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탐방
민조시의 개척자 신세훈 시인을 모시고
풀머리
깨어있는
동녘산자락 청시울가에,
홀로
나
잠드네.
달머리
잠빛 밝은
서녘강허리 금물목샅에,
나 홀로
눈 뜨네.
신세훈 시인의 민조시 ‘如 如’ 전문이다. 시인은 민조시라는 새로운 정형시를 창시하고 보급하였다. 시인은 경상북도 의성군 사곡면 매곡리 1850번지에서 태어났다(1941년 2월 22일). 의성에서 사곡초등학교, 의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안동고등학교를 나와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시인은 그 당시를 회상하며 담담하게 말문을 열었다.
안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동안 집에서 쉬었습니다. 의과대학을 안보내주어서요. 그 당시는 일제 강점기였습니다. 쉰 게 아니고 부역을 나가기도 하고 술을 마시며 아버지 속을 썩여드리는 자식이었지요. 난 공부하고 싶은 데 부역가라면 일이 됩니까? 그러니 얼마나 화가 납니까? 그러니 그 땐 부모님 말씀 잘 듣지도 않았지요. 저는 자랄 때 아주 말썽꾸러기였습니다. 여학생을 놀려도 늘 앞장서서 놀렸고 싸움을 해도 늘 앞장섰지요. 그때도 아주 말을 잘 했던 것 같아요. 호박에 말뚝 박는 건 아주 기본적인 장난이고 그보다 훨씬 심한 장난도 많이 했지요.
그땐 길 닦는 부역이지요. 길도 닦고 자갈도 깔고 하는 부역이지요. 한번은 부역을 나갔는데 술도가에서 막걸리 배달이 왔습니다. 부역하면서 막걸리를 많이 마시고 이웃마을 아이들이 온 것을 보고 싸움을 걸어 그 중 젤 우두머리로 보이는 아이를 제가 먼저 때려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녀석 부모가 병원에 가서 3주 진단을 끊어서 의성경찰서에 고소해 와서 대구지방법원 소년법원에 재판을 받으러 다녔습니다. 저는 안동 하회에 있는 형님의 장인이 동아일보 지국을 했는데 그 분이 안동 도립병원 원장하고 친해서 도립병원에서 3주 진단을 떼어달라고 해서 맞고소를 했었지요.
당시 소년법원장에게 ‘의과대학에 가고 싶은데 못가서 속이 상해서 싸움을 하게 되었으니 용서해 주시면 큰 사람이 되어서 나라에 기여하겠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거짓말처럼 말끔히 그 흔적을 지워주었더라구요. 그때만 해도 법보다는 일정시대라 그런지 실권자들의 마음대로였던 것 같아요. 소년원 원장이 용서해 주어서 홍역을 치루고 사면되었지요. 편지 한 통으로 사면이 되었으니 글을 잘 써서 덕을 본 최초의 사건이라고나 할까요?
-. 문학은 언제부터 관심을 두고 시를 쓰셨나요?
시는 중학교 때부터 쓰고 고등학교 때도 문예부에 들고 그랬지요. 고등학교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국어국문학과보다는 연극영화과를 가고 싶었습니다. 세상이 결국엔 연극이야기란 생각을 했습니다. 시와 연극이 조상이 하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남이 안가는 곳에 가서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남보다 특별한 것을 배워야 남보다 특별한 시를 쓸 수 있으리란 생각을 했었지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연극영화과를 간 것을 몰랐습니다. 나중에는 아셨지요. 아버지께 3개월의 하숙비와 첫 등록금만 달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학비를 해결하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서울 올라오자마자 아르바이트 하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장학금도 타야하고 하니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아르바이트 했지요. 정말 피나는 노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대학 재학 중에 어려운 신춘문예에 등단하셨습니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썼던 시를 퇴고하고 또 퇴고해서 낸 것이지요. 시 몇 편을 열심히 퇴고하여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보냈습니다. 그 시가 당선된 것입니다. <강과 바람과 해바라기와 나>란 시였지요. 당시 양주동 박사와 박목월 시인이 심사위원이셨습니다. 1962년 당시 저와 함께 신춘문예에 나온 사람들이 한국일보에는 박이도 시인, 동아일보에는 김원호 시인이었고 조선일보에서는 평론에 김현 평론가. 소설에는 김승옥 소설가, 그리고 시에는 제가 당선되었지요.
-. 연극영화과를 다니면서 신춘문예로 일찍 등단을 하신 비결이라도 있으셨나요.
