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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말씀 / 베드로후서 1:19~21
(벧후 1: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벧후 1: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벧후 1:21, 개정)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아멘.
(감사시리즈5) 종교 개혁 주일의 감사
● 할렐루야! 오늘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가 로마가톨릭에 대항하여 종교 개혁을 할 때, 오른팔로 일하던 프레드릭 니코니우스가 있었습니다. 그가 갑자기 병이 들어 소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느낀 니코니우스는 루터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를 받은 루터는 깜짝 놀라. 바로 병석에 누운 친구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친구여, 나는 자네가 더 살 것을 하나님 이름으로 명령하네. 교회를 개혁하는데 자네가 필요하니 주님은 자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나로 하여금 듣도록 하지 않을 걸세. 자네가 살아야 한다는 것은 나의 뜻이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네."
죽음을 앞둔 니코니우스는 루터의 편지 내용을 전해 듣고 다시 소생하게 됩니다.
루터의 확신에 찬 기도와 믿음으로 죽음조차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니코니우스는 6년 동안 루터와 함께 일을 하다가 주님 품으로 갔습니다.
오는 10월 31일은 종교 개혁이 일어난 지 506주년이 됩니다.
교인들에게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고 베드로 대성당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고 다니는 교황청의 비리를 침묵하다 못한 천주교 신부 루터가 로마교황청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일어났던 날이 바로 1517년 10월 31일입니다.
오늘 종교 개혁 기념 주일을 맞으며 루터처럼 건강을 위해서 명령합시다!
“병에서 놓여 깨끗해져라. 예수님의 능력으로 깨끗하라.”
루터처럼 재정을 위해서 명령합시다!
“가난에서 놓여 풍성해지라” “예수님의 능력으로 풍성하라”
루터처럼 한국교회를 위해서 명령합시다!
“눌림에서 놓여 다시 일어나라”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시 일어나라”
이것이 말씀 종교인 개혁주의입니다. 그러나 이제 한국교회는 개혁을 말하기조차 부끄럽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개혁해야 하는데 세상이 우리에게 개혁을 요구하고, 언론이 한국교회를 개혁한다는 부끄러운 시대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종교 개혁의 3대 원리를 되새겨 보면서 남에게 개혁을 요구하기 전에 나, 스스로가 개혁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성경의 절대적 권위(계22:18~19)
종교 개혁의 제1원리는 성경의 최고권위, 최종적 권위입니다.
성경은 권위 중의 권위요, 교리의 최고권위요, 교회의 최종적 권위입니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성경에 대해 어땠기에 루터는 이런 주장을 했을까요?
로마가톨릭은 성경의 권위보다 교회의 권위, 교황의 권위를 우위에 둡니다.
교황은 성경의 권수를 결정할 권한이 있고 성경해석의 결정권을 갖습니다.
어느 정도인가요? 우리 개혁주의 교회는 성경 66권이 정경입니다. 정경에서 한 권도 뺄수도, 더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2장 18, 19절에서 말씀합니다.
(계 22: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계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그러나 로마가톨릭 성경의 운명은 교황에게 달렸습니다.
로마가톨릭 성경은 66권보다 7권이 더 많은 73권으로 정했습니다.
우리는 교리를 정할 때 성경에 있는 것만 믿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가 칼빈은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춘다,” 라고 성경해석의 기준을 정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톨릭은 교황이 교리를 해석하거나 정합니다. 예를 들면,
마리아가 2천 년 동안 무덤에서 잠을 자다가도 1950년 교황이 마리아의 부활과 승천을 선언하니 그게 성경 위에 있습니다. 로마가톨릭은 성경에도 없는 교황제도를 만들어 냈습니다. 베드로를 1대 교황이고 현재 교황 프란치스코는 266대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대답했더니 예수님께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합니다.(마 16:18).
교황청은 이 반석을 베드로라고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1대 교황이 되었습니다.
개혁주의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반석을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봅니다.
