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자, 요셉
창세기 37:18-28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주현 후 둘째 주일이다. 요즘 같은 때는 하루와 하루의 구분이 쉽지 않다. 늘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하루’이다. 매일 매일이 소중하다.
그런 중에 지난 주 화요일에 독일 복흠교회 성승규 장로님에게 전화가 왔다. 그냥 새해 인사인가 보다 했는데, 작년에 미룬 50주년 행사를 올해 한다며 8월이 어떻겠냐며 일정을 논의하였다.
내 반응이 어땠을까? “여러분의 믿음이 참 좋습니다.” 독일은 지금 코로나19로 한국보다 상황이 훨씬 나쁘다던데, 역시 독일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반가우면서, 또 한편으로 우려가 크다. 그래도 그들의 꿈은 용기 있고, 아름답다.
당장은 눈앞이 캄캄해도 희망을 품는 일은 좋은 일이다. 아일랜드 기도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꿈꾸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새해가 아름다운 것은 새로운 꿈을 꿀 기회이기 때문이다. 저마다 새해 첫 시간에 희망을 소원한다. 그 희망은 바로 시작을 가능케 하는 힘이다.
내가 꾼 꿈은 내 삶에 생기를 주는 신비이다. 그 믿음은 미래를 맞이하는 능력이 될 것이다.
1)
성경에서 대표적인 꿈장이는 요셉이다. 본문은 족장이야기 제4막 ‘요셉과 그 형제들’의 도입부인데, 겨우 11절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40장까지 전개될 요셉 이야기의 모티브가 된다.
‘미움을 받은 꿈장이 아우 요셉, 형들의 살해 음모, 형제 중 르우벤의 연민과 유다의 지혜, 요셉이 애굽(이집트)로 팔려간 배경’을 담고 있다. 요셉 이야기를 설명하는 열쇠 말들과 인물들이 다 여기에 담겨있는 셈이다.
요셉은 갈등과 증오의 한 복판에 있던 17살짜리 젊은이다. 그는 가장 가까운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아버지의 편애, 곧 특별한 사랑 때문이었다. 사랑의 골이 깊으니, 증오의 가시나무가 웃자란 것이다.
평소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아버지 야곱이 아무런 미래가 보이지 않던 하란에서 머슴처럼 살던 중, 이제 가나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은 바로 요셉의 출생이 계기가 되었다.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창 30:25).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요셉을 얻자, 이제 도망자 신세와 머슴살이를 청산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고 결심한다. 사랑하는 요셉의 얼굴을 보자니 형 에서와 묵은 원한 푸는 일을 언제까지나 미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이젠 아버지의 집을 찾아가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은 그런 의미를 지닌 아들이었다. 게다가 아내 라헬은 요셉의 동생을 해산하다가 죽었다. 그러니 ‘요셉 사랑’이 얼마나 애지중지 하였을까?
아버지는 요셉을 특별히 사랑하여, ‘채색 옷’(색동 옷)을 입혔다. 형들이 노동복인 양치기 옷을 입었다면, 요셉은 명절에나 입는 옷을 날마다 입고 지냈다. 채색 옷은 공주가 입는 옷이었다(삼하 13:18).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난 요셉은 형들에게 그야말로 밉상이었다.
게다가 요셉은 종종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였다. 더 기막힌 것은 엉뚱한 꿈을 꾸어 부모와 형들을 놀라게 하였다. 누가 들어봐도 부모와 형제들이 자신을 섬길 것이라는 못된 꿈이었다. 아버지는 당돌하게 자기 꿈을 말하는 요셉을 꾸짖었지만, 마음에 새겨 두었다.
원래 꿈이란 꿈꾸는 사람의 욕구와 소원을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요셉은 자신이 꾼 꿈 때문에 쓰디쓴 고통을 감수해야 하였다. 요셉이 꾼 꿈은 평소 요셉이 받은 사랑과 함께 요셉을 향한 공격의 과녁이 되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2)
본문은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간 전후사정을 말한다. 아버지는 양떼를 치는 아들들의 안부가 궁금해 사랑하는 요셉을 보낸다.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창 37:14).
요셉은 헤브론을 떠나 멀리 세겜까지 형들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여 찾아 나섰다. 목적은 한가지였다. 아버지가 당부한대로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 즉, ‘샬롬’ 여부를 살피러 떠났다. 요셉은 먼 길을 가면서 집에서처럼 채색 옷을 차려입었다. 도중에 길을 헤매었지만 마침내 형들을 찾았다.
