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amu.wiki/w/9.11%20%ED%85%8C%EB%9F%AC
1. 개요
9·11 테러(September 11 attacks)는 2001년 9월 11일,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알카에다가 일으킨 하이재킹 및 자살 테러 사건이다.
알카에다 주도의 테러리스트들은 납치한 항공기를 미국의 주요 건물에 충돌시키는 방식으로 테러를 일으켜 미국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 D.C.의 국방부 청사 건물인 펜타곤을 공격하였다.
백악관 또는 미국 국회의사당도 목표로 노려졌으나 이 공격을 위해 납치된 UA93기는 승객의 저항으로 펜실베이니아 주의 한 광산에 추락했다.
3천 명에 가까운 사망자와 최소 6천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여 2024년 기준 가장 큰 인명피해를 유발한 테러 공격으로 기록되고 있다.
테러는 피해 당사국인 미국은 물론이고, 미국의 우방국과 적대국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미국 내부에서는 이 사태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에 대한 무제한 응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당시 현직 대통령이던 조지 W. 부시의 지지율은 테러 직후 90%에 육박하기도 했는데, 이는 미국 역사상 현직 미국 대통령의 최고 지지율 기록이기도 하다.)
이 테러는 테러리즘이 단순한 범죄를 넘어 전쟁에 준하는 수준의 안보 위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부시 대통령은 2001년 9월 20일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였다.
사건이 일어난 지 1개월 뒤 미군은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시작하여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2001~2021)을 일으켰고 이에 탈레반 정권이 일시 축출되었으며, 2002년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선포, 2003년 대량살상무기를 명분으로 이라크를 침공하여 이라크 전쟁(2003~2011) 발발 및 후세인 정권의 붕괴, 그리고 최종적으로 2006년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 사살과 사담 후세인의 처형, 2011년의 오사마 빈 라덴 사살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테러와의 전쟁은 이라크 내 대량살상무기의 부재 및 이라크 공습의 정당성에 대한 비판, 위키리크스 등으로 밝혀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미군의 인권 유린 행위 발각, 애국자법(2001)과 같은 감시권한 강화에 대한 논란, 대침체와 더불어 팍스 아메리카나라고 불리던 미국의 절대 패권 약화에 기여 등 국내외적 영향을 끼쳐 역사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은 9·11 테러를 21세기 세계 현대사의 핵심적인 사건으로 평가한다.
2. 배경
1979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발발 후 이슬람권 각지에서는 '불신자 공산군' 과 싸우는 아프간 무슬림들을 돕기 위한 지하드의 일환으로 궐기한 무자헤딘 전사들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으로 몰려들었다.
냉전으로 소련과 대립하던 미국 정부는 CIA를 통해 그들을 지원했고, 서방 유학을 통해 영어에 능통하던 오사마 빈 라덴이 그 지도자가 됐다.
그러던 1988년 소련이 전쟁에서 손을 떼고 철수를 개시하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소련에 대항한다는 방향성을 잃은 지하디스트 세력을 유지하려던 빈 라덴은 지하드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고, 그 대상은 바로 기존의 동맹이던 미국이었다.
같은해 빈 라덴은 (후일 그를 계승하는) 아이만 알자와히리 등의 무자헤딘 베테랑들과 함께 페샤와르에서 '지하드의 선봉' 이 될 조직으로 (아랍어로 '근본' 이란 뜻인) 알카에다를 창설했다.
1990년 사담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걸프 전쟁이 발발하자 빈 라덴은 무자헤딘 조직의 활용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에 군사지원을 제안했다.
하지만 사우디 왕가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고 대신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후 미군이 사우디에 주둔하게 되자 빈 라덴은 사우디 왕가에 타크피르(배교자)라며 지하드를 선포하였다.
또한 '아라비아 반도의 비무슬림을 추방할 것' 이라는 하디스를 인용하며 1996년 사우디에 주둔하는 미군에 퇴거를 명령하는 파트와를 내렸다.
(다만 무함마드 사후 5백여년이 지난 12세기 후반까지 아라비아 반도 내륙(네지드)의 오아시스 도시들에는 여전히 유대인들이 살았다.)
알카에다 창설 전부터 이스라엘과 아랍의 세속주의 독재정권들을 지원하는 미국에 반감을 품어오던 빈 라덴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 않고 전세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에 나서기 시작했다.
1998년 알카에다는 케냐 미 대사관 폭탄 테러와 탄자니아 미 대사관 테러를 감행하면서 전세계 이슬람 극단주의에 있어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했다.
같은해 빈 라덴은 미국의 대 이스라엘 정책과 중동 개입을 성토하며 전세계 무슬림들이 단결해 '이슬람 국가들의 공공의 적인' 미국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중동은 물론, 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등 이슬람권 각지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그의 산하에 모여들었다.
충분한 세력을 확보한 빈 라덴은 1998년 말부터 미국 본토에 테러를 감행할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의 주동자인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도 있었다.
이후의 인터뷰에서 빈 라덴은 1982년 레바논 내전 당시 이스라엘 공군이 미제 무기로 베이루트 도심 고층건물들을 사정없이 폭격하는 것을 목도하고는 보복심리로 미국 마천루들에 대한 공격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진위여부는 알 수 없으나 빈 라덴의 이러한 심리와 실제로 그러한 공격을 감행한 칼리드의 합류는 9·11 테러 계획의 구체화로 이어졌다.
알카에다의 최종목표가 된 미국 본토 공격에 있어 빈 라덴은 미국 군사력의 기반은 미국 경제력에 있고, 따라서 미국 경제의 상징과도 같은 세계무역센터를 테러의 주요 목표로 선정했다.
또한 9월 11일을 실행일로 정한 것은 그가 누차 서방의 중동 개입 시작으로 간주한 제2차 빈 공방전이 절정에 달하던 날이었고, 또한 유엔 총회 개막일이자, 빈라덴 자신의 궐석재판 하루 전날이기도 했다.
이러한 여러가지 요인들이 겹쳤기 때문이다.
또한 테러 실행시간도 이른아침 시간대라 관광객들이 아닌 출근하는 미국 시민들을 노린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999년 빈 라덴의 참모 모하메드 아테프는 테러 실행방법으로서 비행기 납치를 결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인원을 모집했다.
그 결과 교육수준이 높고 서방 유학 또는 거주 경험이 있어 영어가 능숙한 이들이 납치조 약 20여명으로 꾸려졌다.
당시 탈레반의 초청으로 아프가니스탄을 본거지로 삼던 알카에다는 이들을 초청해 훈련시켰다.
(훈련내용에는 서구의상을 입는 법, 음식점에서 주문하는 법 따위도 있었다고 한다.)
납치조는 2000년 봄부터 차례대로 미국에 들어갔고, 빈 라덴은 사우디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친척을 포섭해 그들의 여권을 발급했다.
2000년에 들어간 1차 납치조는 플로리다의 허프만 비행장 등지에서 조종훈련을 받았고, 2001년 봄에는 2차 납치조가 합류했다.
2001년 7월, 납치조장 격인 모하메드 아타는 스페인에서 알카에다 간부와 접선하여 최종계획을 브리핑했다.
빈 라덴은 이를 승인하고 최대한 빠른 실행을 지시했다.
그러나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사실 미국 정보당국도 어느 정도는 알카에다의 음모를 눈치챘었다.
이미 2000년 전후로 사우디 정보당국의 협조로 CIA는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미국 비자를 소지했음을 확인했고, 세계 각지 요원들에게 경고했다.
2000년 7월, CIA는 알카에다 조직원 2인 이상이 미국에 들어간 것을 확인했고 FBI는 미국내 비행학교에서 이상한 조짐을 감지했다.
하지만 두 정보당국의 협조는 거의 없었고, 당연히 이들의 연관성을 찾지 못하고 그저 테러리스트들의 개별 행동으로 치부했다.
심지어 알카에다 조직원에 대한 FBI의 정보공개요청을 CIA가 거절하는 일도 있었다.
이는 1995년 미국 법무부가 정보당국 간 극비사항 공유규제를 내렸음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미국은 2000년 USS 콜 테러사건 이후에도 알카에다가 단순히 해외에 주둔한 미군 공격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여겨 해외 소재 미국인들의 경계 강화에만 치중했다.
2001년 8월, 요르단 정보당국은 미국 측에 알카에다가 미국내에서 비행기와 연관된 음모를 진행중이고, 이는 한 달 안에 집행될 것이라는 중요한 첩보를 전달했다.
(심지어 요르단 정보당국은 알카에다 측의 작전암호(큰 결혼식)까지 전달했다.)
그 후 비로소 민간비행학교에 알카에다 조직원이 있다는 FBI의 의혹제기를 받아들인 CIA는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국내에서 비행기 납치 등의 형태로 공격이 예상된다' 고 보고했다.
8월 16일에는 알카에다 조직원 자카리아스 무사위가 미네소타의 비행학교에서 보잉 747기의 조종훈련을 고집하다가 의심을 받아 체포됐다.
하지만 FBI 뿐만 아니라 조지 부시 대통령을 위시로 한 미국 수뇌부 역시 알카에다를 과소평가하며 납치 후 인질극 정도 벌일 뿐 감히 미국 본토를 향한 직접 공격을 감행하진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빈 라덴이 설정한 테러 개시의 날은 묵묵히 다가왔다.
3. 전개
이 모든 일들은 9월 11일 오전 8시에서 11시까지 약 2-3시간에 걸쳐 벌어졌다.
3.1. 항공기 납치
3.1.1. 항공기
이슬람 테러리스트에 의해 AA11, UA175 · AA77 · UA93 비행기 4 편이 납치됐고 UA93을 제외한 비행기 3 편은 테러의 목표지점에 충돌했다.
UA93 편은 승객들의 저항에 의해 목표지점까지 가지 못하고 도중에 추락했다.
오전 8시 13분경 모하메드 아타를 비롯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이 아메리칸 항공 11편, AA11 편을 납치했다.
이후 AA11 편은 뉴욕으로 향해 오전 8시 46분경 제1세계무역센터에 충돌했다.
오전 8시 43분경 마르완 알 셰히를 비롯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이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 UA175편을 납치했다.
이후 UA175편은 뉴욕으로 향해 오전 9시 3분경 제2세계무역센터에 충돌했다.
오전 8시 51분경 하니 하뇨르를 비롯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이 아메리칸 항공 77편, AA77 편을 납치했다.
이후 AA77편은 워싱턴으로 향해 미합중국 국방부 청사 펜타곤에 충돌했다.
오전 9시 28분경 지아드 자라를 비롯한 4명의 테러리스트들이 유나이티드 항공 93편, UA93편을 납치했다.
이후 UA93편은 워싱턴 D.C.으로 향했으나, 승객들의 저항으로 인해 펜실베이니아 주의 한 광산에 추락했다.
원 목표는 백악관 또는 미국 국회의사당으로 추정.
(소수설이지만 원자력전문가들은 미 동북부 원자력발전소 또한 잠재 타겟이었을 가능성도 제시했다.)
3.1.2. 테러리스트
목표물에 충돌
아메리칸 항공 11편 테러 사건 : 제1세계무역센터에 충돌.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 테러 사건 : 제2세계무역센터에 충돌
아메리칸 항공 77편 테러 사건 : 펜타곤에 충돌
실패하여 추락
유나이티드 항공 93편 테러 사건 : 펜실베이니아 주 인근에 추락.
테러 목표는 백악관 또는 미국 국회의사당으로 추정.
사실, 이들 19명 중 15명은 '메카와 메디나, 두 성지의 수호자' 를 자처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으로, 이들 중에는 법대 재학생이나 재벌집안의 자녀 등 부유한 가정의 도련님들이 많았다.
즉, 굳이 자진해서 테러를 할 필요가 없는 금수저임에도 저지른 것.
유달리 사우디 출신이 많은 것은 두 성지를 품은 조국 사우디아라비아에 '이교도' 인 미군이 주둔하던 것에 불만을 품은 사우디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큰 공항들은 CAPPS I 이라는, 공항에 들어온 모든 개개인을 프로파일링하고 분석하는 시스템을 쓰고 있었는데 논문마다 숫자는 조금씩 다르지만 한 논문에 따르면 19명의 테러리스트들 중 6명이 CAPPS I 시스템에 걸렸고 2차 수색을 받았다고 한다.
사실 공항에서 걸린 테러리스트들의 숫자는 19명 중 10명이었는데 이 중 6명이 CAPPS I 시스템에 걸려들었고 나머지 4명은 가방 속 내용물과 같은 이유로 인해 2차 수색을 받았다고 한다.
문제는 수색을 했음에도 이들이 실질적으로 걸리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테러리스트들은 9·11 테러를 벌이기 전에 사전답사로 보이는 행동을 했었다.
한마디로 CAPPS I 에 걸리는 행동들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공항을 사전답사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CAPPS I 과 같은 프로파일링 시스템의 실용성에 의문들이 쏟아져나왔으며 미국이 곧 CAPPS II 를 개발하는 까닭이 된다.
