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國史가 있고 地方에도 鄕土史가 있듯이 氏族에는 氏族史 곧 族譜가 있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 族譜가 발간되기는 15세기부터인데, 우리 林氏門中에도 1659년 羅州林氏 첫 族譜가 세상에 나온 이후로 관향마다 각기 족보를 펴냈고 또 重修해 왔다.
어언 1100년 여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林氏는 24개 貫으로 번성하여 우리 나라 10대성이 되었으며 貫鄕마다 族譜가 있다. 그 중 上系 系代를 달리하는 한두 貫외에는 거의 모든 族譜가 上系의 頂点인 都始祖 八及公에 관해서는 一致点을 보이고 있다.
또 그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 遠祖라 할 中國의 뿌리에 관해서는 殷太師 比干公과 得姓祖 堅公 그리고 훨씬 내려와 八及公의 高祖되시는 蘊公에 관한 記述도 찾아 볼수 있다.
그런데 各貫鄕의 族譜사이에 약간의 차이점이 있어 왔다. 하나는 得貫祖以上의 系代에 대해서는 文獻記錄이 없어 空白이 되어 있는 貫이나 멀리 新羅初까지 거슬러 올라가 始点을 대는 貫도 한둘이 있다. 둘째는 系代線上에 同名이 겹치거나 그 世代가 서로 어긋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예전에 交通通信이 不備하여 宗族이 遠隔地에 떨어져 살았을 때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同時․當日生活圈속에서 우리는 뒤미쳐나마 서로 族譜를 비롯한 諸文獻과 記錄들을 疏通對照할 수 있게되었다. 硏究의 幅이 넓어진 것이다.
나라의 正史를 基本軸으로 하고, 譜學에 밝은 各貫의 碩學들로 全國林氏中央會族譜硏究分科委員會를 구성하여 몇 년 동안 討議와 硏鑽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오늘 “林氏上系譜鑑”을 펴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中央會版 林氏族譜는 現世代가 衆智를 모우고 精誠을 다해 보다 객관적이며 종합적인 기준에서 林氏歷史의 基軸을 세워 놓으려는 노력의 산물로서 후속세대들이 뿌리를 찾을 때 그 準據가 되고자 함이다.
中國林氏族譜와의 관계에서는 이미 수년전부터 林允華 고문등 宗中人士들의 開拓 노력과 수차의 對中交流가 있어 왔고, 2001년 12월 10일에는 八及公께서 他 7姓과 함께 배를 타고 멀리 新羅로 떠나온 中國 福建省 彭城 海邊 現地에서「韓國林氏宗親․中國武榮殷比干文化硏究會 同立」으로「八及公渡海處」紀念碑를 兩國宗親代表團이 除幕함으로써 두 나라 林氏族譜上의 接点이 公式的으로 定立되었다.
이번 共同硏究會議의 爛商討議에서도 八及公에 관한 明示的 文獻記錄이 中國側에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兩國林氏族譜上의 系代比較檢討 결과로 韓國林氏의 뿌리라 할 中國林氏의 上代에 관해서도 더욱 분명해졌다 할 것이다.
아울러 宗中諸賢의 高見과 叱正에 대해서는 언제나 문을 열어 놓고 補訂과 完成을 위해 계속 노력할 것임을 밝혀둔다.
이번 林氏上系寶鑑 發刊을 위해 計劃, 原稿 및 資料提供에 도움을 주신 中央會 常任副會長여러분, 族譜硏究分科委員會의 林行鎭 委員長과 各貫鄕에서 참여하신 委員여러분, 各貫鄕 및 地域支部會長과 관계任員여러분, 특히 編輯業務 總括을 맡아 수고하신 林貞喆 常任副會長, 諸般 行政的 뒷받침과 資料整理에 애써주신 林東根 事務局長 그리고 出版을 맡아주신 한얼譜學硏究所 南精罡 所長께 深甚한 感謝를 드린다.
2002년 4월 20일
全國林氏中央會 會長 林 芳 鉉
凡 例
1, 韓國林氏의 都始祖는 忠節公 林八及으로 모시되 定立이 되지 않은 貫鄕들 은 從前대로 都始祖를 모신다.
姓은 血族關係를 표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이것이 언제부터 발생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미 人類社會가 시작되는 原始時代부터 이러한 觀念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原始社會는 血緣을 基礎로하여 모여 사는 集團體로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처음에 母만 확실히 알 수 있고 父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처음에 母系血緣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이른바 母系社會가 나타났다가 뒤에 父系社會로 轉換되었거니와, 母系社會건 父系社會건 原始社會는 祖上이 같은 사람들이 集團을 이루고 모여 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原始社會를 氏族社會라고 하는 것이다.
氏族社會도 시대가 흐르고 인구가 증가하고 代가 멀어짐에 따라 같은 氏族中에도 血緣이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살게되어 여러 개의 氏族集團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人類社會는 血緣에서 출발하고 혈연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였기 때문에, 原始時代부터 氏族에 대한 觀念이 매우 강하였다. 자기 祖上을 崇拜하고 同族끼리 서로 사랑하고 氏族의 名譽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각 씨족은 다른 씨족과 區別하기 위하여 각기 名稱이 있었을 것이며, 그 명칭은 文字를 사용한 뒤에 姓으로 表現하였는데 東洋에 있어서 처음으로 姓을 사용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漢字를 발명한 中國이었으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地名 또는 山名, 江名으로 姓을 삼았다.
