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계11:1-8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여게 이 지팡이를 사도 요한에게 주어서 척량하라고 했는데 이 사도 요한은 사도 요한 개인을 말함이 아니고 곧 교회를 대표해서 말함이요 교회를 대표해서 말한 것은 성령과 진리와 피의 역사를 가리켜 말합니다.
그러면 척량하는 것은 성령의 간섭과, 진리의 간섭과, 주님의 피의 간섭 역사가 있는 것을 가리켜서 척량이라고 말하고 이런 것이 없는 것을 가리켜서 척량 없는 성전 밖마당이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성전은 제단보다 크고, 또 제단은 경배하는 자보다 큽니다. 성전생활이 되어져야 제단 생활이 되고, 제단 생활이 되어져야 경배 생활이 되어집니다.
그러면 즉시즉시 이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를 이 복음운동이, 교회 건설 운동이, 주님의 성령과 진리와 피의 역사가 간섭하시는 것을 본인이 알게 될 것입니다.
간섭하시고, 그러면 척량하는 것은 그 있는 것을 정확히 구별하는 그것이 척량인데 이 세 가지 능력이 와서 자기의 성전 생활, 제단 생활, 경배 생활이 잘되고 못된 것을 낱낱이 계속적으로 관리하시고 판단하시고 구별하는 그 섭리가 있는 것을 본인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자가 벌써 성전 생활, 제단 생활, 경배 생활을 버리면 성전 밖마당 생활이기 떄문에 거게는 척량이 없습니다. 성령의 간섭이 없습니다. 영감대로 되었는지 안 됐는지, 진리대로 되었는지 안 됐는지 또 주의 피공로의 구속함을 받은 자로서의 합당한지 안 한지 하는 거게 대한 아무런 비판성 구별성 관리성 또 수정해서 회개성 또 그에게 정확한 제대로의 정확한 정확성이 그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전 밖마당과 라오디게아 교회와 꼭 같은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자기는 부요하여 부족함이 조금도 없다 이렇게 자신만만한 자인한 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그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돼서 그런 것이 아니고 눈이 어두워서 보지를 못해 그런것입니다. 실상은 자기가 가난하고 가련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것을 자기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부요해서 모든 면에서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 제가 참으로 그렇게 모든 것이 온전하고 구비해서 그렇게 인정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라오디게아 교회가 어떤 교회인고 하닌 척량함을 받지 못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간섭과 관리를 받지 못하는 교회, 곧 개인이 합하면 이제 가정교회가 되겠고, 가정교회가 합하면 사회교회가 되겠고, 사회교회가 합하면 하나의 진영이라, 요새는 노선이라, 하나 교파교회가 되겠고, 그러면 이제 시대교회가 되고, 세계교회가 되고 역사교회가 될 것입니다. 역사교회라 말은 에덴동산 아담 하와로부터 오늘까지에 내려오는 하나님이 건설하고 계신 단일교회 한 교회만을 가리켜서 역사교회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이 구원 섭리의 은혜를 받으려면, 하나님이 관리해서 가꾸어 주심을 받으려면 이 세 가지가 돼야 돼지 이 세 가지가 되지 안하면 하나님은 간섭하지 않습니다.
왜? 멸망 가운데 깊이 빠져서 신앙 생활 한다는 것은 전부 껍데기요 아무것도 아닌 껍데기 생활 참 멸망 멸망만 자꾸 마련하면서도 아무 감각성이 없고 그래도 거게서 제가 잘 믿는다고 자긍만 나오고 교만만 나오고 안심만하고 든든하니까 이제는 내 실속이나 차려보자 하고서 자기 사욕이나 노리고 하는 그 되는 그것이 뭐이냐? 하나님 앞에 버림을 당한 자라는 것입니다.
어데서부터 하나님의 간섭을 받게 되는냐? 성전 생활에서부터 간섭 받습니다.
