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농부, 흙 부자 되다!
도시에 살면서 땅은 있으나 흙은 없는 줄 알았다. 농사를 알기 전까지 '땅'은 재테크 대상으로 알았다. 나중에 개발이 되면 시세 차익으로 돈을 벌고,
돈이 많아지면 행복한 삶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세상 모두가 돈, 돈, 돈 하던 때 나 역시 그렇게 사는 것이 최선인 줄 알았다. 집에서 나오면 온통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여 흙을 밟으려면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가야만 했다. 흙을 밟을 수 있는 땅은 개발될 때를 기다리느라,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흙보다 땅만 보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경기도 광명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에서 회원 활동으로 마련한 주말농장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다. 예전에 주말농사를 경험해보긴 했으나,
농사의 '농' 자도 몰라 3~4개월 만에 그만둔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조금 철이 들었는지 밭에 가는 일이 재미있었다. 농사는 잘 몰랐지만, 밭에 가면
즐겁고 뿌듯해서 주말이면 열심히 다녔다. 2년 가까이 농사를 지었으나 알면 알수록 점점 더 어렵고, 이웃에게 매번 물어가며 하는 것이 민망했다.
답답한 마음에 농사를 가르치는 곳을 찾다가 당시 서울 성동구 금호동에 있던 '귀농운동본부'를 찾아갔다. 경실련 활동을 하던 나는 귀농운동본부 역시
시민단체임에도 활동가가 6명이고, 재정자립도가 67% 정도 되는 걸 보고 놀랐다. 대부분 시민단체가 1인다(多)역에 근무 환경은 열악하고, 월급은 턱없이
적어 활동비 수준이었다.
그런데 귀농운동본부는 어떻게 활동을 하기에 재정자립도가 높고 활동가가 많을까 의아했다. 이 의문은 교육을 받으면서 귀농운동본부 중심에 농(農)이
있었기 때문임을 알았다.
'생태귀농학교'에서 생태 가치와 자립하는 삶을 배웠고, '도시농부학교'에서 도시농업의 역사와 농사 실전을 배웠다. 그 과정에서 '아하! 미래의 삶은 흙에 있고,
자립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 이후 손바느질과 재봉틀 바느질, 전통주 담그기, 퇴비워크숍 등 귀농운동본부에서 하는 교육과 체험, 견학을
다니면서 귀농을 꿈꾸게 되었다.
생활이자 삶의 근본을 회복하는 일, 나 자신을 만나는 일, 자연에 순응하는 일, 후손들에게 조금은 덜 미안한 일, 순환의 삶을 실천하는 일, 내 삶을 조금이라도
자립하는 일, 머리가 아닌 몸으로 살아내는 일…. 무작정 귀농이 아니라 '생태 귀농'을 꿈꾸게 된 것이다.
'미래의 삶은 귀농'이라며 꿈에 부풀어 있던 나에게 남편의 말 한마디는 싸늘했다. "이 사람아, 귀농은 도시에서 실패한 사람이나 하는 거야." 그야말로 '허걱' 했으나,
나보다 농사를 더 몰랐으니 그럴 만도 했겠다. 도시에서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싸우며 지내느니, 기다리자 싶었다. 귀농의 꿈을 잠시 접고, 귀농 전까지
도시에서 농사를 지으며 단출한 삶을 살고자 한 것이 벌써 10여 년이 되었다. 시민운동과 직장생활을 오랫동안 한 나로서는 삶의 전환이 농사다. 일, 사람과 부대끼며
사는 것은 이제 그만 줄이고, 흙을 만지며 나를 보듬으며 자연에 순응하는 삶으로 생활을 바꿔나갔다. 돈 버는 시간은 줄이고 농사짓는 시간을 늘리면서 자연스럽게
도시농부가 되었다.
귀농운동본부 도시농업위원회가 끊임없이 함께 활동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나는 농사만 짓고 더 이상 시민운동은 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하지만 끈질긴 설득에
결국 합류하면서 지금까지 도시농업운동을 하고 있다. 5평에서 거름을 자급하고 씨앗을 자급하던 텃밭농사는 400여 평의 밭농사와 논농사로 확장되었다.
