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0일
말씀 : 겔36:27-28
제목 : 새롭게 창조된 삶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의 의지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증거하셔야 한다는 말씀을 계속해서 드리고 있습니다. 중생도 성령의 증거와 창조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요즘 선거철입니다. 어떤 분이 인천에서 선거유세를 하기 위해 식당에 들어갔는데 상대편 지지자들이 ‘왜 식당에 들어오냐 밥맛 떨어지게’라고 말하는 것을 TV를 통해 본적이 있습니다. 카테고리 속에 갇혀 있는 모습들입니다. 스마트폰을 통해 보수성향의 유튜브 영상을 보면 계속 보수성향의 영상만, 진보성향의 영상을 보면 계속 진보성향의 영상만 나옵니다. 대통령을 두고 평가할 때도 완전히 극과 극입니다. 한쪽은 너무 잘한다고, 대통령이 되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말하고 다른 쪽은 너무 못한다고,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이 바뀔까요? 잘 안 바뀝니다. 설명을 하고, 증거를 제시하고, 법원 판결이 났는데도 안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이 있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런 설명을 드리는 이유는 십자가와 부활을 받아들이려면 성령을 통해 성품이 새롭게 창조되는 역사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굳은 마음, 돌 같은 마음을 성령의 새로운 창조를 통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의 ‘내 영’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자의적인 능력으로 해석하거나, 판단하거나, 깨달을 수 없으며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아무리 강조하고 반복해서 전해도 들을 수 없고, 아무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여줘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불순종의 영이 역사하고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즉 ‘중생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말씀을 깨닫느냐, 깨닫지 못하느냐’와 일치합니다. 약2:17-18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중생했다, 거듭났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불의와 함께 살아간다면 중생을 얻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물론 거듭남의 여부는 우리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며 권한입니다.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직 분별력을 가질 정도로 성장하지 못하신 분들도 있고, 늘 연약하여 넘어지는 성도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구원받은 자들은 죄를 싫어합니다.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씁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성령을 통해 말씀이 임할 때 자신에게 비추어 회개함으로 정결한 삶을 살지 못하면서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중생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우리 주위를 보면 거듭났다고 말하면서 기독교인으로 어느 정도 인정받는 사람들조차 거짓과 위선과 악을 도모하는 것을 즐기는 모습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중생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나라의 영역에서 살지 못하고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믿음의 탈을 쓰고 존재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 말씀에 따른 순종, 성령, 중생, 새 언약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후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그러므로 만일 우리에게 믿음이 있고 우리 마음에 성령께서 계신다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원수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새 언약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즉,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우리의 양심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진리를 바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계획과 은혜는 명확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의 본성을 변화시키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중생의 연속성은 바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에 근거합니다. 구원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성화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우리를 간섭하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을 늘 고백할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엡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베푸시는 섭리의 신비의 장엄함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영원히 연구하고 아무리 찾아봐도 모든 진리를 다 밝힐 수 없습니다. 혹시 발견한다 하더라도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 광활하고 거대한 섭리는 인간의 노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완벽하게 그분의 계획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새벽기도 때 여호수아를 함께 나누면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부분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완벽한지를 보여주는 내용들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시대적 상황으로 보면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세계사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노예들이 해방을 받아 다른 나라의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 말고 이런 일을 경험한 민족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노예들이 군대가 있습니까? 무기가 있습니까? 힘이 있습니까? 돈이 있습니까? 가능한 일이 아님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모든 것이 아브라함을 통해 언약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세밀하게 이루어지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거나 그분의 계획을 실현하실 때 우리의 의지를 침범하지 않으십니다. 자유롭게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심령들에게 강요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스스로 복종하게 하십니다.
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고와 합리성과 지식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참으로 심오한 섭리를 펼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우리를 새로운 성품으로 변화시켜 그분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가를 우리는 확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고 부패한 마음을 새롭게 하십니다. 불순종과 반역의 마음을 새롭게 창조하셔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되신다’는 고백을 이루어내십니다.