第 二 節 우리 나라 姓氏의 由來
우리 나라의 姓은 모두 漢字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中國文化를 수입한 뒤에 사용한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三國史記․三國遺事등 우리 나라 옛 史籍에 의하면 高句麗는 始祖 朱蒙이 建國하여 國號를 高句麗라 하였기 때문에 高氏라 하고, 朱蒙은 그 신하 再思에게 克氏, 武骨에게 仲室氏, 黙居에게 小室氏의 姓을 賜姓하였다 하며, 百濟는 始祖 溫祚가 扶餘系統에서 나왔다 하여 姓을 扶餘氏라 하였다 하며, 新羅는 朴․昔․金 三姓의 傳說이 있고, 第三代 儒理王 때에 六部(六村)에 賜姓하여 梁部(閼川楊山村)에 李氏, 沙梁部(突山高墟村)에 崔氏(遺事에는 鄭氏), 澈粱部(茂山大樹村)에 孫氏, 本彼部(觜山珍支村)에 鄭氏(遺事에는 崔씨), 漢袛部(金山加利村)에 裵氏, 習比部(明活山高耶村)에 薛氏의 姓을 주었다고 하며, 金官伽倻의 始祖 首露王도 黃金 알에서 誕生하였다. 하여 姓을 金氏라 하였다는 傳說이 있다. 이와 같이 三國은 古代部族國家時代부터 姓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모두 中國文化를 수입한 뒤에 지어낸 것이다. 一般民衆은 新羅末期까지 姓을 쓰지 아니하였다.
高麗太祖는 賜姓한 例가 많이 있다. 지금의 江陵地方을 管掌하고 있던 溟洲將軍 順式이 귀순하자 太祖는 王氏의 姓을 주고, 渤海太子 大光顯이 歸順하자 또한 王氏의 姓을 주고, 新羅人 金幸이 太祖를 보필하여 權能이 많은 까닭에 權氏의 姓을 주어 安東權氏의 始祖가 되었으며 또한 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高麗太祖가 開國한 뒤 木川 사람들이 자주 叛亂을 일으키므로 太祖는 이를 미워하여 牛․馬․象․豚․獐과 같은 짐승의 뜻을 가진 字로 姓을 주었는데, 뒤에 고쳤다는 設이 있다. 이것은 어떻든 高麗初期부터 姓을 쓰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 貴族官僚階級은 성을 쓰지 아니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高麗中期 文宗 九年(一0五五)에 姓을 쓰지 아니한 사람은 科擧에 及第할 資格을 주지 아니하는 法令을 내린 것을 보면 문종시대까지도 姓을 쓰지 아니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文宗 九年의 이 法令은 實로 우리 나라 姓의 한 時期를 긋는 것으로서 이때부터 姓이 普遍化되어 一般民衆이 다 姓을 쓰게 되었다. 우리 나라 姓氏中 文宗 이후의 사람을 始祖로 하는 氏族이 많이 있는데 이것은 문종 이후에 姓을 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高麗中期 文宗 이후 성이 普遍化되었으나 奴婢등 賤人階級에 이르러서는 朝鮮初期까지도 姓을 쓰지 아니하였다.
第 二 章
族譜의 意義와 由來
第 二 章 族譜의 意義와 由來
第 一 節 族譜의 意義
族譜는 一族의 血統과 家系를 알고 同族의 團結과 보다 나은 활동을 추진하기 위한 값진 氏族의 寶鑑이다. 그렇다면 族譜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族譜란 氏族間에 만들어진 家族의 系統을 기록한 書冊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族譜』『宗譜』『家譜』『世譜』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은 『譜』는 원래 系圖를 中心으로 한 것이며 系圖에 해당된 部分이 生命으로 되어있으나 一族의 歷史를 나타내기 위해 各種의 文獻이나 資料, 혹은 規定 등이 附加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어떤 氏族사이에는 그 先祖中 특히 忠․孝․節․義가 世上에 表顯된 人物을 들어서 그 事蹟․功績을 蒐錄한 것도 적지 않다. 族譜는 一家의 歷史를 표시하는 것으로 家系의 連續을 實證하는 것이므로 家系의 永續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더구나 先祖中 國家社會에 有爲의 功績을 남겨 세상의 崇仰을 받은 名望있는 人物이 있을 때는 그 遺業을 讚揚하고 스스로 그 後裔임에 긍지를 갖게 되므로 더욱 그것이 중요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第 二 節 族譜의 由來
族譜는 어느 나라나 처음에는 王室의 系譜에서부터 始作되었다. 이른바「王代實錄」이니 「璿源錄」이니 하여 王室의 系統을 記錄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各氏族의 族譜가 發達한 것은 과연 언제부터인가에 對하여는 이를 明白하게 알 길은 없다. 그러나 一般的으로 中國의 漢나라 時代부터 이것이 始作되었다고 보는 見解가 많은 것 같다. 여러 가지 文獻에 의하면 後漢以後 中央 또는 地方에서 代代로 高官을 배출하는 右族 冠族이 成立됨에 따라 門閥과 家風을 重要視하는 思想이 높아져 이때부터 譜學이 發達하기 始作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族譜는 高麗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傳해지고 있다. 亦是 王室의 系統을 記錄한 것으로부터 始作되었던 것은 勿論이다. 高麗社會는 門閥貴族의 形成으로 族譜가 流行하였고, 身分에 따라 社會活動 및 出世의 制限은 말할 것도 없고, 문벌이 낮은 가문과는 혼인을 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우리 나라에서 族譜를 編成, 刊行을 促進시킨 그 當時 社會의 特殊한 배경과 性格을 度外視할 수는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러 가지 記錄에 依하면 高麗時代의 權門貴族에 있어서는 이른바 族譜의 體制를 具備한 世系․行列의 方式을 取한 것이 적지 않다. 이러한 系圖에 依하면 同行列에 있는 여러 人物이 같은 字根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것은 當時 이미 系譜에 關한 觀念이 一般化되었다는 것을 말해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文宗 때에는 姓氏 血族의 系統을 記錄한 簿冊을 官에 備置하여 科擧에 應試하는 자의 身分關係를 밝혔으며 朝鮮時代에는 儒敎를 國是로 삼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姓族派別로 家乘을 明白히 할 必要가 생겨 族譜가 없는 집안은 행세를 할 수 없을 정도로 族譜가 성행하였고 그 체제도 현재의 형태와 같이 완성되었다.