알 자지라 방송국에서 9·11 테러의 원흉인 알카에다의 총수 오사마 빈 라덴의 2004년 생전 비디오를 녹화한 것을 공개했다.
이 비디오가 대테러 전문가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3.2. 첫 번째 충돌 : 제1세계무역센터
세계무역센터에 첫 번째 비행기가 충돌하는 순간의 영상.
이 영상은 마침 뉴욕시의 신참 소방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던 프랑스 출신 영화제작자 쥘 노데(Jules Naudet)가 찍은 것으로, 현재까지 발견되고 알려진 영상 중 1WTC에 비행기가 충돌하는 모습이 유일하게 제대로 담겼다.
(첫 번째 충돌이 담긴 다른 영상들도 있지만 우연히 주변에서 다른곳을 찍다가 폭발직후 카메라를 돌린 뉴스 촬영기사 동영상, 몇 초에 한 번씩 사진을 찍은 웹캠 동영상, 그리고 도로 위 차량에서 찍어 전부 다 충돌 모습이 제대로 안 보이지는 동영상 뿐이다.
사건 발생 전이어서 모두가 예상을 못하던 시점 임을 감안하면 거의 희귀동영상이나 다름없다.)
다큐멘터리를 찍다가 갑자기 비행기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크게 들리면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쥘 노데가 카메라 앵글을 돌리다가 우연히 비행기에 피격당하는 1WTC 건물을 찍은 것이다.
엄청난 불길과 폭발음은 물론, 주변 사람들의 "Holy Shit!" 같은 반응을 보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알 수 있다.
1WTC에 충돌한 항공기는 아메리칸 항공 11편으로, 대장인 모하메드 아타 등 5명의 하이재커를 제외한 76명의 승객과 승무원 11명을 태우고 비행했다.
초유의 사태에 연방항공국은 긴장했고 미국 공군은 사라져 버린 AA11편을 찾으려고 전투기를 내보냈지만 그 때는 이미 충돌한 지 한참 지난 후인 데다 첫 충돌 비행기가 AA11편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해 모두가 보이는 곳에서 불타던 AA11을 애타게 찾아다니는 헛수고를 벌였다.
목격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으나 고의 연쇄 테러의 첫 공격이라고는 전혀 생각조차 못했다.
단지 조종사의 조종실수나 비행기 오작동으로 충돌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당장 언론들은 이 "사고" 를 보도하기 시작했고, 이후 WTC에서 사람들에게 비상대피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충돌이 일어난 곳은 1WTC 였기 때문에 2WTC에 있는 사람들의 피난을 중단시켰고 사람들을 다시 안으로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2WTC에 있던 사람들은 밖에 불이 났나 보다라고 생각했고 2WTC 방송실에서는 "긴장하지 말고 제자리에 편안히 있으라" 는 방송을 했다.
당시는 첫 충돌이 '고의 연쇄 테러의 첫 공격' 이라는 것이 파악 안 된 상황이었다.
사실 옆의 1WTC가 곧 무너질 것이었기에 2차 테러가 없었더라도 대피를 하는 것이 옳았으나, 이 정도 규모의 사고가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1WTC가 무너질 것이라는 결론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1WTC가 무너질 당시에 상당수의 언론은 또 하나의 테러나 폭발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고 보도했다.)
3.3. 두 번째 충돌 : 제2세계무역센터
승객 51명과 승무원 9명을 태우고 비행하던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의 교신이 끊어지고 불규칙하게 비행하는 것이 뉴욕 관제소에서 포착되었다.
비행기는 항로를 벗어나 뉴욕 상공으로 들어왔고 금방이라도 추락할 듯이 빠른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다.
결국 1WTC가 불타는 모습이 언론사들을 통해 전세계에 거의 생방송으로 중계되던 9시 3분(한국시각 오후 10시 3분),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방송 카메라가 전부 WTC를 향한 상태에서 두 번째 비행기 테러가 일어났다.
각 언론사들이 1WTC가 불타는 모습을 중계하던 중 또다른 비행기가 2WTC에 충돌하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목격한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해야 할 아나운서들조차 중계 카메라를 통해 들어오는 참상을 보고 비명을 지르거나 최대한 자제해서 비속어를 내뱉으는 등 경악했다.
위 CNN 동영상의 카메라맨은 항공기소음이 커지던 시점부터 크게 동요해 화면이 크게 흔들렸고, 아나운서와 취재진은 10초 가량 말문이 막혀버렸다.
생방송 중 실시간으로 발표 등을 중계하는 게 아닌 이상 아나운서나 리포터가 10초씩이나 말이 끊기면 방송사고인데, 이 전대미문의 상황은 모두 할 말을 잃게 하였다.
이는 9·11 테러가 굉장히 치밀하게 계획된 테러였음을 증명하는데, 1WTC 충돌직후 이목이 집중된 상태에서 시간차를 두고 한 번 더 2WTC에 충돌해 미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테러라는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한 것이다.
사람들이 사고현장을 보고 있는 상태에서 두 번째 테러가 가해진 것은 현재까지도 정말 유례를 못 찾아볼 정도로 매우 충격적인 사례이다.
알카에다가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뉴욕을, 그것도 두 번의 공격이 가능하고 충격을 가장 극대화시킬 수 있는 구조와 환경을 갖춘 쌍둥이 빌딩을 선택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첫 번째야 사고로 추정했지만, 바로 똑같은 종류의 사고가 그것도 바로 옆 건물에서 벌어져 누가 봐도 고의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첫 충돌이 발생한 상태에서 바로 옆 빌딩에 두 번째 비행기가 충돌했으니 사람들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당시 Fox News TV 중계 앵커가 "This seems to be on purpose(이건 아무래도 의도적인 것 같은데요.)" 라고 말할 정도로 무언가 평범한 사고가 아닌 고의적인 사고, 즉 테러라고 사람들은 하나 둘 눈치챘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대부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다.
(2001년 당시엔 스마트폰은커녕 카메라 기능이 있는 피쳐폰도 널리 보급 안 됐고 (당연히 당시 긴급하게 폰으로 동영상을 찍어봤자 화질 낮은 동영상일 뿐이었다) 무선인터넷도 있긴 하나 요금이 비쌌다.)
한국은 1차 테러 이후 한국 시간인 2001년 9월 11일 밤 10시경부터 CNN을 동시통역으로 중계하며 방송3사가 긴급속보를 시작했고, 하이텔 PC통신 등으로 대화방에서 몇몇 이용자가 자신의 사설 서버에 올린 CNN과 MBC 녹화동영상을 공유하는 형식으로 전파되어 갔다.
다음날인 9월 12일부터 방송 3사에서 하루종일 속보방송을 편성하여 내보냈고, 당연히 속보를 보던 국민들은 패닉에 빠졌다.
당시 미국 현지 방송자료와 뉴욕에 있던 사람들이 찍은 동영상을 보면 두 항공기의 충돌과 그 상황에서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까지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담겨 있다.
당시 뉴스 생중계를 보면 사고 그 자체뿐만 아니라 세계무역센터 인근 고등학교에서 폭발물이 설치된 것을 발견했다든가 주변건물이나 차에서 폭탄이 폭발했다거나, 워싱턴 내셔널 몰에 불이 났다거나 하는 등 온갖 소문으로 인해 방송사부터 뉴욕시 경찰과 구조대원까지 모두 대혼란에 빠진 상황이 그대로 드러난다.
세계 최강의 초강대국이라 자부하던 미국의 심장 뉴욕이 무방비로 테러에 노출됐음이 모두에게 각인됐고, 항공기를 테러에 2대씩이나 동원할 만큼 적은 치밀하고 대담하며, 거기에 그 적이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있는 상황은 수많은 미국인들을 대혼란과 공포에 몰아넣었다.
항공기 테러가 가능할 정도의 집단이면, 폭탄을 설치하는 테러 정도는 어렵지 않았을 것인 데다 정확한 공격 규모와 목표도, 그리고 공격 대상과 공격 주체가 누군지 아무 것도 정보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후에야 조사가 이루어지며 알 카에다의 공격임을 알았지만, 아무런 정보가 없는 초기 상황에서는 연쇄 폭탄 테러나 추가적인 테러 공격이 가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절대 배제할 수 없었다.
특히 CNN에서는 WTC 바로 아래에서 터진 폭탄이 북쪽 타워가 무너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도해 이후 음모론의 중요한 떡밥으로 작용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2WTC 충돌부 아래쪽에 있던 사람들은 위층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모르는 등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는데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방송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가 대피를 해도 괜찮다는 등 오락가락한 정보를 내보냈기 때문이다.
(충돌 이후에도 대피방송은 1WTC와 달리 충돌부와 상층부에서도 멀쩡히 나왔다.
이는 1WTC와는 달리 2WTC에 충돌한 UA175편은 측면에 충돌했기 때문에 건물 중심 코어부분을 지나는 전기라인은 손상되지 않았고 따라서 충돌 후에도 상층부, 심지어는 충돌층에서도 전기가 멀쩡히 공급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열기와 유독가스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그 고층에서 뛰어내려 추락사했다.
희생자들은 내부에서 유독가스로 질식사하거나 문자 그대로 하늘을 뚫을듯한 건물인 마천루의 고층에서 뛰어내려 자신을 희생하는 선택지밖에 없던 것이다.
(이런 사례는 30년 전에 발생한 대연각호텔 화재사고에서도 있었으며 이와 같은 까닭으로 고층에서 추락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전 9시 30분경엔 추락하는 투신자에 직격으로 맞은 소방관이 죽는 일까지 있었다.
(열기를 버티지 못한 3명이 동시에 뛰어내렸고 이들중 한 명이 뉴욕 소방국 소방관 Danniel T. Shur을 덮쳤다.
목과 머리를 크게 다친 대니얼은 현장에서 숨졌다.
이는 9.11 테러 현장에서 발생한 최초의 응급요원 순직이었다.)
그렇게 추락사로 사망한 사람의 수만 200명이 넘으며, 추락사한 사망자들의 시신은 대부분 얼마 후 건물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유실되어 버렸기 때문에 대개 신원조차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광경은 비행기 충돌 후 계속 돌아가던 뉴스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겨 미국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이날 타워에서 스스로 뛰어내릴 수 밖에 없던 희생자들은 언론과 정부기관 등에서도 Jumper라고 불린다.
20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Jumper들의 마지막을 담은 사진과 영상들이 무분별하게 유포됐으나 다행히 그들의 마지막에 대한 존엄을 존중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관계 당국들에 의해 인터넷에서 많은 흔적이 사라졌다.)
미국 정부는 세계무역센터에서 투신한 투신자들이 0명이라는 입장을 고수했으나 거듭된 항의에 따라 몇 년이 지나서야 200명 이상의 희생자들이 투신으로 인해 숨졌음을 인정했다.
안타깝게도 불타는 잔해물들이 아래로 계속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상에서도 어떻게 해 줄 방법이 없었다.
불가항력이지만 고통받는 사람들을 건물 밑에서 보고만 있어야 하는 소방대원들은 억울하고도 애처로운 분노를 곱씹었을 뿐이며, 무력감을 느끼는 시민들은 그저 하염없이 절망만 할 뿐이었다.
옥상으로 헬기를 보낼 수 없었냐고도 하지만 화재현장, 특히 초고층 건물 화재에 헬기를 동원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다.
화재현장에서 올라오는 엄청난 기류를 헬기가 그대로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헬기마저 건물에 충돌하거나 열기에 의해 공중에서 폭발해버릴 위험이 매우 크다.
이런 까닭에 당시 사건 현장에 투입된 헬기들은 구조작업은 엄두도 못내고 건물 곁을 빙빙 돌면서 실시간으로 상황 보고밖에 할 수 없었다.
사실 빌딩 상층부에 갇힌 희생자들도 헬기 생각을 하고 옥상으로 올라가려 했지만, 빌딩 상층부로 통하는 문을 포함해 제어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는 쌍둥이 빌딩의 모든 문을 어떻게든 모조리 개방하려는 직원들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충돌로 망가진 제어 시스템에 의해 굳게 닫힌 옥상은 빌딩이 무너지는 그 순간까지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에게 피격당한 2WTC에 9시 37분 뉴욕 경찰 항공대의 헬리콥터가 위험을 무릅쓰고 세계무역센터의 옥상으로 착륙과 강하(레펠)를 시도했으나, 화재의 열기 때문에 엔진 온도가 급상승해 실패했다.
급기야 9시 41분에는 뉴욕 경찰국이 "헬기 구조 작업을 포기하라" 고 지시했다.
같은 시각 플로리다 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그림 동화책을 읽어 주던 수업에 참관 중이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앤드루 키드 비서실장으로부터 미국이 공격받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듣게 된다.
부시 대통령은 보고를 받은 뒤에도 아이들에게 계속 책을 읽어주다가 약 7분이 지난 후에야 교실을 떠났다.
(영상 20초경(부시 대통령이 보고받기 직전)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발음을 교육하던 중 나온 단어들이 절묘하게도 Hit, Steel, Plane(때리다, 철, 비행기)으로 들려 한동안 인터넷에 관련 낭설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나온 단어는 Kit, Steal, Playing이었으며, 저화질의 영상과 불분명한 발음이 맞물려 일어난 단순 해프닝으로 판명되었다.)