그게 맞습니다. 교회라는 이름은 에클레시아, 부름을 받은 무리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이미 교회라는 의미가 신앙고백에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도 교황으로 자처한 적이 없고 열두 사도를 비롯해서 신약의 누구도 교황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결혼해서 아내도 있는데 교황청은 독신이라면서 독신제도를 만들어 냈습니다. *천국에서 가장 곤란한 분이 베드로가 아닌가 싶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 개혁 운동을 할 때 싸운 대상이 둘인데 이성주의와 신비주의입니다. 이성주의는 인간이 세운 공로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것인데 로마가톨릭교회가 바로 이 바탕 위에 서 있었습니다. 신비주의는 신비적 체험에 집착해서 주관적인 신앙을 강조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런 것들에서 교회를 개혁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니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합니다.
(벧후 1: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사사로이 풀지 말라는 것’은 함부로 풀지 말라, 이익을 위해 악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과 이단들은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그 권위를 유린합니다.
이단 교주들이 자신을 메시아라고 하는 일이야 말로 베드로가 경고했던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 이야기입니다.
성경의 권위를 최고권위, 최종적 권위라는 종교 개혁의 후손이라는 우리들이 성경을 얼마나 읽습니까? 정작 성경을 너무 안 읽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으면 성경을 듣고 배우는 일에라도 열심을 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들은 말씀이라도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우리들도 교리적으로는 성경을 최종권위라고 말하지만, 생활은 따라 살지 못합니다. 지식은 있는데 성경보다 감정이 먼저이고, 자아가 더 우위에 있습니다.
때로는 목사의 권위가 성경보다 위에 있습니다.
성경 그대로 살지 않는다면 성경의 최종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 권위, 남편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실행하지 않으면 사실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성도는 성경의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경을 더 많이 읽고 읽은 바대로 지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의 삶이 내 안에서 녹아져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개혁주의의 후손입니다.
2. 이신득의(롬3:22, 엡2:8)
종교 개혁의 제2원리는 이신득의입니다. 한문인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중심적인 교리입니다.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초대교회에 세 가지 잘못된 가르침이 들어왔습니다.
유대인 개종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는 내 행위로 내가 의인이 되고 구원을 얻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행위는 좋은데 동기가 안 좋습니다.
구원을 내 손으로 쟁취하겠다는 행위 구원을 주장한 것이지요.
다음에는 갈라디안 주의입니다. 갈라디아교회에 들어온 변형된 율법주의라고 해서 갈라디안 주의라고 합니다. 갈라디안 주의는 은혜+율법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길은 이루어 놓았지만, 구원성취는 우리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로마교황청은 갈라디안 주의에 뿌리를 내립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인간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면죄부(免罪符)라는 것이 나오고 십자군 전쟁이 생깁니다.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하기 위한 성전(聖戰)에 참여한 자는 모든 죄들을 사해준다는 것입니다.
결국 교황청이 사죄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1대 교황이라는 베드로는 뭐라고 가르칩니까? 벧전 1:18~19절을 읽겠습니다.
(벧전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이런 분명한 가르침에 왜 행실을 덧칠합니까?
사죄권을 독점해야 교황청이 세계 권력을 얻을 수 있고 헌신과 헌금을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은 이런 가르침에 대항해서 목숨을 걸고 싸운 것입니다.
그럼 또 우리 이야기를 합시다.
초대교회에 들어온 또 하나의 사상이 반(反)율법주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행위는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것도 행위가 아니니 행위는 구원 문제에도 별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냥 속죄함을 입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혜로 용서받았습니다.
그런데 용서받은 사람의 행위가 변화되지 않고 은혜를 누리는 사람의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결정적인 약점입니다. 동기는 좋은데 행위가 안 좋습니다.
이런 주제를 다룬 영화가 넷플릿스의 인기작 <오늘>입니다.
자신의 생일날 약혼자를 오토바이 뺑소니 사고로 잃은 다큐멘터리 PD 다혜는 용서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거라는 믿음으로 가해자 소년을 용서했습니다. 1년 후 용서라는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고 다양한 사건의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촬영을 시작합니다.
촬영이 진행될수록 자신이 용서해 준 17살 소년을 떠올리게 되는 다혜. ‘착하게 살고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담담히 촬영을 진행하던 중 우연히 전해 들은 그 소년의 비행에 커다란 충격에 빠집니다. 소년이 더 큰 범죄를 저지르며 더 많은 피해자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해 주지 않고 감옥에 보냈으면 무고한 희생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 속의 다혜는 “용서해 준 것이 죽도록 후회됩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무조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었으면, 그래서 구원받았으면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답게 살아야 하잖아요?
