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몽골 사람들의 식생활
몽골의 식탁은 아무래도 육식이 많이 올라온다. 초원에서 유목민들이 가축을 많이 키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산지대 척박한 땅에 강수량이 절대 부족하며 겨울이 길고 추워 채소를 가꿀 수 없어 반찬은 소박하다. 펄펄 끓는 물에 채소, 해물 등을 넣고 얇게 썬 고기를 살짝 데쳐 양념장에 찍어 먹는 샤브샤브가 인기를 끈다. 음식점에서는 산악지대 초원에서 뛰어놀던 소, 양, 말고기가 3종 세트로 한꺼번에 나와 마음껏 맛보며 즐길 수 있다. 그러나 풀을 먹지 않는 돼지나 닭은 사육을 회피하므로 귀하며 쌀은 만주지방에서, 채소는 러시아에서, 해산물도 바다가 없어 100%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너른 초원에 조금만 온화한 날씨로 강물이 넉넉하게 흐르고 여름이 다소 길었더라면 지금 같은 수천 년 전통의 유목민 생활에서 쉽게 벗어났으며 밭작물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수출국 대열에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강수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초원은 겉보기와는 달리 아주 척박하여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거나 과일나무를 좀처럼 볼 수 없다. 가축을 이끌고 수시로 좋은 풀밭을 찾는 유목민이 될 수밖에 없어 게르라는 간편한 전통가옥이 생겨났고 식생활도 조촐하여 반찬 식탁이기보다 육식 식탁으로 반찬을 추가하는 것을 못마땅히 여기면서 추가 요금을 받기도 한다.
몽골은 기마민족이다. 곳곳에 말을 탄 동상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아마 몽골의 자부심일 것이다. 용맹을 떨치는 남자다운 기상이 나라와 가족을 지키고 떳떳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성인이 되면 국가에서 땅을 배분해 주는데 고비사막 같은 열악한 지역이 많고 지리산 능선 높이의 지형에 지하수조차 얻기 어려워 생존하기 힘겨운 땅이다. ‘붉은 영웅’이라는 뜻의 수도울란바토르에 국민의 절반이 거주해 북적거린다. 하지만 늑대와 사슴을 조상으로 여기며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였다. 욕심을 내려놓고 꿋꿋하게 살아온 몽골 사람들이다. 생활환경이 뒤떨어져 나무 전신주가 능청스럽게 서 있다.
14. 몽골 유목민의 절대적 빈곤
몽골인의 조상은 흉노족(훈족)이다. 산악초원에서 가축과 함께 살아온 부족이다. 우리나라가 전통적인 농업 국가이었다면 몽골은 전통적인 목축업 국가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농업국에서 벗어나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하였는데 몽골은 여전히 유목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절대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소, 말, 양, 염소, 야크와 쌍봉낙타도 있다. 목가적인 풍경으로 신비감에 젖어 든다. 뜬금없이 초원의 오아시스 같은 느낌이다. 끝자락이 보이지 않는 너른 초원에서 말을 타고 유목민이 즐긴다는 양고기 허르헉을 맛본다. 밤에는 별들과 속삭인다. 상상이 아닌 현실로 신바람 난다.
덜컹거리는 도로가 비포장 시골길을 연상하듯 낭만적으로 추억을 들춘다, 고원 초원지대를 지나다 보면 둥글고 하얀 게르가 그림 같다. 초원과 가축과 어우러져 목가적 풍경으로 바꾸어 놓는다. 며칠쯤 푹 묵어가고 싶다. 자연과 좀 더 가까운 곳에서 하룻밤 즐기고 싶다. 저쪽 누렇게 들어오는 곳이 허허로운 사막이다. 초록빛 초원은 생명의 빛이다. 아무리 척박하고 거칠다 해도 사막보다는 초원이 생동감에 꿈이 담겨 흐르고 생명을 길러내며 세상을 함께 열어간다. 풀어놓은 말이 사람을 바라보며 코를 벌름벌름 한참 서성인다. 물론 경주나 군사용 말은 아니어도 생활수단으로 꼭 있어야 할 가축들이다.
몽골의 초원은 아주 척박한 토질에 강수량마저 턱없이 부족하다. 더구나 겨울이 너무 길고 추우며 여름이 짧아 풀이 넉넉하지 못하다. 이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 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를 못하고 끊임없이 좋은 풀밭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부지런하면 가축을 굶기지 않는다는 자긍심이 있기에 불편함을 덜고 견뎌낼 수가 있다. 고산준령의 차디찬 바람에도 칭기즈칸은 꺾이지 않고 깊은 밤 울어대는 늑대처럼 초원을 향해 포효를 토해냈다. 끝 모를 초원에 군데군데 방목한 말이 돌아다닌다. 작은 몸집에 눈빛은 풀을 뜯으면서도 배고픔 같은 그리움이 짙게 배어있다.
