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인생교실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역사로 보는 한국사상 스크랩 조선의유학자및 주요학자정리
내생애 추천 0 조회 104 15.12.27 22: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김굉필 (金宏弼, 1454년 ~ 1504년)은 조선 전기의 문인, 성리학자로 호(號)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이며,[1] 본관은 서흥(瑞興)이다. 김종직의 제자로 김일손 등과 동문이었다. 그 자신도 조광조·이장곤·김안국·이연경 등의 제자들을 배출했으며 이들은 서인학파를 이루게 되었다.

한성부 정동에서 태어나 달성군 현풍에서 성장했다. 김종직 문하에서 소학을 읽고 스스로 "소학동자"라 일컬었고 평소 학문을 깊이 연구하여,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학문 전통을 이어, 성리학에 능하였으며 실천 궁행을 위주로 하는 학자였다.[2]

김굉필은 사헌부 감찰을 거쳐 형조좌랑을 지냈고, 1498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도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회천에 유배되었고, 2년 뒤에는 전라도 순천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 힘썼고 특히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했으며, 1504년 갑자사화 때 전라도 순천의 유배지에서 사형당했다. 저서로 《경현록》, 《한훤당집》이 전한다.

1577년에 시호 문경(文敬)을 받았고,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1610년에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동방 5현으로 성균관 문묘에 배향되었다. 아산의 인산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회천의 성현서원, 현풍의 도동서원, 순천의 옥천서원에 제향되어 있다.

평소 육경(六經) 연구에 몰두하여 성리학에 통달했으며, 문하에서 조광조·이장곤(李長坤)·김안국(金安國)·이연경 등이 배출되었다. 조광조의 학맥은 조광조-성수침-성혼으로 이어지는 한편 율곡 이이는 조광조의 직계 제자는 아니나 그를 사숙함으로서, 조광조의 후계자들은 서인 학파를 이루게 된다. 김안국의 제자는 김인후이고 김인후의 문인이 정철로, 정철 역시 성혼, 이이와 함께 역시 서인 학파를 형성하였다

권극중(權克中, 1585년 ~ 1659년)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도교학자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정지(正之)[1], 호는 청하(靑霞)이다.

권극중(權克中, 1585년 ~ 1659년)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도교학자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정지(正之)[1], 호는 청하(靑霞)이다.참동계(契註解)》의 주해서 《참동계주해(參同契註解)》문집 《청하집(靑霞集)》

기대승(奇大升, 1527년~1572년)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다.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峰)·존재(存齋), 시호는 문헌, 본관은 행주이다.

1558년(명종 13년) 문과에 급제한 후 사관(史官)을 거쳐 사정(司正)이 되었으나, 훈구파에 의해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선조 때 대사성이 되었다. 그 뒤 해직된 다음에 다시 부제학 등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퇴하고 고향으로 가던 중 병을 얻어 전라북도 고부에서 죽었다.

어려서부터 독학하여 고전에 능통하였고 문학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황의 제자가 되어 김인후 등과 왕래하면서 새로운 학설을 많이 제시하였다. 특히,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 8년 동안이나 논란을 편 것은 유명한 일이다. 이 일 이후로는 이황도 그의 이론을 많이 따르게 되었다. 그는 글씨에도 재주가 뛰어나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주문(奏文)을 써서 광국공신3등(光國功臣三等)으로 덕원군(德原君)에 추봉되었다.

저서에 《고봉집》, 《주자 문록》, 《논사록》이 있다.

길재(吉再, 1353년~1419년 구미시)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해평,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이다.[1] 목은 이색과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말의 삼은으로 불린다.

11세 때 절에 들어가 글을 배우고, 18세 때인 1370년(공민왕 19) 박분에게 《논어》, 《맹자》를 배웠으며, 그 뒤 박분과 함께 개경으로 가서 이색, 정몽주, 권근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했다. 1388년(우왕 14)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창왕 때에는 문하주서가 되었으나, 고려가 쇠망할 기운을 보이자,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조선이 건국된 후인 정종 2년에,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세자 이방원이 그에게 태상박사의 벼슬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거절하고 고향인 선산(善山)에서 후배 양성에 힘썼다.

세종이 즉위하던 해인 1419년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성리학은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에게 이어졌다

김석문(金錫文, 1658년(효종 9년) ~ 1735년(영조 11년)은 조선시대 후기의 학자이다. 저서로는 《역학도해(易學圖解)》가 있다. 한국에서는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한 인물이다.

자는 병여(炳如), 호는 대곡(大谷)이다. 숙종때 관직에 등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치고 1726년(영조 2년) 통천군수를 지냈다. 그는 본래 성리학자였으나 평소 역학에 관심이 많아 역학에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별들이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으며 지구는 남극과 북극을 중심으로 1년에 366번 회전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인류 역사와 문명, 자연현상도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그러나 그의 주장은 당시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하고 후에 이규경, 홍대용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김안국(金安國, 1478년~1543년)은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국경, 호는 모재, 본관은 의성이다.

조광조·기준 등과 함께 김굉필의 제자로서 도학에 통달하여 지치주의 유학파를 형성하였다. 연산군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박사·예조참의를 지냈다. 한때 경상 감사가 되어 영남에 가 있을 때, 모든 읍의 향교에다 《소학》을 나누어주어 가르치게 하여 교화사업에 힘썼다. 다시 서울에 올라와 참찬이 되었으나, 이 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의 소장파 명신들이 거의 다 잡혀 죽을 때, 겨우 죽음을 면하고 관직에서 쫓겨나 이천에서 후진들을 가르치며 한가히 지냈다. 후에 다시 등용되어 좌찬성·대제학 등을 지냈다. 저서로 《모재집》, 《모재가훈》, 《동몽선습》, 《여씨향약》 등이 있다.

김육(金堉, 1580년 ~ 1658년)은 조선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며, 효종·현종 연간에 대동법의 시행을 추진하였다.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초호는 회정당(晦靜堂)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고손자.

판관 김비의 손자이자 강릉참봉 김흥우의 아들로 서울 마포(麻浦)에서 태어났다. 청음 김상헌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605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수학하였다. 1605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생으로 공부하였다.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1610년 3번이나 상소를 올려 성혼(成渾)의 원통함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른바 오현을 문묘에 모시는 오현종사를 건의하였다. 1611년 정인홍 등이 이황(李滉)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에 격분하여,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하는 부황에 앞장섰다가 성균관에서 퇴교당했다. 이후 경기도 가평군 잠곡리(潛谷里)로 낙향, 농사지으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조정에 나가 의금부 도사가 됐고,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모시고 피난했다가 돌아왔으며, 환도 후에 음성 현감으로 부임하였다.[1] 1624년(인조 2년) 증광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정언에 임명됐다가 1633년 안변 도호부사로 부임하여 청나라의 침입을 대비하였다.[1]

36년 명나라에 파견될 성절사(聖節使)로서 연경에 갔으며, 37년 명나라에서 병자호란의 발발과 인조의 항복 소식을 접하였다. 명나라에 다녀와서 남긴 《조천일기(朝天日記)》에는 그가 직접 목격한 명나라 관원의 타락과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를 기술하였다. 1638년 승문원부제조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여 도내의 토지대장과 세금 징수상황을 점검하였다.

1643년 한성부 우윤·도승지를 지냈다.[2] 소현세자가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 가자 보양관으로 소현세자를 수행하였으며 귀국하여 우부빈객이 되었으며, 겨울에는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어 원손을 모시고 심양으로 들어갔다. 이듬해 귀국하면서 평안도 일대의 사신접대 폐단을 없애는 데 애썼다. 1645년(인조 23년)에는 관상감 제조가 됐다. 46년 민회빈 강씨의 처벌에 반대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입어 면직당하였다.

1649년(효종 1년) 대사헌을 거쳐 의정부 우의정이 되고, 이어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다시 영중추원부사로 진향사가 되어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실록청 총재관으로 인조실록의 편찬을 맡아보았고, 1650년 대동법 실시 문제로 김집(金集)과 논쟁하였다. 그뒤 사직했으나 1654년 영돈녕부사, 1655년(효종 6년) 영의정이 됐다.[2]

개성 숭양서원, 가평 잠곡서원(潛谷書院), 강동(江東)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경제 정책에 대한 탁월한 식견으로 충청도 관찰사 재직시 공물법(貢物法)을 폐지하고, 백성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는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2] 이는 그의 사후 장남 김좌명에 의하여 전라도 · 경상도 · 황해도에 차례로 대동법이 실시되었다.[1] 또한 서양의 새로운 역법(달력법)인 신력효식(新曆曉式)을 보고 1653년부터 시헌력이라는 새 역법을 시행하게 하였으며, 수레를 제작하고 관개에 수차의 활용을 건의하였다. 1651년 상평통보의 주조를 건의하였고, 병자호란 때 소실된 활자를 새로이 제작, 많은 서적을 간행하도록 하였다. 그의 경제학은 실학의 선구자인 유형원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2]

저서《잠곡필담(潛谷筆談)》《송도지(松都誌)》《팔현전(八賢傳)》《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김인후(金麟厚, 1510년~1560년)는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후지, 호는 하서(河西), 본관은 울산이다. 인촌 김성수의 선조가 된다.

김안국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황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등용되었다.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황의 이기 일물설에 반대하였으며, 이기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에 정통하였다. 저서에 《하서집》, 〈주역관상편〉 등이 있다.

김인후가 죽고 나서 수년 뒤 이웃에 사는 오세억이란 사람이 죽었다가 하루 만에 살아났는데, 죽어서 자미궁(紫微宮)이란 곳에 갔더니 자미선으로 있는 김인후가 명부를 보며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고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전한다.[1]

정조는 "도학과 절의, 문장을 모두 갖추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라고 칭송하였다.[1]

김장생(金長生, 1548년 7월 한성 ~ 1631년 충청남도 논산)은 조선의 유학자이며, 동방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본관은 광산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평산신씨로 이간공(夷簡公) 신영(申瑛)의 딸이다.

처음에 구봉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후에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워 예학파 유학의 거두가 되었다.

1578년(선조 11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올라 참봉·현감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으로 명나라의 군량미 조달에 공을 세웠으며,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군량미를 조달하는 데 힘쓰면서 후금과의 화의에 반대하였다.

이듬해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연산(連山)에 은거하면서 학문 연구에 전심하며 후배들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송시열·송준길 등의 유학자를 배출하여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를 이룩하였다. 또한 예학을 깊이 연구하여 아들 김집(金集)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주류를 형성하여, 동방 18현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들 김집은 유홍(兪泓)의 딸과 결혼하여 정실부인으로 맞이하였다.[1] 그 뒤 아버지 김장생의 스승인 이이의 첩의 딸 이씨를 첩으로 들였다.[1][2][3]

며느리 유씨가 사망하자 예학의 최고 권위자였던 사계는 아들이 재혼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김집은 "사람이 각각 운명이 있는 법인데 운명이 좋지 않아서 먼저 사람과 평생동안 욕을 보았는데 이제 다시 장가 든다고 해도 꼭 먼저사람보다 나을 줄 알겠습니까" 라며 거절하였다 한다.[2][3]

1641년(인조 19) 묘를 연산군 고정리 우수산(連山縣 高井里 牛首山)으로 이장 하였으니, 현재의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로 선조비 허씨 묘의 후편이다. 1657년(효종 9)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며, 1717년(숙종 44) 문묘(文廟)에 종향되고 연산 돈암서원(遯巖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등 10여 서원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사계전서(沙溪全書) 51권, (見朝鮮王朝實錄, 沙溪全書, 神道碑文) 》[4], 《경서판의》, 《가례집람》, 《송강행록》 등이 있다.

김정희(金正喜, 1786년 ~ 1856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금석학자·고증학자이다. 본관은 경주,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등이다.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영조의 딸 화순옹주가 출가한 월성위 집안에서 태어난 김정희의 집안에는 대대로 명필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기계 유씨가 임신한 지 2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전설이 있다.[1] 7세 때 입춘대길이라 쓴 글을 문앞에 붙여 놓으니 지나가던 채제공이 보고는 김정희에게 장차 명필이 되겠다고 칭찬했다고 한다.[2] 서얼 출신으로 시, 서, 화에 모두 능했던 박제가에게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다가 큰아버지 김노영이 귀양 가고, 둘째 큰아버지 김노성, 할머니, 할아버지 등이 죽게 되었다. 그러자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집안의 뜻에 따라 김노영의 양자로 입적된 뒤 15세의 나이로 동갑인 한산 이씨와 혼인한다. 결혼하던 그해 정조가 승하하고(1800년), 그의 증대고모뻘인 김대비(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그 연고로 친부인 김노경은 종3품까지 벼슬이 오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생모가 34세로 세상을 떠나자, 비탄과 허무감에 고향 예산으로 내려가 불교에 심취하기도 한다.

스무살 되던 해(1805년) 대왕대비가 승하하고, 그 다음달에는 부인 한산 이씨가 죽었다. 이 무렵 스승 박제가가 유배에서 풀려났다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양어머니도 얼마 뒤 죽었다. 양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른 뒤 한 살 아래인 규수와 재혼한다. 이듬해인 1809년(순조 9) 생원시에 장원급제한다.

24세 때인 1810년(순조 10)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군관으로 따라갔다. 6개월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된다.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기증까지 하였으며, 김정희가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조선에 돌아온 뒤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때 〈실사구시설〉 등을 발표하여 북학(北學)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한편 성리학적 관념론을 비판했다.

김정희는 한국 금석학의 개조로 여겨진다. 김정희는 청나라에서 고증학을 배울 때 금석학도 함께 배웠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 친구인 김경연, 조인영 등과 함께 비문을 보러 팔도를 답사하기도 했다. 김정희가 남긴 금석학의 가장 큰 업적은 1816년 당시까지 “무학 대사의 비” 또는 “고려 태조의 비”라고 알려져 있던 북한산비를, 비문에 적힌 “…眞興太王及衆臣巡狩…”라는 구절을 통해 진흥왕 순수비라고 밝혀냈다. 순수비를 밝혀낸 과정과 그 사실적인 증명은 그가 저술한 《금석과안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학문 태도를 밝힌 글로서 유명한 〈실사구시설〉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김정희는 그밖에도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전각(篆刻)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차(茶)를 좋아하여 한국의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 스님, 백파 스님과 친분을 맺었다.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암행어사 등에까지 올랐다. 그 무렵 친구 조인영의 조카사위이자 19세의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필선이 된다. 하지만 효명세자가 죽고 나자 권력을 잡은 안동 김씨 집안의 김우명이 그를 탄핵하여 파면되었으며, 그 아버지 김노경은 귀양을 가게 된다. 김우명은 비인현감으로 있다가 암행어사로 내려온 김정희에게 파직된 바 있었는데, 이는 김정희가 너무 강직한 탓이었다. 김노경은 순조가 죽던 1834년 유배에서 풀려난다.

1835년(헌종 1년) 친분이 있던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자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판 이조판서 등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840년(헌종 6년) 무렵 안동 김씨기 집권하자 윤상도(尹尙度)의 옥(獄)에 관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1842년 음력 11월 부인이 세상을 떠났으며, 그 예순세 살인 1848년 음력 12월 6일에 유배에서 풀려난다. 제주도에서 유배하던 때에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에까지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여 만든 서체가 추사체이다. 이 추사체는 한국의 필법뿐만 아니라 한국의 비문과 중국의 비문의 필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그의 대쪽 같은 성품은 그 뒤로 안동 김씨의 표적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친구 권돈인이 영의정으로 김정희를 돌봐 주었는데, 궁중의 제례와 관련하여 그가 실수를 하게 되었다(→헌종묘천 문제). 1850년(철종 1년) 또는 1851년에 실수한 권돈인은 물론이고 친구였던 김정희까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북청 유배는 1852년 예순여덟 살 겨울에야 풀려나게 되며, 그동안 지인과 제자로부터 고대의 석기를 모아오게 하여 한국의 고대 문화를 연구하였다고 한다.

북청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과천에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는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으며, 일흔한 살 되던 해에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으며,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하였다고 한다.

김정희는 많은 사람과 알고 지냈다. 신위, 오경석, 민태호, 민규호, 강위 등 중인 계층과 양반 사대부 계층 등을 이끄는 거대한 학파의 지도자였다. 그의 문하생이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가로 이름을 남기게 되며, 대원군의 정책도 북학에 기초한 실학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학문에서는 고증학에 뜻을 두어 중국의 학자들과 문연(文緣)을 맺어 고증학을 수입하였고, 금석학 연구로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는 등 고증적인 공로도 크다.

서예·도서·시문·묵화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묵화에서는 난초·대나무·산수화 등도 잘 그렸다. 한편 그에게 금석학을 배운 유명한 인물로는 오경석이 있고, 난초를 배운 이는 이하응이 있다.

그리고 지인에게 난초를 그려 줄 때 별호를 다르게 할 때가 잦아 한국의 위인 가운데 가장 많은 별호를 가지고 있다. 추사는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별호로서 서호(書號)이다.

귀양을 가고 풀려나기를 반복하여 일생 동안 귀양살이가 도합 13년이나 되었다.

저서《금석과안록》《완당집》그림《묵죽도》《묵란도》초한도

김종직(金宗直, 1431년 ~ 1492년)은 조선의 성리학자이다. 자는 계온(季溫)·효관(孝?), 호는 점필재(?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1431년(세종 14년) 밀양에서 김숙자의 막내로 출생하였으며, 1459년(세조 5)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 초에 성종 초에 경연관·함양군수(咸陽郡守)·참교(參校)·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으며, 도승지·이조 참판·동지경연사·한성부윤·공조 참판·형조 판서·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영남학파의 종조(宗祖)로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으며, 성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아 제자들을 관직에 등용시킴으로써 훈구파와 심한 대립을 일으켰다.

