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斗庵草堂 詩板
전북 고창군 아산면 영모정길 88
湖南卞成溫秀才 字 汝潤 來訪, 留數日而去, 贈別, 五絶.
호남 변성온 수재가 찾아와서 며칠을 묵었다가 떠났는데, 작별할 때 시를 지어 주었으니, 절구 5수다.
重逢顏面記茫茫, 얼굴 다시 만나니 기억이 아련한데,
屈指如今已六霜. 손꼽아 헤아리니 이제 벌써 육년이네.
千里來尋珍重意, 천리를 찾아 온 진중한 그 뜻으로
一庭相對萬叢香. 같은 뜰에서 마주하니 온갖 풀은 향기롭구나.
河西蓬館舊同遊, 하서는 독서당에 일찍 함께 놀았더니
欻去修文白玉樓. 백옥루 글 지으러 별안간 가버렸네.
今日逢君門下士, 오늘 그대 만나니 그 문하생이기에,
話君終夕涕橫流. 밤새워 그대와 이야기하니 눈물이 이리저리 흐르누나.
河西, 金厚之, 汝潤嘗從遊, 厚之今年下世.
佳山佳水日徘徊, 아름다운 산수에서 날마다 배회하니
仁智吾猶未竭才. 어질고 지혜롭게 되는 데 나는 아직 재주 다하지 못 했다오.
敢叩師門有何訣, 묻노니 그대 스승 무슨 비결 있었던고
請將餘論賁江臺. 남은 의론 가지고서 강대를 빛내려네.
與汝潤登天淵臺.
江臺寥闊共登臨, 툭 트인 강대에 함께 오르니,
俯仰鳶魚感慨深. 위엔 솔개 아래엔 물고기 느낌 자못 깊었어라
妙處自應從我得, 미묘한 곳은 스스로 응당 나로부터 얻으리니,
晦庵詩句爲君吟. 그대 위해 회암의 시구를 읊어 주겠네.
上同
風雪尋師十載前, 눈보라에 스승 찾은 것 십년 앞서 일이러니
云何一瓣嘆靡傳. 어찌 스승의 가르침 전하지 못 하여 개탄하는고?
勸君莫被因循誤, 그대에게 권하노니 미적미적하는 잘못에 빠지지 말고,
努力須橕上水船. 노력하여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를 저어야 하나니.
[原詩 : 『退溪先生文集 卷之三』. 국역 : 李家源. 『국역퇴계전서 3』. 94~96쪽. 국역교열 : 許捲洙 2023. 1.3.]
위 시는 변성온(卞成溫)이 1560년(厚之今年下世) 9월(萬叢香 : 국화)에 전라도 무산(茂山 : 현 고창군 무장면)에서 도산에 찾아와 며칠간 머물다가 돌아갈 때 퇴계선생께서 지어서 주었다고 한다.
문집에는 5절(絶)인데 시판(詩板)에는 6절이다. 즉 “石磵南頭艸屋低 邇來岑寂鎻寒棲 館君終夜淸無寐 霜葉蕭蕭意轉悽(석간대 남쪽 끝 나지막한 초옥에 요즈음 쓸쓸하게 寒棲庵 닫혀 있도다. 그대에게 잠자리 제공해도 밤이 맑아 밤새 잠 못 이루는데, 서리 맞은 단풍잎 우수수 떨어지니 마음도 도리어 처량하누나.)”이 더 있다. 시제(詩題)도 ‘贈 退溪先生詩’이고, 내용 가운데 다른 글자도 몇 자있다. 시판의 셋째 절 둘째 구가 ‘焂去修文白玉樓’이고, 넷째 절 셋째 구에 ‘試將餘緖賁江臺’이고, 시판 다섯째 절 첫 구가 ‘江臺寥濶共登臨’이고, 셋째 구 ‘妙處只應從我得’와 넷째 구 ‘滄洲詩句爲君唫’와 같이 다르다. 시제는 문집에는 ‘시를 주었다’이고 시판에는 ‘시를 받았다’라는 말이다. 시구 가운데 다른 글자는 문집의 글자와 의미가 다르지 않다.
