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01월27일(토요일) 서울 [경복궁&사직공원&경희궁&이화박물관&舊러시아공사관] 탐방일정
08:45~08:58 연신내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경복궁역으로 이동 [13분 소요]
08:58~09:06 경복궁역 5번 출구로 나와서 서울 종로구 사직로 161 번지에 있는 경복궁 매표소1로 이동
09:06~09:10 경복궁 매표소1에서 관람권 구입 [경복궁 관람권 : 3천원]
[관람시간
경복궁은 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되며, 입장은 오후 5시까지 가능합니다. 다만, 겨울철에는 운영시간이 단축될 수 있으니 방문 전에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궁궐 내 일부 건물은 특정 시간대에만 관람이 가능하므로, 관람 계획을 세울 때 이 점을 고려하셔야 합니다.]
탐방지 : 서울 경복궁
[경복궁(景福宮)
이칭별칭 : 북궐(北闕)
건립시기·연도 : 1395년(태조 4)
규모(면적) : 43만 2702.87㎡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
사적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목차
정의
개설
연원 및 변천
내용
특징
의의와 평가
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전기에 창건되어 정궁으로 이용된 궁궐. 정궁. 사적.
개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궐(北闕)이라고도 불리었다. 조선왕조의 건립에 따라 창건되어 초기에 정궁으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조선 말기 고종 때 중건되어 잠시 궁궐로 이용되었다.
연원 및 변천
이성계가 왕이 되어 곧 도읍을 옮기기로 하고,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의 창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이 당시 궁의 규모는 390여 칸으로 크지 않았다.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 5칸에 상하층 월대(月臺)와 행랑·근정문·천랑(穿廊)·각루(角樓)·강녕전(康寧殿) 7칸, 연생전(延生殿) 3칸, 경성전(慶成殿) 3칸, 왕의 평상시 집무처인 보평청(報平廳) 5칸 외에 상의원·중추원·삼군부(三軍府) 등이 마련되었다.
궁의 명칭은 『시경』 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으나, 제3대 태종 때 또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태종은 궁내에 경회루(慶會樓)를 다시 지었는데, 연못을 넓게 파고 장대한 누각을 지어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사신을 접대하도록 하였으며, 파낸 흙으로는 침전 뒤편에 아미산(蛾眉山)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어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에 두었으며, 경회루 남쪽에 시각을 알리는 보루각(報漏閣)을 세우고 궁 서북 모퉁이에 천문관측시설인 간의대(簡儀臺)를 마련하였으며, 강녕전 서쪽에는 흠경각(欽敬閣)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玉漏器)를 설치하였다.
1553년에는 궁내에 불이 났는데 강녕전에서 불이 나 근정전 북쪽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듬해에 강녕전 외에 교태전(交泰殿)·연생전·흠경각·사정전(思政殿)을 복구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궁은 전소되고 말았다. 이때 창덕궁·창경궁 등도 모두 불에 타버려 난이 끝나고 왕이 환도하였을 때 정릉동의 구(舊) 월산대군가(月山大君家)를 임시 어소(御所)로 정하였다.
궁의 복구 문제는 왜란 직후부터 논의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선조는 환도한 뒤 경복궁에 가가(假家)라도 지을 것을 명하였고, 1606년에는 궁궐영건도감(宮闕營建都監)을 설치하고 광화문과 근정전 등 주요건물만이라도 우선 지을 계획을 세웠으나, 일부 대신들이 ‘공사가 커서 1, 2년에 끝낼 수 없으므로 후에 일을 시작해야 한다’며 만류하자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여기에다 경복궁이 길(吉)하지 못하다는 의견도 있어서 결국 왜란 후 경복궁 대신에 창덕궁을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과거 경복궁에서 단종이 쫓겨난 일이 있고 중종 때에는 조광조(趙光祖)가 사정전 뜰에서 왕의 친국(親鞫)에 이어 사약을 받은 일 등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광해군도 한때 경복궁성을 수축케 하고 중건의 뜻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궁의 중건이 완료된 것은 소실된 지 약 270년이 흐른 1867년의 일이다[중건공사 개시: 1865년, 중건공사 완료: 1867년 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강력한 의지로 여느 궁궐의 규모나 격식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그 규모는 7,225칸 반이며 후원에 지어진 전각은 융문당(隆文堂)을 포함하여 256칸이고 궁성 담장의 길이는 1,765칸이었다. 궁이 완성되고 나서 1868년에 왕은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때 조선왕조는 외국 열강들의 세력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1895년에는 궁 안에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은 이어(移御)한 지 27년째인 1896년에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겨,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궁안의 전(殿)·당(堂)·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放賣)하고, 1917년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동행각·서행각·연길당(延吉堂)·경성전·연생전·인지당(麟趾堂)·흠경각·함원전(含元殿)·만경전(萬慶殿)·흥복전(興福殿) 등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창덕궁의 대조전·희정당 등을 지었다. 궁전 안에는 겨우 근정전·사정전·수정전(修政殿)·천추전(千秋殿)·집옥재·경회루 등과 근정문·홍례문·신무문(神武門)·동십자각 등이 남게 되었으며 정문인 광화문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하였다.
또한, 궁의 중심건물인 근정전 정면 앞에 매우 큰 석조건물인 총독부청사를 지어 근정전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이 밖에 자선당 자리에도 석조건물이 들어서고 건청궁(乾淸宮) 자리에는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인멸시켰다.
1945년 광복 후 궁은 공원으로 개방되는 한편, 일인(日人)들이 지었던 총독부청사는 정부종합청사로 활용되다가, 1971년에 궁의 동북 담장 가까이에 지어진 목조기와건물 모양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에 들어있던 국립박물관이,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명칭을 고치면서 이 건물로 이건되었다. 구 총독부청사는 1995년 8·15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철거되었으며, 이 자리에 원래 있던 흥례문 권역이 2001년 10월 복원·낙성되었다.
한편, 일제에 의해 건물이 훼철되는 피해를 입은 경복궁을 복원하는 공사가 1991년부터 침전·동궁·흥례문·태원전·광화문 등 5개 권역으로 나누어, 20년에 걸쳐 5단계로 진행되었다. 이로써 고종 당시 지어진 건물의 40%가 복원되고,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로조 지어졌던 광화문도 원래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내용
경복궁의 주요건물 위치를 보면 궁 앞면에 광화문이 있고 동·서쪽에 건춘(建春)·영추(迎秋)의 두 문이 있으며 북쪽에 신무문이 있다. 궁성 네 귀퉁이에는 각루가 있다. 광화문 안에는 흥례문이 있고 그 안에 개천(開川) 어구(御溝)가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어구에 돌다리인 금천교(禁川橋), 곧 영제교(永濟橋)가 놓여 있고 다리를 건너면 근정문이 있으며 문을 들어서면 정전인 근정전이 이중으로 높이 쌓은 월대 위에 우뚝 솟아 있다.
