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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06 사순5주간 수 – 133위 111° 윤자호 바오로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나의 참된 제자가 될 것이다.
나의 참된 제자가 되면 너희는 진리를 깨달을 것이다.
그러면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133위 111° ‘하느님의 종’ 윤자호 바오로
이름 : 윤자호(尹滋鎬) 바오로
서울교구 윤의병 바오로(1890~1950) 신부 祖[0.1]
서울교구 윤형중 마태오(1903~1979) 신부 曾祖[0.2]
수원교구 윤석원 요셉(1942~ ) 몬시뇰 高祖
출생 : 1809년, 논산 노송
순교 : 1868년 9월 4일, 교수, 수원
윤자호(尹滋鎬) 바오로의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1920년에 사제품을 받은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는 그의 손자이고, 1930년에 사제품을 받은 윤형중(尹亨重, 마태오) 신부는 그의 증손자이다.[1]
윤자호 바오로는 충청도 논산의 노성(魯城)에서 삼형제 가운데 셋째 아들로 태어나 논산의 강경(江景)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던 중 어머니와 두 형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부친을 모시고 충주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한 교우로부터 천주 교리를 전해 듣게 되었다.
이후 윤자호 바오로는 다시 부친을 모시고 고향 노성으로 돌아와 열심히 교리를 배워 영세 입교하였다. 그러나 이단에 빠져 있는 비신자 친척들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으므로 다시 부친을 모시고 공주 계룡산 자락에 있는 한 교우촌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들 부자는 천주를 공경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게 되었지만, 생활이 곤궁해지면서 몇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고향 노성으로 돌아온 윤자호 바오로는 다시 비신자인 친척들로부터 시달림을 당해야만 하였다. 이에 그는 교우인 밀양 박씨와 정혼한 뒤, 몰래 고향을 떠나 광천 독바위(현 충남 홍성군 광천읍 옹암리)의 한 객줏집으로 가서 머슴을 살았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유혹은 여전하였고, 이에 윤자호 바오로는 그 집을 떠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했는데, 장사보다는 죄에 빠져 있는 영혼들을 구하고 교리를 전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또 교우촌을 방문할 때마다 강론과 훈계를 통해 교우들의 믿음을 굳게 해주었으며, 그 결과 그의 이름은 교우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윤자호 바오로는 공주 유구의 관불(灌佛) 교우촌(현 충남 공주군 유구면 녹천리)[2]에 사는 교우들이 인근에 사는 비신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그는 관불(灌佛)로 이주해 살면서 교우들을 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블뤼 주교는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윤자호 바오로 회장은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교우들에게 교리를 강론했으며, 불목하는 교우들의 화해를 위해 힘쓰고, 쉬는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회두하도록 권면하였다. 또 교회를 위해 교우들로부터 애긍전(哀矜錢)을 모으기도 하였다. 그 결과 윤자호 바오로 회장의 행적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의 강론을 들으려고 각처에서 찾아오는 교우들도 많아지게 되었다. 한 번은 윤자호 바오로 회장이 애긍전을 모아 오다가 천안 소반이 고개(충남 천안시 광덕면 지장리)[2.1]에서 도적들을 만나 가진 돈을 모두 빼앗기려 할 즈음에 포졸들이 나타나 그 도적들을 체포하였다. 이때 윤자호 바오로 회장은 포졸들에게 “이들은 지금 나에게 빌려준 돈을 받으려는 것인데, 나도 처지가 급해 당장에 돈을 갚을 수는 없기에 가을에 주겠다고 하여 옥신각신하는 중이다.”라고 거짓으로 둘러대 도적들을 구해 주었다고 한다.
그 뒤 윤자호 바오로 회장은 충청도 대흥[2.2]을 거쳐 경기도 용인 더우골(현 용인군 이동면 서리의 덕골)[2.3]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 때문에 유구의 관불(灌佛)[2.4] 교우촌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의남매인 김 마리아와 함께 순교를 각오하고 포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그때는 체포되지 않았다.
윤자호 바오로 회장이 체포된 것은 1868년 무진박해 때였다. 소문을 듣고 몰려온 수원 포교와 포졸들이 교우촌으로 들이닥치자, 윤자호 바오로 회장은 주저하지 않고 의관을 차려입은 뒤 그들을 따라나섰다. 이때 그의 아들과 마을 교우들이 포졸들을 물리치려 하자 윤자호 바오로 회장은 “천주의 안배하심을 어찌 사람이 막을 수 있겠는가?” 하고 모두를 만류하였다.
