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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견회 과천 추사박물관을 가다 2014.6.5
보견회 6월모임을 어디로 할까 여러 후보지들을 두고 검토하다가 좀 심플하지만 작년 6월에 생긴 과천추사박물관으로 정했다. 관람시간이 한시간 정도 예상되니 인근 또다른 후보지는 없을까 찾았으나 마땅치 않았다. 또 이곳 추사박물관의 교통이 불편하여 생각한 아이디어-- 식당차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10시50분 선바위역에 모여 식당으로 가서 식당차를 타고 추사박물 관으로 간다. 11시30분부터 1시간 가량 관람후 다시 식당차를 타고 식당에 와서 점심식사를 하는 순서이다. 전부 전화로 부킹했으니 혹 차질이 나면 온통 일정이 엉망이 될 것 같아 여러차례 약 속과 다짐을 했다. 지난달 2명의 회원 신규가입이 있어 정회원이 24명이다. 개인사정으로 참가 못한 회원들 8명을 제외한 16명 전원이 약속한 시간에 도착했다.
과천 추사박물관 식당차 기사도 같은 지역에 있는 추사박물관을 몰랐다. 스마트폰을 이용했다. 네비게이션 기능을 하니 스마트폰이야말로 만능의 요물이다. 12시30분까지 오라고 기사께 당부하고 박물관 입구로 들어서니 전화를 여러차례 한 탓인지 직원이 마중 나와 있었다.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4년동안 과지초당에서 지내면서 학문과 예술에 몰두하며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던 곳이 바로 이곳 과천이다. 그래서 과천시가 그의 학문과 예술의 정수를 널리 알리기 위 해 추사박물관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작년 6월3일에 문을 열었다니 꼭 1년이 된 셈이다. 겉으로 보이는 유리 건물의 추사박물관은 아담하고 알차 보였다. 생부이신 김노경 당시 한성부윤 께서 별채로 지었다는 과지초당(瓜地草堂)이 건물 옆에 별도로 있어 박물관 입장에 앞서 그곳에서 단체사진부터 박았다. 부탁한 문화해설사(여자분)가 우리를 안내하면서 박물관의 건립에서, 추사선생의 일생을 일목 요연하게 설명을 너무나 잘 해 주었다. 목소리도 크고 해박한 지식으로 모든 궁금증을 풀어주었 다. 2층건물에 지하까지 3개층으로 전시가 구획되어 있었는데, 2층은 추사의 일생을 구분하여 설명하고 1층은 그의 학문과 예술 작품을 설명하고 있었다. 또 지하1층은 후지츠카 기증실과 강좌 실로 사용되었다. 사진을 중심으로 박물관 전시내용을 소개한다.
추사박물관 외관 추사박물관을 들어서며 과지초당 추사박물관 과지초당에서
추사의 생애 추사는 1786년(정조 10년) 김노경과 기계유씨의 큰아들로 충청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추사의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경주김씨 명문가였고 증조할아버지 김한신은 영조임금 의 딸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도 한성판윤,호조참판을 지 냈던 분이다. 추사는 8살때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로 들어간다. 어린시절 북학파 대가 박제가 의 가르침으로 청나라 신문물과 학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연경을 다녀오다 24세때 생부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 자격으로 연경(지금의 북경)에 가게 되었다. 25세때 북경에서 청나라 학자 완원과 옹방강을 만나 가르침을 받게 되는 행운을 얻었는데, 청나라 고증학의 대학자이며 당시 78세였던 옹방강은 추사의 학문을 보고 '해동에서 제일가는 학자'라고 칭찬을 하였으며 추사는 청나라 관리이자 옹방강과 함께 청나라 고증학을 이끈 완원 에게서 고증학 뿐만 아니라 금석학, 경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을 받았다. 옹방강과 김정희의 필담서가 남아 있다. 또 추사를 위한 송별연 모임장면의 그림도 남아 있다. 금석학에 연구를 거듭하여 신라 소성왕비가 남편의 명복을 빌고자 부처를 만들어 경주 무장사에 둔 과정을 적은 '무장사아미타조상비'를 발견 탁본으로 남겼다. 또 1816년 친구 김경연과 함께 신라의 진흥왕이 한강 이북까지 영토를 넓힌 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북한산진흥왕순수비'를 밝혀 내었다. 그때까지 조선을 세우는데 공이 큰 무학대사가 세운 비석으로 알려졌었다. 1819년 34세때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섰고 암행어사로 나가기도 했다.
김정희의 가계도 여덟살의 추사가 생부 김노경에게 보낸 편지 추사의 생애 예산-한양-연경-제주-한양-북청-과천
옹방강 옹과 추사와의 필담서 무장사아미타조상비 연경서 귀국무렵 추사가 지은 '아생구이 칠언시'와 청 주학년이 그린 '중추사동귀시권.