근정전 뒤의 사정문을 들어서면 왕이 정사를 보는 곳인 사정전이 있고 그 동·서쪽에 만춘전(萬春殿)·천추전이 모두 남향으로 놓여 있다. 사정전 뒤 향오문(嚮五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연침(燕寢)인 강녕전이 있고 그 앞 동서 양쪽에 연생전·경성전이 있다.
강녕전 뒤에는 양의문(兩儀門)이 있고 문 안에 왕비가 거처하는 교태전이 있으며 잇대어서 동쪽에 원길헌(元吉軒)·서쪽에 함광각(含光閣)·동북쪽에 건순각(健順閣)이 있다. 그 뒤로는 후원이 전개되어 소나무가 우거지고 연못·정자 등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다. 흥례문으로부터 이곳까지에는 동서로 낭무(廊廡)가 각 건물을 둘러싸고 있다.
이밖에 궁 서쪽에 수정전이 있고 그 위에 경회루가 있는데 수정전은 의정부 청사로 쓰였던 곳이며, 경회루는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 또한 건춘문과 영추문 안에도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다.
현재 궁내에 남아 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전 등이며, 복원된 건물은 강녕전·자선당·태원전·광화문 등이다.
근정전(국보, 1985년 지정)은 조선왕조 정궁의 정전답게 중층의 정면 5칸, 측면 5칸의 장대한 건물이며 건물의 양식은 조선 말기에 속하여 세부의 장식적 처리가 두드러진다. 경복궁 근정문 및 행각(보물, 1985년 지정)은 정면 3칸의 중층지붕건물이다. 근정문 좌우로는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경회루(국보, 1985년 지정)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장대한 누각 건물로 하층은 네모진 돌기둥을 세우고 상층에는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나무기둥을 세웠다. 주변에는 네모난 큰 연못을 파고 우측면에 세 개의 돌다리를 놓았다. 누각 건물로는 현재 국내에서 제일 큰 규모에 속한다.
향원정은 육각형 평면을 한 정자로 연못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목조구름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자경전(보물, 1985년 지정)은 침전건물의 하나인데, 이 건물의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굴뚝(보물, 1985년 지정)에 묘사된 십장생 무늬가 특히 주목된다.
사정전 북쪽에 있는 아미산은 여러 단의 화계(花階)와 그 사이의 나무·괴석 등이 눈길을 끌며 전체적으로 사철의 변화에 따른 조화를 보여 주는 한국식 정원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도 봉황·귀면·당초문 등을 새긴 육각 화문(花文) 장식의 경복궁 아미산 굴뚝(보물, 1985년 지정)이 있다. 이밖에 18세기에 만든 바람의 방향과 강도를 측정하는 기기인 풍기대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보물, 1985년 지정).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 있을 때는 경천사십층석탑을 비롯한 국보·보물로 지정된 석조물들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용산에 새로 지어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대부분 옮겨져서 현재는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등 일부만 남아 있다.
특징
경복궁이 자리 잡은 위치는 도성의 북쪽 북악산 기슭으로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주산(主山)의 바로 아래이다. 궁의 전면으로 넓은 시가지가 전개되고 그 앞에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내수(內水)인 청계천과 외수(外水)인 한강이 흐르는 명당(明堂) 터이다. 궁의 왼쪽으로 종묘가 있고 궁의 오른쪽에 사직단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인 좌묘우사(左廟右社)를 따른 것이다.
고종 때 중건된 궁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되어 있으며 궁성의 둘레는 1만 여척으로, 시가지를 내려다보듯이 남면(南面)하였고 궁의 주요건물들도 모두 남향으로 되어 있다.
건물의 배치는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에는 정전과 편전들이 놓이고 뒷부분에는 침전과 후원이 자리 잡고 있어 이른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이 정전과 침전을 좌우에 놓거나 배치에 있어 앞뒤의 관계가 불분명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데, 경복궁이 조선조의 정궁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의의와 평가
경복궁은 비록 궁내의 건물들 대부분이 없어져서 근정전과 경회루를 제외한 많은 전각들이 복원되었지만, 창건 때의 위치를 지키고 있어 조선왕조 정궁의 면모를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탐방코스 : [경복궁 매표소1~경복궁 광화문~근정전~사정전~수정전~경회루~강녕전~교태전~동궁~소주방~자경전~흥복전~함화당&집경당~향원정~건청궁~집옥재~태원전~경복궁 광화문]
탐방일 : 2024년01월27일(토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 종로구 : 최저기온 영하 10도C, 최고기온 0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1시간30분 소요)
* 09:10~10:40 서울 종로구 사직로 161 번지에 있는 경복궁 매표소1에서 탐방출발하여 [경복궁 매표소1~경복궁 광화문~근정전~사정전~수정전~경회루~강녕전~교태전~동궁~소주방~자경전~흥복전~함화당&집경당~향원정~건청궁~집옥재~태원전~경복궁 광화문]의 동선으로 경복궁(景福宮)을 탐방
[경복궁 광화문(景福宮 光化門)
경복궁의 정문이다. 건물의 명칭인 '광화(光化)'는 '빛이 널리 비춘다.'라는 뜻으로, 건립 당시에는 정문(正門) 혹은 오문(午門)으로 불리다가 1425년(세종 7)에 이르러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광화문'이라 명명되었다.
역사
1395년(태조 4)에 경복궁을 창건할 당시 건립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소실되었으며, 1865년(고종 2)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광화문도 함께 지어졌다.
일제강점기 당시 경복궁 흥례문 권역에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을 지으면서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이전되었고, 6·25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문루가 모두 소실되었다.
1968년에 남아있던 광화문의 석축을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청사) 앞으로 이전하여 복원하였으나, 목조가 아닌 콘크리트로 문루를 복원하였고, 위치도 원래의 자리에서 뒤쪽으로 밀려지고 각도도 틀어져서 세워졌다.
