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인문학(교양) 제8강】
시장(諡狀)으로 본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삶
전 경상북도상주교육지원청 교육장
권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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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가계와 생애(生涯) 1.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가계와 생애(生涯) 2.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생애(生涯)와 업적(業績) Ⅱ.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시장(諡狀) 1. 증시(贈諡) 2. 시장(諡狀) 3.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시장(諡狀) Ⅲ.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삶 |
시장(諡狀)으로 본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삶
전 경상북도상주교육지원청 교육장
권세환
Ⅰ.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가계와 생애(生涯)
1.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가계
옥천(沃川) 전씨(全氏)의 시조는 도시조(都始祖) 섭(聶)의 22세손으로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한 학준(學俊)이다. 그의 4세손 유(侑)는 고려 충숙왕 때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府使), 판도판서(版圖判書), 상호군(上護軍) 등을 지냈고, 관성군(管城君)에 봉해졌는데 관성(管城)은 옥천의 옛 지명으로 옥천(沃川) 전씨(全氏)의 중시조 군호(君號)가 되었다.
전식(全湜)의 종증조부인 팽령(彭齡)이 상주목사로 재임하면서 상주와의 인연이 닿았다. 『상주목선생안(尙州牧先生案)』에는 상주목의 첫 번째 목사로 기록된 인물이다. 사서(沙西)는 팽령(彭齡)의 형인 팽조(彭祖)의 증손이다.
판도판서를 지낸 숙(淑)의 자손인 여림(汝霖)이 충청북도 옥천에서 상주로 이거하여 아들 식(湜)을 나았다. 식(湜)은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 예조참판(禮曹參判,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자헌(資憲)의 품계에 올랐다. 식(湜)은 극항(克恒)을 비롯하여 6형제를 두었다. 이로부터 노곡동(논실마을)을 중심으로 문호(門戶)를 열어 오늘에 이르기 까지 문벌(門閥)을 이어 오면서 규천(虯川) 극항(克恒), 창주(滄洲) 극념(克恬) 등의 명현을 배출하였다.
전극념(全克恬)은 아버지와 형을 모시고 3부자(父子)가 낙강범월시회(洛江泛月詩會)에 참석하는 등 문장이 빼어났다. 이 때는 임술년(1622년) 7월 16일로 전식(全湜)이 60세 되던 해이다. 전식(全湜)과 큰아들 극항(克恒), 작은아들 극념(克恬) 3부자가 함께 낙강범월시회(洛江泛月詩會)에 참석한 것으로 유명하다.
낙강범월시회(洛江泛月詩會)에 참석한 전식(全湜)의 득청자소서(得淸字小序)는 시제(詩題)로 청(淸)자(字)를 얻어 서문(序文)과 시(詩)를 지었다.
득청자소서(得淸字小序)
사서(沙西) 전식(全湜)
단구(丹丘)의 15일 자리에 나와 창석(蒼石)옹이 갔었다. 좌석의 손과 벗은 다 평소 의중에 있던 친한 이었다. 종일 술을 주고받으며 얘기를 나누어 그 취흥이 거나한데 얼마 뒤 어스름 녘에 더위가 가시자 작은 거룻배를 앞 여울에 띄워 달빛을 타고 거슬러 오르며, 퉁소 소리를 들으니 단란하고도 즐거웠다.
술병을 기울여 자작하고 노래하고 읊조려 서로 화답하니 아지 못 할래라. 파옹(坡翁)의 옛 놀이가 능히 또 이 가운데의 진실한 즐거움을 가졌던가. 파옹(坡翁)은 두 손을 얻어 따랐으나 우리들과 더불어 한가롭게 논 사람은 이미 10여 인에 이르렀다. 그 풍류와 문장의 아담함은 또 두 손과 비교할 바가 아니니, 우리들의 오늘 밤 놀이는 옛날 동파옹(東坡翁)의 놀이에 그리 뒤지지 않으리라.
다만, 날이 16일이 아니고 강이 적벽(赤壁)은 아니나, 오히려 용연(龍淵)에서 모여 완상키로 하였으니, 이 못은 실로 영남의 큰 못이다. 붉은 언덕과 푸른 절벽이 빙 둘러서 하늘 높이 섯는데 파옹(坡翁)으로 하여금 다시 놀게 하더라도 반드시 이 사이에서는 시부(詩賦)를 읊었으리라.
주인옹(主人翁) 검간공(黔澗公)이 젊은이와 어른 20여 인을 모아 놓고 먼저 와 있었다. 그것은, 속수(涑水)의 모임과 비교해 보아도 아주 지나침이 있었다. 나는 마침 조물주의 희롱을 당하여 오던 길에 비를 만나 촌집에 갇히어 부득이 여러 벗과 함께 할 수 없었고, 여러 벗들도 미친 구름이 시샘하여 명월의 시를 욀 수도 없었다. 세상 온갖 일이 다 이같이 슬프니 좋은 때를 만나 흡족해하기 어렵다는 시를 이에서 거듭 읊조린다.