◎ 族譜의 發刊 族譜의 意義와 由來 우리 나라에서 어느 姓氏 族譜가 가장 먼저 出刊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이 문제는 한마디로 斷言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一般的으로 最初로 刊行된 族譜는 文化柳氏의 族譜라 알려지고 있다. 이 化柳氏族譜는 一五二二 ~ 一五六六(中宗 一六 ~ 明宗 二一) 嘉靖年間에 나왔기 때문에 이를 흔히 嘉靖譜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傳하여 내려온 族譜 가운데 文獻的으로 오래된 것으로 信賴할 만한 것은 安東權氏의 成化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成化譜는 成宗(一四七六) 明나라 憲宗成化 十二년에 刊行된 것으로 이것은 文化柳氏 嘉靖譜보다 約 八六年 앞선 셈이다. 그런데 文化柳氏 嘉靖譜序文 가운데는 嘉靖보다 一四0年前이 되는 明나라 永樂年間(世宗五 癸卯)에 이미 文化柳氏譜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永樂譜가 果然 刊行本인지 혹은 筆寫에 그치는 程度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여간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族譜는 當時 階級社會의 産物로 安東權氏譜․文化柳氏譜등이 오늘날 남아 있는 最古의 族譜라 할 수밖에 없다.
※ 參考 : 羅州林氏가 己亥(1659)년에 林氏에서는 제일먼저 族譜를 발간
第 三 章
林氏의 起源
第 三 章 林氏의 起源
第 一 節 林氏의 得姓由來
우리 林氏가 林이라는 姓을 가지게 된 연원에 대해서는 神人說과 比干說의 두 가지 학설로 전하여지고 있으나 一九五0年代 後半부터 대만과 中國과의 文化交流가 시작되면서 各種文獻과 情報蒐集이 容易하게 됨에 따라 林氏上系에 대한 資料도 많이 入手하게 되었다. 종전까지는 두가지 설이 전래되었으나 考證資料에 의거 比干說이 定說로 되었다.
① 神人說
神人說은 지금으로부터 약 오천년전 중국 唐堯의 堯임금시대에 신인 한 사람이 冀州 太原縣의 두나무 아래로 내려오셨는데 그 용모가 심히 훌륭하고 또한 재주와 지혜가 남보다 뛰어남으로 임금께서 林이라는 姓을 내리셨다는 설이다.
② 比干說
比干說은 BC천년경 중국의 殷나라 말엽 은나라 왕자 比干이 당대의 暴君 紂王의 숙부로 주왕의 폭정을 만류하니 주왕이 옛부터 충신의 염통에는 구멍이 아홉 개가 있다 했는데 진실로 충신이라면 염통 구멍이 아홉 개가 있겠다 하면서 비간을 죽이었다. 비간공은 殷나라 太丁大王의 둘째 아드님이시고 紂王의 叔父이시다. 비간공이 은말 주왕에게 直諫하다가 죽음을 당하자 正夫人 陳氏는 임신중에 長林山으로 피신하며 살다가 得男을 하니 泉이라 이름을 하였다. 은나라가 亡하고 周나라가 建國하자 武王이 비간공의 子 泉을 찾아 林氏의 姓과 堅이라는 이름을 賜한 것으로 記錄되고 있다.
예로부터 충신의 본보기로써 童蒙先習에 比干이 忠諫하다 죽으니 이같은 충신의 절개는 실로 역사에 드물다.
第 二 節 韓國林氏 始祖
◎ 始祖東渡說
① 武王時 箕子 從來說
武王時 箕子 從來說에 의하면 우리 임씨는 동방의 外來姓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씨족으로써 周나라 武王元年 서기 기원전 一一二二년에 箕子가 동래할 때 箕子를 따라 동래하여 우리 나라 임성의 시조가 되었다는 설이다.
② 唐末東渡說
이 설은 林八及이 唐나라 文宗때 나이 十八歲로 벼슬에 너무 충직하여 翰林學士가 되었는데 群小奸輩들의 모함을 받고 동료 七人과 함께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오시어 彭城龍珠坊에 닻을 내리시었다. ※參考(중국남단 복건성 팽성에서 출항)
新羅에 出仕하여 官職이 吏部尙書에 이르렀는데 때 마침 敵兵이 邊方을 침입하므로 公이 분연히 토벌하였다는 것이다.
③ 後唐東渡說
西河公文集에 의하면 後唐 明宗 때를 東渡時期로 하고 있다. 이時期는 서기 九二六년에서 서기 九三三년에 이르는 기간으로 新羅의 마지막 임금인 敬順王때에 해당된다.
따라서 東渡說로서 이상과 같이 周나라 武王 元年 東來說과 唐末 東渡說중에서 唐 文宗時 東渡說과 後唐 明宗時 東渡說이 있으나 이 세가지 설이 다함께 東方林氏의 始祖는 學士公 八及으로 中國에서 우리 나라로 東渡하여 오셨다는 사실은 동일하며 모든 林氏의 族譜와 記錄이 일치함으로 東渡時期만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林氏의 起源 첫째로 周나라 武王 元年 箕子從來說은 지금으로부터 約 三一00年前에 東來했다고 하는바 우리 林氏가 東方에서 오랜 歷史를 가진 氏族이라는데는 異義가 없겠으나 理論上에 문제가 생긴다. 즉 得姓說에서 比干) 설과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왜냐하면 이때에는 堅이라는 분이 長林山에 隱居하였던 時期임으로 東來한 始祖가 堅公이라면 몰라도 箕子라면 이론상 합리화될 수 없다. 또한 族譜에 蘊을 始祖로 하는 경우가 있으나 먼저 언급한바와 같이 蘊이란 분은 唐나라 中興期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뒷바침하는 것으로 西河公 文集가운데 수록되어 있는 中秋會飮序에 李伯이 친구 張渭와 함께 郎官湖에서 놀았고 林蘊은 歐陽詹과 같이 長安에서 달맞이를 즐겼다하나 그러나 乾元 貞元이후로는 달맞이하는 풍속이 없어져서 五六百年동안 볼 수 없었다.