1990년대 들어서 경복궁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역사바로잡기의 일환으로 1996년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훼손된 경복궁의 전각들을 복원하였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광화문은 2006년에 철거되었고, 2010년 고종 때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원래의 위치에 광화문이 복원되었다.
2023년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전차의 선로를 설치하면서 훼손되었던 광화문의 월대를 복원하여 일반에 공개하였다.
구조 및 형태
3개의 아치형 문을 낸 석축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門樓)를 올렸다.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용마루와 추녀마루에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하였고, 망새와 용두, 잡상 등을 설치하여 지붕 위를 장식하였다. 가운데 아치문 천정에는 주작(朱雀)을 그려 넣었으며, 광화문 정면 좌우에는 상상의 동물이자 영물인 해태상을 설치했다. 광화문 앞으로는 궐외각사인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兵曹)·형조(刑曹)·공조(工曹) 육조의 관아들이 늘어서 있었고 이를 육조거리라고 불렀다.]
[경복궁 근정전(景福宮 勤政殿)
대한민국의 국보 제223호 (1985년 1월 8일 지정)
시대 조선 고종 4년(1867)
주소 서울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1-1)
근정전(勤政殿)은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전으로, 다포계 팔작 지붕의 중층 건물이다. 현재 근정전은 국보 223호로 지정되어 있는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 중 하나이다.
1395년 조선 태조가 조선의 정궁으로 경복궁을 조성할 때, 중추를 이루는 건물로 중건되었다. 임진왜란 시기 경복궁 전반이 불에 타면서 같이 소실되었다가 1868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공사 때 다시 세워졌다.
조선 국왕의 정무와 나라의 큰 행사, 즉 외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는 등 국가 의식이 치러지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 중에서도 국왕의 즉위식은 근정전의 주요 기능 중 하나였으며, 정종, 세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선조가 근정전에서 즉위를 치렀다. 이와 더불어 과거 시험의 거행과 합격 발표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景福宮)의 정전(正殿)으로서의 권위를 보여주고 있고, 내부관람도 실시하고 있다. 야간개장 때는 근정전의 내부를 공개했으나, 어좌를 제외한 모든 근정전의 내부는 불을 키지 않아 어둡게 보인다.
경복궁 근정전은 외국 사신을 접대하거나 왕의 즉위식 등 국가의 주요 행사를 치르던 경복궁의 정전이자 조선왕조와 대한민국의 상징이다.
개요
정면 5칸, 측면 5칸의 2층 규모 건물이며, 지붕은 전형적인 팔작지붕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처마를 받치는 기능을 하는 장식 짜임새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다포식 건물이다.[2] 내부에는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으로 둘러쳐진 왕이 앉는 의자인 어좌(御座)가 높은 대 위에 있고 통간으로 높은 천장을 형성하였다. 천장 중앙에는 7개의 발톱을 갖고 있는 용 2마리를 나무로 조각해 매달았다.
근정전의 기단인 월대에는 각 네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기둥에 여러 동물상들을 조각해 놓았다. 이는 경복궁이 법궁으로서 갖는 위상을 근정전의 격식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상월대의 난간에는 방위신에 해당하는 사방신(四方神)을 동서남북의 방향에 맞게 조각해 놓았고, 상월대와 하월대의 난간 곳곳에는 십이지신(十二支神)과 상서로운 동물들을 조각해 근정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에는 지붕이 용 문양으로 장식된 청자기와로 지어져서 푸른 유리 지붕처럼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길 좌우에는 정승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행사를 치를 때 햇빛을 가리기 위해 사용했던 차일 고리가 아직도 앞마당에 남아 있다. 근정문 주변으로는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에워싸는 형태로 되어 있다.[2]
역사
조선 초기
태조는 조선을 건국하고 3년차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1394년(태조 3년) 한양에 천도하자 먼저 종묘 및 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청성백 심덕부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했다.[4][5] 1395년(태조 4년) 8월에 공사가 시작되어, 다음 달인 9월 29일에 우선 궁궐 중심부의 건축이 완료되었다.[6]
태조는 그 다음달에 경복궁에 입궐한다. 이 때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 궁궐의 이름을 비롯하여 근정전 등 여러 건물의 명칭을 짓는다. 정도전이 근정(勤政)이라는 이름을 제안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근정전(勤政殿)과 근정문(勤政門)에 대하여 말하오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한 이치입니다. 작은 일도 그러하온데 하물며 정사와 같은 큰일이겠습니까?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경계하면 걱정이 없고 법도를 잃지 않는다.’ 하였고, 또 ‘편안한 것만 가르쳐서 나라를 유지하려고 하지 말라. 조심하고 두려워하면 하루 이틀 사이에 일만 가지 기틀이 생긴다. 여러 관원들이 직책을 저버리지 말게 하라. 하늘의 일을 사람들이 대신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순임금과 우임금의 부지런한 바이며, 또 말하기를, ‘아침부터 날이 기울어질 때까지 밥 먹을 시간을 갖지 못해 만백성을 다 즐겁게 한다.’ 하였으니, 문왕(文王)의 부지런한 바입니다. 임금의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음이 이러하니, 편안하게 봉양하기를 오래 하면 교만하고 안일한 마음이 쉽게 생기게 됩니다. 또 아첨하고 아양 떠는 사람이 있어서 이에 따라서 말하기를, ‘천하에서 나랏일로 자신의 정력을 소모하고 수명을 손상시킬 까닭이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미 높은 자리에 있어서 어찌 혼자 비굴하게 노고를 하겠는가?’ 하며, 이에 혹은 여악(女樂)으로, 혹은 사냥으로, 혹은 구경거리로, 혹은 토목(土木)일 같은 것으로써 무릇 황음무도(荒淫無道)한 일을 말하지 않음이 없으니, 임금은 ‘이것이 나를 사랑함이 두텁다.’ 하여, 자연으로 태만해지고 거칠어지게 되는 것을 알지 못하게 되니, 한(漢)·당(唐)의 임금들이 예전 삼대(三代) 때만 못하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임금으로서 하루라도 부지런하지 않고 되겠습니까? 그러나, 임금의 부지런한 것만 알고 그 부지런할 바를 알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한 것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세밀한 데에만 흘러서 볼 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 데에 빨리 한다.’ 했으니, 신은 이로써 이름 하기를 청하옵니다.”
