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제18차 세계 축성생활의 날
축성생활회와 사도생활단 회원들과 함께 드린 미사에서의 프란치스코 교황님 강론.
성 베드로 성당
백성들이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동안 예언자들은 말라키 예언자가 말한 것처럼 주님의 오심을 선포했습니다.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말라키 3,1)라고 말합니다.
시메온과 한나는 이 기다림의 표상이자 모습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당신 성전에 들어오시는 것을 보고 성령의 비추심을 받아 마리아가 품에 안고 있는 아기에게서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평생 주님을 기다렸지요.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 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루카 2,25) 시메온,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었던” (루카 2,37) 한나.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며 깨어 있는 정신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던 이 두 노인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그들의 마음은 항상 타오르는 횃불처럼 깨어 있습니다.
그들은 나이가 많지만 마음은 젊고, 세월에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눈은 여전히 기다림으로 하느님을 향해 있기 때문이지요.(시14,15 참조)
기다리면서, 항상 기다리면서 하느님을 향해 있었어요. 인생의 여정에서 그들은 힘겨움과 실망을 체험했지만, 패배주의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은퇴시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기를 관상하면서 때가 찼음을,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아보고, 자신들이 찾고, 애타게 기다리던 분을 민족들의 메시아가 오셨음을 알아봅니다. 주님께 대한 기다림을 깨어 간직함으로써 그들은 주님의 오심이 지닌 새로움 속에서 주님을 맞이할 수 있게 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매일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다가 삶과 시간의 종말에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경계를 늦추지 말고 항구하게 기다리라고 친히 권고하십니다. 사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영의 잠’애 빠지는 것입니다. 곧 마음을 잠들게 하고, 영혼을 마비시키며, 희망을 실망과 체념의 어두운 구석에 저장해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축성생활자 형제, 자매 여러분을. 여러분이라는 선물을 생각합니다. 또 저는 오늘날의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기다림을 살아갈 능력이 있습니까?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과, 매일의 일들과 빡빡한 리듬에 붙잡힌 나머지 언제나 오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하는 좋은 일에 사로잡힌 나머지 수도 생활과 그리스도인의 삶조차도 ‘해야 할 많은 일’로 바꾸고 매일 주님을 찾는 일을 소홀히 할 위험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때때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씨를 뿌리는 사람들과 하느님의 때와 놀라움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의 인내로 우리에게 맡겨진 작은 씨앗을 기쁘고 겸손하게 경작하는 대신 성공 가능성을 계산하여 개인적인 삶과 공동체 생활을 프로그램화 할 위험을 초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때때로(우리는 인정해야 하는데) 이 기다리는 능력을 잃었습니다. 이는 여러 가지 장애물로 인해서인데, 그 중에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기다리는 능력을 잃게 만드는 첫 번째 장애물은 내적 생활을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이는 피로가 경탄보다 우세할 때, 습관이 열정을 대신할 때, 영적 여정에서 끈기를 잃을 때, 부정적인 경험이나 갈등 또는 늦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열매가 우리를 쓰라리고 괴로운 사람으로 바꿀 때 일어납니다. 쓰라림을 되씹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모든 공동체와 가족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수도 가족 안에서는 괴롭고 ‘어두운 얼굴을 한’ 사람들은 분위기를 무겁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마음에 식초가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 때는 잃어버린 은혜를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깊은 내적 생활로 들어가고 기쁨에 찬 겸손과 조용한 감사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흠숭에서, 무릎(역주: 기도를 가르킴)과 마음의 일에서 자양분을 얻고, 하느님께 대한 열망과 지난날의 사랑, 첫날의 놀라움, 기다림의 맛을 다시 일깨울 수 있는, 투쟁하고 청원하는 구체적인 기도에서 자양분을 얻습니다.
두 번째 장애물은 복음을 대신해 버리는 세상의 스타일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우리 세상은 흔히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 세상이고, ‘전부와 당장’을 들어 높이며, 활동주의에 자신을 소모하고, 삶의 두려움과 불안을 소비주의라고 하는 이교 사원이나 오락에서 어떻게 해서든 쫓아내려고 하는 세상입니다. 침묵이 추방되고 상실된 이와 같은 환경에서 기다림은 쉽지 않습니다.
기다림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가 가르치는 것처럼 건강한 수동성의 태도, 걸음을 늦추고 활동에 압도되지 않으며 우리 안에 하느님의 활동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정신이 우리의 수도 공동체와 교회의 삶, 그리고 우리 각자의 여정에 들어오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도적 사명에는 기도와 매일의 충실함으로 성숙해진 기다림이, 효율성의 신화, 성과에 대한 집착,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우리의 범주들 안에 가두려는 허세로부터 우리를 해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항상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오시고, 항상 우리의 시간이 아닌 때에,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신비가요 철학자인 시몬 베이유가 말했듯이, 우리는 밤에 신랑이 도착을 기다리는 신부이며, “예비 신부의 몫은 기다림이다. 하느님을 갈망하고 나머지는 모두 포기하는 것, 오직 여기에만 구원이 있다.”(s.weil,『하느님을 기다림』attesa di Dio, milan 1991, 152)
자매 여러분, 형제 여러분, 기도 안에서 주님을 기다림을 기도로 가꾸고 ‘성령의 수동성’을 잘 배워봅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새로움에 우리 자신을 개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메온처럼 아기를, 새로움과 놀라움의 하느님을 받아 안읍시다. 주님을 맞이할 때 과거는 미래를 향해 열리고, 우리 안의 옛것은 그분이 불러일으키시는 새것을 향해 열립니다. 이는 단순하지 않음을 우리는 압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수도 생활에서는 ‘낡은 것의 힘’에 맞서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노인이 아기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 말입니다. 하느님의 새로움은 아기로 나타나고 우리는 우리의 모든 습관, 공포, 두려움, 선망_선망을 좀 생각해 보세요!_, 걱정들을 지닌 채 이 아기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아기를 끌어안고, 맞아들이고, 그 아기에게 자리를 만들어 줄까요? 이 새로움이 정말로 우리 삶에 들어올까요, 아니면 오히려 옛것과 새것을 나란히 두려고 시도하면서 하느님 새로움의 현존에 가능한 한 방해를 덜 받고자 할까요?”(C.M. 마르티니, 『아주 개인적인 것. 기도에 관한 묵상』Qualcosa di cosí personale. Meditazioni sulla preghiera, 밀라노 2009, 32-33)
형제 자매 여러분, 이 질문들은 우리를 위한, 우리 각자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를 위한, 교회를 위한 질문입니다. 시메온과 한나처럼 초조해하고 성령에 의해 움직여지도록 합시다. 그들처럼 내적 생활을 지키며 복음의 스타일대로 기다림을 살아간다면, 그들처럼 그렇게 기다림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빛이요 생명의 희망이신 예수님을 받아 안을 것입니다.
'성삼의 딸들 수녀회'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께서 번역해 주셨어요^^
첫댓글 감사합니다 💗
잘 읽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