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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거란 전쟁 - 정주와 유목의 충돌
인간의 삶이란 기본적으로 서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이들 간의 다툼의 역사이다. 학자 간의 학문적 대립이 될 수도 있고, 상인들끼리의 물건을 많이 팔기 위한 경쟁일 수도 있으며, 나라 사이의 영토 등을 두고 벌어지는 무력 충돌일 수도 있다. 그 가운데서도 문화적 배경이 다른 나라 사이의 다툼은 상대국이 원하는 바를 잘못 이해하거나 오해하는 바람에 다툼이 커지거나 오래가는 경우들이 존재한다. 그러한 사례의 하나가 고려 시대 거란의 침입이었다. 일반적으로 한 곳에 정착한 상태에서 농사를 지어 생활을 이어가는 고려와 달리, 거란은 이동을 계속하며 가축을 키우는 유목 형태의 문화를 영위했다. 이러한 차이는 두 나라 간에 상대방의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이라는 간극을 초래했고 그 결과 전쟁이라는 무력 충돌로 나타나기도 했다.
유목민의 특성과 기마
유목은 목축 생산물을 통해 생존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식량생산경제의 한 형태로, 고정된 거주지나 축사 없이, 그 사회의 성원 대다수가 넓은 지역을 계절에 따라 이동을 하며, 그 과정에서 가축을 사육하는 삶을 이른다. 따라서 한 곳에 정착해 생활하는 농경민과는 구별되는데, 가장 중요한 특징이 ‘이동 생활’·‘목축경제’·‘기마술’이다.
이 가운데 ‘이동 생활’은 인간이 풀을 직접 소비할 수 없으므로, 풀을 소화할 수 있는 가축들에게 필요한 물과 풀을 찾아다니는 생활을 말한다. 동물이 먹을 수 있는 여린 풀은 봄에는 남쪽에서 싹트다가 여름에는 북쪽으로 이동한다. 유목민들의 삶이란 풀 생육의 이동 방향을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것이다. 「톤유쿠크 비문」에 “성을 쌓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것도 그러한 사정을 말해준다. 이동 생활은 생존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방식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이동 생활에서는 항상 말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기마술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톤유쿠크의 비석 (출처: 매일경제 2016.10.10)
유목민에게 가장 중요한 가축은 양이었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봄에 양이 출산을 하면, 풀이 자라는 여름에 살을 찌웠다. 그리고 가을과 겨울에는 도축을 하거나, 내년도 생산을 위해 임신을 시키는 순서로 관리를 하였다. 유목민들이 주로 겨울에 전쟁을 하는 이유도 이러한 순환시스템을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목민의 생존에 문제가 발생하는 때는 겨울이었다. 방목지의 확보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목민은 생존을 위해 초원 바깥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거나, 교환을 했다. 그리고 그것도 안 되면 약탈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중국 송나라의 이강(李綱)이라는 인물의 “신은 가을이 깊어지고 말이 살찌면 오랑캐들이 다시 쳐들어와 이전의 맹약을 질책할 것이 두렵습니다(『정강전신록(靖康傳信錄)』).”라는 언급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강전신록(靖康傳信錄)』 (출처: 국립제주박물관)
이강의 언급은 이른바 ‘천고마비(天高馬肥)’라는 단어가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천고마비라는 단어는 하늘이 높아지는 청명한 가을이 오면, 독서하거나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고 있다. 하지만 가을이 깊어지고 말이 살찐다는 이강의 말은 유목민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때가 되었다는 뜻으로, 농경 민족에게 유목민의 침입을 조심하라고 던지는 경고의 문구였던 것이다.
