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신경이란 무엇인가?
사도신경 - 의의
전에 기독교 인터넷 사이트에서 사도신경에 대한 논의가 벌어진 적이 있었다. 나약 신학교 맨하탄 분교의 학장으로 계시는 김진태 박사는 사도 신경을 외우지 않는 교회는 심각한 오류가 있는 교회라는 글을 썼다. 그 글에 대해서 "김 삼 목사"는 사도신경은 카톨릭 교회의 잔재이기 때문에 외우는 교회가 이상한 교회라고 반박을 한 적이 있다. 한 예이기는 하지만 신학생들과 성도들에게도 충분히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짧은 글이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먼저 우리가 외우는 공식적인 사도신경의 전문을 실어보면 다음과 같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 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
Ⅰ. 사도 신경이란 무엇인가?
1. 들어가는 말
사도신경은 신앙고백문입니다. 따라서 사도신경 역사의 틀을 간략하게나마 잡기 위해서는 최초의 신앙고백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최초의 고백이란 바로 마태복음 제16장 16절,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이 신앙고백으로 말미암아 많은 오해가 생겼고, 가장 큰 집단인 카톨릭이 생겼지만 오늘날에도 이 신앙고백은 우리의 신앙의 터전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교회를 세우고 전도를 하며 신앙생활의 본을 보이면서 복음을 전파해 갔습니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 교회는 세계를 향하여 흩어져 나가기 시작했고, 이 때 흩어진 신앙들을 하나로 모으고 그 신앙적 전통을 지켜 나가기 위해 조항을 만든 것이 사도신경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신앙고백을 위해 만든 조항들은 이단들로부터 순수한 신앙을 방어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내용이 첨가되면서 그 모양을 다듬어 나가다가, 서기 404년에 루피누스(Rufinus)가 주석을 펴내면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신앙고백문이 채택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무려 400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의 기독교 역사가 압축된 신앙고백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주 귀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고 긴 세월동안 있었던 논쟁과 알력과 연구의 열매라고 생각할 때에 정말 천천히, 성령의 도움을 요청하면서 단어 하나하나가 우리들의 입에서 흘러나와야 할 것입니다. 마친 빨리 끝내버려야 하는 귀찮은 존재나 예배의 시작을 울리는 종소리로서 대접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빨리 읽어 나가던지 따라할 수 없는 저는 중간토막을 끊어야만 동시에 골인을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사도 신경의 골격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는 한 줄 한 줄을 피를 흘리면서 썼던 혈서라고 생각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대하였으면 합니다. 헨드릭슨은 사도신경을 제법 규모 있는 페이지를 할당하여 주석을 해놓았고, 부흥과 개혁사에서 번역한 마이클 호튼의 책에서도 현대인의 감각에 맞으면서 개혁주의 신앙에 맞게 사도신경을 해석해 놓았습니다. 좋은 참조가 되리라 믿습니다.
그 내용은 삼위 하나님 즉 아버지 하나님 · 예수 하나님 · 성령 하나님에 대한 구체적인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조를 보면 역시 그리스도의 신성, 수난, 부활, 심판 등을 중심으로 짜여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제자들이 고백한 신앙을 기초로 하여 초대 교회에서 신앙의 기본적 내용을 정한 고백문으로서, 민족이나 교파나 교단의 구별 없이 모든 기독교인들이 공통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표준적인 신앙 고백문입니다. 심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이 고백에 맞지 않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역설 같지만, 쟌 맥아더 Jr 가 쓴 Ruthless Faith 에서의 "사도신경은 모든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가?"라는 글에서 말한 대로 이 신앙고백을 한다고 해서 바른 기독교라고 손을 벌려서 환영하는 것도 금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2. 사도신경의 의의
ⓐ. 기독교 복음의 본질적인 진리입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나타낸 신앙의 요약문으로,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 6,000년 역사를 모두 합쳐서 가장 중요한 진리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사도신경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교회는 사도신경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습니다.
올바른 신앙고백이 없다면 그 교회도 올바른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사도신경은 교회를 교묘하게 파괴시키려는 이단의 침투로부터 성도들을 지켜줍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표준적인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 사도신경은 공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사도신경은 어떤 한 사람의 신앙 고백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나 자기중심적인 신앙표현이나 주장이 아니며, 신앙공동체인 교회의 공식적이고 성경적인 신앙고백입니다.
3. 사도신경의 내용
ⓐ.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이 말은 사람과는 다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는 것이며, 온 천지와 모든 생물과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으로서, 이 모든 내용을 그대로 믿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님의 아들이심, 그리고 그가 구세주요 메시야임을 굳게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또한 하나님으로서 사람인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탄생하신 것과, 본디오 빌라도라는 총독에 의해 가장 극악한 죄수들을 사형시킬 때만 사용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믿음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이는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일어난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셔서 무덤 속에 계시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과, 하늘나라로 승천하셔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가 때가 되면 이 땅에 다시 오실 것과, 그 때는 육신으로 초라하게 오셨을 때와는 달리 온 인류를 심판하는 심판주로 오신다는 사실을 믿는 고백입니다.
