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aac Stern
Isaac Stern의 명언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
그를 만난 어떤 사람이
"당신처럼 연주할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
고 말하자 스턴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한 일이 바로 그겁니다."
프로코피에프
바이올린 협주곡 1번
라장조 작품 19
Violin Concerto No.1
in D major, Op.19
프로코피에프는 바이올린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바이올린 협주곡을 2곡이나 작곡했고 이 앨범을 통해서 들을 수 있는
이 두 작품이 모두 발군의 작품으로 오늘 날 많이 연주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프로코피에프의 작곡활동은 크게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 1기는 1904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입학에서 1917년 러시아 혁명까지이고
제2기는 1918년부터 1933년까지의 망명시절,
제3기는 귀국 이후 1953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할 때까지의 약 20년간이다.
프로코피에프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제1번이 1917년, 제2번이 1935년 즉,
제1번이 20대의 혈기왕성한 청년 시대 작품인 데 반해,
제2번은 40대 중반 무렵의 작품이며 두 작품 사이에 프로코피에프는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유럽에서 약 20년 가까운 생활을 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역시 20년 차이가 나는
두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도 뚜렷한 양식의 대조를 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프로코피에프 바이올린 협주곡 1번 D장조
프로코피에프는 피아노에 있어서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바이올린은 한번도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남긴 두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모두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두 개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바이올린의 현란한 기교들은
오늘날에도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든다.
프로코피에프는 겨울에 어울린다.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D장조는 알렉산드르 블로끄의 시를 떠올리게 한다.
“…그대의 돛배를 가져와 멀리 떨어진 북극을 항해하라.
얼음으로 된 벽들 속에서-그리고 조용히 잊어라,
그곳에서, 사랑하고 파멸하고 싸웠던 일들…
정열로 가득 찼던 옛 고향땅을 잊어라.
그리고 지쳐버린 영혼을 더딘 추위의 떨림에 길들게 하라.
그곳으로부터 빛이 들이 닥칠 때, 여기서 영혼은 아무 것도 필요치 않도록.”
프로코피에프는 1891년에 태어난 러시아 작곡가이다.
그가 젊었던 시대는 러시아 후기 낭만파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이같은 분위기에 그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젊은 프로코피에프는 곧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았고,
거기에 충분한 힘과 개성을 갖추었다고 판단한 그는
즉각 러시아 낭만파의 전통에 날카로운 반기를 들었다.
그는 ‘무서운 아이’였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인습에 반항하는 반항아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그가 아직 학생이었을 때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러시아 전위 음악인들이 모여
‘현대 음악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역시 전위를 원하는 청중들을 위한 콘서트를 열고 있었다.
프로코피에프는 이같은 현대 예술 운동에 기꺼이 참가했다.
그리고 그의 초기의 작품들은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독특한 색채를 지니게 되었다.
정신이 번쩍 날 만큼의 날카로움, 악기의 타악기적인 쓰임.
사람을 압도하는 기교, 그리고 짜릿한 화성 표현 등
그의 작품은 당시 큰 파문을 일으킬 만했다.
20대의 프로코피에프를 두고 사람들은 그의 혁신적인 재능에 감탄하며,
스트라빈스키와 함께 앞으로 신선한 놀라움을 줄 것이라고 예감했다.
프로코피에프는 피아노에 있어서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바이올린은 한번도 정식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남긴 두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모두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두 개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바이올린의 현란한 기교들은
오늘날에도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든다.
네 개의 기본선을 주축으로 한 균형적인 작품
바이올린 협주곡 제 1번 D장조는 그가 20대 청년이었을 때 쓴 곡으로
‘무서운 아이’라 불리던 젊은 작곡가답게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당시 ‘그로테스크’하다고 평가되었던 이 작품은 오늘날 더 이상 그로테스크하지 않다.
오히려 신선하고 서정적이며 매력이 넘치는 훌륭한 작품이다.
프로코피에프는 이 협주곡에 ‘작품 발전에 네 개의 기본선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고전적인 선, 현대적 경향, 토카타와 서정적인 선이다.
그의 말대로 이 바이올린 협주곡엔 이 네 가지로 압축될 수 있는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의 특징들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그래서 고전적이면서 현대적이고, 논리적이며 엄격한 토카타풍의
화성 진행을 보이고 있는데다가, 서정적인 선율까지 갖춘 지극히 균형잡힌 작품이다.
이 곡은 1917년에 작곡되었지만 그후 6년 동안 발표되지 않았다.
