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연합으로 완성되는 창조 계시(1)
이현래 토요 말씀(20-02-01)
창1:26-27
중요한 말씀이다. 다른 것은 다 여러분이 읽으시고 27절 보면 ㅎ이 자기 형상, 곧 ㅎ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라 하시니,
27절 말씀은 외우다시피 알아야할 구절이다.
사람을 왜 지었는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존재해야하는가 그것이 인생의
근본적 의문이다.
사람이 동물도 아닌 것이 신도 아닌 것이 다 아는 것 같은데 왜 있는지 모른다. 여러분 책도 읽어보고 사람들 말도 들어봣을테니 대학도 다녓을 것이고 철학도 알겟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다.
나는 왜 있는가, 그것을 알아야 무엇을 할지 안다. 그 근본을 모르니 무엇을 할지도 모른다. 그것을 모르면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
편하게 살려다 보니 이것 저것 개발하지 목적이 잇어서가 아니다. 동물들은 이런 것과 상관없이 잘 살고 잇다.
부산의 갈매기, 나도 저렇게 살면 좋겟다는 생각이 들엇다. 육해공군 다 된다. 어디서도 다 산다. 농사나 사업, 그런 걱정 없다. 먹을 것이 널려잇다. 사람 사는 것 보면 좀 불편하다.
평생을 나는 조심조심 살아야햇다. 이 육체라는 것, 어려움이 많다. 그러니 그런 생각이 자연히 났다. 사람이 그것보다 나을 것이 뭐인가? 잘 생각해보라. 우리가 낫다 생각하는 것, 우리에게만 필요하지 다른 곳에는 안 필요하다.
갈매기가 인간을 부러워하겟는가? 배, 비행기 보면서 왜 시끄럽게 하는가, 욕할 것이다. 사람의 세계를 부러워하는 동물은 어디도 없다. 사람이 개도 키우니까 그렇지 야생의 개는 그렇지 않다. 사람 좋아하는 동물 하나도 없다. 사람은 인기 없다.
다른 만물에게는 사람이 정말 귀찮은 존재다. 요즘 아마존의 훼손도 그렇고.. 사람 손이 닿으면 다 못쓰게 된다. 잘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정치도 그렇고 자기들끼리 왜 싸우는지도 모른다. 다른 동물들 보면 이해하기 힘들다. 학교가 왜 있는지, 입학 시험은 왜 보는지.. 복잡하다.
누가 뭐라 한다고 기분나쁠 일도 없다. 다 별거 아니다. 자기가 무엇인줄 생각지 말라.
십자가 못박혀 내려오지 못하는 예수를 보더라도 그런 분이 당연히 내려왓어야햇다. 다 못내려와도 그분만큼은 내려와야햇다. 왜 이 이야기를 자꾸 하는가? 인생의 본바탕, 우리 능력에 근거하지 않는다. 사람은 도로 사람이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산다면 인생 조용해진다. 왜 시끄러운가? 자기를 이상하게 알고 잇어서다. 정상적으로 알지 못하니 시끄럽다. 이래도 저래도 문제다. 거기 대해서 이보다 좋은 대답 없다 생각한다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여기서 형상,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부류도 잇다. 원숭이 사람 비슷한 그런 것으로 생각한다. 원숭이도 잘만하면 사람 안되겟는가, 사람도 잘만 하면 신같은 존재 안 되겟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부류가 잇는 것이다. 잘 하면 그렇게 될 수 잇다고 생각한다.
상당히 많은 부류가 그렇게 생각한다. 신학자 지도자가 그렇다. 그래서 수양한다든지 도를 닦는다든지, 인간 아닌 다른 것이 되고자 한계 극복코자 한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은 사람이다, 그 말이 십자가에서 못 내려온다는 말이다. 사람은 도로 사람인 것이다.
변경 불가능, 그게 사람이다. 사람을 ㅎ도 못바꾼다. 한번 소를 만들어놓으면 무슨 일이 잇어도 소지 개가 아니다. ㅎ이 만들어놓은 것, 어떤 것도 못 바꾼다. 바꾼다는 것, 표면적으로 옷만 바꾼 것이다. 몸뚱이 자체가 바뀐 것이 아니다.
ㅎ이 만들어놓은 그대로다. 아무리 해도 그렇다. 그게 창조다. 사람이 만든 것은 바꿀 수도 발전시킬 수도 잇지만 인간은 그게 안된다. 살아잇는 모든 것이 다 그렇다.그러니 어떻게 만들어졋는지가 정말 중요하다.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불교에서는 수양에 따라 어디까지 이른다 그런 말을 한다. 성불, 신과 같다는 말이다. 아무 제한될 필요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자연히 그 안에는 급수가 생긴다.