윤자호 바오로 회장이 수원 관아로 압송되어 오자, 관장은 “너는 누구에게서 천주 교리를 배웠으며,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었다. 이에 그는 “다블뤼 주교에게 배우고 영세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어 관장이 “천주교 신자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하자, 그는 누구의 이름도 댈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이후 윤자호 바오로 회장은 자주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여기에 굴하지 않았으며, 함께 갇혀 있던 교우들을 끊임없이 권면하여 신심을 다질 수 있게 해 주었다. 또 의남매 김 마리아가 전해주는 밥을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그녀가 사다 준 삿자리(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 사용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1868년 9월 4일(음력 7월 18일)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 59세였다.[3][3.1]
[註]__________
[0.1] 윤의병(바오로, 1888~1950) 신부 : 호는 죽총(竹叢). 1888년 9월 27일 경기도 안성(安城)의 산촌(山村) 청룡에서 부(父) 윤상우(尹相雨)의 5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 소년 시절 충북 배티, 용진동(龍津洞)에서 친척과 함께 살면서 백부(伯父) 윤상운(尹相雲)이 세운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1904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 1920년 9월 18일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주례로 종현성당(鐘峴聖堂, 지금의 명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어 충북 음성 장호원(長湖院)본당의 보좌신부로 사제생활을 시작하였다. 장호원본당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신설본당인 충북 괴산 고마리(叩馬里, 속칭 ‘높은 사랑이’)로 전임, 신설 본당을 맡아 1921년 한옥 사제관을 신축하였고, 1923년 아동교육을 위해 숭애의숙(崇愛義塾)을 설립, 1927년 수녀원을 설립하고 1928년 서울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 2명을 초청하여 아동교육을 전담시켰다. 그 뒤 건강이 나빠 1932년 행주(幸州)본당에서 휴양하다가 1935년 황해도 은율(殷栗)로 전임되어 1936년 사제관을 신축하는 한편, 성모 유치원과 성당 학교를 개설하고 수시로 신부들을 초청, 교리 강습회와 강연회를 여는 등 교육사업에 헌신적으로 사목하였다. 또 1939년에는 기해박해 100주년을 맞아 본당과 공소 교우들과 함께 박해시대 교우들의 피신처였던 구월산(九月山)을 등반, 순교자를 현양하는 미사를 봉헌하였고 박해시대 교우들의 신앙생활을 주제로 한 소설 ≪은화≫(隱花)를 집필하기 시작, 당시 조카 윤형중(尹亨重) 신부가 주관하던 <경향잡지>(京鄕雜誌)에 1939년 1월호부터 납치되기 전 1950년 6월호까지 총 125회(상권 69, 하권 56)를 연재하였다. 나머지 부분은 월남하는 교우 편에 보내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원고마저도 분실되었다. 1950년 6월 24일 상오 2시 북한 정치 보위부원에게 연행되어 비밀리에 해주(海州)로 이송된 뒤 행방불명되었다. 1977년 은율 출신의 이계중(李啓重, 요한) 신부가 은사 윤의병 신부의 피랍 27주년을 맞아 자비로 ≪은화≫(상권)를 출판하였다. (‘구가톨릭대사전’ p.917).
* 윤의병 신부, 소설 《은화》 : 박해(迫害)를 주제로 쓴 윤의병(尹義炳, 1890~1950) 신부의 미완성 역사소설(歷史小說). 기해(己亥)박해 100주년을 기념하여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 현양하기 위해 1939년 1월부터 <경향잡지>(京鄕雜誌)에 연재되어 1950년 6월 저자가 인민군에게 피납되기 전까지 만 11년 동안 원고지 2,000여 장이 연재되었다. 박해시대 교우들의 신앙과 생활 모습, 그리고 순교(殉敎)를 소재(素材)로 박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고난과 고통을 극복하며 신앙을 증거하려는 교우들의 고뇌와 비애와 인고와 기쁨들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1977년 제자 이계중(李啓重) 신부가 자신의 사제생활 30주년을 기념하고 자신을 신학교로 보낸 저자 윤의병 신부의 유덕을 기리는 뜻으로 단행본 ≪은화≫(4·6판, 500면, 한국 천주교중앙협의회)를 출판하였다. (‘구가톨릭대사전’ pp.924-925).
[0.2 윤형중(마태오, 1903~1979) 신부 : 1903년 4월 29일 충청북도 진천(鎭川)에서 대를 이은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6살 때 경기도 안성으로 이사해 살았다. 1918년 예수성심학교에 입학, 1930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후 서울 중림동(中林洞)본당의 보좌신부로 사제생활을 시작하였다. 1933년 가톨릭청년사 사장에 임명되었고, 그 뒤 경향잡지, 경향신문 사장들을 역임하면서 언론창달과 저술활동을 통한 교리 전파에 전 생애를 바쳐 가톨릭을 대표하는 지성으로 인정받았다. 1954년에 가톨릭대학 의학부장, 1959년 미리내본당 신부, 1961년 복자수녀회 지도신부 등을 거치면서 그간 순교한 복자현양사업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지성인들을 위한 교리 강좌를 열어 수많은 사회인사를 천주교에 귀의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지병인 폐암(肺癌)과 투병생활을 하다가 1979년 6월 15일 75세를 일기로 성모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사망하기에 앞서 성모병원 안은행(眼銀行)에 사후 안구(眼球)를 기증키로 한 첫 번째 등록자가 되어, 숨을 거둔 그 이튿날 유언대로 그의 안구는 실명자(失明者)에게 이식되어 광명을 주게 되었다. 그의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치되었다. 자서전(自敍傳)과 ≪나의 교우록(交友錄)≫, 그밖에 수많은 논문과 수필을 남겼다. (‘구가톨릭대사전’ p.918).
* 윤형중 신부, 가사 ‘사말의 노래’ : https://youtu.be/Jcg8eGVBdew
[1] 윤형중 신부, 『교회와 역사』 제46호, 1979.6., 2면; 서상요, 「윤의병 신부」, 『교회와 역사』 제78호, 1982.1., 5면.