ⓓ. 성령을 믿사오며,
이는 성령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과 감동하심으로 우리가 신앙을 가질 수 있으며,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여러 은혜와 영적인 은사를 받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거룩한 공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를 믿는다는 뜻이며, 성도들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함께 모여서 교통할 때 믿음을 지키는 힘이 나온다는 것과, 또한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죄를 사면해 주심을 믿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피 흘리시고 죽으신 것을 믿을 때 우리의 죄가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지게 된다는 고백입니다.
ⓕ.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이는 죽음 이후 영혼의 영원함을 믿는 것으로서 언젠가 우리가 죽음을 맞으면 예수님이 신령체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영원한 나라에서 왕이나 제사장처럼 영원토록 살아간다는 사실을 믿는 고백입니다.
사도신경은 진실로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습관에 따라 외우는 주문이 아니라, 온갖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온 믿음의 선인들처럼 우리의 신앙을 바르게 세워주는 강력한 믿음의 고백이어야 하며 아울러 사도신경을 통해 신앙이 회복되고 점검되는 체험이 우리 안에 일어나길 기대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 신경이 우리들의 신앙의 전모를 밝히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유래와 변천과정
사도신경이란 이름이 붙인 것은 권위를 더하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붙인 명칭일 뿐 고백서를 12 사도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은 온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전설은 이렇습니다.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지 전에 12사도가 모여서 우리가 믿고 가르치고 전파해야할 하나님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를 한 분의 사도가 한 가지씩 말해서 모아 보니까 오늘날 우리가 고백하는 신조가 나왔다고 해서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아시는 대로 사도 야고보는 일찍 순교해서 거기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그 외 다른 사도들도 대체로 일찍부터 어려 곳으로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12 사도가 한 자리에서 신조를 만들고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과 거의 같은 형태의 사도 신경이 채택된 것은
ㅡ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ㅡ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
ㅡ431년의 에베소회의,
ㅡ451년의 칼케톤 회의를 거치면서 확정되어 진 것이고
이런 형태의 신앙 고백문이 만들어진 것은 당시의 이단성 규명을 위해서였으며 매회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수정(修訂)되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도 신경을 일컬어 니케아 신경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최초의 종교회의를 참고하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인 아리우스라는 신앙적으로는 상당히 덕목이 있는 사람과 같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리우스 보다는 몇 년 젊은 아다나시우스라는 두 사람의 논쟁에서 출발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에 관한 것이었고 사실 이 문제는 초대교회 이후로 계속 거론되어 왔던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리우스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교에 있어서 많은 신들이 있는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아들 하나님이 별도로 계시다고 하는 두 하나님을 주장하였고 예수는 모든 피조물의 제일 첫째되고 가장 높은 그리스도는 영원한 존재가 아니며, 아버지와 같은 관계이지만 본질이 아니라는 이론이었고 아다나시우스는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 니케아 회의에서는 300명이 넘는 감독들이 참가했고 결국 아리우스를 이단자로 정죄하고 끝냈으나 완전한 논쟁의 종결에는 실패했으며 다시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는 성령의 신성에 관한 신앙적 의결이 첨부되었고 다시 451년의 제 4차 종교회의인 칼케톤 회의에서는 다수의 양성론이 제기되어 정리되었습니다.
교회들이 암송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A.D. 4세기경 라틴어 [Symbolum-Apostolicum]사도들의 상징이란 신조가 바탕이 된 [로마교회 구 신조]에서 형성되어 서방 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하여 보급되었지만 동방 교회(희랍 정교회)에서는 한번도 사도 신경을 공식적인 신앙 고백서로 채택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 그들은 이것과 비슷한 니케아 신조를 그대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사도신경에 그 내용이 찜찜한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지옥에 내려가셨다가"입니다. 이 구절은 한글 사도신경으로 번역되면서 어째 천주교의 연옥 기분이 나고 개운하지 못하다 하여 삭제되었지만 영어 사도신경에는 그대로 남아 있어 가끔 질문을 하곤 합니다. 이 표현대로라면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되어 계셨던 삼일 동안 지옥에 다녀오셨다는 뜻이 됩니다. 성경에도 주님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는 말씀이 있으니까 이것도 교육을 통해서 충분히 바른 의미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전에 이 문제를 가지고 예루살렘 대학에서 사본학으로 Ph.D를 받은 김 경래 박사에게 원어적인 의미를 물어보았습니다. 이 단어는 “preach"의 의미보다는 ”declare"의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맞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옥에 내려가셔서 전도를 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구세주라는 것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선포하신 것으로 넉넉히 해석이 가능합니다.
"거룩한 공회"는 영어의 the Holy Catholic Church (거룩한 공교회)를 번역한 것입니다.
