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명의 고향은 바로 부처님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우리 생명의 고향은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바싹 마른 어떤 도리나 이치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生命)입니다. 생명 이기 때문에 그 생명으로 구하는 것이 우리 중생이 구하는 참다운 신앙심(信仰心)입니다. 우러러서 우리가 구한단 말입니다.
그냥 저기에 무엇이 좀 있으니 내가 구한다. 수학 문제를 풀고 무슨 학문적인 문제를 푸는 그런식의 종교는 아닙니다. 우리 생명자체를 온 전히 우리가 받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우리 생명의 본체인 것입 니다. 만 생명 모든 만물의 생명의 고향이기 때문에 그 자리는 바로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을 생명으로 구하는 것이 부처님인 것입니다. 단순 히 '부처'라고 하지 않고서 '부처님'이라, 정말로 님 가운데 님인 것이고, 우리 마음의 고향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마음의 고향 자리를 우리 생명의 근본 자리를 어떻게 빨리 구할 것인가?
우리는 그러한 부처님을 흠모하고 연모해서 구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처님은 우주의 이치이므로 이치로 구한다. 이것도 구하는 방법의 하나 이겠지만 부처님은 바로 생명이므로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러러서 신앙적으로 구한단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 소박합니다. 그래도 지금 18억이나 되는 인구가 믿는 것은 '오! 주여!'하는 그 마음, 덮어 놓고서 이치는 모른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따르는 그 마음, 그 마음으로 해서 그래도 이만큼이 과학문명 시대에도 18억이라는 인구가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인들은 부처님을 간절히 구하는 연모하고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그런 마음이 너무나 부족한 것 같습니다. 저도 그때그때 부처님 이치로운 법문만 많이 하는 것이지 정말로 생명으로 구하는 그런 쪽에다 역점은 별로 못 두어서 오늘만큼은 그런 쪽에다 보다 더 관심을 두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고향을 떠나면 고향에 대한 향수(鄕愁)가 얼마나 그립습니까? 부모님 슬하를 떠나면 부모님이 얼마나 그립고 간절히 갈망(渴望)을 합니까? 그와 똑같이 생명의 고향인 부처님에 대해서 정말로 갈앙심(渴仰心)이라, 목마를 갈(渴), 우러를 앙(仰), 병든사람이 약을 구하듯이 어린애가 자기 어머니를 찾듯이 부처님을 그렇게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못 찾고서 그냥 그렁저렁 이기심으로 구하니까 공부가 잘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도 감성으로 간절히 구하는 그 마음으로 감상하면 굉장히 마음이 정화가 됩니다. 훌륭한 음악이라든가 또는 훌륭한 미술이라든가 작품을 대할 때에 우리 마음 감성이 순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서 우리 마음이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도 역시 우리 마음이 여러 가지 번뇌(煩惱)에 따라서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있는 거치러운 마음을 정화시키려면 생명의 고향에 대한 간절한 갈앙심이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갈앙심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하십시오. 부처님이 그렁저렁
한 존재는 아니지 않습니까.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일체 공덕을 원만히 갖추고 있습니다. 내가 구하는 것이 거기에 다 들어 있습니다. 자비를 구하고 지혜를 구하고 행복을 구하고 능력을 구하고 그런 것이 부처님한테는 다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부처님을 위해서 우리 하찮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상적으로 나투는 이 몽뚱이 100개를 받친다 하더라도 조금도 한이 없습니다. 그 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과거 전생에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습니까?
과거 전생에 부처님이 살타왕자로 태어났을 때는 굶주린 범의 세끼를 구하기 위해서 몸땅 자기 몸을 바쳤던 것입니다. 또는 나찰한테 부처님의 소중한 법문을 듣기 위해서 해탈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조금도 주저 없이 후해도 없이 자기 몸을 순식간에 다 바쳤습니다. 그걸로 해서 몇 생을 넘어서 성불을 했습니다.