(한편 미국의 유명 교육 유튜브 채널인 Vsauce 에서 소개한 내용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이 상황 보고를 받을 당시 그와 아이들이 읽고 있었던 동화는 "The Pet Goat"(애완 염소)이라는 동화였는데, 그 동화의 마지막 구문은 "More to come(앞으로 더 많이)" 이었고, 이 문장까지 학생들이 모두 읽었을 때는 3번째 항공기가 펜타곤에 충돌 겨우 22분 전이었다고 한다.)
이후 조사위원회로부터 "왜 7분 동안 교실에 머물렀냐" 는 지적을 받자 부시는 "학생들과 이후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시간을 약간 지체했다." 고 해명했다.
(당연히 곧장 교실을 나가면 아이들과 선생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인터뷰에서도 그 상황에서 바로 격앙된 반응을 내서 학생들이나 이를 지켜보던 취재진 등을 당황하게 할 수 없어서 태연한 척했다고 말했다.
(때문에 당시 수업에 참여한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의 이야기를 알아보는 "9·11 Kids" 라는 다큐멘터리에서 그의 행동을 변호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건 당시 백악관 측에서 "부시 대통령은 보고를 받은 즉시 교실을 떠났다" 고 과장해서 이런 논란이 벌어진 것.
다만 소식을 듣자마자 태연한 척을 하다가 표정이 실시간으로 굳어지고, 수업 참관에 집중하지 못한 채 여러 생각에 잠긴 부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직후 부시 대통령은 학교 체육관에서 9·11 테러에 관한 첫 번째 긴급 대국민 담화를 가졌다.
이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친 대국민 연설로 충격에 빠진 미국인들을 안심시키는 데 전력을 다했다.
이 연설들 중 9월 11일 밤 10시에 한 연설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WTC 충돌 이전부터 발생한 심상찮은 징후에 긴장하던 연방 항공국은 사안의 심각성에 크게 경악해 본격적으로 미 공군과의 접촉을 시도했으나 담당 인력이 매우 부족한 마당에 휴가까지 간 인원들도 있어서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
한편 미국 공군도 여러 제보와 항공국이 제공한 정보 등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으나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진 데다 그나마도 제대로 된 정보들이 아닌 헛소문들이 많아서 사태 파악이 늦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은 상정 외의 상황이어서 공군도 처음 겪는 일이었고 하필 테러 몇 시간 전에 있던 훈련까지 겹쳐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전투기를 다시 띄우는 것도 상당히 지체되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미 공군과 연방 항공국을 비롯한 수많은 관제 요원들은 불확실한 정보를 토대로 미국 상공에 있는 수만 대의 비행기들 중 납치된 항공기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 하는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3.4. 세 번째 충돌: 펜타곤
그러나 사건은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교신이 안 되는 비행기들도 있었으며 항공국은 모든 비행기의 이착륙을 금지함과 동시에 고층 건물이나 대도시 인근을 지나는 비행기들을 감시해야 했다.
미국 공군은 만일을 대비해 전투기의 추가 출격을 준비하였고, 여객기 격추 명령을 허가받으려 했으나 절차적 문제와 윤리적 문제로 인해 지연되는 상황이었다.
동부 지역이 사실상 비행기 테러 공격에 무방비인 상황이 드러나자 미국 정부는 곧바로 백악관과 미국 국회의사당을 비롯한 워싱턴 D.C.와 뉴욕 일대의 모든 주요 시설과 공공기관 건물에 대피 명령을 내렸고 추가적인 납치 비행기 수색에 들어갔다.
그리고 아메리칸 항공 77편의 교신이 끊어졌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지만, 항공기의 진로를 막을 수 있는 뚜렷한 방법을 찾지 못했고 결국 항공기는 미국 국방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펜타곤에 오전 9시 37분 46초경 서쪽 편에 충돌하고 말았다.
안 그래도 정신이 나가 있던 미국 정부의 지휘 체계는 이로 인해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져 수습이 늦어지게 되었다.
그 전까지도 단순 비행기 사고로 생각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때부터 미국에 대한 테러 공격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첫 번째 충돌과 두 번째 충돌로 인해 혼란한 와중에 연방 정부 건물, 그것도 국방부 청사인 펜타곤에까지 여객기가 충돌하니 누가 뭐라고 해도 고의적인 테러인 것을 확신했고 미국이 공격받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 되었다.
펜타곤 서쪽 편
(다른 4개의 편은 붕괴되지 않고 서쪽 편 일부만 붕괴.)
5층: 피해 없음. 전원 생존.
4층: 피해 없음. 전원 생존.
3층: 항공기 파편 피격. 2명 사망.
2층: 항공기 본체 피격. 31명 사망.
1층: 항공기 본체 피격. 92명 사망.
앞선 두 테러 때는 범인들이 최대한 건물에 피해를 주기 위해 항공기의 뱅크각을 25~40도 정도 꺾은 반면 저층 건물인 펜타곤에서는 기수를 꺾지 않았다.
결국 미국 연방항공청 국장으로 항공국에서 가장 권한이 높았던 벤 슬라이니가 자신의 권한으로 미국의 모든 영공의 폐쇄를 지시하여 국내선 항공기는 무조건 착륙, 국제선 비행기는 북미권에 들어왔다면 캐나다나 알래스카에, 북미 밖이라면 출발지나 제일 가까운 국가의 공항으로 회항해야만 했다.
3.5. UA93편의 추락
UA93편은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납치되어 목표 지점으로 향하던 중 승객들의 저항으로 오전 10시 3분경 펜실베이니아 주의 한 광산에 추락하였다.
이 비행기의 목표가 어디였는지는 지금도 불분명하나 정황상 워싱턴 D.C.의 백악관이나 국회의사당을 목표로 한 것임은 분명했다.
(이 비행기가 승객의 저항이 없거나 실패한 채 목표에 도달했으면 더 치명적인 피해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이미 미군의 군사 핵심 시설인 국방부에 테러가 일어났는데 백악관이나 국회의사당에까지 테러가 일어났다면 국가의 군 수뇌부는 물론 행정부 또는 입법부가 일시에 마비될 수도 있었다.
다만 만약 충돌에 성공했어도 부시는 상술했듯 당시 백악관에 있지 않았으며 플로리다에 있었기에 가족들만 죽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원자력 분야 전문가들은 이들의 목표물이 백악관도 국회의사당도 아닌 미국 동북부의 원자력 발전소였을 가능성도 제기하였다.
93편의 승객들은 테러리스트들 몰래 가족들과 연락하여 이 항공기가 자살 테러를 목적으로 납치된 것임을 알아차렸고 저항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필사적으로 테러리스트들과 싸웠다.
결국 항공기는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추락하였고 탑승객은 전원 사망했지만 테러로 발생하였을 추가적인 피해를 막아낼 수 있었다.
UA93편의 승객들은 사후 미국인들에게 조국을 구한 영웅으로서 존경받고 있으며, 이후 이 사건을 다룬 영화 플라이트 93이 제작되었다.
3.6. 세계무역센터 붕괴
두 번의 충돌 이후 충돌에 의한 구조적 손상과 화재의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오전 9시 59분경 제2세계무역센터가 완전히 붕괴하였다.
뒤이어 10시 28분경 제1세계무역센터 역시 붕괴하였다.
3.7. 테러 직후
당시 미국의 언론들은 일제히 호외를 찍어냈다.
헤드라인은 "AMERICA UNDER ATTACK".
일부는 '제2의 진주만 공습' 이라고 칭했다.
테러라고는 하나 미국 건국 이래 최초로 '미국 본토' 가 외부 세력으로부터 직접적인 공격을 받은 사건이었다.
미국인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그 자체.
미 본토 전역의 경찰과 공공기관, 주방위군에 비상이 걸렸으며 대부분의 학교가 일제히 임시휴교를 선언하고 학생들을 귀가시켰다.
사건 직후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전체 영공이 봉쇄되었다.
이는 SCATANA(항공교통업무 우발계획)라는 통제 조치로, 미 본토가 적국에게 침공받거나 공습당하는 등의 응급상황을 대비하여 미 영공상의 모든 비행기를 강제로 착륙시키고 Navaid 비콘도 전부 꺼 버리는 조치이다.
이는 1960년대에 처음 제정되었지만 실제로 사용된 사례는 9·11 테러 당시가 유일하다.
이 조치가 발동됨으로서 영공에 떠 있던 약 4,200대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의 비행기들에 강제 착륙 지시가 내려졌으며, 모든 비행기의 이륙이 금지되었고 미국으로 접근 중이던 모든 민항기들도 회항시켰다.
(유일하게 뜬 비행기가 있었는데, 플로리다에서 한 남자가 독사에게 물리는 바람에 급히 해독제를 맞아야 해서 몇 시간의 설득 끝에 개인 비행기 한 대가 해독제를 싣고 샌디에이고에서 플로리다로 날아갈 수 있었다.)
(이때 캐나다에서는 노란 리본 작전을 발동해 출발지로 회항할 수 없는 지점을 지난 미국행 민항기들을 캐나다 각지의 공항으로 대신 유도한다.)
뉴욕항도 봉쇄되었고 모든 화물선들이 정박하거나 회항한 후 미합중국 해군 항모전단이 입항했다.
뉴욕과 워싱턴 D.C.는 패닉에 빠진 인근 시민들이 차량이나 도보로 도시를 빠져나가며 유령도시가 됐다.
상술한대로 부시 대통령은 플로리다에 나가 있었지만 당시 백악관에는 딕 체니 부통령이 있었고, 상황을 알아차리자 곧바로 지하 벙커로 피신했다.
부시는 지상 테러를 우려해 플로리다 학교 일정을 전격 취소하고 에어 포스 원에 올라탔지만 상당한 시간 동안 전투기의 호위 없이 버텨야 했다.
(보통 국내 영토를 비행할 때는 전투기 호위가 붙지 않는다.
이후 호위기로 주방위군 F-16 2대가 합류했으나, F-16에 연료가 부족하여 속도를 늦추라고 했을 정도다.)
부시는 당장 워싱턴 D.C로 돌아가기를 희망했지만 체니와 경호팀, 그리고 보좌진이 모두 뜯어말렸다.
게다가 '다음 타겟은 에인절(에어 포스 원의 암호명)이다' 라는 첩보가 들어와서 에어 포스 원의 조종사 마크 틸먼이 조종실 입구에 보안 장교를 배치해서 아무도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비행기 안에 있는 모든 무기를 압수하고, 경호 요원들을 대통령실 주변에 집중 배치하고 최측근들도 허가 없이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 당시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각종 규정들을 지켜야 했지만 전부 다 무시된 상황이었다고 한다.
에어 포스 원에 탑승한 사람이면 대통령의 최측근이거나 신원이 입증된 언론인들인데도 확인되지 않은 첩보를 듣고 이렇게까지 했을 정도로 당시의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이 심했다는 걸 보여주는 일화.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된 후에도 대통령 주치의는 탑승자들에게 탄저병 예방약을 나눠줬다고 한다.
결국 루이지애나의 박스데일(Barksdale) 공군기지에 착륙했다가 대국민 성명을 발표한 직후 다시 에어포스 원을 타고 좀 더 나은 설비가 갖춰져 있는 네브라스카주의 오펏(Offut) 공군기지로 이동했다.
(두 기지 모두 현재는 미 지구권타격사령부 산하의 핵 및 정찰 감시전력을 운용하는 기지다.
박스데일 기지에서 동아시아 등지로 B-52H 폭격기를 보내며, 또한 북핵 위기 때 등장하는 RC-135 등의 정찰기가 바로 이 오펏 기지 소속이다.)
여기에서 부시는 처음으로 제대로 정부 관료들과 화상 회의를 할 수 있었다.
이미 이때쯤에는 탑승객 명단 분석을 통해 알카에다의 소행이라는 것이 분명해진 상태였고, 부시는 이 회의에서 테러와의 전쟁에 착수한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CIA 국장이 여기서 그 날의 공격은 끝난 것 같다고 말했고, 저녁에야 부시 대통령은 DC로 복귀하여 오벌 오피스에서 다시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3.7.1. 미국 정부의 마비
이 테러는 또 다른 부분으로 미국을 충격에 빠트렸다.
테러의 충격으로 뉴욕은 대혼란에 빠졌고, 국무부에서도 차량을 이용한 자살폭탄 테러가 감행되었다느니 국회의사당 및 연방대법원 건물에서도 폭탄이 터졌다느니 등의 유언비어들이 항공기 충돌을 전후로 대대적으로 퍼지면서 미국의 주요 정부기관이 일제히 마비되었다.
미국 상하원 양당 지도부는 테러 직후 급히 전용 방탄차량을 타고 엄중한 호위와 함께 교외의 핵전쟁 대비 시설로 이동했다.
뉴욕항에 항모 2척이 입항했으며 준계엄령과 동시에 모든 항공기들은 착륙해 통제를 받아야 했다.