저는 연극영화과였지만 백철 교수에게서 평론을 들었고 조병화 시인에게 현대시론, 최인욱 교수에게 소설론을 들었습니다. 철학과 논리학, 고전문학을 신청해서 듣거나 도강해서 들었습니다. 또 연극영화과이니만치 미술, 음악, 판소리, 가면극, 향가, 가사 등 다양한 예술분야를 두루 섭렵하며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에 제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토대로 말미암아 3,4,5,6조의 민조시를 개척하게 되었지요.
-. 民調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우리민족은 황색인종 원류의 맏자식입니다. 그런 우리민족은 정형시를 많이 만들고 계승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요즘 일본의 단가 형태가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을 기존의 전통 정형시인 시조의 3장 6구로만은 현대문명 문화의 비평적 생각이 수용되기 어렵다고 봅니다. 제가 연극영화과를 다니고 그 이후 시조와 가사 등을 면밀히 분석해 본 결과 전부 3,4,5,6조였습니다. 6은 2,4,6,8,10의 기둥수입니다. 또 5는 1,3,5,7,9의 기둥수이구요. 이 3,4,5,6조만 있으면 우리 민족의 아픔이나 현대감각의 모든 감정들을 충분히 처리해 낼 수 있습니다. 3,4,5까지는 한국의 대표적 율격이고 6은 3의 중복으로 이룰 수 있으니 채택하였고, 그 뒤 7은 3과 4로 반복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없어도 됩니다.
-. 민조시를 개척하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천부경 사상 속에 나타나는 3,4,5,6조의 고유한 장단가락은 천인지(天人地) 사상의 한 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한이라는 것은 중국의 한나라 한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한(韓), 즉 ‘크다, 많다, 최고다, 우두머리다, 임금이다, 우리 전체다’란 최선 최고의 한이지요.
-. 민조시라 이름 붙이고 개척해오셨는데 언제부터 쓰게 되었습니까?
70년대 중반부터 습작을 해왔습니다. 그러던 중 우리 백성을 뜻하는 ‘民’에다가 율조의 뜻인 ‘調’와 ‘詩’를 붙여 民調詩라 명찰을 달았습니다. 개발한 이유는 우리나라의 정형시로 내려오는 시조만으로는 현대 언어나 감정을 다 수용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시조시인들이 과거의 언어에 매달리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인데 정형시의 형태가 꼭 시조 하나만을 유지할 필요도 없고, 다양한 형태의 정형시가 나오면 나올수록 문학사적으로나 시적인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고 생각했고 전통율격을 살린 3,4,5,6조의 민조시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진작부터 해왔기에 2000년 6월에 ‘새정형시 民調詩(3·4·5·6調) 개척 선언문’을 채택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선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새정형시 民調詩(3·4·5·6調) 개척 선언문』
民調詩란 무엇인가? 우리 한민족의 민간 장단으로 흘러내려오는 율조의 소리마치를 문자의 뜻 위에 얹어 빌어 쓴 정형시가 곧 民調詩이다.
民調詩는 왜 새로운 정형시인가? 우리말의 소리마디를 3·4·5·6調의 정형률에 맞춰 쓴 새로운 시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 문학사에는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정형시이다.
民調詩의 정신인 사상 배경과 3·4·5·6調의 정형 율격 근원은 어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가? 새정형시인 民調詩의 사상적 배경은 한민족 고유의 정신 문화 유산인 ‘’사상에 그 밑바탕을 펼쳐두고 있으며, 정형 율격 수리의 3·4·5·6調는 한민족의 철학인 수리학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民調詩의 새정형 자수율을 왜 3·4·5·6調에만 걸어둔 채 정형시로 정착시키려하는가? 한민족의 수리 철학은 허수와 실수의 1·3·5·7·9이며, 또 2·4·6·8·10의 10은 0(제로·+)의 개념으로 설정되어 있다. 1(하나)은 곧 3(셋)이며, 3(셋)은 끝수인 9(아홉)였다. 5는 1·3·5·7·9 중의 기둥수리이며, 6은 2·4·6·8·10의 중간 수리인 기둥수이다. 허수와 실수의 중심 수리인 5와 6다음은 7이지만, 이 7은 우리 민족의 3·4조 말마디가 합해져 되돌아와 모여친 덤의 수리가 7(서양의 럭키 세븐)이다. 그러므로 7을 율조로 잡아 다시 6뒤에 새삼스럽게 설정하지 않고, 3·4·5·6調로만도 충분히 우리의 정신 사상과 율조와 만상의 뜻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기본 수리 3에서 6까지만 정형 수리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는 다 ‘天符經’이나 ― ‘한단고기’보다 먼저 쓰인 - 박제상의 ‘징심록’ 들에 나타난 한민족 고유의 수리학 원전에 근거한 것이다. 民調詩는 과거 우리 문학과의 정형 자수율 관계가 어떠한가? 신라 때의 향가나 고려 가요·가사 및 백제사람 왕인이 개척한 ‘和歌’(일본 정형시)나 우리 가요가 일본으로 건너가 ‘萬葉’이 된 가요(일본 정형시의 원형)나 조선조의 時調·가사·판소리에 이르기까지 다 그 소리의 장단·가락 음수율을 짚어보면 결국 3·4·5·6調로 구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선인들은 시조 부문 하나만 이 땅에 겨우 민족 정형시로 정착시켰을 뿐이다.