비행기 만들 때도 속력, 시속 1000키로로 날 것을 만들엇다면 더 발전시킬 수 잇듯이 사람도 수양해서 천키로에서 이천키로로 간다는 말이다. 평등이 될 수 없다.
그런데 ㅎ이 창조한 것, 천키로 만들어놓은 것, 아무리 애써도 그 이상 안된다. ㅎ이 만든 세계 들어오는 일 없이 평등 없다. 재산 같게 해도, 계급장 같게 해도 평등 없다.
계급장 없는 중공군, 그래도 그 안에는 지도자가 잇다. 사람이 만든 것은 평등할 수 없다.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하다. 평등한 것, 절대 속지 말기 바란다. 돈에서 평등한다 해도 계급에서는 안된다. 어차피 평등이 없다. 사람마다 능력 차이있기 때문이다. 감언이설에 속지 말라.
ㅎ이 지으신 세계는 변화 없다. 절대 바꿀수 없다. ㅎ이 지으신 것은 못 바꾼다. 사람은 이래도 저래도 사람이다. 예수님도 사람이엇기에 못 내려온 것이다. 사람이기에 오병이어로 오천명 먹인다. 못 내려온 것과 오병이어 먹인 것, 같은 사람이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ㅎ의 쓰임에 달라진다
우리 형상을 따라
실력 능력 말하는 것 아니다. 그것을 표현하기에 딱 맞는다는 말이다. 손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든 장갑, 누가 봐도 그런 형상이다. 무엇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것을 보고 형상이라 한다.
왜 ㅎ이 사람을 지엇는가? 형상이 없는 ㅎ이 자기를 나타내려고 만물, 사람을 지엇다. 사람, 창1장에서의 만물은 사람을 짓는 과정이다. 사람은 이런 과정을 지나 지엇다는 말이다.
공장에서 기계도 여러 과정을 겪어 만든다. 생명은 씨에서 열매까지 가는 과정이 잇다. 모양이 다 다르다. 씨도 다르고 싹도 나무도 가지도 꽃도 다 다르다. 하지만 생명이 하나기에 열매 맺는 곳으로 간다. 처음 뿌린 그 씨가 거기서 맺힌다.
생물, 날짐승, 물고기 들짐승.. 다 사람을 지어가는 과정이다. 사람이 그것을 다 포함하고 잇다. 식물인간, 날짐승같은 인간, 물고기 같은 인간.. 그런 성분을 다 갖고 잇다는 말이다.
천당 밑의 극락이라는 곳을 가장 좋다 생각하는데 절에서는 그냥 그렇다 한다. 너무 즐거워하는 것이 극락이다. 새처럼 한시도 가만 안 잇고 계속 움직인다. 그러니 그렇게 좋은 곳이 아니라고 한다.
천당도 그렇다. 사람들은 굉장히 좋다 생각하나 상상력이다. 각 나라마다 생각하는 천당, 다 다르다. 잠재의식 속에 들어있는 것이 나타난다. 천당갓다왓다는 사람 말 들어보면 나라마다 각각 다 다르다. 사람 생각 속의 것이다.
나도 깨어나고 보니 내가 살고 잇는 집, 예쁘게 단장되어잇는 것을 보앗다. 잔디도 새파랗고 빨간 꽃이 너무 아름답고.. 누가 우리 집을 저렇게 가꾸엇지 그렇게 속으로 생각햇다. 내게 잇어 천당의 기억은 그것이다. 사람마다 다 다르다.
사람은 어디서 왓는지 모르면 다 헤매인다. 각자 자기 생각대로 산다. 자기 생각에 좋을대로 살앗더라, 그 한 마디가 모든 인간을 말한다. 지금 세상 보라. 주변을 보라. 자기 생각에 좋을대로 산다. 그런데 ㅎ은 자기 생각 좋을대로 지어놓은게 아니다. 당신의 형상으로 쓰려고 지엇다.
전구를 보면 말간 유리다. 이 유리는 투명할수록 좋다. 자기 색깔이 없을수록 안의 빛을 백프로 발산한다. 백퍼센트 증거하려면 내 생각이 없어야한다. 내 생각을 첨가하면 백퍼센트 안된다. ㅎ이 원하는 것, 그 백퍼센트 투명 유리다. 전구에 버큼이 들어가잇으면 어른어른하다. 그런 시대가 있엇다. 지금은 유리모래로 끓여 만들어서 투명해 전혀 그림자를 못 느낀다.