[2] 『병인치명사적』, 1권, 3.147면; 8권, 46면; 24권, 1면. 관불산(灌佛山) 교우촌은 옹기점 교우촌이었다(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리델 문서 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111면).
[2.1] 소반이 : 충남 천안시 광덕면 지장리에 있는 마을로 산에 돌이 많고 소반을 만드는 집이 있었다고 해서 붙은 지명으로, ‘소반곡’, ‘소반점’, ‘반곡’(盤谷), ‘동산리’(東山里)라고도 한다.
[2.2] 대흥(大興) : 충남 예산군 대흥면, 광시면, 신양면, 응봉면, 오가면 일부 지역. 조선시대에는 대흥현이었는데 1895년에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92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근동면(近東面)의 금곡(金谷)외 19개 동리(洞里)와 예산군(禮山郡) 군내면(郡內面)의 탄부동(炭釜洞)을 병합하고, 대흥군(大興郡)의 이름을 따서 대흥군(大興郡)이라 하고 예산군에 편입되었다. 현재 대흥면은 동쪽으로는 대술면(大述面)·신양면(新陽面)과 접하며, 남쪽으로는 신양면(新陽面)·광시면(光時面)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홍성군(洪城郡) 금마면(金馬面), 그리고 응봉면(應峯面)이 접하며, 북쪽으로는 오가면(五可面)과 예산읍이 접한다. 2016년 8월 19일 천주교대전교구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시복된 1801년 8월 25일 대흥 내천변(예당호로 수몰)에서 효수경중된 순교복자 김정득 베드로와 예산산성 아래에서 “내일, 정오에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며 부활신앙을 고백하며 작별인사를 한 사촌 순교복자 김광옥 안드레를 ‘의좋은 순교자’로 현양하고, 대흥 고을과 연고가 있는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대흥면 동서리 105-3과 상중리 367-1 일원을 ‘대흥봉수산순교성지’로 설정하였다.
[2.3] 더우골 :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서리에 있는 덕골(德谷) 마을로 상·중·하 3개의 마을로 되어 있어 상덕·중덕·하덕이라 부르기도 한다.
[2.4] 관불(灌佛) : 충남 공주시 유구읍 녹천리 산 112-9 관불산(灌佛山) 일대 골짜기에 교우촌이 있었다. 398m 관불산은 그 모양이 부처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말봉과 감로봉 등 봉우리가 두 개 있는데 이 봉우리 사이의 모습이 말안장과 비슷하며 예전에는 꼭대기에 막대기를 꽂고 말굽을 놓았다고도 한다.
박해시기에 유구·신풍지역에는 둠벙이(현재의 신풍면 조평리)·진밭(현재의 사곡면 신영리)·먹방이(현재의 신풍면 쌍대리)·관불(현재의 유구읍 녹천리)·만년동(현재의 유구읍 만천리)·용수골(현재의 사곡면 유룡리)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로 모두 와해되었으며, 병인박해 이후 유구읍 명곡리 일대에 요골(명곡리2구)·서재(명곡리1구)·사기점골(명곡리1구) 교우촌이 새로 형성되었다. 유구성당의 직접적인 기원이 되는 이들 교우촌은 1883년 이후 모두 공소(公所)로 설정되었으며, 1897년 5월 8일 공주성당이 설립되면서 그 관할에 놓였다. 한국에 입국하여 1964년 4월 22일부터 대전 성남동 보좌신부로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크랭캉(Crinquand, 강진수 요한, 1936~2004) 신부가 1969년 1월 2일 유구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1977년 10월 5일까지 사목하며 본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성 유스토》, pp.10~11, 두봉 주교의 ‘추천의 글’ 중에서 : “본명이 장 크랭캉인 강진수 요한 신부는 이같이 종교적으로 진실하였던 가문 대대로의 분위기에서 자라 그 역시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수학하고, 사제서품 후 바로 28세 되는 1964년 숙명처럼 한국에 파송되었습니다. 그 후 대전교구에서 40년간 사제로서 봉직하면서 200여 회의 헌혈로 병자를 도왔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우물을 찾는‘수맥 신부’로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이같이 선대에서 다 못한 우리 민족에 대한 사랑을 베푸시던 중 3년 전부터 백혈병이라는 병고를 겪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요양 기간 동안 자신의 선조인 (병인박해 순교자) 백 유스토(브르트니에르) 성인의 책을 번역하기로 마음먹고 병원에 입원할 때에도 노트북을 가지고 가서 작업하였고… 그러나 신부께서는 책이 출간되기 전인 2004년 3월 11일 지병으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습니다.”
[3] 『치명일기』, 정리 번호 360번; 『병인치명사적』, 16권, 76-90면; 23권, 87-89면. 『병인치명사적』 16권의 내용은 경기도 안성에 살던 윤자호 바오로의 손자 윤관병(尹觀炳) 베드로의 증언이고, 23권의 내용은 강원도 산두(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산북리)에 살던 윤자호 바오로의 맏며느리 신 마리아의 증언이다. 1968년에는 윤자호 바오로의 후손들이 그의 순교 행적을 기려 ‘순교자 윤자호 바울로의 행적비’를 세웠다.
