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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에 있는 297명의 국회의원. 전부 각양각색이다.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 한 번 국회의원 배지를 단 것에 만족하는 사람도 있다.
매일 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의정활동 내내 단 한마디도 표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지난달 이 코너에서 2007년 대선에 도전한 데
이어 한나라당 서울시장 경선 후보에 도전하는 원희룡 의원을 만났다.
제주도 출신으로 대입 학력고사, 사법고시 전국 수석 출신인 그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권력의지’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 분석했다.
이번 달에 만난 사람은 2월 4일까지 한나라당 대변인을 했던 조윤선 의원이다.
겉으로 나타난 ‘권력의지’만 놓고 비교하자면 그는 원 의원과 다른 정치인이다.
싸우지 않고, 악쓰지 않고, 공격하지 않는다.
2008년 18대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금배지를 단 초선 의원.
어떤 저력이 숨어 있는지 아직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가 가진 내공은 탄탄해 보인다.
‘공격수’로 상징되는 당대변인을 2년 넘게 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불성을 잘 유지했다.
차분한 어조로 조목조목 논평하는 모습을 보고 ‘전투적이지 않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평정심’을 유지했다는 호평도 얻었다.
2008년 18대 첫 국정감사에서 그는 자신의 내공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민주당의 김유정, 자유선진당의 박선영 의원과 함께
‘여성 대변인 3인방의 활약’으로 주목받았던 때다.
김유정 의원이 ‘공격수형’, 박선영 의원이 ‘호통형’으로 분류된 데 비해
조 의원은 ‘부드러운 공격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공정거래위원회의 현장 조사가 검찰의 압수수색을 방불케 할 만큼
지나치게 강압적이었다는 것을 지적하며 현장 조사의 가이드 라인을 제시했다.
10분 넘게 백용호 공정위원장을 설득한 그는 결국 ‘가이드 라인이 필요하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고압적 태도를 지양하고 풍부한 자료와 논리로 피감기관의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지난해 1월 한나라당 의원 총회에서는 여야 대치상황 해법에 대해 발언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야당과 대치 국면에서 이기는 방법으로 ‘비폭력’과 ‘장기전’ 두 가지를 제안했다.
홍준표 원내대표는 조 의원의 제안을 받아들여 비폭력과 장기전을 택했다.
현재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으로 있는 조 의원은
여성의무공천제도에 대해서도 자신의 경험을 내세워 설득에 성공했다.
공천법 개정으로 여성을 의무공천하지 않는 지역구는 자신이 추천한 전 후보공천을
무효화한다는 강제조항을 넣은 것에 대해 일부 지방의원이 반발하자 앞장서서 속내를 내보였다.
그때 발언한 내용이다.
“제가 사법시험에 붙었을 때는 여성이 300명 뽑혔습니다.
만약 박희태 대표나 안상수 대표가 사법고시를 쳤던 때처럼 여성 합격자가 20, 30명 정도였다면
감히 도전을 못했을 겁니다. 국회의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선에 성공한 여성 대부분이 비례대표로 시작한 분들입니다.
만약 비례대표의 반을 여성으로 하는 제도가 없었다면
제가 지역구부터 시작해서 이 자리까지 올 생각을 하지도 못 했을 겁니다.”
그의 여의도 입성은 2008년이지만 정치 입문은 그보다 앞선다. 2002년 대선 때였다.
사법연수원 시절 교수였던 한나라당 이영애 의원의 손에 이끌려 이회창 총재의 집에 갔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 김&장에 진출한 첫 여성 변호사였던 그는
미국 로펌과 연방항소법원 근무라는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재원이었다.
대선홍보 체제였던 당에서 남경필 의원과 함께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으로 발탁되면서 여성 대변인 시대를 열었다.
이후 정치권을 떠나 다시 김&장 변호사를 거쳐
한국씨티은행 부행장을 하다 18대 총선에 비례대표로 나왔다.
2002년 당시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적극 추천했다.
비례대표 조건이 한나라당 대변인이었다.
690일 동안 대변인 생활을 하며
전여옥(622일), 나경원(608일) 의원을 제치고 한나라당 최장수 여성 대변인을 기록했다.
이번 인터뷰는 얼마 전 입적한 법정스님이 계기가 됐다.
1987년 1차 사법시험에 떨어진 스물 한 살의 조윤선은 송광사 수련원에 들어갔다.
당시 송광사 수련원장이던 법정은 100여 명의 수련원생에게 법명을 지어줬다.
이때 조 의원이 받은 법명이 ‘대원화(大願華)’였다.
송광사에서 몸과 마음을 수련하고 서울로 돌아온 그는
평소 좋아하던 바흐와 베토벤, 모차르트 음악을 녹음해 스님에게 보냈고, 법정은 엽서로 화답했다.
법정과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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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왜 하시게 됐어요?
“로펌 변호사만 13년을 했습니다. 변호사 일이라는 게 사건에 해당하는 법을 찾아내는 거잖아요. 한국에 있는 비즈니스 법은 샅샅이 찾아볼 수 있는 기회를 누렸죠.