ㅎ의 아들, 자신을 표현하려고 만들엇으니 최 상품의 유리로 지엇을 것이다. 자기를 표현해야하니 말이다. 그 빛이그대로 비쳐야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ㅎ의 형상대로 만들엇다는 말, 정말 중요한 말이다.
사람은 무엇 때문에 수양하는지 모른다. 진짜 수양하려면 그의 형상 되기 위한 수양이어야한다. 그렇게 형상화 시킬 수 잇는 사람이 완전하다. ㅎ을 본 사람이 없으나 아버지 품속에 잇는 독생자를 나타냇다, 하셧다.
누구도 ㅎ을 보지 못햇다. 그런데 사람 통해 ㅎ이 표현되도록 되어잇는데 저렇게 완전하게 ㅎ이 표현되는 것 처음이다 할 만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자가 나타내셧다. 그렇게 제자들이 경험햇다. 창조한 그대로네...
그렇게 제자들은 본 것이다. 요한복음 1장 말씀, 처음부터 안 것이 아니다. 1장은 제일 나중에 쓰여졋다. 그분을 다 경험하고 알아차려서 계시받아서 최종 쓴 것이 요한복음 1장이다. 그러니 거기서 시작하면 안된다.
우리가 처음 만날 때, 갈릴리 바닷가에서 만낫다. 그분을 경험하다 보니 1장, 이런 사람이더라. 하는 총론이다. 1장을 알면 다 안다. 논문과 다르다. 무엇인가 잇는데 연역해낸다. 1장을 알면 다 아는 것이다. 창세기도 1-2장 알면 다 아는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우리는 ㅎ을 형상화 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구나 그렇게 경험하여 안다. 경험이 없으면 신화에 불과하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이것이 안 믿어지니 신화화 시킨다. 이것을 경험이 아닌 역사로 보니 이런 일이 없다. 그러니 신화라 하는데 성경은 절대 신화 아니다. 신화적 방법을 이용해서 표현햇다. 우리 이야기다.
호모 사피엔스 이런 말 아니다. 오늘 내가 어떻게 지어졋는가, 그 말이다. 항상 같다.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콩은 만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다.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 자신의 이야기다. 내가 어떻게 지어졋는가, ㅎ을 표현할 형상으로 지어졋다. 옛날 이야기 아니다. 한번 읽고 말 이야기 아닌, 지금 나에게 잇는 이야기다.
나는 ㅎ의 자기 형상과 모양대로 지어진 자구나, 그분을 나타내려고 만들어졋구나 그렇게 알아야한다. 우리는 그런 표현을 들으면 다 알아듣고 같이 즐거워진다. 정말 아름답구나, 그렇게 안다.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니 즐거운 것이다. 그런 간증이 들리는 것은 아주 복된 일이다.
영화형제 손녀딸 루다, 초 4년생인데 주일학교 캠프에 가서 신기하다. 귀가 열렷다는 것이다. 일부러 안들으려고 햇는데도 계속 ㅎ의 말씀이 들리더라는 것이다. 정말 신기하다. 그래서 식구들 앉혀놓고 순모임 하자고 햇다고 한다.
이번에 은희자매 간증 처음 들엇다. 손녀가 간증하니 그것을 받아서 간증한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다른 세계를 본 것이다. 그러면 평생 간다. 중간에 딴 곳에 간다 해도 반드시 찾게 되어잇다. 에덴으로 반드시 돌이키게 된다. 연어의 모천 찾는 것과 같다.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 같은 사람이 만든 것은 잊는다. 그런데 본 것은 안 잊는다. 특히 생명 안에서 본 것은 안 잊혀진다. 절대 안 잊혀진다. 한철형제가 그렇다. ㅎ이 만든 것이 정말 신기하다. 나중 된 자가 먼저되고 처음 된자가 나중된다는 말, 초 4학년이 말씀 들렷다니 무슨 말을 하겟는가.
ㅎ이 그렇게 지어놓앗다. 그런데 뭔가 다른 것이 방해한다. 방해, 교란 전파를 보내어 그 생명이 못 들어오게 하나 어느 순간이 터지면 막 들어온다. 우리가 ㅎ의 형상을 따라 지어졋다는 것, 얼마나 복인가.