금년 中秋 하루전날 李君湛之가 나에게 글을 보내어 하는 말이 내가 오늘 저녁에 술을 갖추어 明月아래 잔을 주고받으며 우리집 故事를 다시 닦아볼까 하는데 자네도 濟南(林蘊의 號)의 後孫이 아니던가 어찌 옛 情을 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따라서 李君湛之가 西河公을 가리키며 자네도 濟南의 後孫이 아니였던가 한 것으로 보아 林蘊은 唐나라 분이였으므로 周나라 武王시 箕子從來說은 타당치 못하다고 본다.
둘째는 唐末東渡說 또는 後唐東渡說중 어느 것이 타당성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西河公이 一一三八年에서 一一七一年代 분으로 先祖東渡後 불과 二~三百年 내에 後孫의 말이 가장 신빙성이 있는 듯 하다. 따라서 唐末東渡說 즉 唐나라가 망하기 직전 八五0年代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文獻으로는 八學士중 薛仁敬의 東渡詩에서������李氏는 唐廟의 운수가 다함이여! 賢士들이 참소를 당하는도다(仙李運衰兮賢士被讒)������라고 쓴 글귀로 보나 劉荃의 詩에서������二祖 즉 기자와 미자가 바다로 들어감이여! 殷나라가 망했도다.(二祖入海兮 殷道衰亡)������라고 한 것 등으로 보아 唐末 前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우리 文獻중 七賢이 바다를 건너 팽성용주방에 자리를 잡았다 라고 記錄되어있고 그동안 연구조사결과 八學士들께서는 農城을 쌓고 상당기간 共同生活을 하다가 七學士들은 각자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셨고 八及公께서만 남아 定着한 것으로 傳하여지고 있다.
◎ 八學士東渡詩
林八及 : 入人浮海兮 桂棹蘭檣
薛仁敬 ; 仙李運衰兮 賢士被讒
許 董 : 吾徙東矣兮 可以免禍
劉 筌 : 二老入海兮 殷道衰亡
宋 奎 : 接淅而去兮 謝暗投明
崔 沍 : 波濤濶矣兮 舟楫利逝
權之奇 : 見機而作兮 疏廣之徒
孔德狩 : 賢士出東兮 竭誠盡忠
여덟사람이 바다를 건넴이여 계수나무 돛대와 난초의 삿대로다
李씨(중국)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賢士들이 참소를 당하는도다
우리들은 동으로 가니 가히 화를 면하리로다
二老(箕子,微子)가 바다로 가니 殷나라도 망하더라
절강(淅江)에서 떠남이여 어두운 곳 버리고 밝은곳 찾아가네
파도가 넓음이여 뱃길을 편히 가누나
기미를 보아 행동하니 疏廣같은 사람들이로다
賢士들이 동으로 가면 정성과 충성을 다 하리로다
第 四 章
韓國 林氏上系
硏究調査
第 四 章 林氏 上系 系譜에 관한 硏究調査
第 一 節 硏究調査 報告書
1. 序 言
우리 임씨(林氏)는 韓國의 10大 姓氏로 관향(貫鄕)은 24貫으로 分貫 되어있으나 모두 같은 조상(祖上)의 후손(後孫)들이다 다른 성씨(姓氏)도 마찬가지이지만 과거 족보 발행과정을 보면 교통이 불편(不便)하고 통신시설이 열악하여 자파(自派)나 자관(自貫) 중심으로 편집하였기에 오류(誤謬)가 많이 있다.
다행한 일은 최근 두 가지 동도설(東渡說)에서 장림산(長林山) 임씨(林氏) 원류(源流)가 밝혀 진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도시조(都始祖) 八及公에서 각 관향(貫鄕) 관조(貫祖)까지는 系代를 못하고 국내에서 발행하는 족보 관련 문헌 등이 편 저자(編著者)에 따라 각양 각색이어서 후손으로서는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이런 점을 우리 세대에서 심도 있게 연구하여 다음 세대에 바르게 전해주어야 할 책무를 느끼던 차에 1998년 전국 임씨 중앙회가 발족, 한국 임씨 상계를 定立하는 일에 우선 사업으로 선정하였다.
이 사업은 대단히 어려운 일로 족보 발간 역사도 400여 년이 넘지 못해 왕족을 제외하고는 사료(史料) 등이 부족하고 각종 사화(士禍)나 전란으로 있는 자료도 소실되는 등 고증 자료가 부족한 것이 애로점이다.
중앙회에서는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족보 연구 분과 위원회를 구성 2000년에 大田 뿌리공원에서 2001년에 예천(醴泉) 玉川書院에서 林氏 上系에 관한 세미나를 갖고 집약한 내용을 정리 발표하고자 하오니 앞으로 계속 여러 종친과 강호 제현의 질정(叱正)을 받아 보완 해 나가고자한다
2. 八及公 東渡 年代와 東渡에 관한 調査
1) 東渡 年代 調査
팔급(八及)公의 동도(東渡) 연대는 상계(上系) 정립(定立)에 중요한 요인으로서 지금 까지는 당나라 문종(文宗)조(827-840)이라는 설과 후당(後唐) 명종(明宗)조(926-933)라는 설이 있고 일반적으로는 서기 850년~900년 전후라고만 전해 오고 있다.
그러나 上系 연구 과정에서 논자(論者)가 조사 한 바에 의하면 서기 870년 전후가 타당하다고 본다. 그 논거(論據)로는
(1) 최근 한국 林氏 원류(源流)가 밝혀 저 득성(得姓) 林氏 80世 온공(蘊公)이 구목연파(九牧衍派) 제육방(第六房)의 시조로 당나라 정원(貞元) 4년(서기 788년)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한 史料와 팔급공(八及公)의 종조부(從祖父)격인 동공(同公)이 821년 급제, 팔급공의 동항(同行)인 상청공(尙淸公)이 866년 급제(及第)등의 기록이 중국 자료에 명기되어 있으며 온공(蘊公)이 八及公의 고조부(高祖父)가 되므로 중국 자료를 종합하면 870년경이 추정된다.
(2) 양저공(良貯公)은 신라 경순왕(敬順王)(927-935)의 왕자 정현(貞顯)의 사위로서 재상된 행적에서 고려 건국이 918년 신라 멸망이 935년 당나라 멸망이 907년 후당(後唐)은 923-935년이 된 점으로 보아 위와 같이 추정 할 수 있다.