이 작품이 완성된 직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고
‘러시아는 당분간 음악이 필요없다’고 판단한 프로코피에프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처음엔 몇 달 안에 귀국할 계획이었지만 결국 1933년까지 그는 고국을 떠나 있게 되었다.
그 사이에 이 곡은 1923년 10월 파리의 쿠세비츠키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는데,
당시 평론가들은 둘로 갈라져 이 곡을 극찬하기도, 악의 있는 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 이 작품에 반한 헝가리 출신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인
요제프 시게티가 이 곡을 세계 각지에서 연주하게 되자 사람들의 반응 또한 달라졌다.
프로코피에프는 시게티를 ‘내 협주곡의 최고의 이해자’라 했고,
이 곡을 매개로 두 사람은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지쳐버린 영혼을 더딘 추위의 떨림에 길들게’ 하는 듯한,
‘멀리 북극을 항해하는’ 듯한 프로코피에프의 바이올린 선율로 한 해를 마무리함이 어떨는지.
글 · 박진영(음악평론가, 김포대 교수)
Isaac Stern
아이작 스턴은 유태계의 바이올리니스트로 1920년 생인데,
지난 2001년에 81세를 일기로 영면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생후 10달이 되던 해에
미국의 샌 프란시스코로 이민했고,
1928년 San Francisco Conservatory of Music에 입학했습니다.
15세이던 1936년에 본격적인 음악 데뷔를 한 이래,
많은 음반을 냈습니다.
특히 그는 많은 젊은 음악도를 찾아낸 것으로 유명한데,
그 중에는 첼리스트인 요요마와 지안 왱, 그리고 바이얼리니스트인
이츠학 펄맨과 핑커스 주커만이 있습니다.
그는 1960년에 거의 망가져 가는 뉴욕시의 카네기 홀을 살리자는
캠페인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그 후 카네기홀의 대강당이
그의 이름으로 헌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브람스, 바흐, 베토벤, 멘델스존,
그리고 비발디와 같은 고전들을 녹음했고,
또 바버, 바르톡, 스트라빈스키, 그리고 번스타인 같은
음악가들의 근대 작품들도 녹음을 했습니다.
그가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에서
대리 연주를 한 것도 아주 잘 알려진 일입니다.
스턴은 1946년에 떠오르는 바이올리니스트에 관한 존 가필드와
조앤 크로포드가 주연한 영화 유머레스크의 음악 고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스턴의 바이올린은 매우 유명한 것으로서 과르넬리입니다.
( Ysaye Guarneri del Gesu)
1979년, 닉슨의 중국 방문 후 스턴은 중국을 방문한 미국 최초의 음악인이 되었고,
그것은 “모택동으로부터 모차르트까지”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 부문의
오스카상을 받은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1987년에 그는 그래미상 평생 공로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미국 최초의 바이올린 명인』과
『금세기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불린
특별한 음악가...
이 모든 명칭에도 자신을 그냥
바이올린 연주자로 주장한 사람...
아이작 스턴은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이며
가장 명예로운 음악가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과 다른 나라에서 주로
예술을 후원하여 『국제적인 문화사절』로 유명합니다
1968년 이스라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텔 아비브 필하모니 합창단과
이스라엘에서 함께 한 공연은 『예루살렘으로 여행』이란
인기 다큐멘터리로 녹화되었습니다.
가장 성공적인 해외 나들이는
1979년 『중국에 간 아이작 스턴, 마오에서 모차르트까지』
다큐로 제작되어 1981년 아카데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습니다.
아이작 스턴은 미국에서 자신의 활동과 헌신으로 많은 상을 탔는데
그에게 수여된 영예로 『음악에 헌신하고 인류에게 바친 일생』으로
1974년 알버트 슈바이쳐 상을 탔으며 1984년 케네디센터 영예상
1987년 에미상 그래미상 평생 공로상을 탔고
1992년 조지 부시대통령에게 자유훈장을 수상했습니다.
.
다른 국가에서는 1985년 덴마크의 단네브로 십자공로훈장,
1987년 이스라엘 울프상 1990년 프랑스에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스턴은 전세계의 콘서트에서 주요 오케스트라와 실내악단과
60년 이상 공연했고 영화까지도 활동했습니다.
1946년 영화 『소야곡』에서
존 가필드는 바이올린 연주자로
스턴의 연주를 더빙해 연기했고
1953년 뮤지컬 『오늘밤 노래해요』에서 스턴은
외젠느 이자이역을 했는데
또한 오스카상을 수상한『지붕 위의 바이올린』 음악에서도
바이올린 독주를 했습니다.