최남선 이광수 등은 일본 정형시(7·5조)의 영향(역수입)을 받아 ‘3·4·5調’를 이땅 정형시로 정착시키려고 애써 실험했지만, 그분들은 ‘天符經’ ‘징심록’ 들의 허수와 실수에 작용하는 수리 ‘6기둥수’를 발견해내지 못해 안타깝게도 실패하고 말았다. 3·4·5·6調는 우연의 일치이지만, 바로 위와 같은 3·4·5調에 내가 ‘6’의 기둥 수리를 발견해낸 다음 다시 3·4·5·6調로 정착시킨 새 정형시이다.
民調詩는 조선의 정형시인 時調와는 어떻게 다른가? 시조는 초·중·종장인 3장 6구(3·4/3·4//3·4/3·4//3·5/4·3)로 된 정형시이지만, 살펴보면 모두 3·4·5·6調로 집합 구성되어 있다. 처음 하나(1)인 3으로 시작해서 3으로 끝난다. 이 3의 수리는 ‘天符經’ 천·인·지(○△□)의 사상인 그 3신 사상의 3철학이다. 초·중·종장 첫머리도 3으로 시작하고, 구마다 첫머리 자수 3도 처음의 1(하나)인 3으로 시작한다. 초장 첫머리 3과 중장 첫머리 3도 합하면 6이요, 중장·종장 역시 6(3+3)에, 초·중·종장 첫머리의 합이 9(3+3+3=끝)이다. 초장 첫머리 첫구도 3이요, 둘째 구도 3이다. 종장 마지막 3수리와 만나면 6수리가 되고, 6은 다시 종·중·초장 첫머리 수리와 음악적으로 화합하면 각각은 9수리(끝)가 되는 수철학 구조다.
시조의 기본 음보인 3·4조와 종장의 5수리 구조가 곧 3·4·5조 율격 구성이며, 초·중장의 기본조인 3·4조를 합하면 7조가 된다. 결국 시조도 말마디 리듬을 분석하면 말머리의 위치만 다를 뿐 역시 3·4·5·6조의 구조로 짜여져 있다. 民調詩와는 구성상 그 형식만 다를 뿐이다.
우리 민족의 정형시인 時調가 있는데, 왜 또 정형시 民調詩를 새로 개척하는가? 무릇 시의 형태는 시대가 지나면 변하는 것이 순리이다. 지금 時調도 많이 변했다. 그러나 3장 6구의 자수(약 43자 내외)가 일본 정형시에 비해 너무 글자수가 많을 뿐 아니라, 현대 문명·문화 언어를 이 시조에 수용했을 때는 시가 잘 되지않는 약점이 있다. 시조가 이러한 점들을 현대 감각적인 민족시로 소화시켜내기엔 그 형식에서만 보더라도 너무 벅찬 듯하다.
그래서 나는 향가·여요·판소리·가사·시조…… 들의 정형 율조 구조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낸 컴퓨터칩(예:64KD램→64괘 4차원 수리학 응용 후 성공함)의 수리 집합·분산 원리처럼 우리말마디의 수리를 3·4·5·6調로 民調詩語群에 수용할 경우 자유로이 집합·해체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이 새정형시를 개발한 것이다. 民調詩에는 아무리 어려운 현대의 문명·문화 비평 언어가 시어로 새롭게 끼어든다고 해도 하나 어색하지 않게 시적 효과를 나타낼 수가 있다. 民調詩의 또 한 가지 장점은, 불과 18자로 시 한 수를 뽑아낼 수가 있다는 점이다. 日本의 짧은 정형시(17자)의 자수와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각 말마디마다 얼마든지 거듭 우리의 소리말 장단에 추임새를 매겨 중첩으로 계속 쓸 수 있음도 그 형식에 매인 시조와는 다른 자유로운 언어 세계의 정형시라고 할 수 있다.