성전 생활이 안 되면 제단 생활은 제가 조작배기로 하는 것이지 성전 없는 데 제단이 없습니다. 또 성전과 제단이 없는 거기에서 하나님 앞애 경배하는 경배는 없습니다. 안 됩니다. 그것은 모든 이방의 신당들이요 그것은 다 조짜배기요 가짜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성전 생활을 할라고, 성전이 될라고, 성전 생활에서 성전이 되어져 가는 것인데 성전 생활을 하려고 하면 거게서부터 간섭이 오는 것을 볼 것입니다. 또 틀렸다. 이거는 바로 됐다. 이거는 이면이 모자라다.
길다. 짜르다. 넓다. 거게 있는 이 구속의 실상대로 그것이 정상적으로 되지를 못했다. 요거는 잘못됐다 요거는 바로 됐다 여거는 무엇이 모자란다. 요거는 지나갔다.
그러면 중추점도 알 것이요, 중추점, 곧 기점. 기점도 알게 될 것이요 지나가고 미달된 치우친 것 그런 것도 알게 될 것이요 삐뚤어진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간섭이 있는 것도 자기가 환하게 볼 수 있고, 또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양육하고 있는 것도 보일 것이고,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해서 시비를 계속 말씀을 하시면서 고치시는 것도 자기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없는 자기가 어데까지 삐뚤어져도 삐뚤어진 것을 모릅니다.
삐뚤어진 것을 제대로 합리화시켜서 해석할 수 있는 그런 자가 자꾸 됩니다.
그러기에 정동이 서까지 삐뚤어져도 삐뚤어진 그것이 자기에게는 합리가 되어지고 바른 것이 되어지고 또 거기에도 얼마든지 조건이 있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성경은 육십육 권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오늘 교회에 대한 해석이 수 천만 갈래도 더 되게 갈라졌으며 교회가 이래 갈라졌으며 사람들이 이렇게 됐느냐 하는 것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는 것 하나님의 성령님으로만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성령님이 간섭치 아니하고 또 진리가 그를 간섭치 안해서"내가 주와 및 말씀에게 부탁하니 - 주는 곧 그리스도의 영이요 주님이시니까 하나님을 말합니다. - 말씀이 너희를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운다" "말씀이 세우신다" 말씀이 삐뚤어진 것을 자꾸 수정해 가지고 어떻게 세우는 것, 그러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 구원은 영감이 중요하지마는 계시 이 말씀 이 말씀을 통하지 않은 영감이 없습니다. 이 계시 말씀이 제일 먼저요 그 다음에 계시 말씀 안에서 영감 역사가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열어 보이시는 그대로 되는 것인데 그만 그에게는 하나님의 성경 말씀이 바르다 옳다 하는 그 성경 말씀의 간섭이 없고 그러고 나면 주님의 피공로의 간섭이 없습니다. 주님의 피공로로 인해서 진리가 우리에게 왔고 성령님이 우리에게 왔지마는 피공로는 중보자입니다. 피공로는 하나님과 진리와 우리와의 연결을 시켜 주는 모든 연결 작업을 다 일으킨 어데까지나 중보의 역할을 책임지고 이루신 것이 주님의 피공로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피공로로 진리와 성령님 곧 하나님에게 연결될 때에 거게서 나타나는 것은 다 영생입니다.
진리가 나타나고 또 진리 안에 성령님이 더 추가 역사해 가지고 더 꺠끗하게 새롭게 해서 주님의 피 안에서 주님의 진리 안에서 주님의 성령으로 마지막을 완전히 결말을 지워서 완성을 이루는 것이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성전 생활, 제단 생활, 경배 생활을 하려고 하는 자에게는 진리가 그를 수정해 줍니다. '나는' 그래 할라 할 때에 진리에 삐뚤어진 것을 알게 해 줍니다. 또 진리와 일치된 것도 알게 해 줍니다. 그럴 때에 성령님의 그 감화에 삐뚤어진 것을 알게 해 줍니다. 그 전에는 간섭이 없습니다.