▲ 따복 텃밭에서. ⓒ이복자
농사가 도시를 바꾼다
5년 전엔 4500여 평 고등학교 예비 부지에 'LH흥덕농장'을 조성했다. 25톤(t) 덤프트럭 550여 대분 흙을 들여와 복토를 하고, 부대시설을 만드는 건설현장의 소장(?)이
되었다. 무단경작을 하던 기존 경작자들과의 실랑이를 하고 주민들의 민원이 빗발쳤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해소되어 함께 농사를 짓는다. 흥덕농장은 남녀노소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여 농사를 짓는 텃밭이다. 지역아동센터,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생들이 농사를 경험하면서 또 다른 학습의 장이 된다. 경작자 중에는
도시농업공동체를 만들어 도시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분들도 생겼다. 매월 격주 일요일 아침에는 '흥덕농부학교'를 수료한 사람들과 토종씨앗을 보급하고자
공동 농사를 짓는다.
도시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다양한 변화가 일어난다. 한 뙈기 텃밭에서 농사 경험을 하면서 외국산보다 우리 농산물을 고르고, 더 나아가 친환경농산물과 토종
농산물을 찾으면서 서서히 먹을거리의 변화가 생긴다. 쌈채소를 키우는 농사에서 갈무리할 수 있는 농사로 넓혀가고, 제철 먹을거리를 회복하는 건강한 식생활
습관 형성에 도움을 준다. 전통음식인 된장과 간장, 고추장을 담그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 된다. 취미 위주의 수확체험농사를 시작한 주말농부들은
음식물 찌꺼기와 오줌 액비로 거름을 자급하고 흙을 살리는 농사를 실천하는 도시농부들로 변신한다. 농지 여건이 된다면 곡식 농사와 겨울 농사를 짓고 싶어 한다.
올해 5월엔 경기도 신도시 광교지구 작은 유휴 부지에 '따복 텃밭'을 만들었는데, 신청자가 80여 명에 이르렀다. 땅이 작아 개인 텃밭은 없고 모두가 함께 공동으로
농사짓는 텃밭인데도 지역 주민들은 즐겁게 텃밭을 가꾼다. 이들은 함께 농사지은 배추로 김치를 담가 독거 노인들게 기부하는 행사도 가졌다. 벌써 주민들이
내년엔 어떻게 할지를 논의하고 있어 텃밭 중심 마을공동체가 만들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올해는 광명시 노온사동에 500평 텃밭을 만들어 뜻있는 분들과 농사를 함께 짓는다. 토종농사 공동체인 '호미 한 자루'와 어린이집 아이들이 함께한다.
고맙게도 땅 소유주가 도시농업 교육터로 내줘 시작된 텃밭이다. 5~6년 동안 농사를 짓지 않아 버드나무와 갈대 등 습지식물이 늪처럼 덮인 곳이었다. 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포크레인으로 뿌리를 캐내고, 밭을 고르고, 작은 논을 만들었다. 비닐집, 우물터와 쉼터, 생태 뒷간을 만들어 '우리씨앗농장'이 탄생했다.
이곳에서 관내 9개 어린이집 아이들이 자연과 농사를 체험한다. 10여 명의 도시농업전문가들은 매주 토종농사에 대해 연구하는 '텃밭도서관' 모임을 한다.
논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자라는 24종류의 토종벼는 마을 어르신들을 향수에 젖게 한다. "옛날 어릴 때 보았던 벼인데 아직도 이런 종자가 있느냐?"
물으며 신기해하신다. 어르신들은 생태순환농사를 짓는 우리 씨앗농장의 탄생으로 주변이 훤해졌다고 칭찬하신다. 어린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농사짓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시기도 한다. 농약과 제초제를 쓰던 윗논 주인도 이제는 제초제를 쓰지 않고 농약도 대폭 줄였으니 점점 농약을 쓰지 않을 것 같다.
▲ 우리 씨앗 쌀 22종. 논농사도 토종농사를 짓기 위해 노력한다. ⓒ이복자
도시농업운동의 힘
우리나라에서 도시농업운동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그 시작은 2004년 귀농운동본부에서 도시농업위원회를 만들면서부터가 아닌가 한다. 도시농업위원회는
이듬해 봄부터 농사교육(도시농부학교), 인재발굴(텃밭보급원=도시농업전문가 과정), 연구, 자재개발, 농장 조성, 출판 홍보 등의 사업을 시작했다. 도시
농부학교는 귀농운동본부 사무실에서 이론교육을, 교육농장인 경기도 군포, 안산, 고양, 퇴계원에서 실습교육을 하면서 도시농업 운동의 기초를 차분히
다져갔다. 도시농업위원회의 뒤를 이은 텃밭보급소는 2009년 말 ‘전국귀농운동본부 텃밭보급소’라는 이름으로 서울시 강동구 둔촌농장 비닐하우스 사무실에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민관 거버넌스'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강동구의 도시농업을 시작으로, 도시농업 열풍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귀농운동본부 도시농업위원회에서 시작한 도시농업운동은 10년을 훌쩍 넘어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꽃피웠다. 전국 곳곳 도시가 없는 곳은 없다.