상황이 원체 혼란스러웠던 데다가 당시 에어 포스 원에는 위성 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대통령과 보좌진은 큰 도시 위를 지나갈 때나 가끔 잡히는 영상을 보고서야 상황을 직접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백악관 벙커로 피신한 부통령과 정부 수뇌부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었는데, 냉전 시대 이후 제대로 설비 개량을 거치지 않은 벙커의 시스템이 낙후되어 있던 탓에 영상이 나오면 소리가 안 나오고 소리가 나오면 영상이 안 나왔다고 한다.
게다가 산소가 부족해서 벙커에 있는 사람들이 졸음에 빠지는 일까지 발생했다고.
(결국 몇 명을 내보내서 해결했다고 한다.)
통신장비에도 문제가 있어서 에어 포스 원과 백악관 벙커 간의 소통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공중에서 납치한 민항기를 건물에 들이받아 자폭 테러를 한다는 발상은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기상천외한 작전이지만 9·11 테러 발생 불과 6개월 전에 FOX 채널에서 방영한 《엑스파일》 의 스핀오프 시리즈 《론 건맨》 1시즌 1화에 미 정부가 민항기를 납치하여 세계무역센터에 충돌시키려 한다는 내용이 나왔다.
한편으로 톰 클랜시의 9·11 이전에 집필된 《적과 동지》 라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일본인 기장이 여객기를 몰고 대통령 취임식이 진행 중인 미국 국회의사당에 돌진해서 미 정부 요인 중 반수 이상이 사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충돌 직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어 경호원들이 맨패즈로 요격 시도를 하지만 워낙 대형기체라 미사일을 맞고도 그대로 들이받는다.)
(실제 톰 클랜시는 소설 출간 전에 자문을 위해 미 공군 고위 장교에게 이 시나리오를 이야기했는데, 상당히 놀라워했다고 한다.
클랜시는 이런 시나리오를 군쪽에서 대비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말한 거지만 고려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톰 클랜시는 9·11 직후 한층 더 유명해졌고, 실제로 CNN는 사건 초기 방송에서 톰 클랜시와의 생방송 중 인터뷰를 하루에도 수차례 했다.
사건 당일 방송 그리고 펜타곤은 할리우드의 유명 시나리오 작가들을 불러 모아 '가능한 모든 미 본토 침공 시나리오를 제출하라' 고 지시했다.
게다가 공중 납치는 아니지만, 비행기를 납치해 자폭 테러를 한 시도는 이미 예전에도 있었다.
《항공 사고 수사대》 에서도 다룬 사건으로 알제리에서 반정부 테러리스트들이 공항에서 프랑스 여객기를 납치해 파리에 날아가 에펠탑에 자폭테러를 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연료가 부족해 마르세이유에 중간기착을 했을 때 프랑스 헌병대 특수부대 GIGN를 투입시켜 막아냈다.
생존자들 중에는 9·11 테러를 보고 '만약 저들이 성공했다면 우리가 저런 꼴이 되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한편 재난 대책 업무를 맡은 뉴욕 경찰국 및 뉴욕 소방국에서는 일시적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세계무역센터의 붕괴라는 희대의 재난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었지만 여기에 더해서 당시 경찰과 소방, 기타 행정부서들이 모여서 합동으로 사건을 수습하는 훈련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 이후 경찰과 소방 인원들을 통합 지휘하는 기관인 커맨드 센터는 제대로 설치되어 있어 제 역할을 해야 했는데 하필이면 이 기관이 세계무역센터의 로비에 있었다.
붕괴 직전까지 역할을 다했으나 결국 붕괴 직전 인원들이 급히 철수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
또 타워가 붕괴되기 직전 뉴욕 경찰국은 경찰관들에게 즉시 대피할 것을 명령했지만, 통신 체계의 문제로 뉴욕 소방국 소방관들은 경고를 일체 전달 받지 못했다.
4. 왜 막지 못했는가
계속 언급되었지만 당시 미국의 항공 보안은 지금과는 달리 구멍투성이였는데, 탑승객의 신원 파악조차 제대로 안 한 건 물론 조종실 문도 잠그지 않았고 심지어 무기로 사용될 여지가 있는 소지품까지 전혀 통제하지 않았다.
(9·11 테러 이전에도 초소형국민체의 여권은 신경쓰지 않았는데, 시랜드 공국은 이걸 알아채고 여권을 대량 말소하였다.)
테러와의 전쟁과 9·11 테러의 전조를 감지한 정보기관들은 90년대부터 테러를 큰 위협으로 여겨 우려하고 있었다.
실제로 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를 비롯해 연이은 대사관 테러와 USS 콜 테러사건 등으로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부터 알카에다와의 전쟁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그러나 정보기관 일선의 판단과 우려에 비해 미국은 소련 붕괴 후 찾아온 90년대의 대호황에 국가도 아닌 일개 테러조직 따위가 초강대국 미국에게 위협이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클린턴 행정부 전반기는 셧다운과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로 인해 중동의 테러조직 따위에는 관심도 가질 여력이 없었다.
이후 행정부가 뒤늦게나마 관심을 두려 할 시기에 이번엔 유고슬라비아에서 코소보 전쟁이 터져서 모든 관심은 발칸 반도로 집중되면서 또다시 테러 얘기는 아오안이 되었다.
그러다가 대사관이 공격당하는 등 테러에 대한 위협이 점점 현실화되자 오사마 빈 라덴을 암살하려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세 번이나 암살 작전이 취소되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수단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도망치고 있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국제법 위반 등의 이유로 두 눈 뜨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미리 화근을 제거할 기회를 놓쳤다는 정황들이 발견되면서 클린턴 정권에도 9·11 테러의 책임이 일정 정도 존재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었다.
당시 미국의 항공보안은 매우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그 당시도 미국의 항공교통수단은 대한민국의 기차 같은 개념으로 조종석이 달랑 커튼 한장으로 객실과 분리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고, 탑승구도 티켓 미소지자도 버젓이 출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까지만 해도 스위스 나이프 같은 자그마한 칼은 문제없이 기내에 들고 갈 수 있었다.
실제로 9.11 테러의 납치 범인들도 스위스 나이프 같은 작은 칼로 범행을 저질렀다.
미국의 항공보안에 이러한 심각한 허점들이 있다는 것이 지적되어 개선을 요구하는 의회, 정부 보고서가 클린턴 행정부와 부시 행정부 내에서 여러 차례 올라왔으나 무시되었다.
이러한 보안 취약점을 개선하기 위해 조사위에서는 CIA와 FBI를 비롯한 정보당국이 항공국에 위험인물의 정보에 접근할 권한을 줘야 한다고 권고했으나, 정보 당국은 이를 무시했다.
CIA와 FBI를 비롯한 정보당국끼리도 정보 공유를 꺼렸다.
테러리스트들이 미국으로 밀입국한 사실이 확인되어 FBI가 정보를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CIA는 정보 제공에 비협조적이었고,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FBI와 CIA간의 반목은 원체 유명했지만, 특히 콘트라 사건을 계기로 두 집단의 갈등은 극에 달하게 된다.)
결국 테러리스트들을 찾는 수사관은 단 1명밖에 없는 상황이 일어났고, 이 문제점은 테러가 일어날 때까지 개선되지 않았다.
또한 CIA는 테러 발생 후 자신들이 경고했으나 정부가 무시했다는 것만 강조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할 생각만 하다가 실속은 없이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고문 스캔들이다.
부시 행정부의 안보 담당들도 취임한지 1년도 안 되었다 보니 알카에다의 존재와 위험성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알카에다의 위험도가 고조된지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여서 아랍 쪽 첩보 담당자들을 제외하면 미국 수뇌부들 중 그 누구도 알카에다의 위험성과 존재를 알지 못했다.
클린턴 정권의 안보 담당자들이 업무를 인계하면서 '알카에다를 경계하라' 고 이야기하자 부시의 안보 담당자들이 "알카에다가 도대체 뭐요?" 라고 되물어볼 정도였다.
게다가 2001년 4월, 미 EP-3E 정찰기가 중국 공군 J-8 전투기와 충돌해 하이난 섬에 불시착한 이른바 하이난 섬 충돌사고로 중국과의 사이가 냉각되면서 알카에다 따위에게는 전혀 신경을 쓸 여건이 안 되었던 상황이었다.
FBI가 테러리스트들이 비행기로 건물에 테러를 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해 2001년 8월에 보고했지만, 부시 행정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테러리스트들이 거의 모든 준비를 마쳤을 시기였다.
아프가니스탄의 북부동맹을 지원해 오사마 빈 라덴을 제거하는 작전은 2001년 9월 10일까지 부시 대통령의 책상 위에 놓이기만 한 채 결재되지도 못한 상태였다.
민간항공과 공군이 사용하는 용어도 달라 테러 초기에 정보전달이 잘 되지 않아 혼동이 발생해 이미 추락한 비행기를 찾는 등의 혼선이 벌어졌다.
게다가 미국 공군에서는 적국의 침공만 상정하고 있던 상태라 제대로 된 초기대응도 하지 못했다.
비행기가 내륙에서 날아와 공격을 가했는데도 공군의 전투기들은 엉뚱하게도 대서양 방향으로 출격했다.
오로지 미 공군의 강력한 제공권 장악력만 믿고 있던 당시 미국의 방공체계의 문제점으로 인하여 방공부대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다만 아무리 방공무기가 강력하다 해도 납치된 자국민이 타고 있는 자국의 민항기를 자국 공군이 격추시킨다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릭 레스콜라라는 보안 전문가는 언젠가 비행기를 이용해서 타워에 들이받는 테러를 예견했고 대비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릭은 당일 안전교육 중 테러가 일어나자 2,700명 가량의 모건 스탠리 직원들을 구하고 사람들을 더 구하려다가 건물이 붕괴되어 죽고 말았다.
아랍권에서 갈수록 커져가던 반미 정서로 인해 발생한 테러 조직들이 점점 조직적이고 강력해지는데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이를 과소평가해 전혀 손을 쓰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정보기관들 간의 상호 삽질과 알력싸움, 그동안 계속 방치되어 온 미흡한 보안 규정에 대한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결국 대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5. 이후
9·11 테러 당시 미국은 냉전도 끝나서 딱히 외부의 위협세력도 없었기 때문에 대외정책에 대한 명분과 필요성, 그리고 예산의 부족으로 슬슬 해외 문제에 대한 개입을 줄이려고 했지만 테러 이후 약 10여 년간 분위기가 반전되어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치르는 등 개입정책에 나섰다가 경제위기와 함께 다시 개입이 줄어든 상태다.
물론 9·11에 가담한 알카에다 인사들은 모조리 죽거나 체포되어 끝없는 재판 중에 있고 미국의 심기를 건드린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정부는 단박에 박살이 나서 흔적만 남아 있게 되었으며 미국을 방해한 탈레반 역시 죽기 직전까지 맞고 명줄만 겨우 붙어 있다가 하늘이 돕고 10년이 다 되어 그제서야 미국이 감당못할 전비로 인해 철수를 함으로써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테러 단체의 수괴인 오사마 빈 라덴은 안구와 심장을 비롯한 부위에 벌집이 되도록 돌격소총에 맞아 죽은 후 데브그루 대원들의 사격 내기용 표적으로 두개골이 두쪽 나는 수모를 겪었으며, 그 시체는 망망대해에 던져졌고 개인 컴퓨터에 담아 놓은 불법 다운로드한 미제 영화와 온갖 야동, 야애니들까지 일일이 만천하에 까발려지는 최악의 모욕을 당했다.
아이만 알자와히리 역시 드론의 미사일로 산산조각 나는 최후를 맞았다.
그나마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처럼 너무 일찍 잡혀왔거나, 가담의 정도가 덜하거나 철저한 협조를 통해 선처를 구한 자들만 관타나모 만에서 온갖 고문을 당한 후 가석방 없는 종신형으로 겨우 목숨만 붙어 있게 되었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자리는 그라운드 제로라고 불리고 있으며, 건물 붕괴 후에 쌍둥이 빌딩의 철골 구조물 중 일부가 십자가 형태로 남아 있어 '굴하지 않는 미국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현재 여기에는 9.11 메모리얼 & 뮤지엄이 조성되었고 세계무역센터가 새로 지어졌다.
현장 옆의 빌딩에는 소방관 추모비도 걸려있다.
2011년에 Park51 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슬림 센터가 근처에 생겼다.
이 사실이 그라운드 제로 주변에 모스크(이슬람교 성원)를 건립한다는 가짜 뉴스로 와전되며 미국인들의 여론이 들끓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에 의해 무너진 건물 주변에 이슬람 성원을 건립한다는 건 희생자들을 모욕하는 일이다" 라는 반대 의견과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 는 찬성 의견이 대립했다.
버락 오바마는 지지를 천명했다.
이 때문에 오바마가 무슬림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고 본인의 지지율은 더 떨어졌다.