그러면 또 성령과 진리는 주님의 피를 증거하고, 주님의 피는 진리와 성령을 증거하고, 이 셋은 하나인데 이가 저를 증거하고 저가 이를 증거해서, 이가 저 면에 삐뚤어진 걸 말하고 저가 이 면에 삐뚤어진 걸 말해서 이 셋이 합하여서 한 계시를 나타냅니다., 한 하나님의 올바른 것을 나타내서 그대로 되어지는 그것을 가리켜서 증인 생활이라 끝에 말했습니다.
거게서 세상에 바로 보여 주기도 하고 " 세상에 빛이라"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라 너희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는 이 착할 선(善)자로 선이라고 우리에게는 표시했는데 선에 대한 정의는 아주 삐뚤어져 가지고 있습니다. 이 한 단어의 정의가 바로 되는 그것이 기독교를 좌우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하는 영광 돌리는 것은 옛사람이 영광 돌리는 것 말하는 것 아닙니다. 옛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줄을 모릅니다. 옛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습니다.
그런데 착한 행실이라는 이 선이라는 정의를 악이라는 정의를 이걸 바로 가지지 못하고 이것을 전부 다 마귀에게 다 빼앗겼습니다. 마귀에게 빼앗겨서 마귀가 말하는 선을 마귀가 말하는 악을 그것을 바꾸어 가졌기 때문에 요새는 기독교 도덕주의가 아주 세력을 부리고 기독교 사회주의가 세력을 부리기 때문에 앞으로 이 간섭 없는 교회는 결국은 세상하고 한덩어리가 돼 가지고 참된 교회와 싸우게 됩니다. 적이 됩니다.
그러기에 빛이라 말은 빛이 오면은 모든 정체와 정형과 정색이 드러납니다.
빛이 오면 여게 아무것이 아무것이도 드러나고, 키 작고 큰 것도, 낯이 검고 흰 것도, 나이가 많고 적은 것도, 사람도 짐승도 다 나타나지마는 빛이 없으면 모든 정명도 정색도 정질도 정체도 정종도.종자, 종자. 그거 무슨 종자라 하는 그것도 안 나타납니다. 가리워집니다.
"너희는 세상이 빛이라" 말은 너거로 인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근본대로의 변질되지 아니한 것을 나타내 보이시겠다는 말입니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착한 행실이 뭐인데? 너희들이 하나님께서 자존하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그들 모르게 창조하시고, 또 예정도 하시고, 하나님의 목적도 정하시고 이렇게 한 그 모든 사실, 하나님 중심한 하나님의 구속 도리 이 구속의 역사 하나님의 구원은 전부가 하나님을 일단 타락으로 배반하고 돌아갔던 것을 하나님께로 집합시켜서 하나님 중심으로 복구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되어지는 것이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이렇게 타락해서 왕도 여러 억만도 넘고, 주인도 억만도 넘고, 창조자도 억만도 넘고, 주관자도 억만도 넘으나! 실은 한 분뿐이라. 이 한 분뿐인 것을 네가 생활해서 '과연 그 사람보니까 자존자의 목적이 있구나. 그 사람 보니까 하나님의 예정이 있구나 모든 것이 그분 한 분으로 말미암았고, 구분 한 분으로 인하고 그분 한 분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로구나.' 하는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빛인데 세상 인간들 마귀들이 좋아하는 , 마귀들이 환영하고 마귀들이 기뻐하고 마귀들이 좋아하는 그 일을 하는 것이 빛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교회는 속화됩니다.