다재 다능한 공연으로 스턴은
음악사에서 가장 많이 녹음한 음악가에 속합니다
63명의 작곡가와 2백 여 작품을 백 회 이상 녹음.
일부 동시대 작곡가들은
그를 위한 특별한 작품을 썼는데
1950년 윌리엄 슈만의 콘체르토
1954년 번스타인의 세레나데
1975년 조지 로쉬버그의 콘체르토
1977년 펜데레츠키의 콘체르토 1번
1985년 뒤띠의 콘체르토
86년 데이비스의 콘체르토가 있다.
아이작 스턴은 1920년 7월 21일 우크라이나에 태어났습니다.
그가 10개월이 되자 부모는 미국으로 이민와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했습니다.
유태인 음악가족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모두 러시아의 유명한
상트 페테르브루크 음악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6살에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친구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은 후 이이작은 악기 연주를 시작했지요.
1928년 어린 아이작은 후원자의 도움으로 샌프란시스코 음악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
칼 플레쉬 기법을 가르치는 바이올린 연주자
나옴 블라인더에게 배웠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 제1 바이올린 연주자
블라인더에 대해 아이작이 말했죠.
『그는 교사로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인 스스로 배우는 법을 가르쳤지요』
16살에 스턴은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했습니다.
다음해인 17살에 뉴욕시에서 공연하여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스턴은 시민으로 음악사의 보존가치를 이해했습니다
1960년 그는 1891년 건립된 유명한 음악 콘서트장인
훌륭한 카네기 홀을 파괴하는 행위를 막았고
그 후 카네기 홀의 첫 대표로 선출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직위를 유지했습니다.
카네기 홀을 구하는 과정은
1987년 에미상 수상 다큐멘터리
『카네기 홀의 위대한 재개관』에서
스턴씨를 TV 사회자로 모시고 진행됐습니다
아이작 스턴이 말했습니다
『무언가를 믿을 때 산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열 살이 되던 어느 날, 갑자기 바이올린으로 아무도
가르치지 않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활을 새로운 방식으로 움직이고 현 위에 손가락을 느끼며
소리가 다르게 되었지요.
갑자기 그것을 알게 된 것을 믿을 수 없었어요.
제 생각에는 경험이 축적되며 갑자기 스스로 깨어나면서
자신만의 연주를 하게 되었지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ㅡ『나의 79년『, 아이작 스턴 저ㅡ
아이작 스턴은 다른 음악가와 작곡가의 교사이며 상담자였지요.
아이작이 자신의 이전 학생이던
유명한 첼로연주자 요요마와 가진 대화입니다.
아:나는 재능을 좋아해요
요:항상 좋아하셨어요
아:항상 관심이 있어요 아이들에게 기대가 크며 거기서 가장 기쁨을 얻어요.
자신이 유용하며 필요한 존재 같지요. 가장 멋진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주는 위대한 선물은 배우는 법을 가르치는 겁니다.
스턴이 중국의 어린 음악가와 가진 대화
아주 재능 있는 소녀이군요.
이런 연주에서 대부분은 손의 힘을 주로 집게 손가락에 주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그러나 이걸 생각하면 힘은 퍼지며
이 손가락이 중심이 돼요. 이 손가락으론 소리가 나지 않아요.
그런데 그걸 펴면 그림 붓과 같이 됩니다.
ㅡ『마오에서 모차르트까지』 다큐멘터리ㅡ
아이작 스턴은 영감을 주는 교사로서 유명한 음악가인 바이올린 연주가
이작 펄만 핀차스 주커만 지휘자 주빈 메타 첼로 연주가 요요마의 스승이죠.
스턴이 자신의 교육철학을 간단히 말합니다
『자신처럼 느끼거나 생각하도록 강요할 수 없지요.
그러다 더 좋게, 더 많이 생각하도록 가르칠 순 있어요.
비평적으로 듣는 법을요.
원하는 소리가 아닌 정말 자신의 연주를 듣는 것이지요.
연주가와 작곡가에 필요한 내적, 외적인 교감을 더욱 존중하는 겁니다』
음악은 무엇일까요?
악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결과에 이르는 도구일 뿐입니다.
즉 음악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지 않고
바이올린으로 음악을 연주합니다.
2001년 마지막 순간까지 베풀고 연주하고 가르치는 마음을 가졌지요.