— 《삼봉집》기09 경복궁, 또는 《태조실록》태조 3년 10월 7일
근정전의 주위에는 근정문을 비롯해 4문이 있었고, 그 북쪽 사정전은 편전이며, 강녕전·교태전 등의 침전, 그 밖에 여러 전각이 있었다. 이때 건립된 전각은 총 390여칸에 이르렀는데, 태조실록에 새 궁궐의 규모, 배치 및 각 건물의 기능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 때 지어진 근정전은 사정전과 함께 조선에서 청기와를 덮은 단 두 채 뿐인 건물이었다.
1553년(명종 8년) 9월에 강녕전에서 시작된 불로 경복궁의 대부분이 소실될 때에도 근정전은 소실되지 않았다.
파괴와 중건
근정전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경복궁이 파괴될 때 마찬가지로 불에 타 소실되었다. 이렇게 소실된 경복궁 근정전 자리는 여전히 여러 행사에서 사용되었다. 그 후로 근정전은 복원되지 못하다가, 1865년(고종 2년) 수렴청정중인 신정왕후의 지시로 중건된다. 1866년 3월 10일에 영건도감에서 제출한 근정전 공사일정에 따르면, 터는 6월 8일에 세우고, 초석은 8월 25일에 놓았다. 근정전의 상량문 제술관은 10월 9일에 정했는데, 경복궁 영건도감 도제조이던 조두순이 맡았다. 상량은 1867년 2월 9일에 했다. 상량시 물 수(水)자를 윤곽으로 그 안에 용(龍)을 1천자 이상 새겨 넣은 종이를 올려 넣었고, 마찬가지로 용 그림도 같이 올려 넣었으며, 6각형 은판의 각 모서리에 물 수자를 새겨 넣은 것도 함께 넣었다. 이는 화재로부터 근정전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고종은 완공된 근정전에서 정사를 보았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시해되는 사건인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고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옮기는 아관파천을 일으킨다. 러시아공사관에서 머무는 동안에는 거기서 정사를 보다가, 1897년에는 외국 공사관이 밀집한 지대인 정동에 있는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법궁으로 사용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이 훼철되어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설 때에도 건사하였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중에는 식장으로 사용되었고, 행각에는 진열장을 배치하였다. 1927년에는 전국축산대회를 개최하는 등 여러 행사에서 총독부에서 번갈아가며 사용하였다.
해방 후
해방 후에도 근정전은 여러 행사를 위한 장소로 이용되었다. 1946년에는 문맹퇴치학생계몽대 출동식, 전조선학교음악제전이 열렸다. 1948년에는 최초로 보수공사하였다. 이후 1964년에는 반자를 수리하였고, 1970년에는 기단을 보수하였다.. 1987년에는 북측 월대를 보수하였고, 1988년에는 현판을, 1996년에는 정면 창호를 보수하였다. 이후 2000년부터 2003년까지 해체보수공사를 진행했다.
용도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으로써 기능했다. 조선 왕실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큰 조회인 조하(朝賀)와 망궐례(望闕禮)가 정기적으로 열렸으며, 그 외에도 과거시험 및 연회 등 여러 왕실의 행사가 이루어졌다.
구조
근정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정면과 측면의 칸수는 같지만 주칸의 너비가 더 넓다. 총 25칸에 중층 목조 건물로, 내9포 외7포의 공포로 되어있으며 기둥 높이는 16척이다. 보칸은 어칸 11척, 전후 협칸 각각 11척, 전후 뒷칸 각각 17처깅며 도리칸은 어칸 22척, 좌우 협칸 각각 21척, 동서 툇간 각각 17척이다.
지붕은 상층 지붕에는 용마루, 합각마루(내림마루), 추녀마루(귀마루)로 구성되어있으며 용마루의 양단에는 취두를, 합각마루의 아래끝에는 용두를 놓았다. 추녀마루에는 상하층 모두 7개의 잡상을 놓았으며 그 뒤에는 용두를 두었다. 하층 지붕은 추녀마루로만 이루어졌는데, 여기에도 7개씩 잡상을 놓았다.
천장에는 칠조룡 두 마리가 여의주를 놓고 희롱하는 장식인 쌍룡희주(雙龍戱珠)의 장식을 설치하였다.
월대
근정전은 2층의 월대 위에 놓여있다. 월대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과 십이지신이 조각되어 새겨져 있다. 주작은 월대 상층부의 남단에, 현무는 월대 상층부의 북단에, 청룡과 백호는 월대 하층부의 북단에, 십이지신은 월대 하층부의 남단에 아로새겼다.
권역
근정전은 사방이 행랑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그 중 동, 서측 행랑에는 통로가 있고 북측과 남측 행랑에는 문이 나 있다. 북측 행랑에 있는 문은 사정전으로 통하는 사정문이다.
근정문
근정문은 근정전의 정문이자 경복궁의 내문이다. 현판은 경복궁 중건시 신석희가 썼다.
월화문과 일화문
월화문과 일화문은 근정전 좌우에 있는 협문이다. 정전에서 조회를 볼 때 무인은 월화문으로, 문인은 일화문으로 출입했다. 달은 음양에서 음을, 해는 양을 의미하므로 각각 서쪽과 동쪽의 문 이름으로 지었다.
행랑
근정전의 동쪽 행각에는 서방색(書房色), 관광청(觀光廳), 양미고(粮米庫), 융문루(隆文樓)가 있었고, 서쪽 행각에는 내삼청(內三廳), 충의청(忠義廳), 예문관(藝文館), 향실(香室), 액정시(掖庭厮), 융무루(隆武樓)가 있었다.
계인문
계인문(啓仁門)은 근정전 동행랑에 있던 문이다.
협의문
협의문(協義門)은 근정전 서행랑에 있던 문이다.]
[경복궁 사정전(景福宮 思政殿)
왕의 집무 공간, 사정전(思政殿)
경복궁의 중심 건물인 근정전(勤政殿)의 뒤편에는 사정전(思政殿)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근정전이 국가의 공식 행사를 치르는 의전용 공간의 기능을 했다면, 사정전은 왕이 신하와 경연(經筵)을 하고 정무를 보는 집무실과 같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도(京都)편에 ‘사정전은 근정전 북쪽에 있는데, 아침마다 공사(公事)를 보는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부분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궁궐 조성의 책임을 맡은 정도전은 이러한 기능을 고려하여 이 건물의 이름을 ‘사정전’이라 지었다. 여기에서 ‘사정(思政)’이란 생각하고 정치하라는 뜻이다. 정도전은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잃는다.”고 하며 생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서경]에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고 했으니, 생각이란 것이 사람에게서 작용되는 것이 지극하다고 본 것이다. 정도전은 백성들 중에는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한 사람이 섞여 있고, 모든 일에는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임금이 된 자가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펴야지만 인재를 등용하고 일을 마땅히 처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정도전은 이 건물에서 왕이 매일 정사를 보고 조칙(詔勅)을 내려 지휘하기에, 한 번 더 생각하여 결정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사정전’이라 이름 하였음을 그의 문집인 [삼봉집(三峯集)]에 밝혀두었다.