전쟁과 관련한 『요사』의 기록을 참고하면, 거란은 출병은 음력으로 9월을 넘기지 않고 군사를 돌이키는 것은 12월을 넘기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이는 생활시스템 속에서 자연스레 이루어진 일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거란이 고려를 치기 위해서는 자연 해자, 즉 방어막 역할을 하는 압록강을 건너야만 하는 것도 겨울을 선택한 이유의 하나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한반도와 요동을 잇는 길목은 평안도 의주(義州)였는데, 외부 세력이 고려를 침공하기 위해서는 의주 앞쪽의 압록강을 건너야만 했다. 그런데 압록강 유역은 대부분 옥토나 점옥토 또는 점토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땅이 얼어 단단해지기 전에는 도로로 이용하기 어려웠다. 아울러 의주 부근은 바다와 가까워 조수간만의 영향도 받았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중 〈의주부(義州府)〉 (출처: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그 이유 때문에 강을 건너는 것도 하루에 2회 정도로 제한을 받았으며, 건널 수 있는 인원도 하루 평균 500명 내지 6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적이 지키는 강을 건넌다는 것은 적의 공격에 희생을 감수해야만 하는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따라서 상대적이나마 압록강을 안전하게 건너기 위해서는 수량이 적은 시기인 갈수기나 얼음이 어는 결빙기를 택하는 것이 유리했음은 당연하다. 유목민의 장점인 속도전을 발휘할 수 없게 하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이유로 거란이 겨울을 선택해 고려를 공격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란은 기병을 이용해 빠르게 적을 공격하는 속도전을 선호했다. 이는 거란이 유목을 바탕으로 한 사회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였다. 『요사(遼史)』 「식화지(食貨志)」에, “거란의 옛 습속을 보면, 부유함은 말로 판단하고 강한 것은 병력으로 판단한다. 들판에 말을 놓아기르고 백성을 병력으로 이용한다. 일이 있으면 전쟁을 하는데, 강건한 병사들이 명령을 내리면 바로 모인다.”거나 “유사시에는 공격하는 전투를 임무로 삼고 한가하면 수렵을 생업으로 삼는다.”는 기록 등에서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거란의 모든 구성원들은 그 자체가 군사 집단이었고 평상시의 유목 생활 자체가 군사 훈련의 하나였던 셈이다.
거란의 원정 형태는 군주인 카안이 직접 지휘를 하는 친정·도통을 임명하여 군사작전을 치르는 원정 그리고 도통을 임명하지 않는 원정으로 구분된다. 전투부대는 5백〜7백 명의 1대가 기본 단위이며, 실제 전투는 10대로 구성된 5천〜7천 명의 1도(道)가 주축을 이루었다. 성종대 부터 현종 대까지 그동안 1차부터 3차로 이해한 전쟁에 동원된 거란군은 5만에서 40만 명 사이였다. 그리고 그 원정군의 대부분은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거란은 기병을 이용한 속도전에 고려보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이러한 우위가 드러난 전쟁은 1010년의 강조(康兆)가 사로잡힌 통주성 전투에서였다. 강조(康兆, ?~1010)는 군사를 3군으로 나누어 1부대는 동주(銅州) 또는 통주(通州)와 가까운 산에 진을 쳤으며, 1부대는 동주성에 붙여 진을 치고 자신은 삼수(三水)에 영을 세워 지휘를 했다. 고려는 거란의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삼수채와 같이 강을 이용하는 전술을 사용했던 것이다.
KBS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 7회, 거란의 기병을 막는 고려군 (출처: KBS)
고려는 검거(劍車) 등을 이용하여 초반 전투에서 거란을 막아내는데 성공을 했다. 하지만 승리에 도취한 강조가 방심을 한 바람에 패배하고 말았는데, 당시 강조의 패전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것은 강조가 거란군의 진입이 그렇게 빠르게 이루어질지 몰랐다고 하는 사실이다. 『고려사』에는 거란의 병사들이 이르렀다는 보고를 강조가 믿지 못했다고 기재되어 있을 정도이다. 거란 기마병의 신속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려가 승자로 남은 이유
학자에 따라 고려와 거란의 전쟁 횟수에 이견이 있지만, 고려와 거란이 전쟁은 크게 성종(成宗)과 현종(顯宗) 대에 걸쳐 크게 2차례로 구분할 수 있다. 성종 대 양국의 충돌은 993년 10월에 가서 있었는데, 같은 해 윤10월에 가서 서희(徐熙)와의 회담 끝에 거란군이 회군하면서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마무리된 반면, 현종 대의 침입은 현종 원년인 1010년 10월에 시작되어, 현종 10년인 1019년 2월까지 대략 10년 동안 이어지는 장기전 양상을 띄었다. 현종 대 전쟁은 1018년 12월 소배압이라는 거란 장수가 10만이라는 대규모의 병사를 거느리고 침입했다가 다음 해인 1019년 2월에 구주(龜州)에서 강감찬(姜邯贊) 등에 의해 대패를 당하며 마무리되었다. 이 전투가 우리가 잘 아는 구주대첩이다(‘귀주’대첩이라고도 하는데, ‘龜’가 ‘구’와 ‘귀’ 두 가지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龜城’을 ‘구성’이라 발음하는 것을 고려하면, ‘구주’로 부르는게 좀 더 맞을 듯하다).