그는 일찍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었는데,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 4년)에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이것을 사초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부관참시(관을 부수어 시체의 목을 벰)를 당하고 많은 문집이 소각되었으며, 그의 제자들이 모두 참화를 당하였다.

총재관으로서 《동국여지승람》 55권을 증수하였고 서화에도 뛰어났다.

길재(吉再) 및 아버지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문 경향은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주안으로 하는 실제적 방면에 치중한 것이었다.

저서《점필재집》《청구풍아》《유두유록》

가족 관계부(父) : 김숙자형(兄) : 김종석

김좌명(金佐明, 1616년 ~ 1671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청풍, 자는 일정(一正), 호는 귀천(歸川)이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지냈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지냈다. 아버지 김육의 건의에 따라 효종이 호남 연해와 산골까지 대동법을 실시하려 하자 자진하여 그 책임자로 나섰고, 현종 때 군율을 바로잡아서 수어사를 겸하게 되었다. 호조판서 때에는 서리들의 부정이 줄고, 국비를 덜어 재정을 윤활하게 하였다. 그러나 여러 관직을 겸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한 끝에 과로로 사망하였다. 사후 영의정 겸 청릉부원군(淸陵府院君)에 추증되었고, 종묘의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가족관계아버지 : 김육(金堉)동생 :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아들 : 청성부원군 김석주(金錫胄)

조카 :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金氏)

김집(金集, 1574년~1656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본관은 광산,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1] 김장생의 아들이다.

여덟 살에 송상현(宋象賢)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나 학통은 가학을 이어받았다.[2]

김집은 유홍(兪泓)의 딸과 결혼하여 정실부인으로 맞이하였다.[3] 그 뒤 아버지 김장생의 스승인 이이의 딸을 부실로 들였다.[3][4][5] 부인 유씨가 사망하자 집안 어른들은 가문의 대를 잇기위해 그가 재혼하길 원했으나 김집은 "사람이 각각 운명이 있는 법인데 운명이 좋지 않아서 먼저 사람과 평생동안 욕을 보았는데 이제 다시 장가 든다고 해도 꼭 먼저사람보다 나을 줄 알겠습니까" 라며 거절하고, 율곡 이이의 서녀와 해로하였다.[4][5]

18세에 과거 급제하여 동부승지·우부승지·공조참판·예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나, 벼슬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사임하여, 성균관 유생들이 소를 올려 벼슬에 머물도록 해달라고 하는 등 덕망이 높았다.[1]

그 뒤 세자익위사 위솔(世子翊衛司衛率),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 등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사헌부 지평(持平)·공조참의 · 승정원 승지 등을 역임했다.

김육 등에 의해 대동법이 주청되자 그는 대동법을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효종이 즉위하자, 청서(淸西)의 김상헌과 함께 등용되어 예조참판(禮曹參判)·대사헌·이조판서가 되었으며, 김상헌과 더불어 북벌을 추진했다. 벼슬에 있기보다 초야에 묻혀 학문에 힘썼다.

이이·성혼·송익필의 학문을 받아 예학(禮學)을 일으킨 부친 김장생을 이어 그 학문을 송시열, 송준길 등에게 전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2] 김장생과 더불어 부자가 문묘에 배향되어 동방 18현의 한 사람이다.

저서로 《신독재문집》·《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이 있다.

[편집] 가계

할아버지 : 김계휘(金繼輝)아버지 : 김장생 종손 : 김만중 종손 : 김만기

부인 : 기계유씨(송당 유홍의 딸)부실 : 덕수이씨(율곡 이이의 딸)

노수신(盧守愼, 1515년 ~ 1590년)은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 본관은 광주이다.

중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시강원 사서가 되었다. 명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을사사화를 일으켰다고 하여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여기에 양재역(良才驛) 벽서 사건이 겹쳐 진도로 다시 쫓겨가 19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동안 이황·김인후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하고 이황과 논쟁하여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을 저술하기도 했고, 《대학장구(大學章句)》, 《동몽수지(童蒙須知)》 등을 주석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영의정까지 지냈으나, 1588년 사임하고 영중추 부사가 되었다.

1589년 기축옥사로 정여립을 천거했던 관계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문장과 서예에도 능했고 양명학을 깊이 연구했다. 저서로 《시강록(侍講錄)》, 《소재문집(蘇齋文集)》 등이 있다.

박세채(朴世采, 1631년 ~ 1695년)는 조선의 정치가이며 유학자이다.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18세 때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이이·성혼의 문묘 종사에 대하여 반대하는 자들을 공격하다가 효종의 꾸지람을 듣고서는 과거 공부를 포기하였다. 김상헌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송시열과도 학문 교류를 하였다. 그는 소론으로 당쟁에 끼여들었으나 황 극 탕평설을 주장하면서 당쟁의 근절에 노력하였다. 그는 당대의 유종(儒宗)으로서 특히 예학에 밝았다.

많은 저술 외에 70여 권의 문집, 논어·맹자의 찬요, 유현들의 사우 연원을 수록한 책 등 후진들에게 귀중한 문헌을 남겼다.《범학전편》《남계집》《삼례의》《동유사우록》

송시열(宋時烈, 1607년 음력 11월 12일~1689년 음력 7월 24일)은 조선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이자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영보(英甫), 아명은 성뢰(聖賚),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며[1] 존칭은 송자(宋子).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聖人)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이며, 이는 1787년 조선 정부가 《송자대전》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1607년 오늘날 충청북도 옥천군 구룡촌(九龍村)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며칠 전에는 마을 앞의 강물이 이유 없이 바싹 말랐다가, 그가 태어나자 다시 물이 불었다고 하며, 또한 그가 태어나기 며칠 전에 그의 아버지 송갑조(宋甲祚)의 꿈에 공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나타나서 그 중의 한 제자를 가리키며 “이 아이를 그대에게 보내니 잘 가르치시오.”라고 말한 뒤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송시열은 3세 때에 혼자서 이미 글자를 깨우쳤으며, 7세 때에는 그의 두 형이 읽은 글을 받아 적을 줄 알았다고 한다. 송갑조, 김장생의 문인으로 그 뒤로 송시열은 아버지 송갑조를 비롯하여 당시의 유명한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3촌 숙질 간인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동문수학하였으며, 뛰어난 학문으로 노론(老論)의 쌍벽을 이루었다.[출처 필요]

한편 그는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고,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敬陵)참봉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고, 1635년 봉림대군(효종)의 스승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민족적 수치를 느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에만 전념했다.

그 뒤 1649년(효종 1년) 인조의 뒤를 이어서 효종이 임금이 되자 송시열은 곧 어명을 받들어 다시 사헌부 장령에 등용하자, 세자시강원 진선을 거쳐 집의가 되어 정계에 진출하였다.

당시 집권당인 서인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1650년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1649년 대제학 조경(趙絅)이 찬술한 《장릉지문》에 따르면,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나라의 압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충주목사(忠州牧師)·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이때 김자점은 효종이 새 사람을 등용하여 장차 청나라에 항거하려 한다고 하자, 청나라는 국경 지대에 병력을 집결하고 사신을 보내 추궁하였고, 이에 송시열은 또 사임하고 돌아갔다는 주장도 있다.[2]

1658년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1659년) 봄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한편 효종의 병이 위독하여 당시의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와 더불어 그를 불러 뒷일을 부탁하려는 눈치였으나 두 사람이 병상에 들어갔을 땐 이미 왕은 붕어한 뒤였다.

회덕의 우암고택효종 다음의 현종도 그를 신임하여 숭록대부에 특진시키고, 이조 판서에 판의금부사를 겸임시켰다. 이어서 1660년 좌참찬으로 임명되어 효종의 능지(陵誌)를 지었다. 우찬성에 올랐을 때 효종의 장례와 장지(葬地)를 에워싸고 말썽이 일어나 그는 사임하고 회덕(懷德)으로 돌아갔다.

윤선도(尹善道) 등의 공격을 받은 것도 그 직후였다. 이 후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다가 1668년 우의정으로 취임하였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 뜻이 맞지 않아 한때 사임하였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으로 복직하였다. 이어서 허적이 물러가자 1672년 좌의정에 승진하고, 그의 후임으로 김수항(金壽恒)이 우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효종이 돌아갈 때의 대왕대비 복상 문제와 장지 문제는 항상 말썽의 대상이 되어 벼슬길도 평탄치 못하였다.

마침내 현종이 돌아가고 숙종 때 이르러 덕원(德源)·웅천(熊川)·장기(長?)·거제(巨濟)·청풍(淸風) 등지로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려 나왔다.

그 뒤 효종의 죽음으로 효종의 계모였던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제기되자 송시열은 중국의 주례에 따라 부모상에 자녀는 3년복, 자녀 중 장남의 상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고 차남 이하는 1년복을 입는다는 것을 참고하여 기년설(만 1년설)을 주장하였으며,[3] 윤휴가 이의를 제기하자 의례 참최장의 주석을 찾아서 서자는 장자가 될 수 없고 본부인 소생 둘째 아들 이하는 모두 서자로 간주한다는 자료를 증거로 제시하였다. 남인이 계속 정치 공세를 가하자 의례의 3년조의 소에 가통(家通)을 계승하였더라도 3년 상복을 입지 않는 사유인 사종지설과 체이부정, 정이부체설을 찾아서 제출하였다.[4] 그러나 남인은 송시열을 탄핵하여 역모로 몰아가려다가 실패하였고, 3년설을 주장하며 송시열이 효종의 왕통을 부정한다는 정치 공세성 모함을 하며 송시열을 제거하려 하자 그는 기년설을 관철시키고 남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사건 이후 송시열은 서인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74년 인선왕후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했고,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남인의 공격을 받고 1675년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 장소가 옮겨졌다.

남인이 예송 논쟁을 빌미로 송시열을 역모로 몰아가려 하자 송시열을 두둔하는 상소가 올라왔는데, 그 중 송시열의 제자이며 대전 회덕의 유생인 송상민이 1679년 음력 3월 12일 예송 논쟁의 전말을 정리하여 책 《석곡봉사》를 지어 올리며 송시열의 처벌이 부당함을 호소하며 송시열의 구명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실패하고, 분노한 숙종은 송상민을 사사했다.[5] 남인들은 다시 송시열을 죽이기 위해 고묘(종묘에 고하는 일)를 계속하여 주장하였다.[6]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영중추부사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胃), 김익훈 등을 지지하여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였던 윤증(尹拯)과의 감정 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과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장파인 노론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그 후 금강산 지방을 여행하고 사표를 낸 후로는 다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충청도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숙종의 비위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어 숙종은 크게 노하여 그의 모든 관작을 박탈하였다. 이에 의론이 분분하여 마침내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다시 불러다가 심문하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우세하니 숙종은 또 이를 허락하였다. 붙들려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정읍에 이르자 이미 사약(賜藥)이 내렸으므로 제자 권상하(權尙夏)·김만준(金萬埈)의 손을 붙잡고 뒷일을 부탁한 후 세상을 떠났다. 그 후 5년 만에 조정에서 관작을 복구하고 시호를 내렸다.

송시열은 성격이 과격하여 정치적인 적을 많이 두었으나, 학식이 뛰어나 문하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조선 국왕 효종, 현종 두 임금이 그의 제자였으며, 송상민, 송상기, 민정중, 김만기, 김만중, 이경화, 윤증, 민진원, 김익훈 등은 모두 그의 제자들이었다. 귀양지에서도 끊임없이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등과 같은 저서를 많이 집필하였다. 송시열이 사망한 지 5년 후에 문묘·효종묘를 비롯하여 충청북도 청주의 화양서원, 경기도 여주의 대로사, 수원의 매곡서원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송시열은 유교 예법을 고수하여 매우 보수적이라고 평가를 받고 있지만 실제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고 여러 대안을 제시하였다.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양반의 노비증식을 억제하고 양민이 노비화되는 것을 막는 노비종모법을 옹호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의 인재의 등용하고 서얼에게 관직을 줄 것을 주장하고, 양반부녀자들의 개가를 허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가장 역점을 두었던 정책은 양민의 생활안정을 위해 공안(貢案)을 개정하고 대동법을 확대, 시행하며, 양민들의 군비부담을 줄이는 호포제의 실시하는 것이었다.

저서《우암집(尤庵集)》《송서습유(宋書拾遺)》《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정서분류(程書分類)》

《송자대전(宋子大全)》 : 송시열 저서 모음집, 사후 편찬

송익필(宋翼弼, 1534년∼1599년)은 조선의 유학자이다. 자는 운장, 호는 구봉, 본관은 여산이다.

 

이이·성혼 등과 사귀어 성리학을 논하여 통하였고 예학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문장에 능해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시와 글씨에도 탁월하였다. 김장생·정엽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특히 김장생은 스승의 예학을 계승하여 조선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

송준길(宋浚吉, 1606년 ~ 1672년)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였으나 노론·소론이 분당되기 전에 사망하였으나 사실상 그가 이끌던 문인들은 그의 사후 노론을 형성하였다. 친척인 송시열과 함께 양송으로도 불렸다.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본관은 은진. 영천군수를 지낸 송이창(宋爾昌)의 아들이다. 사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양산보(梁山甫, 1503년~1557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제주, 자는 언진(彦鎭), 호는 소쇄옹(瀟灑翁)이다.[1]

총명·단정한 성품으로 어렸을 때부터 글을 깨우쳤다. 열다섯이 되던 해에 정암 조광조 문하에서 글공부를 하여 1519년 기묘년에 현량과에 급제하였으나 숫자를 줄여 뽑는 바람에 낙방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중종이 그를 친히 불러 위로의 말과 함께 지필묵을 하사하셨다. 그해 겨울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괴수가 되었다 하여 화순 능주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죽자 원통함과 울분을 참을 수가 없어서 세상 모든 것을 잊고 산에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무등산 아래에 소쇄원이라는 별서정원을 짓고 두문불출하며 스스로를 소쇄옹이라 하였다.그 후에도 여러 번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해왔으나 끝내 버티어 나가지 않고 한가롭게 산중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연구하며 지냈다.

양팽손(梁彭孫, 1480년(성종 11년) ~ 1545년(인종 1년)) 조선시대 전기의 학자, 화가이다.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學圃),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1516년(중종 11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은 교리(校理)를 거쳐 용담현령(龍潭縣令)을 지냈다. 글씨와 산수화에 뛰어났는데 그의 산수화는 중종 때의 산수화풍을 대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작품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산수도(山水圖)>가 있는데 묘사가 정확하고 필치가 고답한 북종화풍의 회화로 알려진다. 개인 소장의 <춘강계칙도>도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며, 한편 일본 히로시마현(廣島縣)의 다이겐사(大願寺)에 있는 <소상팔경(瀟湘八景)>도 그의 필법과 매우 흡사하여 주목된다.

어유봉(魚有鳳, 1672~1744)은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조선 후기의 거유(巨儒)였다.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순서(舜瑞). 호는 기원(杞園). 경종의 장인 어유구(漁有龜)의 형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사마시를 거쳐, 1699년 대과(大科)에 응시했다가 시험의 부정을 보고 과거 응시를 단념하였다.

뒤에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가 건원릉(健元陵) 참봉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1719년 사헌부집의를 거쳐 양주(楊州)목사에 전임되자 사퇴하였다. 1722년 신임사화로 김창집의 동생이었던 그의 스승 김창협이 화를 입자 신원(伸寃)을 상소하였다.

1732년 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거쳐 사헌집의(執義)가 되고, 34년 호조참의, 1735년 승지, 찬선(贊善)을 지냈다.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이 심성변(心性辨)으로 논쟁할 때 이간의 편에 서서,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동일하게 오행(五行)의 이치를 갖추었다고 주장하였다.

저서《기원집》《경설어록》《오자수언》《논어상설》《어류요략》《대월첩》《풍아규송》

유성룡(柳成龍, 1542년~1607년 음력 5월 13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이자 유학자이며, 동인의 일원이다. 본관은 풍산(豊山)[1],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의성[1] 출신이며, 군수 유작(柳綽)의 손자이며,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柳仲?)의 둘째 아들이다.

이황의 제자로 조목(趙穆)·김성일과 함께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의 대가였다. 탁월한 군사 지식으로 무관 이순신을 후원하여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하여 승리로 이끌었으며,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겪은 뼈저린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현재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이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평가 받으며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1564년 명종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1566년 별시 문과를 거쳐 한원(翰苑)에 들어갔다가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 검열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명나라의 지식인들로부터 ‘서애 선생(西厓先生)’이라 불리며 존경을 받게 된다.

 

이조 정랑이 되어 이준경(李浚慶)의 관직을 삭탈함이 옳지 않음을 주장하였으며, 인성(仁聖) 대비가 죽었을 때 예조에서 기년설(朞年說)을 주장하였으나 유성룡은 적손(嫡孫)의 예를 따라 3년설이 타당함을 주장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후 응교(應敎) 등을 거쳐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 직제학(直提學), 부제학(副提學), 도승지, 대사헌(1582년~1583년), 대제학 등의 요직을 맡으며 별탈 없이 승진해 나갔다. 상주(尙州) 목사로 나가 예절로 다스렸으며 고향에서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던 중 함경 감사·대사성 등에 연달아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예조 판서 재직 중 위주 목사 서익(徐益)이 소를 올려 그를 간신이라 탄핵하니 물러나기를 청하고 3년 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형조 판서로 부름을 받고 대제학을 겸했다. 1590년 다시 예조 판서에 이르러 역옥(逆獄)이 일어나자 많은 사대부와 함께 그 이름이 죄인의 글에 나타났으므로 사퇴를 청하였으나 왕은 이조 판서에 옮겼다가 이어 우의정에 승진시키고 광국 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하였다.