더불어 새롭게 창조된 자들은 영적인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새로운 정신’ 즉 ‘새로운 내적 성향’을 드러내어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분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새로운 정신, 새로운 내적 성향’을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예화 하나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미국 하버드대 MBA를 나온 금융가가 조그만 해안가로 휴가를 갔는데 마침 한 어부가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가더니 2시간 만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금융가가 “왜 벌써 돌아왔습니까?”라고 묻자 그 어부는 “나는 20마리면 됩니다. 애들하고 놀고, 아내와 음식 차려서 먹고, 낮잠 자고, 저녁에는 식당에 가서 차 한 잔 마시고, 기타 치면서 놀려고 일찍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어부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금융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8시간 일하면 약 200마리 정도 잡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팔아 돈을 모아서 큰 배를 구입한 후 고기를 많이 잡아서 당신의 좋은 기술로 통조림 회사를 차리고 전 세계로 수출하세요. 그러고 나서 주식을 팔아 백만장자가 된 후 다시 돌아와서 행복하게 살 수도 있도록 내가 코치해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20마리만 잡고 옵니까?” 이 말은 들은 어부가 물었습니다. “내가 당신 말대로 했을 때 다시 돌아올 때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이 물음에 금융가는 ‘약 30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답했고, 어부는 “내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데 뭐하러 30년 동안 고생을 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즉 이 어부는 돈이 행복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마음, 새로운 성향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 판단, 해석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심했을 때 우리를 변화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성령님께서 내주하시고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며 함께하시는 것은 우리 안에 시작하신 사역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을 보면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겠다.’ 이것은 중생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영이 들어오면 그분을 향하여 내적 성향도 새롭게 바뀝니다. 즉 새로운 정신, 새로운 성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겠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새로운 본성으로 바꾸십니다. 그 결과 성도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체험하는 복된 은혜입니다.
‘내 영을 너희 속에 두겠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면서 그분의 율례를 지키며 행하도록 가르치시고, 독려하시며, 능력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 단계는 분명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놀라운 확신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을 미워했고, 허물과 죄로 죽었으며, 진리를 거부하고 의를 적대시하는 존재였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거나 죄의 권세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능력이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후, 즉 죄가 이 땅에 들어온 이후 우리는 하나님 없이, 그 어떤 희망도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현주소를 바꿔 놓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아니면 불가능하기에 그분이 아니면 우리는 죽은 존재입니다. 문제는 이 사실을 알고 인식하고 있느냐인데 이런 사실을 증명하고 고발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계획을 세워놓고 계셨습니다. 그 계획은 아담의 범죄 때문에 취소되지 않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계속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활짝 여셨다는 것은 성령을 통해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나 중생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시고 본성을 변화시키셨다는 말씀을 반복적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정리합시다.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입니까? 늘 불평하고 원망하며 거짓과 위선으로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정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재창조되지 않으면, 즉 중생하지 않으면 이런 삶의 패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령께서 함께하심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서 역사를 이루셔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정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창조하실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강조하는 것처럼 십자가 밑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말씀으로 나와서 그 말씀이 비춰지고, 이를 통해 우리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통회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말씀을 계속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로 나와서 마음 문을 열고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믿어지도록 성령께서 일하심을 깨닫는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회개하며 그 분 앞에 엎드릴 때 변화는 시작됩니다. 한꺼번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계셔서 계속 변화를 이끌어내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내적 사역을 시편 51편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51:10-12 ‘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인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이 죄에서 벗어나 회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첫째, 다윗은 하나님께 정한 마음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굳게 잡고 다시는 이런 죄에 빠지지 않도록 맞서 싸울 수 있는 내적 성향을 구했습니다. 둘째, 다윗은 성령께서 계속 자기 안에 머물면서 다시는 불순종의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거듭나서 중생을 얻었다면 중생의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회심해서 새 마음을 받았다면 하나님을 향한 내적 성향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내적 성향이 새로워지기 위해 전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은 너무나 나약하고 넘어지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여신 새로운 길을 우리가 걸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도우시며 함께하심을 아셔야 합니다. 얼마나 큰 의지를 가지고 함께하시는지는 십자가를 지시는 사랑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축복의 여정으로서의 삶으로 이끄심을 다시 한번 인식하시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이렇게 같은 말씀을 반복해서 드리는 이유는 첫째, 우리의 본성이 변화되지 않고서는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거나 그분의 말씀에 순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원래 선하기 때문에 교육이나 좋은 정책, 또는 환경적 변화를 통해 선하고, 정직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부분들을 고발하면서 본성이 바뀌지 않는 한 절대로 사람 안에서 선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줍니다. 즉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고, 성장하며, 그분의 언약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든지 먼저 기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뜻과 계획과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해야 할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설계하시고 운행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셋째,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우리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복음을 전했다면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대로 전했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전해야 하며, 진리의 빛이 그들에게 비춰져서 그들의 마음을 볼 수 있도록 끊임없이 복음 사역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생명의 기회를 끊임없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넷째,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삶의 설계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분께서 이 땅을 이끄시며 우리의 삶을 주관하십니다.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나가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반복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믿음을 점검해 봅시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은혜와 감사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것을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주시고 감사를 충만히 허락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광이며 축복인데 이런 귀한 신비함을 우리가 얼마나 놓치고 살아가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조금만 불편해도 짜증내고, 조금만 기분이 상해도 원망을 쏟아내며, 조금만 일이 막혀도 태어난 것 자체를 저주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분명 잘못 살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새 마음, 정직한 마음, 정한 마음으로 창조되어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길을 열어놓으시고 감사와 은혜와 영광과 놀라운 신비함을 볼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자들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