(3) 팔급공(八及公)은 당 덕종(德宗) 乙巳生이며 당년 18세에 등과 하여 한림학사를 역임하시다 간신들에 참소를 받아 七學士와 함께 동도 신라 신덕(神德) 왕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였다는 사례(扶安林氏 先祖寶鑑 P 105)
(4) 비간문화(比干文化) 연구회(중국임씨 연구기관) 임수단(林樹丹) 종장(宗長)이 당나라 말경에 八及公이 바다 건너 신라에 간 후 1088년만에 임윤화(林允華)고문이 중국방문단을 인솔 조상의 뿌리도 찾고 조상의 유적을 참배한 일은 팔 민(八閩)을 놀라게 했다는 자료 (팔민은 중국 하남성, 복건성, 대만에 사는 임 씨를 총칭) 林氏上系 硏究調査 (5) 팔급공 후손들이 사료(史料)에 나와 있는 사실을 연대로 역산했을 때 870년 전후가 타당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에는 임언(林彦)을 927년 고려 태조 10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고 임희(林禧)는 1045년 송나라 대상(大商)과 토산물을 교류 했다하고 임명필(林明弼)은 918년에 순군부령(巡軍部令)으로 임희(林曦)는 병부령(兵部令)으로 명했으며 그 외도 임적여(林積璵)는 광평시랑(廣評侍郞) 임상난(林湘煖)을 도항사향(都航司鄕)으로 임식(林寔)은 廣評郎中으로 하였다는 사료(史料)가 있다.
2). 東渡한 根據 資料
우리 나라 임씨가 중국에서 동도 했다는 이설(二說)은 과거 국제교류가 없었던 시대의 일이며 최근에 장림산 임씨원류가 정설로 밝혀졌다. 왕손인 은태사(殷太師) 比干公 (기원전 1092-1029)의 아드님 견공(堅公)이 이 세상 모든 임씨의 시조이고 우리 나라는 80世 온공(蘊公)(서기 788년)의 玄孫인 팔급공이 우리 나라 林氏의 도시조(都始祖)이다 그 근거 자료는
(1) 우리 나라 구보(舊譜)에 계대는 되어 있지 않으나 온공(蘊公)을 시조로 하고 있다. (자료: 平澤譜 扶安譜 恩津譜등)
(3) 중국 임씨 대동보 (대만 발행, 전북 林鍾天 고문 소장분 복사)에 80世 온공(蘊公)이 구목연파 第六房의 시조이고 81世 원공(愿公) - 82世 옹공(邕公) - 83世문범(文範)공으로 계대 되어 있으나 문범(文範)公 장자 자리가 비여 있고 차자는 文回公으로 계대 되어 있다.
(4) 1996년 한국 중국 대만 성씨 원류(源流) 국제 세미나에서 문범공의 장자가 八及公이라는 계대를 삼국대표 (林允華 林樹丹 林瑤棋 宗長)가 족보 대조 절차를 거처 문범공과 팔급공의 부자 간 계대를 정립한 점
(5) 1997년 중국 복건성에 신축한 비간전(比干殿) 준공식을 겸한 祭享에 참석했던 한국 대표단과 중국에 사는 文回公 후손 대표들이 형제간 후손의 정을 이산가족 상봉의 장면과 같이 확인 한 점
(6) 구목연파 제육방 보첩에 ������閩林二十世 文範公 生一者 八及 海東林氏 始祖 移居 신라국������으로 기록된 점 (자료: 韓國林氏源流族譜)
(7) 팔급공이 동도 하시기 전 본향인 복건성(福建省) 동령(東岭) 항아촌(港牙村)에 살았던 가옥에 벽화 등이 남아 있고 팽성(彭城)이라는 마을 이름을 지금도 쓰고 있는 점과, 2001년 전국 임씨 중앙회 국제 분과 위 주관 중국 유적 답사반이 중국 종친과 합동으로 현장에 팔급공 동도 기념비(東渡 記念碑) 준공식을 갖는 등 양국 간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는 점
(8) 팽성 부근 복건성 보전(甫田)에 구목사(九牧祠)가 있는 점(구목사는 온공의 할아버지 아버지와 구형제(九兄弟)의 묘와 영정(影幀)을 모신 곳이다).
(9) 농성(農城) 유적조사(1998년)를 평택시(林完洙 林貞喆 종친 주선)에서 수원대학교 박물관에 의뢰 조사한 결과 忠節公(휘 八及)이 중국에서 동도하여 정착했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자료 (농성유적조사보고서)
이상의 자료에 의거하여 볼 때 팔급공이 중국에서 동도 했다는 것이 확실하며 우리 나라 林氏는 구목연파(九牧衍派) 제육방(第六房)의 계보 손이다
3. 八及公에서 夢周公까지 系代 調査
도시조(都始祖) 팔급(八及)公에서 몽주(夢周)公까지는 단관(單貫)평택(平澤)貫(彭城)으로 내려오다 몽주공의 구미(九美) 아들 대에서 여러 관으로 분관 되였으나 상계의 계대가 되지 않아 정립이 시급한 실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중앙회(中央會)에서는 2000년 11월 대전(大田) 뿌리공원에서 2001년 7월에는 예천 '옥천서원(玉川書院)'에서 두 차례의 족보연구 분과위원회 세미나를 통하여 집약된 내용이다.
一世 二世 三世 四世 五世 六世 七世
林八及 ― 良貯 ― 碔 ― 禧 ― 冕 ― 得雨 ― 夢周公
위 계대(系代)를 고증하는 구보(舊譜) 자료로는
① 1829년 기축보(己丑譜)(울진관)
② 1871년 임신보(壬申譜) 평택관
③ 1874년 林氏 世家 大同譜(林吉相 제공)
④ 1899년 林氏 大同 世譜 元編
⑤ 1924년 彭城林氏大同譜(甲子譜)에서는 모두 一世, 二世, 三世 등으로 되어 있거나, 세대(世代) 기록 없이 차례대로 편제(編制)되어 있다.