<<부처님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성불의 지름길.>>
불자님들 깊이 생각을 하십시오. 그렁저렁 공부를 해서는 이 공부는 더딘 것입니다. 자기 교만심을 그대로 두고서 부처를 구한다. 억지로 앉아서 화두를 한다. 이렇게 해서는 공부가 순탄하게 나아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다 바쳐서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 마음이 부처 아닙니까. 중생심(衆生心)을 몸땅 부정해 가지고서 참다운 불심(佛心)에다 마음을 두고서 구해야만 공부가 속 빠른 것입니다. 그것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생명의 고향에 대한 하나의 갈앙심입니다.
정토경(淨土經)을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십념왕생(十念往生)'이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열번만 부르면 그걸로 해서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갈앙심이나 그리워하는 마음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거짓말로 생각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거짓말을 하시겠습니까. 지금 현재 내 마음 이마음 떠나서 부처는 없습니다. 이마음이나 부처 마음이 같은 마음입니다. 다만 우리가 이 마음을 나다하고 스스로 업장(業障)을 지어서 이 마음을 구속하고 있는 것이지 이 마음 바로 부처 마음입니다.
따라서 이 마음이 바로 부처고 이 마음 가운데는 조금도 번뇌나 그런 찌꺼기가 없다. 그래서 100%부처님 마음 같이 확실히 믿는다고 생각을 할 때는 이 마음 그대로 바로 극락세계를 이루는 것이고 극락세계의 공덕을 우리가 수용하는 것입니다.
'일언지하(一言之下)에 확철대오(廓徹大悟)'라 한 마디에 깨달아 버린다. 그것도 역시 과거 전생에 업장이 가벼워서 부처님 말씀을 조금 도의심없이 받아드린다는 것입니다. 보통 성자나 선지식의 말씀을 듣는다 하더라도 보통은 다 그럴 것인가? 이렇게 의심을 깔고 듣습니다. 겉으로는 의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잠재의식에서는 그대로 받아 들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100% 수용할 때는 정말로 딱 믿어버리면 그 자리에서 깨달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믿는 마음이 중요 합니다.
<<믿음이 최상의 방편이다.>>
사람도 사람 사람끼리 믿어 보십시오. 그렇게 마음도 평화스럽고 그리고 믿음 그것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다 상통이 됩니다. 남을 미워하고 의심쩍어 해 놓으면 그 때는 그냥 그 마음이 건너가서 나를 안 믿는단 발입니다.
특히 현대 사회는 불신의 시대라, 서로 믿지를 않는 것이 병입니다. 서로 믿지 않는 것은 자기 마음의 본성도 모르고 남의 마음의 본성도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본성도 부처고 저 사람 마음의 본성도 부처다. 이렇게 안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안 믿을 수가 있습니까?
내가 너무 믿다가 저 사람이 나를 속이면 손해가 아닌가? 더러는 시행착오로 손해를 볼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영원적인 차원 해탈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설사 몇 번 속임을 당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손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귈 때 가장 좋은 방편이 무엇인가? 그것은 저 사람을 믿는 것입니다. 저 사람도 나와 똑같이 부처님이다. 이렇게 믿고서 우리가 최선을 다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람 사람끼리 사귀는데 있어서 가장 우수한 방법입니다. 이것이 예수가 하신 방편이고 석가모니가 하신 방편입니다. 불경(佛經)에서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무량수(無量壽佛) 무량광(無量光佛)이다. 목숨이 영생불멸한 생명이고, 또는 부처님 지혜가 우주에 충만해서 모든 것을 다 알고 할 수 있는 지혜다. 부처님
은 생명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 만유의 본질이고 그 가운데는 만 공덕이 다 들어 있다. 우리가 이렇게 듣고서 한 생각 그렇게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80만억 나유타겁(那由他劫)이란 오랜 무수한 세월동안 계행 지키고 법문도 하고 보시도 하는 바라밀 공덕과 비교할 때 믿는 그 마음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량무변하다. 내 생명이나 일체 부처님의 생명이 영생불멸하고 만공덕을 갖추고 있다. 이렇게 한번 딱 믿는 그것과 무량 세월 동안에 계행지키고 보시 하고 참선하고 염불하고 이런 공덕에 비해서 다시 비교할 수 없는 한도 끝도 없이 더 공덕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화경(法華經) 공덕품(功德品)에 있는 법문입니다.