이듬해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 문제로 정철을 비롯한 서인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동인에 속하여 정철을 처벌하는 데는 찬성하지만 서인 전체를 처벌하는 것에는 반대한다며 강경파인 북인의 일원인 이산해와 대립하였다. 또한 좌의정에 재직 중 일본이 그들의 군사를 명나라로 들여보내겠다는 국서를 보냈는데 영의정 이산해는 이를 묵살하자고 했으나 성룡은 이 사실을 중국에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그대로 실시하였으므로 뒷날에 명나라에 조선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였다.

1591년 선조가 명장을 천거하라고 했을 때 성룡은 권율·이순신·원균 등을 천거하여 뒷날에 나라의 간성이 되게 했다. 이 중 이순신은 전라도에, 원균은 경상도에 각각 배치되었으며 그 결과 이순신이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구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4도 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가 되어 당쟁과 전란 속에서 조선의 조정을 총지휘하게 된다. 이때 왕을 모시고 송도(松都)에 이르러 영의정이 되었으나 신잡의 말에 따라 그 날로 사퇴하고, 평양에서 소동을 일으킨 난민들을 진정시키고 조정에서 북행(정확하게는 북행하여 압록강을 넘어 명나라로 들어가자는 의견)을 말하는 자가 많았으나 홀로 의주로 향할 것을 주장하여 뒷날에 명나라 구원의 길을 열게 하였다.

또한 일본의 군사적 도발을 근본적으로 저지하기 위해서는 국방 안보 체제를 제대로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뒤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병사 조련 등 군비 확충에 총력을 기울였다. 더불어 여러 신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순신과 권율 등의 명장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듬해 관서 도체찰사(關西都體察使)가 되어 안주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직문하고 군량을 준비하다가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만나 평양의 지도를 주어 전투상의 편의를 제공하고 파주까지 진격하여 일본군을 궁지로 몰아붙이는 한편 일본의 간첩 수십 명을 잡아 적의 연락을 끊었다.

다시 영의정에 보직되었다가 1598년 명나라 장수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을 끌어들여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정인홍 등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다.

이에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한 그는 조용히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그 후 2년 만인 1600년에 복권되어 정부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다. 1604년(선조 37) 호성(扈聖) 공신에 책록되었다. 1607년 음력 5월 6일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당을 병산서원 뒤에 세우고 여산(廬山)의 퇴계묘(退溪廟)에 함께 모셨다.

유성룡은 바둑의 고수로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유성룡은 의학과 침술에도 조예가 깊어서 허준에게 의학과 침술에 대한 많은 조언을 하였다고 한다.

살아 생전 유성룡은 너무나 청렴했던 삶을 살았던 탓으로 장례비가 없었는데 이를 듣고 많은 백성들이 제수용품을 싸들고 문상을 왔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 때, 세상 사람들이 모두들 “유성룡이 아니었다면 우리들은 지금 이렇게 살아있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애석해 하였다고 한다.

유성룡은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한성에 2만, 팔도에 각 도당 1만)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는 당시 인구를 감안했을 때 조선 전체의 백성을 모두 징집하는 결과였으므로 너무 외세에 대비하는 데에만 치우쳐져 백성들의 생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유성룡은 권율, 이순신, 원균등의 장수들을 천거하여 이순신으로는 전라도를, 원균으로는 경상도를 각각 방어하도록 조치했다.

평가예악교화(禮樂敎化)·치병이재(治兵理財)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선조실록》에서는 편찬자의 평으로, 재상으로서의 그릇이 작고 붕당에 대한 마음을 떨치지 못해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면 용납하지 않았고 임금에게 바른 말을 고하지 못하여 대신다운 풍절이 없었다고 하는 등, 그의 성품에 대한 단점도 기록되어 있다.[2][3]

저서《징비록(懲毖錄)》《서애집(西厓集)》《난후잡록(亂後雜錄)》《진사록(辰巳錄)》《근폭집(芹曝集)》

윤봉구(尹鳳九, 1681년∼1767년)는 조선의 학자이다.

자는 서응, 호는 병계, 본관은 파평이다. 숙종 때 진사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영조 때 주자를 송시열 사당에 함께 모시자고 했다가 벼슬에서 쫓겨났다. 그 후 다시 등용되어 판서에까지 올랐으며 한원진과 함께 호론(湖論)을 내세웠다. 한원진·이이근·현상벽·한홍조·성만진·이간·채지홍 등과 함께 권상하의 문하에서 배워 이들을 '강문 8학사'라고 불렀다. 저서로 <병계집> <화양존주록> 등이 있다.

윤휴(尹?, 1617년~1680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로, 남인의 거두이며, 이조판서, 좌찬성 등을 지냈다. 예송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었다. 자는 희중(希仲), 호는 백호(白湖), 하헌(夏軒).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재학(才學)과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관직에 발탁되었다. 그뒤 두루 벼슬을 거쳐 1656년 종부시주부, 사헌부지평, 예빈시정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사퇴하고 내려가 학문 연구에 전심했다. 그는 주자만이 답을 아느냐며, 주자의 학설에 추종하여 이를 묵수하려는 태도를 배격하고, 《대학》,《중용》,《효경》 등의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구절과 해석을 수정, 주자와 대등한 입장에서 유학의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는 데 과감했다. 이는 당시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앞서 1660년(현종 11년) 복상문제가 일어나자 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와 함께 송시열의 예론(禮論)을 통박하다가 사문난적으로 낙인이 찍혔다. 논쟁 초기에 송시열은 윤휴의 주장을 접수하였으나, 남인이 복상 문제로 송시열을 제거하려 하자 송시열은 그를 공격하였다. 숙종 초에 남인이 득세하자 사헌부대사헌·이조판서·좌찬성의 요직을 역임했다. 정계에 등장한 이후 호포법·상평제의 실시와 전정(田政)의 개혁 등을 꾀하였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그뒤 우참찬(右參贊), 이조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정계에서 배제되어 갑산(甲山)에 유배된 뒤, 사형에 처해졌다.

비변사를 폐지하고 체부(體府)를 신설하여 북벌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결과가 안좋아 폐지되었다. 1689년 복권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독서기》《주례설》《중용대학후설》《중용설》《백호집》

이광사(李匡師, 1705년(숙종 31년) ~ 1777년(정조 1년))는 조선시대의 양명학자(陽明學者)이며 서예가이다.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수북(壽北),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755년(영조 31년) 나주(羅州) 벽서사건(壁書事件)으로 백부(伯父) 이진유(李眞儒)가 처벌을 당할 때 이에 연좌되어 회령(會寧), 진도(珍島) 등지에 유배되었다가 거기서 일생을 마쳤다. 일찍 윤순(尹淳)에게서 글씨를 공부하여 진서(眞書), 초서(草書), 전서(篆書), 예서(?書)에 모두 능했고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이룩했다. 서적으로는 영의정 이경석표(領議政李景奭表), 우의정 정우량지(右議政鄭羽良誌), 병조판서 윤적인비(兵曹判書尹蹟仁碑), 형조판서 이신의표(形曹判書李愼儀表) 등이 있다.

이기(李沂, 1848년 ~ 1909년)는 조선 말의 실학 사상가, 계몽운동가이다. 전라북도 김제에서 출생했고, 본관은 고성, 자는 백증(伯曾), 호는 해학(海鶴)·질재(質齋)·재곡(梓谷)[1]이다.

1906년 대한자강회, 자신회를 조직하였고, 1909년에는 나철, 정훈모, 오기호 등과 함께 서울에서 단군교를 세워 대종교의 기초가 되었다.

일생에 걸친 항일 구국 운동으로 1968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만손 (李晩孫, 1811년 ~ 1891년) 은 조선 고종 때의 유학자이다. 이황의 후손으로, 영남 유생들을 이끌고 위정척사론을 내세우면서 민씨 세도의 개화 정책을 정면으로 비난하였다. 김홍집이 일본에서 《조선책략》을 가지고 돌아와 왕에게 바치자, 1882년 강진규 등과 함께 〈만인소〉를 올려 당시의 정책을 비난하다가 유배되었다. 임오군란 후,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자 석방되었다.

이언적(李彦迪, 1491년 ~ 1553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유학자·현신(賢臣)이었다. 이름은 원래 이적(李迪)이었는데, 중종의 명령으로 “언”자를 덧붙였다. 호는 회재(晦齋), 자계용(紫溪翁)이고, 자는 복고(復古)이다. 경주 출생이며 여주(驪州)이다.[1]

1514년(중종 9년) 문과에 급제한 이래 이조정랑, 사헌부 장령, 밀양부사 등의 여러 관직을 거쳐 1530년에는 사간이 되었다. 그때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해서 모략을 받아 한양에서 쫓겨나 경주 자옥산에서 성리학 연구에 집중하였다. 1537년에 다시 관직에 올라 직제학을 역임하고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어 경내(境內)를 평안케 하는 등 여러 관직을 지냈고, 1545년에 의정부 우찬성이 되었다.

그해 을사사화가 일어나 관직에서 곧 물러났지만, 1547년(명종 2년)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돼서 강계(江界)로 귀양 가서 죽었다. 유배 때 많은 저서를 저술했다.

저서로 《대학장구보유》, 《속혹문》, 《군인록》 등이 있다.

죽은 후 시호인 문원(文元)을 받아 1573년 자옥산에 건립된 옥산서원에 제향했다. 동방 5현의 한 분으로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명종의 묘소에도 배향되었다.

그는 조선 왕조 전기의 가장 유명한 성리학자의 한 사람으로 특히 주리(主理)의 학설은 이황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무극태극 논쟁에 크게 기여했다.

이이(李珥, 1536년 음력 12월 26일~1584년 음력 1월 16일)는 조선시대의 문신, 성리학자이며 정치가다. 본관은 덕수,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아명은 현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의 5대손이며, 통덕랑으로 사후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이원수(李元秀)와 정경부인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었다.

2006년부터 쓰이는 대한민국 5000원권에 실린 이이의 초상1536년 강원도 강릉 죽헌동에 있는 외가인 오죽헌에서, 좌찬성에 추증된 이원수와 유명한 신사임당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사임당이 거처하던 오죽헌의 별채에서 태어났는데, 이이가 태어나기 전 신사임당의 꿈에 흑룡이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고 임신하고 출생하였기 때문에 그가 태어난 방은 몽룡실이라 일렀고, 아이 때의 이름은‘현룡(見龍)’이라 지었다가[1] 뒤에 이(珥)로 바꾸었다. 이후 경기도 파주 본가로 와서 생활하였다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는 사헌부 감찰이었으며, 어머니 신사임당은 덕이 매우 높은 인격자였을 뿐만 아니라, 절개가 굳고 시부모를 잘 섬긴다고 칭송을 받던 인물이었다. 더욱이 학문이 깊고 시와 글에도 능할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는 여인으로 이이는 어려서 어머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그의 외할아버지 진사 신명화(申命和)는 기묘사화 때의 의리를 지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1] 이렇게 훌륭한 피를 이어받은 이이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였다.

이이는 3세 때에 이미 글을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글과 그림을 흉내낼 정도로 놀라운 천재였다. 이이는 4세 때 중국의 역사책인 《사략》의 첫 권을 배웠는데 가르치는 스승보다도 더 토를 잘 달았다고 한다.

이이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5세 때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1시간 동안 기도를 올릴 정도로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 또 11세 때에는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이이는 칼 끝으로 자기의 팔을 찔러 흘러내리는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의 병을 낳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1548년, 이이는 13세 때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여 시험관은 물론 부모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이의 학문은 날로 깊어가서 15세 때에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서 더는 배울 것이 없을 정도였으며, 유교 서적뿐만 아니라, 그밖에 다른 여러 책까지도 통달하고 성리학까지 깊이 연구하였다.

1551년(명종 6) 16살이 되던 해 이이는 수운판관인 아버지가 평양으로 출장을 갈 때 따라가게 되었다. 이 무렵 신사임당은 몸이 불편하여 자리에 눕자, 사당에 홀로 들어가 매일 1시간 동안 기도를 올릴 정도로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컸다.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였던 이이는 3년 동안 어머니의 무덤 옆에 묘막을 짓고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또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이이는 칼 끝으로 자기의 팔을 찔러 흘러내리는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묘막에서 독서에 열중하던 이이는 불교 서적을 읽고 유교와 색다른 학문에 흥미를 느껴 3년상이 끝난 1554년(명종 9)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연구하였다. 어머니를 여의고 세상의 허무를 통탄하여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연구했다는 견해도 있다.[2] 불교가 유교에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1년 만에 금강산에서 내려왔다.

20세에 금강산에서 내려와 다시 성리학에 탐독하며 유교의 진리를 통해 현실 문제를 타개하겠다는 다짐을 설파하며 《자경문》(自警文)을 집필하였다.[1]

이이는 이황을 선학으로 모시고 존경하기도 하였다. 1558년(명종 13) 23살의 이이는 당시 대학자인 58세의 퇴계 이황을 찾아가서 만났다. 이이는 그곳에서 이틀간 머물며 이황과 학문의 여러 가지 문제와 사상을 논하고 시를 짓고 토론하였고, 이황은 그의 재능에 크게 감탄하였다. 비록 견해를 일치시키지 못했지만 그 후 이들은 가끔 편지를 서로 주고 받으며 학문에 관한 질의 응답을 나누곤 하였다. 이이가 질문을 하면 이황은 친절한 답변을 보냈고, 불교에서 과감히 벗어나 유교로 되돌아온 용기를 높이 평가하며 칭찬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었다.[1] 그해 겨울 별시(別試)에 장원하였는데, 이이는 13세 이후로 29세까지 생원시와 식년문과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는데, 이로써 그는 과거에 총 9번 장원 급제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거리를 지나갈 때면 아이들까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 지나간다고 우러러 보았다.

1564년(명종 19) 이이는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곧 호조좌랑이 되었다가 예조좌랑으로 전임하여 국가를 위해 일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이는 왕실의 외척 윤원형이 승려 보우를 궁중에 끌어들여 비행을 서슴지 않자 상소를 올려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고 윤원형을 관직에서 몰아냈다.

1567년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외척 심통원이 등용되어 횡포를 일삼았다. 이때 이이는 다시 상소를 올려 심통원을 탄핵하였다.

1568년(선조 1) 천추사가 명나라로 갈 때 서장관으로 동행한 뒤, 1569년 홍문관교리를 지냈으며, 그해 음력 9월에는 송강 정철과 함께 《동호문답》(東湖問答)이라고 하는 책을 써서 선조에게 올렸다. 그 무렵에 가장 관심갖고 추진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시무’(時務)와 ‘무실’(務實)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급선무로 해결해야 하는 정치가 어떤 것인가를 명확히 밝혔다.[1]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이는 계속 ‘시무’가 어떤 것인가를 계속하여 상소로도 올리기도 하였다.

1570년(선조 3) 해주 야두촌(海州野頭村)에 돌아가 학문의 터를 닦았다. 이듬해인 1571년 조정의 부름을 받고 청주목사로 임명되어 내려간 그는 서후향약을 정하고 백성들의 자치 생활을 권장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다음해 그는 학문 연구를 위하여 신변을 핑계로 사직하고 파주의 율곡촌으로 돌아와 학문에 힘썼다.

그러나 1573년(선조 6)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아 승정원의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우부승지로 옮겨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길고 긴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이이는 조선의 정치와 사회 풍습 중에서 잘못된 것 7가지를 국가적 근심거리라고 지적하였고 세세하게 설명하여 개선책을 강구하라는 요구 사항을 열거하였다.[1] 선조는 이이가 올린 상소문을 보고 감동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해 음력 3월 이이는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다시 고향인 파주 율곡촌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에 전심하였다.

1574년(선조 7)에는 또 조정의 요구로 황해도 감사로 약 반년간 재직하였다. 그 후에도 자주 조정과 고향을 왕복하면서 대사간·대사헌·호조판서·대제학·이조판서·우찬성·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42세 때인 1577년 황해도 해주의 석담으로 낙향하여, 은거하면서 글을 배우는 사람을 위해서 기초 서적인 격몽요결을 저술했다.[1]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힘을 쓰다가 1580년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아 하는 수 없이 정계에 진출하였다. 이듬해 음력 9월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성학집요》를 저술하였다. 5편으로 구성된 이이의 책을 받아본 선조는 “이 책은 참으로 필요한 책이다. 이건 부제학(율곡)의 말이 아니라 바로 성현의 말씀이다. 바른 정치에 절실하게 도움이 되겠지만, 나같이 불민한 임금으로 행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1]

이이는 평생 동안 대사간에 1만 9번이나 임명되었는데, 이것만 봐도 선조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이이는 1582년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여진족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대제학을 역임하고 우찬성에 올랐다.[1] 이듬해 당쟁의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탄핵을 받아 일시 퇴직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가 되는 등 반대파의 탄핵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경륜와 소신을 펼칠 만한 기회는 부족하였다.