구미(九美)(아홉 美)의 손(孫) 중 계미공(季美) 系는 순창관조(淳昌貫祖)를 득우(得雨)로, 예천관조(醴泉貫祖)를 몽주(夢周)로, 부안관조(扶安貫祖)를 계미(季美)로 3세대가 위의 구보(舊譜)에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구보 자료에 1874년 林氏 世家 大同譜 卷之一의 八及公 난에 평안도 개천(介川) 묘향산에 세워진 팔급공(八及公)의 묘갈명(墓碣銘)을 증손 충숙공(忠肅公)이 찬(撰)하였다는 자료가 있다. 이것은 충숙공(忠肅公)인 희공(禧公)이 팔급공의 증손자이고, 팔급공이 증조부이며, 양저공(良貯公)이 조부, 무공(碔公)이 아버지란 사대(四代)의 계대(系代)를 알 수 있다.
년대(年代) 상으로 검토(檢討)해 보면 팔급공(八及公)의 상대(上代)에 고조부인 온공(蘊公)의 관직 년대가 788년, 종조부인 동공(同公)이 821년에 급제하고 팔급공과 동항(同行)인 상청공(尙淸公)이 866년에 급제하였다는 것을 종합 고찰해 보면 1世代가 평균 25년으로 추정되는데, 근대와 같이 1世代를 평균 30년으로 보는 것과 8․9세기(世紀)와 같이 의술이 발달치 못한 시대의 평균 1세대 연수가 낮은 것도 일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같은 논리로 팔급공(八及公)이 870년경에 동도(東渡)하고 7世인 몽주공(夢周公)까지를 一世代를 평균 25년으로 본다면 서기 1020년이 되고, 1世대를 평균 30년으로 본다면 1050년으로 되는데 몽주공(夢周公)의 관직 년도가 1010~1031년이므로 연대 상으로 보아도 타당성을 인정할 만 하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논거는 오래된 충정공(忠貞公)(휘 彦脩) 비문(碑文)에 온공(蘊公)을 시조로 충절공(忠節公) 팔급공(八及公)이 태사(太師)공 양저(良貯)를 낳고 양저(良貯)공이 충렬(忠烈)공 무(碔)를 낳고 무(碔)공이 충숙(忠肅)공 희(禧)를 낳고 희(禧)공이 시중공(侍中公) 면(冕)을 낳고 면(冕)공이 시금위???(侍禁衛) 득우(得雨)를 낳고 득우(得雨)공이 충선공(忠宣公) 몽주(夢周)를 낳다 는 기록은 본 계대(系代)를 확실히 고증하고 있다.
이상 여러 자료를 종합 검토하여 팔급공(八及公)으로부터 몽주공(夢周公)까지의 계대(系代)를 정립(定立)하고 이를 제청한다.
표1 韓國林氏 上系資料
代數
諱
官 職
諡 號
配 位
墓地
王 代
年代(일부는 推定)
1世
八及
翰林學士
吏部尙書
忠節公
貞敬夫人
福州金氏
彭城
新羅 景文
서기 870年경
2世
良貯
太師
上將軍
太師公
貞敬夫人
慶州金氏
善山
新羅 孝恭
″ 900年 추정
3世
碔
上將軍
彭城伯
忠烈公
貞敬夫人
開城王氏
平安道
介川
高麗 太祖
″ 927~935年
(관직기간)
4世
禧
門下侍中
忠肅公
貞敬夫人
驪興宋氏
開城
″ 惠宗
″ 950년 추정
5世
冕
門下侍中
侍中公
貞敬夫人
草溪鄭氏
開城
″ 定宗
″ 946~ 947年
(관직기간)
6世
得雨
侍禁衛???
貞敬夫人
開城王氏
彭城
″ 光宗
″ 950~ 975年
(관직기간)
7世
夢周
評察品事
忠宣公
貞敬夫人
開城王氏
牙山
″ 顯宗
″1010~1031年
(관직기간)
◎ 上系先祖人物 事蹟
一世 八 及 (팔급. 忠節公)
서기 870년 경 중국 복건성(福建城) 동령(東鈴) 팽성(彭城)에서 七學士와 함께 唐나라 말기의 혼란을 피해 지금의 평택시 팽성(彭城)읍에 동도 하셨다. 당나라에서는 18세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시작 신라 국에서는 이부상서(吏部尙書)의 높은 벼슬에 이르고 변방 외적의 침입을 막은 큰 공으로 시호(諡號)는 충절공(忠節公)이며 묘소는 팽성읍 안정리에. 배위(配位)는 貞敬夫人 福州 金氏이시다. 묘갈명(墓碣銘)은 증손 충숙공(忠肅公)이 쓰시다.
二世 良 貯(양저. 太師公)
신라조에 出仕하여 태사(太師)와 상장군(上將軍) 중랑장(中郞將)에 이르고 경순왕자(敬順王子) 정현(貞顯)의 사위이며 덕이 있는 재상으로 충직의 절개가 높아 경순왕(敬順王)이 고려조에 귀순을 하고자 할 때 군주의 도리가 아니라고 직간하여 왕의 노여움을 사 선산(善山)으로 유배되어 생애를 마치었다 배위는 정경부인 경주 김씨이고 부는 정현(貞顯)이며 묘지는 선산(善山) 야성(野城)에 있다. (註) 正史와 宗史가 一致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나 硏究結果가 나오기까지는 從前記錄되로 移記함.
三世 碔 (무 .忠烈公)
벼슬이 상장군(上將軍)에 이르시고 공이 있어 평택(平澤)君에 봉작하였으며 시호(諡號)는 충렬공(忠烈公).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開城 王氏이다. 묘지는 平安道 介川 雲岩洞에 있으며 묘갈명(墓碣銘)은 후손 충정공(忠貞公) 언수(彦脩)가 쓰시다.
