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1-12
큰 위로의 손길 / 홍문수 목사
언젠가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남자의 젊은 아내가 갑자기 장티푸스에 걸려 죽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좌절한 나머지 실성한 사람처럼 방황합니다. 매일 술에 만취해서 사람들과 다투기 일쑤이고, 괜히 남의 물건을 훔치고, ... 그러다가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늙은 아버지가 면회를 가서 이렇게 호통을 칩니다.
“얘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이 너 하나뿐인 줄 아느냐? 슬퍼하며 사는 게 바로 인생이란 말야!”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영화 속의 남자와 비슷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고통과 슬픔을 이기지 못해 낙심천만한 나머지 방황하는 남자! 여러분,
그가 누굽니까?
뜻밖에도 엘리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고 있는 엘리야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이스라엘의 사악한 왕 아합의 폭정에 항거한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아합은 부인을 잘못 얻었죠. 이방 나라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정략 결혼을 했는데, 그 여자는 자기 나라의 우상 신상을 끌고 왔습니다. 게다가 바알신과 아세라신 선지자들을 왕궁에 끌어들이고 백성들에게까지 우상 숭배를 강요합니다.
엘리야는 이를 척결하고자 갈멜산에 백성들과 850명의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를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영적 대결을 펼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인가? 아니면, 바알 신이 참 신인가?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할 때 제단에 불이 내려와 젖은 것까지 다 태워버립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한 기적이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아무 응답이 없었던 바알신 선지자들은 겁에 질려 엘리야에게 다 죽임을 당합니다. 그뿐 아니죠. 엘리야가 기도하자 3년 6개월 동안 가뭄으로 고생하던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렸습니다. 기적의 연속입니다.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대단했던 선지자가 전혀 뜻밖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2절. 아합이 이세벨에게 모든 상황을 보고합니다.
그러자 분개한 이세벨이 다음 날까지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고 경고합니다.
그때 엘리야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3절~4절 보면, 자기 생명을 위해 도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이제는 차라리 죽고 싶다고까지 말합니다. 하도 황당한 모습이라 어떤 성경신학자는 이를 미화시켜 해석하기도 합니다.
엘리야가 잠시 기도하기 위해 고요한 장소로 옮겨 갔던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굳이 미화시킬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성경은 있는 그대로 진실을 말하는 책입니다. 엘리야의 평소 모습과 판이해서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도망간 게 사실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오히려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약5:17에도 보면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선지자지만 그 역시 고통과 슬픔,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 처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게 인생의 본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생은 예외 없이 슬픔과 고통 중에 살아갑니다. 다만 그 종류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모세도 시편 90:10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
사람들이 일일이 표현하지 않아서 그렇지 다들 아픈 사연을 갖고 살아갑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믿는 성도들조차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고통과 슬픔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 인생에 꼭 필요한 게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위로’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피할 수 없는 게 인생이라면 위로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본문 보면 엘리야에게 필요했던 것도 역시 하나님의 위로였습니다. 그는 그 위로를 받았고 결국은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나 능력있는 선지자로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주시는 참된 위로 대신 세속적인 것으로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예를 들면 세속적인 향락을 통해 고통을 잊어버리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마취주사 맞는 것과 같습니다. 그때뿐입니다. 잠시 잊어버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마취가 깨어나면 본격적인 고통이 찾아오듯이 고통과 슬픔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잠시 후 더 크게 밀려옵니다. 그러면 더 커진 고통와 슬픔을 잊기 위해 더 큰 향락을 추구합니다. 악순환이 이어지고, 마침내 인생은 망가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참 위로로 인생의 모든 고통과 슬픔, 두려움과 절망을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인생의 승패를 결정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위로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그분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아무쪼록 위로의 하나님으로 인해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엘리야에게 찾아오신 위로자 하나님
성경 보면 하나님이 때때로 엄위하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예를 들어 심판주로서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혼내고 책망하고 징벌을 하는 무서운 분으로 연상하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 그런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이상으로 하나님은 부드러운 사랑의 모습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책망하기보다는 용서하시고 용납하시고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엘리야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엘리야를 책망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못난 모습을 보이는 그에게 큰 소리가 나고 욕이 나갈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5절 보면 ... 잠이 든 엘리야에게 천사가 찾아옵니다.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줍니다. 7절에는 ‘여호와의 사자’라고 되어 있는데 천사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신학자(아브라함 카이퍼)는 여기서 말하는 천사(여호와의 사자)가 구약 시대 종종 나타났던 성육신(成肉身) 이전의 예수님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일반 천사이든 성육신 이전의 예수님이든 중요한 것은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통과 슬픔이 많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살펴주십니다. 그 모든 고통과 슬픔을 딛고 일어서게 해 줍니다.
성경을 보면 위로자 하나님의 모습이 다양하게 설명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각각 위로자로 나타납니다.
① 성부 :
구약과 신약 도처에 하나님 아버지가 위로자로 소개됩니다.
고후1:3~4 를 보면 극한 고난을 많이 겪었던 바울이 그 가운데 체험한 위로자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고 시편에서도 하나님을 위로자로 묘사합니다.
시68: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시139:7~10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② 성자 :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고 히4:15~16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소개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③ 성령 :
예수님이 십지가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당신이 떠나가시며 그후에 성령이 오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요14:16,18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보혜사로 오신 성령께서 성도를 위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위로의 손길 : 새 힘과 세미한 음성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위로하시는 손길이 어떻게 나타날까요? 엘리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위로의 손길을 살펴보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① 새 힘의 공급 :
5절~8절 보면 천사가 나타나.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줍니다. 이것은 비단 육신적인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영적 능력까지 공급해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위로는 힘을 주는 겁니다.
