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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주를 중심으로 백제와는 다른 정치세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설이 많다. 한반도 왜, 비류백제, 마한 잔존, 영산강 세력 등 그 실체에 대한 설명은 다양하지만, 이 설들의 공통점은
①백제와는 독립된 정치세력이 나주를 중심으로 영산강 일대에 존재
②5세기경을 기점으로 백제에 복속되거나 또는 일본으로 건너감
로 요약할 수 있다.(앞으로 이하 영산강설로 표기함)
그러나 필자는 이것은 완전한 허구이며, 백제가 늦어도 4세기 말에는 마한을 정복했다는 기존 학설이 옳다고 확언하는 바이다.
96~98년 발굴당시 한국 사학계에 그야말로 충격을 던져주었던 전남 전주시 다시면 복암리 3호분. 쇼크였던 이유가, 사상 유례없는 '아파트형 고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고분은 사다리꼴 모양으로 총 3층으로 되어있으며, 무려 41개(!)의 무덤이 들어있다. 묘제도 다양하며, 더욱 충격적인건 층별로 3~7세기에 걸쳐 조성되었단 것이다. 즉, 3세기에 만들어진 무덤에 층을 얹어가며 시체를 입주(?)시켰다는 것이다.
영산강설에 따르면, 영산강 세력은 5세기에 어떤 형태로든 백제에 정복된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아파트형 고분군은 7세기경 조성된 무덤에서는 서울 지역에서 발견되는 묘제가 나타나며, 이것이 백제에 정복된 사실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소리다-_- 세계 어느나라가 피정복지의 옛 지배세력의 무덤을 건드린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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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산강 세력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잇는 다장복합묘에 의문을 품으신것 같은데 이것은 아주 특이한 묘제입니다. 기존의 다장이나 합장이라하면 부부나, 가족, 혹은 같은 혈연집단의 몇몇만 묻은것이 대부분인데, 복암리고분은 무려 41개의 매장주체부가 발굴되었습니다. 그것도 여러형태의 묘제가 총 망라되어서 말이죠. 이것은 상당히 특기할만한 것입니다. 보통 같은 혈연집단이라면 같은 묘제를 쓰기 마련인데, 묘제도 제각각입니다. 기존의 순장이나 합장같은 경우와는 달리 오랜시간 몇백년간 고분조성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님이 지적하신 백제묘제의 등장은 횡혈식석실분을 지적하신 듯 합니다. 이지역에서는 지석묘-토광묘-옹관묘라는 묘제의 발전을 이루어왔습니다. 그러다가 6~7세기가 되면 횡혈식석실분이 등장하면서 옹관묘는 쇠퇴기를 맞습니다. 복암리 횡혈식 석실분에서는 백제의 관리들이 하고다니는 은제관식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마한의 무덤위에 백제가 무덤을 쓴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마한이 점점 백제에 통합되어가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합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다장복합묘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느 지역에서나 나타나는 것이니까요.
복암리 3호분은 3~7세기에 이르기까지 시체를 계속 입주(?)시켜온 아파트형 고분입니다. 마한잔존세력이 5세기에 멸망했다고 전제한다면, 7세기까지 입주가 이루어지는 것은 어렵습니다.
나주에 진출한 백제군이, <피정복지의 옛 지배세력의 무덤을 건드려서><한 무덤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매장형태를 유지하며><새 고분을 짓지 않고 정복군의 시신을><향후 200여년동안이나 계속해서 입주시켰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 먼저 다장복합묘가 어느 지역에서나 나타난다는 말씀은 조금 의외군요. 다장복합묘(多葬複合墓)란 말그대로 하나의 묘역안에 여러사람을 여러묘제를 써서 묻은 장법입니다. 어느 한지역에서 주구묘, 토광묘, 전축분이 나왔다고해서 다장복합묘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묘역이 아닌 어느 일정한 지역에서 나온 묘제이기 때문이죠. 영산강유역의 다장복합묘는 하나의 고분안에 여러 매장주체부가 나온것이 특기할만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한잔존세력이 5세기에 멸망했다고 가정하셨는데 그러한 배경의 근거는 무엇인지 묻고싶군요. 그렇게 가정한다고 치고 님의 의견에 반론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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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세기경 고분 중 다장복합묘만 분류한 것입니다.