법화경은 대승경(大乘經)아닙니까. 법화경 공덕품에 가서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이라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은 내 생명의 본질인 동시에 우주의 본체인데 그 가운데는 무량의 공덕이 다 들어 있다. 이렇게 말씀을 듣고서 그 자리를 딱 믿으면 한번 믿는 그 마음이 몇 천년 몇 만년 동안에 보시하고 계행 지키고 참선하고 이런 공덕보다도 훨씬 더 수승하다는 그런 법문이 있습니다.
다른 공부하는 법을 무시하는 그런 법문이 아닙니다. 다만 앞서 말씀과 같이 부처님의 무량지혜(無量智慧) 무량공덕(無量功德)을 믿는 그것 이참다운 신앙(信仰)입니다. 그 자리를 믿고 염불도 하고 주문도 외이고 참선도 하고 그렇게 해야 공부가 속 빠른 것입니다.
내 마음의 본성이 그와 같이 일체 만공덕을 다 갖추고 있다. 지혜도 자비도 행복도 다 갖추고 있다. 이렇게 분명히 딱 믿고서 그 자리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갈앙심으로해서 공부를 한다고 생각할 때에 그렇게 공부를 해야만 공부가 속빠른 것이고 또 피로하지도 않고 병도 생기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그런 경계가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더러는 부처님 같은 모양으로 나오고 또는 신장이 나오고 말입니다. 별스러운 경계가 다 있으나 부처님이라 하는 것은 내가 가고자 하는 근본 목적이 부처님하고 다른 것이 아니라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 생명의 근본인 동시에 우주에 가득차 있는 모든 존재의 근본생명이고 그 자리는 만공덕을 다 갖추고 있는 그 자리다. 하나의 생명의 실상이다. 이렇게 분명이 믿어 버린다고 생각할 때는 다른 나뿐 경계가 공부할 때에 옆보이지를 못합니다.
우리 마음이 시원찮고 그래저래 묽으니까 경계가 이것저것 나오는 것이지 우리 마음이100% 가고자 하는 근본 도리 진여불성 도리에 마음을 딱 못박고서 그 자리를 굳건히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공부가 굉장히 속 빠른 것입니다. 공부를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마음의 고향 자리 어차피 그 자리에 가야 합니다. 떠나온 것도 역시 그 자리에서 떠
나 왔습니다. 진여불성에서 우리가 떠나온 것이고 그러다가 몇 만생을 지옥으로 아귀로 우리가 헤맸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돌아가는 것도 역시 근본자리인 진여 불성 자리입니다.
삼계유여객사(三界喩如客舍)라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또는 욕계나 색계나 무색계나 모두가 다 오랜 '나그네 길'입니다. 욕계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헤매어 왔는고, 여기 계시는 분들 과거에는 천상에도 계셨고 그랬으리라 믿습니다마는 그렇더라도 역시 지옥 아귀 축생을 다 거쳤습니다.