Catholic이란 뜻은 보편적 혹은 세계적인, 우주적인 이라는 뜻으로서 한영 사도신경을 보면 어떤 것은 Catholic이라는 단어를 감추기 위하여 이것을 풀어 Universal로 번역해 놓은 것도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용될 경우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개신교도 catholic church(보편 교회)라고 해서 별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쓰여진 배경을 살펴보면 이러한 보편적인 의미로 쓰여진 것이 아니란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모시고 있던 당시의 카톨릭 교회로서는
땅 위의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유일한 교회가 카톨릭 교회라고 주장하고 이것을 반대하던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던 터였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것을 거룩한 공회로 번역하여 난관을 넘기고 있지만 한영 찬송가 등에서는 여전히 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표현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실제로 '공회'란 표현은 참 애매합니다. 성경에서의 '공회'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로 모인 집단들을 표현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10:17, 마26:59; 눅22:66; 요11:47). 제가 생각하기에는 각교회마다, 신학교마다 이 구절들의 철저한 교육을 통해서 로마 카톨릭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지시키면서 “보편적인 교회 또는 카톨릭 교회”라고 번역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많은 사람들이 사도신경의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모든 세상의 성도들이 서로 영적으로 함께 교제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성도는 믿는 성도들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죽은 카톨릭의 성인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본래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것을 성자숭배의 근거로 삼고 있으며 산자와 죽은 자가 교통하는 교리적 근거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으로 인하여 카톨릭 교인들은 지금까지도 죽은 자들의 이름으로 봉사하고 헌금하기도 합니다.
물론 성경적인 의미의 '성자' 또는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신자들(고전1:2)을 가리키지만, 로마 카톨릭의 '성도'는 죽은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뒤에 특별 심의를 거쳐 서품 되는(복자, 성자) 죽은 자를 지칭하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책망하고 있는 바 강신술을 권장하는 것과 같은 미신에 속한 것입니다.(신18:11; 사8:19-20)
트렌트 회의에서 결의한 교리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성인들이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실제적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오늘날 크리스마스에 싼타크로스에게 선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비슷한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몇 달 전에 과연 크리스마스는 성경적인가라는 글을 짧게 쓴 적이 있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G.I. 윌리암슨이 쓴 소교리 문답( 개혁주의신행협회)를 가르칩니다. 바로 이 저자가 정통장로교회 총회때에 크리스마스를 없애는 운동을 벌였던 분이기도 합니다.
"이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
원래의 사도신경이 이단분별의 기준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사도신경 끝에 이러한 표현이 있는 것은 그들에게는 당연한 논리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사도신경에서 끝 부분에 붙어 있던 이러한 표현을 빼버린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초창기에는 "이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어다" 라는 말로 사도 신경은 끝맺음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런 조항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PCUSA는 포스터가 주장하는 다섯가지 조항에 진심으로 서명하지 않아도 목사안수를 줄 수 있다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 다섯가지 조항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사도신경이다. 이 조항이 매일 외우는 사도신경에서 삭제되지 않았다면 우리 기독교를 위해서는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도 신경이란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사도들이 기록한 것이 아니며,
여러 차례 수정하였고 변형되어 왔습니다.
사실 이 신조가 만들어지게 된 것은 외우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닌 이단의 판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여전히 주일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외웁니다. 그러나 일부의 사람들의 주장처럼 하지 않는 교회는 이단이라고 정죄를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우리가 예배때마다 성경 66권에 나오는 모든 신앙의 교리들을 다 외울 수 없고, 루이스 벌코프의 책을 예배때마다 훓어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사도신경에 명시한 어떤 교리를 인정하지 않거나, 다르게 가르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이런 신조를 믿지 않아도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다는 오번 선언은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도신경해설
1. 예배의 뜻이 무엇입니까?
성경에 있는 '예배'라는 낱말은 '절하다', '섬기다'는 뜻입니다. 예배는 하
나님께 사람이 모든 피조물과 함께 경배하며 영광과 감사를 드리는 의식이요
잔치입니다. 십계명은 예배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으로 우상에게
예배해서는 안되고 오직 당신만을 예배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출애굽기 20:1
∼17). 또한 예배하되 하나님을 사랑하고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도록
명하십니다(마태복음 22:37∼4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삶 전체로 예배
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 없는 예배는 위선입니다.
그러나 삶으로 드리는 예배는 성도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께 경배하는 예배
에서 비롯됩니다. 의식을 갖춘 예배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리스
도인들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존재하므로 성
도들은 정한 날과 장소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
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인 이레 중 첫날, 즉 일요일을 주의 날(주일)이
라고 부르며, 그 날에 일손을 멈추고 함께 모여 예배해 왔습니다(사도행전
20:7).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특징은 두 부분으로 구
성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분과 그 말씀에 응답하여 기도하며 찬송
하는 부분입니다. 예배에서 우리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달으며 하
나님은 우리 사람과 만물을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인식합니다. 우리는 예배에
서 창조주요 구원의 주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도
와 감사와 찬송으로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는 또한 성경 봉독과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말씀에
서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언약을 확인하며 복음 전
파와 이웃 사랑의 사명을 받고, 삶으로 예배할 능력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영
원토록 예배하는 것, 그것은 구원 얻은 성도의 특권이며 목적입니다.
2. 예배에서 왜 사도신경을 고백합니까?