내동리 7호분:옹관 6기, 토광 1기
초분골 1호분:옹관 5기, 토광 1기
초분골 2호분:옹관 1기, 토광 2기
만수리 4호분:옹관 5기, 토광 10기
신연리 9호분:옹관 4기, 토광 3기
사창리고분:옹광 3기, 토광 1기
창원 삼동동 고분:석관 6기, 토광 11기, 옹관 34기
부산 괴정동 고분:석곽묘 30기, 옹관 10기
다장복합묘는 아주 흔한 형태의 고분입니다. 나주 고분의 다장복합묘가 다른 지역과 차별화되는 것은, ①복암리3호분처럼 아파트형 고분이 존재하며 ②옹관묘를 '주로'사용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전 마한잔존세력이 5세기에 멸망했다고 가정한 적 없습니다. 제 논지는 어디까지나 마한은 4세기 이후로 잔존하지 못했다는 것이니까요. 5세기로 전제한 것은, 일반적인 마한잔존설은 마한이 5세기에 멸망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님은, 한 발 더 나아가 6~7세기경에 멸망했다고 보시는 겁니까?
[마한잔존세력이 5세기에 멸망했다고 전제한다면, 7세기까지 입주가 이루어지는 것은 어렵습니다.]
--> 마한이 5세기에 멸망한다고 그동안의 마한의 문화가 갑자기 사라질까요? 그것은 강제적이 아니라면 서서히 동화되어가는 일련의 과정을 겪을 것입니다. 백제가 마한을 정복했다고해서 갑자기 백제의 묘제가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백제도 토착세력을 어느정도 견제하기 위해서 마한의 문화를 어느정도 수용했을 가능성도 상정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파트형고분에 입주한 사람들은 일반인이기 보다는 어느정도 권위를 가지는 지위에 위치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혈연이나 가족공동체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죠. 그런 위치의 사람이 갑자기 백제에게 정복당했다고해서 그동안 써오던 묘역을 포기할 이유는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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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만들어진 고분에 계속해서 사람을 집어넣는다는 생각 자체가 오로지 복암리 3호분의 주인, 그리고 그 후손들만이 가졌던 발상입니다. 더군다나, 피정복지의 옛 지배세력의 무덤에 정복자의 시체를 입주시킨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마한의 문화를 어느정도 수용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피정복자가 정복당한 이후에도 어느정도 명맥을 유지하며 계속해서 시체를 입주시켰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피정복자가 정복당한 이후에도 정복당하기 이전의 권위를 계속 유지하며(복암리 3호분은 5세기 이후로 묘제문화의 변화의 흔적은 나타나지만, 권위와 부가 실추된 흔적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정복자 못지않은 권위를 유지했다는 점(5세기 이후 새롭게 새워진 고분들이 모두 피정복자들의 무덤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이 납득하기 힘듭니다.
이희진 교수도 지적한 바가 있지만, 강대국 고구려의 고분 역시 일반적으로 왜국의 것보다 작다.
--> 무덤의 규모가 반드시 국력의 척도가 될 수 는 없지만, 고대국가에서 왕의 무덤을 크게 조영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례입니다.
②독특한 옹관묘제가 나타난다.
옹관묘는 어느 지역이나 나타나는 것이지만,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이 고분에서만 나타나는 묘제의 특성이란건 다음과 같다.
1.옹관의 크기가 크다.
2.옹관형식을 주로 사용했다.
3.한 무덤에 여러 개의 옹관을 묻었다
4.토기같은데 그냥 쳐넣는게 아니라 관으로 쓰기 위한 옹관을 따로 제작했다.
이것을 과연 독립적이고도 독특한 문화를 가진 세력의 존재를 증명하는 근거가 될수 있을지 심히 의심된다 -_- 옹관의 크기가 다른 지역과 차별화된 문화인가? 한 묘제만 쓰는게 아니라 여러 묘제를 혼용해서 쓴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한 고분안에 여러 개의 무덤이 들어가는건 백제는 물론 여러 지역에서 나타나는 것이다.(3세기경에 만들어진 창원 고분군은 자그마치 토광묘(널무덤)11기와 옹관묘 34기가 같이 묻혀있다) 4번은....구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근거라고 할 만한것은 2번 뿐인데, 여러 정황이 뒷받침해주지 않는 한 이것만으로 한 '학설'을 만들어낼 순 없다. 더구나 옹관만으로 만들어진 고분군들은 대부분 5세기 말에야 조성된 것들이다.