『호암실기(壺巖實記 : 1899년 간행.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는 시제(詩題)가 ‘退溪先生贈詩 八首’ 이고, 시(詩)도 시판보다 끝에 2절이 더 있다. 즉 “生鄕地角與天涯 一日那知共此懷 別後知君思我夢 月明時復繞山齋(각자 태어난 곳이 땅 모퉁이 하늘 끝처럼 멀리 떨어졌으니, 하루라도 이 마음 같이 할 줄 어찌 알았으리오? 이별한 뒤에 그대가 나를 꿈속에서 생각할 줄 알겠나니, 달 밝을 때 다시 산속의 서재를 맴도겠네.)”와 “梁君貽我一封薑 勸我心腸老益剛 厚意何勝師不撤 代酬龐薤綴詩章(양군(梁君)이 생강 한 봉지를 주며 내 심신 늙어도 더욱 건강하길 바랐네. 끝까지 스승으로 모시려는 후의 어찌 감당하랴? 방삼(龐參)의 부추로 갚는 것 대신으로 시를 지어 주노라.”이다. 내용 가운데 역시 다른 글자도 있다. 첫째 절 첫 구가 ‘前時識面老茫茫’이고, 넷째 절 셋째 구가 ‘敢請師門有何訣’이고, 넷째 구가 ‘試將餘緖賁江臺’이고, 다섯째 절 셋째 구가 ‘妙處只應從我得’이고, 넷째 구가 ‘滄洲詩句爲君吟’이고, 여섯째 절 둘째 구가 ‘云何一瓣歎靡傳’이다.
退溪先生文集에는 絶句 5首인데, 壺巖實紀에는 絶句 8首인 이유는 ① 퇴계선생께서 8수를 지었는데, 그 뒤 나머지 3수는 별로 마음에 안 들어 초고를 안 남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호암은 8수를 받아가서 그대로 간직하여 후손들에게 전해 주어 보존되어 올 수 있다. ②. 선생의 문집 편집할 때 제자들이, 분량을 줄이기 위해서 3수를 생략했을 수도 있다. ③ 간혹 제자들이 스승의 시문을 받아가서 간직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그렇게 못 하지만, 그 후손 또는 후학들이 약간 변조(變造)했다. 라고 추정할 수 있다.
변성온이 위 시에서 6년 전(今已六霜)에 퇴계선생을 처음 뵈었고, 이번이 두 번째이다. 변성온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면 본관이 초계(草溪)와 밀양(密陽)으로 두 가지이고, 생몰년도 두 가지(1530~1614, 1540~1614)이며, 그리고 형 변성온의 호가 호암(壺巖)이고 동생 변성진의 호는 인천(仁川)으로 보인다. 또 『도산급문제현록』에는 형은 본관이 밀양(密陽)이고 생년과 호의 기록이 없고 동생 변성진(卞成振)은 호가 호암(壺巖)이고 생년이 1540(嘉靖庚子)년으로 기록되어 있고, 『도산급문제현변정록』에는 형은 호가 호암(壺巖)이고 본관이 초계(草溪)이고 생몰년이 1540(嘉靖庚子)년~1614년이고 동생은 호가 인천(仁川)이고 생몰년은 1549(己酉)~1610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호암실기(壺巖實記)』에 실린「행장(行狀 : 奇挺翼 撰)」과「전(傳 : 黃胤錫 撰)」을 살펴보면 초계군(草溪君) 변정실(卞挺實)의 후손이고 무장현(茂長縣) 장사산(長沙山) 아래 사미동(士美洞)에서 가정경자년(嘉靖庚子年 : 1540)에 태어나서 73세에 졸(卒)하였다고 하고, 호는 만년(晩年)에 호암(壺巖)아래 암석절경(巖石絶景)을 특별히 사랑하여 호암거사(壺巖居士)라고 하고 있다. 『초계변씨족보』에 변성온은 “字는 汝潤이고 號는 壺岩으로 中宗庚寅1530年生이며 河西金麟厚에게 師事하고 또 退溪李滉先生과 往來交遊하셨으며...”라고 하고, 동생 성진은 “字는 汝玉이고 號는 仁川이며 中宗庚子1540년생으로 甲寅年1614年8月24日에 享年75세로 卒하셨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어 형제의 생졸년이 혼돈되어 전해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퇴계선생을 1530(가정경인)년생이면 24살 때 처음 만났고 두 번째는 30살이고, 1540년생이면 14살에 처음 만났고 20살에 두 번째 만났다. “선생께 왕래하면서 의심스러운 점을 묻고 배웠고 『역학도(易學圖)』라는 저술도 있다.”하였으니 학문적 성숙도로 본다면 1530년생이 더 믿음이 간다.