거란의 기마를 이용한 빠른 속도전을 막기 위해 고려는 들판을 깨끗하게 비우는 청야(淸野)와 더불어 지형지물을 이용한 수성전(守成戰)을 사용하였다. 『요사』를 보면, “고려가 작은 나라이지만 여러 차례 요의 군대에 피해를 입혔으니 이는 험난한 지형을 잘 이용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라는 언급을 하고 있기도 하다. 고려가 이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 수행하느냐에 따라 거란의 기마병으로부터 승리 여부가 달려 있었던 셈이다. 성을 중심으로 한 방어 전술은 고려 이전부터 우리 민족에게 이어져 내려온 전통적인 것이었으며, 유목민족인 거란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1010년 거란 내에서 전쟁에 관련한 논의를 할 때, 거란의 신하 소적열(蕭敵烈)이 고려는 작은 나라이지만, 성과 보루가 완전하고 굳건하므로 무력 충돌보다는 사신 파견을 통해 죄를 물은 다음에 전쟁을 해도 늦지 않다는 전쟁 불가론을 편 것에서도 확인이 된다.
실제 거란의 우려대로, 거란은 산성 안에 웅거하며 공격을 막아내는 수성전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뤘다. 거란이 효과적으로 공격하지 못한 곳 가운데 한 곳이 평안도에 소재하고 있던 흥화진(興化鎭)이었다. 흥화진은 의주를 거쳐 개경으로 내려오는 가장 빠른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 거란이 빠르게 고려를 공격해 압박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지나가야만 했던 것이다. 흥화진 성에서의 수성전은 1010년 거란 성종이 친정을 했을 때 빛을 발했다. 흥화진성이 함락되지 않자, 거란은 흥화진의 고려 군대가 거란의 후미를 공격할 것을 우려해 무로대라는 곳에 20만의 군사를 남겨두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즉 거란은 흥화진 성에서 시간을 소비했을 뿐만 아니라, 전력을 온전히 집중시키지 못한 것이었다. 반면에 고려는 거란군의 분산을 통한 전력 약화와 방어를 좀 더 치밀하게 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던 셈이다.
KBS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 6회, 처참한 흥화진의 풍경 (출처: KBS)
현종 5년에도 거란은 소적열이라는 장수를 보내와 통주와 흥화진을 침략했다. 하지만 이를 막아선 장군 정신용(鄭神勇)과 별장 주연(周演)의 활약으로, 7백여 명의 병사를 죽이고, 도망치다 강물에 빠져 죽은 이들도 매우 많았다. 또 현종 8년(1017)에는 거란의 소합탁(蕭合卓)이 흥화진을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9일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고려의 장군 견일(堅一)·홍광(洪光)·고의(高義)에 의해 큰 패배를 입어야만 했다. 흥화진 전투는 수성전의 모범 사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수성전과 함께 고려가 중요하게 사용한 전술은 청야(淸野)였다. 청야란 앞서 언급한 대로 들판을 깨끗이 비워두는 것이다. 실제로 싸움을 하기보다는 식량 등의 보급이 이루어질 수 없게 하며 시간을 지연시켜 적의 전력 약화를 꾀하는 전술이다. 전쟁도 사람이 하는 것이다 보니, 먹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특히 속도전을 해야 하는 거란의 입장에서 말에게 먹일 여물의 부족은 큰 타격이었다. 거란은 기본적으로 타초곡(打草穀)이라 하여 별도 보급을 받지 않고 현지에서 식량과 마초를 공급받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따라서 청야는 거란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방어책 가운데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1010년 현종은 친조를 명분으로 거란의 회군을 요청하는 전략을 펴며, 나주로 피했는데, 이후 고려 군대는 청야전술을 쓰며 험한 지형의 성에 웅거해 버티기에 돌입했다. 결국 거란은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후퇴해야만 했다. 또 1018년에는 소배압이 신은현(新恩縣), 즉 황해도 신계까지 들어오기는 했으나, 현종은 직접 나서 서울 밖에 있는 민가를 성내로 들어오도록 명하며 청야전술을 활용하였고, 결국 최종 승리는 고려의 몫이 되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점은 전쟁이 진행되면서 고려가 거란의 기병 전술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1019년 2월의 전투 기록에서 살필 수 있다.