[3.1] 상교우서(上交友書) 통권 39~40호, 교우가 본 치명자 이야기- 《병인치명사적》: 윤 바오로(1,2)
파리외방전교회 신학생 시절부터 시복수속과 재판에 관해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은 뮈텔 신부가 1880년 조선에 입국하자 시복수속을 위한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1883년 3월 18일부터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이 시작되었으며, 아울러 ‘병인박해’순교자들에 대한 증언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 대략 1865년부터 채록되기 시작한 병인 순교자 증언자료는 1920년대 초반까지 계속 수집되다가, 시복재판 위임판사 드브레 주교(당시 부대목구장)의 지시로 1923~1925년에 걸쳐 필사된 것이 바로 《병인치명사적》(전24권, 1~2권 누락)이다. 이 책은 현재 절두산 순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아직 영인(간행)되지 못하고 펜글씨 사본(가로 23cm×세로 32cm)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병인치명사적》외에도 병인년 순교자 증언 기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시복재판을 위한 예비조사 자료로 정리·간행된《치명일기》(1895년)와 드브레 주교가 분류한 문서(226건, 그중 12건 유실 추정)를 새롭게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1-226까지 정리번호를 붙여 간행한《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1987년), 1888년 푸아넬 신부가 박순집 베드로의 증언을 기록하여 묶은《박순집증언록》(전3권), 병인 시복재판 기록을 묶은《병인 순교자 시복재판록》(1차[1899~1900] 총9권, 2차[1921~1923] 총10권) 등이 있다. 그중에서 《병인치명사적》은 990명가량의 순교사적을 수록하고 있어 가장 많은 순교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내용에 있어서도 다른 증언자료에 비해 더 풍부하고 구체적이다. 또한 증언자료 외에 다양한 자료도 포함하고 있어 병인년 순교자와 그 당시의 교회사를 연구하는 데 기초적인 자료로써 활용 가치가 높다. 아래는 1868년(무진) 9월 4일(음력 7월 18일)에 수원유수부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한 윤 바오로에 대한《병인치명사적》16권의 증언이다. |
윤 바오로(윤자호, 尹滋鎬) 1868년 9월 4일 교수형으로 수원 유수부에서 순교
윤 바오로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대대(代代)(로) 명가의 자손(名家)이라. 노성(魯城)1) 땅에서 생장(生長: 나고 자람)하였으니 3형제 중에 말째러라. 그 부모(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놀미[論山]2) 강경(江景)3)이로 이사하여 살다가 그 아내와 두 아들이 세상을 떠나매 그 막내아들 (윤) 바오로를 데리고 충주(忠州) 땅으로 반이(搬移)4)(로 이사)하여 살더니, 마침 거기서 어떤 교우에게 문교(聞敎)한 후 부자(父子)가 한가지로 고향으로 들어가 교리를 열심히 배우더니 (윤) 바오로가 먼저 영세(領洗)하니라.
(윤) 바오로가 먼저 영세한 후 날로 열심을 감발(感發: 감동하여 분발함)하여 천주 섬기는 데 더욱 힘쓸새(힘써) 본 고향에서는 많은 친척들 사이에서 갖가지 이단(異端) 사망(邪妄: 사악하고 망녕됨)에 빠져 방해됨이 많은 고로 수계 범절(守誡凡節: 지켜야 할 계명과 모든 예절)하기에 편치 못하여 그 늙은 부친을 모시고 고향을 떠나 공주(公州) 계룡산(鷄龍山) 한 교(우)촌으로 이사하여 살매 날로 천주를 공경함에 더욱 열절(熱切: 뜨겁고 간절함)하여 영식(靈食: 영혼의 양식)은 일진월부(日進月富: 날로 앞서가고 달로 풍부해짐)하나 그러나 육신의 생애(生涯: 생계유지)가 부족하여 얼마 지나지 못하고 본 고향에서 가져온 재물이 다 탕진(蕩盡: 다 없어짐)되고 또한 약간 남아 있던 전답(田畓: 논밭)까지도 다 팔아다가 먹은 후 살 수 없는지라.
할 일[할 수] 없이 다시 노친(老親)을 모시고 본 고향으로 들어가니 친척들이 몇 해 만에 잃었던 일가(一家)를 만나보매 기쁜 마음으로 전에 쓰던 이단(異端)의 물건과 본 묘(廟: 사당)의 갖가지 책임을 전과같이 다시 맡기려 하며 또한 외(교)인의 여식(女息: 딸)으로 강박(强迫: 억지로 다그침)히 혼인을 정하려 하거늘 때에 (윤) 바오로(는) 벌써 교우 여식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더불어 정혼(定婚)하였더라.
(윤) 바오로(가) 양심이 좋지 못하여 다시 고향을 떠나고자 하나 일가들이 천방백계(千方百計: 온갖 방법과 계략)로 만류할 뿐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데로 갈까 하여 날마다 엿보는지라. 그러나 부자(父子)(가) 수치 됨을 무릅쓰고 용심(勇心)을 발(휘)하여 밤을 (틈)타 수챗구멍5)으로 빠져 도주하여 다른 일가의 집으로 가 부쳐 살더니, 윤씨(尹氏)의 산송(山訟: 묘지에 관한 송사) 까닭으로 인하여 모든 일가들이 모여 오거늘 거기 있지 못하고 다시 그 동네를 떠나 광천(廣川) 독바위6) 어떤 과부의 객주(客主)7) 집으로 가서 머슴으로 있을 새(때) 전에 아니 하던 생(生: 생소한)일을 처음으로 하여 어려운 것이 많으나 그 만나는바 모든 괴로움을 다 감수인내(甘受忍耐) 하며 매사가 민첩하고 진정(眞精: 참되고 정성스러움)하더라.