겨쳤왔으므로 기분 사나웠을 때 남을 미워하는 것을 보십시오. 금방 그 사람을 때려죽이고 싶지요. 그것은 바로 지옥 같은 마음입니다. 우리한테는 지금 아귀 같은 욕심(慾心) 아수라 같은 진심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발동을 다 막아야 합니다. 진심이 사무치면 자기 부모도 죽이는 것입니다. 욕심을 내면 그 욕심 때문에 보십시오 가정불화 단체불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말입니다. 그 하찮은 물질 욕심. 물질은 본래로 없습니다. 우리가 금생에 살기 위해서 몸을 타고 나왔으므로 최소한으로 먹고 최소한으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은 위험스러운 시대입니다. 국제화 시대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도 치열한 경쟁을 하고있습니다. 경제 전쟁 또는 지식경쟁 또는 기술경쟁 각기 민족끼리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단시일 내에 일본을 능가할 수가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물질로 해서는 지금 다른 선진국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 정다운 믿음 정다운 가치관 이것은 우리 마음먹기에 따라서 그냥 당장에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어떤 나라나 자기들이 애쓰고 물질을 많이 생산하고 풍요를 자랑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네들도 종단에는 부처님 가르침같은 우주의 도리를 따라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우주의 도리입니다. 우주가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의 궤도에 따라랴 파멸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네들도 역시 몇 번 시행착오를 경험하다가 종당에는 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 번뇌를 이기는 것도, 또는 국제간에 이기는 것도 모두가 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른 것으로 해서는 이길 길이 없습니다.
다른 것은 이겼다 하더라도 별것도 아닙니다. 물질을 남보다 더 많이 가지면 그때는 가난한 사람들이 시기를 하겠지요. 감투나 물질은 그것은 많이 가져 보아도 이것은 사실은 불화의 씨앗밖에는 안됩니다. 그러기에 자본주의 사회를 보십시오. 부익부 빈익빈이라. 부자는 더욱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계금의 고랑을 메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혁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참다운 자유, 참다운 행복,
참다운 평화를 위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능념불무량력공덕(能念佛無量力功德)'이라 앞의 법문이나 거의 같습니다만 우리가 능히 부처님의 무량의 힘을 생각할 때는 즉시 '입필정(入必定)'이라 곧 바로 참다운 삼매(三昧)에 든다는 말입니다.
문자는 외울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뜻은 잘 기억 하십시오. 우리가 부처님의 공덕을 능히 생각할 때는 즉시 반드시 삼매에 든다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우리 마음이 안정이 되고 통일이 되어간다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산란스럽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이 오로지 부처님을 지향해서 가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고 산란스럽습니다. 부처님 공덕이 무량공덕이다. 이렇게 믿는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가 틀림없이 바로 삼매에 든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절대로 비하(卑下)를 말으십시오. 자기의 위치가 어느 위치에 있던지 비하할 필요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마음으로는 바로 석가모니 마음과 똑 같습니다. 따라서 그 마음의 무량한 공덕을 그때그때 여러분들이 깊이 깊이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무량의 공덕을 처음에는 잘 모릅니다. 허나 기도를 잘 모시고 참선을 많이 해 놓으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무량의 힘이 많이는 못솟아 올라와도 어느 정도는 자기 공부하는 정도에 따라서 무량의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한테 물질적으로 돈이 없다고 슬퍼마십시요. 내가 내 목숨 다 바쳐서 만중생(萬衆生)을 제도해야 되겠다. 이렇게 100% 믿는다고 생각 할 때는 틀림없이 물질도 옵니다. 물질 그것도 역시 진여 불성이 물질이 되었습니다. 물질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불자님들 물질이라 하는 것도 역시 현상이니까 이것도 진여 불성으로 부터서 잠시 간 어깨비 같이 상을 낸것에 불과합니다.
일체 존재 만유는 모두가 한결 같이 공(空)이요 무상(無常)이요 하는 것입니다. 공이고 무상이기 때문에 나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어느 것도 내 소유는 없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아 물질이 없다고 한탄을 마십시오. 금생에 태어나서 한사코부처님 법을 깨닫고 만중생을 위해서 이 몸뚱이 피 한방울까지 다 바치겠다. 이렇게 마음 먹는다고 생각할 때는 꼭 거기에 필요한 것은 따라오는 것입니다.