제주도 유배생활과 세한도 추사가 55세 되던 해 정치적인 모함을 받아 제주도로 유배생활을 8년3개월이나 살았다. 그러나 힘든 귀양살이 속에서도 학문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고 역관 제자 이상적이 청나라 에서 가져온 책을 받아보며 연구에 열중 하였다. 이상적은 무려 10수레나 되는 책을 제주도에 계 신 추사께 보냈다는 대목에 감동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이상적에게 고마움의 뜻으로 그려준 세한도는 너무나 유명한 문인화이다. 세한도를 설명치 않고 그냥 지날칠 수 없다.
세한도(歲寒圖)는 국보 제180호로 너무나 잘 알려진 추사의 대표그림이다. 종이 바탕에 수묵화로 세로 23cm, 가로 61.2cm. 손창근씨가 소장하고 있다. 조선 말기를 풍미했던 김정희의 문인화 이 념의 최고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의 변함없는 의리를 날씨가 추 워진 뒤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답 례로 그려준 것이다. 그림 끝에 작화(作畵) 경위를 담은 작가 자신의 발문(跋文)과 청대(淸代) 16명사들의 찬시가 적혀 있고, 이어 뒷날 이 그림을 본 김정희의 문하생 김석준(金奭準)의 찬문 과 오세창(吳世昌)·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 등이 함께 붙어 그림 길이가 약 70cm인데 왼쪽부분 에 붙은 발문의 길이가 무려 13m에 이른다. 오른쪽에는 '세한도'라는 제목과 '우선시상'(藕船是 賞 : 우선 이상적에게 이것을 줌)·'완당'이라는 관서(款書)를 쓰고, '정희'와 '완당'이라는 도인을 찍었다.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이 너무도 기뻐 청나라에 가져가 청나라 학자들에게 보이고 16명 의 학자들로부터 찬사의 글을 받았던 것이다.
또 유배시절 그의 독특한 추사체 글씨를 완성하기도 했다. 제주유배생활은 추사 인성(人性)의 완성이라 할 수 있으며 추사체를 꽃피운 절정의 시기이기도 하다. 추사는 1849년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뒤 용산에서 지내다 2년뒤 또다시 모함에 의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거기서는 친한 후배 이며 함경도 감사였던 윤정현의 도움으로 학 문에 매진할 수 있었다. 윤정현과 함께 황초령에서 발견된 진흥왕순수비를 원래자리인 진흥리로 옮기고 비각을 세우고 "진흥북수고경(眞興北狩古竟)"이라는 현판을 남겼다.
추사의 제주유배지 추사가 예안이씨 부인에게 보낸 한글편지 세한도 추사가 쓴 황초령진흥왕 순수비각의 현판글씨 "진흥북수고경" 예림갑을록/1849년 6월 20일부터 7월14일까지 제자들의 서화를 7차례 평한 것으로 참여자는 김수철,허련,이한철,유상,전기,유숙,유재소 등이다. 예서 대련/대팽 고회 "촌노의 가장 큰 즐거움" 좋은 반찬은 두부,오이,생강,채소요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손자라네-- 행서 대련 '좋은 붓과 이름난 꽃' 무쌍채필산호가 :더없이 좋은 붓에 산호 붓걸이 제일명화비취명: 제일가는 이름난 꽃에 비취 꽃병 추사가 짓고 쓴 "해붕대사화상찬(海鵬大師畵像贊) 추사 인장 구경
과지초당(瓜地草堂)생활 1852년 8월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뒤 아버지 김노경이 과천에 마련한 과지초당에서 약 4년동안 머물면서 자신의 학문과 예술을 완성시켜 나갔다. 과천시절 남긴 추사글씨로 촌노의 가장 큰 즐 거움이라고 한 "대팽고회"의 대련이나 "종이붓과 이름난 꽃"도 유명하며 과천시절에 쓴 추사편지 도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추사가 세상을 뜨기 3일전에 썼다는 봉은사 판전에 걸린 현판 "판전(板 殿)은 한 점 속된 기운이나 기교가 없는 단단한 글씨로 유명하다.