또 1583년(선조 16)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병조판서로 시작된 그해 음력 2월에는 국방 강화를 위해 《시무육조》를 계진하였는데 내용은 첫째 어진이를 등용하시오, 둘째 군대와 백성을 제대로 키우시오. 셋째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마련하시오, 넷째 국경을 견고하게 지키시오, 다섯째 전쟁에 나갈 군마(軍馬)를 충분하게 길러야 합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교화(敎化)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같은 해 음력 4월 다시 ‘봉사’(封事)를 선조에게 올려 그동안 주장했던 폐정에 대한 개혁을 실시할 것을 다시 반복해서 요구하였다. 봉사에는 공안(貢案)의 개혁, 군적을 고치고 지방의 군현을 합병하여 불필요한 공직자 수를 줄이고, 관찰사(도지사)의 임기를 보장하여, 관찰사로 하여금 지방을 제대로 다스릴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하는 요구였고, 서얼 제도를 폐지하며 신분에 관계 없이 천민이나 노비 중에서도 능력 있는 사람은 평등하게 공직에 발탁하여 나랏일을 맡겨야 한다 등이었다. 그리고 ‘찬집청’(纂輯廳)이라는 관청을 신설하여 국가에서 각종 서적들의 편찬 사업을 주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경제사(經濟司)’를 신설하여 국가의 경제 문제의 해결을 담당하는 전담 부서로 활용해야 한다고 방안을 내놓았다.[1] 또한 선조에게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동인의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3]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던 당시, 조선의 총 병력수는 장부상으로는 30만 명이 넘었으나, 실제 전투 가능한 병력 숫자는 1,000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4] 1581년 대제학 재직 중 오랫동안 저술하던 《경연일기》의 완성을 보았다.[1]

십만양병설에 관한 의혹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학자도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십만양병설은 당시 조선의 사회적, 경제적 능력으로 보았을 때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사안이었으며, 그러한 한계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던 실무적 유학자인 이이로서는 오히려 십만양병설을 주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한다.

실제로 이이가 올렸던 상소문과 각종 글을 모은 문집을 살펴보면 당대 다른 중신들도 즐겨 쓰던 '양병'이란 글자는 나올지언정 '십만양병'에 관련된 내용은 일절 나오지 않는다고 하며, 오히려 군축을 해야 한다는 상소문이 십만양병설 대신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어 덧붙이기를, 십만양병설에 관련된 내용은 후대에 세워진, 율곡 이이를 기리는 비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고 하며 이는 율곡 이이를 숭배하던 후대 조선 유학자들이 일종의 신성화를 노려 억지로 날조하여 추가하였다고 한다.

당색으로는 서인에 속했는데, 이 때문에 동인의 집중 탄핵을 받아 이이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경장(更張)하고 싶어하던 구국의 뜻을 풀지 못한 채 병을 얻어 49세를 일기로 새벽에 사망하였다. 이이가 1년간의 입산 경력이 있음을 놓고, 불교와 관계했다 하여 뒷날의 동인 당쟁파들은 온갖 트집을 잡아 비방을 하였다.[1]

장지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장사되었다.[1]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우계 성혼과 구봉 송익필과는 이웃에 사는 절친한 친구였는데, 1682년(숙종 8)에는 우계 성혼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가 죽은 후 황해도 백천(白川)에 문회서원(文會書院)이 건립되어 그를 제사하였다.

그는 보기 드문 천재로서 성격과 태도가 이황과는 달리 기상이 호탕하고 도량이 넓어 학문에서도 분석적인 해석보다는 근본 원리를 자유롭게 종합적으로 통찰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의 사상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로 대표되며, 그가 23세 때 지은 《천도책(天道策)》에 이미 그 바탕이 드러나 있다. 즉 율곡은 이황이 기(氣)와 이(理)는 서로 독립되어 있다는 데 이설(異說)을 제기하여 우주의 본체는 이기이원(理氣二元)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인정하나 이와 기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분리되거나 선후(先後)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와 기는 최초부터 동시에 존재하며 영원무궁하게 떨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이는 조리(條理), 즉 당연의 법칙으로 우주의 체(體)요 기는 그 조리를 구체화하는 활동이니 우주의 용(用)이라 주장하였다.

그리고 도덕적 가치에서도 인간심리의 근본이 이와 기의 두 가지 근원이 있지 않고 일원적이라 하여 퇴계의 사단칠정(四端七情)설을 배격하였다. 이러한 학설은 서경덕과 이황의 설을 절충하여 집대성한 것으로 그는 자기의 주장을 발전시키면서 이 주장이 주자의 뜻과 어긋나면 주자가 잘못 된 것이라고까지 하는 자신을 얻게 된 것이다. 이같이 그는 학문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경세가(輕世家)로서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저작인 《동호문답(東湖問答)》, 《성학집요(聖學輯要)》,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시무육조소(時務六條疏)》 등은 모두 임금의 도리와 시무를 논한 명저로 그의 정치에 대한 태도는 유학자의 이상인 요순시대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 밖에 정치적 부패의 타개와 백성의 구제에 대한 방책에 관해서는 한층 구체적인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율곡은 부패의 시정책 7개항을 제시하였는데 특히 그 중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여 임진왜란을 예언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 밖에도 대동법의 실시와 사창의 설치 등을 제의한 일은 조선 사회 정책에 획기적인 혁신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일반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서원향약(西原鄕約)》, 《해주향약(海州鄕藥)》,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 《동거계사(同居戒辭)》, 《학교모범(學敎模範)》, 《해주은병정사학규(海州隱屛精舍學規)》, 《약속(約束)》, 《문헌서원학규(文獻書院學規)》 등의 규례를 많이 만들었다.

이항복은 이이의 신도비를 썼다.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은 이이의 가장 큰 제자로 이이의 일대기인 ‘행장’을 지어 이이의 업적을 찬양하였다. 김장생은 이이를 추모한 율곡행장에서 “고려 말엽에 문충공 정몽주 선생이 처음으로 도학(道學)을 열어 명유들이 이어져 조선에 와서 번창한다. 그러나 학문이 높고 밝은 데에 이르고 재주가 경국제세의 역량을 감당할 만하고 의리로써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났던 사람에는 조광조와 율곡 두 분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율곡이야말로 만세토록 태평성대의 나라를 세우려 했으니 그 공로가 원대하다 말하겠다며 극찬하였다.[1] 그는 제자들에게 동방지성인(東方之聖人)이라는 칭호를 받고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후세의 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제자로는 사계 김장생, 중봉 조헌, 수몽 정엽, 묵재 이귀 등의 학자들이 율곡의 문하였다.

저서《성학집요》(聖學輯要)《격몽요결》(擊蒙要訣)《동호문답》(東湖問答)《경연일기》(經筵日記)

《순언》(醇言)

가족아버지 : 이원수 - 통덕랑 사헌부감찰 수운판관 역임, 좌찬성에 추증어머니 : 신사임당

서모 : 권씨누이 : 이매창형 : 이번, 이선동생 : 이우부인 : 권씨

첩 :서녀 : 김집의 첩이 되었다.[5][6][7]서녀사위 : 김집 친척 : 이순신

이항로(李恒老, 1792년~1868년)는 조선의 유학자이자 문신이다.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본관은 벽진이며 경기도 포천 출신이다. [1]

3세 때 《천자문》을 떼고, 6세 때 《십팔사략》을 배웠다고 한다. 1840년 헌종 때 경사(經史)에 밝은 선비로 천거되어 휘경원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 벽계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1864년 고종 때 조두순의 추천으로 장원서 별제·전라도 도사를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특히 성리학에 밝았으며, 저서로 《화동역사 합편강목》 60권과 《벽계아언》 12권, 《주자대전 잡의집보》 등이 있다.

이정구1564(명종 19)~1635(인조 13).한문 4대가의 한 사람.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보만당(保晩堂)·추애(秋崖)·치암(癡菴)·습정(習靜). 현령 계(啓)의 아들로 윤근수의 문인이다. 14세에 승보시에 장원한 뒤, 22세에 진사,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1598년(선조 31) 명나라의 정응태 무고사건이 일어났을 때 〈무술변무주 戊戌辨誣奏〉를 지어 명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여러 차례 대제학에 올라 문사(文詞)에 능한 자들을 발굴했고, 중국을 내왕하면서 100여 장의 〈조천기행록 朝天紀行錄〉을 펴냈다. 그뒤 병조판서·예조판서·좌의정·우의정을 지냈다. 문학을 경세치용(經世致用)의 도구로 보았으며, 그의 문장은 당시 관인문학을 선도하는 전범(典範)을 보였다. 시문집으로 〈월사집〉 68권 22책이 전한다.

이황(李滉, 1501년 음력 11월 25일 ~ 1570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 명종·선조 시대의 명신.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이다.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도수·퇴도(退陶),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진사(進士) 이식(李埴)의 아들이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남인 계열의 종주이다.

이황은 경북 예안현(오늘날의 안동시 예안면)에서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마흔 살의 나이로 사망하여, 이황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다. 이황은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송재 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송재는 그때 관직에 있었는데, 바쁜 일과 중에도 퇴계를 가르쳤다.

1528년에 소과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승진을 거듭하여 성균관 사성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다시 불러 다시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전한이 되었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화를 입어 한때 파직되었다가 복직하였으나, 이미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을 때이므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양진암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일찍 그가 서울에 있을 때 《주자전서》를 읽고 여기 몰두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여, 마침내 대성하여 '동방의 주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배웠다. 비록 조정의 부름이 있더라도 관직에 오래 머물지 않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외직을 자청하였다. 명종 초에 단양·풍기 등의 군수를 역임한 것도 이 때문이다. 풍기 군수 시절에 소수서원 사액을 실현시켰다.

1552년(명종 7) 다시 소환되어 홍문관 교리·대사성·부제학·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앞서 풍기 군수의 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그는 한서암을 짓고 1555년에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세웠다. 이이가 그를 방문한 것도 이때의 일이며, 명종이 그가 관직에 나오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 화공에 명하여 도산(陶山)의 경치를 그려오게 하여 완상한 것도 이때의 미담이다.

그의 사상은 50~60세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변론·저술·편저 등 중요한 것은 모두 이 기간에 되었으며, 《계몽전의》, 《주자서절요》, 《송계원명이학통록》, 《인심경석의》 및 기대승과 문답한 《사단칠정분리기서》와 같은 것은 그의 대표적인 명저이다.

명종 말에 예조 판서가 되고 대제학·판중추 겸 지경연사 등이 되어 유명한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를 지어 임금께 올리니 이는 국은에 보답하고 학문을 개발하기 위한 만년의 대표작이다.

그가 죽자 선조는 시호를 내리고 영의정을 추증하였으며, 1610년 문묘(文廟)에 모셨다.

친구로서 호남의 대학자 하서 김인후, 사마시에 함께 급제한 김난상 등과 교류하였다.

이이와 더불어 한국의 성리학(유학)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주자의 이기이원론 적 사상을 계승하여 그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철저한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채택,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어디까지나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은 이와 기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기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 이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한 것이니, 즉 이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기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심성 문제를 해석함에도 역시 이러한 절대·상대의 가치를 가진 이기이원으로 분석하였다. 이것이 뒤에 기대승과의 논쟁이 벌어진 유명한 ‘사단칠정론’으로 이후 한국 유학자로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를 던진 것이다.그의 학문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쳐, 에도 시대에는 기몬 학파와 구마모토 학파가 있었고, 메이지 시대의 교육 이념의 기본 정신을 형성하였다.그러나 이황의 학문적 근본 입장은 진리를 이론에서 찾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진리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으로 지와 행의 일치를 주장, 그 기본이 되는 것이 성이요, 그에 대한 노력으로서 ‘경’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실로 그의 학문·인생관의 최후 결정은 이 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 경을 70여 생애를 통하여 실천한 것이 이황이었다. 그는 문학·고증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 사상·학풍이 후세에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 유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저서:퇴계전서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성학십도(聖學十圖)

장유(張維, 1587년∼1638년)는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묵소(默所)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판서 운익(雲翼)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둘째 아들, 우의정 김상용의 사위였다.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다.[1]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김장생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최명길, 조익, 이시백과 절친하여 사우정(四友情)으로 불렸다.[2] 13세에 아버지를 잃고 불우한 소년기를 보냈으며 1605년(선조 38) 향시에 장원을 했고, 1609년(광해군 1) 문과에 급제를 했다. 이후 예문관·승문원 등에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1] 관직생활을 하던 중에 김직재의 옥이 일어나면서 매제 황상이 김직재 옥사에 연루되어 역적으로 체포되면서 그는 인척이라는 이유로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12년 동안 장유는 고향인 안산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은거하며 독서와 저술에 전념했다. 이 무렵에 대가의 문장을 거의 다 접했으며, 저서 《묵소고》 를 엮기도 했다.[1]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었고, 이조좌랑과 암행어사 등을 지냈다. 그러나 그는 모시던 국왕을 쫓아낸 일을 부끄러워 하였다고 한다.[1] 그는 공신이면서도 공신의 전횡을 비판하고 소장 관인들을 보호하다 좌천을 당하기도 했다.[1] 인조 14년의 병자호란 대에 최명길과 함께 강화를 주장했으며, 또한 최명길과 함께 양명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조선시대의 사상이 편벽(偏僻)함을 지적하여 “중국에는 학술에 갈래가 많아 정학자(正學者)도 있고 단학자(丹學者)도 있고 정주(程朱)를 배우는 자도 있고 육씨(陸氏)를 배우는 자도 있어 문경(門經)이 불일(不一)한데 우리나라는 유식무식(有識無識)할 것 없이, 책끼고 글 읽는 사람은 다 정주(程朱)를 송(誦)하여 다른 학(學)이 있음을 듣지 못하나 우리 사습(士習)이 과연 중국보다 훌륭하고 그런 것인가?”라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우암 송시열은 장유에 대해 "그는 문장이 뛰어나고 의리가 정자와 주자를 주로 하였으므로 그와 더불어 비교할만한 이가 없다"고 평가하였다.[2] 그는 양명학을 선학이라고 비의(非議)함을 변박하였으며, 천문·지리·의술·병서(兵書)·그림·글씨에 능통했고, 특히 문장에 뛰어나 신흠·이식·이정구와 더불어 월상계택(月象谿澤) 4대가로 꼽혔다.

1637년 의정부우의정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친상을 이유로 18차례의 상소 끝에 물러났다. 사후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지고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1]

그의 많은 저술은 대부분 정묘호란 때 분실되었고 《계곡집(谿谷集)》, 《계곡만필(谿谷漫筆)》, 《음부경주해(陰符經主解)》 등이 남아 있다.

정도전(鄭道傳, 1342년[3] ~ 1398년 8월 26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아버지는 형부상서 염의선생 정운경이고 어머니는 우연의 딸 영천 우씨이다.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이자 최고 권력자였던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였다.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 등을 세자로 추대하였다가 이방원과의 왕위 다툼에 의한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살해되었다.

정도전은 1342년 아버지 형부상서 정운경과 어머니 영천 우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경기도 양주, 경상북도 영주와 봉화, 그리고 충청북도 단양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그의 호 삼봉은 삼각산과 같이 학문과 경술에 우뚝하라는 뜻으로 이존오,박의중,이집,김구용 등이 1369년 가을 삼각산 그의 집을 찾아와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4]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독서를 좋아하였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은 이곡과 나이를 잊은 두터운 친교가 있었기 때문에 이곡의 아들 이색과 가깝게 지낼수 있었고, 성균관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나 성리학에 대해 한층 심도있게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다.[5] 이때 그와 함께 공부했던 이들은 정몽주, 박의중, 윤소종, 이존오, 이숭인, 설장수(?長壽) 등이며, 성균관에서 경사(經史)를 강론하였는데 특히 문장과 성리학에 능하였다.

공민왕 때인 1360년 성균시에 급제한 데 이어 2년 뒤1362년 문과 동진사로 급제하여 1363년 충주사록(忠州司錄)으로 초임 관로에 나아갔다.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냈다. 그뒤 성균박사, 태상박사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출세를 하였다. 그러나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않았다. 공민왕이 신돈을 기용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해서 은둔생활을 하였으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정월과 12월에 연이어 작고하여 영주에서 3년간 여묘살이 하며 학문연구와 교육에 힘썼다.[5] 당시 관료들은 백일탈상이 관례였으나 그는 성리학적 가례에 따라 3년상의 예를 다 하였다.

70년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신돈이 제거된 뒤 정도전은 기용됐으나 1374년(공민왕 24)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친명파에 속했던 정도전은 다시 정치적 위기를 겪는다. 그 때 정국은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대결하고 있었다.[5]

1375년(우왕 1) 원나라 사신이 왔을 때 원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제로 조정에서는 신흥사대부와 권신들 간에 대립이 일어났다. 이인임과 지윤 등은 사신을 맞아들이자고 한 반면, 정도전을 비롯한 신흥사대부들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인임 등은 그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원나라 사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이인임은 정도전을 영접사로 보내려고 했다.[5] 이에 정도전은 “사신의 머리를 베든지, 그렇지 않으면 묶어서 명나라로 보내버리겠다.”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이인임·경부흥(慶復興) 등의 권신의 진노를 사 나주의 속현인 회진현(會津縣)으로 유배되었다.