15. 독립운동가 이태준은 누구인가
울란바토르에는 한국과 몽골로부터 동시에 추앙을 받아 마땅한 분이 있다. 한국에서는 꼭 필요했던 독립운동가이었고, 몽골에서는 불과 7년여 동안 거주하면서 빈곤과 질병으로 시달림을 받을 때 슈바이처 같은 의사였다. 그러나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머나먼 외국에서 순국하였으며 눈부신 활약에도 불구하고 미처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바로 이태준 선생이다. 대암 이태준(1883~1921) 선생은 경남 함안에서 출생하여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하였다. 대학 시절 안창호 선생을 만났다. 중국 난징으로 망명해 김규식 선생을 만나 1914년에 비밀군관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울란바토르로 이동하였다.
이태준 선생은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개설하여 독립운동 연락거점으로 이용하면서 상해의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운반하였다. 의열단에서 활동하면서 몽골인에게 아낌없이 인술을 베푼 한국인 독립운동가였다. 당시 몽골에 만연하던 전염병을 근대적인 의료기술로 퇴치하여 몽골 사람들로부터 ‘하늘이 내린 신의’라는 칭송까지 받으며 몽골의 마지막 황제였던 ‘복드 칸’의 주치의로 활약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서 1919년에 몽골 정부로부터 1등급의 국가 훈장을 받았다. 독립운동가이며 위대한 의사였던 이태준 선생은 일본군과 내통하던 러시아 백군에 의해 38세의 젊은 나이에 피살 순국하였다.
이태준 선생은 죽어서도 그리운 고향에 돌아가지를 못했다. 2,000km(5천 리) 떨어진 머나먼 이국땅 몽골의 초원에 쓸쓸하게 묻혔다. 뒤늦게 매서운 눈초리에 쫓기며 이태준 선생의 묘소를 수소문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이런 훌륭한 독립운동가가 있는 줄조차 까마득히 몰랐다. 뒤늦게 가까스로 그 혁혁한 공로를 인정하면서 순국 70년이 지난 후인 1990년에 대한민국 정부는 ”우리나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이 크므로 대한민국헌법의 규정에 따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한다.”라고 하였다. 참으로 부끄러우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16.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에서
이태준 선생은 이역만리 울란바토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했다. 비록 짧지만 굵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죽어서도 고향 땅에 돌아가지를 못하고 무명으로 잊힐뻔하다 늦게나마 업적을 기릴 수 있어 천만다행이다. 몽골 정부는 2,000여 평 부지를 제공했다. 연세의료원은 2000년 7월에 기념비 제막식을 하고 이듬해 준공식을 했다. 15평 규모의 기념관엔 안창호에게 보낸 친필 서신, 김규식의 사촌 동생이며 부인인 김은식의 사진, 여운형의 이태준 묘소 방문기, 이태준의 세브란스 의학교 졸업사진과 학적부, 선배이자 안창호의 의형제인 김필순의 사진 등이 진열되어 있다.
중앙 통로 양편에 꽃밭을 만들어 우리의 꽃인 백일홍과 금잔화 그리고 코스모스와 해바라기 등을 심어놓았다. 꽃나무 하나 제대로 보기 힘든 몽골 울란바토르에서는 가히 파격적이라 할 것이다. 가뭄에 물까지 흠씬 뿌려주었다. 꽃은 고사하고 나무도 흔치 않은 이곳 울란바토르에서는 볼 수 없는 진풍경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대단한 조경이다. 아쉬움이야 떨칠 수 없지만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꽃밭을 꾸미고 가꾼 곳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큰 관심이고 큰 대접이다. “감사합니다!” 단 한 마디로 모두를 대신할 수밖에 없으니 부끄러울 뿐이다. 제2의 고향 몽골에서라도 존경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지금은 고국에서 수시로 오가는 관광객, 기업인도 많으며 하루 다르게 발전하는 조국의 소식을 전해 들으며 외로움을 달래고 계시지 싶다. 기념관 앞에서 선생을 처음 뵈옵는 인사를 올리려니 가슴이 뜨거워진다. 새삼스레 우리의 암울했던 일제 만행의 역사가 여기에서 다시 들추어질 줄은 미처 몰랐다. 선조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얼마나 악전고투하며 외롭게 떠돌아야 했는지 새삼 눈시울을 붉히며 떠올리게 한다. 어렵게 얻은 광복이고 독립인데 70년이 훌쩍 넘어도 오로지 ‘탓. 탓, 탓’만 명분으로 앞세우고 끊임없는 싸움질로 나라가 비틀비틀 엉망진창에 곤두박질치는 건 아닌지 면목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