만약 다르게 지어졋다면 어떻겟는가. 그 정해진대로 밖에는 안된다. 그 범위에 머무르고 만다. 개는 사람만 못하다. 모든 면에서 못하다. 개를 흉내낼 수도 없다. 우리는 개로 만들어지지 않앗다. 내가 어려운 것만 못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다른 것은 다 못한다. 위치가 다르니 생각이 다르다. 그래서 못한다.
그래서 위치가 바르게 되면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어잇다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이 형상, 이미지라고 번역되어잇다. 그런데 경험을 통해 알아야한다. 단어로는 그것으로밖에는 안 된다.
사과 본적 없고 모르는 사람, 아무리 설명해줘도 안된다. 그게 언어의 한계다. 우리 경험을 통해 알아야한다. 아무리 해도 우리는 ㅎ 비슷하게도 안된다. 그의 형상이 되면 완전해질 수 잇다.
그분을 나타내는 자리에 가면 완전해진다. 여자가 남자 되겟는가. 성전환 수술한다고 되겟는가. 그렇게 생겨먹어서 수술한다. 멀쩡한 사람은 수술하지 않는다. 여자는 여자로, 남자는 남자로 지어져서 여자다. 그것을 불완전하다 할 수 없다. 둘이 합하면 연합하면 완전하다. ㅎ이 만든 세계가 다 그렇다.
홀로 부처가 되겟다, 잘못된 생각이다. 둘이 합해지면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어잇다. 완전 다른 것이다. 둘이 하면 쉬울 것을 혼자 하려니 어렵다.
ㅎ의 동산 떠난 자들 가시덤불로 걷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한다 햇다. 왜 그런가? 둘이 해야할 것을 혼자하려 하니 그렇다. 홀로 똑똑해지려는 고통이다.
세상에는 돈도 많고 잘 되는 사람 많다. 그런 사람은 꼭 에덴동산에서 안 쫓겨난 사람 같다. 만사형통한다. 그러면 성경이 틀렷는가? 여전히 가시덤불에서 헤맨다. 혼자 하려니 땀이 흐른다. 심지어 성경의 제사장, 혼자 섬기는 것 아니다.
아비야 반열, 즉 조를 짜서 섬겻다는 말이다. 그룹 봉사다. 혼자가 아니다. 창조 세계는 어느 하나도 홀로 생산 번성하는 곳은 없다. 연합하는 것이 진리다.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 만고불변의 진리다. 둘이 합해서 완전해지도록 만들어졋다. 그러니 혼자 완전해지려고 하면 안된다. 고통이다.
반드시 연합해야한다. 그러면 인생 쉬워진다. 이 비밀, 모르면 너무 어렵다. 형상으로 만들어졋다는 것, 연합이 절대적 필요하다는 것이다. 등, 불이 와야 쓰지 어디 쓰겟는가.
술병, 술이 들어와야지 어디에 쓸모잇겟는가. 담길 것이 담겨야 가치잇다. 빈병, 아무 소용없다. 우리 인간도 빈그릇이다. 뭐를 담아야한다. 무엇이라도 담게 되어잇다. 나는 절대 자유자다, 누구에게도 안 매인다 해도 결국 그런 것을 자신 속에 담고 잇다. 거기서 못 벗어난다.
나는 절대 정의로와야겟다, 그는 거기서 못 벗어난다. 거기서 죽는다. 바위 위에서 떨어져 죽어버린다. 구부러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게 자유가 아니다. 어디에 매여잇는 것이다. 사람이 좋다 하는 것 다 매여잇는 것이다.
나는 의리다, 그 사람은 그 의리에 매인 사람이다. 우리가 형상이라는 것을 안다면 나를 나라고 주장할 것이 없다. 나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빈병이 자기를 뭐라 하겟는가.
좋은 병이면 무엇이고 나쁜 병이면 무엇인가. 담을 것이 없는데.. 그러니 사람이 형상으로 지어졋다는 것, 정말 심오한 말이다. 어디가도 이만한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이상의 인간에 대한 바른 정의가 없다.
남자든 여자든 이렇게 확실하게 정의한 곳이 잇는가?
둘이 연합해야 생육하고 번성한다. 우리 인생, 잘 살면 너무 쉽다. ㅎ이 창조한 대로 살면 쉽다. 그것을 벗어나면 가시덤불이다. 죄, 과녁을 빗나간 것이다. 정해진 길이 아니다.
속의 것으로 아무리 회개해도 소용없다. 어차피 빗나간 길 안에 잇다. 그 안에서 회개한들 소용없다. 돌이켜서 그 길에서 나와야한다.