멀리서 형들의 모습을 알아본 요셉은 얼마나 반가웠을까? 게다가 형들은 아버지가 듣고 싶은 소식처럼 잘 있는 듯 보였다. 그들의 ‘샬롬’을 확인하기 위해 요셉은 달려갔을 것이다. 그런데 형들의 생각은 달랐다. 형들도 멀리서 다가오는 요셉을 보았다. 채색 옷을 입었으니 금새 구별할 수 있었다.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19).
그렇지만 형들은 동생을 반기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동생이지만 반기기는커녕, 동생을 보자마자 죽일 모의부터 한다.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얼마나 증오심이 깊었던지, 죽이고 나서 과연 요셉의 꿈이 이루어지는지 두고 보자고 하였다.
먼저 죽인 후, 한 구덩이에 던져놓자고 하였다. 그때 맏형 르우벤이 나서서 생명은 해치지 말자고 하여 겨우 목숨만은 건진다. 이번에는 넷째 형 유다가 멀리서 오는 이스마엘 상인들을 보고 동생을 죽이느니 차라리 노예상인에게 팔자고 제안하였다.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26).
다행히 형제들은 마지막 순간에 동생의 피를 흘리는 일만큼은 자제한 셈이다. 형들은 요셉의 옷을 벗기고, 아우를 노예상인들에게 팔아 넘겼다. 살인은 면했지만, 짐승만도 못한 몹쓸 짓이었다.
벗겨진 채색 옷은 요셉 자신에게는 자부심이었지만, 형들에게는 증오심의 상징이었다. 형들은 채색 옷에 숫염소의 피를 발라 동생이 들짐승에 의해 죽었음을 입증할 증거로 가져갔다. 아버지를 속일 완벽한 알리바이였다.
이제 요셉의 꿈은 정녕 물거품이 된 것일까? 하루 아침에 요셉은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상징하는 채색 옷을 빼앗기고, 누더기를 걸친 노예 신세가 되었다. 고향과 아버지를 떠나 낯선 애굽 땅에서 이방인이 되었다. 히브리인 종, 서글픈 이주민의 신세가 되었다. 요셉은 자신의 꿈 때문에 저주를 받은 셈이다. 돌이킬 수 없는 낭패를 보았다.
요셉과 형들의 악연을 보면 차라리 원수만도 못한 짓으로, 낯부끄럽다.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성경은 이렇게 표현한다.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창 37:4).
형들의 심정 곧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다’라는 표현은 형들과 요셉 사이에 샬롬이 없었다는 말이다. 샬롬은 무엇인가? 한 인간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일상의 안녕이며, 일용할 평안이다. 그런데 형들은 가장 가까워야 할 동생과도 이러한 ‘샬롬’을 나누지 못했다.
샬롬은 가장 평범하지만, 또 가장 특별한 인사이다. 누구나 그런 샬롬이 필요하지만, 누구나 샬롬을 다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증오심이 커서 동생에게조차 샬롬을 말할 수 없는 그런 상태는 얼마나 불행한가?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샬롬을 나누지 못한다면, 내 찢어진 마음의 상태를 돌아봐야 한다. 행여 내 가족 안에서 샬롬은 오늘도 안녕하신가? 내 형제들, 친구, 동료 사이, 지금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샬롬이 깨지면 엄청난 불행도 스스로 불러들일 수 있으니 지극히 조심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하루 속히 ‘샬롬샬롬’(내 안의 평화, 관계의 평화)을 회복하는 일이다.
요셉은 아버지와 작별조차 하지 못한 채, 생지옥으로 끌려갔다. 고대의 길은 얼마나 험한지 이런 속담이 있을 정도이다. “세 가지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질병, 단식, 그리고 여행이다.” 게다가 요셉이 끌려가는 길은 광야였고, 파리 목숨과 같은 노예 신세였다.
우리는 요셉 이야기의 결말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이번 주에 톨레레게에서 다 읽은 내용이니 얼마나 친숙한가? 모두 한 마디씩 보태고 싶을 것이다. 한 마디로 전반부는 ‘꿈꾸는 자, 요셉’이 꿈을 잃어버리는 낭패의 과정이고, 후반부는 ‘꿈꾸는 자, 요셉’이 꿈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애굽으로 팔려간 노예생활은 요셉의 삶에 인생역전의 계기를 만들었다. ‘인생은 새옹지마라’더니 요셉의 꿈은 요셉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에게 꿈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뮤지컬 요셉이 있다. 원래 제목은 ‘요셉과 놀라운 총천연색 꿈의 옷’이다. 나는 이 뮤지컬을 두 차례 보았다. 한번은 미국식 뮤지컬을 뮤지컬극장에서 보고, 두 번째는 독일교회의 날에 예배당에서 구경하였다. 난생 처음 에쎈 콜로세움에서 본 뮤지컬은 내게 꿈같은 경험이었다. 더군다나 국영 독일철도(DB)의 철도카드 응모에 당첨되어 2인 입장권과 기차표까지 제공받았다.