"사도신경"이란 이름이 처음으로 사용되기는 주후 390년경이었으나, 그 내
용은 대다수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훨씬 더 일찍부터 예배에서 고백해 왔습니
다. 2세기 초반의 속사도 교부이며 안디옥의 감독인 이그나티우스(110년)와
순교자 저스틴(∼165)의 글과 저자 미상의 신앙교육서 [디다케」(100년경)에
이미 "신앙의 척도"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2세기부터 교회에서는 예배에
서 세례 받는 새 신자에게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
까?" 하고 묻는 말에 "예 믿습니다."고 말하면 물에 담그거나 머리에 물을 발
라 안수함으로써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
도..."에 관한 고백으로 묻고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교회와 죄사하여 주시
는 것..."에 관한 고백으로 고백으로 물어 세례의식을 진행했습니다.
신약 성경 말씀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합니다만, 사도들의 편지에는 당시의 교회가 기도나 찬송으로 신앙을 고
백한 구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빌립보 2장 6∼11절의 말씀과 여
러 말씀들이 있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
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사...(고린도전서 15:3)."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
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
라(로마서 8:34)."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전한 기독교의 신앙, 즉 복음의 진리를 간략하게 표현
하고 있어서 역사적인 교회의 신앙고백들과 신학의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그
러므로 우리는 예배에서 감사하며 감격하는 마음에서 세계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고백을 고백합니다.
3. 사도신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행위로써가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흔
히 믿음생활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냥 막연히 열심히 믿는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고, 역사적이며 구체적인 내용을 가진 믿음입니다. 기독
교의 신앙을 한 마디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성
경의 말씀을 따라 좀더 구체적으로 그러면서도 간략하게 고백하는 것이 사도
신경입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
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
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
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
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사도신경은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에 관한 신앙고백, 둘째는 아들 하나님과 그분이 우리를 구속하신 일에 관한
신앙고백, 셋째는 성령 하나님과 교회 및 성도의 거룩한 삶과 영원한 삶에 관
한 신앙고백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아들에 대한 신앙고백은 비교적 깁니다. 아들은 우리가 신앙
하는 대상이시므로 아들의 인격과 그분이 겪은 역사적인 사건을 함께 고백합
니다. 그에 반하여 성령에 대한 서술은 짧습니다. 그것은 신약 성경과 교부
들의 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지, 정, 의를 감동시켜 예
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도록 일하시는 영이시므로 그러합니다(요한복
음 14:16∼17, 26; 16:7∼14).
"거룩한 공회"는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잘못 번역한 것입니다. "카톨
릭"이란 "보편적인" 혹은 "범 세계적인"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교
회"는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 혹은 "거룩한 범세계적인 교회"라고 번역했어
야 합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그냥 "거룩한 교회"라고 말하기도 했으므로 그렇
게 번역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그 뜻을 잘 모름에도 불구하고
옳은 번역을 시도하지 않고 방치해 두고 있는 것은 유감스런 일입니다. 그리
스도의 몸이 하나이므로 온 세계 교회가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임을 믿
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로마 카톨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
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틀어 지칭하는 말입
니다.
4. '하나님 아버지' 할 때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사도신경에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고백은 비록 짧지만 무한한 내용을 함
축하고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영원 전에 말
씀이신 아들 하나님을 낳으시고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시는 성령
과 함께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지으셔서 만물과 함께 우리를 다스리
십니다(시편 8:1∼9; 104:1∼35).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희생의 제물로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조의 능력으로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악 가운
데서 구원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지으시고 양자로 삼아주십니다
(로마서 8:14∼1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아들과 함께 이 세상에서와 내세에서 모든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십니다(이사야 42:5)." 산과 들과 바다와 거기서 나오는
모든 산물을 주십니다. 사람들이 가공하여 만든 물건도 다 하나님께로부터 옵
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
사와 찬송을 충분히 드리지 못하며 그분의 기쁘신 뜻대로 사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와 지식과 능력을 주시고, 재물을, 과
학 지식과 기술을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욕망과 명
예를 위하여, 자기 성취를 위하여 동원합니다.
우리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하고 고
백할 때, 독생자를 영원 전에 낳으신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
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며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
사와 함께 회개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부모를 생각할 때 감사하는 마음을 가
지면서 내가 불효함을 느끼듯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면서 우
리의 불충을 고백합니다.
5.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입니까?
전능하시고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천지 만물을 친히 보존하
시고 다스리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며 다스리시는 것을 섭리
(providence)라고 합니다(사도행전 17:27∼28; 시편 145:15∼16). 나무 잎새
하나와 풀 한 포기, 비오는 것과 가뭄, 먹고 마시는 것, 건강과 병, 부귀와
빈곤, 민족의 흥망 성쇠 등등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사건이며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과
다스리심에 달려 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공중의 새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입
히시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서는 더 하시지 않겠느냐고 하시면
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열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
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태복음 6:25∼34)."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성도는 모든 역경 가운데서도 참고
견디며, 순탄할 때와 다름없이 감사하고, 장래의 모든 일을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맡깁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어서 그분의 뜻이 아니
면 움직일 수 없으므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믿는 확신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로마서 8:33∼39).
