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유채꽃밭과 거지 악사
깊이는 없으나 폭은 넓디넓은 알룽창포강변 길을 따라 달리는 버스의 창문 너머로 제법 너른 보리밭과 유채꽃밭과 흙집이 모여 있는 마을도 보였다. 강폭이 좁아지고 산곡 아래에 계단식 경작지가 보이고, 언덕 위에는 새로 지은 금빛 지붕의 절도 있다. 하얀 구름이 떠가는 새파란 하늘 아래에는 융단처럼 이끼풀이 깔린 산봉우리들이 있고 멀리 설봉이 희끗희끗 순결한 얼굴을 드러냈다. 달리던 버스가 마을 앞 밭두렁 가에 멈추어 섰다.
간밤에 내린 감로수 같은 비가 땅의 갈증을 촉촉이 적셨다. 풀잎이나 청보리 잎맥에도 아침 햇빛을 받아 영롱히 반짝이는 이슬이 맺혔다. 보리밭 고랑과 밭둑 사이로 참새들이 짝을 지어 포롱포롱 날개짓을 하고 날아다닌다. 흙냄새를 맡으며 우리들은 살가운 청보리 이삭들을 쓰다듬었다. 보리밭에서 노소가 얼싸 안고 웃기도 하고, 어깨동무를 하고 밭둑에서 한 줄로 서서 사진도 촬영했다. 작은 수박이 조롱조롱 달린 수박밭도 있다. 천지간에 생명력이 충일한 계절의 한가운데에 우리가 서 있었다. 자동차의 매연과 시멘트와 온갖 골치 아픈 현실이 사람의 몸을 달아오르게 하는 문명이란 이름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살다 온 우리는 그 맑고 깨끗한 공기와 풍경 속에서 주체하지 못할 즐거움에 빠지고 만 것이다.
나는 일행에서 벗어나 고산증의 숨 가쁨도 무릅쓰고 샛노랗게 일렁이는 유채꽃밭으로 걸어갔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버스에서 내려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싯누런 황토물이 노도를 일으키며 흘러내리고, 언덕에는 돌투성이였다. 하지만 하늘은 말로 다하지 못하리만큼 새파랗고 백운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계곡 건너편 산기슭에 하얀 집들이 보인다. 공기가 투명하고 햇살이 반짝이며 한 그루 나무도 보이지 않아 깨끗하기까지 한 황량한 산들과 무욕의 청정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는 이곳에서 보는 유채꽃밭은 현기증이 일어나게 할 만치 사람을 그 아름다움에 취하게 하였다. 내 마음에 평화로움의 물결이 한량없이 물결쳤다. 눈앞에 가득 펼쳐진 이 사랑스런 꽃물결 앞에서 나는 행복감으로 포만하였다. 아니 너무나도 살갑고 포근한 그 정경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번 티벹 여행에서 내가 얻은 행복감의 극치였다.
오래 머물고 싶은 그 시공간을 떠나 다시 차는 험악한 산곡의 위태로운 길을 꼬불꼬불 돌아서 달렸다. 잠시 선 버스에서 내려 계곡 밑으로 굽어보았다. 망태기를 어깨에 둘러맨 여인이 어린 딸을 데리고 강물 위의 벼랑 사이로 양들을 몰고 갔다. 양들을 풀을 뜯기며 손에는 양털 뭉치에서 실을 잣는 가락바퀴를 부지런히 돌린다. 협곡을 빠져 나오자 다시 강폭은 넓어지고 계곡도 품이 제법 넉넉해졌다. 주변에 마을들이 보였다. 다시 버스가 쉬어가고 우리는 길가의 너른 돌밭에서 쉬었다. 강 건너편에는 멀리 설산이 선명히 다가서고 그 아래 산 아래 계곡의 선상지에는 숲에 싸인 마을이 있고 그 아래 다락밭에는 샛노란 유채꽃밭이 수채화처럼 그려져 있다. 발아래에는 토실한 줄기에 노랑꽃을 피운 들풀이 앙증스런 미소를 띠고 있었다.