기독교의 죄,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니 회개만 강조한다. 해도해도 끝이 없다. 어디로 회개하는지 모른다. 꼭 회개할 곳이 잇다면 형상으로의 회복, 그곳으로 돌이키도록 회개해야한다. 그게 형상이다.
ㅎ이 나타나니 바로 ㅎ이라 햇다.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ㅎ의 아들입니다 바로 고백한다. 그런데 십자가 매다니 도로 사람이다. 예수 왜 겸손햇는가, 그러니 겸손햇고 온유햇다.
예수님 모든 삶, 그 자리에서 다 나온다. 근본이 그곳이다. 저절로 겸손해진다. 십자가 내려오지 못하는 그 사람이 나라고 생각하는데 교만할 일이 잇는가? 교만하기가 더 어렵다. 겸손하기가 더 쉽다. 거짓말 안 하는 것이 더 쉽다. 악한 생각 안하는 것이 더 쉽다. 위치만 바꾸면 삶이 바뀐다.
대천해수욕장에 간 적이 잇다. 시내, 작은 동네가 있는데 이 동네 사람들 다 발가벗고 다닌다. 비키니 바람이니 온 동네가 벌거벗고 다니는데 거기서 넥타이 매고 다닌다고 보라.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만다. 옷입은 사람이 이상하지, 벗는게 정상이다.
인생, 위치를 알면 살기 쉽다. 위치 모르니 해수욕장 가서 넥타이 매고 다니는 꼴된다. 그러니 인간이 어렵다. 내 멋대로 살아 쉽다는 말이 아니다. 정상적 위치에서 살면 힘들 일이 없다.
제사장은 왜 땀 나면 안되는가? ㅎ을 섬기는 일 자체가 힘든 일이 아니어서다. 만약 땀나면 잘못하고 잇는 것이다. ㅎ을 섬기는 자체가 예배다. 그렇게 쉽다. 이상하게 꾸미고 만들면 어렵다.
귀가 열렷다는 것, ㅎ이 보면 얼마나 좋아하시겟는가. 옆에 잇다면 끌어안고 싶다. 하물며 하나님은 어떻겟는가. 그게 예배다. ㅎ을 기쁘시게 하는 것 자체가 예배다.
루다는 땀 안흘리고 제사장 노릇하고 잇다. ㅎ을 섬기는 것도 같다. ㅎ을 말씀 해보라. 여러분이 좋아서 돈도 내면서 하고 싶다. 얼마나 좋은가. 순리대로 살면 정말 좋다
순천자 흥하고 역천자 망한다 하는 공자 말도 잇지만 비슷하다. 순풍에 돛을 달고 달리는 범선을 보라. 그 큰 배가 물 위로 미끄러지는 듯 하다. 소리도 없이 간다. 너무 시원하다.
내가 사는 동네 앞에는 호수같은 바다가 잇다. 그 위로배가 그 물살에 제 바람에 가는 것을 보면 정말 미끄러지는 듯 간다. 인생도 정위치에서 그렇게 살아진다. 거꾸로 살려면 어렵다. 배도 억지로 가려면 힘들게 갈지자로 간다.
ㅎ이 정해주신 뜻이 잇는데 그대로 살면 순천자가 된다. 그것을 거스리면 역천자다. 내가 머물엇던 병원이 순천향 병원이다. 하늘의 뜻에 따르는 마을이란 뜻이다. 의미가 좋다. 여기는 순천향이다. 하늘의 뜻을 따른다. 우리 교회, 한자의 의미로 말하지면 순천향이다.
형상을 따라 지엇다, 너무 좋고 절대적인 말이다. 이것을 벗어나면 무엇을 해도 땀이 난다. 사람은 그것을 형상화하도록 지어졋는데 다른 것을 하면 얼마나 땀이 나겟는가. 장갑을 양말로 쓰려고 해보라. 되는가?
내 쓸 자리에 쓰여지면 너무 좋다. 그 자리 벗어나면 어렵다. 인생의 고, 다른 것이 인생고다. 먹고 입고 사는 것이 인생고 아니다. 소는 짚을 하루종일 씹는다. 귀찮아하지 않는다. 모든 이치 다 같다.
교회 오니 교회생활 어렵다, 답답하다. 이 순천향에 와서 어렵다 하면 되겟는가. 여기 오면 편해야한다. 그러려면 내가 십자가 못박혀 내려오지 못한 나를 보고 그게 내 위치고 내 운명이구나. 별것 아니구나 그렇게 알고 살면 걸리고 말게 없다. 그렇지 않은가.