아, 속수(涑水)의 뱃놀이 성대하였도다. 운자(韻字)를 나누어 시 짓는 일은 옛 부터 있었으니, 어찌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하여 뒷날 오늘을 보는 자로 하여금 아쉽게 여기게 하랴. 맑을 청(淸)자를 얻어서 애로라지 크게 한 번 웃는다.
‘청(淸)’자를 얻어서
오동나무 가지에 맑은 가을빛 드니
단구(丹丘)의 경치는 강성보다 좋도다.
뉘 집 맛좋은 술은 시 벗을 맞는가.
특별한 곳 호쾌한 놀이에 명월을 얻었네.
오늘 함께 완상함을 무엇이 방해하랴
문득 삼경에 이름도 깨닫지 못하네.
- 중략 -
여러 번 동파노인 후적벽부 읊조리니
도산(陶山)의 한바탕 웃은 정 배나 생각나네.
모부에서 시월에 다시 유상(遊賞)하여
뱃전 두드림 낙강(洛江)에 모여 또 서로 맞이하세
신선 땅이 아마도 범인을 받아 주겠지
학이 나를 스치며 우는 소리 오래도록 듣네.
낙강범월시회에 참석한 극항(克恒)의 득서자서(得徐字序)이다.
득서자서(得徐字序)
규천(虬川) 전극항(全克恒)
낭관호(郞官湖) 위에서는 학사(學士)가 아름다운 시문을 짓고 제자섬)가에서는 서생(書生)이 아름다운 글을 짓는다. 이에 마음을 다하여 수놓은 비단에 바다와 산악의 정기 모으니 구슬 같은 시문(詩文)은 강산의 도운 바를 힘입었도다.
삼가 생각하니 여러 선생의 문장은 위엄은 봉황의 골격이요 모습은 귀인의 상이로다. 양나라 추매(鄒枚) 같은 뛰어난 재주는 문장에서 빼어났고 진나라 도사(陶謝) 같은 고상한 풍치는 어찌 술자리에서만 그치리오.
풍채와 품격은 묘하게도 옛 현자들과 부합하니 연회에 참여하여 옛일을 따르고자 하도다.
한공(韓公)이 이른 가을날 완상에 부질없이 연꽃만 읊었음을 비웃고 소노가 열 엿새 밤에 놀았던 일을 생각하며 한가로이 계수나무 노에 의지하도다.
다행히 해가 임술년(壬戌年) 돌아옴을 맞으니 실로 황강(黃岡)의 부절(符節)을 지녔던 해요 월건(月建)은 무신(戊申)이니 적벽(赤壁)에 신선이 오르던 달이도다.
- 중략 -
석 잔 술로 한바탕 이야기를 지어내어 얻고 잃음조차 떨쳐 버리니 시(詩) 천(千) 수로 만호(萬戶)의 봉작을 하찮게 여기도다.
감히 하찮은 파음(巴唫)을 바쳐 영곡(郢曲)에 화답하도다.
다음은 범월시회에 참석한 극념(克恬)의 래(來)를 얻어 쓴 시(詩)다.
‘來’자를 얻어서
창주(滄洲) 전극념(全克恬)
옥주(玉柱) 신령한 땅 동쪽 물굽이에 열리니
하늘 찌른 층층 절벽 어쩜 이리도 장한가.
큰 강물 세차게 그 밑으로 달리니
푸른 물결 만 이랑 청동(靑銅)을 펼친 듯하네.
호산(湖山)의 경치는 흡사 적벽(赤壁) 같은데
하물며 임술년 가을바람 돌아옴에랴.
가군(家君)은 어제 속수(涑水)에서 배를 띄우고
다시 뭇 어른들과 뱃놀이하기로 약속하셨네.
검계(黔溪)와 월간(月澗)은 난새와 학의 모습이요
좌상의 웅변은 바람과 천풍도 놀라게 하네.
묻나니, 누가 문장으로 으뜸인지
창석(蒼石) 어른 지금 막 조유(曺劉)의 재주 탔다네.
송만주인(松灣主人)의 마음은 얽매임이 없어
뛰어난 기개와 도량은 진실로 넓디넓네.
걸출한 동유(同遊)분들은 다 동남의 아름다운 선비요
소자(小子)도 다행히 모시고 뒤 따르네.
가을 이슬 강에 빗기니 밤기운 찬데
큰 바람 달을 불어 동쪽 바다에서 오네.
강 한가운데 한 척 갈잎배 가는 대로 맡기니
황홀하게도 바람 타고 봉래산 찾는가 싶네.
밤은 어찌하여 북두성이 지려 하는가
어디선가 구름 뚫고 오는 피리 소리 애닯네.
물새 날아 흩어지니 숲속 갈가마귀 놀라고
고기와 용이 물 밑에서 수심에 차 서성이네.