생각하고 정치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곳에서 실제로 조선 전기의 왕들은 신하들과 경연을 벌였고, 국사(國事)를 돌보았다. 특히 세종대에는 [사정전훈의(思政殿訓義)]라는 책을 완성하여 주목된다. 1435년(세종 17)에 세종은 윤회ㆍ권도ㆍ설순에게 명하여 문신 40여 인을 모아 [자치통감]의 훈의(訓義)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이때, 세종은 친히 교정을 보고 때로는 늦은 밤까지 열중하는 정성을 보였다. 이 책이 완성되자 이름을 내려 ‘사정전훈의’라고 하였는데, 책의 제목에 ‘사정전’의 이름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사정전이 갖는 의미가 컸음을 엿볼 수 있다. 사정전은 좌우에 만춘전과 천추전을 두고 사정전의 공간 기능을 보완하도록 했다. 현재는 이 두 건물이 독립된 전각의 형태이지만 원래는 복도각으로 연결되게 하여 사정전에서 왕이 행하는 주요 활동이 이곳에서도 행해졌다.
세조대인 1456년(세조 2)에는 사정전 앞에 큰 종을 주조하여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 흥미롭다. 신숙주가 쓴 종명서(鍾銘序)에서는 “우리 전하께서 태평한 날이 오래되어 군정(軍政)을 엄히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곧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큰 종을 주조해서 사정전 앞에 설치하여 금군을 호령하여 정돈되도록 하셨다.”라고 종을 설치한 이유를 설명하였다. 아침저녁으로 경계시키기 위해 사정전에 설치한 이 종은 후에 종각에 안치되었다.
사정전에서 공놀이[打毬]를 즐긴 세종
왕과 신하가 공부를 하고 정사를 돌보던 사정전. 그런데 이곳에서 세종대에는 이벤트성 행사가 자주 벌어졌다. 사정전에서 종친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공을 치는 놀이[打毬]가 벌어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타구(打毬)는 장치기라고도 했는데, 길 위에 여기 저기 구멍을 파놓고 긴 막대기로 둥글고 작은 공을 쳐서 그 구멍에 들어가게 하는 놀이이다. 오늘날의 골프와 비슷하다. 구멍은 가능하면 공이 잘 들어가기 어려운 자리에 움푹하게 만들었는데, 아슬아슬한 승부를 맛보게 하기 위해 다리 끝과 같은 곳에 파기도 했다.
타구에 쓰이는 공의 크기는 달걀 정도였고 나무나 차돌멩이로 만들었다. 각자의 공을 구분하기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재미있는 이름을 공에다 붙이기도 했다. 공을 치는 채의 모양은 긴 숟가락처럼 생겨 오늘날의 골프채나 하키채를 연상시킨다. 세종은 왕자시절부터 하인들과 어울려 타구를 했다. 특히 날씨가 추워 궁궐 밖에 나가기 어려운 겨울부터 연초까지 이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세종은 왕이 되어서도 타구를 즐겼음은 실록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태종이 상왕으로 있던 시절 세종은 부친인 태종과 함께 타구를 치면서, 부자간의 정을 돈독히 한 모습도 기록에 나타난다. 왕이 주최하는 타구가 사정전 앞에서 자주 거행되었던 사실은 [세종실록]이나 [세조실록] 등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 [세조실록]에는 “사정전 남랑(南廊)에 나아가서 종친의 봉희(棒戲)를 구경하였다.”고 기록하여, 타구를 막대기로 하는 놀이라는 점에서 봉희라고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사정전, 세조와 사육신의 악연의 공간
사정전 앞에서는 역사를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바로 사육신이 단종 복위 운동을 펼치다가 실패해 이곳에서 세조에게 국문을 당한 일이다. 1456년 단종복위 운동을 주도한 성삼문, 박팽년등의 거사는 김질 등의 고변으로 인하여 실패로 끝났다. 분노한 세조는 이들을 사정전 앞으로 압송하게 하였다. [세조실록]에는 “왕이 사정전으로 나아가서 이휘를 인견하고, 다시 성삼문 등을 끌어들이고, 또 박팽년 등을 잡아와서 친히 국문하였다. 박팽년에게 곤장을 쳐서 당여(黨與)를 물으니, 박팽년이 대답하기를,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성승·박쟁·유응부·권자신·송석동·윤영손·이휘와 신의 아비였습니다.’라고 하였다.”고 기록하여 세조의 친국이 벌어진 현장이 사정전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세조는 사정전에서 친히 거사 참여자들을 국문하면서 협박, 회유하려 하였다. 그러나 성삼문과 박팽년 등은 세조의 왕위 찬탈의 부당성을 공격하면서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국문 과정에서 성삼문은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나으리’라고 칭하여 세조를 자극하였다. 또한, 그는 세조의 신하가 아니기 때문에 세조가 준 녹봉을 먹지 않고 창고에 쌓아 두었다고 말하였다. 이에 세조는 크게 노하였고, 달구어진 쇠로 고문을 더욱 모질게 가했다. 이날 사정전에서 벌어진 상황은 [연려실기술]에 자세하게 실려 있다.