四世 禧 (희 忠肅公)
고려 壁上 三韓 三重 大匡의 관직에 오르고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다. 배위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여흥(驪興) 송씨(宋氏). 묘지는 開城 南山에 있으며 묘갈명(墓碣銘)은 후손 忠貞公 언수(彦脩)가 쓰시다.
고려에서 시금위(侍禁衛)의 관직에 오르고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개성왕씨(開城王氏). 父는 윤(倫)이다. 묘지는 평택시 팽성읍 용주방(龍珠坊)에 배위(配位) 묘는 龍仁 大峙에 있다. 현 순창(淳昌) 林氏 관조(貫祖)이시다.
七世 夢周 (몽주. 忠宣公)
고려에서 평찰품사(評察品事)의 관직에 오르고 아우님이 몽정(夢程) 몽상(夢商)이 있으며 九美 즉 自美 秀美 見美 斗美 箕美 允美 伯美 仲美 季美의 아홉 아들을 두고 모두 君으로 봉작(封爵)한 인연으로 많이 분관하였다. 배위는 정경부인(貞敬夫人) 풍천(豊川) 임씨(任氏)이고 묘소는 牙山 九月洞에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시다. 현 예천(醴泉) 林氏 관조(貫祖)이시다.
4. 夢周公에서 起世祖까지 系代調査 (平澤貫)
한국 임씨의 대부분의 관향은 평택관(平澤貫)에서 분관하였다. 상론(上論) 한 바와 같이 일차 분관은 구미손(九美孫)에서 많이 하였다. 지손(支孫)인 계미공(季美公)系 醴泉 扶安 관등은 계대(系代)가 잘 정립되어 있으나 종파(宗派)인 평택관은 그러치 못하여 큰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논자(論者)는 오래 전부터 팽성(彭城) 임씨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 추진한바 도 있었으나 평택관만으로는 해결하기가 어렵고 평택관에서 분관한 타관과도 공통점을 찾아야 하기에 전국 규모의 조직이 필요하여 전국임씨 중앙회 창립후로 삼대 사업으로 추진하게 된 것이다.
중앙회에서는 우선 기초작업으로 전객령(典客令)계와 충정공(忠貞公)계의 기세조(起世祖)가 같은 시대임을 규명하고 양계열(兩系列)에 관련된 갈곡공(葛谷公)계의 계대(系代)가 선행해야 하기에 이 분야에 연구를 많이 한 임병구종(林炳九宗)과 연구를 교류하였다.
그 결과 두 기세조(起世祖)는 같은 시대 조상이며 갈곡공(葛谷公) 계보도 명확히 정립하는 개가(凱歌)를 올려 중앙회에서 대단히 큰 일을 하였다고 주위에서 치하를 하고 한다.
참고로 정립 전에는 양쪽 기세조(起世祖)를 한 쪽은 상대 기세조(起世祖)를 손항(孫行)에 또 한쪽은 반대로 증손항(曾孫行)에 계대 하는 등 부끄럽기 그지없든 것을 바르게 정립하였다.
양 기세조의 같은 시대 조상이란 사적(史的) 논거는 세춘(世春)공의 배(配) 청주경씨(淸州慶氏)는 경수(慶綏)의 딸로 그의 조상은 정중부(鄭仲夫)의 난을 토평(討平)한 청년 무장으로 유명한 경대승(慶大升)이요 그 후손인 경수(慶綏)는 고려조에 판서(判書)였던 인물이며 그의 아들 경사만(세춘(世春)공의 처남)은 1322년 대언(代言)의 관직에 있었고 그의 아들 경부흥(復興)(일명 千興)은 1372년 좌시중(左侍中) 1374년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있다가 1380년 사망한 인물임을 고려사에서 볼 수 있다. 이로 미루어 경부흥은 견미(堅味)공 보다 10년 전 시중이 되었으니 동년배로 볼 수 있으며 그의 아버지인 경사만(斯萬)은 언수(彦脩)공과 동년배임을 입증 할 수 있다.
이상으로 추정 할 때 1385년에 서거하신 언수(彦脩)공의 출생 년도는 1296년으로 경사만의 1322년 고려조 대언(代言)직은 세춘(世春)공과 남매간인 점으로 볼 때 언수(彦脩)공과 세춘(世春)공이 동 연배임을 추정함은 타당하다고 본다.
또한 두 분은 같은 지역에 사셨던 자료는 구보에 같은 지역 경북 구미시 선산읍 고양리(高陽里)에 유택(幽宅)이 있다는 것이 형제 간 등 앞으로 연구 할 자료를 시사해 준다.
④ 1924년 팽성(彭城)임씨(林氏) 대동보(大同譜)인 갑자보(甲子譜)등을 검토 해보면 견미공(見美公)에서 언수공(彦脩公)까지 몇世 몇世 해서 기록된 것도 있고 순서대로 내용을 기록 된 것도 있다.
다만 견미(見美)공 다음 대 색(塞)공과 만옥(萬玉)공이 일부 보첩에 기재되지 않은 것도 있고 정확하게 일부 보첩에는 一世 夢周 二世 見美 三世 塞 四世 萬玉으로 된 보첩이 있고 순창(淳昌) 족보에는 색(塞) 만옥(萬玉)공을 팔급(八及)공 다음으로 편제된 것이 있으나 여러 면으로 검증 해 보와도 순창(淳昌) 자료는 오류임을 알 수 있다.
몽주(夢周)공에서 언수(彦脩)공까지는 약 250 년간인데 색(塞) 만옥(萬玉)공이 견미(見美)공 다음에 편제된 보첩이 바르다는 논거가 성립된다.
그 외의 계대는 여러 족보가 같은 내용이고 더욱이 충정(忠貞)공 비문(碑文)에 희윤(喜胤)공이 평장사(平章事) 련(璉)을 낳고 련(璉)공이 문하시중(門下侍中) 정(楨)을 낳고 정(楨)공이 좌찬성(左贊成) 완(玩)을 낳고 이 분이 충정공(忠貞公)(휘 彦脩)의 아버지라고 明記되어 있다.