자기 몸뚱이만을 생각하므로 자기 생각이 안 따라오는 것이지 정말로 우주가 바로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우리 마음을 딱 붙여두고서 우리 행동 말하나 모두가 다 중생의 복리를 위해서하고 남한테 베푸는 마음으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꼭 거기에 필요한 물질도 오는 것입니다. 물질이 감정이나 정신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티끌 하나 전자(電子) 하나 모두가 다 부처님의 생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코 우리가 참다웁게 부처님 법대로 따른다고 생각 할 때는 꼭 틀림없이 건강도 올 수가 있는 것이고 물질도 올 수가 있는 입니다. 우리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모두가 다 진여불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진여불성은 만유의 생명입니다. 자기를 절대로 과소평가를 말으시고 자기 비하를 마십시오. 부처님을 100% 믿으시는 것이 최상의 행복한 길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공부하는 것이 바른 견해 입니다. 바른 지혜입니다.
반야(般若)의 지혜(智慧)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분명히 외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모두가 허망합니다. 허망하지 않다고 생각이 되시겠지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깊이 생각할 수록 지나간, 가사 지금 나이가 50 같으면 49년 생활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죽을 때에 자기 한평생을 헤아려 회고해 본다고 생각할 때에 여태까지 산것이 무엇입니까? 한바탕 꿈이란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이것은 무상(無常)이고 공(空)이고 무아(無我)입니다. 이것은 공식이고 현대 물리학의 공리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 간 나온 이것은바로 시간적으로 무상이고 공간적으로 공입니다. 현대 물리학도 다 증명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상식적으로 보니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물질이 있고 무엇이 있다고 보는 것이지 정말로 부처님 지혜로 보고 물리학적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모두가 다 물질이나 내 몸뚱이나 다 있는 것은 허망 무상한 것입니다. 무상하고 또는 공이고, 무상하고 공이고 때문에 내것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내 몸뚱이도 내 것이라고 할것이
없습니다.
인생고(人生苦)는 거기서 옵니다. 무상하고 무아인 내 몸뚱이가 나다 하는 데서 옵니다. 내 몸뚱이 이것이 나다. 중생들 입장에서 이것은 거짓말이 될수가 없지요. 그러나 과거 전생에 이 몸뚱이는 없었단 말입니다. 또는 죽은 뒤에 이 몸이 있을 것도 아닌 것이고, 금생에도 순간 찰나도 이 몸뚱이는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상(相)을 내서 상이 지금 변화해가는 과정(過程)에 불과한 것이지 고유한 내 몸뚱이는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자리 진여불성 자리는 영생불멸해서 그때는 조금도 변치가않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과 같이 낳지않고 죽지 않고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고 일체 행복이나 자비나 지혜나 다 갖추고 있어서 원만한 자리 그 자리가 바로 부처님 자리 입니다. 우주에는 부처님만 꽉 차 있습니다.
<<진여불성 자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 인생의 최상의 가치이다.>>
그 자리를 우리 중생은 보지 못하지만 성자는 그 자리하고 항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행복은 우리 인생의 최상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 자리를 느끼고 그 자리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핵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인류가 피할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나와 남이 본래 둘이 아니고 천지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체이다.' 라고 하는 부처님 지혜로 가야만 핵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고, 동시에 인간끼리 단체끼리 화합도 이루어집니다. 부처님 지혜로 해야 만이 비로소 이루어 집니다.
나와 남이 둘로 보는 서구적인 사상, 서구식의 분열로 보는, 이것 저것을 둘로 보고 셋으로 보는 그런 사고 방식 이런 걸로 해서는 절대로 참다운 자유 참다운 평등이 없습니다. 본래로 나와 남이 둘이 아니다. 이렇게 분명히 느낀다고 생각할 때는 경제적 평등 정치적 자유 이런 것이 절로 안 올 수가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한테 가는 길은 반야바라밀을 등불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나 그네 길이 팍팍한 길 아닙니까. 갈등하고 질투하고 헤어지고 생이별 사이별 이러한 길인데, 이런 길에서 그래도 좀 편하게 살아야 할 것인데, 편하게 살려면 바른 지혜의 등불, 앞서 말씀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등불로 해야 그래야 마음이 편합니다.