세조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하니, 성삼문은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옛 임금을 복위하려 함이라,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의 마음은 나라 사람이 다 안다.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도둑질하여 뺏으니, 성삼문이 신하가 되어서 차마 군부(君父)의 폐출되는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나으리가 평일에 곧잘 주공(周公)을 끌어댔는데,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는가. 성삼문이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백성은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세조가 발을 구르며 말하기를, “선위를 받을 때에는 어찌하여 저지하지 않고, 도리어 내게 붙었다가 이제 나를 배반하는가.” 하였다. 성삼문이 말하기를, “사세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내가 원래 그것을 저지하지 못할 바에는 물러가서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임을 알지만, 공연히 죽기만 해야 소용이 없겠으므로, 참고 지금까지 이른 것은 뒤에 일을 도모하려 함이라.” 하였다. 세조가 말하되, “네가 신이라 일컫지 않고 나를 나으리라고 하는데, 네가 내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것은 반역이다. 겉으로는 상왕을 복위시킨다 하지마는, 실상은 네가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박팽년 역시 세조를 ‘나으리’라고 칭하였고 세조가 준 녹을 받지 않았다. 이는 그가 국문 과정에서 “상왕의 신하로 충청 감사가 되었고, 장계에도 나으리에게 한 번도 신이라 일컫지 않았으며, 녹도 먹지 않았다.”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박팽년은 장계에 신이라 일컫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그 장계를 대조하여 보니 과연 ‘신(臣)’자는 하나도 없었고 모두 그와 비슷한 ‘거(巨)’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성삼문과 박팽년은 세조에 의해 가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사정전은 조선시대 왕이 정사를 보는 대표적인 공간이었고, 왕과 신하가 머리를 맞대며 학문을 토론하는 경연이 자주 벌어지기도 한 곳이었다. 또한 심신을 단련하려는 왕과 종친들의 타구 자주 벌어진 생동의 현장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1453년 계유정난으로 파생된 불법적인 왕위 찬탈은 사정전 앞마당을 처참한 고문의 현장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경복궁 수정전(景福宮 修政殿)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2012년 3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760호로 지정되었다. 근정전 동편 경회루 바로 앞에 자리한다.
입지 현황 및 역사문화환경
수정전은 근정전 서측에 있는 건물로써, 북으로는 경회루가 자리 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 없어지기 전인 세종 연간에는 학문을 연구하며, 왕에게 주요 정책을 자문하고 건의하던 기관으로 한글을 창제하는 등 문치의 본산이었던 집현전이 있던 곳으로 왕의 영역과 신하들의 영역이 만나는 접점인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고종 때 중건되어 이후에도 외조공간에 자리 잡은 왕의 편전으로 사용되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대한제국의 군국기무처를 여기에 두었으며, 이후 내각청사로 사용되었다. 4면에는 행각과 남쪽의 외행각이 일곽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일제 때 철거되고 현재의 본전 건물인 수정전만 남아있다.
연혁
조선 초
조선 초기 왕조실록에는 수정전과 관련된 기록이 보이지 않고, 조선 초기에 작성된 경복궁 전도에도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경복궁이 궁궐로써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시기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세종 조에는 집현전으로 사용되었고, 세조 때에는 예문관으로도 사용되었다. 그 후 선조25년(1592) 4월 임진왜란으로 인해 경복궁의 수많은 전각과 함께 소실되었다.
근대
지금 전해지는 건물은 고종 4년(1867)에 근정전, 사정전, 경회루 등과 함께 중건한 것이다. 중건 당시에는 4면의 행각과 남쪽으로 외행각이 있었으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내부 벽체와 창호가 훼철되었고 수정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철거되었다. 1915년 가을에 조선의 정궁을 훼철하고 조선총독부를 세우고자 하는 일제의 전초작업으로 시정 5주년 기념사업인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면서 헐게 된 것인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정(修政)’은 ‘정사를 잘 수행함’이란 의미로 현판글씨는 중건 당시 조석원이 썼으며, 조선 후기 문신으로 도승지에까지 이르렀으며, 글씨에 조예가 깊었다.
구조
경복궁 근정전 서편의 외조공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로 다른 궁궐의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넓은 월대(月臺)를 갖춘 장대한 건물외관, 가구부재 등이 중건 당시의 모습을 현재까지도 잘 유지하고 있다.
건물은 고종 때 중요한 자료인 궁궐지에는 수정전과 이에 부속된 행각의 명칭, 규모, 양식, 주칸 등이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으며, 정면 10칸, 측면 4칸의 비교적 긴 장대한 건물로 남향으로 앉혀진 1고주 7량가의 이익공양식 단층 팔작지붕이다.
수정전 정면에는 네 벌대의 넓은 월대가 조성되어 있다. 월대에는 정면에 계단을 3곳 설치하였고, 중앙의 계단은 소맷돌을 두어 좌우계단과 차별화시켰으며, 이것은 임금의 출입이 자주 있는 편전임을 의미한다. 다섯 벌대나 되는 높은 건물기단 위에는 4각 초석위에 각기둥을 세우고 띠살창 분합문과 빗살창교창을 사방 전면으로 둘러 설치하였다.
높은 기단의 좌우 측면에는 불을 넣는 아궁이를 설치하여 온돌방을 두었다.
평면은 정면 10칸, 측면 4칸으로 앞면 퇴칸 주간을 넓게 하여 10칸의 도리방향을 모두 대청으로 터져 있으며 좌우 및 후면의 퇴칸이 연결되어 내부 회랑 역할을 한다.
공포는 길게 뻗은 쇠서의 이익공 위에 소로를 높고 양봉한 보머리를 받으며 주심도리를 받아준다.
지붕의 용마루 및 내림마루엔 양성을 하고 취두, 잡상을 배열했다. 건물의 짜임이 견고하고 창의력 있는 구조다.
지정 가치
수정전은 외관, 가구부재 등 전반적으로 양호한 상태로 중건 당시의 모습이 잘 유지되어 있다. 또한 임진왜란(1592) 이전에는 한글창제의 본산인 집현전으로 사용되었으며, 고종 중반 우리 역사의 대격변기(1890년대)에 여러 제도가 급변할 때 중추적 역할을 했던 건물로서 사회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또한 광화문에서 근정전 서편에 해당하는 외조공간에서 궐내각사가 모두 훼철되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로 역사적, 건축적 가치가 높다.]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조선시대에 연회를 하거나, 외국의 사신(나라의 명을 받고 다른 나라로 파견되는 신하)을 접견하던 곳으로, 지금의 청와대 영빈관에 해당된다.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앞면 7칸·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누각건물에서 많이 보이는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태종 때 처음 지어진 경회루는 성종 때 고쳐 지으면서 누각의 돌기둥을 화려하게 용의 문양을 조각하였다고 전해지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고종대에 다시 지으면서 지금과 같이 간결하게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안쪽에는 둥근기둥을 세웠다. 1층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2층 바닥은 마루를 깔았는데, 마루의 높이를 3단으로 각각 달리하여 지위에 따라 맞는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경복궁 경회루는 우리 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 누각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
역사와 구조
임진왜란 이전
원래의 경회루는 경복궁 창건 당시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세운 작은 누각이었는데,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고 건물도 다시 크게 짓도록 명하여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이 완성하였다. 초기의 모습은 《궁궐지》, 《태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 전한다.
