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풀기
[1] 사도 바울과 함께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안부 인사를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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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무엇이 풍족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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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 가지 부르심은 무엇입니까?
①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
② ( )( )라 부르심
③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도록 부르심
1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
바울은 1세기 서신 형식을 가지고(보내는 자 – 받는 자 – 안부 인사) 하나님의 편지를 씁니다. 바울은 로마식 이름입니다(그의 히브리식 이름은 사울이다).
바울은 첫째,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합니다(갈 1장 1절.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람의 자격, 노력, 사람들의 추천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 뜻에 합당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의 모든 삶을 이끌고 있습니다.
둘째,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쓰시는 사도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 사도입니다. 그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사도로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 예수의 뜻이 일치되고 있습니다. 사도는 신약 시대의 독특한 직책입니다. 그 뜻은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그를 보내신 분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고전 9장 1절. 고전 15장 8절. 행 9장 1-7절). 그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내신 전권대사였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는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도로서 쓴 공적 서신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보내신 목적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롬 1장 1절.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 행 9장 15절, 롬 11장 13절, 갈 1장 16절. 이방인을 위한 사도).
셋째,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의 권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를 둡니다. 그의 사도권은 신적 기원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은 어떤 자격을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 시대의 사회는 ‘이력서’가 중요합니다. 이런 문화에서는 자기 의가 강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이력서가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의 공로가 의미가 없습니다. 사회에서 많은 이력서, 고급 실력을 갖춘 사람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참으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겸손하게 드리는 사람을 쓰십니다.
바울과 함께 언급되고 있는 형제 소스데네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쓴 편지 내용에 동의한 것은 분명합니다. 공동 사역의 연합과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스데네는 사도행전 18장 17절에 나오는 회당장과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바울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법정 앞에서 채찍질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회심하고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참한 것 같습니다. 에베소에서 바울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절.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
수신자가 누구인지를 말씀하시는데,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교회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고린도는 1세기에 존재했던 지역입니다. 그 고린도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교회”라고(the church of God) 부릅니다. 교회는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교회는 바울이나 아볼로 등에게 속해 있지 않음)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회중(헬. 에클레시아. 70인 역에서 회집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 헬라 세계에서는 도시의 행사를 위해 모인 정치적인 회집 공동체를 의미. 구약에서 여호와의 회중을 말함. 민 16장 3절, 20장 4절, 신 23장 1절, 대상 28장 8절)”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소유입니다.(벧전 2장 9절. “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존재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 |
보이지 않는 교회 | 보이는 교회 |
우주적인 한 몸 된 교회 | 지역 교회(각 처) |
천상의 교회 | 지상의 교회 |
승리의 교회 | 전투하는 교회 |
완전하고 흠이 없는 교회 |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교회 |
하나님의 교회는 첫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거룩하여진’은 완료시제로 결정적인 성화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회심을 의미) 구별된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죗값을 치르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죄 씻음 받음으로 거룩해졌습니다. 구약에서 희생제물로 구별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짐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도록 구별되었습니다. 뒤에 분열이 나오고 다양한 문제들이 나오는데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둘째, 교회는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부르심을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성도 공동체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하나님께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3장 1절에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하였는데 성도의 정체성을 가르쳐줍니다. 고린도전서를 보면 고린도 교회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깨닫도록 합니다.
셋째, 교회는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主)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입니다. “각처”는 교회는 각 지역에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도시 곳곳에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편적인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主)”로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릅니다. 구약에서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 4장 26절. 왕상 18장 24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그의 도우심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그의 도우심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공동체입니다.
3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고, 예수님을 “주,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은 “은혜와 평강”입니다. “은혜”는(헬. 카리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레온 모리스는 은혜는 “가장 위대한 기독교 단어 중 하나”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화의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성화는 구원의 현재성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것이 “평강”(헬. 에이레네)입니다. F. W. 그로샤이데는 “평강은 은혜의 성숙한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48장 22절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평안을주십니다(마 11장 28절. 요 14장 27절). 평강은 전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풍요로운 삶을 사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 평안은 교회 공동체로 구현이 됩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고 하시고 둘(유대인과 이방인)로 하나를 만드시는 평안을 이루신다고 하셨습니다.