자기 몸뚱이 내 것이라고 아무리 지고 가도 변하고 맙니다. 죽을 때 우리가 운다고 안 죽습니까. 우리는 보다 똑 바로 봐야 합니다. 반야바라밀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허망 무상한 것입니다. 허망 무상하다고 확실히 느끼면 그 무겁던 몸이 가벼운 것입니다. 인생은 가뿐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 몸뚱이 이것이 언제 가도 무방하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모두 다 이것은 허망하다. 원래 공이다. 이렇게 확실히 생각할 때는 그렇게 귀찮은 몸이 귀한 몸이 그때는 아무런 무게가 없는 것입니다.
범 세끼한데 이 몸뚱이를 주나 개한데 주나 그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몸도 제일 편하고 마음도 제일 편합니다. 부처님 법은 몸도 마음도 제일 편하게 하는 최상의 길입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지금 공부하시는 방법 화두(話頭)면 화두, 염불(念佛)이면 염불, 주문(呪文)이면 주문 모두가 그 자리를 의미합니다. 차별도 없고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진여불성 자리, 우리 본래면목자리, 어떤 수행법이나 본래 그 자리를 의미합니다. 그 자리를 의미하는데 우리가 당장에 그 자리를 가지고 깨달으면 좋은데 업장 때문에 습기 때문에 바로 안돼는 것입니다. 나뿐 습관성 때문에 옳다고 이치로는 믿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행동은 안된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생각생각에 그 부처님 생각, 화두하는 사람들은 화두, 염불하는 사람들은 염불로 해서 실상 자리를 놓치지 않고 습을 녹여야 합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그럽니다. 부처님이 생명인지라 생명으로 구하면 좋을 것인데 바싹 마르게 화석화시켜서 구한단 말입니다. 내 생명이고 만중생의 생이 바로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기 때문에 생명을 생명으로 구하는 것이 염불입니다.
잘 모른 사람들은 공부를 많이 했다는 분도 화두를 하는 것은 보다 고도의 참선인 것이고, 염불은 그냥 근기가 낮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에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적어도 달마스님부터 6조 혜능 스님까지는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부처님이 우리 몸 밖의 어디에 존재한다. 우리가 염불할 때에 부처님이 우리 몸밖의 어디에 계시다가 우리가 부처님을 간절히 흠모 추구하고 염불을 하면 나한테 와서 나를 도와준다. 이렇게 생각하는 염불은 참다운 염불이 못됩니다. 그것은 소박한 방편 염불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염불은 무엇인가 하면 부처 자체가 바로 내 생명의 근본 자리이고 근본 성품이고, 우주의 근본 성품이기 때문에 참다운 염불은 바로 우주의 근본 성품을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자기 본래면목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본래면목을 인격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염불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방편이 되겠습니까.
따라서 참선과 참선 공부가 아닌 것과 차별은 무엇인가? 이 구분도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부분을 하셔야지 그렇지 못하면 공연히 부처님 법을 비방을 합니다. 참선 이것은 이름이나 상에 걸리지 않고, 명상에 걸리지 않고서 본성품 자리 본체를 구하는 것입니다. 헛된 가상(假相)이나 가명(假名)이나 그런 것에 걸리지 않고서 근본 성품을 안 여의는 공부는 다 참선입니다. '이뭣고'를 하나 '무자'를 하나 또는 '염불'을 하나 '주문'을 하나 다 참선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겠지요. 부처님 가르침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원래 문이 없이 천지우주가 다 부처님인데 부처님법 가운데서도 꼭 자기들 하는 식이 옳다고 합니다. 그 외는 옳지 않다고 그럽니다. 그럴 수가 어디가 있습니까? 그것은 아집(我執) 법집(法執)입니다. 그 아만심(我慢心), 법성(法性)을 미처 못 보아 놓으면 법집을 합니다. 그러나 법성을 본 사람은 법집을 하려고 해도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인가? 천지우주가 하나의 법이거니 어떻게 부처님 법 가운데서 어느 것만 옳고 어느 것을 그르다고 하겠습니까?