-->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것입니다. 님의 말씀대로 옹관은 한반도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많이 사용됩니다. 보통 장란형토기 같은 실생활용 토기에 2차장을 하거나 세골장을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의 옹관이란, 대옹과 소옹을 합한 길이가 3m가 넘어 전신장을 할 수 있을만큼 규모가 큽니다. 이러한 옹관은 제작하는 것에도 어려울뿐더러 운반역시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규모의 옹관묘는 전세계에서 영산강유역에서만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큰 옹관을 사용하고 관으로 쓰기 위한 옹관을 따로 제작하는 것은 분명 나주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나, 하나의 독립된 정치세력을 논할 정도로 확대해석하는건 무리입니다.
한 국가의 통치 아래 그 정도 차이를 보이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백제 지역 내에서도 나주만 타 지역과 구별되는 독자성을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관점에서의 연구가 이루어져 모든 부분에서의 독자성이 입증된다면 모를까, 현 시점에서 이루어진 것은 '나주 옹관문화:타 지역의 옹관문화'의 단순비교 뿐인 것 같군요.>
===> 물론 옹관문화 하나만 가지고 마한의 독립체적 성격의 이유를 설명할 수 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문화는 다른 세력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이기 때문에 근거의 일부분은 될 수 있습니다. 삼국은 고구려의 적석총, 신라의 적석목곽분, 백제의 횡혈식석실분..등 등으로 대표되는 묘제를 수장급 무덤의 장법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런 국가간의 묘제의 차이점을 영산강 유역은 다장복합묘적인 성격과 대형옹관으로 차별화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삼국이 모두 사용했던 토광묘라던지 등의 일반적인 묘제도 있습니다만, 대표되는 수장급의 묘제는 어느정도 차별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석촌동고분과 같이 서로 동일한 묘제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반도 왜설과 비류백제설은 광개토태왕의 공격으로 왜가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튀었다고 하고, 마한잔존설은 동성왕의 공격으로 마한이 멸망했다고 한다. 그 근거를 살펴보자.
우선 한반도 왜설
'10년(400년)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 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얐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귀복하였다.'
'14년(404년)왜가 불궤하게도 대방 지역에 침입하였다. 석성에 배가 연달아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할 것이 무수히 많았다.'-광개토 태왕릉비
이것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왜가 고구려의 제후국이었던 신라를 공격했는데, 고구려가 잘됐구나 싶어서 남정해서 왜나라까지 쳐들어가 왜나라를 완전히 조져버렸다. 근데 왜구가 건방지게도 4년 후에 다시 깝치다가 망했다. 광개토태왕이 또 쳐들어올까 무서버서 일본열도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열도에 자리를 잡기까지 108년동안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①전쟁의 주체는 왜였으며 ②임나가라가 나주이고 ③나주가 왜땅.....등등 수많은 전제가 있어야 하고 또 전제가 사실이라는 증명도 있어야 하지만 백번 양보해 다 사실이라고 전제하자. 그래도 억측이다.(제발 왜 억측인지는 묻지 말아달라.)
마한 잔존설.
'20년(498년)8월에 탐라에서 공납과 조세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그를 몸소 치려고 무진주(광주)에 이르니 탐라에서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중지하였다.'-삼국사기 동성왕조
이것을 이렇게 해석한다. 존만한 섬 하나 잡는데 왕이 친정씩이나 할 리가 있나? 제주도 잡는다는 핑계로 군대 일으켜 마한을 조져버렸는데, 그 소문 들은 제주도 쫄아서 사죄한 것이다...
탐라국은 그리 만만한 나라도 아니었을 뿐더러, 제후국이 말을 안 들을 때 본보기로 왕이 직접 친정을 나서는건 흔한 일이다. 더군다나 동성왕은 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6차례나 나오고(당시 왕의 사냥은 그냥 개인 취미활동이 아니었다)당시 세계최강대국이었던 고구려·북위와의 대립구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등 적극적이고 호전적인 왕이었다. 직접 제주도 친정에 나서는게 이상한 일만도 아닌 것이다.
