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 : 시인, 대학교수
출생 : 1942년,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소속 : 우석대학교 명예교수
학력 : 원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석사
경력 :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
수상 : 2016.11. 제8회 구상문학상
시인은 시집,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의 책머리글에서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나 지렁이 얘기 같은 게 더러 있습니다. 아직 신화가 되지 안은 그런 이야기들이 은행나무 마을에는 시글시글 스물거립니다. 어쩌면 은행나무 마을 얘기를 조금 더 쓰게 될 것 같습니다.
라고 한다.
나도 위대하고 훌륭하고 보기에 좋았더라 하는 글보다 편하고 만만한, 흙을 파봐라 돈이 나오나 하지만 흙을 파 봐라 지렁이가 나오지 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맛나게 좀 쓰면 좋겠다.
내 살던 뒤안에
참새떼가 요란스럽게 지저귀고 있었다
아이들이 모여들고 감꽃들이
새소리처럼 깔려 있었다
아이들의 손가락질 사이로
숨죽이는 환성들이 부딪치고
감나무 가지 끝에서 구렁이가
햇빛을 감고 있었다
아이들의 팔매질이 날고
새소리가 감꽃처럼 털리고 있었다
햇빛이 치잉칭 풀리고 있었다
햇살 같은 환성들이
비늘마다 부서지고 있었다
아아, 그때 나는 두근거리며
팔매질 당하는 한 마리
구렁이가 되고 싶었던가
꿈자리마다 사나운 몰매 내리던 내 청춘을
몰매 속 몰매 속 눈감는 틈을
구렁이가 사라지고 있었다
햇살이, 빛나는 머언 실개울이 환성들이
감꽃처럼 털리고 있었다
햇볕이 익는 흙담을 끼고
구렁이가 사라지고 있었다
가뭄 타는 보리밭 둔덕길을 허물며
팔매질하며 아이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감나무 푸른 잎새 사이로
두근거리며 감꽃들이 피어 있었다.
토막말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보릿고개
나무껍질 물 오르면 보릿고개다
먹고 죽는 껍질만 아니면
아무 나무나 속껍질을 벗겨 먹었다
새 풀잎 돋으면 보릿고개다
먹고 죽는 풀만 아니면
그게 다 봄나물이다 보이는대로
아무 풀이나 뜯어먹었다
보리 안 패는 3월 없다는
그 말 하나 믿고 보릿고개를 견뎠다
아닌게 아니라 삼월이면
어디선가 반드시 보리이삭이 패곤 했다
나락농사는 이삭패고 한달이면 먹는데
보리농사는 이삭 패고도 한달 반은 실히 넘겨야 타작을 한다
굶어죽는 꼴을 꼭 보아야
익겠다는 듯이
자고나도 자고 나도 퍼렇기만 한
야속한 보리밭을 건너다보면서
애기 잡아먹은 문둥이가 보리깜부기로
눈썹 그리며 시치미 떼던 보리밭 둔덩에
문둥이 몰래 저물도록
허천나는 삐비나 뽑아 먹었다
천정을 보며
우리네 사는 일 따뜻하여
잠 아니 올 때
내 기억 밖에서 흘러가던 바람소리
어쩌다 되돌아와서
내 영혼의 우수의 석경을 닦는다
추적추적 궂은비가 내리는 새벽에
비로소 잠이 들던 친구의
피곤한 꿈자리를 지나서
높고 가난하고 또 쓸쓸한
우리 스승의 숙명의 한 많은
걸음걸이나 시늉하며 따라가다가
문득 오랜만에 참으로
오랫만에
죽음이라는 걸 생각하면서
엄청난 치부일지 어쩔지
좀처럼 요약되지 않는 우리네
사랑이여 예감이여
뉘우침이 모두
그늘이 되어 바람이 되어 쓸쓸한
아무려면 괜히 목숨이 탈까
목숨이 탈까 사랑이여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서 소식 없는
우리 곁에서 수없이 떠나간 사람들의
남긴 시간을 보자
우리의 살다 남는 시간을 보자
피곤한 음계를 오르내리며
한세상 가고
우리의 생활은 바람의
절망의 저 건너편에서
시작되어도
우리네 초라한 희로애락
모두 맘에 들어라
내 기억 밖에서 흘러가던 바람소리
다시 기억 밖으로 흘러가고
모든 자랑의 사랑의 절망의
뉘우침의
저 바람소리엔 주석이 필요치 않다.
하행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깜박 잘못 들어선 하행선이다
가야 할 상행선은
차들이 잘도 달린다
빠져나갈 출구가 안 보이는 길
가다서다가다서다가다서다
하행선은 자꾸만 길이 막힌다
유턴이 안 되는 길이다 기다리지 말라
해 안에 가기는 틀렸다 기다리지 말라
너는 왜 고따우로만 사냐고
기다리던 친구가 손전화 속에서 투덜댄다
정말 이따우로만 나는 살았는가
한평생 잘 못 들어선 길
빠져나갈 수 없는 길
한꺼번에 다가와 막히는 길들이
줄담배처럼 어느 새 낯설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