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
#지미페이지
1944년 1월 9일 영원한 전설 레드 제플린의 기타리스트 지미 페이지가 태어났습니다.
이하의 글은 80년대 월간팝송이라는 잡지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지미 페이지는 1944년 영국 미들섹스에서 1월 9일에 태어났다
(본명 James patric page)
그는 학교 시절에는 '좀 많이 외로운 아이'로 통하며 레코드 듣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12살 되던 해에 스페인풍 기타를 처음 손에 잡은 그는 곧 록의 매력에 빠져 기타 연습에 모든 열정을 바쳤다
그러던중 제프 벡의 여동생을 통해 제프를 만나게 된 지미는
정규 기타 레슨 없이도 벡과 손발을 맞출 만큼 기타 솜씨가 일취월장하게 되었다
15살에 기타리스트로 출발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둔 지미는 당시
지방에서는 큰 인기를 얻던 그룹 Neil christian&the crusaders에서
리드 기타리스트로 일자리를 얻었다
제프벡은 당시 크루세이더스와 공연하던 지미 페이지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지미가 너무 깡마른 관계로 그가 잡은 기타는 크게만 보였지요
그건 마치 가느다란 파이프 소제기에 기타를 둘러멘 꼴이었어요"
당시 크루세이더스에서 발휘한 지미의 기타 연주 실력은 소문을 통해
많은 팬들과 연주인들에게 알려졌는데 그중에는 후에 레드제플린의
일원이 된 존 폴 존스(본명 John baldwin)도 있었다
이 팀의 리더인 닐 크리스쳔은 R&B 계통에 끌려, R&B를 그들의 주분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그룹 활동이 그럭저럭 궤도에 올랐을 즈음, 지미는 갑자기 전염성 혈액병에 걸려 그룹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혈액병에 걸린 몸으로는 강행군이 계속되는 그룹 활동을 도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의에 빠진 그는 한동안 집에서 요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지미 페이지는 다니던 예술 학교도 집어치우고 본격적인 프로 연주인의 길로 나섰다
당시 그에게 영향을 끼치던 인물로는 Alexis korner's blues incorporated 출신의 Cyril davies가 있는데 그를 통해 지미는 자유로운 블루스 연주를 처음으로 만끽했다
데이비스 외에도 제프 벡, 에릭 클랩튼과 어울려서 그는 블루스 취향의 연주를 세련되게 갈고 닦을 수 있었다.
그러던중 지미는 프로듀서 Mike leander의 눈에 띄어 세션 연주자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지미는 수많은 정상급 그룹과 가수들의 레코드에서 세션 연주를 해주었다
이런 인기인들의 세션을 해주다보면 그들이 가진 스타 의식 때문에 충돌도 많기 마련이었지만 지미는 묵묵히 자기 연주에만 충실했다
이 무렵 그가 여러 유명인들과 가진 세션 연주는 79년에 james patric page session man이라는 이름의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https://youtu.be/n5xDvA-fjHA
한편 1965년에 지미는 자신의 싱글 She just satisfies를 녹음했다
https://youtu.be/0isgc4EtQZ
하지만 이 싱글은 당시 그가 세션계에서 얻고 있던 신망과는 달리 전혀 반응을 얻지 못했다
1963년에서 1965년까지 2년동안 지미는 가장 잘 팔리는 세션맨으로 활약했으며 세션기타리스트로 일하는 동안 디스토션이나 휘드백 테크닉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이것을 적극적으로 연주 테크닉에 활용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중간 생략)
지미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로듀서 C.L.tarumi를 알 게 된 것도 세션을 통해서였다
시,엘,타루미라면 그 당시 최고의 그룹들을 지휘하는 막강한 프로듀서였다
지미의 역량을 높이 평가한 타루미는 자기가 프로듀서하고 있는 그룹의 레코딩 작업에 지미를 자주 참가시켰다.
세션 업무를 계속해 오던 어느날 지미는 Andrew oldum이라는 사나이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어 하루 아침에 앤드류 올덤이 경영하는 레코드 회사의 레코드 디렉터 겸 프로듀서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지미는 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 되어 자기가 가진 모든 역량을 발휘하여 디렉터이자 프로듀서,플레이어 겸 작곡에까지 손을 댔다
그야말로 지미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점은, 이 당시에 지미가 활약한 일들은 별로 기록이 없고
특히 지미 자신이 그 당시의 일들을 일체 입밖에 내질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위에서는 이 시대를 '지미의 수수께끼 시대'라고 평하고 있다
과거를 돌이켜 봤자 별로 유쾌한 추억도 아니어서 그 당시의 일을 일체 함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지미로 하여금 별로 유쾌하지도 못한 그런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지미의 모든 것 가운데 알려지지 않은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아마도 영원한 수수께끼가 될 것 같다
1965년에 지미는 당시 Yardbirds를 그만 둔 에릭 클랩튼의 후임으로 야드버즈에의 가입을 요청받았다
하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지미가 거절을 하자 제프 벡이 야드버즈에 가입하게 된 것이었다
한편 이즈음 음악유행의 대세는 크게 변해가고 있었다
브라스 세션과 요란한 스트링을 대거 기용한 편곡 경향이 음악업계를 크게 지배하기 시작한 이 경향은 자연히 실험적인 기타 플레이의 길을 막는 결과가 되었고, 지미 페이지도 세션 기타리스트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1966년 6월, 야드버즈의 베이시스트인 Paul samuel smith가 그룹을 탈퇴하자,