이상 여러 족보와 오래된 충정공(忠貞公)(휘 彦脩)의 비문 그 외 시대의 검증을 종합 해 볼 때 논자는 상기 몽주(夢周)공에서 언수(彦脩) 공까지의 계대(系代)가 바르다고 본다.
표2 韓國林氏 上系 資料(平澤貫)
世數
諱
官 職
諡 號
配 位
墓 地
王 代
年代(일부는 推定)
8世
見美
光祿大夫
平澤君
貞敬夫人
延日鄭氏
高麗睿宗
서기 1090년경
9世
塞
兵部侍郞
貞夫人
達城徐氏
″ 仁宗
″ 1120년경
10世
萬玉
評察事
貞敬夫人
金氏
″ 毅宗
″ 1150년경
11世
喜胤
崇綠大夫
貞敬夫人
光山金氏
開城
″ 神宗
″ 1171~1197년
(관직기간)
12世
璉
三重大匡
貞敬夫人
開城王氏
開城
″ 高宗
″ 1210년경
13世
楨
門下侍中
貞敬夫人
三嘉具氏
″ 元宗
″ 1214~1259년
14世
玩
大匡贊成
貞敬夫人
光山金氏
未詳
″ 忠烈
″ 1275~1308년
(관직기간)
15世
世春
世子典客令
淸州慶氏
高陽
″ 忠烈
″1275년~1308년
(관직기간)
15世
彦脩
平城府院君
忠貞公
貞敬夫人
金浦公氏
高陽
″ 忠烈
″ 1294년생
1384년졸
5. 結 言
족보 연구분과 위원회에서는 전 관향(全 貫鄕)과 관련이 있는 도시조(都始祖) 팔급공(八及公)으로부터 몽주공(夢周公)에 이르기까지의 계대(系代)와 (1차 분관) 몽주공(夢周公)으로부터 평택관(平澤貫)의 기세조(起世祖)에 이르기까지의 계대(系代)를 수립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그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앞으로도 계속하여 미완(未完)된 상계(上系)의 계보(系譜)는 계속하여 연구해야 할 과제는
1. 나주관(羅州貫)과 은진관(恩津貫)은 몽주공(夢周公)의 아드님 항렬(行列)인 자미(自美)公으로부터 분관(分貫)한 것은 사실이나 두 관향(貫鄕)의 1세조(1世祖)까지의 계대(系代)를 확정하는 문제
2. 선산관(善山貫)은 여러 가지 구보(舊譜)자료에 의하면 충정공(忠貞公) 아드님 의미(毅味)公으로부터 계대(系代)되어 왔으나 선산관(善山貫)의 종친회에서는 약400년 간 앞의 양저공(良貯公)에 계대(繼代)하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계대(系代)를 정립하는 문제
3. 익산관(益山貫)과 옥구관(沃溝貫)은 조선 건국에 따라 고려시대의 현조 들에게 삼족을 멸하게 되므로 서 후손들이 은거 생활을 하여 관향(貫鄕)을 고쳤기 때문에 1994년 평택 임씨(平澤林氏) 평원부원군파(平原府院君派) 파보 발간 시에 합보 함으로서 족보上으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나 그 이외의 계보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문제
4. 안동관(安東貫)은 팔급공(八及公) 이전의 신라 박혁거세(朴赫居世) 시대의 동방공(彤芳公)으로부터 계대(繼代)하는 안동관(安東貫)과 조양관(兆陽貫)으로부터 분관(分貫)한 안동관(安東貫)의 두 관향(貫鄕)의 계대(系代) 관계
5. 옥야과(沃野貫)의 상계(上系)를 팔급(八及)公系와의 계대(繼代)를 하는 문제
6. 조상(祖上)의 휘(諱: 이름) 중 각종 족보 관련 저서의 편저자(編著者)에 따라 착오가 있으므로 이번에 중앙회에서 다음 정오(正誤)를 정립하였다
1) 林季味, 林世椿, 林自味는 실존한 이름이 아니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2) 林八汲 林八伋(誤) → 林八及(正)으로
林彦修(誤) → 林彦脩(正)------忠貞 공
林 佑(誤) → 林 祐(正)------蔚珍 관조
林 沅(誤) → 林 元(正)------季美 공의 자
林 溢(誤) → 林 益(正)------西河 공의 손
孔德符(誤) → 孔德狩(正)------八學士中
7. 상기 林 祐公은 우리 족보에 두 조상이 계신데 두 조상 님이 모두 正史에 기록된 훌륭하신 분으로 한 분은 종비(宗庇) 公系 울진 관조(蔚珍貫祖) 林 祐公(蔚陵君)이고 또 한 분은 민비(民庇) 公系의 林祐公(蔚陵君)이 계신다. 종비 공계의 林 祐公(蔚陵君)은 몽주공(夢周公)의 八世 손으로 부친이 종비(宗庇) 公이며 1214년에 登科하여 용호(龍虎)좌윤(左尹)이 되었고 여진족의 난리 때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워 벼슬이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중부상서(中部尙書)에 이르셨다. 몽고가 개경(開京)을 침입 할 때에 임금을 호종한 공으로 울릉군(蔚陵君)에 봉해 졌고 신축 호종공을 수록하면서 二等 공신이 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경공(忠敬公)이다.
민비(民庇) 公系의 林祐公은 몽주(夢周)公의 十五世 손이며 1562년生으로 字는 덕응(德應)이다. 이조(李朝)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義州까지 시종 거가(車駕)를 따르면서 호종하였다. 1604년 6월에 그를 호성공신(扈聖功臣) 三等으로 녹훈(錄勳)하였다는 선조실록에 기록된 公이시다. 이 후손들은 2002년에 처음으로 中央會에 등록되어 알게 되었다.
이상 요지(要旨)는 우리 나라 林氏의 계통을 확연히 밝히고자 하는 취지로 기술(記述)한 것이므로 잘못된 것은 강호(江湖) 제현(諸賢)의 질정(叱正)을 받아 보충하여 林氏 후손들이 총망라되는 상계(上系) 계보(系譜)의 큰 기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첫댓글 부안임씨 계보를 찾아 보려는데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