이러니까 이종교와 기독교가 다른 게 뭐 있으며 이종교와 기독교와 이래 가지고 구별 구별 하는 것이 기독교인데 ' 그렇게 까다롭게 해 가지고 그럴 게 뭐 있는가? 종교는 다 하나지. 인간은 하나지 갈 길은 하나지, 이러니까 종교 통일을 말하고 그 보다 더 큰소리 하고 넓고 크고 대인은 이제 만물 통일 우주 통일을 말합니다. 이러니까 이 운동이 자꾸 돼 가서 '공산주의도 지금 서로 화합이 되어가는 이런 판에 뭐 천주교니 개혁교니 그래 가지고 번역을 그걸 구별하는 그런 좁작하게 그럴 게 뭐 있는가? 교파를 망라해야지 교파를 말하는 그런 좁작한 것을 말할 게 있는가? 그 반대기 속같이 좁기때문에 그런 데는 아무것도 들어가지 못한다. 너무 양협하고 너무 시야가 좁다.' 좁은 것이 네가 좁다. 자존자를 보는 시야가 좁으냐? 인간 그까짓것들만 보는 게 시야가 넓으냐? 뭐이 넓으냐? 뭐이 넓으냐, 넓기를? 좁고 넓은 것도 모르요 모든 만사에 정의를 모르는 완전히 소경이 됐습니다. 완전히 어두워졌습니다.
이거는 뭐이냐? 하나의 잣대가 있어야 그 잣대를 가지고 길다 짜르다 몇 자 된다 이것을 알 수가 있고 또 먹줄이 있어야 굽고 곧은 것을 알지 그것이 없는데 어떻게 굽고 곧은 것을 알 수가 있습니까? 기독교의 표준을 모르기 때문에 안 된다 그말이오.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것은 기독교의 표준)이라 그말이오.
기독교의 강령이요 진수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성전 생활을 하려고 해 봐야 내가 얼마나 거짓되며 얼마나 변하며 얼마나 틀렸으며 이것을 알지 그걸 안 하는 자는 항상 제가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만족합니다.
그 안에서 제단 생활할라 하니까 " 이 제단 생활을 원하는 선은 해지지 안하고 원치 안하는 죄만 범하게 되어진다"하는 로마서 7장에 바울이 간증한 것이 그 사람이 성전 생활 제단 생활 할라 하기 떄문에, 제단 생활을 할라고 하니 경배 생활 할라고 하니 자꾸 틀렸어. 자꾸 틀린 것만 나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 원하는 마음만 있지 이루어지는 건 안된다" 거게서 이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꾸 자기 만족으로써 그저 하나도 염려되는 것이나 틀린 것은 없고 안심 만족이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전부 사욕만 나옵니다. '어떻게 해야 내 꾀를 파 가지고 내 유익을 만들까, 내 왕국을 만들까, 내 주장을 만들까?' 벌써 소경돼서 죽은지 오래 됐다 그거요.
네가 너를 나타낼 게 어데 있느냐? 조물주로 말미암아 됐는데 그 분으로 말미암은 구원이요 그분으로 말미암은 교회인데 어떻게 네것이 있느냐 그거요.
어리석으면 안 됩니다.
성전 생활이 제일 먼저 돼야, 우리가 다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전 생할을 할라고 자기가 성전이, 성전 생활 한다 말은 성전이 되는 그 역사를 한다 그 말이오 성전이 우리가 다 된 게 아니라. 성전이 되어져 갈라고 애를 쓰는 것이 제단 생활 할라 하는 것이요, 또 제단이 되어져 갈라고 애를 쓰는 것이 제단 생활 할라 하는 것이요, 경배자가 되어져 갈라고 하는 것이 경배 생활 하는 것이라 그것입니다.
그러기에 창세기 출애굽기나 구약에 모든 열왕기나 모든 성경은 다 그것을, 역대기 열왕기 모든 구약 성경은 다 그것을 다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 건 한 건, 그 건을 보면서 깨닫고 그 건을 보고서 깨닫도록 이렇게 한 건 한 건 보여주는 것이 뭐이냐? 그것이 성전 생활을 가르치고 제단 생활을 가르치는데 된 것도 있고 안 된 것도 있고, 성전 제단 경배 생활이 안 된 거는 실패됐고 된 거는 성공했고 그것을 자꾸 보이는 것입니다.
