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고인돌질마재따라 100리길 3코스-질마재길
미당 서정주 시의 자양분이 되었던 길을 걷다
겨울들판과 겨울 산이 쓸쓸한 듯 여유롭다.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겨울풍경은 내 마음에 여백을 만들어준다.
활력 넘치는 녹색의 향연도 없고 울긋불긋 단풍든 가을 산이 아니어도 수확 끝난 텅 빈 들판이나
나목을 이룬 산은 하루일과를 끝내고 휴식을 취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
오늘은 이러한 겨울풍경을 따라 질마재길을 걸으려한다. 고인돌·질마재따라 100리길 3코스인 질마재길은
고창 선운사 입구 풍천에서 시작된다. 이곳에 올 때면 십중팔구 선운사로 향하게 되는데,
오늘 우리는 질마재길을 걷기 위해 장어식당이 많은 풍천마을에 주차를 한다.
풍천마을 앞으로 흐르는 인천강 하류는 곰소만과 가까워 민물과 바닷물이 섞여있다.
민물장어는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하천에서 잘 자라 예로부터 이곳은 민물장어가 많이 잡혔다.
그래서 이곳 풍천에는 ‘장어’식당들이 많다.
인천강 위에 놓인 연기교를 건너는데, 강바람이 매섭다.
갈색으로 변한 강변이 느릿느릿 흘러가는 강물을 더욱 쓸쓸하게 해준다.
붕긋붕긋 솟은 봉우리들과 굽이굽이 흘러가는 강물이 유연하고 부드럽다.
산과 강의 부드러운 조합은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겨울철이라 인적마저 끊어진 강에는 백로 몇 마리만이 유유자적 한가로움을 즐기고 있다.
다리를 건너 강변제방을 거슬러 올라간다.
강변 갈대숲은 엄동설한에도 꽃을 떨구지 않고 햇빛방향에 따라 은빛으로 반짝이기도 하고,
갈색물결을 이루기도 한다.
역광에 비췬 은빛 갈대는 우아하고, 갈색의 갈대에서는 세월이 만들어준 경륜이 느껴진다.
갈대 뒤로 걷고 있는 일행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에 이르는 우리들의 모습이
왕성한 활동 후에야 꽃을 피운 갈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과 비교하면 패기는 떨어지지만 경륜이 만들어준 지혜로 하여금 세상을 살맛나게 해준다.
강변 임도를 따라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에도 알몸의 겨울나무들은 의젓함을 잃지 않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목들에서 올 겨울을 잘 견디면 따스한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본다.
에스키모 집 같은 외형을 하고 있는 골든캐슬 팬션이 강변에 줄줄이 서 있다.
골든캐슬에서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임도는 고인돌·질마재따라 100리길 2코스이고,
3코스인 질마재길은 여기에서 산비탈로 올라선다.
가파른 산비탈에는 낙엽들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잎을 떨군 활엽수들이 더불어 숲을 이루며
함께 매서운 겨울을 견디고 있는 모습이 대견하다. 사람들의 삶 또한 마찬가지리라.
힘들고 어려울 때 의지하고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으니 말이다.
산비탈을 따라 10여분 올라가 연기저수지 옆 임도로 내려가는 고개에 도착한다.
맑은 공기가 도시생활에서 찌든 내 가슴을 씻어주는 것 같다.
고개를 넘어 산비탈을 내려가니 나목의 앙상한 숲속에 녹색 카페트를 깔아놓은 듯 꽃무릇이 신선함을 선사해준다.
꽃무릇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이곳에는 데크길과 쉼터도 마련되어 있다.
겨우내 푸른 잎을 유지하는 꽃무릇은 5월이면 잎은 누렇게 시들어 사라진다.
잎이 사라진 상태에서 여름을 보내고 9월초에 땅을 뚫고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하여 9월 중순부터 꽃을 피운다.
그리고 꽃이 시든 후 10월에 다시 푸른 잎이 나온 후 겨울을 보낸다.
이처럼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은 잎을 만나지 못한다.
꽃무릇쉼터에서 임도로 내려서니 연기저수지가 발아래로 펼쳐진다.
저수지를 돌아가는 길은 완만하고 부드럽다.
연기저수지는 연기마을 뒤쪽 골짜기에 만들어진 인공호수로 뒤로는 소요산(445m)이 둥지를 틀고 있다.