<4333(2000). 6. 26. ‘自由文學’ 편집실에서.>
-. 민조시와 조선시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우리 한국 시인이라면, 조선 혈통을 가진 시인이라면, 조선의 호흡과 마음과 장단과 가락에 맞춰서 시를 써야 합니다. 그래야 결국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월시같이 우리 장단과 가락, 민요조로서 쓴 시가 우리들 속에 오래도록 살아남는 거죠. 民調詩도 민요조로서, 형식은 소월의 시어 구조와 비슷한 단수 18자 3.4.5.6조의 구성으로 돼있습니다. 한국인 속에 흐르는 피는 결국 한국 피이기 때문에 언어와 정서 구조 역시 한국적이어야 한다는 얘기와 같은 거죠. 묘하게도 사람은 1분에 평균 18번의 숨을 쉰다고 합니다. 인체리듬으로 따지면, 1분인 60초에 18번씩 호흡한다는 것은, 2x9=18이라, 그러면 30초에 9회씩 쉼호흡을 한단 얘기 아닙니까? 9를 세 번 쪼개면 3X3=9, 3쪽이 되고, 이3은 우리 한민족의 3신 사상 3세 판의 기본 天, 人, 地의 3재 사상이 됩니다.
그리고 시조의 초, 중, 종장의 5구 첫 조와 6구 마지막 조 3수리가 역시 3이 됩니다. 천인지의 3은 하나 ‘ᄒᆞᆫ’과 같지요. 詩調나 民調詩나 3이 첫조의 기본 수리이고, 역시 마지막조의 수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民調는 단수 18자로서 단 한 줄로 ‘촌철살인’도 할 수 있는 혼의 시를 쓸 수 있죠. 이것이 詩調와 民調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우리 현대문학에서 한국시의 흐름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현재 우리나라 문림엔 잡초가 무성합니다. 부정적인 의미만의 잡초가 아닌 다양성을 뜻합니다. 잡초밭에라야 난초나 장미가 더욱 빛나겠지요. 지금은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색깔과 모습, 다양한 정신의 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디카시, 디지털 하이퍼시, 민조시, 청소년시, 시조, 동시조, 동민조시, 청소년시조, 동수필, 장편수필, 시소설, 공연시... 들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문학 및 시 분야의 개성있는 꽃들이 만발하고 있습니다.
-. 그럼 한국시가 어떻게 달라져야 한다고 보십니까?
한국시는 ‘조선시여야 된다.’는 생각을 예나 지금이나 바꾼 적이 없습니다. 한국 시인이 쓰는 시는 한국시여야 된다. 바꿔 말하면 서양시여서는 안 된다, 이거죠. 지금까지 한국시는 발상법이나 형식, 구조, 수사 면에서 너무 서양시에 기울어져 있어요. 우리 한국 사람은 조선 정신을 가지고 조선시를 써야 합니다. 조선의 장단, 가락, 호흡...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써야 50년 후에 혹은 1백 년 후에도 순수한 조선시로 남아있지 않을까요? 소월시같은 민족 정서와 장단, 가락, 호흡을 가지고 있는 조선시들은 영원히 이땅 위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시가 읽히지 않고, 시집도 팔리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가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이상, 한 줄이라도 감동을 주는 이상 시는 영원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 끝으로 현대를 사는 시인들에게 당부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호흡, 장단을 흡수해서 우리의 정서에 맞게끔 운율을 지어내는 시라야 우리의 진정한 한국시, 조선시가 될 수 있습니다. 시라는 것은 원래 음악하고 함께 가야 하는데, 현대시는 음악을 빼버렸으니, 장단과 가락이 없죠. 우리들의 말소리 속에 살아있는 장단, 가락을 작품 속에서 죽이지 말고 살려내야 합니다. 한문이나 한글을 우리는 잘못 배워왔어요. ‘한문은 뜻글자, 한글은 소리글자’라고 배워왔는데, 아닙니다. 한글도 뜻글자요, 소리글자이고, 한문도 마찬가지 뜻글자+소리글자이지만, 오늘날까지 우리 조상들이 잘못 전달한 거죠. 그러니까 항일 저항기에 日本 교육 정책상 그들은 한글 학자들이나 교사들을 통해서 한글은 뜻(혼)이 없는 것으로, 소리만 있지 뜻이 없는 글자라며 강제로 비하시켜버렸죠. 한글이라는 언어 속에는 고저장단과 혼가락이 모두 들어있습니다. 특히 시는 모든 예술의 핵입니다. ‘문화의 꽃은 예술, 예술의 꽃은 문학, 문학의 꽃은 시’('自由文學' 캐치 플레이즈)입니다. 예부터 ‘詩, 書, 畵, 音, 律’이라 했죠. 詩가 제일 앞섭니다. ‘書’는 산문 또는 서예, ‘畵’는 그림, ‘音’은 음악, ‘律’은 율동 즉 춤(무용), 이것 외엔 모두가 잡기입니다.