(다만 9·11 테러를 저지른 게 전체 무슬림을 대표해서가 아니라 알카에다라는 테러단체를 대표한 것이고 종교적 목적보다는 미국의 중동 개입에 대한 보복이라는 정치적 목적이 더 강했기 때문에 일반 무슬림이 센터를 짓는 것까지 막을 명분은 없었다.)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자리에 있는 Pool 근방에는 Tribute in light 라는 서치라이트 설비가 설치되어 해마다 9월 11일이 되면 위와 같은 조명을 밝혀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같은 항공기 시뮬레이션들은 과거에는 표기되었던 장소들이 사라진다든가 하는 경우들이 생겼다.
이후 조금씩 상황이 진정되며 도시전경 같은 경우 전문적으로 도시전경이나 공항 시너리를 제작하는 업체들이 판매하고 있고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2020에 와서야 Bing 지도 기반으로 고층건물 풍경이 구현되기 시작했다.
사건 당시 CNN을 비롯한 주요 보도 채널에서 순간마다 쏟아지는 관련 보도들을 소화하기 위해 뉴스 내용을 실시간 자막 스크롤 형식으로 내보내야 했다.
이후 세계의 여러 보도 채널들이 자막 뉴스 보도를 본격적으로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건축 쪽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사건 이후 미국에서 건물에 관한 규제가 강화되어서 설계를 할 때에는 그 건물이 테러에도 견딜 수 있는지 고려를 해야 된다고 한다.
테러 2개월 후 또 다시 뉴욕, 그것도 시가지인 퀸즈에서 항공기 사고가 일어났다.
다만 이쪽은 테러가 아닌 단순 추락사고였다.
하지만 테러의 여파로 미국은 다시 준계엄령을 선언하고 뉴욕의 교통이 통제되기도 했다.
또한 서방권에서 이슬람의 이미지가 극도로 나빠지는 데 기여한 사건이기도 했다.
이전만 해도 이슬람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처럼 그저 아시아 쪽의 신비주의적인 종교 정도로만 여겨졌으며 딱히 미치광이 극단주의 사상이라는 인식은 적었다.
오히려 20세기 냉전 시기에는 미국이 대놓고 공산주의 막겠다고 반공 성향의 이슬람주의자들하고 대놓고 협력을 하기도 했다.
놈 촘스키는 이것이 이슬람 극단주의의 확산에 영향을 끼쳤다면서 비난했다.
2009년 4월 27일, 미국 국방부가 에어 포스 원 홍보물 촬영을 위해 뉴욕에 F-16과 함께 저공비행을 하고 갔는데 이걸 보고 시민들이 9·11 테러의 트라우마가 떠올라서 대피하는 소동이 일어났고 심지어 주가까지 0.7% 급락했다.
이러한 소동이 일어난 데는 국방부로부터 비행통보를 받은 뉴욕 이벤트 담당자가 본인만 통보를 받고 어디에도 전달을 안 하고 국방부는 더 상급기관인 백악관에 보고도 안 한 채 비행을 했다가 일어난 일이었다.
이에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까지 노발대발했고 당시 뉴욕 시장이던 마이클 블룸버그 역시 긴급 기자회견에서 국방부에 대놓고 쌍욕을 했다.
이 사건은 영어 위키백과에 아예 별도의 문서가 생성되어 있다.
그만큼 미국인들에게는 9·11 테러가 트라우마로 남아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후 미국정부는 남아있는 용의자를 체포했지만, 차고 넘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형을 확정하는 것은 물론 재판조차 열지 못하고 있는데, 용의자 체포부터 심문까지가 전부 불법으로 자행되었기 때문 용의자를 비행기로 납치한 뒤, 고문과 가혹행위를 자행해 얻은 증거라서 이것을 증거로 사용하면 미국 역사상 최악의 사법불신을 일으킬 뿐만이 아니라 판례법주의인 미국의 판례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미국의 진노를 일으킨 이들을 사법거래하기에는 자존심이 용서를 하지 못해서 어떻게 손을 못 해고 있는 상태로, 20여년간 재판장만 8번 바뀔 정도로 답이 없다.
이후 미국 정보부는 큰 테러에 대한 첩보를 입수했을 경우, 적국이라도 할지라도 적극적으로 정보를 넘겨주는 편이다.
여론이 급격히 바뀌어 적국 정부가 극단적인 정책을 펴지 못하게 예방하려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5.1. 끝나지 않은 피해
9·11 테러 이후 20년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수천 명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에 시달리고 있다.
TV로 비행기가 충돌하여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뛰어내리는 모습이 생방송되었으니 이는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희생자들뿐만 아니라 그걸 지켜본 모든 이들에게 트라우마가 될 수밖에.
이로 인해 보안시장의 규모가 급격히 커졌다.
게다가 당시 현장 근처에 있던 시민들이나 수습을 위해 현장에 다가간 각종 구조대원들은 다량의 유해 가스와 먼지를 마신 후유증에 아직까지 시달리고 있다.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질 때 발생한 분진에는 건물 및 각종 구조물과 비행기 잔해뿐만 아니라 항공유와 유해, 그리고 석면이 함유되어 있었다.)
9·11 테러 당일 사망자보다 각종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가 더 많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
사건 발생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당시 현장의 시민들이나 정부기관 관계자들은 고통받고 있으며,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로 인한 사망자가 늘어가고 있고 이로 인한 순직을 인정받고 있다.
특히 소방 및 구조, FBI 및 뉴욕경찰 등 관련자들의 순직 기록을 보면 9·11 테러 당시 구조 작전 수행으로 인한 순직으로 기록된 사망이 현재도 나오고 있다.
생존자들에 따르면 이에 의해 158가지 암이 발병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56가지에 불과하며, 치매,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 자살 등 수많은 건강 문제에 시달리고 있지만 정부에서 보험 처리도 잘 안 해 주기 때문에 힘들다고 한다.
9·11 테러 이후 1년간 미국의 무슬림 400명 이상이 애꿎게 보복성 증오범죄를 당했고 그 뒤로도 매년 100명 가량이 공격을 당했다고 한다.
이슬람이랑 아무 관련 없는 시크교도들까지 터번을 쓴다며 공격당했다.
조지 부시는 이로 인해 악화될 무슬림계 미국인들의 여론을 달래기 위해서 9·11 테러 직후인 9월 17일 워싱턴 D.C의 모스크를 방문해서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이며, 무슬림계 미국인들 역시 소중한 미국의 국민이다.' 라고 연설하였다.
피해자가 워낙 많다 보니 무슬림의 피해 사례도 있는데, 특히 미 의회에서도 언급된 사례로 파키스탄계 미국 귀화인으로 뉴욕 경찰 견습생이 된 이슬람 신도 모하메드 함다니의 사례도 있다.
초기에는 용의선상에 올랐으나 이후 그라운드 제로에서 의료가방과 함께 시신으로 발견되어 영웅으로 명예 회복되었다.
9·11 테러가 발생한지 22년이 지난 2023년에도 아직도 유해 신원 확인이 진행중이다.
2023년 9월에는 사망한 1천648번째, 1천469번째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차세대 DNA 염기 서열 분석등 법의학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였지만, 여전히 희생자의 40%인 약 1,100명의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다.
5.2. 후속 테러
9·11 테러의 재현, 모방을 노리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어이없게도 이들은 9·11 테러가 오히려 자신들이 다른 무슬림, 아랍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안겨줬다(그러니까 비극단주의 무슬림 또는 무고한 아랍인들이 잠재적 범죄자로 낙인찍힌 것을 의미)는 것을 배우지 못했고 그저 자신들이 증오해 마지않는 일명 미제와 서방 세계에 큰 피해를 주었다는 것만 보고 배웠다.
한 마디로 나무만 보고 숲을 안 본 셈이다.
그리고 설령 안다고 해도 이들이 테러를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이들은 무조건 자신들이 옳다는 아집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이슬람 이외의 모든 것을 무력으로 없애 버리길 바랄 뿐이며, 이슬람 내부의 중립 내지 온건파들을 그저 내부의 적, 용기없는 겁쟁이 등으로 볼 뿐이다.
이 정도 정신상태가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극단주의에 빠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들이 테러하는 목적 자체가 서양인들이 이슬람을 혐오하게 만들어서 무슬림들이 서구 문화에 동화 및 흡수되는 것을 막는 것이라는 음모론적인 추측도 있는데, 이 주장에 따르자면 저렇게 이슬람을 고립시키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바라는 것이다.
어느 쪽으로 보나 이들을 설득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국제적인 공조를 통해서 많은 테러 시도가 저지되었지만, 일부는 실제로 실행에 옮겨졌다.
굵직한 것만 해도 2002년 발리 폭탄 테러, 2004년 마드리드 열차 테러 참사, 2005년 런던 지하철 폭탄 테러, 2015년 튀니지 수스 테러, 2015년 11월 파리 테러 등이다.
이들의 주 목적은 테러를 통해 사회를 이슬람과 반-이슬람으로 갈라 놓고 세속주의 이슬람을 반-이슬람 세계에 대한 반감을 이용해 흑백논리로 몰아세워 궁극적으로는 이슬람 근본주의 중심의 세계로 재편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잠시나마 실현된 것이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교리는 교리대로 어겨가면서 같은 무슬림들도 마구잡이로 죽여대는 ISIL의 모순이 밝혀지고, 이라크 전쟁,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토벌 작전 등을 거치면서 이슬람 세계주의는 그 위세가 크게 줄었고 탈레반조차 2021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재수립한 이후에는 외세는 간섭 말라는 식의 지역주의를 표방하게 되었다.
현재 탈레반은 자신들이 테러 단체라는 것조차 부정하며, 오히려 호라산 이슬람 국가 토벌에 협조하겠다고 세계에 손을 내밀기고 있기도 있다.
미국 다음으로 테러 피해가 가장 컸던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가장 강하게 내린 조치도 무슬림 공동체를 정보 당국에서 더 철저히 감시해서 테러분자들을 사전에 색출해내는 것과 테러를 선동하는 자들은 법적으로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사회와 격리시키는 정도다.
5.3. 2014년 후유증 사기 적발
2014년 미국의 전직 뉴욕시 경찰관과 뉴욕시 소방관 등이 9·11 테러 수습과정에서 얻은 후유증으로 4억달러(당시 기준 약 4300억원)라는 거액의 장애연금을 챙겼는데 이 후유증이 허위로 드러나 106명의 관련자가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이 사건은 미국 최대의 연금 관련 사기 사건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의 주범에는 변호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변호사 레이먼드 래벌리(Raymond Lavallee, 적발 당시 연령 83세), 토머스 헤일(Thomas Hale, 적발 당시 연령 89세), 전직 뉴욕 경찰관인 조셉 에스포지토(Joseph Esposito, 적발 당시 연령 64세), 존 미네르바(John Minerva, 적발 당시 연령 61세)가 주범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은 미국 당국이 당시 급증한 사회보장보험 관련 사기를 단속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는데, 여기에서 적발된 전직 경찰관과 소방관은 헬리콥터 비행을 하고 라스베이거스에서 블랙잭 게임도 즐겼으며 오토바이와 제트스키를 타고 무술 도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음악에 맞춰 춤추는 영상을 유튜브에 올린 이도 있었으며, 외출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날 수 없다며 연금을 타낸 전직 뉴욕 경찰관이 낚시여행에서 잡은 대형 물고기를 안고 배 위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이것이 적발된 것이다.
6. 음모론
일반적으로 음모론은 자잘한 사례를 통해서 실체가 불분명한 거대한 음모가 존재한다는 식이라 그다지 대중에게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반면, 9·11 사건은 역으로 정황 자체가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고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이 정황을 입증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어렵지 않게 사실로 받아들였다.
(음모론자들이 내놓은 근거들이 당시에는 명백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서 몇 년 혹은 길게는 10여년이 지나서야 반박된 것도 음모론이 오랜 세월 동안 강한 생명력을 가지게 된 원인 중에 하나다.)
음모론은 크게 2가지인데, '부시 행정부의 자작극' 설과 '자작극은 아니나 미리 테러 정보를 입수하고도 정치적 이득을 위해 방관했다' 는 설이다.
당시 음모론이 설득력을 가졌던 이유는 아래와 같다.
사건 자체가 워낙 세계사적인 대사건이었고 전세계에 극적으로 생중계되었던 점.
일종의 인지부조화 현상으로 항공기가 충돌하고 거대한 건물이 불에 타 쓰러지는 장면을 TV 생중계로 목격했던 이들이 이 충격적인 장면이 사실이라는 것을 수용하기 어려워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부시와 미국 보수 매파의 불리했던 정치적 입지가 극적으로 반전된 점.
음모론이 생겨나게 된 근본 원인이다.
하지만 당시는 부시 대통령의 임기 첫해였고(01년 1월부터 임기 시작) 중간선거 또한 02년도에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굳이 정치적으로 특별한 계기가 있지는 않았다.
설령 음모론으로 본다 해도 그 어떤 정치인이건 하이재킹으로 민항기를 자국 빌딩에 자폭시킬만큼 무모하진 않다.
물론 미국 정부가 갱단이나 마약 밀수업체, 반군한테 무기나 자금을 지원한 사례는 많다.
이란-콘트라 사건이 대표적.