이 길은 소요산 8부 능선에 있는 소요사로 오르는 좁은 비포장도로지만 평소에는 다니는 차량이
거의 없고 인적도 드물어 그지없이 고요하고 한적하다. 우리는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걷는다.
자연이 살아있는 포근한 길을 같이 걷는 일행들은 도반(道伴)이다.
고요한 길은 도반과 함께 걸을 수 있는 도량이 된다.
소요산을 바라보니 정상 바로 아래에 소요사가 자리를 잡고 있다.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지는
산비탈에 둥지를 튼 소요사는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소요사에서 내려다보면
이곳 연기저수지와 저수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봉우리들이 오백나한처럼 보일 것이다.
산자락에 기댄 마을들의 가옥들은 득도를 하려는 불자들처럼 다가올지도 모른다.
백제 위덕왕 때 소요대사가 창건했다고도 하고 신라 경덕왕 때 연기대사가 세웠다는 설이 있는
소요사는 이후 수차례 소실되거나 폐사되었다가 1961년부터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요사로 오르는 임도와 갈림길이 있는 고개에 사각정자가 있어 잠시 휴식을 취한다.
추운 날씨에 보온병에 담아온 따뜻한 물 한잔이 몸과 마음을 훈훈하게 해준다.
소요사 입구 쉼터에서 질마재 쪽으로 걷는데 동쪽으로 멀리 내장산이 바라보인다.
길 가까이에서는 오산저수지의 푸른 물결이 출렁인다.
이 길에서 선운리로 넘어가는 낮은 고개를 질마재라 한다. ‘질마’는 소나 말의 안장을 뜻하는 ‘길마’의 사투리다.
옛날 소금농사를 짓는 바닷가 심원마을 사람들은 부안면 알뫼장터에서 곡물과 교환하기 위해 좌치나루터를 거쳐
이 고개를 넘었다. 서정주 시인의 ‘질마재 신화’라는 시로 인해 질마재는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질마재에서 선운리로 내려가는 옛길 주변의 울창한 숲에서는 추위를 이기고 있는 새들이 길손들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미당 서정주도 이 길을 걸으며 시적 상상력을 키워나갔을지도 모른다.
숲길을 벗어나 포장된 도로로 내려서니 조그마한 저수지가 기다리고 있다.
군청색을 띤 저수지 제방 아래로 선운리 들판과 곰소만이 내려다보인다.
곰소만에서는 물이 빠져 갯벌이 드러나 있다.
서쪽 멀리 한 척의 커다란 배처럼 떠 있는 위도가 바라보인다.
미당시문학관이 가깝게 보이지만 질마재길은 2차선 포장도로를 벗어나 서당골 방향으로 농로를 따른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보다는 차량통행이 없는 좁은 임도나 농로가 걷기에는 훨씬 좋다.
산자락에 바짝 붙어있는 길을 걸으며 변산반도와 곰소만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산자락에 기댄 마을은 요람 속 아기처럼 포근하다.
서당골마을에 들어서니 오래 된 팽나무 두 그루의 섬세한 가지를 드러내며 아름다움을 뽐낸다.
우리나라 자연부락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나 팽나무들은 수형이 예쁘고 가지가 미세하여
잎을 떨구어버린 겨울철에 보면 더욱 아름답다. 이곳 서당골은 진마, 신흥과 함께 선운리에 속한 자연부락으로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재 황윤석이 서당을 열었다고 하여 불리어진 이름이다.
마을 뒤 산자락에는 지금도 널찍한 서당터와 커다란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씨가 남아 있다.
마을 입구에는 날렵하게 세워진 솟대가 눈길을 끈다.
미당 서정주가 태어난 진마마을에 도착하니 미당생가와 미당시문학관으로 가는 이정표가 길안내를 자처한다.
미당생가로 가기 전 도깨비집이라 쓰인 초가집이 관심을 끈다.
미당 선생은 ‘질마재 신화’에서 말피 도깨비와 부자가 된 설막동이네를 소재로 시를 썼는데,
이 도깨비집은 그 시 속의 도깨비집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도깨비집에서 마을 골목을 따라 내려가면 미당 선생이 태어난 생가가 나온다.
미당은 이곳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에서 1915년 태어났다. 1925년 고창 줄포보통학교를 수료하고,
1929년 중앙고등보통학교 입학, 1930년 광주학생운동과 관련해 구속되었다가 기소유예로 석방, 이로 인해 퇴학당했다.
1931년 고창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으나 곧 자퇴, 방랑을 하다가 고승 박한영 문하로 들어가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해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수업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었고,
같은 해에 김광균, 오장환과 함께 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하고 주간을 지냈다.