‘두암초당(斗庵草堂)’은 변성온이 동생 변성진(卞成振, 1549~1623)과 함께 옛 무장군 탁곡면(현 고창군 아산면) 주진천 강변에서 만년을 지내던 정자가 훼손되자 1815년 10월 변성온의 5대손 변동빈(卞東彬)이 전좌(殿座)바위 또는 두락암(斗落巖)이라고 불리는 바위산 절벽중턱에 움푹 파인 곳으로 옮겨지었고 그 후 유실(遺失)된 것을 1954년 영모정(永慕亭) 재실과 함께 다시 지었다고 한다.
‘두암’이란 이름은 정자의 주인 변성온의 인품이 마치 곡식을 되는 말(斗)이나 저울 추 같이 평평해 어느 한곳에 치우치지 않는다고 해서 붙였다고 한다. 가는 길은 아산초등학교 인근에서 150m정도 걸어야 하는 데 정자와 가까워질수록 좁고 가팔라서 어린이나 노약자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올라가기가 쉽지 않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한가운데 1칸짜리 온돌방이 있다. 보기에 3칸이지 여느 집 2칸보다 좁아서 방에 5~6명이 둘러앉기도 불편할 정도이다.
‘두암초당(斗庵草堂)’이라는 편액은 전남 화순 출신 문인으로 일제강점기 망국의 한을 시(詩)·서(書)·화(畵)로 남긴 호남 화단(畵壇)의 마지막 삼절(三絶)로 불린 염재(念齋 宋泰會,1872-1942) 작품이다. 정자 처마와 내부에 ‘산고수장(山高水長)’과 ‘고산경행(高山景行)’의 큰 글자 현판이 걸렸고 중건기(重建記)와 퇴계선생을 비롯한 하서(河西 金麟厚, 1510~ 1560), 노사(蘆沙 奇正鎭, 1798~1879) 등의 시판도 보인다.
이 지역은 1억 5천만 년 전 용암과 응회암이 침식·풍화되며 생겨난 바위로서 호리병모양, 얼굴모양 등의 독특한 생김새로 관심을 이끌고, 병바위 주변의 소반바위, 전좌바위 등과 잘 어울려 경관적 가치가 있으며, 취한 신선 전설과 풍수지리(금반옥호<金盤玉壺>, 선인취와<仙人醉臥>) 관련 문화성도 있고, 다양한 문헌으로 병바위와 두암초당 강학에 관한 기록이 시·글·그림으로 남아있으며, 오랜 기간 고창현, 흥덕현, 무장현 등에서 지역의 명승이 되어온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어서 2021. 12. 6.에 국가명승지로 지정되었다.[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사이트 참조]
두암초당을 2022년 12월 17일 오후 도산서원 참공부 모임 도반들과 함께 전임 고창군수였던 분과 전북도 학예연구관 김승대 박사와 전남대 이형성 교수 등 지역 문화인들의 안내로 답사를 하였다. 이날 새벽부터 점심때까지 내린 눈이 발목이 묻히도록 쌓였다. 전날 부안 변산에서 열린 반계(磻溪 : 柳馨遠, 1622~1673) 탄신 400주년기념 국제학술회의에 영호남 지역문화교류의 일환으로 “퇴계학과 반계학의 만남”이라는 주제의 학술발표에 참가하고 이날 오전에는 눈보라가 휘날리는데 반계선생 유적지와 부안 청자박물관을 관람하였다. 오후에 두암초당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인 호암묘소를 참배하였다. 두암초당에서 호암묘소 가는 길은 눈꽃 속 평탄한 숲길로 설경의 운치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이 묘소가 호남에서 이름난 명당이라고 한다. 묘 앞 비문은 퇴계선생 13대 종손이신 하정(霞汀 : 李忠鎬, 1872 ~1951)공께서 쓰셨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기도 하였다. 묘소에서 오른 편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병바위’가 있었다. 호암공이 호(號)로 하신 바위이다. 높지 않은 산기슭에 병(甁)모양의 큰 바위가 우뚝하게 서있다.
이번 답사는 학술행사 참가에 목적이 있었지만 호남지역에서 퇴계선생 문도의 유적을 답사할 수 있었다는 것도 좋은 기회였다. 좋지 않은 날씨임에도 상세하고 친절하게 안내하여주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