1377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4년 간 선향 영주에서 학문과 후진을 양성하며 지냈다. 이때 정몽주가 맹자 한질을 보내와 하루 반장 또는 한장씩 읽으며 완전히 이해를 한 다음 뒷장을 넘겼다고 한다. 그가 즐겨 읽었던 《맹자》는 군주도 잘못하면 신하가 벌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책이다. 그 뒤 1381년 가을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와‘삼봉재’(三峯齋)를 열어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전국에서 많은 재생들이 운집하여 교육의 즐거움을 향유하였으나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전임 재상이 재실을 헐어 버리는 등 박해를 함으로써 재생들을 이끌고 부평부사 정의에 의탁하여 부평 남촌으로 이사하여 후생 교육사업을 재기 하였으나 이곳 역시 재상 왕모가 별장을 짓는다고 학숙을 폐쇄하였다. 계속되는 멸시와 박해로 다시 김포로 옮겨야 했다.[5]

1383년 가을 드디어 정도전은 비장의 결심을 하고 함주에 있는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갔다. 외적의 침략을 물리쳐 고려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른 이성계를 만나기 위해 함흥으로 직접 찾아간 것이다. 정도전은 부패한 관료로 인한 피폐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혁명 밖에 대안이 없다고 결론 짓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성계의 군사력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당시 조우에서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정예 군대와 일사분란한 지휘통솔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성계 또한 정도전의 심오한 학문과 원대한 국가경영에 대한 경술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동북면 군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군령을 엄하게 지킬 뿐 아니라 무기들 또한 잘 정비되어 있으며 훈련에도 열심히 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이 정도의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성공시키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넌지시 떠보았다. 평생 전쟁터를 누벼 온 이성계가 정도전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으나, 무슨 뜻이냐며 반문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동남방의 왜구를 소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정도전은 그날 밤 이성계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정도전은 군영 앞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이성계를 위해 시 한 수를 지었다.

아득한 세월에 소나무 한 그루

몇 만 겹 푸른 산속에 자랐도다.

잘 있다가 다른 날에 서로 만나 볼 수 있을는지?

인간 세상 굽어보다가 곧 큰 발자취를 남기리니.

이 시에서 정도전은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고 있는데, 앞으로 때가 되면 이성계는 천명(天命)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러 나서야 하며, 자신과 손잡고 큰일을 하여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속마음을 은근히 드러내었다. 이성계는 개혁을 주장하는 정도전에게 협력하기로 하고 지원을 약속했다. 그의 인물됨됨이에 매료된 정도전은 그의 막료가 되었고 이후 역성혁명까지도 논의하게 되었으며 이 일을 계기로 정도전은 이성계의 참모로서 큰 야망을 품게 되었다.

1384년 임용과 동시에 성절사(聖節使) 정몽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85년 성균관 제주(祭酒)와 86년 외보를 요청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도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부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388년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올랐다가 그해 음력 6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조준과 함께 이성계의 우익이 되어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다. 그해에는 우왕을 내쫓고, 이인임의 주장으로창왕을 세웠다.

이때 정도전은 힘껏 이성계를 뒤에서 도와주었다. 정도전은 밀직부사에 올라 조준 등과 함께 전제(田制) 개혁에 착수했다. 조세 제도와 토지 제도를 바로잡음으로써 새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자금 확보는 물론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어 조민수 등 구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차근차근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아 나갔다.

1389년 음력 11월 여주로 유배된 폐주 우왕이 자신을 찾아온 김저(金佇)와 정득후(鄭得厚)에게 보검을 주며 곽충보(郭忠輔)와 함께 이성계를 제거하라는 밀명을 내린 음모사실이 곽충보의 고변으로 발각되었다. 이에 이성계는 우왕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유배시켜 버렸다. 정도전은 정몽주, 조준과 함께 뜻을 같이해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하여 폐가입진을 실현하였다.

1391년에 이성계는 삼군도총제부를 만들고 군대를 장악하였고, 정도전은 우군도총제의 자리를 맡았다.[6]

1392년(공양왕 4) 4월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었다. 6월 정도전은 비로소 소환되어 정치 일선에 나서서 새왕조 창업을 위한 정지 작업을 단행하여 7월17일 공양왕의 선양을 이끌어 내어 이성계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 조선을 건국하였다. 그는 당시의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한 고조 유방과 그의 참모 장량에 비유하였는데, 이 말은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해 한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제국을 건설했다는 뜻으로, 자신 또한 태조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것이며,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가 곧 자신이라는 뜻이다.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정도전은 왕명을 받아 새로운 왕조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17조의 〈편민사목〉을 지어 발표하였다. 또한 조선 건국을 반대한 정적 등 반대파를 일소하였다.[5] 조선을 건국하는 데 일등 공신이 된 정도전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겸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의 군국의 요직을 겸함으로써 권력을 손에 쥐어 조선의 핵심 실세가 되어 행정, 군사, 외교, 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반적인 문물 제도와 정책의 대부분을 직접 정비해 나갔다. 태조로 즉위한 이성계는 나랏일을 모두 정도전에게 맡겼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2인자가 되었으며, 건국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여 새 나라의 문물 제도와 국책의 대부분을 결정하였다. 즉 한양 천도 당시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都城)의 기지를 정하고, 각 궁전 및 궁문의 칭호, 도성의 8대문 및 성안 48방(坊)의 이름 등을 제정하였다.[7]

“재상의 나라”를 꿈꾸었던 정도전은 훌륭한 재상을 선택하여 그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을 부여하여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신하들을 통괄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중책을 부여하자고 주장하였다. 즉, 정도전은 임금은 단지 상징적인 존재로만 머물고 나라의 모든 일은 신하들이 회의를 거쳐 결정하는 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생각하고 있었다. 태조 때의 정치는 태조와 그의 신임을 받은 정도전 등 소수의 재상이 이루었다. 한편 조선은 각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중앙집권 관료국가”가 되었다. 이것은 이전까지 지방 세력을 인정하는 봉건국가와는 비교되는 정체였다.

정도전은 조선이 갖춰야 할 정부 형태와 조세 제도는 물론 법률 제도의 바탕을 만들었으며,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또한 정도전은 수도 천도를 결정하고 수도 이전을 단행하였다.

또한 노비 해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병제(兵制)를 대폭 개혁하여 진법(陳法)·진도(陳圖)를 지어 장병을 훈련하고, 1397년(태조 6)에 동북면 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지금의 경원(慶源 : 함경북도) 지방에 가서 성보(城堡)를 수치(修治)하고 주·군과 역참을 획정하였다.

정도전은 고려 말 배불론(排佛論)의 주동자로 철두철미 불교의 말살을 기도하고 유교로써 문교(文敎)를 통일하고자 하여 주자학으로 불교와 노자교(老子敎)를 압도코자 유감없이 공격을 가하였다. 불교의 자비는 친함과 안면이 있음에 따라 차별이 있고, 불교는 인류 자연의 성정에 위배하여 사회 조직을 파괴하는 것이며, 석가가 인세(人世)를 이탈하여 자립자영코자 아니하였음은 타력에 따라 기생(寄生)코자 한 것이고 특히 선종(禪宗)과 같은 것은 인심을 현혹하는 마종(魔宗)이라고까지 비판하였으나 아무도 이에 응대하는 불교인이 없었던 유학의 대가였다.

경복궁 근정전한양을 조선의 새 수도로 결정한 것은 물론, 서울의 도시 설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복궁 자리도 정도전이 잡은 것이라고 한다. 무학대사는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궁궐을 세워야 한다고 했으나 정도전은 반대하였다. 그는 무학대사가 추천한 위치는 동향이며 터가 너무 좁아 왕도로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경복궁이 현재의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다.[5]

태조의 허락 아래 종묘와 사직, 궁궐의 터 등이 들어설 자리를 정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궁궐 및 각 전각의 이름은 모두 정도전이 손수 지었다.[7] 그 밖에도 종묘의 제례법과 음악도 정도전이 제정한 것이었다. 특히 〈몽금척〉(夢金尺), 〈수보록〉(受寶?), 〈문덕곡〉(文德曲) 등 수많은 악장을 지어 태조의 공덕을 찬양하였는데, 이 악장은 조선조 5백년 간 중국에서 연주되었다.

신덕왕후 강씨는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기를 간절히 소원 하였고, 태조 이성계 역시 방석을 총애하여서 대소신료들은 태조의 의중에 따라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태조의 전처 한씨 소생 아들 중 다섯째 인 이방원은 정치적 야심이 가장 컸던 탓에 이 일로 격분하였다.[8] 왕세자를 누구로 임명하느냐는 문제에 관해서 당초의 의론은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세워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왕과 왕비의 의도와 배극렴의 주장으로 의안대군 이방석을 왕세자로 세웠다. 그러나 전처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자신들을 배제하고, 중전의 아들 막내가 왕세자가 된 것에 대해 모두 분개하였다. 이것이 훗날 제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조선 창업에 성공한 정도전은 세자책봉에 이은 새나라 문물과 제도정비에 착수했다. 그는 국가의 통치규범인《조선경국전》,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왕들의 치적을 담은 《경제문감》(經濟文鑑),《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 등의 편찬을 주도하여 새로운 치국의 대요와 관제 등 모든 제도와 문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어 국방력 강화와 고구려 고토수복을 위한 공병제도를 도입 군의 통수권을 국가에 귀속 시키기 위한 사병을 혁파하였다. 또 조세수급의 안정을 통하여 국가 재정의 건전성 확보하기 위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한 과전법을 단행하는 등 일소에 혁신하였다. 그러나 급진적인 정책추진에 대한 반발하는 부류들이 태동되었다.

1395년 일부 반발 세력에 의한 국가기밀 누설로 인하여 갈길 바쁜 조선은 명나라와 외교적 분쟁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신흥국 조선의 일신을 경계하였던 명제 주원장은 조선의 정조표전(正朝表箋) 문구에 명나라를 모독하는 글귀가 있다는 걸 문제삼아 태조에게 정도전을 자신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태조는 정도전은 병에 걸렸다거나 나이가 55세로 많다거나 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명나라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계속해서 그의 소환을 요구하였고, 이를 무마하기 위한 조처로 일선에서 물러나 동북면도선무찰리사로 체직 된다. 그러나 조선의 요동공벌은 건국초기부터 면밀히 계획된바 간과할 수 없기에 정도전은1397년 2월 태조 이성계의 중임으로 복귀하여 요동 정벌을 위한 군사훈련에 박차를 가한다. 애석하게도 그의 요동공벌 출정은 조준의 반발로 주춤하는 사이 하륜의 부추김과 이숙번이 지지한 이방원의 반란에 살해됨으로 인하여 무산되고 말았다.

정도전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세운 일로 인해, 이방원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방원은 그가 한씨 소생의 모든 왕자들을 궁으로 불러 들인 후에 신의왕후 죽일 계락을 세웠다고 누명을 뒤집어 씌워 살해하였다.[6] 그러나 이방석의 세자 책봉은 정도전이 아니라 태조 이성계가 한 일이고, 정도전이 왕자들을 암살하는 계략을 실제 세운 근거가 없다.[7]

1398년(태조 7) 음력 8월 26일 밤에 그는 이방원(태종)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정도전은 그때 송현에 있는 남은의 별장에서 남은, 심효생 등과 함께 이방원(태종)의 사병에게 무참히 살해되었다. 태종은 정도전이 세자 이방석(芳碩)에게 당부하여 먼저 난을 일으켰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켰다고 하나 실은 태종이 정권을 잡기 위하여 일으킨 변란으로 희생된 것이다(→제1차 왕자의 난).

정도전의 묘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봉화정씨 을류보에 경기도 광주(廣州) 사리현(士里峴)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柳馨遠(1622-1673)의 ‘동국여지지(東國輿之地)’ 과천현조에는 현동북 18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5] 정도전과 그 일가는 1398년 음력 8월 태종(이방원)에 의해 몰살당하였으나, 맏아들만 살아 남아 태종 11년에 판 나주목사로 중용되어세종 대에 형조판서를 역임하었다.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는 정도전의 저서 《삼봉집》을 간행했다.

1865년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고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해 그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5] 또한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정도전을 복권하고 문헌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뒤 고종은 후손들이 사는 경기 양성현(안성군 공도면, 평택시 진위면)에 사당을 건립하였다.[9] 고종은 공의 위업을 기려 유종공종(儒宗功宗) 현판을 특필하여 하사하였다. 사당은 1986년 3월 향토유적 2호로 지정되었다.[9]

주요 저작《삼봉집》(三峯集)《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경제문감》(經濟文鑑)

〈경제의론〉(經濟議論)《불씨잡변》(佛氏雜辨)《심문천답》(心問天答)《심기리》(心氣理)《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진맥도결》(診脈圖結)《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상명태일제산법》(上明太日諸算法)《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寄圖)《태을72국도》(太乙七十二局圖)《진법》(陣法)《강무도》(講武圖)〈궁수분곡〉(窮獸奮曲)〈납씨가〉(納氏歌)〈정동방곡〉(靖東方曲)〈문덕곡〉(文德曲)〈신도가〉(新都歌) 등.

조식(曺植, 1501년 ~ 1572년)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고 영남학파의 거두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명종과 선조에게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받았으나 한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

조식(曺植)의 자는 건중(楗仲)이며, 경상도 삼가현 사람이다. 한미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와 숙부가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비로소 관료의 자제가 되어 사림파적 성향의 가학을 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30세까지 서울 집을 비롯한 부친의 임지에서 생활하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혔고, 후에 명사가 된 인물들과 교제하였다. 조선 중기의 큰 학자로 성장하여 이황과 더불어 당시의 경상좌·우도 혹은 오늘날의 경상남·북도 사림을 각각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유일(遺逸)로서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으나 한번도 취임하지 않았고,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하였다.

1501년 연산군 7년 경상도 삼가현 토골(현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 에서 승문원 판교 조언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였지만, 과거에는 1,2번 응시하고 이후로 응시하지 않았다. 1527년 중종 22년 부친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고, 1531년 생계가 어려워지자 처가인 김해의 탄동으로 찾아가 산해정을 짓고 제자교육에 힘썼다. 1539년 38세에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벼슬을 고사하였고, 1544년 관찰사의 면담도 거절하였다. 1549년 명종 4년 전생서주부에 특진되었으나 고사하였고, 집 근처의 계복당과 뇌룡사를 지어 강학에 전념하였다. 1556년 종부시주부로 다시 부름을 받았지만, 역시 고사하였고 1544년 벼슬길에 나가라는 이황의 권고도 거절하였다.

1561년 지리산의 덕천동으로 옮겨 산천재를 짓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독특한 학문의 체계를 이룩하였다.

1567년 5월 명종의 부름을 받고 찾아가 치국의 도리를 건의하고 돌아왔다. 만년에는 두류산에 들어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여러 차례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고사하였다.[1]

그의 제자로 김효원, 김우옹 등 저명한 학자들과 정인홍 같은 관료, 의병장 곽재우가 배출되었다. 일반적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우도 지역(오늘날의 경상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학맥을 형성하였다. 유명한 글로는 '단성소'라고 불리는 '을묘사직소'가 있다. 선조 때 대사간, 광해군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조식은 16세기 당시 경상좌도의 이황과 나란히 경상우도를 대표하던 유학자로서 양측이 다 우수한 문인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개중에는 두 문하에 모두 출입한 사람들도 있었다. 고려시대에 성리학이 전래된 이래 그것의 도입과 전개를 주도한 학자들이 영남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당시 영남의 좌?우도를 대표한 이들은 동시에 조선 유학을 영도하는 위치에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특히 경상우도는 김종직,,김굉필, 정여창 등 영남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으로, 사림파의 실천적 학문 전통 가운데서 성장한 조식은 개인적으로 사림파의 인물들과 밀접한 인적 관계로 맺어져 있었으며, 그 집안의 학문적 배경도 사림파에 속했다. 그러한 까닭에 그는 평생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는 중국 송대의 학자들에 의해 이미 완성되었고, 남은 문제는 오로지 실천이라고 하는 원, 명대로부터 조선 전기로 이어지는 유학의 학문적 입장을 강조하였다.

조식이 말하는 실천에는 물론 ≪소학(小學)≫과 ≪가례(家禮)≫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적 예의 실천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유학의 본령으로 생각하는 ≪대학≫의 학문관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면이 강하다. 즉 유학자는 고답적인 이론에 매몰되어 현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실학적 학문관이다. 이는 성(性)과 천도(天道)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하고자 하지 않았던 공자 이래로 유학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어진 견해이기는 하지만, 특히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학문적 문제의식의 핵심을 이룬 것이었다. 그러므로 조식은 조선 전기 사림파의 실천적 학풍과 조선 후기 실학파의 현실을 중시하는 학풍을 이어주는 사상사적 고리로 간주될 수 있다.

조식은 또한 우리나라의 유학자들 가운데서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그가 사직소를 통해 당대의 정치에 대해 과감한 비판을 행한 데에서 잘 드러나 있지만, 또한 역대의 인물에 대해 그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에 따라 비판을 감행한 데서도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성호 이익 같은 이는 그에 대해 “우리나라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東方氣節之最)”이라는 찬사를 부여하였고, 또한 퇴계학파는 인(仁)을, 남명학파는 의(義)를 중시한 점을 그 특징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대체로 조식 및 남명학파에 대한 공통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조식의 역대 인물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출처(出處), 즉 벼슬에 나아갈 때와 나아가지 말아야 할 시기에 대한 명철한 판단 여부가 그 기준을 이루었다. 그는 제자들에 대해서도 “출처는 군자의 큰 절개”라 하여 이를 매우 강조하였고, 그 자신은 한평생 열 차례 이상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받았지만, 한 번도 취임한 적이 없었다.