동양적인 내면과 감성의 세계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고전적인 절제의 경지를 보여주었다고 평가받는
그의 시는 우리 민족정서와 운율을 잘 드러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미당은 '화사집(1941)', '신라초(1960)', '질마재 신화(1975)' 등 15권의 시집과 1천여 편의 시를 남겼다.
하지만 미당은 일제말기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학도병 지원을 독려하는 시를 게재하는 등 친일시인이라는 오명을 남겼다.
1980년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집권한 전두환 대통령 생일잔치에서 낭독했다는 ‘전두환 대통력 각하
제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등 군부독재에 편승한 행적 역시 시인의 어두운 그림자다.
미당의 문학적 재능이 친일과 친독재로 얼룩지지 않고 한국 문학계에 오롯이 환원되었더라면
정말로 한국 문학계의 큰 자산으로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시인이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을 가져본다.
미당생가는 그의 부친이 돌아가신 후 친척이 거주했지만 1970년부터 사람이 살지 않고 방치되었다가
2001년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미당생가에서 개천을 건너 3분 정도 골목길을 따라가니 미당시문학관이 나온다.
미당시문학관은 폐교인 선운초등학교 봉암분교를 개조하여 생가복원에 이어 2001년 11월 개관하였다.
문학관은 미당의 작품 및 육필원고를 비롯하여 각종 사진자료와 운보 김기창 화백의 미당 초상화,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넓은 운동장과 담쟁이 덮인 옛날 교문을 바라보고 있으니 천진난만하게 뛰어놀던 어린이들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오늘은 월요일이라 시문학관은 휴관이라 내부를 볼 수가 없어 아쉽다.
문학관 앞에서 미당의 시 ‘귀촉도(歸蜀途)’를 음미한다.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 삼만 리
신이나 삼아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미당의 생가와 시문학관이 있는 선운리 진마마을 곳곳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들이 탐방객들의 눈길을 유혹한다.
미당 생가마을을 벗어나니 발 아래로 너른 들판과 곰소만이 펼쳐지고, 그 뒤로 아기자기하게 솟은
내변산 줄기들이 병풍을 둘러놓은 것 같다. 아래로 펼쳐지는 넓은 농경지는 간척을 통해 만들어진 논이다.
이곳의 행정구역이 부안면(富安面)인데, 간척지로 인해 확보된 논이 많아 부유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고장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흙을 드러낸 텅 빈 들판 위로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한가로움을 즐기고 있다.
들판과 곰소만, 내변산이 만든 풍경화를 감상하며 걷다보니 도로를 따라 걷는 지루함도 생각할 틈이 없다.
길은 죽염공장을 지나 강변 산길로 이어진다. 숲길 아래로는 곰소만에 합류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하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인천강이 흐른다.
바다와 만나는 지점이라 강변은 갯벌을 이루고 있다.
숲길을 걷고 있으면 강바람이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걸어온다.
좁은 산길은 차츰 수로 옆 넓은 길로 이어지고, 다시 강변 논길에 닿게 된다.
인천강변 농로는 연기마을 앞 정자나무까지 이어진다.
앞으로 인천강이 흐르는 연기마을은 주민이 20여명밖에 안될 정도로 작은 마을이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소요산에 연기도사가 창건했다는 연기사라는 절터가 있어 이름을 연기마을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연기마을 골목길을 걸으며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살아있으므로 저것이 살아있다.’는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을 생각한다. 당신이 있어 내가 있고, 뭇 생명이 살아있어 인간도 살아있다.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은 쉼없이 흘러간다.
(2017. 12. 25)
*여행쪽지
-고인돌·질마재따라 100리길 3코스(질마재길)는 골든캐슬팬션→꽃무릇쉼터→연기저수지→소요사입구→서당골→미당시문학관→연기마을→풍천까지 11.6km로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선운사 입구 풍천에 차량을 주차하고 인천강을 건너 강변을 따라 골든캐슬까지 1km를 걸어야 질마재길 초입을 만난다.
-난이도 : 보통
-출발지 내비게이션 주소 : 선운사 입구 풍천(전북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로 8)
-선운사 입구 풍천에는 민물장어요리를 판매하는 식당이 많다. 신덕식당(063-562-1533), 원조연기식당(063-562-1537)
첫댓글 크리스마스에 트래킹...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고마워요.^^
추운 날씨였지만 걷는 즐거움은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