섭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시인하고 의지하는 사람만이 시인할 수 있습니
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고백하고 찬송합니다(로마서 8:28).
6.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는 구원자라는 뜻이고(마태복음 1:21),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히브리어 '메시아'의 헬라어 번역어입니다. 말하자
면 '예수'는 개인적인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공적인 칭호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에 합하는 자를 택하셔서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백성들의 지도자로, 즉 선지자, 왕, 제사장으로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 베드로가 고백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들로
하여금 예언하게 하시고 약속하신 메시아, 즉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복음
16:16).
예수께서는 선지자, 왕, 제사장의 세 직분을 한 몸에 구현하시는 분이십니
다. 천국의 복음을 전하시고 하나님을 계시하셨으며, 현재도 설교자들을 통하
여 천국의 복음을 전하게 하심으로써 선지자의 직분을 다하십니다(누가복음
24:19; 요한복음 3:2; 6:68∼69).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친히 희생이 되어 화목제물이 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
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며 중재하심으로써 제사장의 직분을 다하십니다(히브리
서 4:14∼16; 8:22∼25; 9:12; 로마서 8:34).
예수께서는 또한 왕이시지만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고 입성하
셨습니다. 겸손한 평화의 왕이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누가복음 1:33; 마태
복음 21:5; 요한복음 18:36, 37; 19:19).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보전하
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왕이시며 섬기는 이로 사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서 만물을 다스리시고 택한 백성을 보전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며, 장차 심판의 주로 오실 분이십니다. 성부와 성령과 함께 당신의
백성들과 모든 피조물에게서 영광과 존귀와 감사와 찬송을 받으시는 만 왕의
왕이십니다(빌립보서 2:10∼11; 마태복음 28:18; 요한계시록 1:13∼18; 19:11
∼16).
7. 나사렛 예수는 무슨 뜻입니까?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은 주로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호칭입니다.
나사렛 동리 출신 예수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여러분
이 알고 있는 나사렛 출신 예수'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앉
은뱅이를 고치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고 했으며, 그
의 설교에서도 병자가 같은 이름으로 나음 받았다고 증언합니다(사도행전
3:6, 4:10).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름한 것은 병자를 고치신 예수,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시라는 선포임과 동시에 지금도 살아 계셔서 병든 자를
고치신다는 뜻으로 한 말씀입니다.
유대 백성들은 예수께서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 알고 그리스도신 줄 몰랐습니
다. 그러나 베드로와 제자들은 마침내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
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고백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기뻐하셨
습니다(마태복음 16:16∼17).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며(로마서 1:4), 하늘에 있는 자들
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을 주
님으로, 하나님으로 시인하는 이름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빌립보 2:6
∼11).
'나사렛 예수'는 누구든지 부를 수 있는 이름이요 예수께서 사람으로 사셨음
을 상기시키는 이름임에 반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으로 부를 수 있는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에 사는 그리스도
인들은 예수를 가리켜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
러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도 얼마를 지나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렀습니
다(사도행전 9:34).
베드로가 말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께서는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함축합니다.
8.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외아들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희랍 신화에는 영웅들이 신
의 아들이란 믿음이 투영되고 있는가 하면 성경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
을 볼 수 있습니다(창세기 6:2,4). 로마의 지성인들이 좋아한 스토아 철학자
의 글에서도 "우리는 신의 자녀"란 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서 하나님의 양자가 된 성도들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외아들 즉 독생자'는 위에서 말한 그런 의미의 하나님의 아들들이나 자녀와
는 구별되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 하나님이 창조 전에 낳으신 아들 하나
님이심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교회 역사에 보면, 사도시대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가
르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잘못된 교리는 가현설(假現說)과 양자설(養子說)
의 두 유형으로 구분됩니다.
가현설은 예수는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나 보이신 분이라고 말하
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이나 신비주의자들이 따르는 주장입니다. 가현설
은 예수께서 사람이 되신 임마누엘 하나님이신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선지자들
의 예언을 부인할 뿐 아니라, 그분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역사
적 사실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중보자이심을 부인하는 이단설입니다(요한 1서 1:1∼4).
양자설은 사람일뿐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양자로 삼았다는 주장입니다. 예수
께서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주로 유대교 배경을 가진 에비온파와
3, 4세기의 아리우스파가 그런 주장을 했으며, 근세의 합리주의자들과 자유주
의 신학자들이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사도들을 계승한 교부들과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수께서 영원 전에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나신 아들이시며, 아버지께 순종하시지만 아버지와 본질
이 같으시며, 권세와 능력이 동등하실 뿐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만물을 창조
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경배하며 찬양합니다(빌립보 2:6∼11).
9. 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고백합니까?
성경이 예수의 잉태와 탄생에 관하여 말씀하는 대로 믿고 고백합니다(마태
복음 1:18). 선지자의 예언대로 만백성을 구원할 구세주가 동정녀의 몸에서
나셨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일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우리의 합리적인
이해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요셉과 정혼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심으로써 선지자의 예언대로 다윗의 자손이 되셨으며, 다른 사람들과 다름
없이 온전한 사람으로 나셨습니다. 그러나 죄는 없으십니다(히브리서 4:15;
베드로전서 2:22).