따라서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설사 하나님을 외운다 하더라도 오직 하나님 그것이 우리 부처님 같이 천지우주의 근본 성품을 의미하면 됩니다. 의미가 문제인 것이지 그냥 형식상 그런 가상가명(假相假名) 그런 것은 문제가 안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라고 부르나 또는 '똥마른 막대기'라 부르나 다 상관이 없습니다.오직 문제는 우리 마음이 진여 불성자리를 안 여의면 된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모두가 다 그 자리를 의미합니다.
다만 중생들이 잘 모르니까 극락세계도 저 서쪽에 있다고 한 것이지 서쪽이나 동쪽이나 아래나 위나 천지우주가 바로 극락세계인데 우리 중생이 번뇌에 어두워서 스스로 지옥을 만들고 스스로 극락을 만듭니다.
<<부처님 법 떠나서 참다운 행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바른 지혜의 등불 반야바라밀의 등불이 있어야 불교입니다. 덮어놓고 믿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나오셔서 증명하시고 무수한 성자가 증명하신 가르침, 무수한 성인들이 자기 몸뚱이를 다 바쳐서 증명했던 것입니다. 이 태안사(泰安寺)도 과거의 위대한 스님네가 그 험준한 밀림을 헤치고 절을 창건했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 생명을, 우리 생명의 가르침인 부처님 법을 위해서 지금 무엇을 했는가 말입니다. 과거의 스님네들은 자기 몸뚱이를 바쳐 부처님 법을 지키고 믿고 했을 것인데 과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가? 우리 행복과 부처님 법이 따로 있습니까? 부처님법 떠나서 참다운 행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자의 길에만이 참다운 행복이 있습니다. 건강도 명예도 어느 무엇도 거기에 있습니다. 자기 자성을 위하는 것도 모두가 다 부처님 법 우주의 도리 거기에 있습니다. 부처님 법을 떠나서는 참다운 자성을 위하는 것도 아닌 것이고 누구를 위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반야의 도리 인간의 번뇌로 보는 것은 모두가 다 허망무상하다. 허망무상해서 이것은 공이고 무아인 것이다. 고,공,무상,무아(苦,空,無常,無我) 이것은 불교의 공식입니다. 부처님 공식을 잘외워 두십시오. 모든 현상계라 하는 것은 우리 중생이 잘 못 보아서 우리가 보는 대로 있다고 하는 것이지 본질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것은 고고 공이고 무상하고 무아란 말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잘 못 보기 때문에 우리가 잘 못 구하기 때문에 인생고가있습니다. 고공무상무아라 인생은 고요 무상이고 공이고 무아라, 이것이 공식입니다. 인연 따라서 생겨난 법은 모두가 다 이것은 무상이고 공이고 무아입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잘못 구하기 때문에 인생 고가 있습니다. 이 공식은 꼭 외워두시기 바랍니다.
무상이고 공이고 무아고 고란 말입니다. 그래서 인생고를 떠나려고 생각할 때는 잘못 보아서 인생고가 있기 때문에 바로 보아야 하겠지요. 바로 보는 것이 반야바라밀 반야의 지혜인 것입니다. 반야의 지혜, 이것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실로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제법이 공이라. 다른 사람이 나한테 좋게 하는 것이나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이나 내가 배신당하는 것이나 모두가 다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것은 별것이나 모두가 다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 것은 별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출가한 우리 비구 비구니는 걸사다. 거러지란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평생동안 자기 소유란 승복 한벌과 바리에 하나란 말입니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물론이고 영생을 구하는 부처님 제자들은 그와 같이 검소한 생활을 해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 출가승들은 보다 더 자기 마음을 다 잡아서 항시 부처님 법에 따라야 합니다. 적게 먹는다고 해서 꼭 몸에 나쁜 것도 아닌 것이고 칼로리를 안 채운다고 해서 몸이 건강하지 아니한 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 생명 자체 우리 마음자체가 우리 몸을 기르는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 세포가 우리 몸을 기르는 것이 아니단 말입니다. 그런것은 보조에 불과합니다.