저서《남명집》《남명학기》《파한잡기》《남명가》《권선지로가》

배향산청군 덕천서원(德山書院)에 배향하였다. 처음에는 남명 조식 선생의 위패만 봉안했다가 최 수우당이 사절하자 수우당(守愚堂) 최선생을 종사 했다. 그러다가 10년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병화로 소실 되자 중건(重建)했으며 광해군 원년 1609년에 사액(賜額) 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숭덕사(崇德祠), 경의당(敬義堂), 동무(東무), 시정문(時靜門), 세심정(洗心亭)이 있는데 수년전 국가보조로 담장과 홍전문(紅箭門), 서무, 관리인 막사가 지어졌다.

조헌(趙憲, 1544년 ~ 1592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유학자이자 경세사상가, 의병장이다.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본관은 배천(白川)이다.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난 조헌은 5살 때에 글을 읽는 등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효성이 있고 유순했다. 집은 가난하였으나 12세 때부터 김황(金滉)에게 시와 글을 배워 1565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567년(명종 22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에 속하였다. 이후 정주(定州)교수로 3년간 있으면서 그곳 선비의 풍속을 일신시켰다. 파주 교수로 옮겨 성혼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니 성혼은 사양하면서 감히 사제 간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

1572년(선조 5년) 홍문관 정자(正字)로 왕의 불공(佛供)이 옳지 않음을 말하다가 파면되었다.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의 문물과 제도의 따를 만한 것을 조목별로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후에 박사(博士), 호·예 2조 좌랑, 전적(典籍), 감찰 등을 거쳐 경기도 통진(通津) 현감으로 다스리다가 법을 어긴 궁노비를 취조 중 장살(杖殺)하고 부평에 귀양 갔다. 1581년에 공조 좌랑에 임명되었고, 전라도사로 나가 소를 올려 연산군 때의 공안(貢案)이 민폐가 되므로 개혁할 것을 청하고 이율곡 등의 선비들과 친분을 유지하였다.

1582년에는 보은(報恩) 현감으로 소를 올려 노산군(魯山君 : 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할 것을 청했으나 모함을 받아 파면되었다. 1586년 조정에서 학제(學制)를 수정하고 각도 제독(提督)을 창설할 때 공주(公州) 제독이 되어 선비의 규율을 엄하게 하고 앞장서서 실천하니 찾아드는 선비가 많았다. 이때 또 소를 올리는 한편 정여립(鄭汝立)의 행패를 따지고 공격하였으나 관찰사가 화를 두려워하여 여러 번 물리치므로 벼슬을 내놓고 옥천(沃川)으로 돌아갔다. 1589년에는 대궐에 엎드려 소를 올려 시정(詩政)의 장단점을 철저히 논하였는데 광론(狂論)이라 하여 3사(三司)의 배척을 받고 드디어 길주(吉州)로 귀양 갔으나 그해 겨울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다 하여 석방되었다. 이렇듯 조헌은 철저한 유교적 입장에서 많은 개혁안을 상소하고 정론(正論)을 폈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가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 등을 보내와서 명나라를 칠 것을 전달하여 임금과 신하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상소를 올려 겐소 등을 죽일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경하여 일본군을 대비할 책을 상소했으나 정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시골에 내려가 왜란에 대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의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영남의 곽재우(郭再祐),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호서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보은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였으나 순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의 시기로 홍성 지방에 옮겨가서 또 의병 천여 명을 모집했다. 이때 일본군은 청주에서 진을 치고 있어 관군이 여러 번 패하였는데, 승장(僧將) 영규(靈圭)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여 충청도 공략의 본거지를 탈환하는 등 전과를 세웠다.

곧이어 의주로 북상하기 전에,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흩어지고 남은 700명의 의병을 이끌게 되었다. 그때 당시 금산(錦山)의 왜군이 충청도 일대로 세력을 넓힐 기세라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영규와 함께 금산을 향해 가서 일본군에게 함락된 금산의 10리 밖에 이르렀다. 당초 호남 순찰사 권율(權慄)과 합세하여 적을 협공할 약속이었으나 권율로부터 그 기일을 미루자는 편지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왜군은 이미 조헌이 거느린 의병의 약점을 알고 역습해 왔다. 그의 군사는 역전 분투하여 왜군에게 많은 손해를 주었으나 많은 수를 대적하지 못하여 조헌과 7백의사가 전멸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호남 방어의 근거지였던 금산을 회복하게 된다.

1604년(선조 37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1609년(광해군 1년)에 그의 사당에 '표충(表忠)'이라는 액이 하사되었으며, 1754년(영조 30년)에 영의정으로 추증, 문묘에 종사되었다.

유학자로서의 면모는 아래와 같다.

1572년(선조 5년)에 왕의 불공(佛供)을 반대하다가 파면되었다.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 문물제도 중 따를 만한 것을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1581년(선조 14년) 공조좌랑에 임명, 전라도사로 나가 연산군 때 정해진 공안(貢案)의 개혁을 청하였다.

1582년 보은현감으로 소를 올려 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을 세워 표충할 것을 청하였다.

1589년 대궐에 엎드려 시정(時政)의 득실을 극론(極論)하다가 귀양갔다.

1589∼1591년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보낸 사신을 죽일 것을 청하고 왜적 대비책을 상소하였으나 거부되었다.

금산 전투에서 700의사(義士)와 함께 전몰하니 그 충성심은 길이 추앙받았다.

고경명·김천일·곽재우와 함께 임진 4충신(壬辰四忠臣)의 한 사람이다.

최세진(崔世珍, 1473년 - 1542년)은 조선시대의 학자이다. 본관은 괴산, 자는 공서(公瑞)이다.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중국어에 능통하여 외교 문서를 도맡아 처리하였다. 1524년 군자감정으로 있으면서 《친영의주》와 《책빈의주》등을 한글로 풀이하였다. 또한 1527년 《훈몽자회》를 완성하였는데, 이것은 한글의 자음·모음의 이름을 정하고, 순서와 받침 등을 정리한 최초의 저술로 국어학 발달에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1530년 첨지중추 부사로서 《황극경세서집》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1539년 승문원 제조로 《대유대주의》와 《황극경세서설》을 지어 바쳤다. 당대에서 가장 뛰어난 중국어 학자로 사신들을 맞을 때 중요한 역을 맡았다. 그러나 중인(中人) 출신이었기 때문에 살아있을 때는 크게 우대 받지 못하였다. 저서로 《경성지》, 《여호경》, 《사성통해》, 《소학편몽》, 《운회옥편》등이 있다.

황현(黃玹, 1855년 ~ 1910년 9월 7일)은 조선 말기의 선비로 우국지사이며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다. 아호는 매천(梅泉). 본관은 장수. 학자 황의돈과 일가이다.

전라남도 광양 출생으로, 구례에서 성장했다. 1892년 봄 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황현은 명성황후를 배후로 지목하였다. 그에 의하면 운현궁의 폭탄 테러 사건은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해 벌인 것이라고 하였다.[1]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낙향하여 제자를 양성하며 지내다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통탄하며 조약 체결 일주일 후 구례의 집에서 음독 자살했다. 자결하면서 남긴 〈절명시(絶命詩)〉는 장지연이 주필로 있었던 《경남일보》에 실렸고, 경남일보 필화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구례 황현의 집터에는 현재 그의 영정과 위패가 있는 사당 매천사가 세워져 있으며, 유품을 전시한 유물관도 함께 설치되어 있다.

《매천야록(梅泉野錄)》

편년체로 기술한 역사서로서 사료 가치가 풍부하다.《매천집(梅泉集)》문집이며 유고집으로 출간되었다.

김성일 (金誠一, 1538년~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의성, 호는 학봉(鶴峰), 자는 사순(士純)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 시호는 문충공 서애 유성룡과 함께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은 수제자로 임진왜란 때 초유사로 순절하였다. 안동에 자리한 학봉종택은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의 전형으로 유명하다.

1562년 승려 보우(普雨)의 말에 따라 문정왕후가 희릉(禧陵)을 옮기려 하자, 유생의 신분으로 이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지었다. 1564년 진사시, 1567년 대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자·대교·봉교 등을 역임하고, 1572년(선조 5)에는 상소를 올려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종친을 등용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1573년 전적·수찬 등을 시작으로 병조좌랑·이조좌랑 등의 요직을 거쳐, 1577년 종계변무를 청하는 사행(使行)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사행 길에 요동에서 정학서원(正學書院)을 방문하여 중국 선비들과 학문하는 목적을 놓고 토론하였다.

1579년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어 시사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다. 1579년 함경도순무어사가 되어 영흥·함흥·삼수·길주·명천 등의 고을을 순행하면서 민정을 살피고 수령들의 근무태도를 점검하였다. 1583년 특지로 나주 목사가 되어 도내의 민폐를 해결하였다. 당시 김여물이 순무어사로 나주에 파견되어 민가에서 술을 마시고 밤에 관아로 오자, 그를 꾸짖고 문을 열어주지 않는 강직함을 보였다.

1589년 의정부 사인으로집] 조선통신사 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보낸 겐소(玄蘇)·소 요시토시(宗義智-혹은平義智라고도 불림) 등과 일본과의 통호문제를 의논하였고, 1589년 11월 18일 일본 사정을 탐지하려고 파견된 조선통신사 행에서 부사(副使)로 임명되었다. 1590년 3월 일본에 들어간 직후부터 정사 황윤길(黃允吉) 등과 관백(關伯)에게 예를 표하는 절차를 놓고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는데,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국왕이 아니므로 왕과 동일한 예를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1591년 음력 2월 부산에 돌아와 각기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또 풍신수길의 인상을 묻는 선조의 질문에, 황윤길은 '눈 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하였고,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그의 눈은 쥐와 같아 마땅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후일 병화가 있다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김성일은 다음과 같은 말로 무마하였다.

"나도 어찌 왜적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불안에 휩싸일까봐 그런 것입니다."

이와 같은 김성일의 보고에 서인 황윤길을 비롯해, 조헌 등이 기필코 왜적이 침입할 것리고 주장하였지만, "(西人)들이 세력을 잃었기 때문에 인심을 요란시키는 것이다"라고 매도 하여 배척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볼 때 당시 김성주 등의 동인이 정국을 주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1]

이 발언 때문에 안방준(安邦俊) 등에 의해 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매도되었고, 왜란 초에 파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러한 발언이 일본이 틀림없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장담한 황윤길의 발언으로 인하여 민심이 혼란해지는 것을 완화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명하였다.

실제 황윤길의 발언이 있은 직후 조정은 각지에 성을 쌓고 장정들을 징집하는 등 급작스런 대비책을 강구하였는데, 이는 당시 민심을 상당히 동요시켰다. 이에 상소를 올려 오늘날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의 향배이니, 민심을 잃으면 견고한 성과 무기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여 내치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직후의 음력 6월 28일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김성일을 비꼬며, 그 정도(징후 운운) 이상의 말을 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김성일은 통신사로서 일본에 갔다가 막 돌아와서,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지혜가 미치지 못한 바가 있어서 그러했던 것인가. 동시에 사신으로 갔던 황윤길(黃允吉) · 허성(許筬) 같은 사람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왜적들이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보장하기 어렵다고 하기도 하였는데, 김성일만이 유독 왜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괴이하다."[2]

1592년 왜란 초 경상도 일대가 왜군에 의하여 유린되자, 사태 수습을 목적으로 다시 경상도 초유사(招諭使)에 임명되었다. 당연히 탄핵받았어야 할 인물이었지만, 동인이 집권하는 있는 상황에서 탄핵보다 오히려 벼슬을 받았다.

관군이 궤멸된 상황에서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들을 의병장으로 삼아 서로 협동하게 하고, 용맹한 자를 선발하여 수령이 없는 고을의 행정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또 각지를 순행하면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뿌리고 군량으로 쓸 양곡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곽재우와 경상감사 김수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기고 조정에서 곽재우를 처벌하려는 기색이 있자, 양자를 화해시켜 이를 원만히 수습하기도 하였다. 왜란 초기에 피폐해진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정치적으로는 동인(東人)에 속하였다. 반면 같은 동인으로서 서인 황윤길의 편을 든 허성은 이후 동인들의 외면을 받게 된다.

저서《해사록》《상례고증》《조선연혁풍속고이》《학봉집》(사후에 출간된 문집, 1627년)

그가 지은 시

1592년 경상우도 초유사로 진주에서 지은 시가 전한다.

矗石樓中三壯士 촉석루위 마주 앉은 세 장사들은

一杯笑指長江水 한잔 술로 웃으면서 남강 물을 가리키네

長江之水流滔滔 남강 물은 밤낮으로 쉬지않고 흘러가니

波不渴兮魂不死 강물이 마르지 않는 한 넋도 없어지지 않으리

김일손(金馹孫, 1464년 ~ 1498년 7월)은 조선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이며 학자, 사관이다. 본관은 김해,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1]이다.

1464년에 태어나 1478년 15세 단양 우씨와 혼인하고, 선산의 이맹전을 찾아 배알하였다. 1483년 부친상을 당하였고, 그 당시 사림의 대표적 으뜸이던 김종직의 문하생인 그는 1486년(성종 17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예문관에 등용된 후, 청환직을 거쳐 1489년 음력 11월 요동질정관으로 1차로 북경을 다녀왔다. 1490년 음력 3월 노산군 입후치제를 주장하고 음력 4월 《육신전》을 첨삭하였으며 음력 11월 진하사가 명나라에 파견될 때 서장관으로 다시 북경에 다녀왔다.[1] 1491년 사가독서를 했고, 뒤에 이조정랑이 되었다.

성종 때 춘추관 헌납 재직시에 이극돈과 성준이 새로 붕당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하여 이극돈을 비롯한 훈구파의 원한을 샀다. 1496년 음력 1월 소릉복위 상소를 올리고 음력 3월 모친상을 당했다. 1498년에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노사신·한치형·윤필상·신수근 · 유자광 등을 통해 연산군에게 알려졌다. 그 내용인 즉, 세조를 비방하고, 노산군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던 것이다. 곧 체포되어 심한 고문 끝에 대역죄로 음력 7월 광통방(廣通坊 : 조흥은행 본점이 있던 광교 네거리 근처)에서 능지처참되고, 권경유 · 권오복 · 허반 등 다른 많은 사류도 화를 당하게 되었다.

이 일을 무오사화라 한다. 이를 계기로 성종 때에 날개를 펴며 등장한 신진 사림은 집권층인 훈구파에게 거세되었다. 중종반정 후 신원되고, 문민(文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도승지가 추증되었다. 목천의 도동서원, 청도의 자계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탁영문집》이 있다.

일찍이 스승인 김종직을 닮아 사장(詞章)에 능했으며, 당시 고관들의 불의와 부패를 규탄하였다.

김질(金?, 1422년~1478년)은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익원공 김사형의 증손자이자 정창손의 사위이다. 김자점의 5대 선조이며 김구의 20대 방조에 해당된다. 1455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했다가 뜻을 바꾸어 세조에게 사육신의 거사를 알렸으며 이 공로로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과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고 뒤에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자(字)는 가안(可安), 호는 쌍곡(雙谷), 시호는 문정(文靖). 본관은 안동.

조선 개국 공신 김사형(金士衡)의 증손으로 태어났다. 음서제로 관직에 입문하여 충의위(忠義衛) 부사직 등을 지냈다. 부사직으로 재직 중 휴가를 얻어 성균관에 입학,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의 성균관 수학으로부터 참상관의 성균관 수학제도가 비롯되었다는 의견도 있다.[출처 필요]

1450년 문과에 응시하여 급제, 그해 집현전 수찬에 뽑혔으며, 사간원 우정언 등을 지냈다. 1455년 성균관 사예가 되었다. 단종이 폐위당하자 1456년 성삼문·박팽년·하위지·유성원 등과 함께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하였으나 마음을 바꾸어, 이를 세조에게 알렸다. 일설에는 그의 장인 정창손이 설득한 것이라고도 한다.[출처 필요]

사육신의 거사를 고변한 공으로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로 승진했고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과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그뒤 승정원 좌승지·공조판서·의정부 우참찬 등을 지냈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의정부 우의정에 발탁 되었으며 곧 좌의정으로 승진했다. 이어 상락군에서 상락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1468년 세조가 붕어하였을 때 한명회(韓明澮)·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원상이 됐고, 1469년 예종이 죽었을 때도 한명회·신숙주와 함께 원상직을 수행하였다.[1]

1471년에는 성종의 즉위를 도운 좌리공신(佐理功臣)을 서훈할 때 좌리공신 2등으로 서훈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졌다. 성종 때는 〈경국대전〉의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남사고(南師古, 1509년~1571)년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호는 격암(格庵)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인 남사고는 본관이 영양(英陽)이고 호는 격암(格庵)이다. 효행과 청렴으로 이름이 났으며 소학(小學)을 즐겨 읽었던 그는 역학, 풍수, 천문, 복서, 관상의 비결에 도통하여 많은 예언을 하였는데 꼭 들어맞았다고 한다. 명종 말년에는 동서분당(선조8년,1575년)을 예언했고, 명종 19년에는 "내년에 필연코 태산을 봉하리라"했는데 이듬해 문정왕후가 죽어 태릉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는 또 임진왜란을 예언했는데 "살기가 심히 악하여 임진년에 왜적이 크게 쳐들어올 터이니 부디 조심하라"고 다른 사람한테 말했는데 과연 그해 임진왜란이 터졌다. 특히 그는 풍수지리학에 조예가 깊어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문집에는 격암일고(格庵逸槁)가 있다. 남사고가 묘결(妙訣)을 얻은 데는 진위를 가릴 수 없는 많은 일화가 전해져 온다.