‘위로자’라는 영어 단어가 comforter인데 com(함께)과 fort(힘)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힘에 센 사람이 함께 하면서 힘을 공급하는 것이 위로인 것입니다. 인간은 진정한 의미엣 위로자가 되지 못합니다. 고만고만하니까 말입니다.
그저 동정(Sympathy)할 뿐이죠. 동정도 필요하지만 그러나 근본적인 위로는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엘리야는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영적으로 육적으로 기력을 회복합니다. 그 힘으로 호렙산까지 40주야를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지쳐있을 때 육신적으로 좋은 음식을 먹고 휴식을 취하는 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위로를 통해 영적 힘을 보충 받는 것은 그 이상으로 중요합니다.
② 세미한 음성 :
9절 보면 아직 엘리야가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는 굴 속에 은거해 있습니다. 11절~12절 보니까, 굴 속에 있는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세우고 바람, 지진, 그리고 불을 차례로 지나가게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불 후에 세미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때 실망했던 엘리야가 크게 위로를 받게 됩니다. 자기는 열심을 내서 한다고 했는데 오히려 상황이 악화됐습니다.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았고, 자기 혼자만 남아서 고난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3절 이하를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하나님께 다 계획이 있다는 겁니다. 악한 이스라엘을 징계할 도구로 아람을 일으키고, 아합 왕을 징벌할 도구로 예후를 세우고 ... 더욱이 엘리야 혼자 남은 게 아니라 남은 자 7천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엘리야는 모든 의심이 사라지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낙심하는 것은 상당 부분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스스로 오해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이해가 되고 위로를 받게 됩니다.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대통령이 된 후 신문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의 성공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가 대답하기를 ... “그건 남보다 실패를 많이 했기 때문이죠.”(링컨은 실제 실패의 연속 ... 사업에도 ...정치에도 ... 의원 선거에 연거푸 낙선했었습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기자에게 이어서 대답합니다. “사단은 실패할 때마다 ‘이제 너는 끝장이다’라고 했지만, 하나님은 ‘이번 실패를 거울삼아 더 큰 일에 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사단의 속삭임보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게 성공의 비결이라면 비결입니다.” 그가 실패의 순간마다 마음 속에 들으면서 새겼던 말씀은 롬8:28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음성이 그를 낙심에서 구해낸 겁니다.
옛날 제가 전도사로 있던 교회에 한 여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딸이 제 기억으로 4살이었는데 얼마나 똑똑하고 예뻤는지 모릅니다. 기도도 깜찍하게 잘 하고 ... 그런데 어느 날 트럭이 후진하다가 그 아이를 보지 못하고 치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딸 아이를 잃었습니다. 얼마나. 미치도록 괴로웠겠습니까? 밤에 갑자기 생각나면 괴로워 하다가 전화를 합니다. 그런데 무라고 위로할 말이 없는 겁니다. 인간의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제게 말씀만이 위로가 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다가 다윗이 어린 아들을 병으로 잃은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다윗이 병 중에 있던 아이를 위해 울며 기도하다가 오히려 죽고 나니까 평정을 찾았다 ... 왜 그런 줄 아느냐 ... 이제 다윗이 그 아이에게로 갈 수 있지, 아무리 애써도 그 아이가 되돌아 올 수는 없다 ... 그러니 천국을 소망하면서 평소처럼 사아야 되지 않겠나 ... 그후 그 집사님이 마음의 안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전화했는데 하나님이 더 위로하셔서 꿈에 딸 아이가 예수님 품 속에 안긴 것을 봤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울지 않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살다가 고통과 슬핌이 찾아옵니까? 다른 데 찾아다니지 말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함으로 새 힘을 얻으시고 세미한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한 위로를 받고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위로에서 벗어나지 않는 길 : 항상 하나님을 앙망하는 신앙
엘리야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른 채 도망갔습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요?
3절 보면 그 원인이 나와 있습니다. “저가 이 형편을 보... ” 그의 영적인 시선이 문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세상의 형편과 조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순간 두려움이 몰려오고, 낙심이 되고, ... 그랬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신앙인이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적인 시선이 흩어지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바다 위로 걸어가던 베드로가 바다에 빠진 것도 예수님을 바라보다 파도치는 바다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을 앙망하시기 바랍니다.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그런데 때대로 고통을 당하다 보면 자기 자신이 스스로 의기소침해져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때가 생깁니다. 그런데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를 들어 1만원 짜리 지폐를 생각해 보세요. 빳빳한 것과 구겨진 것 두 가지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기왕이면 빳빳한 게 좋겠지만 그래도 가치는 같습니다. 구겨져도 절대 안 버립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이 혹시 구겨지고 찢어져도 우리가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일진대 하나님은 우리를 꼭 기억하시고 관심을 가지십니다. 사랑하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어려울수록 오히려 하나님께 다가가십시오. 그리고 위로를 구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질고를 짊어지고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큰 위로를 받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고통과 슬픔 많은 이 세상! 여러분은 무엇으로 위로를 받으며 삽니까?
다른 데 가서 기웃거리다 낭패를 당하고 낙심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오직 유일한 참 위로자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그 위로로 절망 가운데 있는 세상 사람들까지 위로할 수 있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