하루는 천주가 저를 시험코자 하실 새(때) 마치 옛적에 성조(聖祖) 요셉이 이집트(Egypt)국(國) 포티파르(Potiphar)에게 종으로 팔려 가 있다가 그 안주인에게 음행(淫行)의 유인(誘引: 유혹)으로 하여금 제가 입었던 옷자락을 내어버리고 달아난 것과 같이8), 하루는 그 안주인이 (윤) 바오로의 규모단정(規模端正)하고 용모화려(容貌華麗)함을 보고 사사로이 가까이하여 음행(淫行)으로써 꾀거늘 (윤) 바오로(가) 굳이 사양하여 듣지 아니할뿐더러 즉시 그곳에서 일어나 가져왔던 옷보와 쓰던 물건을 내어버리고 그 집을 떠났더라. (윤) 바오로(가) 그 집을 떠난 후로 사세부득(事勢不得: 상황상 어쩔 수 없음)하여 장사를 다닐 새(때) 겉으로는 육신 생애(生涯)(생계 유지)를 위하여 다니는 듯하나 속마음으로는 죄악에 묻혀 있는 무수한 영혼을 건지기 위하여 이르는 곳마다 성교도리(聖敎道理)를 정성으로 강론(講論)하고 가는 교(우)촌마다 구변(口辯: 말솜씨) 좋게 도리를 (펴서) 벽파(闢破: 이단을 물리침)하고 훈계하여서 교우들의 신덕(信德)을 굳게 하고 열심을 감발(感發: 감동하여 분발함)케 하니 이러므로 (윤) 바오로의 이름이 경향(京鄕)에 전파되었더라.
(윤) 바오로가 공주(公州) 유기(유구)9)라 하는 촌에 이르니 그 촌사람들이 이웃 반종(班種: 양반 자손)들의 토색(討索: 재물을 빼앗음)으로 인하여 구박(고통)이 자심(滋甚: 매우 심함)하거늘 (윤) 바오로가 저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그 동네에서 살더니, 그해 파공(罷工: 노동하지 않는 축일)에 윤(尹) 바오로가 교우중(敎友衆)에 출등(出等: 뛰어남)하므로 안(安, Daveluy) 주교(께서) 아시고 (윤) 바오로에게도 회장(會長) 책임을 맡기시니, (윤) 바오로(가) 겸손한 마음으로 회장직임을 맡은 후에 더욱 열심을 발하여 원근(遠近: 멀고 가까운 곳)에 두루 행(行: 돌아다님)하며 모든 교우들을 권면(勸勉: 힘써 권함)할 새(때) 본집은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으나 조금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다만 영혼의 일만 힘쓰더라.
교우들이 모인 곳이면 찾아가 항상 성교의 거룩한 도리를 가져 강론하기를 좋아하고 (그 뜻을) 풀어주기를 좋아하며 또 아무리 바쁜 일을 하다가도 만일 누가 불목(不睦: 화목하지 않음)한다 하면 그 하던 일을 버리고 찾아가서 화목 시키고 누가 냉담(冷淡)한다 하면 곧 (찾아)가서 권면하며, 또 어떻게 원근 교우촌으로 다니며 구변(口辯) 좋게 열심으로 강론하였던지 처음에 여교우들은 내외(內外)를 하고10) 나와 보지도 아니하다가 (그가) 만일 강론을 시작하여 들리면 젊은 부인들 뿐 아니라 양반의 부녀자들까지 내외를 불고(不顧: 돌아보지 않음)하고 와서 정성으로 듣더라.
이렇게 (윤) 바오로의 명성이 사방에 전파되매 모든 교우들이 (윤) 바오로의 집에로 도리(를) 듣기 위하여 타처(他處: 다른 곳)에서 구름같이 모여와 날마다 7~8명에(보다) 지나지(많지) 아니하는 날이 없더라. 하루는 집에 손(님)들이 어찌(나) 많이 왔던지 양식이 없으므로 대추 한 말을 사다가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고 난즉 각 사람에게 겨우 한 주먹씩 밖에 차례(가) 가지 아니하였더라. 그 후 안(安) 주교께서 (윤) 바오로의 집에 객(客: 손님)들이 너무 많이 감을 아시고 저의 (살림이) 가난한데 방해가 될까 하여 각 교우들에게 분부하시기를“만일 누구든지 내 관면(寬免)11) 없이 (윤) 바오로의 집에 자주 가는 자가 있으면 성사를 막으리라”하시니라.