부처님 법은 바로 부처님 말씀대로 믿어야지 우리가 가감해서 자기가 편리한 것은 그대로 취하고 편리하지 아니한 것은 안 믿고 그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기한테 도움도 안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야바라밀의 등불, 반야바라밀의 광명, 이 광명을 딱 믿고서 그 다음에는 그 광명이 하마옆으로 샐세라 그 광명 쫓아서 간단 말입니다. 밥을 먹으나 길을 가나 행주좌와(行住坐臥) 앉으나 서나 누우나 또는 우리가 잠을 깨나 언제나 그때 그때 부처님 자리 '나나 너나 모두가 다 하나의 청정무비한 진여불성이구나' 이렇게 생각하기 위해서 화두가 있고 염불이 있습니다.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검기는 칠보다 검고 밝기는 해와 달보다 더 밝고 하늘을 받치고 땅을 괴고 이것이 나와 더불어 있지만 미처 알지 못하는 그것이 무엇인가?' 내나 '우주에 가득차고 영원히 빛나는 그 자리 생명의 본체이고 영원히 변치 않는 그 자리가 무엇인가?' 이런 것 입니다.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서 공부하기 위해서 염불이 있습니다.
<<우주는 영원히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부처님 이름은 모두가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무량생명을 이름 자체에 리듬 자체에 다 포함시켜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은 그냔 아무렇게나 지은 부처님 이름이 아닙니다. 부처님 이름 자체에 무한의 공덕이 거기에 묻어 있는 것입니다.
우주는 범부 중생이 볼 수 없는 수승한 하나의 리듬 하나의 음률(音律)입니다. 영생의 음악입니다. 따라서 영생의 음률로 해서 이루어진것이 부처님 이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명호를 한번 외이면 외인 만치 우리 몸도 마음도 정화가 됩니다. 우리 몸과 마음이 정화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신장이나 귀신도 정화를 받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의 지혜를 견지하시고 동시에 그 지혜를 순간도 놓치지 말고, 사업에 실패하고 며칠동안의 굶주림도 다 허망한 것입니다. 그런 것은 우리 생명의 손해가 아닙니다. 어느 순간도 조금도 차이가 없이 버스를 타나 밥을 먹으나 어디서나 간에 영생불멸한 그 자리를 놓치지 안해야 우리 생명이 손해가 안봅니다. 그 자리를 놓치면 그때는 손해입니다. 그 자리에 가까이가면 갈수록 몸도 마음도 가볍습니다. 분명히 그러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어릴 때는 굉장히 몸이 약했습니다.
그러나 중이 된뒤 지금까지 한번도 아파보지를 못했습니다. 그건 뭐 잘나서도 아닌 것이고 본래 건강해서 그런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래도 바보 같이 부처님을 믿어 왔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절대로 부처님 법 떠나서 다른 생각을 말으십시오. 이 시대만큼은 꼭 부처님 법을 따라야만 우리민족도 삽니다. 세계 경쟁력도 부처님법 따라야만 우리가 이깁니다. 참다운 기술도 말입니다. 영생 해탈의 그 자리에다 마음을 두고서 연구한다고 생각할 때는 굉장히 무시무시한 발명을 다 할 수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소중한 우리 인연 우리 불자님들 꼭 금생에, 우리는 달리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아니겠습니까. 어쩌다가 우리가 정말로 모처럼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호기(好機)를 만난 것입니다. 이 귀중한 찬스 이걸 놓치지 말으시고 꼭 정말로 손해 없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면으로나 좋습니다.
장사를 할 때도 역시 다른 고객들 다 부처님 같이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 자비스러운 말로 우리가 말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그냥 두번 오고 세번 오고 또 온단 말입니다. 어떤 분야나 마찬가지 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꼭 금생에 위없는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빌어 마지않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