이후 성종 6년(1475)에 근정전, 광화문, 흥례문의 기와를 청기와로 덮으며 경회루도 증축한다. 연산군 대에는 경회루를 화려하게 치장했다가 중종이 기물들을 헐어냈다. 중종은 경복궁의 다른 건물들과 격이 맞도록 경회루에도 청기와를 올리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임진왜란 전의 경회루는 유득공의 《춘성유기(春城遊記)》에 "남아 있는 경회루의 돌기둥은 그 높이가 세 길(10m)이나 되고 모두 마흔 여덟 개인데. . ."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흥선대원군 때 다시 지은 경회루와 같은 규모인 정면 7칸, 측면 5칸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3층 구조에 높이는 100척에[주해 1] 48개의 돌기둥에 승천하는 용들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한다. 《용재총화》에서는 류큐국의 사신이 조선의 세 가지 장관 중에 하나로 경회루 돌기둥을 꼽으면서 이르기를 ‘돌기둥에 가로세로 그림을 새겨 놓아서 용이 거꾸로 물 속에 그림자를 지어 푸른 물결과 붉은 연꽃 사이에 보이기도 하고 숨기도 하는’ 모습을 들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이는 고종 당시 중건할 때 반영되지 않는다.
방지 서쪽에 만세산(萬歲山)이 조성되어 전국의 화려한 꽃들을 심고 봉래궁(蓬萊宮), 일궁(日宮), 월궁(月宮), 벽운궁(碧雲宮) 등 상징적인 작은 모형궁을 만들고 금·은·비단으로 장식하였다고 한다. 또 연못 속에는 연꽃을 띄우고 산호(珊瑚)를 꽂아 놓고 황룡주(黃龍舟)란 유선(遊船)을 타고 왕이 만세산(萬歲山)을 왕래하였다. 때로는 금과 은으로 장식한 비단꽃과 동물 모양의 등을 물 위에 띄우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밤이 낮같이 밝을 정도로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현재의 경회루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서 돌기둥만 270여 년 남았던 것을 경복궁을 중창할 때 재건한 것으로, 고종 4년(1867) 4월 22일에 상량하였다. 재건 후 130여 년이 지난 1999년 지붕 일부를 해체 수리하였다.
새로 지은 건물로서 경복궁의 편전(便殿)인 사정전과 천추전(千秋殿)의 서북방에 위치하고 있다. 경회루는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가 되는 인공으로 만든 커다란 방형 연못 안 동쪽에 치우쳐 있는 네모난 섬 위에 지은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다. 건물 하층의 바닥은 네모난 전돌을, 상층 바닥은 장귀틀과 결합하는 동귀틀이 각 칸에 하나로 구성된 장판자를 깔았고, 동쪽과 서쪽에는 하층에서 상층에 오르내릴 수 있도록 계단을 두었다. 1층 천장, 2층 마루의 귀틀 밑부분은 소란우물천장을 꾸미고 화려하게 단청해 놓았다. 경회루 서쪽으로 있는 네모난 섬 두 개는 당주(當洲)이며, 이곳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경회루는 둘레를 장대석으로 축대를 쌓아 기단을 삼은 네모 반듯한 섬 위에 세워졌으며, 세 벌로 조성된 돌다리를 통하여 연결되는데, 남쪽의 것이 임금을 위한 다리다. 다리의 돌난간과 네 귀는 짐승 모양의 조각으로 장식되었고, 섬을 이루는 돌 기단 둘레에도 돌난간이 둘러있고, 모퉁이마다 돌로 조각한 12지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돌난간은 하엽동자(荷葉童子)와 팔각의 돌란대로 구성되었다. 기단의 서쪽으로는 계단을 두어 연못에서 배를 탈 수 있도록 하였다. 연못 둘레에는 석연지, 연화대 등의 석조물과 이무기 형상을 새긴 석루조가 있고 경회루 난간과 돌다리 기둥에는 여러 가지 형상의 짐승들이 조각되어 있다.
현재의 경회루 1층 부분은 민흘림을 한 높은 사각 돌기둥이 외부 둘레에, 원형의 돌기둥이 내부에 배열되어 있고, 2층 부분은 나무기둥으로 조영되어 있다. 1·2층 바닥에는 모두 건물 공간 사용의 위계를 표시하기 위해, 바깥보다 안쪽의 바닥을 조금씩 높였고, 2층에서는 중앙부분의 바닥을 더 높여서, 외진(外陳)-내진(內陣)-내내진(內內陣)을 형성했다. 2층의 세 공간 사이에는 분합문을 달아 공간의 위계를 명확히 했고, 필요에 따라 들어올려 하나의 공간으로 사용토록 했으며, 상부에는 광창을 달았다. 현재 내진과 내내진 사이에 문은 없고, 문선만 있다. 2층 둘레로는 계자난간을 설치했고, 기둥과 창방 아래 부분에는 당초문의 화려한 낙양각을 달았다. 이 곳 2층에서는 북쪽으로 백악, 서쪽으로 인왕, 남쪽으로 남산을 멀리 볼 수 있어서 이 곳이 자연과 함께 하며 연회를 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2층 상부의 가구(架構)형식은 11량 구조로 복잡하게 구성되었지만, 치밀하고 합리적으로 결구되어 있다. 공포는 출목이 없는 이익공이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을 얹어서 하중을 균등하게 분포시켰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내부 공간의 규모에 비해 매우 거대하다. 팔작지붕의 내림마루·추녀마루·용마루는 모두 회반죽을 바른 양성을 하였는데,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를, 내림마루와 추녀마루가 만나는 부분에는 용두를,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와 잡상을 배열하였다. 사래 끝에는 토수를 설치했으며, 지붕 합각면에는 풍판과 쫄대를 사용하여 판벽을 구성하였다.