예수께서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과 동정녀 탄생이 물리적으로 인과관계
가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죄가 남자에게 있고 동정녀에게는 없
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죄가 없으신 것은 그분이 성령으로 잉
태된 때문이며, 성경이 말씀하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 지상에 사시면서 마귀
의 유혹과 시험을 이기시고 흠 없이 거룩하게 사셨기 때문입니다(요한계시록
3:21). 예수께서 천국 복음 사역을 하시기 전에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신 것에 관한 기록은 예수께서 우리 사람이 겪는 시험을
받으셨으나 승리하셨음을 밝히시는 말씀입니다(마태복음 4:1∼11).
예수께서 성령으로 동정녀에게서 나신 사실은 예수께서 영원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언하는 사건입니다. 예수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
시에 죄가 없으신 참 사람이시므로 하나님과 사람간에 평화를 이루는 중보자
로서의 자격과 요건을 유일하게 갖추신 분이십니다(고린도후서 5:21).
천국의 복음을 전하실 뿐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시기까지 사람을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자비하신 삶이, 그리고 그분의 고난의 삶과 죽음
과 부활이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합니다(로마
서 1:3∼4).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신
사실을 주저 없이 감사함으로 고백합니다.
10. 예수의 고난과 죽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의 전 생애가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말구유에 나신 일, 헤롯의 어린
이 학살을 피하여 부모가 아기 예수를 이집트로 피신시킨 일을 비롯하여, 천
국 복음 사역을 하실 때도 머리 둘 곳도 없이 지내신 일, 바리새인들과 율법
학자들에게서 질시와 미움을 받으신 일 등이 다 고난의 삶이었습니다(마태복
음 2:1∼23; 8:20).
예수께서는 특히 생애 마지막에 십자가의 극형을 받아 당신 자신의 몸과 영
혼으로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짊어지셨습니다(이사야 53장). 십자
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갈라디아서 3:13).
예수께서는 고난을 받으시고 단 한번에 드리는 속죄 제물로 자신을 드림으
로써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형벌에서 구속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
혜와 의를 입혀 주시고 영원한 삶을 얻도록 해 주셨습니다(마가복음 10:45).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그분은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찔림을 받고 우리
의 죄악을 인하여 상함을 받으셨습니다(이사야서 53:5∼6; 히브리서 9:11∼
15). '구속'은 누군가가 본래 노예 대신 값을 지불하고 그 노예를 자유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사람은 누구나 다 죄를 지었으므로 죽을 수밖에 없습
니다(로마서 6:23; 5:1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받는
길을 첫 사람이 범죄한 때부터 열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
담과 하와에게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셔서 부끄러움을 덮어주셨습니
다(창세기 3:21;3:10∼11). 죄를 사한다는 구약의 '키퍼'라는 말뜻이 '덮는
다'입니다.
사람들은 짐승을 희생하여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으
며 죄 사함 받을 수 있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
으심으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그분을 가리켜 '세
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불렀습니다(요한복음 1:29). 요한계시록에 따
르면 천상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늘 '어린양'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요한계시
록 5∼6).
11. 십자가 혹은 그리스도의 피를 어떻게 이해합니까?
십자가는 본래 극형의 형틀이었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뜻하
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화목 제물이 되셔
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셨습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
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므로,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전하며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22∼24; 갈라디아서 6:14). 그렇다고 십자
가의 형상 자체가 무슨 신비한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를 부적처
럼 사용하는 것은 미신입니다. 종교개혁의 교회는 그런 뜻에서 십자 성호를
긋지 않습니다.
피는 곧 생명입니다(창세기 9:4, 5). 그러므로 피 흘림은 죽음입니다. 하나
님께서는 구약에서 짐승을 희생함으로써 범죄한 사람이 용서함을 받으며 죄에
서 정결함을 얻는 길을 여셨습니다. 제사장은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리거나 사
람에게 뿌려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했습니다(출애굽기 24:1-8; 레위기
3:2, 13; 4:7 등). 출애굽 때는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 재앙을 면
케 하셨습니다(출애굽기 12:7).
그러나 피 역시도 그 자체가 무슨 능력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뿌려진 피
는 생명의 희생이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희생을 값있게 보시고 사람의 죄를 사
하시고 생명을 보존케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는 우리 죄를 사하고 우리를 구속하십니다(요한1서 1:7). 그러므
로 우리는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찬송가 202) 하고 찬송합니다. 그러나
피 자체가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제물이 되셔서 흘리신 피를 보시고, 즉 생명을 희생하신 것을 보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새 생명을 주십니다(히브리서 9:12∼22). 그러므로 우리는 그
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를 귀하게 여기며 그의 피로 인하여, 다시 말하면, 희생
의 제물로 죽으신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주께 감사하며 주를 찬양합니다.
12. 왜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합니까
로마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것은 여
론에 따르는 것일 뿐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는 뜻에서 손을 씻기까지 했습니다
(마태복음 27: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에서 왜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하느냐고 의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빌라도가 당시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다스리는 행정 책임자이며
예수를 핍박하고 정죄하며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모든 사람들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허락이나 지시가 없이는 아무도 판결을 받거나
처형될 수가 없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이 물욕과 권세에 눈이 어두운 불의한 권력자에게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 달
려 죽으셨습니다.