도시에 유휴공간이 있다면 그곳을 생태농사, 순환농사를 짓는 텃밭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텃밭은 지역주민들이 소통하는 공간이 될 것이고 마을 사랑방이
되어 그야말로 삭막한 도시의 숨 터가 될 것이다. 흙과 함께 도시공동체가 복원되는 것이다.
도시농부는 흙과 함께 농사지으며 순환하는 삶으로 성숙해가고, 도시농업은 환경과 생태계를 보전하여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어나갈 것으로 믿는다.
♬ Symphony No.6 in F major 'Pastoral' op.68 / Beethoven, Ludwig van
전원교향곡
범 공 천
‘전원교향곡’이라는 제명은 앙드레 지드의 소설로도 유명하지만 악성(樂聖)) 베토벤의 제6번 교향곡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곡은 베토벤이 청력을 거의 잃어가고 있을 무렵 의사의 권유로 번잡한 빈(Wien)을 떠나 아름다운 자연으로 돌아가 있을 때 작곡한 것이라서 그곳의 분위기와 그의 정서가 그대로 배어 있다.
내가 라흐마니노프나 차이콥스키보다는 선호도가 낮은 베토벤의 이 음악에 갑자기 애정을 갖게 된 것은 작년 이맘 때 이곳 양주 시골에 정착한 후부터이다.
나는 거의 매일 한 두 차례 개울가를 따라 잘 다듬어진 자전거 전용도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운동 효과를 기대하기 보다는 그저 가벼운 산책을 한다. 이 시간 동안 라이터만한 크기의 MP3에 저장된 음악을 듣는 것이 나의 굳혀진 습관이다.
음악은 주로 가벼운 클래식 음악과 팝송을 적절한 비율로 혼합하여 지루하지 않도록 수시로 저장한다. 그래서 1시간 가까이 연주되는 교향곡은 가급적 꺼려왔다. 그러나 이곳 전원생활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음악으로 이 베토벤의 6번 교향곡(전원교향곡)과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제9번(신세계)은 예외적으로 저장을 했던 것이다.
이 전원교향곡은 바이올린에 의해 흐르는 시냇물의 속삭임과 플루트와 오보에 클라리넷 등으로 각종 새들이 지저귀는 전원의 정경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고 햇살 가득한 들판의 정취를 화사하고 평화롭게 그리고 있다.
이런 음악은 실내공간에서 듣는 것과는 느낌과 감흥이 사뭇 다르다. 자전거롤 타고 있는 동안이나 벤치 혹은 풀밭에 덥석 퍼질러 앉아 음악을 들으면서 바라보는 낙조나, 시선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한 쌍의 백로는 참으로 아름답고 정겹다. 어느 미디어 동영상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아름다운 이런 정경에 빠지다 보면 어느새 나는 음악에 이끌려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거나 상상 속에서 구성해본 내 영화를 다시 떠올리기 십상이다.
내가 그동안 만든 상상 속의 영화는 세 편이다. 타향에서 떠돌다 늘그막에 귀향하여 어릴 적의 첫사랑 소녀를 그려보는 탕아의 인생 역정 스토리, 또 하나는 인척 관계의 청순가련한 여인을 인습의 장애 속에서 몰래하는 사랑 이야기, 다른 하나는 나의 취미와 취향이 같은, 즉 예술과 문학 그리고 철학 천문학 인류학 생물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 관심이 많은 여인과의 지성적인 교류 등이다.
이런 상상은 음악을 듣는 순간에 그려지고 다듬어지며 되풀이 된다. 나는 가끔 만약 영화에 음악이 없다면 얼마나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울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음악이 배제된 산책 또한 마찬가지여서 왠지 공허한 기분이고 건조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디에도 메어있지 않고 이런 음악과 함께 자연의 품에 안겨서 자연의 온갖 친구들과 호흡을 같이하고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은 더할 나위없는 행복감에 젖어들게 된다. 때로는 가슴 벅찬 희열감과 환희로 숨이 막히기도 하고 감동의 눈물이 돌기도 한다.