또 주교(를) 모셔 오기에 극력 주선할 새(때) 방방곡곡(坊坊曲曲)에 다니며 교우들에게 애긍전(哀矜錢: 자선 헌금)을 거두더니 하루는 돈을 추심(推尋: 빌려준 돈을 받음)하여 가지고 예산(禮山) 퉁점이고개(정조이후 1871년 이전 ‘禮山縣邑誌’에 縣內面 東店里가 있었음. 또한 예산군 신양면 내에 『1872년지방지도』에는 신양장대[新陽長垈]·차유현[車踰峴]·차동점[車洞店] 등이 묘사되어 있다. 차유현[車踰峴]·차동점[車洞店]은 아마도 예산군 신양면에서 관불산이 있는 공주시 유구읍 녹천리로 넘어가는 ‘차동점고개’, 곧 ‘차동고개[주막]’일 것이다)라 하는 곳에 당도(當到: 도착)하니, 도적들 수십 명이 달려들어 그 가진 바 돈을 탈취코자 하는지라. 할 수 없이 돈짐을 벗어 놓으려 할 즈음에 홀연 뒷산 꼭대기에서 한 총각 아이가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저 노인은 거기서 무엇을 하려 하나이까? 이 아래서 누가 당신을 기다린다”하니 (윤) 바오로(가) 깜짝 놀라 돌아보매 전에 보지 못하던 한 총각 아이라. 즉시 돈 짐을 지고 일어나되 탈취하려 하던 도적놈들은 그 아이의 하는 말을 듣고 모두 넋을 잃고 있다가 감히 범접(犯接: 접근하여 침범함)치 못하였다 하니, 이상하도다. 이 일이여! 필경 천주께서 저의 성교 열애하는 마음을 돌아보시어 급하고 위험12)한 때에 당신 천신(天神: 천사)을 보내시어 도와주신 듯하도다.
또 하루는 돈을 가지고 천안(天安) 소반이13) 고개를 넘어오다가 도적을 만나 다툴 즈음에 우연히 포교(捕校) 수십 명이 달려들어 도적들을 잡으려 하거늘 (윤) 바오로(가) 측은한 마음으로 저들의 생명을 호위하여 주기 위하여 이르되 “이 사람들은 내게 돈빚을 받으려 하는 사람들인데 지금 내게 돈을 당장 달라 하매 ‘나도 즉 여러 식구의 양도(糧道: 식량)가 급하므로 지금은 주지 못하고 올가을에 주마’하나 저들이 듣지 아니하고 굳이 지금 받아 가려 하는 고로 지금 서로 다투는 중이라”하니, 포교(捕校)들이 (윤) 바오로의 말을 듣고 도적들을 꾸짖어 가로되“그러면 지금 농사 때에 무슨 빚을 받으려 하느냐? 가을에 받으라”하고 가는지라. 도적들은 포교들이 간 후 (윤) 바오로를 향하여 이르되 “당신은 참 큰 양반이로소이다. 우리는 당신을 해하려 하거늘 당신은 오히려 우리들의 지금 죽은 생명을 살려 주시오니 이런 큰 은혜를 어찌 다 측량하오리까?” 백배사례(百拜謝禮)하고 가니라.
이렇게 (윤) 바오로가 갈력(竭力: 온 힘을 다함) 주선함으로 안(安, 다블뤼) 주교와 다른 여러 위(位) 신부들을 조선에 모셔 나오시니라. 그 후에 대흥(大興)14)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다시 용인(龍仁) 더우골15)로 이사하여 살다가 병인년(1866) 군난을 당하매 본 토종(土種: 토박이)들이 성교(聖敎)를 미워하여 잡아 본관(本官)에 부치고 가장(家藏: 살림 도구)을 모두 적몰(籍沒: 재산 몰수)하고자 하는 것을 알고 식구를 데리고 다시 공주(公州) 관불산(冠佛山)16)으로 이사하니 (그) 때에 장(張, 베르뇌) 주교와 여러 위(位) 신부 잡혀가시고 또 각처(各處)의 유명한 교우들을 잡아 올리니라. 윤음(綸音: 국왕의 명령)이 내려와 사방이 요란한지라.17) (그) 때에 (윤) 바오로(가) 치명할 마음이 간절하여 의매(義妹) 김(金) 마리아로 더불어 한가지로 치명하기로 약속하고 날마다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잡히지 않은 것은 포졸(捕卒)들의 두목들과 더불어 전부터 친하게 지낸 연고(緣故: 까닭)러라.
이 위에 말한 김(金) 마리아는 본디 서울서 부요(富饒)하게 살던 집 과수(寡守: 과부)라. 서울서 윤(尹) 바오로가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육신의 고난(苦難)을 불고(不顧)하고 다만 영혼의 유효(有效)한 말을 듣기 위하여 그 가진 바 재산을 다 팔아가지고 윤 바오로가 사는 데로 이사하여 (윤) 바오로와 함께 의남매를 맺고 살다가 마침 기회를 만나 서로 치명하기로 언약하고 있더니 (윤) 바오로(가) 잡혀 치명하던 날까지 정성으로 밥도 얻어다 주고 있었으나 그때는 여인들은 잡지 아니하는 고로 치명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돌아오니라.
(윤) 바오로(가) 천주의 안배하심만 바라고 있더니 하루는 별안간에 포교(捕校)들이 들어오는지라. 보니 전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 김명보와 치문이라. 이 자들이 각각 포졸들을 거느리고 들어와 인사한 후 슬피 통곡하고 말을 아니 하고 있거늘 (윤) 바오로(가) 그 연고를 묻되 저들이 가로되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을 다 잡아 압송(押送)할지라도 형님은 어떻(게)든지 빼놓기로 결심하였더니 지금은 나라에서 형님은 성교(聖敎)의 괴수(魁首: 우두머리)라, 외국인을 조선으로 데려온 두목이라 하여 형님의 이름자가 직접 박혀 내려왔으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이냐?”하고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는지라.