※여담인데, 마한 잔존설의 3번 문제는 대략 웃기다. 마한 잔존세력의 멸망에 관련된 기사(라고 지들이 주장하는 기사)가 마한잔존세력이 '존재했다'라는 중요한 사료상의 근거 중 하나기 때문이다. 즉 마한잔존세력이 존재했다는 전제아래 '마한잔존세력은 이렇게 멸망했다'라는게 아니라, 그 기사 자체가 마한잔존세력의 실존했다는 중요한 근거 중 하나다.
밑의 글은 제가 예전에 발표문으로 쓴 글입니다만 참고가 될까 올립니다.
*고대 나주·영산강 세력에 대해서
1. 기존의 통설비판
기존의 통설에 의하면 마한은 백제 근초고왕(346~374)대에 완전히 병합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 근거로 <일본서기> 신공 49년(369) 신공황후가 파견한 왜병이 신라를 치기위해 한반도에 출정하였다가 낙동강수계에 존재하던 가야를 비롯한 7국을 평정하고 그 기세를 몰아 서쪽으로 남만침(탐)미다례(南蠻忱(耽)彌多禮)를 도륙하여 백제에 사여하였다는 내용을 골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신라 및 가야 공격 주체를 倭가 아닌 백제로 보아 백제가 근초고왕 대에 한반도 남부의 마한을 병합했다고 인식해 왔다. 백제 근초고왕대라면 고구려를 공격하여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던 시기 백제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아무리 백제의 힘이 강성하였다고는 하나 신라, 가야, 마한, 고구려를 모두 적으로 삼아 정복전쟁을 벌였다는 것은 믿기 힘들다. 그리고 근초고왕대에 백제와 신라가 적대관계였다는 것은 더욱 믿기 힘들다.
① 21년(366) 3월에 사신을 보내어 신라에 빙문하였다.
② 23년(368) 3월 초하루 정사에 일식이 있었다.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양마 2필을 주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조]
신공 49년을 서기 369년으로 상정한다면 백제가 368년 전까지는 신라와 우호 하다가 갑자기 369년에 신라를 공격한 것이 된다.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는 신라 공격 사유가 나와 있지 않아 더욱 일본서기 신공기를 의심하게 된다. 더욱이 369년이라면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를 공격한 시기와 일치한다. 이러한 국가적 대란에 신라와 가야 마한까지 군사를 보낼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백제는 369년 고구려의 공격을 크게 이기고 371년 재차 공격해오는 고구려 군을 크게 무찔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에 이른다. 이것은 백제의 주력이 고구려와의 싸움에 할당되었음을 의미한다. 백제가 아무리 강성했던 시기라고는 하지만 신라, 가야, 마한까지 공격할 여력은 없었다고 판단된다. 또한 신공기의 신라·가야 공격기사는 무시하고 한반도 남부 공격기록만 신용한다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판단돼 일본서기의 기록은 오기(誤記)이거나 신화적 요소가 가미된 기록이라고 생각된다.
<①광개토태왕 등의 사례를 볼 때 국가가 전성기일 때 그 정도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②368년 이후로 양국 관계는 일그러지기 시작하며, 비유왕대까지 백제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지 않는다. 더욱이 백제가 신라에 2년동안 두 번이나 사신을 보낸 일은 흔하지 않은 것을 볼 때(적어도 소햏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단순히 화친의 의미로만 해석하는 것도 어렵다.
③369년 고구려의 공격이 비록 고구려 왕이 친정했기는 하나 백제에게 있어 국가적 대란이라고 보기 어렵다. 고구려인 사기의 말처럼 고구려군은 정예가 아니었으며, 병력도 2만이었다. 더군다나 백제의 마한 정벌은 3월에 시작한 일이고, 고구려의 백제공격은 농번기인 9월의 갑작스런 기습전이었다. "이러한 국가적 대란에 신라와 가야 마한까지 군사를 보낼 여유는 없었을 것이다"는 오류라고 생각된다.>
====>1. 구체적인 사료나 증거없이 전성기라는 모호한 설정으로 광개토왕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는 것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2. 백제와 신라와의 관계가 일그러진 구체적인 사료가 없어 화친의 의미가 강하다고 생각한다.
3. 제 발표문에 언급되어있는 것과 같이 신라, 가야 기사는 무시하고 마한병합 기사만 신용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갑작스런 기습전이었다면 백제로써는 더욱 큰 타격이 아닐까요? 마한을 평정하기위해 남방으로 군사력을 주력했을 상황인데 고구려의 기습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위험이 크다고 생각합니다만? 마한평정이 성하나 뺏는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길게는 몇개월 몇년에 걸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고구려의 기습전에 대한 방어에 이은 반격까지의 과정에 무리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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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 국가가 강성할 때에는, 그 정도 정복전쟁이 수행하는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정도 수준의 전쟁에서 빠짐없이 승리했기에 전성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전쟁들이야말로 백제가 전성기였다는 구체적인 근거겠지요.