역사에서 기독교 신자들이 박해를 당한 경우를 보면 정치적인 권력자는 늘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인들과 로마 제국
내의 여러 종교와 사상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고 핍박을 받았습니
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이며 문화적인 마찰과 갈등의 성격을 띠
었습니다만, 정치적인 권력자가 이런 핍박을 묵인하거나 허용하거나 스스로
주도했을 때, 사소한 핍박은 대규모의 박해로 발전했으며 수많은 신자들이 순
교하게 되었습니다.
네로를 위시하여 절대 권력을 가졌던 로마의 여러 황제들, 사법권을 부여받
아 이단과 신실한 신자들을 종교재판으로 고문하며 처형하고 학살한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의 교권주의자들과 이를 방조하거나 주도한 군왕들이 곧 본디
오 빌라도의 후예입니다.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한 때 부흥했던 기독교의
한 종파인 경교(景敎)로 하여금 자취를 감출 정도로 심하게 박해한 당나라의
무종(武宗), 카톨릭 신자들을 혹독하게 박해한 일본의 도꾸가와(德川) 및 조
선의 대원군이 다 본디오 빌라도의 후예입니다.
13. 예수의 부활을 사도들은 무엇이라고 증언합니까?
사울이라고 칭하던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개
종을 하여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
리스도인을 잡아 유대인들에게 넘기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커스로 가
는 길에 그는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빛 가운데서 자신을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눈이 멀었습니다. 아나니아라는 제자에게 안수를 받고 눈을 뜨게 되었습
니다(사도행전 9:1∼18). 그는 사도가 되어 고난과 핍박을 무릅쓰면서 지중
해 연안 지방을 여행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
내 순교했습니다.
바울은 증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으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
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
느니라(고린도전서 15:1∼8)."
예수께서 생전에 당신의 부활에 관하여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은 말씀의 뜻
을 몰랐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신 후 제자들은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하
며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제자들의 태도와 삶이 돌변했습니다. 부
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주의 죽으심과 부활의 복음을 만민에게 증거하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고
돌보는 일에 생명을 바쳤습니다.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읽는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의 부활이 역사
에 일어난 사실임을 믿으며, 우리 믿는 성도들도 부활의 첫 열매인 그리스도
와 함께 장차 부활할 것임을 믿습니다(마가복음 14:9∼12; 누가복음 24:1∼
12; 요한복음 20:19∼31; 21∼23; 사도행전 2:30∼32; 고린도전서 15:12∼
19; 베드로전서 1:3).
14.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는 무엇을 의미
합니까?
예수께서 올리어 가신 하늘은 구름이 떠 있는 푸른 하늘이 아니고 이 세상
과는 차원이 다른, 이 세상을 초월한 영원한 곳이며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곳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며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으니 가서 너희 있을 곳
을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리라(요한복음 14:1∼2)."고 예수께서
약속하신 그 곳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에 따르면, 그 곳에서는 네 영물과 이십 사 장로들과 수
많은 천사들과 구원함을 받은 성도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으로 죽임
을 당하신 이, 각 종족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당신의 피
로 사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그리스도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와 찬송
을 세세 무궁토록 돌리며 예배합니다(요한계시록 4:1∼7:17).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권세를 받아 만물을 다스리시며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비와 구원을
베푸시도록 중보의 역할을 다하시는 아들이심을 의미합니다(히브리서 7:24,
25).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
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
라..." 하는 말씀대로 입니다(에베소서 1:20∼23; 마태복음 28:18; 빌립보서
2:9∼11).
15.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저리로서"라는 말은 거기서부터, 즉 주께서 계신 곳으로부터라는 뜻입니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은 세계의 종말에 관한 말씀과 함
께 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히브리서 9:28; 고린도전서 16:17;
고린도후서 7:7; 마태복음 24:3, 27; 데살로니가전서 2:19, 3:13, 4:15,
5:23; 베드로후서 1:17 등등). 성경은 예수께서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
실 것이라고 하며(사도행전 1:11), 모든 족속과 그를 찌른 자를 포함하는 각
사람이 주께서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 1:7, 마 24:30).
그리스도께서는 재림하셔서 사람을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믿는 자
에게는 영원한 구원을 주시며 그들을 하늘의 기쁨과 영광을 누리도록 영접하
시는 반면에, 믿지 않고 불의한 자는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하실 것입니다(요
한계시록 21:1∼8; 사도행전 17:31; 10:42, 누가복음 21:27∼28, 마태복음
25:1∼13;31∼46; 데살로니가후서 2:8∼12).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가운데서도 다시 오시는 구원의 주이시며 심판의 주를 기다리며 고개를 들고
삽니다.
예수의 재림의 날짜나 장소를 안다고 하는 자, 소위 시한부 종말론을 말하
는 자는 거짓 선지자요 미혹하는 자입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천사들도, 아들
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4:36; 사도행전 1:7). 그래서 예수께서는 도둑 같이 혹은 해산할 여인이 아
이를 낳듯이 갑자기 오신다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11).