신약도 다 그렇습니다. 신약에 요한복음 6장에 오병이어 그것도 어떻게 하나님 앞에 그거는 제단 생활을보이는 것인데제단 생활이 되어지면은 어떤 능력이 역사한다, 내나 증인의 권위가 있고, 또 감람나무의 권위가 있고, 또 빛의, 촛대의 권위가 있고, 그가 원하는 대로 그가 말하는 대로 그대로 모든 우주와 영계는 움직여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이스라엘의 마병이요 불병거라"하는 것도 그도 그가 눈이 밝아졌을 때에 이제 이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권위를 줘서 그분들의 권위대로 모든 것은 다 미래의 역사는 이루어져 가고 있다 미래의 역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그 원하는 대로 이루어져 가고 말하는 대로 이루어져 가고 그대로 이루어져 갑니다. 그것들이 말하는것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말하고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대로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그분들의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오 그러기 떄문에 "네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네 안에 있으며 원하는 대로 구라하 다 이루리라"하는 요한복음 15장 7절에 이 말씀이 곧, 그뭐 소원대로 이루어지니까 소원 성취하니까 좋다는 말이 아니라 너와 하나님과 모든 의사가 같다 그말이오 지정의가 같다 그말이오 모든 소욕이 같다, 지식도 같다, 하나님과 같다 그말이오. 하나님과 같이 됐다 그말이오 그러기 떄문에 하나님 소원 이루어지는게 네 소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네 소원과 하나님의 소원이 일치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그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이 성구를 보고 , 처음에 성경을 읽다 이 성구를 본 사람이 놀라고 까물치고 '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되어진다' 는 거게 대해서 놀라지는 것이 다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게 대한 해석은 많이 들었기 때문에, 성전 생활을 할라고 성전 생활은 간단합니다. 주님의 피로 구속받았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내게 대해서는 당신만이 이리 저리 하지 이 집이 이 암만 크다 해도 집 제까짓 거는 여게 뭣이 와 가지고 누가 이래 망치로 뚜드려도 하나도 방어 못 합니다. 똥칠을 해도 방어 못 하요. 주인이 그것을 관리하고 방어하요.
이제 자기는 주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주의 것이 됐으니 주님이 자기의 주인이요 자기를 책임지고 모든 것을 다 이루시지 자기는 자기에게 대해서 하나도 크고 작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화과나무를 엮어 입은 그것이 인간이 저를 위해서 제가 노력하기 시작한 것인데 그게 무슨 소용, 그게 무슨 소용 있소? 무화과나무로 만들어 입으면 그게 몇 해나 갈 것이며 몇일이나 가겠습니까? 해 돋으면 바싹 뿌숴져 버리고 말지. 그게 뭐 되겠소? 그러기에 작은데서 많은 것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전 생활은 자기는 주의 피로 구속받은 주의 것이기 때문에 주의 것이다, 주님의 자기에게 있느느 자기 주인이다. 자기는 자기에게 대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주님에게 쓰여지면 됩니다. 주님 모시고 쓰여지면 돼요 주님 모시고 주님이 자기를 주관하시고, 자기를 주관하시고 주님에게 쓰여지면 돼요. 주님이 자기안에 계시고 자기의 주가 돼셔서 주장하시고 주관하시고 또 자기에 대한 모든 걸 책임지시고 그러면 됩니다.