2.2년에 한번꼴로 사신을 보내던 나라가, 6번 왕이 바뀌는 동안 한번도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는 겁니다. 신라가 백제의 적대국인 고구려의 수하로 들어가는 등 여러 사건이 있었지만, 368년 이후로 한번도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는 건 적어도 백제가 신라와 화친을 원했다는 건 아니라는걸 보여줍니다. 신라와의 화친관계를 근거로 백제의 신라공격이 신빙성이 없음을 입증하시려면, 369년 이후에도 꾸준한 친밀도를 유지했다는 근거를 제시하셔야지요.
3.마한 출병은 3월이고, 고구려는 농번기에 갑작스럽게 기습해 왔기에 이미 마한에 출병해 있는 상황에서 "국가적 대란에 신라와 가야 마한까지 군사를 보낼 여유는 없었다"는 오류란 것입니다. 또한, 기습공격에 마한에 출병해 있는 병사를 되돌려야 할 만큼 당시 고구려군은 강력한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2. 마한에 관한 문헌기록
송서(宋書420~479)의 왜전을 보면 [
倭가 왜 · 백제 · 신라 · 임나 · 가라(가야) · 진한 · 모한 등 7국의 왕을 칭하면서 남송의 황제에게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자 남송의 황제가 그에게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이라는 관작을 수여했다.]라는 기록을 볼 수 있다.여기서 보이는 모한(慕韓)이 마한일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더욱이 5세기의 기록에서 마한의 기록이 보이는 것은 5세기까지는 마한이 완전히 백제에 병합되지 않았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또 한 [진서] 36 열전 장화전에 태강3년(282) [동이마한신미제국(東夷馬韓新彌諸國)’이 역대로 내부(內附)하지 않다가 20여국과 함께 사신을 파견하였다.]라는 기사를 볼 수 있다. 이것은 한강유역에서 자리를 잡은 백제에 밀려 한반도 남부로 밀려난 마한이 기존의 목지국에서 신미제국을 맹주국 으로 재편성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일 것이다.
<그 논리대로라면, 5세기까지 진한 역시 존재했다는 뜻이 되는 것 아닌가?
진서의 기록은, 필자의 논지와는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되므로 반론하지 않는다.>
3. 마한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
나주·영산강 지역의 가장 특기할만한 사항이라면 다장복합묘와 대형옹관(大形甕棺)으로 볼 수 있다. 다장복합묘의 대표적인 예는 나주 반남면 복암리 3호분으로 하나의 봉분안에 41기의 매장시설이 발굴되었다. 22기의 옹관 1기의 석곽옹관, 1기의 횡구식석곽, 3기의 수혈식석곽, 11기의 횡혈식석실, 2기의 횡구식석실, 1기의 목관등 41기의 매장시설이 확인되었다. 몇백년에 걸쳐 조영된 고분으로 영산강 유역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묘제가 망라되었다.
<다장복합묘는 어디서나 발견되는 묘제이며, 영산강 지역만의 묘제문화인 아파트형 고분은 위에서 말했듯 오히려 마한잔존설의 반론 근거가 된다.>
영산강 유역의 묘제는 대략 3~4세기 초까지는 금강유역을 포함한 여타 마한권 과 동일한 토광목관(곽)묘가 중심이 되나 4세기 중엽 이후부터 옹관이 매장주체가 된 저분구의 집단장(集團葬)이 등장하면서 여타 지역과 구분되는 독자성을 띤다. 이 옹관도 기존의 소형 옹관(생활토기)이 아닌 2~3m에 이르는 대형 옹관이 주를 이루고 있다. 또한 신촌리 9호분 출토의 금동관, 단봉환두대도, 금동식리등으로 보아 왕에 준하는 수장을 정점으로 하는 독립적 정치체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영산강유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도 빼놓을 수 없다.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대표적인 묘제로 앞이 네모지고 뒤가 둥근 형태의 고분이다. 이러한 고분은 한반도 남부 영산강 유역에서만 발견되고 있으며 그 시기도 대략 5~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이 전방후원분이 유독 영산강 유역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영산강 세력이 倭와 긴밀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독립된 정치세력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무리이다. 예컨데, 4~5세기경게 조성된 충남 공주 수촌리 고분군은 크기는 무령왕릉과 거의 맞먹고 환두대도, 금동관, 금동신발 등 국보급 유물들과, 한성시대 수도권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횡혈식 석실분까지 발견되었지만, 그 시기에 백제의 영토가 경기도에 국한되어 있었다고 보는 역사학자는 없는 것으로 안다.