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바울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을 쓸 때 잊지 않고 “감사”를 말합니다. 감사하는 것은 그의 삶의 습관이었습니다. “항상”은 그것을 표현해 줍니다.
감사의 이유 | |
① | 고린도 교회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풍부하다 |
② |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 |
③ | 하나님께서 신실하심으로 교회를 보존하신다 |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그리스도 예수께 연합된 지체이기 때문에 은혜를 주심)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감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생각할 때 나오는 것입니다. “주셨다”는 것은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 ‘선물’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들은 풍족한 은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를 둡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들의 힘으로 무엇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 교회에 나타나고 있는 ‘교만함’의 문제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의 뿌리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장 5절에 ‘지식’을 말하는데 8장 1절에 그 지식으로 교만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예수”를 잊으면 교만해집니다.
5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
감사의 이유가 나옵니다. “그 안에서”는 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셨습니다.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모든 일에 풍족하였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부요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들을 주십니다. 그들의 신앙의 우월함을 나타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언변과(헬. 로고스) 지식”을 언급합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중요하게 내세우면서 자랑한 내용이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언변”은 말과 관련된 은사들입니다. 레온 모리스는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박윤선 목사는 “전파된 진리 곧 복음의 진리”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말할 내용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식”을 레온 모리스는 진리를 인식하고 그것을 붙잡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말과 지식의 풍족함이 있었습니다(12장 8절.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입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에 감사를 드립니다.
6절.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
“그리스도의 증거”는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전한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들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입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로 하여금 말해야 할 것과 알아야 할 것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성령님으로 잉태됨, 지상에서의 사역과 전하신 말씀들,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 하늘에 오르심 등의 증거들에 근거하여 믿음이 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견고하게 해줍니다. 그리스도의 증거가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고, 그들의 변화된 삶을 견고하게 붙들어 줍니다.
7절.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
바울은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고 인정합니다. ‘은사’가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구원’과 ‘영생’(롬 5장 15절. 6장 23절)이 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주시는 선물(롬 11장 29절)도 은사입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사들(고전 12장 4절)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현재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은사들을 누리고 있습니다. 12장에 나오는 은사들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성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주”로 오시는 때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현재 은사를 누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 누릴 충만함과 관계가 있습니다. “기다림”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자세입니다(롬 8장에 세 번이나 쓰임. 19절, 23절, 25절). 빌립보서 3장 20절에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기다림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 된 말씀을 믿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생각하게 합니다.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현재 주어진 은사에 도취 되어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잊으면 안 됩니다. 둘째,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그 은사를 주신 목적을 생각하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합당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8절.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
주께서 하시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구약에서 “주의 날”이다. 기독론적으로 말씀하신다)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그 날이 있습니다. 그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로 세우고자 하십니다. 끝까지 견고하게 하십니다. 구원을 완성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빌립보서 1장 6절에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은혜로 은사를 주신 주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끝까지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교회는 아직 마지막 날에 이르지 못했지만 주께서 마지막 날까지 이끄실 것입니다. 견고하게 교회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9절.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미쁘신” 분이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신명기 7장 9절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하시고 “언약(히. 베리트)을 이행하시며 인애(히. 헤세드)를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인애는 하나님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미쁘심이 구원의 가장 확실한 근거입니다.
미쁘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끝까지 그렇게 하도록 행하실 것입니다. 1장 2절에 교회는 예수님을 “주”로 부르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부활하셔서 하늘에 계신 “주”와 교제하는 공동체로 서 있어야 합니다. “교제”(코이노니아)는 ‘참여하다’(고전 10장 16절. 빌 1장 5절)는 뜻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 있습니다. “바울 신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레몬 모리스). 이 “교제”는 1장 10절에 나오는 “분쟁”과 반대를 이루는 용어입니다. 분열은 교제를 깨뜨리는 행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