거란의 병사들이 구주(龜州)를 지나가자 강감찬 등이 동쪽 교외에서 마주하여 싸웠으나 양쪽 진영이 서로 대치하며 승패가 나지 않았다. (이때) 김종현(金宗鉉)이 병사들을 이끌고 도달하였는데, 홀연히 비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와 깃발들이 북쪽을 향해 휘날렸다. 아군이 그 기세를 타고 분발하여 공격하니, 용맹한 기운이 배가 되었다. 거란군이 북쪽으로 달아나자 아군이 그 뒤를 쫓아가서 공격하였는데,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기까지 쓰러진 시체가 들을 가득 채우고, 노획한 포로·말·낙타·갑옷·투구·병장기는 이루 다 셀 수가 없었으며, 살아서 돌아간 적군은 겨우 수천 인에 불과하였다. 거란의 병사들이 패배한 것이 이때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거란의 군주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어 소손녕(蕭遜寧)을 책망하며 말하기를, “네가 적을 가볍게 보고 깊이 들어감으로써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볼 것인가? 짐이 마땅히 너의 낯가죽을 벗겨낸 이후에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다(『고려사절요』 권3. 현종 10년 2월 기축).
이 기록은 1019년 구주에서 있었던 전쟁의 상황을 서술한 것이다. 고려군이 구주의 동쪽 교외에서 거란군과 대치한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구주 또는 귀주대첩이라 부르는 전쟁이다.
〈기록화: 귀주대첩〉 (출처: 전쟁기념관)
이 전투는 앞서 언급한 수성책과는 다른 형태의 전투 장면을 보여준다. 고려군이 구주 동쪽 교외에서 맞서 싸웠다거나, 비바람을 이용한 고려군의 공격에 거란군이 달아나자 이를 쫓아가 공격을 했다는 것이다. 기마병 중심인 거란군과 직접 부딪쳐 싸웠다거나 도망가는 적들을 쫓아갔다는 것은 고려 또한 기마병이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즉 거란군을 막아내기 위해 고려가 거란의 장점인 기마술을 습득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인 셈이다.
고려군의 공격으로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기까지 쓰러진 거란군의 시체가 들을 가득 채우고, 고려가 노획한 포로, 말과 낙타 그리고 갑옷과 투구 및 병장기가 다 셀 수가 없을 정도였으며, 살아서 돌아간 적군은 겨우 수천 인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고려의 대승으로 마무리 되었다. 조선 시대 『성종실록』(성종 8년 9월 경진)에는 ‘구주 동쪽 교외에서의 싸움에서 거란의 30만 군사가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는데, 이것은 나라의 형세가 바야흐로 강하고 강감찬(姜邯贊)이 그 재주와 지혜를 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귀주에서의 패배가 거란에게 어느 정도였는지는 그 나라 군주인 성종 칸이 소손녕(소손녕의 형인 소배압의 오기)에게 낯가죽을 벗겨낸 후 죽이겠다는 폭언까지 할 정도였다는 데서 살필 수가 있다. 고려가 구주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데는 고려의 장기인 수성과 청야전술의 적극적 활용과 더불어 상대방의 장기인 기마술까지 익힌 것이 크게 주효했기 때문이었다. 적의 장기라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배우는 고려의 실용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싸움의 결과는 송나라 신하 부필(富弼)은 ‘하북수어십이책(河北守禦十二策)’에서 다음과 같이 남겼다.