미국 로펌 경력 덕분에 주로 외국인 의뢰인이 많았어요. 일을 하면서 갈수록 느끼는 게 다른 나라에서는 다 되는 조항이 유독 한국에서만 안 되는 비즈니스가 많은 거예요. 금감원에서는 금융 허브 만든다고 하지만 규제는 변한 게 없이 꽉꽉 막혀 있어 뭐 하나 제대로 해낼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그
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금융규제를 완화하겠다고 한마디 하니까 금감원에서 원래 하려고 했던 얘기를 가져오라고 하더라고요. 정치 리더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정책이 어떻게 힘을 받게 되는지 깨달았죠. 정치가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매력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2002년 한나라당 선거대책본부에서 대변인을 하셨잖아요. 왜 그때 바로 하지 않았나요?
“안 그래도 정치권에서 권유를 했지만 경험도 너무 없었고 어리다고 생각했어요. 좀 더 경험을 쌓은 후에 기회가 온다면 다시 하겠다고 다짐했죠. 제 선택이 맞았던 것 같아요. 이후 씨티은행 부행장을 했는데 큰 조직에 있으면서 조직 운영과 리더십, 책임감 같은 것을 배웠거든요. 현실 정치에도 그때의 경험이 도움이 되더라고요.”
조윤선이 가진 것과 없는 것
그는 상명초등학교 시절 체조선수를 하기도 했다. 같은 학교 동기로 농구 꿈나무였던 허재·유재학·정찬진 감독이 있다. 4학년 때 키가 너무 커서 체조 선수의 길을 걷기가 힘들어 자연스럽게 포기하게 됐다. 이후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웠지만 오른쪽 새끼손가락 길이가 좀 짧아 역시 꿈을 접어야 했다.
강남 세화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외교학과에 들어갔고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왔다. 남편은 고등학교 시절 독서실에서 만난 첫사랑이다. 현재 김&장 변호사로 같은 법조인 출신의 든든한 동반자다. 올해 고등학교 2학년이 된 큰딸과 중학생이 된 작은딸이 있다.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고, 지금도 그 삶을 잘 유지하고 있다. 세속적인 잣대로만 보면 참 많은 것을 가진 여자다. 두 번째 만남은 일주일 후 의원회관에서 이뤄졌다. 사진 촬영과 함께 못 다한 얘기를 나눴다. ‘결핍’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다.
─다른 정치인에 비해 ‘권력 야망’이 없는 것 같아요.
“(하하) 대변인 시절 정치부 기자들에게서 많이 듣던 소리예요. 정치라는 게 모범답안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정치를 한다고 누구나 다 대통령이 되고 싶은 꿈을 펴라는 법도 없고요. 어느 자리에 가고 싶은 욕심이 솟구치는 것도 아니고, 딱히 무엇을 해내겠다는 의지가 왕성한 것도 아니죠. 그래서 한번은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무엇일까. ‘권력’이 아니라 ‘영향력’이더라고요. 사람들을 끌어서 같이 나갈 수 있는 힘을 키우고 사회 전반적으로 이익을 줄 수 있는 시민운동 같은 것을 일으키는 거요.”
요즘 그는 6·25 참전용사 유자녀장학재단 설립을 위해 앞장서고 있다. 국회 정무위에서 국가유공자 관련 보훈사업도 하고 있는 그에게 이번 프로젝트는 의미가 크다. 권력이 아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첫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올해 60주년이에요. 지금 대한민국의 번영과 풍요로움을 누리는 데 있어 잊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바로 한국전쟁 참전용사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그들의 선조가 우리를 도왔지만 이제는 우리가 보훈을 해야 할 때라는 거죠. 특히 올해 한국은 G20 개최국이 됐어요. 대한민국의 국격 향상을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원래는 법안을 상정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 기금만 모이면 그럴 필요가 없어요. 종잣돈 6억원 정도만 모여도 시작할 수 있거든요.”
남아프리카와 태국, 필리핀, 터키 등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 8개국을 시작으로 점차 전체 참전국가 유자녀로 확산할 계획이다. 학계·종교계의 호응도 좋아 기대가 크단다. 대의를 위해 일하는 정치인으로 필요한 것 중 또 하나가 소외계층에 대한 측은지심이다.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란 정치인에게는 기대하기 힘든 미덕일 수 있다.
“저는 한국의 전형적인 중산층입니다. 일생의 대부분을 월급쟁이로 사신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그 월급에 맞춰 빠듯한 삶을 사셨어요. 경제적으로 척박한 생활을 한 적은 없지만 풍요롭지는 않았어요. 지금도 기억나는 게 병 콜라를 여러 병 사서 냉장고에 넣고 마시기 시작한 게 초등학교 6학년 때 이후였으니까요.”
기초생활급여가 입금된 수급자 명의의 예금은 압류하지 못하게 하는 기초생활보장법, 장애인 청년 미취업자에게 균등한 기회 보장을 해주는 청년실업특별법 개정안을 발의하는 등 그 나름대로 소외계층에 대한 입법 활동을 펼쳤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그가 ‘월급쟁이’라고 표현한 부친은 경남 의령 출신으로 서울대 농대를 졸업한 후 한국농약에 입사, 부사장까지 지냈다.