용서받았으니 용서하면서 은혜를 베풀며 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용서받고 구원받았으니 더 악한 죄를 지으며 살아도 괜찮다는 것이 반율법주의자입니다.
율법주의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로마서>이고 갈라디안 주의에 대한 경고가 <갈라디아서>이고 반율법주의에 대한 가르침이 <야고보서>입니다.
우리 개혁 주의교회에 필요한 것이 야고보서입니다. 우리 믿음이 행위로 가야 합니다. 이행득의(以行得義)가 아닌 이행득성(以行得聖)-행위로 성화 된다는 야고보의 말씀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교회가 삽니다.
3. 만인 제사장(벧전2:9)
종교 개혁의 제3원리는 만인 제사장입니다. 만인 제사장은 이제는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직접 기도로 나갈 수 있고 세상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해 사역이 기도이고 전도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가들은 왜 종교 개혁을 일으키면서 만인 제사장을 주장했을까요?
교황청이 성도들은 제사장이 아니라 신부들만 제사장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가르침을 변질시킨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우리 대신에 하나님께 나아가서 죄 사함과 기도를 해주는 신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죄의 휘장, 장벽이 제거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누구나 제사장이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제부터 누구든지 신부에게 고해성사하지 않고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고 죄 사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천주교는 지금도 신부 앞에 고해성사하게 합니다.
사제들만이 제사장이고 사제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최고의 중보자는 마리아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건 아니거든요. 자기들이 말하는 1대 교황이라는 베드로는 2:9에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우리가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이보다 더한 성경적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럼에도 로마교황청은 왜 이렇게 뻔한 것을 갖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할까요? 이유는 그래야 교황청은 만세 반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해성사는 무서운 것입니다.
죄를 고해놓으면 모든 신자들이 교회에 꽉 잡혀서 꼼짝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종교적 천재집단입니다.
그러면 다시 우리 이야기입니다. 만인 제사장을 믿는 우리는 얼마나 기도합니까?
세상을 위해 중보 기도합니까? 제사장은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옷으로 구별하고 신분으로 구별합니다. 그렇게 구별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그래도 뭔가 다른 사람, 자기들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믿는 우리가 믿지 않는 그들보다 차별성이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500여 년 동안 교황청의 권위를 비판하면서 그보다 더 한 권위를 행사하려고 합니다. 뭐가 뭔지 모를 지경입니다. 이제 교회가 개혁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 506년을 맞는 우리는 감사함과 함께 부끄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미국의 월간잡지인 <라이프>지는 1000년~2000년 사이의 천년(밀레니엄)을 만들어 낸 1백 대 사건과 1백 인의 인물을 선정, 발표했습니다.
1백 대 사건 중 1위는 1455년 독일 대장장이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성경을 인쇄한 일이고, 2위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1492년), 3위가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1517년)이 뒤를 잇고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인물로는 전기를 발명해 인류에게 빛을 준 인물 1위 에디슨, 2위 미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3위 종교 개혁의 마르틴 루터 순으로 선정했습니다.
세상도 종교 개혁이 지난 천 년 동안 인류 역사에 미친 공헌을 굉장하게 다루는데 정작 우리 기독교는 종교 개혁의 정신을 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 개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입니다.
종교 개혁을 통해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을 수 있게 하시는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죄성을 지닌 인간은 갈수록 나빠지고 악하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계속 개혁해야 합니다. 종교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개혁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가난해도 행복했는데, 지금은 넘쳐나도 왜 불행합니까?
내가 더 악해졌기 때문입니다. 믿었던 남편이 착했던 아내가 더 나빠졌기 때문입니다.
옛말에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하지 않습니까?
나를 개혁해 나가는 일이 교회개혁이요 우리 사회의 개혁입니다.
내가 바꿔지고 나 하나로 시작되는 개혁, 이것이 진정한 종교 개혁의 시작입니다.
종교 개혁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큰 선물입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믿고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살게 하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음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심을 감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행위로 하나님의 자녀 됨의 삶을 살게 하신 종교 개혁의 진정한 뜻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황이나, 천주교의 신부들만이 제사장이 아니라 우리 모두 스스로 제사장의 신분으로 하나님께 직접 죄를 고하고 기도할 수 있게 하신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개혁주의 교인 됨을 감사하면서 나부터 개혁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기도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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