그 생활 할라하면은 자기가 하루 안 가서, 하루가 안 돼서 '아이구 틀렸다 할 것이오.' 아니, 한 시간이 안 가서 '요래 틀렸다' 한 시간이 아니라 한 시간 만나 가지고 잠깐 애기할 때 ' 아이구 틀렸다' 한 사물을 만날 때 ' 또 틀렸다' 자꾸 틀린 것만 나왔을 것이오. 틀린 것만 나오는 거기서 틀렸으니 ' 주여' 다시 주님의 피공로가 있기 때문에 또 회개하고 할 때에 그때에 틀린 것을 아는 그것이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 기독교는 하나님의 율법으로써 정죄함을 받아서 죽고 예수님의 공로로서 사죄를 받고 사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성전 생활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교만이 나올 여가가 있고, 자긍을, 자기 자랑하는 자긍이 나올 여가가 있고, 사욕이 나올 여가가 있고, 자기를 위해서 꿈을 꾸는 그런 여유의 여가가 있지. 그러기 때문에 한 자리에서 꼭 같이 주의 복음의 일을 하나 그 속에는 자기가 왕입니다. 주님의 성전도 있고 마귀당도 있습니다. 성전도 있고 마귀당도 있어 자기가 제단 생활은 그만 오병이어의 물고기 두 마리를 도시락 안에 넣어 가지고 주님에게 바친 그것이 곧 뭐이냐? 제단 생활입니다. 제단 생활 자기대로의 이 세상에서 살던 자기대로의 살던 그것을 다 죽여 이걸 죽일라 하니까 이놈이 자꾸 나오니 " 원하는 선은 되지 안하고 원치 한하는 죄만 되어진다" 하는 탄식은,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라" 하는 그 탄식이 바울이 우리만 못해서 탄식합니까? 자기의 표준과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그대로 할라고 해 보니까 또 틀렸고 또 틀리고 이래 된는데 자기가 자기를 기준하니까 딱 들어맞았다 그말이오 어러석습니다.
이렇게 제단 생활 하면, 오병이어면 해석 다 됩니다. 제단 생활 하니까 적은 양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충족을 줬습니까? 이것이 기독자의 제단 생활입니다. 뭐 그 떡이 뭐 변화돼 커서 그렇습니까? 축사하신 주님이 크시기 떄문에 그렇지 나눠 주신 주님이 크시기 때문에 그렇지 주님으로 말미암았어.
이렇게 되면 주님은 자기의 전부가 됩니다. 자기가 제단 생활이 되면 자존하신 지극히 크신 하나님은 그 전부는 다 자기 것이 됩니다.
"경배하는 자" 경배하는 자는 이제 당신만이, 당신만이라. 아무것도 없어.
하늘에서도 주 외에는 아무도 없고 땅에서도 아무도 없다. 주님외에 아무것도 없다. 주님 한 분이면 다다. 이분을 깨닫고 , 이분을 소망하면서, 이분만 섬기는 것이 그것이 경배 생활입니다.
주님 한 분으로서 자기의 전부를 삼고 자기의 전부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전부가 되고 모든 것이 그분에게 나왔고 그분은 모든 것의 전부의 전부요.
이것을 소망하면서 그분만 바라보고 섬기는 것이, 그것이 경배 생활입니다.
이것도 할라 하면은 우상 많은 걸 알 수 있어. 이것도 이 생활 할라 하면 우상 많은 걸 알아. 이 경배 생활 할라 할 떄에 우상을 압니다. 이 경배 생활을 하지 안하는 사람은 우상을 모릅니다. 제가 우상인 것을 모르요. 제 지식이 우상, 제 지능이 우상, 제 열심이 우상, 제 꾀가 우상, 제 수단이 우상, 제 활동이 우상, 제 젊음이 우상, 제 힘이 우상, 꽉 찼소! 이게 들어서 다 하나님의 뜻을 다 가로막고 망쳐지는 것입니다. 이런 유혹을 우리가 받지 안하면 증인도 되고, 감람나무도 되고, 촛대도 되고, 권능도 있어서 인간이 제일 좋다는 요것 아니면 못 살겠다는 그것이 그 사람을 죽이는데, 요 사람은 돈이 제일이다 돈만 있으면 된다 하는데 그 돈을 딱 죽여서 피가 되도록, 알겠습니까? 제가 이것만 있으면 된다 하는 그것이 자기를 망치는 것이 되어지도록 그렇게 훼딱 뒤비쳐서 인간이 거게서 돌아올 수 있도록, 회개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물을 피되게 하는 것입니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엘리야가 기도한 것처럼, 엘리야 기도는 모든 바알신의 우상 숭배로 전국이 뒤벼진 것을 그것을 자기의 기도하는 그 기도로 인해서 원수 사백오십 명을 기손강가에서 다 무찔러, 저거 손으로 죽였어. 저거 손으로 다 죽여버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다시 복구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 제단 경배 생활이 이루어지는 데에 거게서 척량을 받습니다. 거게서 틀렸다 옳다, 너무 이리 치우쳤다 저리 치우쳤다, 이것이 없다 반쪼가리다, 너는 구비치 못하다, 척량을 받아서 점점 온전함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고 그럴 때에 자기는 증인도 촛대도 감람나무도 됩니다. 그러면 권위 있는 자가 되어집니다. 그러면 다 증거 마치고 난 마음에는 순교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간섭이 없는 이것을 탄식을 합시다.