퇴임한 후에는 일본에서 농약을 수입해 골프장 제초 서비스를 하는 회사를 차렸다. 68세에 영어를 배우겠다고 LA에 이어 호주에까지 연수를 다녀올 정도로 열정적인 인물이다. 새로운 세계에 끊임없이 도전해온 조윤선 의원. 어쩌면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DNA가 숨겨져 있을지 모르겠다.
조윤선이 하고 싶은 ‘다른 정치’
그는 잘 알려진 대로 오페라 마니아다. <미술관에서 오페라를 만나다>는 오페라 칼럼니스트로 월간 객석에 2년간 연재했던 글을 묶어 펴낸 책이다. 2000년 미국 컬럼비아대 유학 시절 <피가로의 결혼>을 보고 반해 오페라에 본격적으로 빠져들었다. 2003년에는 동호회 ‘돌체 비타’를 만들어 준전문가급 오페라 애호가가 됐다.
대변인 사의 표명을 하고 2주 후인 올 1월에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다울 음악회>에서 오페라 콘서트의 사회자 겸 해설자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미술에도 관심이 있어 발이 부르트도록 뉴욕의 화랑을 돌아다니며 화집을 사들였다. 집에 보관하고 있는 화집만도 100권이 넘는다. 그림이 있는 오페라 글을 쓸 수 있었던 이유도 이때 사 모은 화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책을 보니 준비작업이 만만치 않았겠어요.
“그 책을 만들면서 주말마다 제가 모은 화보집에 일일이 라벨을 붙이며 오페라와 관련된 그림을 찾아내는 게 일이었어요. 그림이 없을 때는 대형서점 미술코너를 다 뒤져 구했고요.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힘든 줄도 몰랐죠. 2권을 내야 하는 데 아직 엄두도 못 내고 있어요.”
─문화정책 쪽에도 관심이 많으시죠?
“해외 출장 때마다 미술관장과 오페라단장을 만나요. 그때마다 문화교류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죠. 지난해 8월에는 호주 정부 초청으로 한 달간 호주를 방문했는데 호주 오페라단장과 우리 국립오페라단장을 연결해주기도 했어요.”
─미래의 문화부 장관도 꿈꾸실 수 있겠네요?
“(웃으며) 선출직이 됐든 임명직이 됐든 구체적인 일을 맡아 하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프랑스도 미테랑 대통령 시절 문화사업 인프라를 잘 만들어 지금까지 그 덕으로 먹고살잖아요. 오르세미술관도 독립재정으로 만든 자산이고요. 한국의 문화정책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냉온탕을 왔다갔다할 게 아니라 일관성 있는 지원정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봐요. 문화 콘텐츠도 결국 한 나라의 든든한 자본이니까요.”
─기존 정치인 이미지와 많이 다릅니다. 어떤 정치를 하고 싶으세요?
“이념의 정쟁에만 매몰된 리더십은 지양하고 예술처럼 다른 것이 서로 어울려 새로운 가치와 미를 창조하는 통섭의 정치를 하고 싶어요. 우리나라는 지금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변곡점에 와 있어요.
요즘 외국에 나가면 한국을 동경하는 나라들이 많아요. 한국이 G20 국가군에 들어갔다는 것도 가슴 벅차고요. 이데올로기 스펙트럼이 좁혀진 상태에서 이제는 좀 글로벌한 시각을 가지고 다른 것을 포용할 수 있는 화합의 정치를 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지역구로 나올 생각은 없으신가요?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힘든 과정이라는 걸 알죠. 지역 주민의 지지도 받아야 하고… 시민운동에 기여하면서 영향력을 키워가면 자연스럽게 준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쵸쵸상의 모습을 가슴에 안은 채 살고 있다. 살다 보면 너무나 씩씩하게 사는 데 지쳐 누구나 가끔은 간절히 누군지 모르는 막연한 대상의 등 뒤로 잠시 숨어 버리고 싶은 때가 있지 않은가.”
─<미술관에서 오페라를 만나다> 중 ‘나비부인’ 편. 조윤선 저.
아직 정치인으로서 노련함은 좀 더 갖춰야 하는 초선 의원.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정치인에게는 드문 ‘솔직함’과 감수성이 있다. 울고 싶을 때 울고, 힘들 땐 숨고 싶다고 말하는 정치인. 앞으로 그가 그려낼 정치가 무척 궁금해진다. (끝)
첫댓글 일가님들 창밖에 홍매화가 활짝 피였답니다~ 봄도오고 우리 함안조가네의 큰 경사[조윤선여성가족부장관]내정~ 다 시 한번 축하~ 축하...!!
다시 한번 축하의 박수~짝짝짝!!!
무궁화(박근혜대통령당선자)꽃~ 홍매화(조윤선여성가족부장관내정자)꽃이 피였습니다....짝짝짝!!!
함안조문의 숨은 보물~ 모두들 아끼고~딱고 ~ 빛을 내도록 중지를 모읍시다.^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