(윤) 바오로(가) 즉시 이 말을 듣고 화평한 용모를 드러내어 위로하며 “울지들 말게. 만일 윗[상부] 영(令: 명령)이 그러하면 자네들이 나를 잡아 바쳐야 자네들의 본분이요 또 나도 잡혀가야 나의 도리가 마땅하다”하고 그들을 권면하고 위로한 후 포졸들을 불러 앉히고 참외를 사다가 하나씩 돌려주고, 그 사랑하는 아홉 살 된 막내아들이 곁에 있음을 보고 육정(肉情: 인간적인 정)을 끊기 위하여 참외 하나를 주어 돌려보낸 후 그 장남(長男: 남자로 장성함)한 한 아들을 불러 여러 가지 말로 훈계한 후에 입었던 옷을 벗어 놓고 헌 옷과 갓·망건18)을 쓴 후에 먼저 자원(自願)하여 포졸들 앞서가니, (그)때에 (윤) 바오로의 아들과 그 동리 사람들이 의논하고 길거리에 가 있다가 포졸들을 때려 물리치고 (윤) 바오로를 구하고자 하여 공론(公論: 여럿이 의논함)이 은은하거늘 (윤) 바오로(가) 그 기미를 알고 엄히 책망하여 가로되“천주의 안배하심을 어찌 사람이 막으리오?”하며 여러 가지 말로 만류하고 훈계하니 동리 사람들이 순종하여 의논을 파하니라.
(윤) 바오로(가) 그날 본관(本官)으로 들어가 갇혀 있다가 그 후에 수원읍(水原邑)으로 이수(移囚: 죄인을 옮김)하였으나 (윤) 바오로(가) 그때까지 아무 형벌도 받지 아니하고 무사히 갔으니, 이는 포졸들의 두목이 (윤) 바오로의 아들들로 하여금 돈 28냥을 포졸(捕卒)들에게 주었으므로 아무 형벌 없이 가니라.
(윤) 바오로(가) 즉시 관가(官家)에 들어가 문초할 새(때) 포장(捕將)이 물어 가로되“네가 누구에게 배웠으며 누구에게 영세하였느냐?”하거늘 (윤) 바오로 대답하여 이르되 “안(安, 다블뤼) 주교에게 배워 영세하였나이다” 또 포장이 가로되 “너희 동류(同類: 같은 천주교 신자)들이 어디 있느냐? 대라”하니 “만만코 못 한다”하거늘 곧 하옥(下獄)하니라.
그 후에 (윤) 바오로 날마다 문초와 형벌을 당하였으나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모르나 한가지로 옥에 갇혀 있어 친히 목도(目睹: 눈으로 봄)하던 교우의 말을 들은 즉 (윤) 바오로(가) 옥에 있을 때에 함께 옥에 갇혀 있는 교우들을 항상 권면하며, 실망하며 냉담하여 가는 자들을 지성(至誠)으로 권고하여 신덕(信德)을 견고케 하였다 하며, 또 친목(親目: 친히 봄)한 김(金) 마리아의 말이 “내가 밥을 얻어다 줄 때마다 옥 구멍으로 보면 밥을 받은 후 자기는 먹지 아니하고 다른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는 고로 그 후에는 밥 한 그릇을 따로 얻어다 주었다”하며, “하루는 (윤) 바오로가 자리 한 잎을 사다 달라 하기에 내가 곧 장에 가서 왕골자리 한 잎을 사다 주니 자기는 앉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을 깔아 앉히더라”하더라.
(윤) 바오로 이렇게 옥중에서 아름답게 세월을 지내다가 마침 교사(絞死: 목매어 죽임)함을 입어 그 영혼을 천주께 바치니 때는 강생 후 1868년 무진 7월 18일이요, 새 군난 난 지 3년 만이니 (윤) 바오로의 나이는 60세러라.
여기 사적을 기록한 치명자는 치명록(《치명일기》) 제360호에 있는 윤(尹) 바오로 회장올시다.
이 치명사적을 저술한 자는 치명자의 손자 되는 (윤) 베드로올시다. 죄인(증언자)이 어려서부터 조부의 사적을 친히 목도한 부모들에게나 또 다른 여러 교우들에게 많이 들었음으로 이 사적을 여러 해 전부터 저술하기 시작하여 누차 상고(詳考: 자세히 살펴봄)하고 문의하여 작년에 비로소 마쳤나니다.
이 사적의 증인으로 말하면 (윤 바오로의) 생시에 증인은 죄인(증언자)의 부모,
치명한 사적은 치명록(《치명일기》)에 있는 김(金) 마리아.
안성군(安城郡) 읍내면(邑內面) 동리(東里)19) 294번지
윤(尹) 베드로 백(白: 아룀).
종(終)
<주>__________
1) 노성 : 충남 논산시 노성면, 광석면, 상월면과 부여군 초촌면 지역. 조선시대에는 노성현이었는데, 1895년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 논산군에 병합되었다.
