다. 그 밤에 많은 것을 잃었읍니다.
당신이 그랬듯이--- 말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내게 말할 것이 없읍니다---
나는 당신을 보고 있읍니다--- 나는 사형수들의 평온한 얼굴을 알고
있읍니다--- 당신의 얼굴은 그렇지 못합니다. "내가 무얼 잘못했나요?"라고
두려움에 차서 질문하는 피해자의 경련하는 얼굴 표정입니다. 어찌 우리가
당신을 피고석에 앉일 수 있겠읍니까? 언젠가 당신 스스로 당신 자신을
앉히고--- 그리고는 아마도 안나.클라이버는 다만 추억으로 간직될 수 있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것을 결심하게 되겠죠. 그때 당신은 다시 비겁한
인간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조가 변한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말을 들으시면 기분이 좀 나아지실 겁니다. (알프렛, 머리를
들고 축축한 눈으로 작가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침묵 더이상 말할것이
없다는 듯이 가벼운 몸짓을 한다.)--- 막이 내릴 것입니다.
없다는 듯이 가벼운 몸짓을 한다.)--- 막이 내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