서예를 배우는 필자로서는 특히 글씨에 관심이 많을수밖에 없다. 그의 글씨중 해서,행초서,예서, 전서 어느하나 훌륭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가 이룩한 특히 예서 추사체를 특히 좋아한다. 글씨나 그림을 그리면 낙관을 하는데 호와 이름의 도장의 진수를 추사인장에서 볼 수 있었다. 호가 200개가 넘는다고 알려진 추사의 여러모양의 인장은 강한 인상을 남긴다. 추사의 예서 대련 직성수구와 호고유시 그리고 불이선란도 청나라 유용의 행서풍 작품 과천시절 친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1856년,개인 소장 제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되지만 70년 동안 벼루 열개를 갈아 구멍을 내고 천자루의 붓을 닳게 했습니다. 해서 51세에 쓴 옥산서원과 71세에 쓴 판전 행서 예서 말년의 추사체 세상을 뜨기 3일전에 쓴 판전/봉은사 판전의 현판
마지막으로 건물 벽면에 추사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를 감상했다. 그림에 화제가 붙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처럼 많은 제발을 붙인 것은 처음 본다. 이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그림보다도 글씨가 더 많을 뿐만 아니라, 그림보다도 오히려 글씨를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독특한 그림이다. 그림보다도 글씨가 많아지게 된 것은 추사가 제발을 네 번이나 추가했기 때문이다. 추사는 우연히 손길 가는 대로 그렸던 이 그림 제발을 추가했을 뿐만 아니라, 눈앞에서 문하생(門下生)들끼리 주인이 두 번이나 바뀌게 되었던 특별한 사연까지 밝히며 제발을 계속 추가했다.
벽에 새겨그린 불이선란도/불이선란도 불이선란도/제발이 네개나 되고 글씨가 우에서 좌로가 아니라 좌에서 우로 쓰고 우측에 낙관한 기존에 없던 파격을 택했다. 15세기 화풍이 V라인데 반해 19세기에는 U라인의 화풍이다. 추사 영정/소치 허련 그림
전시된 추사의 예술작품을 감상하면서 오늘의 이곳 추사박물관 견학을 잘 선택했구나 하는 생각 이 들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회원들이 만족해 하는 것 같아 주선한 사람으로서 기뻤다. 12시30분 대기한 식당버스를 타고 예약한 "옛골토성 과천점"으로 향했다.
오리훈제 전문점인 옛골토성은 평일인데도 만원이다. 야외식당에서 오늘의 일정을 마치며 회식 에 들어갔다. 오늘 스폰서인 유호길회원의 건배구호로 시작된 식사와 주연은 근 한시간여동안 소란스러울 정도로 정담이 오갔다. 스폰서에 감사 박수를 보내며 이날의 행사를 모두 마쳤다.
<수입,지출 결산> 전월 이월 2,176,910원 보험료 환불 +115,000원 회비입금(16명) +320,000원 식대 -281,000원 식대 스폰서(유호길회원) +200,000원 기사,식당팊과 가이드음료대 -25,000원 이월 잔액 2,505,910원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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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추사체는특징이 있네요.소치의추사영정. 두분이화합한 듯. 느낌이듭니다.자세히 알려 주셔서 감사 합니다.
이창수원장의 첫댓글에 감사 드립니다.역시 높은 식견에 놀랐습니다.
본문의 사진은 장세원 회원께서 촬영하여 송부해주신 것으로 우리 보견회의 자랑입니다.감사합니다.
봉은사 바로 옆에 살다가 보니 자주 그곳으로 산책을 나간다 .그때마다 빛 바래고 금이 많이 간 현판 板殿을 보면 추사의 작품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다. 아무렇게나 무관심하게 먼지를 뒤집어 쓰고 달려있는 이 졸필(?)이 정말일까 하고. 이는 도대체 무슨 뜻이며
돌아가시기 3일전에 그 힘에 부치는 기력으로 기어이 쓰고 가신 까닭은 또 무엇일까 ? 옆을 지날때마다 나는 늘 같은 생각을 한다
추사박물관에서 추사의 다이나믹한 인생 및 글씨에 대한 많은 자료들을 잘 보았고,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산님의 박식한 식견은 자타가 아는 바이고 모처럼 추사 작품과 일생을 같이 보게 되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예산의 추사 탄생지에도 볼만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언젠가 기회를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kdchang님 감사합니다. 저도 봉은사 판전을 종종 보는데 과연 추사 글씨가 맞나 싶을 정도로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글씨를 배우면서 느낀점은 경지에 달한 달필이 아니가 생각합니다. 인쇄체의 매끈한 글씨가 잘 쓴 것이 아니라
혼과 정성을 다한 글씨를 최상으로 치니까--아마도 그렇게 인정하는가 봅니다. 잘은 모르지만 추사글씨중에서도 물론 마지막 작품이라 더 평가 되기도 하는 것 같구요.
결산중 보험료 환불 115,000원건에 대한 설명입니다. 지난달 전주 갔을때 24명 보험을 들기로 했는데
보험사의 착오로 1명밖에 가입이 안되어 나머지 23명분 보험료가 통장으로 환불입금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