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원박씨시조와 본관
진원박씨(珍原 朴氏)는 신라 시조왕(始祖王)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손으로 고려조에서 대장군(大將軍)의 벼슬에 이른 박진문(朴進文)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보첩인 정유보(丁酉譜; 효종8년; 1657년 進士公 東溪; 春長 編纂)에 따르면 “그 이상은 문적이 없어 더 이상 고찰(考察)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新羅宗姓 仕 高麗 位至 大將軍 己上文籍 不存 不可攷).
또한 그 譜序에 의하면 “珍原에서 原譜를 가져다가 자손의 支派를 찾고 조사하여 이렇게 刊行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미 그 훨씬 전에 족보(族譜)가 있었으며 동시에 시조 진문공(始祖 進文公)에 관한 것도 오랜 문적(文籍)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진원 박씨의 상계 선조들은 거의가 장성(長城)주변의 명족(名族)들과 혼인(婚姻) 관계를 이루고 살았으며. 세종때의 ‘신찬 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誌)’의 기록에 따르면 “그 때 장성군(長城郡)에 많은 씨족(氏族)이 세거(世居)하고 있었지만 진원 박씨(珍原 朴氏)와 영광 오씨(靈光 吳氏)가 주성(主姓)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타 씨족(氏族)보다 이른 시기에 장성에 정착(定着)하였기에 진원(珍原) 고현(古縣)을 중심으로 구진(丘珍) 또는 진원(珍原)으로서 관향(貫鄕)을 정하였다고 여겨지며. 그 시기는 대략 고려(高麗) 중기 명종(明宗) 무렵 이후로 추정된다.
進文公의 현손 첨(瞻)은 고려조에 순충론도 동덕 좌명공신(純忠論道 同德 佐命功臣) 벽상 삼한 삼중대광(壁上 三韓 三重大匡)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우문관 대제학(右文館 大提學), 예문춘추관사 영경연사(藝文春秋館事 領經筵事)등을 역임한 후, 익양군백(益陽郡伯; 今 永川)에 봉해졌고, 충의(忠義)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또한 구례(求禮) 감무(監務)를 지내신 7세 온(溫)은 용원재(龍原齋)에 봉향(奉享)하고 있다.
진원 박씨 중흥(中興)을 일으킨 8세 희중(熙中)은 조선 태종(太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동궁(東宮; 世宗) 서연관(書筵官)을 거쳐 예문관(藝文館) 지제교(知製敎) 겸(兼)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註官)을 역임하고 일본국(日本國) 회례사(回禮使)와 명(明)나라에 조선(朝鮮) 건국의 승인(承認)을 받으려고 사신(使臣)으로 다녀왔으며, 1423년에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에 제수되었고, 김제 벽골제(碧骨提)를 수축(修築)한 공으로 백성들이 비(碑)를 세워 은혜(恩惠)의 뜻을 표시하였다.
또한 公은 글씨에 能하여 海東筆苑에 登載되었으며 남원 부사를 끝으로 진원 땅에 귀향(歸鄕)하여 후진(後進) 양성에 전념하고, 청백전가(淸白傳家)의 가훈(家訓)을 남겨 지금까지 종훈(宗訓)으로 이어오고 있다. 공은 사후에 학림사(鶴林祠)에 배향(配享)되었다.
13세 우(祐)는 선공감판 겸 첨정(繕工監判 兼 僉正)으로.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捕虜)가 되어서도 충절(忠節)을 굽히지 않았으며 조총(鳥銃)의 정교한 기술을 배워 새로운 무기를 개발한 공으로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충열공(忠烈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14세 광전(光前)은 왕자사부(王子師傅)를 거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함열(咸悅)과 회덕(懷德)의 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임정(壬丁)양란에 의병(義兵)을 일으켜 공훈을 세우고 돌아가신 후 이조 판서(吏曹 判書)에 추증(追贈)되고 문강(文康)의 시호(諡號)가 내려졌으며 용산서원에 배향되었다.
또한 아들 근효(根孝), 근제(根悌)와 함께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워 일문삼충(一門 三忠)으로 가문(家門)을 빛냈다.
14세 승종(承宗)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지금의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한 공으로 일등 공신(一等 功臣)에 책록(冊錄)되고, 철권단서(鐵券丹書)를 하사(下賜)받으셨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양소(良昭)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이렇듯 국가(國家)가 난국(難局)에 처했을 때마다 珍原 朴氏는 구국(救國)의 길에 앞장서 혁혁(赫赫)한 공훈(功勳)을 세워 충의(忠義)의 전통(傳統)을 이어오고 있다.
파별 분포 및 세거지
☉ 5개파의 세거지(世居地)를 살펴보면 휘(諱) 박희중(朴熙中)의 세 아들이 9세손으로서 휘생(暉生), 곤생(坤生), 진생(進生)이다.
장자 휘생(暉生)은 성균(成均) 생원으로 시거(始居) 보성(寶城)하여 종파(宗派)의 파조가 되었다.
차자(次子)인 곤생(坤生)은 성균 진사(成均 進士)로 장성(長城)의 중파(中派) 파조가 되었다.
삼자(三子)인 진생(進生)은 생원으로 승의랑(承議郞)을 지냈으며 장성(長城)의 계파(季派) 파조가 되었다.
보성(寶城)종파에서는 휘생(暉生)의 아들인 10세손 휘(諱) 문기(朴文基 ; 進士, 司醞署 直長)의 세 아들이 11세손으로 흥원(興原) 계원(繼原) 윤원(胤原)인데, 장자(長子) 흥원(興原 ; 進士)은 장종파(長宗派), 차자(次子) 계원(繼原 ; 生員 昭格署 參奉)은 장중파(長中派), 삼자(三子) 윤원(胤原 ; 生員)이 장계파(長季派)의 파조가 되어 오늘날 5개 파로 모든 종문사(宗門事)가 이루어지고 있다.
☉ 파별(派別) 거주 분포(分布) 상황(狀況)을 살펴보면,
장종파(長宗派)는 보성(寶城)과 장흥(長興) 지방에,
장중파(長中派)는 보성(寶城)과 고흥(高興) 지방에,
장계파(長季派)는 보성(寶城), 고흥(高興), 여수(麗水), 화순(和順), 광양(光陽), 장성(長城), 전북(全北) 임 실(任實), 경남(慶南) 사천(泗川) 지방에,
중파(中派)는 장성(長城), 담양(潭陽), 나주(羅州), 신안 (新安)과 전북(全北)의 임실(任實), 충남(忠南)의 연 기(燕岐), 보은(報恩) 등지에,
계파(季派)는 장성(長城), 담양(潭陽), 나주(羅州)와 전북 (全北)의 임실(任實)지방에 각각 세거(世居)하면서 집성촌(集成村)을 이루고 있었으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하면서 도시집중화 현상으로 정든 고향 을 떠나 현재는 광주, 서울 또는 지방도시로 점차 거주를 달리하고 있다.
2015년 통계청의 인구조사 통계 자료에 의하면 진원박씨는 전국에 33,630명이 살고 있는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