그러나 우리가 말세에 살고 있음을 성경은 여러 가지로 말씀합니다. 명심해
야 할 말씀은 복음이 모든 민족을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된 후에야 끝이 올
것이라는 말씀(마태복음 24:14)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선교의 중요성을 일
깨우는 말씀입니다.
16. 성령에 관하여 무엇을 믿습니까?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함께 영원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성자
는 성부에게서 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십니다(요 14:16∼
17). 성경은 성령께서 인격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person)이심을 가르
칩니다. 교회는 일찍부터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개종자를 성부와 성자와 성
령의 이름에 연합하도록 세례를 베풀며 예배에서 성 삼위 하나님을 찬송했습
니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성령을 단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해하다가 예수 그리
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며 영원하신 아들 하나님이심을 밝히 알게
된 이후, 즉 4세기 중반부터 성령께서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가르치
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을 믿사오며"라고 할 때 우리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
신 후 오순절에 성령께서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에 역사적으로 강림하셨음
을 믿습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든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뜻을 따라, 그리
고 자의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성경 말씀을 깨닫도록 해주시며, 죄를 깨달
아 회개하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셔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십니다(요한
복음 3:5∼9).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회개하면서 주의 뜻을 따르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도록 우리를 성화시켜 주십니다. 지상에서 우리가 숨을
거둘 때 우리를 영화롭게 해 주십니다(갈라디아서 6:16∼24).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며 교회의 지체들에게 은사를 주셔서 서로
를 섬기는 가운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섬기게 하십니다(요한복음
16:13; 갈라디아서 6:16∼25). 성령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지키시며, 우리가
불순종할 때 근심하시며(이사야서 63:10), 우리가 연약할 때 도우시며, 빌 바
를 알지 못 할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께 간구하십니
다(롬 8:26).
17.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거룩한 공회'는 '거룩한 보편적인 교회'의 서툰 번역어입니다. 그리스도
의 교회는 하나의 예루살렘의 교회에서 시작하여 언어와 문화가 다른 여러 나
라와 지역에 있는 수많은 교회들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온 세계의 교회들이 모두가 다 그리스도를 머
리로 하는 하나의 몸 된 교회임을 시인하는 고백입니다.
교회에는 초기부터 분파 운동들이 있었습니다만, 1054년에 교회는 크게 둘
로, 즉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의 서방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
는 발칸과 러시아 지역의 동방교회로 분립되었습니다. 그러나 동, 서방 교회
의 분립은 오늘의 교회 분열과는 양상이 달랐습니다. 교리보다는 언어와 문
화 및 정치적인 배경의 차이로 인한 분립이었습니다. 한 지역이나 도시 안에
분립된 교회들이 공존하는 그런 분립이 아니었습니다.
서방교회는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나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로 나뉘었습
니다. 개신교는 루터교회, 개혁교회, 앵글리칸, 재세례파 교회들로 출발하여
제각기 또한 민족과 국가 단위의 교회들로 발전하였습니다. 유럽의 이민들로
구성된 미국 교회는 다양한 민족과 언어의 배경 때문에 수많은 교파 교회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언어, 문화 혹은 교리의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분
열과 분립을 거듭해 왔습니다. 한국 교회의 성도로서 우리는 '거룩한 보편적
인 교회'를 떳떳이 고백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함을 깨달으며, 부끄럽게 여깁니
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
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부르심
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에베소서 4:2∼6)." 이 말씀은 지
역 교회의 신자 각자에게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들 모두에게도 하
시는 말씀입니다.
18.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신자의 모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기관입니다. 칼빈
이 옳게 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목적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었습니다(마태복음 16:18∼2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부탁이 복
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고 돌보라는 것이었습니다(마태복음 28:19∼20; 요한
복음 21:15∼17).
사도신경에서 다른 모든 주제는 그냥 믿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나 교회
에 대한 신앙고백은 다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씀과 같
이 "여러분"이, 즉 "우리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
전서 12:27). 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에는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함을 받은 그리스도인 각자는 혼자 살지 않고 교회
의 지체로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삽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
가 되어 서로 도우며 오래 참고 사랑하면서 함께 자라갑니다. 성령 안에서 하
나가 되어 주님을 닮는 거룩한 삶을 살며 함께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가
야 합니다.
교회는 예배 공동체, 즉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봉사는 교회가 하는 봉사와
교회를 위한 봉사로 구분됩니다. 교회가 하는 봉사는 교회가 공동체로서 하
는 봉사, 즉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과 선교 및 이웃을 돕는 봉사입니다. 교회
를 위한 봉사를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직분자를 세우십니다. 목사와 교사를 세
워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게 하시며, 장로와 집사를 세워 교회를 돌아보며
교인들을 섬기게 하십니다(에베소서 4:11∼12; 고린도전서 12:27∼31; 로마
서 12:4∼13). 교회를 위한 봉사는 교회가, 즉 온 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
아 봉사를 옳게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봉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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