그가 어린 시절 서당에 다닐 때 이유 없이 자꾸 야위어 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훈장이 까닭을 물어보니 서당에 올 때마다 여우목 고개에 예쁜 여자가 나타나 입맞춤을 하자면서 자신을 희롱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묘령의 여자는 입맞춤을 할 때마다 입 속에 구슬을 가지고 논다고 하였다. 훈장은 여우가 여자로 둔갑한 것임을 알고 다시 입맞춤을 할 때 여자 입 속의 구슬을 빼앗아 삼키고 도망치라고 일러주었다. 다음날 서당에 오는데 또 예쁜 여자가 입맞춤을 하자면서 따라오자 남사고는 스승이 시킨 대로 얼른 여자의 입 속에 있는 구슬을 삼키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처녀가 구슬을 내놓으라고 뒤쫓아오자 너무 당황한 나머지 땅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처녀는 늙은 여우로 변하면서 슬피 울다가 되돌아갔다. 허겁지겁 서당에 온 남사고를 보고 훈장은 넘어질 때 어디를 제일 먼저 보았냐고 묻자 땅을 제일 먼저 보았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훈장은 탄식을 하면서 "아깝도다! 넘어질 때 하늘을 먼저 보았으면 천문에 능했을 텐데 땅을 보아 지관에 머물겠구나"하였다 한다.

남사고(南師古)는 조선 명종때(서기 1509∼1571년) 천문지리(天文地理)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어린시절부터 총명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 아이를 신동(神童)이라고까지 불렀다. 그렇다고 성장하여 장원급제를 하거나 벼슬을 탐한 것도 결코 아니었다. 한때 그가 일종의 천문학 교수인 종6품의 관상감(觀象監)이란 벼슬을 하게 된 것도 역학(易學)·복서(卜筮)·상법(相法)·천문(天文) 등에 남다른 박식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이 어린시절에 불영사(佛影寺)란 절을 갔을 때 일이다. 스님 한 분이 선생을 보고 깜짝 놀라며 천기(天氣)를 받아 눈에 광채가 번뜩이고 있음을 보자 "아! 그놈 참 영특하게 생겼구나."

스님의 이 같은 말을 듣고 있던 선생이, "그럼, 스님 저하고 바둑 한 판 두지 않겠소이까?" 하고 청하자 스님은 마음 속으로, '바둑에 대해서는 둘째 가라면 서운하다 할 정도인 내가 어린 네가 아무리 총명하다고 해도 나를 감히 따라 올소냐?' 이런 마음으로 어린 남사고에게 쾌히 응락을 했다. 두 사람은 절 근처에 있는 부용봉(芙蓉峯)에서도 기암절벽이 수려한 노송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광경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태고때부터 아름다운 산세에 몇백 년 동안 만고풍상을 다 겪으면서 꼬불꼬불하게 자라난 큰 노송 밑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스님과 어린 나이인 남사고선생이 마주하여 바둑을 두는 모습은 참으로 돋보이는 아름다움이었다.

 

 

 

처음에는 이내 승부가 날 것으로 생각했던 노스님은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수가 남사고만 못하다는 것을 알고서 점점 불안해졌다. 남사고는 웃음을 띄면서 장난하듯이 쉽게 두고 있어도 승세를 계속 유지하게 되자 노스님은 망신스럽다는 생각에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결국 바둑은 나이 어린 남사고가 이겼다. 화가 난 노스님은 갑자기 산천이 떠나 갈 정도로 큰 소리를 치며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그러더니 잠시 후 땅 속에서 머리와 콧등을 먼저 보이며 큰 황소처럼 변장하여 나타나면서 남사고에게 물었다.

내가 이렇게 나타나도 무섭지 않느냐?" 고 하자 남사고는 태연한 모습으로, "뭐가 무섭습니까? 본래 모습은 스님이었는데요." 하고 대답했다. 노스님은 자신이 어린 남사고와 힘을 겨루는 못난이었음을 깨닫고 후회했다. 그후 노스님은 남사고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고 자신이 사부로부터 전수받은 천문지리에 관한 각종 비록을 남사고에게 전해주었다. 남사고는 심산유곡 깊은 동굴에 들어가 그 비전을 해독하여 능히 천기(天氣)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돼 개인에 관한 미래는 물론이고 나라에 관한 미래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언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와 같은 예언을 비록(秘錄)해 놓은 책이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격암유록(格庵遺錄)」이었다.남사고는 이로부터 명지관이 되었고 세상일을 정확하게 예언을 하여 지금도 `남사고결록` `격암유록`등이 전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책이 실재로 남사고가 쓴 책인지 아니면 후세에 누군가 남사고의 이름을 도용하여 쓴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 대지를 구해 어머니 유골을 안장하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오는데 밭을 갈던 한 농부가 노래를 부르면서 말하기를 "아홉 번을 옮기고 열 번째 장사한 구천십장(九遷十葬) 남사고(南師古)야! 용이 하늘을 날 듯이 올라가는 형국인 비룡상천(飛龍上天) 좋아하지 마라. 죽은 뱀을 나무에 걸쳐놓은 형국인 고사괘수(枯蛇掛樹)가 아닌가 하거늘." 남사고가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산형(山形)을 자세히 보니 과연 사룡(死龍)이었다. 급히 밭을 갈던 농부를 찾으니 그는 홀연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남사고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대지(大地)는 필히 그 주인이 있는 법이니 평소 덕을 쌓지 않은 어머니를 억지로 명당에 모시려고 해도 아무나 얻는 것은 아니구나" 하면서 욕심을 버리고 무해지지(無害之地)를 찾아 이장하였다고 한다.

박팽년(朴彭年, 1417년 ~ 1456년)은 조선의 문신 겸 학자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醉琴軒), 본관은 순천이다. 손자 박일산이 생존하여 사육신 중 하위지가와 함께 후손이 전한다.

조선 세종 때인 14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가 되어 편찬 사업에 참가하였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황보인·김종서 등과 함께 문종과 단종을 보필하였다. 1455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수양대군이 황보인·김종서·안평대군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후, 그를 형조참판에 임명하였으나, 세조가 즉위한 다음 해인 1456년, 형조 참판의 자리에 있으면서 성삼문·하위지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세조가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서 마음을 돌려 보려고 하였으나, 흔들리지 않았다. 박팽년은 고문받던 중 사망하였다. 후에, 숙종은 그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절개를 표창하였다. 저서로 <취금헌 천자문>이 있다.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

뒤에 아버지와 동생, 아들까지 사형당했으나, [1] 사육신 중 하위지와 함께 유일하게 친후손이 존재한다. 그의 며느리이며 장남 박순(朴珣)의 아내 이씨는 사육신에 연좌되어 노비가 되었는데, 며느리 이씨와 한 여종의 기지로 그의 아들은 무사하였다 한다. 뒤에 그 아이는 박비라는 이름으로 숨어지내다가 성종때 자수하여 박일산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박팽년의 사위 김자무(金自茂)는 단종때 제주목사를 역임했으나 처가가 화를 당하자 일족을 이끌고 피신하여 무장(茂長)에 정착하였다.

서거정(徐居正, 1420년~1488년)은 조선 문종, 세조, 성종 때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달성, 자는 강중(剛中), 초자는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이며,[1]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여섯 임금을 섬겼다.

1444년(세종 26) 문과에 급제하여 사재감 직장(直長)을 지내고 이조 참의, 사헌부 대사헌(1478년), 의정부 좌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1451년(문종 1)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부수찬(副修撰)·응교(應敎)를 역임하였다.

1456년(세조 2) 문과중시에 급제, 이듬해 문신정시에 장원했다. 후에 공조참의(工曹參議)가 되어 1460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서 그 곳 학자들과 문장과 시(詩)를 논하여 해동(海東)의 기재(奇才)라는 찬탄을 받았다. 귀국 후 대사헌이 되고 1464년 조선 최초로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함)이 되었으며 1466년 발영시에 또 장원, 이후 6조(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1470년(성종 1) 좌찬성(左贊成)에 올라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달성군(達城郡)에 봉해졌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봉사하였고, 시문을 비롯한 문장과 글씨에도 능했으며 시화(詩話)의 백미인 《동인시화(東人詩話)》와 《동문선(同文選)》 등을 남겨 신라 이래 조선 초에 이르는 시문을 선집, 한문학을 대성했다.

덕행이 있어 세조 때 《경국대전》, 《동국통감》, 성종 때 《동국여지승람》 등 책의 편찬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또한 왕명으로 《향약집성방》을 한글로 번역했다. 성리학을 비롯하여 천문·지리·의약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했다.

사후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경상도 대구의 구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서울 지하철 7호선의 사가정역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서경덕(徐敬德, 1489년~1546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주기파(主氣派)의 거유이다. 본관은 당성,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화담(花潭)이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며 부친은 부위(副尉) 서호번(徐好蕃)이다.[1]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 또는 화담(花潭). 부위(副尉) 호번(好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어머니가 공자(孔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그를 낳았다한다. 나이 7∼8세에 이르자 총명하고 영특하여 어른의 말을 공경히 받들었다. 1502년(14세) ≪서경≫을 배우다가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인 일(日) 월(月) 운행의 도수(度數)에 의문이 생기자 보름동안 궁리하여 스스로 해득하였다. 18세 때 ≪대학≫의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조를 읽다가 “학문을 하면서 먼저 격물을 하지 않으면 글을 읽어서 어디에 쓰리오!”라고 탄식하고, 천지만물의 이름을 벽에다 써 붙여 두고 날마다 궁구(窮究)하기를 힘썼다. 19세에 태안 이씨(泰安李氏) 선교랑(宣敎?) 계종(繼從)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31세 때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賢良科)에 응시하도록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花潭)에 서재를 세우고 연구와 교육에 더욱 힘썼다. 1531년(중종 26)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더욱 성리학의 연구에 힘썼다. 1544년 김안국(金安國) 등이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추천하여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러 연구와 교육에 몰두하였다.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중종과 인종이 죽자 “임금의 상(喪)에 어찌 복(服)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자최삼월(齊衰三月)의 복을 입었다.

만물의 이치를 이해하고자 하는 철학자로서의 업적을 남겼다. 그의 이론 중 이기설(理氣說)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유물론의 원류로 평가받기도 한다.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유명하다. 당대의 대학자 이이와 기(氣)가 먼저냐 이(理)가 먼저냐 서간을 주고받으며 논쟁한 일화는 유명하다.

저서《화담집(花潭集)》〈원이기(原理氣)〉〈이기설(理氣說)〉〈태허설(太虛說)〉〈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전우치가 서화담에게 도술을 도전하러 가다가 서화담의 집 근처에서 헤매다가 포기했다는 야사가 있다.

성혼(成渾, 1535년 ~ 1598년)은 조선의 학자이다. 자는 호원, 호는 우계, 본관은 창녕이다. 17세 때 감시 초시에 합격했으나 병으로 복시를 못 치러 과거를 포기하였다. 백인걸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며, 이이와 '사단칠정 이기설'을 토론하고 새로운 학설을 주창하였다. 이이가 선조에게 권하여 종묘 서령의 벼슬을 내렸으나, 병으로 등청하지 못하자 왕이 약을 보내 주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해 세자를 모시었고, 환도 후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일본과 화평을 맺을 것을 주장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고향인 파주로 내려갔다. 이황의 학설을 이어받은 성리학의 대가로 이이와 함께 <사칠속편>을 완성하였고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죽은 후, 반대파들에 의해 관작을 빼앗겼으나, 인조 때 복귀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우계집> <주문지결> 등이 있다.

정여창(鄭汝昌, 1450년∼1504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백욱(伯?), 호는 일두(一?), 시호는 문헌(文獻),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18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서 학문을 익히다가,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제자가 되어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오경과 성리학을 연구하여 경명수행(經明修行)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매번 사양하다가 1490년(성종 21) 소격서 참봉이 되었으며, 그해 가을 문과별시(文科別試)에 합격, 예문관 검열을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를 지냈다. 당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하였지만 곧고 강직한 성품으로 인하여 오래 가르치지 못하고, 연산군 1년(1495년)에 안음(지금의 안의면) 현감에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나,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종성에 유배되어 1504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되었다. 그 후 중종 때 정몽주(鄭夢周)·김굉필(金宏弼)과 같이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됨에 이르러 우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하였다. 《용학주소》(庸學註疏), 《주객문답설》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소각되고, 지금은 정구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가 전할 뿐이다.

최항((崔恒 1409년 ~ 1474년)은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정부(貞父), 호는 동량(?梁), 또 태허정(太虛亭), 시호는 문정(文靖). 본관은 삭녕(朔寧)이다.

1434년(세종 16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이 되었다. 1443년에는 집현전학사로 정인지 등과 《훈민정음》 을 한글로 옮겨 풀었으며, 〈용비어천가〉에 주를 달아 풀이하였다.

1453년(단종 1년) 승지로 있을 때, 당시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하는 데 참여한 공으로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에 이조 참판이 되어 《공신연곡(功臣宴曲)》 4장을 지어 바쳤다.

1455년(세조 1년) 좌익(左翼) 공신 2등에 책록되고 공조 판서에 승진하였으며, 1459년(세조 5년) 《육전(六典)》의 편찬을 비롯하여 《관음현상기》, 《십이준도》 등을 찬하였고, 중추원사로 《명황계감》의 가사(歌詞)를 한글로 번역하는 한편, 《동국통감》을 찬수하였으며, 신숙주 등과 같이 《어제유장설》 3편을 주해하였다. 1464년(세조 10년) 좌찬성으로 어제구현재시(御裁求賢才試)에 1등으로 합격하고 가자를 받았으며, 《병장설주(兵將說注)》를 산정(刪定)하였다. 1466년에 우의정·좌의정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이르러 영성군(寧城君)이 되었으며, 《소학(小學)》, 《주역구결(周易口訣)》, 《예기구결(禮記口訣)》 등을 정하고 세조의 행장을 초집하였다. 1467년에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영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한편 1461년(세조 7년)에는 왕명으로 《경국대전》 편찬에 착수하여 조선 초기의 법률과 제도를 집대성하였다.

1469년(예종 1년) 상정소 제조(詳定所提調)로서 《경국대전》을 찬수하였으며, 1471년(성종 2년) 좌리(佐理) 공신의 호를 받고 좌의정이 되어 《세조실록》, 《예종실록》을 찬수하였다.

평소 겸손하고 과묵했으며 문장에 능하여 명에 보내는 글을 거의 그가 작성했다고 한다. 저서로 《태허정집》이 있다.

한백겸(韓百謙, 1552년~1615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청주,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1][2] 조선 왕조의 개국공신·영의정 한상경(韓尙敬)의 7대손 및 그의 손자인 좌찬성 한계희(韓繼禧)의 5대손이다.

한백겸은 1552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한효윤(韓孝胤)는 경성판관을 지냈고, 숙부인 한효순(韓孝純)은 대북(大北)파의 영수이며 광해군때 좌의정으로서 폐모론을 주도했으나 한백겸 형제는 이에 가담하지 않았고 당파로는 남인(南人)에 속했다. 아우 한준겸(韓浚謙)은 문장에 뛰어났고 선조(宣祖)의 유언을 받은 일곱 신하의 한사람으로서 호조판서, 5도도원수를 역임하고 인조의 장인으로서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지고 영돈녕부사를 지냈다. 그러나 한백겸은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젊은 시절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화담 서경덕의 제자였던 행촌(杏村) 민순(閔純)의 문하에 들어가 그로부터 소학》과 《근사록(近思錄)》 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계속하여 의리(義理)에 관한 연구에 힘써 육경논맹(六經論孟)과 염락관민(濂洛關?)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한백겸은 과거 시험에는 응하지 않고 학문 연마에만 힘을 쏟다가, 1586년(선조 19) 주변의 천거로 받아 관직에 올라 중부참봉(中部參奉)·경기전(慶基殿) 참봉·호조좌랑·형조좌랑을을 지내다가 외직인 황해도의 안악현감으로 발령받아 2년간 근무하다가 다시 함종현령을 지내고 강원도 영월군수에 부임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 때 연좌되어 귀양 갔다. 임진왜란 때 석방되어 적소에서 적군에게 아부하여 난을 선동한 자들을 참살한 공으로 내자직장(內資直長)이 되었다가 여러 내외직을 거친다.

1602년 청주목사를 지내고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통정대부 오른다. 장례원 판결사와 호조참의를 지냈다. 1608년에 선조가 죽었을 때 대신들은 한백겸이 예(禮)에 밝다 하여 빈전(殯殿)의 모든 상례(尙禮)를 맡겼다.

1612년 60세 때에 파주목사에 발령되었으나 벼슬을 사퇴하고 낙향하여 학문연구에 몰두한다. 1615년 64세에 명저인 《동국지리지》의 저작을 마치고 그해 가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2] 묘갈명은 정경세(鄭經世)가 썼다. 묘는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부평리 산481-1

한백겸의 아들 한흥일은 효종때 우의정을 역임했고, 아우 한준겸은 인조의 국구로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아들이 정승에 오르면서 영의정에 추증되고 자신이 세웠으며 원천석을 모신 칠봉서원(七峯書院)에 그 자신도 배향된다.[2]

《동국지리지》는 60장에 이르는 작은 책자이다. 불과 한 편의 논문에 지나지 않은 책이지만 그의 독창성과 비판정신이 가득한 학문적 태도 때문에 영향력은 상당하였다.