통킹만 사건 같이 미국이 실제로 여론 전환을 위해 조작한 사건이 정보 공개를 통해 대중에 많이 알려진 점.
노스우즈 작전 같이 실제로 미국민을 희생시켜서 전쟁 명분을 얻으려한 사건이 공개.
부시 일가가 오사마 빈 라덴 일가와 친분이 있었던 점.
빈 라덴의 집안은 “사우디 빈 라덴 그룹” 을 소유한 소위 재벌가였고, 부시 일가와는 CIA 국장, 부통령, 대통령을 역임한 아버지 부시 시절부터 친분을 맺어오고 있었다.
특히 아들 부시의 석유관련 사업에 큰 돈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테러리스트로 전직한 빈 라덴과는 오래 전부터 절연한 상태였다.
오사마 한 명 때문에 온 가문이 영문 이름을 Laden 에서 Ladin 으로 개명했다.
오사마 빈 라덴과 CIA와 연관이 있었다는 점.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아프간의 무자헤딘 반군을 CIA가 지원했는데, 오사마 빈 라덴도 그러한 지원을 받은 인물 중 하나이다.
즉 “빈 라덴은 CIA의 훈련을 받았다” 는 건 엄밀히 말하자면 팩트이다.
물론 당시는 소련이 멀쩡히 살아 있던 냉전 시절이었고 빈라덴은 반미 테러리스트가 되기 전이기는 했다.
항공기에 탄 희생자들의 명단이 없는 점.
부시가 군수 및 석유업체의 지지를 받았던 점.
9·11 테러로 인해 강행할 수 있었던 이라크 전쟁을 통해 이러한 기업들이 막대한 부를 쌓게 된다.
이런 음모론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 설마 부시가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 한두명도 아닌 저렇게 많은 자국민들을 희생시키겠느냐 정도 수준이었고 당시 미 정보부가 사건 이후 보안을 위해 제한된 정보만 공개했던 점, 9·11 테러 직전에 보여준 너무나도 허술한 모습이 국회 청문회에서 낱낱히 밝혀지면서 이후 미 정부가 내놓는 반박 자료가 대중의 신뢰를 받지 못한 점도 음모론이 탄력을 받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후 석유 때문에 벌이는 추악한 전쟁이라는 국내외 비난 여론과 막대한 재정 지출을 감수하고 부시 정권이 적극적으로 강행했던 이라크 전쟁에서 자신의 지지 세력이었던 군수업체와 석유기업들의 배만 불린 채 명분으로 삼았던 대량살상 무기가 실제로는 발견되지 않은 것도 음모론이 지속적으로 생명력을 가지게 된 원인 중 하나이다.
대표적인 것이 《루스 체인지(Loose Change)》 다큐멘터리다.
이들이 주장하는 음모론은 다음과 같다.
비행기에 부딪히지 않았는데 세계무역센터 7번 건물은 왜 무너졌나?
철골로 된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어떻게 비행기 충돌 하나만으로 자유낙하 속도로 무너졌나?
항공기의 충돌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다.
또한 충돌과 동시에 4만 리터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항공유가 유출되면서 폭발했고 건물 안에 남은 항공유도 엄청나게 뜨거운 열을 내뿜으며 연소되면서 건물이 전체적으로 약해져서 무너졌다.
또한 붕괴될 때 밖으로 튀어나온 외벽 파편들만 보면 아무런 저항이 없으니 자유낙하 속도와 얼추 비슷하게 나오지만 실제 외벽 파편들이 땅에 닿았을 때 아직 건물은 30 ~ 40층 정도 남아 있는 상태였다.
거기다가 붕괴가 꼭대기층인 110층이 아닌 70 ~ 80층에서 시작된 점을 감안하면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자유낙하 속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다.
붕괴된 층보다 20 ~ 30층 아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편들은 대체 무엇인가?
건물 내부가 먼저 무너졌기 때문에 나온 파편들이다.
건물 내부 코어가 먼저 무너지고 그 층들에 있는 수많은 배선, 수도관, 사무용품 등등이 코어와 함께 밖으로 먼저 튀어나온 것이다.
왜 세계무역센터의 건물주(래리 실버스타인)는 9·11이 발생하기 6주 전에 35억 달러짜리 테러보험과 함께 건물을 임대계약을 했나?
6주 전에 계약을 한 것은 정말로 운이 없던 것이고 테러 보험을 든 것은 세계무역센터는 이미 1993년에 큰 테러를 한 번 당했기 때문에 든 것이다.
9·11 이전 몇 주 동안 예고에 없던 대피훈련은 무엇인가?
전술했듯 이미 세계무역센터는 93년에 초대형 폭탄 테러를 당한 건물이기 때문에 이러한 훈련은 매우 정상적인 훈련이다.
건물 내부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또 다른 폭발음을 들었다는데? 특히 소방관들은 건물 안 밝은 섬광을 보았다는데?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1,000도에 육박하는 엄청난 열기에 녹은 비행기 동체(알루미늄)가 층에 있던 구멍 곳곳으로 새나가면서 하층부에 있던 물과 만나면서 산화알루미늄이 만들어졌고 이 상태에서 엄청난 열과 에너지를 내뿜어서 폭발처럼 느껴졌다는 가설이다.
왜 펜타곤 충돌 현장에서는 보잉 757기 파편이 없는가?
비행기가 스쳤다는 펜타곤 잔디밭에는 왜 아무 흔적이 없나?
펜타곤에서 엔진이 들이받았을 자리는 왜 멀쩡한가?
위 3개 음모론은 펜타곤 피해상황을 찍은 많은 사진들이 소방수나 짙은 연기, 화재에 가려 엔진과 날개 충돌 부위가 제대로 안 보였기 때문에 크게 제기된 설이다.
비행기 파편은 사진으로 전부 나올 정도로 많이 나왔으며 흔적의 경우에는 실제로는 날개, 엔진이 있던 자리도 크게 충격을 받아 그 부위에 흔적이 남을 정도로 부서졌고 기수(機首)에 순간적으로 엄청난 충격이 가해져 날개가 살짝 안쪽으로 꺾이면서 충돌했기 때문에 날개 및 엔진이 들이받은 자리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펜타곤 직원들은 사고 당시 군용 화약 냄새를 맡았다고 하는데?
미국 정부는 왜 사고기의 블랙박스를 회수하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했나?
블랙박스를 회수했으면 그것이 더 기적이다.
세계무역센터 충돌 같은 경우에는 충돌 이후에도 1,000도가 넘는 화염이 1시간 가량 계속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거기다가 2개의 건물이 붕괴된 충격을 생각하면 블랙박스는커녕 잔해를 찾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이다.
펜타곤의 경우에도 충돌 이후 무려 40시간이나 화재가 지속됐는데 이러한 열기에서 멀쩡하게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의 경우에는 건물이 아닌 평지에 추락하여 화재가 금방 진압되어 FDR(비행정보기록장치), CVR(조종실 음성 녹음장치) 모두 회수에 성공하였고, 2006년에 민간에 모두 공개하였다.
흔적 없이 사라진 UA93편은 어디로 갔을까?
UA93이 추락한 곳이 땅이 진흙에 가까운 광산 지역이라 대부분의 파편이 지하 깊숙히 박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공기의 잔해가 매우 많이 남았으며 유골도 발견되었을 정도로 실제로는 많은 파편이 발견되었다.
미국 정부는 9·11 테러 당일 주요 각료들의 비행 탑승을 왜 금지시켰는가?
미 공군은 왜 비행기가 납치된 시각으로부터 2시간 동안 늑장을 부렸나?
정말 우연히도 9월 11일에 NORAD의 연례 훈련인 '글로벌 가디언 훈련'이 있었다.
그 때문에 훈련 상황을 위해 주요 각료들이 사령부에 모여 있어 훈련을 진행하였다.
또한 납치된 비행기들이 트랜스폰더를 끄고 추적하기 매우 어렵게 만들어 비행기를 찾기도 어려웠으며, 비행기를 찾은 시점은 이미 테러가 발생한 직후 상황이었으며 처음 겪는 상황에 공군 비행기들도 대서양 쪽으로 발진하여 더더욱 대응이 어려웠다.
거짓 전화통화 // 거짓 빈라덴 비디오 // 거짓 납치범
초기 혼란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공개된 납치범, 전화 통화, 빈 라덴의 2001년 12월 비디오 등은 나중에 9·11 테러 위원회 연구로 실제 존재했음이 밝혀졌으나, 언론에서 속보 보도로 내놓으면서 급하게 내놓느라 인명을 틀리게 적은 경우가 나중에 음모론으로 공격받은 사례이다.
WTC 지하에 숨겨져 있던 1,600억 달러의 금괴 중 2억 달러어치만 발견한 점.
4WTC에 있던 금괴 양 자체가 잘못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는 2-3억 달러 어치만 있었는데 음모론자들이 언론 보도에 인용된 수치를 단순히 합친 결과 엄청난 양으로 불어난 것.
JET FUEL CAN'T MELT STEEL BEAMS(제트 연료의 연소로는 쌍둥이 빌딩의 철제 골조를 녹일 수 없다).
진실: 말 자체는 사실이나 녹지 않아도 충분히 약화된다.
음모론자들은 철근의 녹는점은 대략 1,400도 정도이고 제트연료의 연소온도는 900도 정도인데 왜 철근이 죄다 녹아 건물이 무너졌냐, 화재를 대비해서 철근에는 화재대비 코팅 처리가 되어 있을 텐데 왜 화재로 무너졌냐고 음모론을 제기하지만 실제로는 시속 수백 km로 여객기가 건물에 부딪혀 기둥, 바닥, 여객기 등 온갖 자재들이 순식간에 파편화된 상태에서 엄청난 폭발이 있었기 때문에 충돌층의 대부분의 코팅이 벗겨졌다.
또한 철근이 녹는 온도까지는 도달하기 힘들지만, 건물을 무너뜨리려면 녹게 하지 않아도 그냥 열을 가해서 약하게 만들기만 해도 된다.
(철은 온도에 따라 고체상을 유지하면서도 원자 배열(조직)을 바꾸며 성질이 가지각색으로 변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철강 재료는 500도만 되어도 이걸 철이라고 불러야 하나 싶을 정도로 무른 상태가 된다.
실제로 900도 정도면 롤러에 넣고 밀면 껌 늘어나듯 쭉 늘어난다.
제철소에서도 철강 빔을 이런 식으로 만든다.)
쉽게 예를 들어 종이를 돌돌 말아 기둥을 만들고 그 위에 책을 얹은 상태에서 굳이 그 종이기둥을 치우지 않고 기둥에 물을 뿌려 약하게만 만들면 책의 무게를 못 이기고 무너지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실제로 1,000도 정도에 도달하면 철은 상온 강도의 5%조차 못 내는 사실상 말랑말랑한 덩어리가 되고 만다.)
그럼 철강은 약해져서 건물이 무너졌다고 치고, 저기 흘러내리는 붉은색의 금속성 액체는 무엇인가 반문할 수도 있지만 상술한 것과 같이 비행기 동체가 녹았을 확률이 매우 높다.
동체는 대부분 초듀랄루민이라는 알루미늄계 합금이 수톤 사용되는데 안타깝게도 듀랄루민은 알루미늄이 주재료답게 녹는점이 600도대로 매우 낮아 화재에도 충분히 용융된다.
애초에 그냥 녹은 금속이 보인다고 다 쇳물이라고 생각하는 점도 음모론자들이 전문가를 자처하기엔 수준이 너무 낮다.
재료공학계열 전문가가 듣는다면 헛웃음이나 치게 할 내용.
한때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네리던 음모론들 중 하나였으나 screw loose change 같은 반박 영상도 나왔고 다른 반박 의견들도 나와서 《루스 체인지》 를 제작한 딜런 에이버리는 그 의견들에 대해 반박하면서 논쟁을 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방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건축 전문가들이 건물의 붕괴 원인을 설명한 판에 이런 음모론이 발붙일 자리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2010년대 들어서 미국 인터넷에서는 음모론을 비꼬는 뜻으로 Jet fuel can't melt steel beams 가 밈화 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9·11 테러 직전 찍은 사진 '이라며 한 남자가 쌍둥이 빌딩 옥상 위에 올라가 있고 그 뒤로 비행기가 날아오는 사진이 떠돌아 진위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어났다.
나중에 합성으로 밝혀졌다.
덕택에 이 사진은 Tourist guy 라는 이름으로 필수요소가 되어 버렸다.
이외에도 마약과 관련된 루머도 역시 존재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전 세계 아편 공급량의 90% 이상을 담당하고 있으며, 대마 역시 세계 최대 생산국이다.
UN 에서도 당해년도 마약 시세를 알아보는 데 일단 아프가니스탄부터 언급을 할 정도로 마약 생산 대국이다.
만일 아프가니스탄에 문제가 생기면 전 세계의 지하경제가 초비상에 돌입한다고 봐도 될 정도이다.
그런데 매우 엄격한 이슬람 근본주의를 추구하는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한 이후 이슬람법에 어긋난다고 마약 생산을 금지했던 것이다.