스턴은 마지막 십 년의 여생을 카네기 홀의 대표로서 활동에
대부분 시간과 관심을 보였습니다. 정부에 예술과 교육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고
음악적 재능을 가진 아동을 찾았습니다. 아이작 스턴의 음악과 국가간의 교량역할은
많은 이를 감동시켰지요. 신께서 주신 능력으로 조화와 사랑의 음악을
바이올린으로 연주한 그는 오랫동안 기억될 겁니다.
ㅡ수프림 마스터 TV
현재 스트라디바리가 제작한 바이올린을 소장하면서
연주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로는 피에르 아모얄(1717년 코찬스키),
알프레도 캄폴리(1700년 드라고네티), 지노 프란체스스카디(1727년 하트),
아르투르 그뤼미요(1727년 거인), 야사 하이페츠(1731년),
프리츠 크라이슬러(1734년), 기돈 크레머(1734년),
예후디 메뉴인(1714년 소일), 이차크 펄만, 헨릭 셰링, 요제프 수크 등이 있다.
자크 티보가 베리오에게 물려받아 소장하고 있던 1709년산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은 교통사고로 티보와 함께 운명을 달리 했다.
한편 유진 이자이에게는 아이작 스턴에게 물려준 과르네리 말고도,
1732년 제작의 스트라디바리 헤라클레스가 있었는데,
1909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도난당한 이후 영영 못찾고 있다.
스트라디바리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도 영원한 명기로 남아있는 것은
그 제작기술이 신비에 싸인채 전수되지 않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스트라디바리를 오늘날 재현하려는 노력은 많았으나 대부분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최근, 현악기 최고의 명품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의 비밀은
나무좀벌레를 막아주는 특수 약품 처리에 있었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과학 전문지 네이처를 인용,30일 보도했다.
미국 텍사스A&M대학 조지프 나지바리 박사 연구팀은 스트라디바리가
1717년에 제작한 바이올린과 첼로,과르네리 델 제수가
1741년에 만든 바이올린 등을 적외선 분광기와 핵자기공명장치를
이용해 분석했다. 실제 분석에는 수리를 위해 맡겨진 악기들의
부스러기가 사용됐다.
나자바리 교수는 “당시 악기 제작에 사용된 목재들은 산화 광물질이
포함된 액체에 삶겨진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이는 좀벌레를 죽이고 곰팡이의 성장을 막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 말했다. 그는
“이런 처리로 인해 스트라디바리가 부드럽고 감미로운 음색을 갖게 됐으며
저음에서도 귀에 거슬리는 껄끄러운 소리를 막을 수 있게 됐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나지바리 교수는
“산화 광물질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추가 연구를 위해 악기의 목재 샘플이 필요하지만 악기 주인들이
내주기를 꺼리고 있다”며
“음색의 비밀이 완전히 밝혀지는 것을 원치 않는 모양”이라고 덧붙였다.
Guarneri
과르네리 (Guarneri) 는 17세기~ 18세기
이탈리아 크레모나 지역 출신의
현악기제작으로 유명한 가문의 이름이다.
과르네리는 종종 현악기의 장인으로 알려진 가문인
스트라디바리와 아마티와 비교되곤 한다.
과르네리 가문에서 처음으로 현악기를 제조하기 시작한
1650년대에는 당시 가문의 안드레아 과르네리가
아마티 공방의 견습생 이었던 터라 주로 아마티의 방식을 따랐지만,
이후에는 과르네리 고유의 양식을 발전시켜
독립된 장인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대대로 이어 만들어온 과르네리 중에서도
흔히 말하는 과르네리 델 제수 (del Gesù) 는
안드레아 과르네리의 손주인 바르톨로메오 주세페 과르네리가 만든 악기로
스트라디바리와 함께 현존하는 가장 탁월한 바이올린으로 알려져 있다.
과르네리 가문의 전통을 그의 독특한 방식으로 분화시킨
주세페 과르네리는 항상 자신이 만든 악기에
I.H.S. (iota-eta-sigma) 와 십자가를 새겨 넣었는데,
이는 예수를 그리스어로 표기했을 때의 처음의 3자를 로마자화한 것으로,
이 때문에 델 제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대부분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를 함께 연주한다.
델 제수를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는
야샤 하이페츠, 프리츠 크라이슬러, 아이작 스턴,
이자크 펄만, 기돈 크레머, 핀커스 주커만, 장영주 등이 있으며,
바이올린의 명장 니콜로 파가니니가 가장
아끼던 바이올린도 캐논이라는 별명의 델 제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