원수끼리 모인게 아니다. 누구 괴롭게 하려고 한게 아니다. 자기 혼자 괴로울 일 아니다. 자기때문에 자기가 괴롭다. 평생 기억하길 바란다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렇게 지어졋구나. 이것이 미션이고 인간의 사명이다.
내가 태어나서 한번이라도 ㅎ을 표현하면 만족이다. 장갑은 지어져서 손에 한번이라도 끼어져봐야 만족이다. 엉뚱한 곳에 쓰여지면 탄식하여 재수없어하지 않겟는가. 성경의 만물 탄식과 같다.
저들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이 자신의 뜻이 아닌 것이다. 장갑이 손에 끼워지지 못한 채 왜 나는 딴짓을 해야하는가, 그런 탄식이다. ㅎ의 목적 대로 쓰일 때 만족 감사가 생긴다.
ㅎ을 위해서 그러라는 것 아니다. 다 자기를 위해서 그러라는 것이다. 나를 위한 일이다. ㅎ은 이래도 저래도 그만이다. 나만 더러워진다. ㅎ을 아무리 욕해도 손상받지 않는다. 내가 손상받는다. ㅎ을 안믿어도 ㅎ에게 손해 없다. 나만 손해다.
교회도 그렇다. 안 와도 손해 없다. 자기만 손해다. 물론 속으로는 잘 오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누가 왓나 다 보고 잇다. 아무개 안보이네.. 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무엇보다 자기가 손해다.
우리 일이다. 신학은 인간학이다. ㅎ을 위하는 것은 곧 나를 위한 것이다. 여호와를 높이라, 곧 너를 높일 것이다. 그분은 손해볼 일이 없다. 아무 일 없다. 내가 높이면 내가 행복해진다. 안 높이면 자기가 손해다.
ㅎ과 우리 관계, 뗄래야 뗄수없는 관계다. 남편이 아내 욕하고 다녀서 무슨 덕을 보겟는가. 피차 그렇다. 자기만 손해다. 불가분의 관계다. 내 남편, 내가 좋다고 선전할 일이다. 어쩔수 없이 남에게 가서 선전해야한다. 집안에서 미워도 밖에 나가 최고라고 해야한다.
해놓고 나면 자기에게 무엇이 돌아오는가? 안좋은 것만 돌아온다. ㅎ과 우리, 불가분의 관계다. 어쩔 수 없다. 그런데 그게 복이다.
내일 정숙희 자매, 소강당 현판식을 할것인데 간증 듣고 어제 잠을 못 잤다. 너무 끌렷던 것이다. 사람이 이럴 수 잇구나.. 생명이 한순간 한순간 없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찬양하는 모습, 피 한방울도 허비된 것이 없구나 하고 알아졋다.
감격적이고 감동이엇다. 오래 기리고 싶엇다. 그래서 교회 건축되면 어느 방 하나를 기념물로 그렇게 하겟다 약속햇는데 10년 세월이 흘럿다. 그것을 계기로 자매 간증을 들으니 너무 좋다. 잠이 안 왓다.
사랑방에 올려졋으니 길지만 다 읽기 바란다. 죽음 앞두고 한 말이기에 그 한마디 한마디 다 진실하다. 마지막에는 목이 막혀서 말도 안 나오는데 그순간까지 계속햇다. 그런데 이어서 옥현이가 그렇게 살앗다. 거기서 영향 받은 것 같다
우리 피한방울도 그냥 없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니 감격이엇다. 그게 ㅎ의 형상 아닌가? 앙상한 갈비뼈로 남지 않고 그리스도의 갈비뼈로 남길 바란다. 그보다 진한 말이 없다.
ㅎ의 형상으로 드러난다는 것, 인생 최고의 영광이다. 누가 그렇게 표현하겟는가. 왜 ㅎ이 인간 구원하시고 건지셧는가. 그렇게 표현할 수 잇기 때문이다. 하루를 살아도 그렇게 표현하면 넉넉한 인생이다.
먹고 입고 살다 죽엇다, 그런 천년 인생,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그 허망 극복하려고 네피림 되엇다. 그래도 그 허망함 극복 안된다. 성경은 생생하게 그것을 기록하고 잇다. 안 그러면 무엇을 해도 허무하다. 무엇을 쌓고 단체를 이루어도 허무하다. 그런데 형상으로 삶, 하루를 살아도 꽉 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