물론 금한다고 쉽게 걸려들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큰 타격은 받지 않고 있었지만 탈레반은 완전 근절을 위해 UN 과 협력하여 아편 생산을 무려 90% 이상 줄여 버렸다.
이는 안티드럭 캠페인 역사상 가장 큰 쾌거라고 모두가 기뻐했는데, 이게 바로 2001년이다.
그리고 이 일 이후 미국에서 9·11 테러가 일어났으며 미국은 아프간을 지목해 탈레반을 몰아냈는데 미국이 점령하고 나서 아편 생산량은 순식간에 원상복구되어 지금까지도 왕성히 아편 생산을 하고 있다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2004년에 출간된 이원복 교수의 교양만화 <21세기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편 1권 초판 p247에선 이 테러의 원인을 '유대인의 미국 장악' 때문이라고 주장했는데, 애당초 WTC가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뉴욕에 있고 이마저도 유대인이 장악한 터라 사태의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2007년에 미국의 유대인 단체 시몬 비젠탈 센터 등이 항의를 하면서 저자가 사과한 뒤 다음 판본에서 지워졌고, 대중들 사이에서 빠르게 사장됐다.
한국에는 아직도 9·11 음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우스 파크》 시즌 10 에피소드 9 'Mystery of the Urinal Deuce' 은 9·11 테러 음모론을 주제로 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미국 정부가 미국 시민들 4분의 1은 음모론 따위를 믿을 정도로 멍청하니 직접 음모론을 만들어 사람들이 자신들을 공포하게 하려는 일종의 프로파간다라고.
그리고 나머지 4분의 3에게는 진실을 말한다고 했다.
2000년도에 출시된 게임인 데이어스 엑스는 음모론과 세계를 뒤에서 조종하는 비밀조직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는데 주인공이 속한 대테러 조직 UNATCO 가 설립된 건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테러로 파괴됐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게임 용량 문제로 삭제된 것을 테러 때문에 날아갔다고 설정을 붙인 것이었는데, 여기서도 사람들은 이 일이 미국 정부의 자작극, 즉 Inside job 이라고 생각한다.
테러로 사라진 세계무역센터라는 설정도 그렇고 어떻게든 앞을 내다본 게임이다.
7. 9·11 테러를 다룬 대중매체
7.1. 게임
08:46: 오큘러스 리프트 전용으로 나온 게임으로 9·11 테러를 추모를 위해 제작된 게임으로서 9·11 당시 북쪽 타워 내부 상황을 직접 경험해 볼 수 있는 게임이다.
하지만 이 게임의 엔딩이 탈출해 생존하는 게 불가능하고 질식사해 죽거나 떨어져 자살하는 결말밖에 없어서 영 좋지 못한 평을 듣고 있다.
생존하는 결말이 없는 것은 9·11 당시가 얼마나 비참하고 살인적인지를 알려주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12 오퍼레이터: 사건사고가 발생한 곳에 경찰, 소방, 구급 유닛을 배치하는 지령요원 시뮬레이터 게임으로 2차 창작 모드로 뉴욕에서 게임을 시작하면 9·11 테러 신고가 들어온다.
끝없이 들어오는 신고전화와 사건들이 당시 911 지령요원의 심정을 체감할 수 있게 한다.
7.2.2. 논픽션
《문명전쟁》
《102분》 : 세계 무역 센터에서 항공기가 충돌한 후 북쪽 타워가 붕괴되기까지 102분간 벌어진 일을 그린 논픽션이다
7.2.2. 논픽션
《문명전쟁》
《102분》 : 세계 무역 센터에서 항공기가 충돌한 후 북쪽 타워가 붕괴되기까지 102분간 벌어진 일을 그린 논픽션이다
7.3. 만화
마블 코믹스: 테러 당시(2001년 11월) 출판된 J. 마이클 스트라진스키가 쓰고 존 로미타 주니어가 그린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36은 스파이더맨, 데어데블, 루크 케이지 등 여러 히어로들이 사고 현장에서 시민들을 구출하는 내용으로, 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사고 20주년인 2021년 마블은 조 퀘사다가 쓰고 존 로미타 주니어가 그린 만화 The Four Fives(2021) #1을 출판했다.
이 만화는 스파이더맨과 캡틴 아메리카가 등장하고 역시 사고를 추모하는 내용이다.
이 만화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018) #73, 데어데블(2019) #34, Excalibur #23, Ka-Zar: Lord Of The Savage Land #1, X-Force #23에 추가로 수록되었다.
네모바지 스폰지밥 '제발 한 입만!' 이라는 에피소드에서 징징이가 게살버거를 먹으러 갔다가 두 번이나 불타 죽을 뻔한 장면이 나올 예정이었으나 9·11 테러를 연상시킨다고 미국에서는 이 장면이 잘렸다.
(한국 더빙판은 EBS에서는 수정 전 장면을 방송했고, 재능TV판은 수정된 장면으로 방송되었다.)
7.4. 영화
《2001년 9월 11일》 : 각각의 에피소드가 11분 9초 1프레임 길이가 되게끔 맞춘 단편 11편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영화.
에피소드 순서대로 사미라 마흐말마프, 끌로드 를르슈, 유세프 샤힌, 다니스 타노비치, 이드리사 오에드라오고, 켄 로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아모스 지타이, 미라 네이어, 숀 펜, 이마무라 쇼헤이 연출.
《화씨 911》 :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루즈 체인지 제2판》
《플라이트 93》
《월드 트레이드 센터》 : 9·11 테러를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한 명작.
《레인 오버 미 》 : 9·11 테러로 아내와 세 딸을 잃고 정신적 충격을 겪는 치과의사 찰리 파인맨의 이야기.
《시대정신》
《내 이름은 칸》 : 테러 이후 미국에서 이미지가 나빠진 미국의 무슬림들에 대한 영화이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 모신 하미드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 조나단 사프란 포어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스토리는 훈훈하지만 보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산만한 영화라서 호불호가 좀 갈렸다.
《제로 다크 서티》 : 9·11 테러 주모자인 오사마 빈 라덴을 주인공 '마야' 가 10여 년간 추적하는 과정을 다루며 촬영 직전에 빈 라덴이 넵튠 스피어 작전을 통해 실제로 사살되어 스토리가 변경되었다.
영화 초반부에는 9·11 테러 당시 무전, 통화 음성들이 나와 영화 시작부터 극의 긴장감을 더한다.
《9/11》 : 테러 직후 무역센터 건물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버린 5명의 인물들을 다루는 이야기.
찰리 쉰이 주연으로 등장한다.
2017년 9월 개봉.
《논스톱》 : 하이재킹을 다루는 영화로 9·11 테러에서 친구를 잃고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다가 미국에 실망한 인물이 빌런이다.
테이큰의 리암 니슨 주연.
《모리타니안》
《나의 연인에게》 : 9·11 테러에서 비행기를 하이재킹했던 테러리스트의 로맨스를 다루고 있다.
사실 이 영화는 그와 그의 애인의 연애담 중간 중간 나오는 서로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과 심리 변화가 주를 이루는 작품이라 이것을 모르고 봤을 때의 둘의 심리 변화를 천천히 따라갔을 때 느낌과 미리 알고 봤을 때의 느낌이 굉장히 다르게 다가올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이 사실은 굉장한 스포일러이다.
7.5. 드라마
《CSI : NY》 시즌 1 1회: 주인공인 맥 테일러 반장의 아내인 클레어가 9·11 테러의 희생자다.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은 맥이 그라운드 제로에서 아내를 찾는 모습으로 끝난다.
이후에도 클레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조금씩 언급된다.
《뉴스룸》 시즌 1 7회
《웨스트 윙》 시즌 3, 0회(특별편) "Isaac and Ishmael": 9·11 테러로 인해 추가된 특별편.
에피소드 내용에서는 9·11 테러와 직접적 연관성은 나타나지 않고 극단적 종교주의자들에 의한 테러와 그에 대처하는 자세 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에피소드 시작 전 9·11 테러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를 표하고 관련 단체의 후원을 독려하는 부분이 나온다.
《본즈》 시즌 8 6회
《더 루밍 타워》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빌리언스》 더블 주인공 중 하나인 바비 액슬로드(대미언 루이스 분)의 인물배경으로 언급된다.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 기계는 9·11 테러 이후 비슷한 사태가 재발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9-1-1: 론 스타》 주인공 오웬 스트랜드가 9·11 테러 현장에 있었던 소방관으로 나온다.
에피소드가 전개되며 당시 생존자들이 어떤 후유증을 겪고 있는지 자세하게 보여준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주인공 백이진이 사회부 기자로 있던 시기에 9·11 테러가 발생하면서 미국으로 출장 가 애인인 나희도와 잠시 떨어져 지내게 되었지만 테러의 막심한 피해와 테러와의 전쟁 선언으로 인해 백이진의 출장 기간이 길어진다.
《재벌집 막내아들》 드라마 기준 10화에서 등장하고, 원작에서도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드라마에서는 9·11 테러로 인한 미국 증시 하락과 뒤이어 발생하는 코스피 지수의 붕괴, 그리고 이후의 시장 흐름으로 인한 이익과 손실 여부가 작중의 경영권 이슈의 핵심으로 등장한다.
7.6. 음악
Yellowcard - Believe : 생존자와 희생된 소방관의 관점에서 쓰인 노래인데, 간주 부분엔 전 뉴욕 주지사 조지 퍼타키, 마지막 부분엔 전 뉴욕 시장인 마이클 블룸버그의 연설이 들어가 있다.
브라이언 맥나잇 - Back at One: 가사는 상관은 없으나 뮤직비디오는 911로 죽은 남자친구가 죽기직전 연인과 통화하면서 죽은 이후 슬퍼하는 그녀를 찾아가 위로하는 내용이다.
Dream Theater - Sacrificed Sons :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에서 죽어나간 이들에 대한 곡.
초반부에 전세계의 뉴스 보도가 흘러 나온다.
조성모 5집 《내 것이라면》 뮤직비디오: 9·11 테러 때 사망한 소방관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 모델인 '제이 임' 이 남주인공인 소방관 역을, 임은경이 여주인공 역을 맡았다.
Lily Allen - Him[130], 2009
anti-flag - 911 for peace
My Chemical Romance - Skylines and Turnstiles, Sleep, The Only Hope for Me is You
John Mayer - Covered In Rain
Velvet Revolver - Messages
Green Day -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 원래 보컬인 빌리 조 암스트롱이 어릴적 아버지의 사망 이후로 충격을 받아 방문을 걸어 잠그고 어머니에게 "9월이 끝나가면 깨워 주세요" 라고 말한 걸 토대로 작곡한 곡이다.
가사의 내용은 9·11 테러와 큰 연관은 없어 보이나 빌리 조는 9·11 테러의 유가족들에게 위로가 되고자 작곡을 했다고 한다.
노래 특유의 서정적 멜로디 때문에 이후에도 미국에서 굵직한 사고가 터질 때마다 추모곡으로 자주 쓰였다.
Celine Dion - A New Day Has Come: 911 테러 3개월이 지난 후에 발표된 곡으로 미국인들에게 큰 위로를 주었다고 한다.
또한 세계적으로도 1200만장 이상 판매로 그 해 2위로 가장 많이 팔리는 앨범이자 셀린의 2000년대 음악 커리어 중 큰 순간이 됐는데 당시 음악시장이 붕괴수준까지 갔다는걸 생각한다면 대단한 판매량이다.
My Heart Will Go On 도 위로곡으로 사용됐다.
한국에서도 10만장 이상 판매됐다.
Madonna - American Life: 마돈나의 곡 중 유일하게 가장 심한 여론의 비판을 받은 노래다.
당시 마돈나는 9·11 테러를 빌미로 이라크에 전쟁을 선포하는 부시를 정면으로 비판한 바가 있는데 당시 충격과 공포에 휩쌓인 미국 대중은 이러한 의지에 대해 심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마돈나가 뮤직비디오를 수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는 잘못된 국수주의라고 비판하지만 당시 상황을 본다면 자기 나라 도심 한복판에 빌딩이 추락했고 여러 사람들이 죽었는데 이에 대한 복수를 비판한다는 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는 현상이었다.
물론 결과는 복수로 인한 전쟁으로 인해 미국이 지금도 중동 쪽에서 큰 증오를 받는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Coldplay - Politik: 9·11 테러에서 영감을 얻은 크리스 마틴이 작곡한 곡.
Wilco - Jesus, etc.: 윌코의 최고 명반인 Yankee Hotel Foxtrot에 수록된 곡.
'Tall building shake' 나 'Skyscrapers are scraping together' 같은 가사를 보면 9·11 테러를 강하게 연상시키지만 사실 곡 자체는 9·11 테러 이전에 만들어졌다.
아름다운 멜로디와 테러로 상처입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가사로 많은 찬사를 받은 곡이다.
Interpol - NYC: 데뷔 앨범인 Turn on the Bright Lights 에 수록된 곡으로 NYC는 뉴욕의 자원봉사 단체인 'New York Care' 의 약자이다.