왜 틀려도 틀린 줄을 모릅니까? 자기 틀린 것을 왜 모릅니까? 자기 틀린 것이 왜 없습니까? '나는 참 예수 믿는 자가 아니라 이거는 순전히 내가 마귀의 왕이요 마귀다, 순전히 내가 마귀다.' 탄식을 할 때에 마귀의 대적이 되고 벗어나서 성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인 줄 알 때에 그때가 의인입니다.
자기는 전혀 불신자 하는 것을 발견해서 탄식을 할 때에 신앙은 거기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시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쩌든지 우리는 지금, 그만 이 말씀을 가지고 상품을 삼아서 팔아먹는, 말씀 팔아먹는 큰 죄를 우리가 범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팔아먹는 큰 죄.
이러니까 말씀을 들을 때에도 거게서, 성령은 사람을 통해서 건너갔지 직접 건너간 일이 없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성령이 건너간 줄 알아야 됩니다. 문서 가지고 거너가지 안했소. 문서 가지고 건너가지 안했기 때문에 문서 본 그 결과는 나중에 그 사람을 망치는 지식으로 화해지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실은 이 문서라는 것 이거 본인이 알고는 듣지 안한 사람에게는, 듣지 안한 사람에게는 문서 가지고 전할 필요도 없고 듣지 안한 자에게는 녹음에 테이프를 가질 필요가 없다 그거요.
이런데 녹음 떡 틀어 놓고 이제는 '나는 못 들어도 녹음기가 세밀히 듣는다.'그게 녹음기 우상이라. 그 시간 마음은 녹음기에 빼겼어 '보자, 가다가 탈칵하면' 그거 인제 끝이 나야 되니까, 다시 바꿔 끼워야 하지마는 마음은 녹음기에 가 있고 녹음은 제 구주입니다. 이러니까 조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영감은 생각지 아니하고 그 지식만 받을라 하는 사람이기 떄문에 지식에 영감이 가하지 안하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교만의 결과밖에는 내지를 못하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라도 성전 생활, 제단 생활, 경배 생활을 지금부터라도 시작하면 간섭이 있습니다. 그 간섭이 없으면 평안한 줄 알아도 간섭이 없는 자에게는 마지막에 목마름이 옵니다. 간섭이 없으면 목마름이 오요. 간섭 있는 그 간섭으로서 목이 말라 또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를 하신다" 고 위로가 오고, 배고픈 자에게 배부름을 줍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다 간섭이오. 그게 다 척량이오. 척량 없으면 안됩니다.
이세가지가 될라고 표준을 하고서 애를 쓰면 척량이라 하는 것이 시간 시간마다 계속해서, 뭐 일 분도 떠남이 없이 계속해서 한 사건 사건마다 척량이 올 것이라 그말이요. 틀렸다는 사실이 밟혀져 오는 척량이 자기에게 올 것이라. 하나님의 간섭이 올 것이라, 하나님의 관리가 올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