요즘은 잡기가 돈을 더 많이 버는 시대죠. 그러나 순수 예술 문화가 잘 되고 발전해서 그 단가가 높아져야 대중문화인 잡기들도 잘 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순리죠. 기초 과학이 튼튼해야 고급 전문 분야의 첨단 과학이 그를 기반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이치죠. 민조시에 있어서도 우리의 말마디나 장단, 가락이 실담어->산스크리트 어->가림토문->고구려, 신라 이두문->고려가요->한글 시조에 이르기까지 그 핏줄 성질 위에서 기초 과학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에 20세기 후반 당대에 와서 새로운 정형시가 가능했던 겁니다. 우리의 한사상을 기반으로 장단, 가락을 살리어 우리 정서에 맞는 시를 짓는 시인이었으면 합니다.
‘잠실 밤개구리가 운다.
밤새도록 밤새도록 운다.
울음숲을 이루며 잠실잠실
실실실 잠실․ ․ ․ ․ ․
아파트가 더 들어서면
고향을 잃어버린다고 운다.
비 맞은 인디언 물귀신처럼 운다.
아스팔트가 덮이면
변두리 산으로 쫓겨나
숨 다할 거라고 무한정 밤을 운다.
잠실 밤하늘을 원망이라도 하듯
순하디 순한 흙값이 금값임을
허공천에 대고 원망이라도 하듯
잠실 밤개구리가 새워 새워 운다
금구렁이들이 자꾸자꾸 모여들면
이제 울 수도 없을 거라고 자꾸 운다
울음시위와 울음 화살로는
마른 번갯불로 빛나는 그림자 앞에서는
울어봐도 다 소용 없을 거라고 자꾸 운다.
여름밤 인디언 물귀신처럼 그리 슬피 운다.’-<신세훈, ‘잠실 밤개구리’전문>
-. 약력
.1962.1.1. ‘조선일보’ 신춘 문예 시부 당선
.청소년문학 장르를 개척함
.새로운 정형시 3.4.5.6조 ‘민조시’를 개척함
.동수필을 개척함
.국제 PEN 한국 본부 부이사장(2회)
.제22, 23대 한국 문인 협회 이사장
.제20대 한국 현대 시인 협회 이사장
.초대 한국 자유 문인 협회 회장
.초대 한국 민조시인 협회 회장\제2대 (사)상고사 학회 이사장 역임
-. 저서
시집 「비에뜨·남 葉書」(1965 토픽 출판사), 「江과 바람과 山」(3인 시집·1978 한겨레 출판사), 「뿌리들의 하늘」(1만행 장시집 제1부·1984 일월서각), 「사랑 그것은 落葉」(청소년 시집·1984 온누리), 「조선의 天平線」(1991 미래 문화사), 「꼭둑각시의 춤」(1993 도서출판 天山), 「체온 이야기」(시극·장시집·1999 도서 출판 天山), 「3·4·5·6 調」(2000 民調詩集 도서 출판 天山) 등 편저·역저·저서 23권.
-. 수상
제3회 詩文學賞(1978)
제1회 한국P.E.N. 공로상(1994)
제8회 한국自由詩人賞 본상(1994)
제10회 예총문화예술대상(문학 부문) 수상(1996)
인헌무공훈장(1966)
제14회 경기문학 대상(1999)
대통령 표창(2002) 등 포상.
제14회 청마문학상 등 수상(2013)
글 : 이정종
첫댓글 이정종 명예회장님, 어려운 글 쓰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정종 명예회장님 문인탐방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