버스는 새로 집을 짓는 마을들을 지나고, 양떼를 몰고 가는 사람들 곁으로 달렸다. 아무리 보아도 인상적인 것은 티베트 건축의 문이었다. 티벳인들이 얼머나 삶을 아름답고도 고귀하게 단장할 줄 아는지 문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최근에 옛집을 허물고 중국 정부의 정착금을 지원 받아서 주택을 새로이 돌이나 벽돌로 흙대신 짓고 있는 집들을 많이 보았지만, 집집마다 대문이나 창문에는 예외없이 섬세한 조각에 아름다운 색상을 채색하여 꾸미고 있었다. 그것은 척박한 자연 환경 속에서 이들이 얼마나 불교 문명을 통해 삶을 미적으로 고양시키고 사는 가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었다.
한참을 달린 강은 다시 넓어지고 마을을 품고 산굽이를 감아 돌았다. 강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이 야크 가죽으로 만든 떼를 타고 노를 젓고 있었다. 가로수가 나오고 길가에 새로 지은 가게들이 즐비하게 나오는 곳으로 버스가 진입하였다. 그곳은 대하를 이룬 도도한 강물이 굽어 도는 곳에 자리 잡았다고 지명이 취스이현(曲水縣)이었다.
점심을 먹으려고 길가의 설산반점(雪山飯店)으로 들어갔다. 벌써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빈 자리에 앉고 푸짐한 중국 음식이 나왔다. 그런데 어디서 현악기 소리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새까만 얼굴에 땋은 머리를 하고 옷이 남루한 티베트인 악사였다. 이바디가 드러날 정도로 입이 큰 얼굴을 한 그는 점심을 먹는 중국인들 옆에 다가가 노래를 부르며 푼돈을 구걸하고 있었다.
밥 먹다 말고 나는 그곳으로 다가가 그 악사를 크로즈 업해서 카메라에 담았다. 오늘 티벹의 현실을 생생히 전하는 장면인지라 나는 놓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악사의 노래 소리를 녹음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뒤에 보니 토굴당님이 디지털 사진기로 악사의 연주 장면을 녹화했다. 중국인 주인은 영업 방해라고 그 청년 악사를 호통 치며 문밖으로 내쫓았다. 하지만 악사는 노란 모자를 삐뚜루 쓰고는 태연한 얼굴로 능글맞은 웃음까지 지으며 다시 들어와 우리 테이블에 와서 같은 노래를 연주했다. 새로 만든 악기는 분명 마을의 축제 때 쓰는 것이었다. 이 청년이 부르는 티벹 민요의 가사를 알아듣지는 못해도 티벹의 새파란 하늘만큼이나 투명하고 높은 목청의 선율이 경쾌한 리듬을 타고 더 없이 아름다이 흘러나왔다. 나는 지갑을 열어 그에게 몇 푼의 돈을 건네며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눈짓으로 한 곡을 더 청해 들었다. 그도 고마운 표정을 지으며 초원의 정경이 그려지는 그런 노래를 온 몸에서 뽑아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우리들 누구나 짐작할 수가 있었다. 나라를 잃고 가족이 죽고 늙은 부모를 모시며 어린 것들 배를 굶기지 않으려고 비파를 들고 길거리로 내몰린 뵈릭(티벹민족)의 초상인 것을. 점심을 먹고 문밖에 나오니 낡은 그 악기, 말머리 비파(馬頭絃)를 둘러메고 푼돈을 구걸하는 또 다른 거리의 악사가 이집 저집을 전전하고 있었다. 고풍스럽고 낡은 악기처럼 뵈 민족의 처연한 역사가 청아한 음성의 노랫소리에 굽이굽이 배여 있었다. 라사의 박물관에 박제가 되어 전시되어 있던 그 비파가 이제는 구걸하는 길거리 악사의 어깨에 걸려 있는 모습이란 차마 볼 수가 없는 풍경이었다. 서글픈 그 악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가슴에는 일본 제국주의에게 조국을 빼앗긴 시대에 살았던 만해 스님의 시 한 머리가 문득 떠올랐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님의 침묵>>, 1926)
-2007년 여름에 순례한 티벹여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