전방후원분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으나, 일단 마한이 5세기까지 잔존이나 했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하기에 말하지 않는다.>
==>수촌리 고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님의 말씀처럼 백제의 것으로 보는학자도 있지만, 이한상 교수는 백제와는 다른 정치세력이 공주에 있었을 가능성도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동관, 금동식리 등은 위세품입니다. 더욱이 신촌리고분 출토 금동식리는 여타 백제와 신라의 금동식리와는 달리 오히려 倭와 비슷합니다.
<공주 일대에 독립국이 있었다는건, 일부 사료에 집착한 지나친 상상력입니다. 여기까지 따질 이유는 없으니, 그냥 '예'로 생각하고 넘어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금동관, 금동식리 등의 위세품이 독립된 정치세력의 존재의 증명까지 확대해석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걸 예로 들어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왜는 왜 언급하셨는지 모르겠군요. 마한잔존설이 아니라, 한반도 왜설인가요?>
4. 마한의 멸망
기존의 통설에 따르면 백제의 마한병합은 근초고왕때인 4세기로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 문헌적인 기록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독자적인 묘제와, 왕에 준하는 금동관, 문헌적 기록 등으로 볼때 마한은 6세기때까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가 점차 백제에 병합되어감을 알 수 있다. 5세기에 이르러 백제의 횡혈식석실분이 영산강유역에 나타나며 백제의 관료들이 관모를 장식했던 은제관식이 나주 흥덕리와 복암리에서도 출토되어 6~7세기가 되면 마한이 백제에 완전히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옹관역시 5~6세기가 되면 쇠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한은 기존의 통설과 달리 빠르면 5세기 늦어도 7세기에 백제에 병합되었으며 그 전까지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중국, 왜와 교류하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다장복합고분과 대형옹관이라는 독자적인 묘제를 사용하였으며, 倭 의 전방후원분도 받아들여 융통성있게 백제와 왜의 사이에서 세력을 구축했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말 동성왕의 친정군이 광주에 주둔했다는 기록이 있는 시점에서 6~7세기까지 마한이 잔존했을 가능성은 일말도 없다.
마한이 4세기 이후까지 잔존했다는 학자들도, 6~7세기까지 잔존했을 거라는 추측은 하지 않는다.
==> 백제의 마한병합 기사는 온조왕대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런 기록은 기년조정이 필요한 사료라고 생각됩니다. 아니면 병합이라는 자체가 마한의 우두머리國을 병합했다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전쟁관련 기사는 과장되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 마한이 6~7세기까지 잔존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는 많이 있습니다. 지금 영산강 세력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와 고고학계의 대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모두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역사학계에서는 4세기, 고고학계에서는 훨씬 이후 즉 옹관이 쇠퇴하고 횡혈식석실분이 들어오는 6~7세기라는 주장이 대표적입니다.
저의 생각은 마한이 6~7세기까지 존재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류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님이 지적해주신대로 다른 세력과 차별되는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다는 점과 사료의 해석 등등. 그밖에도 제가 생각하는 것은 영산강세력의 대형고분은 다장의 결과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다장복합묘로 대표되는 묘제인만큼 하나의 묘역에 여러 사람을 매장하다보니 고분은 점점대형화가 돼갑니다. 그리고 신라의 예를 봤을때도 중앙과 지방과 묘제가 다르다고 두 집단을 완전히 분리시켜 생갈할 수 도 없다는 문제점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약간의 사료와 고고학적 자료를 가지고 생각해봤을때 영산강세력은 4세기이후까지 독립적인 형태로 남아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온조왕 기사는, '늦어도 4세기에 병합되었다'라는 논리 내에서도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고, 저 역시 그다지 신뢰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마한은 늦어도 4세기에 병합되었고 그 이후로는 지역문화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