"천성(天聖, 천희(天禧)의 오기) 3년(1019) 거란이 일찍이 고려를 정벌하였습니다.……고려가 거란 병사 20만을 살해하여 한 필의 말과 한 척의 수레도 (거란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거란이 항상 두려워하여 감히 공격하지 못했습니다(『속자치통감장편』 권150, 인종 경력 4년 6월 무오).”
거란이 고려를 두려워해 감히 공격을 못할 정도로 고려의 대승으로 마무리 되었던 것이다. 전쟁 당사자가 아닌 제3국 인물의 평가이니, 객관적이라 봐도 큰 문제가 없을 듯하다. 실제로 이후 양국 사이에 외교적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거란은 대규모 군사행동은 감행하지 못했다.
실제로 거란은 1301년 5월부터 1033년 이전의 덕종 재위 기간 중에 고려 공격을 위해 송에 원병을 요청한 사실이 있었다. 이때 양국은 압록강 이동 지역에 거란이 점유한 땅의 반환 문제로 인해 충돌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송은 인종(仁宗, 1022∼1064)이 재위하고 있었는데, 인종 즉위 후 10여 년간 섭정을 하고 있던 명숙태후(明肅太后, 970∼1033)가 이를 받아들이려고 했으나, 신하인 여이간(呂夷簡, 979∼1044)의 반대로 군사 연합은 성사되지는 못했다. 고려를 공격하기 위해 거란이 송에 연합을 요청했다는 것은 거란이 ‘절대 강자’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고려를 두려워해 거란이 무력 행동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다. 구주에서의 승리가 가져다준 결과였다.
구주대첩에 대한 조선의 평가
고려 시대 거란과 전투에 공을 세웠던 이들은 조선 시대에도 추숭되었다. 평안도 선천군에는 1011년 정월에 거란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 유백부(庾伯符)를 모신 삼충사(三忠祠)를 인조 23년(1645)에 다시 세웠다. 삼충사는 원래 고려 때부터 존재했다. 하지만 그 후 있었던 여러 차례의 병란으로 인해 어느 순간 없어지고 말았다. 이때 와서 다시 창건한 것이다. 세조 2년(1456)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 直提學) 양성지(梁誠之, 1415~1482)는 무성묘(武成廟)를 세워 조선 이전 공을 세운 장군들을 모실 것을 건의했다. 무성묘에는 거란과의 전쟁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던 양규와 강감찬(姜邯贊)도 포함되었다(『세조실록』 권3, 세조 2년 3월 정유).
구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강감찬에 대한 추숭은 좀 더 이른 시기의 기록에 나타난다. 태조 원년(1392)에 마전현에 창건한 사당인 숭의전(崇義殿)에 배향되었으며, 또 금천, 즉 지금의 경기도 광명에 있는 충현서원(忠賢書院)에도 배향되기도 하였다.
충현서원지 (출처: 충현박물관)
선조 대와 광해군 대에는 전조, 즉 고려 왕들의 묘를 재정비하라고 했는데, 그 가운데는 강감찬의 묘도 있었다(『선조실록』 권146, 선조 35년 2월 무진․『광해군일기』[중초본] 권25, 광해 2년 2월 임자).
성호 이익(李瀷, 1681∼1754)은 『해동악부(海東樂府)』의 「금화팔지가(金花八枝歌)」에서 “살았을 땐 백성들의 부모와 같았었고, 죽어서는 고종(瞽宗: 중국 은나라 때의 학교)의 악조(樂祖: 예악을 주관하던 선현)가 되었다네… 천고에 이름 남을 그대가 있었구나.”라고 하며, 강감찬을 기리기도 했다.
집필자 소개허인욱고려 시대 대외관계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는 한남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전근대 시기 대외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며 연구하고 있다. 아울러 역사 속 사람들의 삶을 재구성해보는 것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저서로는 『옛 그림에서 만난 우리 무예 풍속사』, 『옛 그림속 양반의 한평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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