한백겸의 학문적 업적으로는‘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과 ‘기전도(箕田圖)가 있다. 기전도는 고조선의 왕 기자(箕子)가 시행하였다는 정전(井田) 제도의 유적이 평양에 남아 있음을 입증하였다. 유제설과 한백겸의 이 그림이 후대의 토지제도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2]

후대에 실학자들이 쓴 《반계수록》과 《경세유표》에는 토지정책의 핵심은 토지소유의 평등, 균등화로 분배를 공정히 하자는 것으로, 주자(朱子)가 부인한 이유로 주자 이후의 보통의 성리학자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던 정전제도가 한백겸의 실증적 연구결과를 통해 실재했음이 밝혀져 후세에 공전제(公田制)의 확충을 주장하던 실학자들이 자신들의 학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활용되었다.[2]

한백겸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통곡하던 친구들이 많았다. 당대의 재상이며 한백겸의 절친한 친구였던 오성 이항복이 최초로 통곡한 사람으로 그는 한백겸의 죽음에 제문을 바쳤다. 이항복은 우선 한백겸이 당대의 주역 연구의 큰 학자라 하였으며, 모든 경서에 두루 밝았으나 유독 《주역》에 깊은 연구가 있어 당시의 세상에서 모두 그가 큰 주역학자임을 인정했다고 하였다.[2] 또 다른 친구로 대제학에 이조판서를 지낸 우복 정경세(鄭經世)가 있는데, 뒤에 정경세는 한백겸의 묘갈명을 지어 한백겸은 당대의 주역학자로 국가에서 간행한 《주역전의(周易傳義)》라는 책의 교정을 맡았다고 하며 칭송하였다.[2]

《반계수록》과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를 쓴 반계 유형원은 “오직 근세의 한백겸이 변론했던 것이, 천년동안 정해지지 못했던 것을 깊이 알아냈으니 그분의 학설에 의해서 확정한다”고 격찬하며 그의 학설을 그대로 수용하였고, 여암 신경준, 순암 안정복 등도 한백겸 학설에서 일정분의 영향을 받았음이 확인되고 있다.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도 그의 저서 《아방강역고》에서 “한백겸의 학설은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라고 단정하여 높은 수준의 학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2] 역사학자 이기백 교수는 《구암유고 동국지리지》서문에서 “그의 주장이 반드시 옳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당시의 학문적 수준에 비추어볼 때 그의 주장은 실로 놀랍도록 참신한 새 학설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주장은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 여러 실학자들의 전제개혁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심기원(沈器遠, 1587년~1644년)은 조선 중기의 역신(逆臣)이다.

권필의 문하생인 그는 1623년 유생의 신분으로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공신 1등에 녹훈되고 부원군이 되었다. 반정 직후 형조좌랑에 임명되고 이후 고공행진을 거듭하였다. 이괄의 난 때에는 도원수가 되어 이를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정묘호란 때에는 도검찰사로서 세자를 호종하였다. 강화부유수·공조판서를 지내고, 병자호란 때에는 유도대장이 되어 도성의 방어를 담당하였다. 1642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기용되고, 1643년에는 성절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44년,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하였을 때 회은군 이덕인(李德仁)을 추대하는 반란을 꾸몄다는 고발을 받아 여러 부하들과 함께 능지처참되고 가산을 적몰당했다. 그가 모반을 했다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능양군의 이복동생인 흥안군을 자기 맘대로 죽였고 이 때문에 왕자를 자기 마음대로 국문도 없이 죽여서 하옥된 전력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심기원은 이미 인조에게 크게 밉보였으며 이것이 심기원이 모반을 꾀한 것보다 심기원이 능지처참당한 것에 대해 더 크게 작용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 당시 심기원과 더불어 권력의 중심에서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던 김자점이 이를 조작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가 처형당할 때 형리들이 자신의 다리를 토막내려고 하자 놀라서 물었는데, 이에 형리가 “김 상공이 명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심기원이 탄식을 하며 말하기를 “나를 대신해 김자점에게 말해 주시오. 당신도 반드시 이런 형벌을 당할 것이라고.” 우연의 일치였을까? 김자점이 훗날 효종의 북벌론을 청나라에 밀고했다가 발각되어 유형당하고, 이어 아들 김익(金?)과 반역을 획책하려다가 발각되어 함께 주살될 때 과연 산 채로 살을 회뜨는 능지형을 받게 된다.

심달원(沈達源 1494-1535)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자는 자용(子容), 순문(順門)의 아들이며 영의정 심연원의 동생이고 심봉원, 심통원의 형이다. 1517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1519년 부수찬(副修撰)으로 숙직하던 중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趙光祖)의 당이라 하여 제1착으로 투옥된 후 유배되었다. 그뒤 풀려나 1522년 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에 등용되었으며 중국어에 능통하여 1528년 명나라에 가는 성절사(聖節使)를 수행했다. 호군(護軍)·판교(判校) 등을 거쳐 좌통례(左通禮)에 이르렀다

심덕부(沈德符, 1328년 ~ 1401년)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자는 득지(得之). 호는 노당(蘆堂)·허강(虛江). 시호는 안정(安定)이며, 본관은 청송이다.[1] 심룡의 아들로서, 소헌왕후의 할아버지이고, 심온의 아버지이다.

고려 충숙왕 말에 음보로 좌우위녹사, 참군이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밀직사에 올라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지문하부사로 왜구가 침략할 때 왜구 방어에 공을 세웠다.[1]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후 삼사판사가 되고, 안사공신을 거쳐 청성군 충의백, 1392년 조선 개국 후에는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다. 1397년 판문하부사, 이듬해 영삼사사 등을 지내고 1399년 좌정승에 올랐다.

심수경(沈守慶, 1516년 ~ 1599년)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희안, 호는 청천당, 본관은 풍산이다. 화천군 심정(沈貞)의 손자.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 등을 지냈다. 경기도 관찰사로 있을 때 중종의 능을 이장할때, 대여(大輿)가 한강을 건너도록 선창을 설치하지 않은 죄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후에 대사헌, 팔도의 관찰사를 두루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1590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지휘하였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저서로 《청천당 시집》, 《청천 유한록》등이 있다.

심연원(沈連源, 1491년 ∼ 1558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맹용(孟容), 호는 보암(保庵), 본관은 청송이다. 명종비 인순왕후의 할아버지이며 심강의 아버지이다. 심의겸의 할아버지이며, 심통원의 형이다. 시호는 충혜(忠惠).

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가 되었다. 이후 승문원 정자·예문관 검열·대교·봉교 등을 거쳐 26년 다시 문과 중시에 급제, 뒤에 의주부사(義州府使)·동부승지(同副承旨)·예조참판 등을 거쳐 1541년 성균대사성을 지냈다.

1545년(명종 즉위) 호조판서로 있을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위사공신 2등으로 청성군(靑城君)에 봉해지고, 춘추관감사로서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의금부판사, 우의정, 좌의정 등을 거쳐 명종 때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의 문장은 아름다우면서도 날카로웠으며, 중국과의 국경선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제주 목사로 있을 때 산과 강의 높낮이·굴곡 등을 자세하게 지도로 잘 그려 두었다가, 1555년 해적들이 쳐들어오자 이를 이용하여 잘 막아내었다. 1558년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심온(沈溫, 1375년 ~ 1418년 음력 12월 25일)은 고려 시대 말기와 조선 시대 초기의 문신이다.

조선 세종의 장인이고, 소헌왕후의 아버지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자는 중옥(仲玉), 시호는 안효(安孝)이다.

여말(麗末)에 과거 급제를 하고, 조선의 개국 이후부터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조선 태조 1년(1392년)에는 병조와 공조의 의랑, 조선 태종 12년(1411년)에는 풍해도 관찰사, 조선 태종 15년(1414년)에는 형판(刑判), 호판(戶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京兆尹), 이판(吏判)을 차례로 역임했다.

조선 세종 원년(1418년)에는 태종의 양위로 인하여, 사위가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했으므로, 1418년 음력 9월 3일 국구(왕의 장인)가 된 심온은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으로 봉작과 동시에 영의정에 오른다. [1] 그 해 음력 9월에 세종의 즉위를 알리기 위한 명국로 가는 사은사(謝恩使)의 수장(사은주문사)에 임명된다. 그 때 태종에 대한 불경죄를 이유로 심온의 아우 심정 등이 체포되었다. 이후 사태가 일단락되는 모습을 보였으나, 심온이 명나라에서 돌아온 후 당시 우의정 박은 등의 무고로 인해 심정이 처형당하고 심온도 의주부(義州府)에서 체포되어 음력 12월 25일 수원(水原)에서 사사되었다.

심의겸(沈義謙, 1535년 ~ 1587년)은 조선시대의 문신이며 척신이다. 자는 방숙, 호는 손암, 본관은 청송이다. 인순왕후(명종의 비)의 동생이며 이황의 제자로, 명종 때 급제하여 병조좌랑·부수찬·교리·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척신 출신이지만 구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사림들간에 명망이 높았다. 외숙부 이량이 사림들을 탄핵할때 반대로 외숙부 이량을 탄핵하기도 했다. 1572년 김종직 계통의 신진 세력으로서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그가 일찍이 권신이던 윤원형의 집에서 묵은 사실을 들어 권력가에 아부했다 하여 반대하였다. 1574년 결국 김효원은 이조정랑이 되었고, 이듬해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이 후임 이조정랑에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반대함으로써 두 사람은 대립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구세력은 그를 중심으로 서인이라 했으며, 신진 세력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동인이라 하였다. 그 후 당쟁이 커질 것을 염려한 이이의 조정으로 개성부 유수가 되었다가 사직하였다.

1584년 이이가 죽은 후 동인이 득세하고, 서인이 몰락하자 파직당하였다. 그의 날카롭고 비타협적인 성격은 당쟁의 실마리를 만들어 조선 왕조의 치명적인 적폐의 요인이 되게 하였다.

심정(沈貞, 1471년 ~ 1531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정지, 호는 소요정, 시호는 문정, 본관은 풍산이다.

1502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3등으로 화천군에 봉해졌다. 1507년 중추부지사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18년 한성부판윤, 형조판서에 올랐으나 신진 세력인 조광조의 탄핵으로 파직당하고 정국공신 책록도 삭탈당했다.

이에 불만을 품고 훈구파 대신으로 1519년 남곤, 홍경주와 모의하여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와 그의 신진 사류들을 모조리 숙청시키거나 실각시켰다.

이 일로 1527년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이 되었으나 김안로의 탄핵으로 강서로 유배당하고 곧 경인 박씨와 통정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했다.

심지원(沈之源, 1593년 ∼ 1662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원지, 호는 만사, 본관은 청송이다.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오르지 않고 은거하였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검열을 지냈으며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왕을 남한산성으로 모셨다.

1636년,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다녀왔으며 이듬해에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심지원이 1614년 윤관장군의 묘를 파헤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조상의 묘를 조성한 탓에 이것이 원인이 되어 2006년까지 파평윤씨와 무려 392년 동안이나 두 가문이 싸웠다.

심충겸(沈忠謙, 1545년 ∼ 1594년)은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공직, 호는 사양당, 본관은 청송이다.

조선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판서까지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변사 제조로서 선조를 평양으로 모시었다. 이듬해 호조·병조참판으로 군량미를 조달하는 데 크게 활약하였다. 죽은 후에 청림군에 추봉되었으며, 서도에도 뛰어났다.

심통원(沈通源, 1499년~?)은 조선시대 중기의 권신으로 명종비 인순왕후의 종조부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자는 사용(士容)이고 호는 욱재(勖齋)이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다가 1537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벼슬이 대사헌,참판,한성부판윤 등을 지냈으며,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후 의정부우찬성으로 승진했고, 다시 우의정으로 승진, 1564년 좌의정에 이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565년 왕의 외척으로 윤원형(尹元衡) 등과 권력을 남용하여 뇌물을 받아 3사(三司)로부터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그후 중추부영사로 전임되었다가 1567년 선조 즉위 이후 관직이 삭탈되었다

심환지(沈煥之, 1732년 - 1802년 10월)는 조선 영·정조 시대의 문신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자는 휘원(輝元), 호는 만포(晩圃)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노론 벽파의 지도자로 정조의 정적이었으며 좌의정과 영의정 등을 지냈다. 한때 정조의 독살 배후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심진(沈鎭)의 아들, 심의겸의 8대 종손이며 이조판서를 지낸 심택현의 종손(從孫)이다.

심의겸의 형 심인겸의 8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교리를 지낸 심태현(沈泰賢)이고 아버지는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심진(沈鎭)이며, 어머니는 대사간을 지낸 신무일(愼無逸)의 딸 증 정경부인 거창신씨이다. 부인은 부사 김이복(金履福)의 딸인 정경부인 안동김씨이다.

1762년 소과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1771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지내고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777년 정조 즉위 후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전임되었다. 관료 생활 초기 성리학적 대의명분에 입각한 의리(義理)와 공의(公議)를 중시하여, 언관으로 지내며 의리와 공의를 강조하는 격렬한 언론을 펼쳐 여러 차례의 유배와 귀양살이를 겪기도 하였다.[1] 초년의 심환지는 김귀주와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으므로, 홍국영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후 홍국영이 김종수 등 노론 강경파와 소론 서명선 등 양측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몰락하자, 요직에 올라 김종수, 유언호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779년 홍문관부수찬으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을 겸하였다. 곧 접위관(接慰官)으로 옮겼다가 다시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로 옮기다.

 

1784년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겸하였고, 곧 승진하여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이 되었다. 87년 충청도암행어사로 나가 민생을 시찰하고 돌아왔고, 그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이후 당상관으로 승진, 1789년 사간원대사간, 1790년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1791년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전임되었다. 1792년 가선대부 형조참판으로 승진하였으나 그해 평택안핵어사(平澤按?御史)로 있던 김희채(金熙采)의 탄핵(彈劾)으로 김갑도(金甲島)에 위리안치되었다.

1793년 풀려나 복직되었고, 그해 이조참판, 승정원도승지, 규장각제학을 역임했다. 그해 다시 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며, 대사성으로 비변사제조를 겸했다.[1]

1794년 외직인 능주목사(綾州牧使)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제수되었다. 이어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으로 옮겼다.

1795년 병조판서로 승진되었다. 이후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에 임명되었고,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하였다. 그해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예조판서(禮曹判書),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이 기간 중 그는 벽파의 선봉장을 자처하여 남인계열의 채제공(蔡濟恭)·이가환(李家煥), 소론 계열의 서명선(徐命善) 등에 대한 비판과 공격, 탄핵에 앞장섰다.[1] [1795년]]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으로 승진, 1796년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거쳐 1797년 행 대호군(大護軍)으로 전임되었다.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 1798년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이 되었다. 1799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겸하였고, 경모궁도제조(景慕宮都提調)를 겸하였으며,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으로 자리를 옮겼다.

순조 즉위 초반의 정치활동 [편집]

1800년 세자의 사부가 되어 세자시강원부(世子侍講院傅)를 겸하였다.

1801년 정조가 갑자기 사망하자 정순왕후의 신임을 바탕으로 순조 즉위 초반 원상(院相)으로서의 정무를 보며 내분을 수습하였다. 이어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수렴청정으로 남인과 소론 및 시파가 몰락하고 벽파(僻派)가 집권하게 되자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올랐다.

천주교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명, 1802년 천주교 탄압을 이용하여 남인계열과 시파를 정치적으로 제거한 신유사옥을 주관하였다.[1][2] 이후 정조가 설정한 왕권 중심 군사적 구도의 핵심이며, 시파세력인 김조순(金祖淳) 계열이 진출, 장악하고 있던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하였다.[1] 또한 김관주(金觀柱), 정일환(鄭日煥) 등 노론 강경파를 등용하여 남인, 소론 및 노론 시파 등 반대파에 대한 공격과 탄압에 앞장서게 했으며, 권유(權裕)를 대사헌에 임명하는 등 같은 노론이면서도 시파에 속했던 김조순 등에 대한 공격을 유도, 지휘하였다.[1] 신유박해 때 시파(時派)에 대대적 타격을 가하고 남인을 공격할 목적으로 천주교신봉자 교도에 대한 박해와 처벌에 가담했다.

심환지는 1802년 10월 18일 7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해 순조는 심환지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승지(承旨)를 보내어 예로써 치제(致祭)하였다. 그러나 정순왕후 사후 노론 시파였던 김조순이 집권하면서 정조의 치적을 파괴한 역적으로 단죄되었다. 1806년 무고한 인명을 살해하고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대혼(大婚)을 방해했다는 죄목으로[1] 관직(官職)을 추탈 당하였다.

고종 즉위 후, 1864년 복권되었다.

노론 벽파(僻派)의 거두로 정조와 정치적으로 대립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2009년 2월에 발견된 어찰집(御札帖, 심환지와 정조가 나누었던 비밀 편지 모음)를 통해 밝혀진 사실[3]에 의하면, 정조는 각종 현안이 있을 때마다 비밀 편지로 심환지와 미리 상의했으며, 때로는 서로 '각본'을 짜고 정책을 추진할 정도로 측근으로 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후 교활하다는 악평을 들었으나 생전에는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진솔하고 원칙적이었으며 청렴하였다는 평이 있다. 정조와 정치적 노선을 달리하였으나 타협을 거부하였고, 정조 사후 그가 추진한 정책을 전부 되돌려버림으로써, 자신의 사후 4년 뒤 정조의 치적을 파괴한 역적으로 단죄되기도 하였다.

정조의 어의 중 심환지의 친인척이 있었다 하여 심환지가 정조의 암살 배후라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아닐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