이러한 최고의 만족감과 행복감의 경지는, 독실한 신앙인이 초자연적인 존재와의 소통과 일체감, 혹은 예술가나 그의 작품 속으로의 몰입과 동화 등에서 오는 일시적인 흥분상태와 유사한 것일 거다.
아침 산책길에서 만나는 야생화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며 아침 인사도 건넨다. 이름을 모르는 꽃은 미안한 마음에, 집에 돌아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어코 알아내고는, 머릿속에 입력하여 두었다가 다음날에는 그 이름을 불러주는데, 이때 순간적으로 그 꽃과의 교감으로 짜릿한 행복감을 맛본다.
또한 강가에 먹이 사냥 나온 조류들에게도 “쇠백로야, 간밤 잘 잤어?”라는 식으로 인사말을 한다. 그러면 고개를 길게 들어 올리며 고맙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화답을 보내온다. 청둥오리 떼들이 가까이에서 몸단장하는 장면을 카메라 앵글에 담으려고 자세를 취하면서, 이들이 날아가 버릴까봐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여도, 반사적으로 경계태세를 취하게 마련인데 이때는 속삭이듯 “미안해요, 공연히 신경쓰이게 해서”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혹은 손을 흔들어주기도 한다.
어쩌다 밤늦게 자전거를 타고 달밤을 달리다 보면 하루살이 떼나 나방과 부딪힐 때가 있는데 이 때 나는 “내 본의가 아니야, 미안해”라는 위로의 말도 잊지 않는다.
의정부와 동두천을 경유 소요산으로 이어지는 1호선 지상 전철은 요즈음 날마다 황금색을 더해가는 들판을 대략 10분 간격으로 오가는데, 이런 모습은 적절히 향수를 자극해주어서 좋다.
봄날이나 초여름에는 온갖 동물들이 새끼를 치는 계절이라 진귀한 정경을 자주 만나게 된다. 청둥오리 어미가 가녀린 새끼 여럿을 이끌고 먹이를 찾거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모습, 또는 여러 마리의 새끼들을 줄줄이 이끌고 이사 가는 족제비 일가족의 모습과 같은, 어미의 지극한 모성애와 새끼들의 천진스러움을 만나게 될 때에는 머리카락이 쭈뼛 일어서고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감동을 받는다.
나의 산책은 이런 들판이나 자전거전용도로만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는 산속 호수나 야트막한 산을 찾기도 하는데, 진달래꽃이 한창이던 봄 어느 날, 산길에서 나는 어린소년시절 이래 처음으로 딱정벌레의 일종인 화려한 비단길앞잡이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감격해 하는 때도 있었다. 이놈을 내 카메라에 담는 동안에도 고분고분 응해주는 듯하여 고맙기까지 하였었다. 나는 어릴 적 특별한 애정을 갖던 이 곤충을 그 동안 볼 수 없어서 멸종된 줄만 알았던 것이다.
며칠 전 집을 찾아온 딸 식구들과 함께 집 앞 들판 농로를 따라 산책에 나섰는데 딸이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묻는다. 그것은 아주 주의를 하고 들어야 겨우 들리는 배짱이의 노래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자연의 소리였다.
내 어릴 적 고향의 시골 밤은 각종 수컷 풀벌레들이 암컷을 부르는 세레나데로 시끄러울 정도로 요란스러웠다. 나는 그 때 언덕에 서서 영화 ‘오케스트라의 소녀’에서 지휘를 맡았던 스토코프스키를 연상하면서, 볼펜을 지휘봉으로 하여 한참을 지휘하기도 했었다. 이거야 말로 진정한 전원교향곡이었다.
지금은 비록 풀벌레 소리들이 환경오염에 대한 희미한 항의와 절규로 들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의 친구들인 온갖 풀꽃들하며 곤충과 조류 그리고 공기가 흐르는 소리 바람소리 강물이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다정한 소리 등에 의해 여전히 전원교향곡은 은은하면서도 장엄한 연주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단골 관객임과 동시에 양주전원교향곡의 평생 상임지휘자로서 살아갈 것이다.
첫댓글 그러자나도 바로 옆에 텃밭이 하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