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담는 가방/ 한정숙
사람들은 제각각 애착하는 물건이 있다. 물건에 이야기가 담기면 더 그렇다.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는 물건은 그들의 결혼식 예물에서 짐작할 수 있다. 신랑은 보통 평소에 점 찍어 둔 시계를 준비하고 신부는 그동안 갖고 싶었던 가방을 받기도 한다. 형보다 먼저 결혼한 둘째도 어른들의 권유로 양가에 드리는 예단은 없애고 서로 예물만 주고받았다.
대신 면세가격이 가장 싸다는 나라로 신혼여행을 가더니 시계와 가방을 사 왔다. 평소 갖고 싶었다며 자랑하는 아이들에게 ‘멋있다’와 ‘예쁘다는 말로 대꾸했다.
나도 이야기가 담긴 가방이 몇 개 있다. 해가 바뀌고 집이 바뀌어도 밖으로 밀려나지 않고 선반과 책상 옆에 온전히 자리를 잡은 것들이다. 어깨끈이 노란색 금속 고리로 된 검은색 가방은 가족에게 받은 선물이다. 교장 승진 인사 발령이 났을 때 “가족들의 응원과 도움으로 좋은 날이 왔으니 참으로 고맙다. 이 일은 분명히 축하받을 만하다”라고 포문을 연 후, 그동안 근무하랴 집안 살림하랴 바쁘고 힘들었다며 자랑할 것도 없는 지난 일을 들췄다. 그리고 “아무래도 앞으로 참석해야 할 행사가 많이 있을 테니 맞춤한 가방을 선물 받고 싶다”며 전혀 생각이 없는 세 남자를 긴장시켰다.
그땐 첫 아이가 외국 출장이 빈번할 때라 면세점 들르는 일이 쉽지 않겠느냐며 은근히 강요하여 남편과 아이들은 마음에도 없는 큰돈을 갹출하여 나를 만족시켰다. 일이 있어 그 가방을 사용할 때면 지은 죄가 있어 혼자 피식 웃곤 한다. 내가 잘 쓰니 당신들도 기분이 좋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참 어지간히 못 말리는 엄마다.”하고 흉보는지도 모른다. 그렇거나 말거나 아끼며 잘 쓰니 그 아니 좋은가? 딸이 있는 집은 알아서 챙긴다는데 남자들이라 잘 모르니 가르쳐서 쓸 일이다.
내가 가장 편히 쓰고 자랑스러워하는 가방은 출퇴근용으로 등에 메는 책가방이다. ‘들꽃잠’이라는 우리나라 회사의 제품인데 몇 해 전 아이들이 준 생일선물이다. 축하할 일이 생기면 가족들에게는 현금으로 대신하고 내 선물은 적당한 가격의 물건을 골라 주문한다. 살아보니 현금은 당시에는 좋으나 기억 거리가 없어 별로다. 이 가방이야말로 언제 어디서나 사용하기 편하다. 특히 걸어서 출근할 때 안성맞춤이다. 차에 짐을 싣지 않아도 되는 날 운동화에 가방을 메고 봄물이 오른 나무 사이로 걸어가면 눈이 환해지고 몸도 가볍다. 여름에 등에 땀이 배는 고충을 빼면 가을과 겨울엔 단풍과 눈을 보며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어 출근길이 즐겁다. 또 등 뒤에 적당한 무게가 느껴져 몸의 균형을 맞추기도 편하다. 책도 도시락도 담을 수 있는데 예쁘기도 하다. 서울로 병원 가는 길에는 늘 내 짝 이다.
특히 이 회사는 ‘건강한 삶의 시작’을 지향하는데 소비자들의 건강한 생활을 위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어 자주 이용하는 인터넷 상점이다. 진즉부터 눈여겨보았다가 생일에 맞춰 선물로 받은 가방은 해가 가도 질리지 않는다.
더 자랑하자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가방 전체에 무늬로 넣어 사용하는 이가 우리 글을 아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은근히 알린다. 그뿐 아니라 가장자리와 어깨끈, 주머니는 가죽으로 지어서 튼튼하기도 하다. 가방을 건네며 아들은 “엄마가 좋아하실 가방이네요.” 하며 웃었다. 공부하면서 늘 혼나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만날 ‘우리 글, 우리 글!’ 하고 잔소리하는 엄마를 다행하게 생각하며 하는 말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는 이야기가 담긴 가방이 몇 개 더 있다. 교감 때는 일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서류가 많이 들어가는 큼지막한 가방을 준비했고, 둘째 아이에겐 이름난 금색 상표가 찍힌 초록색 가방을 받기도 하였다. 특별하게 선배 언니의 유품으로 누구나 알 수 있는 갈색 가방을 받기도 하였다. 49재를 마치고 고인의 아들이 받아주기를 청하여 가지고 있는데 주제 넘지 않는가 하며 스스로 돌아다본다. 벌써 7년이 되어간다. 쉽게 쓸 수 있는 가방은 아니다.
텔레비전에서 돌아가신 김동길 박사가 젊은 시절에 지인께 물려받아 쓰고 있다며 낡은 가방을 진행자에게 자랑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관련 자료가 남아있을까 하고 찾아보니 오래전 이야기라서 인지 보이질 않는다. 전 한성대 김상조 교수의 가방 사진이 연관검색어로 올라온다. 내가 보았던 김동길 박사의 가방과 흡사하다. 보는 사람의 눈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낡은 가죽 가방이다. 대학원 때부터 쓰던 것이라고 한다. 이어서 2017년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청와대에서 차담을 할 때 문재인 대통령이 신기한 듯 낡은 가방을 살펴보는 사진도 따라온다. 청빈한 학자들의 가방을 보니 부끄러운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대신 내 가방엔 따뜻하고 재미난 이야기를 가득 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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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구리 찌르니 명품 가방도 나오고 우와 부럽네요.
당당하게 가방을 요구하셨군요.
따뜻하고 재미난 이야기 가방을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