신선놀이 비로소 반 천 년 만에 이으니
맛난 술 모름지기 삼백 배(盃)는 기울어야 하리.
남은 일생은 뜻대로 삶이 귀하니
하필이면 얽매여 티끌세상에서 달리랴.
그대는 듣지 못하였던가,
동파(東坡)가 옛날 오늘에 모여
만고에 사부(詞賦) 구슬로 남기었음을.
2.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생애(生涯)와 업적(業績)
전식(全湜)은 1563년(명종 18년)〜1642년(인조 20년)까지 80세를 일기로 사신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양란을 겪은 상주의 대 유학자와 선비이다.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이다.
조부(祖父)는 혼(焜)이고 부(父)는 이조판서 여림(汝霖)이며, 모(母)는 월성이씨이다.
류성룡(柳成龍),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며, 반간(槃澗) 황뉴(黃紐)와는 사돈 간이다.
1589년(선조 2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군(昌義軍)의 군량유사를 맡아 왜적을 토벌하는데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이로 인해 김응남의 추천으로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이 되었다.
1599년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으로 전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0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607년 전적·예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1611년 울산판관이 되어 백성들 교화에 힘썼다.
1612년 전라도도사(都事)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낙향하여 벗들과 산수를 유람하며 자연을 관조(觀照)하며 생활하였다
1623년(인조 1년) 인조반정으로 새 왕이 등극하자 예조정랑에 이어 수찬·교리가 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태복시정(太僕寺正)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천안에 이르러 집의가 되었으며, 연평군 이귀(李貴)와 원수 장만(張晩)의 실책을 논하였다. 이어 병조참의·병조참지에 승진했으나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1625년 5월 13일 중국 명나라 성절사 겸 동지사의 정사로 임명되어 1625년 8월 3일까지 약 9개월간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에 대한 기록으로 『사행록(槎行錄)』이 있다.
그 뒤 대사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어했고, 왕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와 예조참판에 임명되고 가선대부에 승계(陞階)했으나 사양하였다. 1638년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대사성이 되었다. 왕이 순검사에 명해 하삼도(下三道)의 수군을 정비하게 했으나 적절한 시책이 아니라고 반대하였다. 1642년 자헌의 품계에 오르고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그 뒤 재차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전식(全湜)은 1642년(인조 20년) 11월 7일 상주에서 돌아가시었다. 전식(全湜)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인조실록 인조 20년(1642년) 12월 2일』‘전 지중추부사 전식(全湜)의 졸기(卒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전식은 사람됨이 겸손하고 신중하였으며, 지난 혼탁한 조정에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가 반정한 뒤에 청현직(淸顯職)을 역임하였으며 나이가 많아 귀향하였는데, 이때에 죽은 것이다.
이는 전식(全湜)의 곧고 바르며 인(仁)과 의(義)을 겸비하였으며, 그의 삶이 맑은 물같이 깨끗한 선비였음을 말하고 있다.
1646년(인조 24년) 6월 14일 전식(全湜) 사후 4년 만에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사 전식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주관사 세자부(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世子貳師知經筵春秋館事全湜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傅)로 추증되었다.
이는 전식(全湜)이 인조반정 공신으로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 1등으로 녹훈되었기 때문이다.
학맥으로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향리에서는 이준(李埈), 정경세(鄭經世)와 더불어 상산삼로(商山三老)로서 향토 문학에 꽃을 피웠다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1691년(숙종 17년, 선생 사후 49년)에 충간(忠簡)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Ⅱ.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시장(諡狀)
1. 증시(贈諡)
증시(贈諡)는 조선시대에 종친 및 문무관 실직 정3품 당상관 이상과 친공신(親功臣)·유현(儒賢)·공훈자 등에게 사후 시호(諡號)를 내려 주던 제도이다.
봉상시(奉常寺)에서 담당한 증시(贈諡) 행정은 종친과 문무관 실직(實職) 정2품 이상이 그 대상자였다. 시장(諡狀)을 접수하는 관서는 예조(禮曹)였다. 이 시장(諡狀)은 봉상시를 거쳐 홍문관으로 이송되었으며, 최종 삼망단자(三望單子)를 홍문관과 봉상시의 삼망(三望)과 합친 다음 의논하여 시호(諡號)를 확정하였다. 이를 왕에게 입계하면 그 중 하나를 낙점하였으며, 이 시호 교지는 제문과 함께 내려졌다. 증시(贈諡) 대상은 조선후기에 정3품 당상관 이상과 유현(儒賢)·절의(節義)로까지 확대되었다.
시호(諡號)에서 시(諡)는 행위의 자취요, 호(號)는 공(功)을 나타내었다. 따라서 시(諡)는 죽은 이의 생전 행적의 선악을 살아 있는 이들이 평가하여 후손들의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포폄(褒貶)의 의미가 있었다. 정도전도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