인터폴다운 공간감과 폴 뱅크스의 읊조리는 듯한 저음으로 시작하지만 모든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며 빛을 환하게 밝히자는 희망적인 가사로 마무리하는 구조가 인상적인 곡.
카라바오 - เดือน 9 เช้าที่ 11(9월 11일): 존 레논의 Imagine 의 구절을 인용하며 서로간 복수가 아닌 평화를 꿈꾸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히토토 요 - ハナミズキ: 테러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뉴욕시의 친구에게 전해듣고 일주일간 고심한 끝에 지은 곡.
가사에는 자식에게 '먼저 가라' 고 하며 아이가 성장해서 오랫동안 행복한 삶을 보낼 것을 기원하는 어머니의 안타까운 모성애가 담겨 있다.
제목인 ハナミズキ(서양산딸나무)는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힌 십자가의 재료로 희생을 의미한다.
Stephen Mcknight. - HEAVEN INSIDE: GUITARFREAKS 8thMIX & drummania 7thMIX의 수록곡. 9·11 테러를 계기로 평화를 기원하며 쓴 곡이라고 한다.
사일런트 포스 - Heroes: 신의 이름으로 테러를 자행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비판하는 가사를 썼다.
Cher - Song for The Lonely
7.7. 뮤지컬
컴 프롬 어웨이: 테러 직후 캐나다 뉴펀들랜드 섬에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이다.
9·11 테러 당시 미국으로 향하던 비행기들은 캐나다에 비상착륙을 해야 했는데, 대서양을 횡단 중이던 비행기들은 모두 제일 가까웠던 뉴펀들랜드 갠더 공항으로 몰려들었고 그 인원은 당시 갠더 지역 인구의 2배에 달했다고 한다.
식량, 숙박 등 모든 것이 열악했지만 지역민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먹고 마실 것과 집을 내주었고 이때의 경험이 매우 특별했다고 증언했다.
이들 중에서는 승객과 지역민이 결혼한 사례도 나왔다고 한다.
결국 이 훈훈한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미국에서 브로드웨이 뮤지컬까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뮤지컬이 잘 만든 작품으로 인정받는 진정한 이유는 단지 '아픈 날이지만 이런 미담도 있었어요' 수준에서 끝나지 않고, 이러한 긍정적 경험을 한 당사자들도 어쩔 수 없이 테러로 인해 느끼는 상실감과 PTSD 역시 조명했기 때문.
극 후반부에 나오는 Something's Missing 이라는 넘버에 이러한 내용이 잘 담겨져있다.)
한국 라이선스 공연도 2023년 11월 광림아트센터에서 올라왔다.
7.8. 다큐멘터리
9/11(2002): 위에 언급된 쥘 노데의 사건 당일 다큐멘터리.
맨해튼의 소방서에서 다큐를 찍다가 우연히 9·11 테러가 일어나 유일하게 첫 번째 빌딩 공격을 찍은 다큐멘터리이다.
(두 번째 테러는 33분 53초에 나온다.)
세계는 지금(2001.09.16. KBS1)
9/11: 그날의 기록(2021.08.30. 내셔널 지오그래픽/9.11 메모리얼 & 뮤지엄/디즈니 +): 9.11 메모리얼과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합작 다큐멘터리로, 관련 인물에 대한 광범위한 인터뷰를 통해 근래 공개된 9.11 관련 다큐멘터리 중 가장 심도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9/11: 백악관 상황실, 그 안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2021.09.01. Apple TV+): 테러 당시 있었던 상황을 조지 W. 부시 입장에서 서술한 다큐멘터리.
2023년 11월 23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03회 - 그라운드 제로 - 9.11 테러의 그 날
7.9. 당시 방송 및 뉴스
2001년 9월 11일 CNN 뉴스 생중계 영상.
북쪽 타워에 비행기가 충돌한지 약 3분 후인 8시 49분부터 긴급 속보로 생중계를 시작했다.
이후 남쪽 타워에 비행기가 충돌하는 장면이 생중계되고 상황이 점차 심각해지는 게 영상 속에 생생히 담겨 있다.
2001년 9월 11일 밤, ABC 뉴스
이날 KBS 9시 뉴스는 1시간 일찍 방송을 시작했다.
2001년 9월 12일 KBS 9시 뉴스
MBC 뉴스데스크 2001년 9월 12일 MBC 뉴스
2001년 9월 12일 SBS 뉴스
9·11 테러 당시 뉴스 생중계 영상들을 모아 편집한 영상으로 테러 발생 불과 몇 분 전 평화롭던 아침부터 테러 후 당일 밤까지 상황이 잘 정리되어있다.
7.10. 그 밖에
주요 배경은 아니나 언급된 것도 포함한다.
모키 쇼: Sr pelo의 장기 연재 작품. 9·11 사건을 풍자했다.
세계 다크투어: 3회에서 9·11 테러에 대해 다룬 적이 있었다.
Wake Up, Girls!: 언급이 나왔다.
아이리스 2에서 최민에 의해 테러에 아이리스가 연관되었다며 간접적으로 거론되는데, 최민이 피해를 입진 않았지만 그의 약혼자가 사망했으며 최민이 아이리스 타도를 목적으로 하는 계기가 된다.
8. 기타
9·11 테러 당시 출동하던 뉴욕 소방국 소방관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9·11 테러가 발생한 지 5년이 지난 2006년까지도 매일 수백 통의 우편물이 사라진 세계무역센터의 우편번호로 전송됐다고 하며 우편물들은 전화요금 고지서에서부터 보험증서, 와인클럽 홍보물, 대학 동창회보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고 한다.
세계무역센터의 우편물을 취급하는 한 우편배달부는 이러한 우편물들을 보고 "언젠가는 그들도 우편물이 전달될 건물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 이라며 "다만 그것이 언제일지는 모르겠다" 고 말하기도 했다.
이 우편물들은 보낸 사람에게 반송되거나 일부 기업에선 사람을 보내 우편물을 가져갈 때까지 우체국이 이를 보관하도록 비용을 지불하였으며, 나머지는 파쇄되었다고 한다.
사건 발생 이후 +8271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테러 사건들 중에서는 많은 피해를 낸 사건이기도 하다.
9.11 테러의 또다른 특징이라면 많은 일반인들에게 테러 상황이 장기간 노출되었고 이를 생생하게 기록한 현장 사진 및 영상들이 매우 많다는 점.
보통 일반적인 '테러' 는 총기나 폭탄을 이용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관련 영상이 많이 남기 힘들다.
폭탄 테러는 순식간에 피해가 발생한 뒤 빠르게 수습에 들어가며, 총기 같은 경우 테러범들 본인이 직접 피해를 주기 때문에 생생한 영상을 기록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반면 9.11 테러는 비행기 충돌과 동시에 범인들은 즉사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빌딩과 사람들의 죽음을 실시간으로 목격해야 했다.
때문에 테러 현장을 목격하거나, 관련 영상을 보고난 뒤 PTSD를 호소하는 비율이 굉장히 높았다.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수상쩍은 행동을 한 이스라엘인 5명이 체포된 적이 있다.
차를 타고 온 이들은 무역센터를 지켜보던 중 비행기 테러로 무너지자 춤을 추면서 환호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정체는 이스라엘의 첩보원들로 잠정 결론 났다.
생존자들 중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는 뉴욕 뉴저지 항만청 경찰관인 John McLoughlin과 Will Jimeno 다.
이들은 붕괴 직전에 WTC 타워에서 구조 작업을 하다가 대피하려고 시도했지만 건물이 붕괴하여 장애물과 파편에 매몰되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두 사람은 살아남았으며, 구조대원들에 의해 구조되어 생존하게 되었다.
이들의 실화는 니콜라스 케이지와 마이클 페냐 주연의 영화 '월드 트레이드 센터' 로 제작되었다.
마이클 잭슨은 테러 당일에 WTC에서 미팅이 계획되어 있었는데 자명종이 고장나서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취소되었다고 한다.
만약 제시간에 일어났다면 테러에 휘말렸을 것이다.
마이클 입장에서나 팬들의 입장에서 천운이었던 것.
이후 마이클 잭슨은 추모곡 <What More Can I Give> 를 발표하였다.
두 타워 사이의 광장에서는 평소에 잔잔한 재즈 음악들을 틀어놓았는데, WTC1에 비행기가 충돌하자 음악이고 뭐고 끌 새도 없이 다들 대피하였고, 그로 인해 지옥도가 펼쳐지는 현장에 현장의 상황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평화로운 재즈음악들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한국서 활동하는 방송인 타일러 라쉬는 당시 중학생이었는데 친구 부모가 희생되었다고 한다.
학교 교사는 차마 그 사실을 직접 전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라고 했다고.
2001년, 이 사건 이후 대한민국의 초등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한 구전 동요인 내가 제일 존경하는 오사마 빈 라덴이 초등학생들 사이에 유행해 테러리스트 찬양곡이 나돈다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북한은 9.11 테러 당시 미국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자신들이 한 테러가 아니라며 한 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으며, 이후에도 9.11 테러에 대해서는 미국이 이를 빌미로 테러와의 전쟁을 일으킨 것을 맹비난하는 정도로만 그치고 있으며, 의외로 9.11이 미국의 자작극이라는 음모론은 대놓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음모론을 언급한다고 해도 테러와의 전쟁과의 연계성을 운운하며 9.11이 조작이라는 음모론이 나도는 것이 '너무도 응당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고 보는 정도에 그치지 대놓고 '9.11은 미국이 중동을 침략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 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여담으로 북한은 9.11 테러를 '9.11 사건' 이라고 부른다.
용산국제업무지구에 계획되어 있던 마천루 중 하나인 더 클라우드의 디자인이 당시의 세계무역센터를 연상시켜서 논란이 많았다.
참사 후 복구와 수습 과정에서 수년에 걸쳐 희생자들의 유해가 발굴됐다.
참사 10년이 경과한 뒤에도 인근에서 미처 수습되지 못한 건물, 항공기의 잔해는 물론 심지어 사람의 뼛조각까지 발견됐다.
유해 확인 역시 진행 중이다.
납치범들의 유해도 일부 발굴됐다.
9.11 테러 당시 타워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들을 방송 카메라가 찍었던 고화질 영상이 인터넷에 불건전한 제목으로 올라왔다가 지금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
(처음에는 실존하지 않고 만델라 효과로 여겨졌지만 FBI의 증거 보관소에 영상 자체는 보관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첫댓글 이때 내가 초1이었는데 전세계뉴스에 테러사고라고뜬거 아직도 기억해..
뉴욕 여행때 메모리얼파크 다녀왔었는데 가운데 보고 있으면 희생자분들 눈물이 흐르는 것 같더라고... 그리고 또 정말 많은 사람들 이름이 있더라 너무 안타까워 진짜.. 어릴때라서 뉴스 보고 이런일이 있구나 싶었고 꼬꼬무로 다시한번 자세히 알게됐는데 너무 슬펐어 못찾은 신원들도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꼭 누구인지 찾았으면 좋겠다...
꼬꼬무에 911특집 나왔었는데 저기서 희생된 한인분들도 꽤 됐음..
이거 디즈니플러스에 다큐 있던거 작년엔가 봤는데 진짜 꼼꼼하게 잘 다뤘더라.... 현장에 계셨던 분들의 증언이 상세해서 보는데 엄청 몰입되고 가슴아팠음
디즈니 플러스 들어가서 검색해보면 관련다큐 여러개있더라
와 3000명..? 미친
초딩이라 뉴스 사건사고 관심 없었는데 저건 기억남....빌딩이 무너지는세 충격적이고 그게 비행기 때문에 그리고 티비 틀면 다 저거 이야기였음..
너무 안타까운게 각각 비행기가 충돌한 가장 마지막층 위의 사람들은 비상구가 아예 막혀서 붕괴될때까지 탈출할 방법이 없었대 그래서 두 건물 다 일정층 이상에선 생존자가 아예 없음...탈출도 못하고 그 안에서 얼마나 무서웠을지 감도 안잡힘...ㅠㅠ
난 기억에 아예 없는 사건인데 최근에 관련 다큐랑 영화 보니까 존나 충격적이더라... 계속 팡팡 하고 터지는 소리 나는데 사람들 떨어지는 소리인거...
생중계 속보로 본거 완전 어릴때지만 아직도 기억남... 저 영상만 계속 리플레이 해줬었는데 진짜. ,,
저때 초등학생이었는데 엄마아빠가 뉴스로 빌딩에 불나는 거 보고 있어서 뒤에서 같이 보다가 엄청 충격 받았었어 저 뉴스로 테러라는 단어랑 그 개념을 처음 알게됨 나중에는 인터넷에 쌍둥이빌딩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는 사람들 영상 엄청 올라와서 트라우마 생김... 아직도 신원을 모르는 피해자들이 저렇게나 많구나 너무 충격적이고 슬프다
실시간으로 봤었는데... 진짜 놀랐음. 무너지는 거까지 실시간중계 다 봤었음...
뉴스 속보 보면서 충격으로 멍해졌던 기억이 나
진짜 충격적이다 테러를 시발 왜
희생자들 너무 안타까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