뮤지컬의 마지막은 요셉의 노래 ‘꿈이 이룩하리라’로 막을 내린다.
“나는 금실로 수를 놓은 채색 옷(색동옷, 꿈의 옷)을 입었네. 그 채색 옷이 반짝일 때 어느덧 새벽은 동트고 나는 잠에서 깨어났지... 나를 출발점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빛도 흐리고 꿈도 흐립니다. 나에게 채색 옷을 돌려주세요. 그 놀라운 채색 옷을 돌려주세요.” 오래도록 “돌려주세요”가 여운처럼 맴돌았다.
사람들은 쉽게 꿈을 꾼다. 그런데 너무 쉽게 꿈을 잊거나 포기한다. 자신이 꾼 꿈을 개꿈만도 귀히 여기지 않는다. 꿈은 무엇인가? 꿈이란 행위를 가리켜 ‘낳는다, 발견한다, 생산한다’고 하지 않는다. 꿈은 반드시 ‘꾼다’고 말한다. 꾼다의 또 다른 의미는 ‘빌린다’이다. 그렇다. 꿈은 하나님에게 빌리는 일이다. 그래서 꿈이다.
하룻밤에 꾸는 무의식의 반영인 그런 잠꼬대 같은 꿈이 아닌, 꾸고 나서 방귀처럼 새나가는 그런 꿈이 아닌, 하나님의 비전을 꾸어오는 일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요셉의 꿈 이야기에는 그런 놀라운 비전이 담겨있다. 나중에 요셉은 원수만도 못한 형들을 다시 만난다. 복수를 해도 누가 뭐랄 사람이 없을 텐데, 그런데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고, 관용을 베푼다. 요셉은 화해와 평화의 사람이었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 이야기에는 인간 역사에 있을 법한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형제간의 증오, 갈등, 살해음모 따위다. 그러나 요셉은 수많은 어둠, 악행, 차별과 마주하면서도 결코 하나님의 마음을 잊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런 요셉을 통해 주님의 더 큰 역사와 섭리를 알게 하시고, 또 그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셨다.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창세기의 결론이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요셉의 꿈은 한낱 자신의 출세와 성공에 머물지 않았다. 요셉의 꿈은 단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일이 아니었다. 요셉의 꿈은 대가족을 살리고, 당시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오늘 우리의 삶에 비추어보면 참 꿈같은 이야기이다. 성경은 이렇게 현실이 되는 꿈 이야기로 가득하다. 요셉의 꿈은 모두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일깨우는 꿈이었다. 요셉의 꿈은 결국 모두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나누는 꿈이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떠한가? 여전히 미워하고, 경쟁하고, 차별하고, 분열하는 현실 속에서 다만 사람살이가 다 그런 것이라고 변명만을 일삼을 것인가? 우리 사회의 끊이지 않는 악행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어느 한 편을 들어야 한다는 현실론에 백기투항을 할 것인가?
창세기는 여러 족장들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모델을 제시한다. 그 중에서도 요셉을 내세워 하나님의 사람은 참 화해와 평화, 형통하심을 누릴 만한 그런 사람임을 일러주신다.
과연 요셉의 이야기는 ‘꿈은 이런 것이다’를 보여준다. 록그룹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부른 ‘어떤 이의 꿈’이란 노래는 우리에게 그런 꿈을 이루기 위해 사는가라고 묻고 있다.
‘어떤 이는 꿈을 간직하고 살고, 어떤 이는 꿈을 나눠주고 살며, 다른 이는 꿈을 이루려고 사네. 어떤 이는 꿈을 잊은 채로 살고, 어떤 이는 남의 꿈을 뺏고 살며, 다른 이는 꿈은 없는 거라 하네. 세상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과 세상에 이처럼 많은 개성들 저마다 자기가 옳다 말을 하고, 꿈이란 이런 거라 말하지만’
“나는 누굴까 내일을 꿈꾸는가 나는 누굴까 아무 꿈 없질 않나...”
여러분은 어떤가? 사람마다 저마다 자기의 꿈이 소중하기에 꿈 이야기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공감대가 크다.
올해도 꿈을 꾸라. 하나님께로부터 비전을 빌려오라. 내 꿈을 디자인하라. 그리고 그 꿈을 이루려고 살라. 그러나 인생역전은 넝쿨 채 굴러 들어오는 완성품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밭에 뿌려지는 한 알의 씨앗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내가 지닌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에 바탕을 두었기에, 희망이란 에너지, 긍정의 에너지, 샬롬의 에너지로 가득하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내가 지닌 믿음 때문에, 꿈 때문에, 화목케 하는 마음 때문에 형통한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