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님을 보았지 /황가영
해질 녘
길 건너 모퉁이에서 만난 달님
어딜가냐 물으니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나러 왔다 했지
우리 집 담벼락 밑으로
자정 즈음
살금 살금 대문을 빠져나가는 달님을
몰래 따라가보았지
빵집 옆 가로수길로
우리 학교 세 번째 울타리 밑으로
아빠가 운동하는 산책길 옆 물가로
달님이 가는 곳마다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길게 뺀 목 살랑살랑 흔드는 누군가가 있었지
우리 집 담벼락 밑에 사는 바로 그 아이였지
아마도 달님의 가장 친한 친구겠지
그날 밤 나는 보았지
친구의 가는 목에 얼굴을 맞대고
친구의 하늘하늘 기다란 팔을 잡고
바람의 노래에 춤을 추는 달님을 보았지
밤새도록 춤을 추는 달님을 보았지
오리의 편지/황가영
바다에 오리가 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오리가
오리가 바다 위에서 무얼 하는지도 나는 알고 있다
오리는 먹이를 찾으러 다니는 게 아니라
편지를 쓰고 있다는 걸
언젠가 파도에 떠밀려온 오리의 편지를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오리의 안부를 묻지 않지만
나만은 오리의 마음을 안다
오리가 쓴 편지는 잔물결을 일으키고
고요한 구름이 되었다가
거친 칼날이 되었다가
으르렁대는 커다란 짐승이 되어 파도를 타고 나에게 온다
그래서 나는 오늘밤도
바다를 비추는 커다란 촛불 등불삼아
별처럼 빛나는 사탕을 잔뜩 담은 편지를 쓰고 있는
반짝이는 작은 점이 된 오리를 본다
비밀 일기예보/ 황가영
창문을 열어 하늘을 보는데
구름 속에서 물끄러미 나를 보던 눈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눈사람은 어쩐일로 내게말을 건냈다
반짝반짝 발그레한 얼굴로
“여덟시에 감나무 밑에서 만나”
학교에 갔더니
윤지는 다락방 창틀에서
정미는 토끼굴 속에서
현우는 빵집 앞 우체통 앞에서
눈사람과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기예보를 보지 않고도
커튼을 열어 창 밖을 보지 않고도
눈이 올 거라는 걸 알 수 있다
콘크리트 누룽지/황가영
엊그제 언니가 가져온 누룽지
누룽지는 봉지에 담겨 있었고
엄마 사랑이라고 쓰여있었고
그리고
외국산 100%였다
어느 더운 나라의 콘크리트 바닥을 생각해 본다
엄마들이 흙바닥에 하얀 쌀밥을 깔고 있었다
그 나라의 사람들은 바닥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한낮의 열기가 가시고 나면 바닥에는 누룽지만 남는다
반짝거리는 구둣발이 밟고 지나간
딱딱하고 납작한 누룽지
그걸 누가 먹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나라의 이름은 외국이라고 한다
생일 저녁 7시 58분 /황가영
거실 천장에 동글동글 매달려있던
생일을 깨우는 매미 소리
엄마가 부엌에서 포도알 씻는 소리
빨강 꽃 접시 달그락대는 소리
장난감 강아지 재주넘는 소리
그 밑으로 대롱대롱 알록달록하던
성냥 그어 초 켜는 소리
속눈썹 반짝이는 인형 눈알 깜빡이는 소리
아이들의 생일 축하합니다 노랫소리…
꺼진 촛불 연기되어 사라지고
납작해진 포도껍질만 바람 빠진 풍선처럼
먹다만 케이크 옆에 뒹굴고 있네
황가영: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어딘가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찾아 나섭니다.
<시집을 펴내며>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쓰고, 지우고, 새롭게 고쳐쓰고, 단정지었던 부분을 여러번 수정하고 다시 이어서 쓰기 시작하는 과정의 반복일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사람과 사물, 혹은 다른 어떤 것도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모습이 극히 일부일 뿐임을 알게 된다는 것,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들을 찾아나가는 것.
첫댓글 왕지각 죄송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