그 대신 지미 페이지가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하루 저녁에 결정된 일이었다
이 때 야드버즈는 사무엘 스미스의 탈퇴로 한 팔을 잃은 딱한 처지에 놓여 그 누군가가 있어야만 계속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때 후보선수격으로 기용된 것이 지미 페이지로 처음 그룹 가입조건은 정식 멤버가 아닌 임시 멤버로 언제라도 정식 베이시스트가 결정되면, 그때는 그만 둔다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몇주가 지나도 야드버즈는 새로운 베이스를 구하지 않고 지미 페이지를 정식 베이시스트로 앉혔다
그 뒤 Chris dreja가 베이스를 담당하게 되면서,지미는 다시 기타로 전향하여 제프 벡과 함께 트윈 리드를 담당하여 그룹의 사운드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게 되었다
제프 벡과 지미 페이지는 학교 다닐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학우였다
두 사람은 모두가 기타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고, 서로 기타를 만들기도 하고
개조하기도 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해 온 다정한 친구 사이였다
지미 페이지는 야드버즈와 함께 주로 미국과 구라파로 연주여행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대규모의 콘서트라기 보다는 대학 구내의 연주나 술집에서
연주하는 정도의 경험을 쌓기 위한 연수여행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야드버즈는 꾸준히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다
세계적인 음료인 코카 콜라의 CM에도 출연을 했고 MGM에서 만든 액션영화
에도 특별 출연을 한 적이 있다
https://youtu.be/w9fZ7oydsl4
이 영화에서 제프 벡은 흥분해서 기타를 부수는 커트를 실감있게 해냈고,
야드버즈는 STROLL ON 등 몇 곡을 영화 속에서 연주하였다
이때 연주한 실황을 MGM사에서는 사운드 트랙으로 내놓았는데 별로 많이 팔리지는 않았다
1966년 9월, 야드버즈는 롤링 스톤즈 등 여러 그룹과 영국 연주여행을 했다
이 연주여행에서 야드버즈는 거의 완숙한 그룹이 되었는데, 이 여행을 끝내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제프 벡은 정식으로 그룹을 떠났다
제프 벡이 떠난 것이 야드버즈에게는 큰 타격이긴 했지만,그 후임을 구하진 않았다
남은 4명의 멤버가 똘똘 뭉쳐 4인조 편성의 그룹으로 계속 활동을 했다
https://youtu.be/MnKCEC-xcwc
야드버즈는 미국에서 3장의 히트 싱글 히트를 냈다
Little games와 ten little indians,Ha Ha,said the clown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멤버로 구성된 야드버즈가 내놓은 최후의 싱글은
goodnight sweet 이었다
https://youtu.be/W_SturUfdOI
이 당시 야드버즈의 사운드는 이른 바 싸이키델릭 사운드라 불리우는 것이었고,
지미 페이지는 이미 I'm confused를 연주함에 있어 바이얼린의 활을 사용하고 있었다
극동지방으로 연주여행을 한 뒤, 야드버즈는 대학의 캠퍼스와 그밖에 소규모 공연장에서의 공연을 위해 영국으로 돌아왔다
BBC의 라디오 프로그램인 Top gear에도 출연할 정도로 자리를 굳힌 야드버즈였지만, 그룹의 각 멤버들은 더 이상 그룹활동을 하고 싶어하는 의지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 당시 상황에 대하여 지미 페이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때쯤 야드버즈의 구성원들은 '야드버즈'라는 이름 자체를 부끄러워 하는 것 같았어요
이 이름은 그들의 과거, 즉 싸이키델릭 이전의 시대와 연결된 이름이었으니까요"
야드버즈의 마지막 콘서트는 1968년 7월,루톤 공업대학에 있었다
야드버즈는 실험적인 팝,록 뮤직을 탄생시킨 선구적 역할의 그룹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1983년 3인의 야드버즈 구성원들(jim mccarty,paul samwell smith,chris dreja)은 야드버즈 재결합 공연을 가지면서 제프 벡,에릭 클랩튼,지미 페이지를 초대 기타리스트로 출연시키려 했다하지만 3명중 이 공연에 참가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씁쓰릅한 뒷맛을 남겼다
크리스 드레자는 야드버즈 해산 뒤에도 지미 페이지와 손을 잡고 뉴 야드버즈를 결성할 예정이었으나, 뒤에 그는 마음을 바꾸어 음악과 아주 결별을 하고 상업 사진과 상업 디자인 쪽으로 방향을 돌리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이러한 트레져의 결심은 지미에게 두가지 임무를 부여한 셈이 되는데 그 하나가 야드버즈의 이름을 지미가 계승해야 되며, 그 명예를 살려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미 야드버즈의 이름으로 스칸디나비아의 여러 나라와 연주여행하기로 계약한 책임의 수행이었다
지미 페이지는 야드버즈의 미국 공연시 친해졌던 매니저 Peter grant와 함께
Super hype recording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이 회사를 차림으로써 지미는 지금까지 야드버즈 시대의 프로듀서 Mickey most와 결별하게 되었다
피터 그랜트는 야드버즈 때부터 일을 함께 해 온 다정한 친구이면서
지미에게는 헤어질 수 없는 마음 맞는 동업자였다
지미 페이지가 새로운 그룹을 구상하고 있다는 소식에 접한 존 폴 존스는 재빨리 지미에게 연락을 해서 새 그룹에 참가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 뒤 지미는 Terry reed가 추천하는 로버트 플랜트라는 남자를 만나러 갔다
https://youtu.be/IC6SwzXvyz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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