2) 놀미 : 충남 논산시 부창동 지역. ‘놀뫼’, ‘논산포(論山浦)’라고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노성현 광석면 논산리였는데, 1914년 은진군, 연산군, 노성군 지역을 합쳐 새로이 ‘논산군’이 설치되자 논산면(1938년 읍으로 승격, 1996년 시로 승격됨)에 편입되었었다. 조선시대에는 서해와 금강을 통해 많은 배들이 강경을 거쳐 놀뫼까지 들어와 ‘놀미장’이 열렸다.
3) 강경 : 충남 논산시 강경읍. 조선시대에는 은진현(1895년에 군이 됨) 김포면에 속했는데, 1914년 논산군에 편입되었다. 강경포(江景浦)는 조선 후기 어물, 소금, 곡식의 집산지로 유명하며 평양, 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의 하나로 일컬어졌다.
4) 반이 : 원문의 ‘반리’는‘반이’의 오기이다.
5) 수챗구멍 : 집 안에서 쓰는 허드렛물을 버려 흘러나가게 한 시설의 구멍으로 요즘의 하수도와 비슷하다.
6) 독바위 : 충남 홍성군 광천읍 옹암리에 있는 포구 마을. 조선시대 말기부터 새우젓 시장이 들어섰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보령현(1895년에 군이 됨) 청소면에 속했는데 1914년에 홍성군에 편입되었다.
7) 객주 : 조선시대 경향(京鄕) 각지의 상품 집산지에서 상품을 위탁받아 팔아주거나 매매를 주선하며, 그에 부수되는 창고업·화물수송업·금융업 등 여러 기능을 겸하는 중간상인을 말한다.
8) 옛적에 성조 요셉이 … 달아난 것과 같이 : 요셉이 포티파르 아내의 유혹을 뿌리친 내용은 창세기 39,1-12에 나온다.
9) 유기(유구) : 유구(維鳩)는 현재 충남 공주시 유구읍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신상면이라고 불리다가 1942년 유구면(1995년에 읍이 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0) 내외를 하고 : 예전에 남녀가 같은 자리에 있지 않는 것을 ‘내외한다’라고 하였다.
11) 관면 : ‘관면(寬免, Dispenstio)’은 가톨릭교회에서 지켜야 할 법적 의무를 중지 또는 면제시키는 것이고(e.g. 주일·단식·금육 관면), ‘특전(特典, Privilegium)’은 법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권리나 권한을 관할권자가 은전으로 장소나 사람에게 부여한 권리나 권한이다(e.g. 전대사, 바오로·베드로특전) 통상적으로 ‘관면’은 관할권자의 ‘허락’이나 ‘승인’을 뜻한다. 관면이나 특전은 상황이나 조건 때문에 敎會 實定法·倫理 규범을 준수할 수 없을 때 條理에 비추어 합리적이고 관대하게 해석하는 ‘에피케이아(Epikeia)’와는 다르다. 敎會 實定法·倫理가 神的實定法이나 自然法과 충돌할 때가 있다. 요한 8,1 이하 ‘죄녀에 대한 용서’에서 그 죄녀는 율법에 따라 石殺해야 한다(신명 22,22-24; 레위 20,10; 요한 8,5). 하지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모세 율법을 자구대로 해석해서 죄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으신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라고 명하신다. 현행 교회법전의 마지막 조항인 제1752조 말미에 “교회법적 공평을 지키며 영혼들의 구원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것이 교회에서 항상 최상의 법이어야 한다(servata aequitate canonica et prae oculis habita salute animarum, quae in Ecclesia suprema semper lex esse debet)”라고 규정함으로써 교회법의 본질이 무엇이고, 교회법의 해석과 적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제1원리를 명시하고 있다.
12) 위험 : 원문의 ‘위엄’은 ‘위험’의 오기이다
13) 소반이 : 충남 천안시 광덕면 지장리에 있는 마을. 산에 돌이 많고 소반을 만드는 집이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소반곡’, ‘소반점’, ‘반곡’(盤谷), ‘동산리’(東山里)라고도 한다.
14) 대흥 : 충남 예산군 대흥면, 광시면, 신양면, 응봉면, 오가면 일부 지역. 조선시대에는 대흥현이었는데, 1895년에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 예산군에 편입되었다.
15) 더우골 :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서리에 있는 덕골(德谷) 마을. 상, 중, 하 3개의 마을로 되어 있어 상덕, 중덕, 하덕이라 부르기도 한다.
16) 관불산 : 충남 공주시 유구읍 녹천리와 신풍면 백교리 경계에 있는 산. 그 모양이 부처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높이는 해발 398m이다.
17) 윤음이 … 요란한지라 : 1866년 9월 11일(음력 8월 3일)에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반포되었다. 《일성록(日省錄)》, 병인년(1866) 8월 3일조. 참조.
18) 망건 : 원문의 ‘망근’은 ‘망건’을 가리킨다.
19) 동리(東里) : 경기 안성시 안성1동에 속한 동본동, 명륜동, 봉남동, 봉산동, 숭인동 지역. 조선시대에는 안성군 동리면에 속했는데 1914년 교동(명륜동)을 병합하여 읍내면(1931년에 안성면이 됨)에 편입되었다. 1943년에 5개의 정(町)(1947년에 洞으로 바꿈)으로 나뉘어졌고, 1998년 안성시 안성1동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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