고종 때 재건된 경회루는 당시 유가(儒家)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건설되었는데, 그 내용은 정학순(丁學洵)이 경복궁 중건 후인 1865년에 쓴 《경회루전도(慶會樓全圖)》에 나타나 있다. 1층 내부 기둥을 원기둥, 외부 기둥을 사각기둥으로 한 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나타낸다. 2층 기둥은 외진주만 사각기둥이고, 내진주는 모두 원기둥이다. 외진-내진-내내진 3겹으로 구성된 2층 평면의 제일 안인 내내진은 세 칸으로 이루어져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상징하고, 이 세 칸을 둘러싼 여덟 기둥은 천지 만물이 생성되는 기본인 《주역(周易)》의 팔괘(八卦)를 상징한다. 제일 안 세 칸을 둘러싼 다음 겹인 내진은 12칸인데 1년 12달을 상징하고, 매 칸마다 네 짝씩 16칸에 달린 64문짝은 64괘를 상징한다. 가장 바깥을 둘러싼 24기둥은 1년 24절기와 24방(方)을 상징한다. 이와 같이 경회루는 당시 유가의 세계관을 건축 형식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경회루에는 불을 잡아먹는 짐승인 불가사리 둘을 금속으로 제작하여 연못 속에 넣어 화기(火氣)를 막으려고 했다는 것을 정학순은 기록하였는데, 이 상징물 하나가 최근 경회루 방형 연못을 청소하면서 나왔다. 방형 연못 서북쪽으로 돌기둥 두 개가 물 속에 담겨 있는 육각형 평면의 하향정(荷香亭)은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평가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건물이다. 이와 같이 거대한 규모의 건물을 물 속에 인공으로 조성한 섬에 세웠으면서도 그 기초를 견고히 하여 건물이 잘 견디게 처리한 점, 거대한 건물을 이익공의 간결한 법식으로 처리하면서도 왕실의 연회장소로 합당하게 잘 치장한 점, 2층 누에서 주변 경관으로 인왕산·북악산·남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게 처리한 점, 1층 건물 주변을 돌며 연못의 물과 섬을 바라보며 감상토록 한 점 등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경복궁 강녕전(景福宮 康寧殿)
경복궁의 내전으로 임금의 침전(寢殿)으로 사용되었던 공간.
강녕전은 경복궁 사정전 뒤편에 위치한 임금의 침전(寢殿)으로, 왕이 일상을 보내던 공간이다. 전각의 명칭인 '강녕(康寧)'은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나오는 오복(五福)에서 따왔으며 '근심 걱정 없이 안녕함'이라는 뜻이다. 전각의 이름은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지었고, 현판의 글씨는 1995년 강녕전을 복원할 때 서예가 김응현(金膺顯. 1927~2007)이 썼다.
역사
1395년(태조 4) 경복궁 창건 당시에 처음 지어진 전각으로, 임진왜란 이전까지 왕의 침전과 각종 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1553년(명종 8) 경복궁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에 중건되었고,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과 함께 완전히 소실되었다.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강녕전도 새로 지어졌으나, 1876년(고종 13) 화재로 다시 소실되었고, 1888년(고종 25)에 다시 복원하였다. 강녕전이 복원된 이후에는 주로 외국 공사를 접견하거나 연회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의 내전을 복구하기 위해 강녕전을 해체하여 창덕궁 희정당의 부재로 사용하였고, 이후 강녕전 터는 빈 터로 남게 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 경복궁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역사바로잡기의 일환으로 1996년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훼손된 경복궁의 전각들을 복원하였다. 경복궁 1차 복원 사업은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1년 동안 진행되었는데, 강녕전 및 침전 권역 복원은 1995년에 완공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구조 및 형태
정면 11칸, 측면 5칸 규모의 건축물로,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월대와 기단을 만들었다. 방형의 주춧돌 위에 사각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이익공 형식의 공포를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는 없으며, 박공마루,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하였고, 용두와 잡상 등을 설치하여 지붕 위를 장식하였다. 양 측면의 툇마루 부분은 장주초석을 세워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했다. 강녕전의 내부는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청이 놓여있고,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경복궁 교태전(景福宮 交泰殿)
경복궁의 내전으로 왕비의 침전(寢殿)으로 사용되었던 전각.
건립자 : 조선 세종
건축양식 : 익공계 목조건축
규모 : 정면 9칸, 측면 4칸
별칭 : 중전, 중궁
경복궁 강녕전 뒤편에 위치한 왕비의 침전(寢殿)으로, 왕비가 일상을 보내던 공간이다. 전각의 명칭인 '교태(交泰)'는 《주역(周易)》의 64괘 중 11괘인 '태괘(泰卦)'의 '천지교태(天地交泰)'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늘과 땅의 기운이 조화롭게 화합하여 만물이 생성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현판의 글씨는 완림군 이재원(李載元,1831 ~ 1891)이 썼다.
역사
세종대에 지어진 전각으로, 조선 초기에는 왕비의 침전이 아닌 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논의하고 연회를 베푸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1553년(명종 8) 경복궁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듬해에 중건되었고,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경복궁과 함께 완전히 소실되었다.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교태전도 새로 지어졌고, 이때부터 교태전이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1876년(고종 13) 화재로 다시 소실되었으나, 1888년(고종 25)에 다시 복원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의 내전을 복구하기 위해 교태전을 해체하여 창덕궁 대조전의 부재로 사용하였다.
1990년대 들어서 경복궁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역사바로잡기의 일환으로 1996년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훼손된 경복궁의 전각들을 복원하였다. 경복궁 1차 복원 사업은 1990년부터 2010년까지 21년 동안 진행되었는데, 교태전 및 침전 권역 복원은 1995년에 완공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구조 및 형태
정면 9칸, 측면 4칸 규모의 건축물로,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만들었다. 방형의 주춧돌 위에 사각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이익공 형식의 공포를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는 없으며, 박공마루,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하였고, 용두와 잡상 등을 설치하여 지붕 위를 장식하였다. 기단의 양 끝에는 작은 초록색 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문 안에는 아궁이가 위치한다. 교태전의 내부는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대청이 놓여있고,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부속 건물
교태전은 강녕전과 같이 하나로 된 독립된 건물과 달리 우측 측면으로 진료를 맡아보았던 원길헌이 있고, 좌측으로는 함홍각이 있으며 후면 아미산이 있는 쪽으로는 중전의 산실로 쓰였던 건순각 등 여러 건물들과 붙어 있다.]
[경복궁 원길헌(景福宮 元吉軒)
위치와 연혁 : 경복궁 원길헌(景福宮 元吉軒)은 교태전의 동쪽에 붙어 있는 건물이다. 교태전과 이어져 있다. 교태전을 중건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1891(고종 28)년에 이 곳에서 약원(藥院)들이 진료를 했다[入診]는 일성록의 기사가 있다.
뜻풀이 : ‘원길(元吉)’은 ‘크게 선하여 길하다’는 의미이다. ‘원(元)’은 ‘크게 선하다’는 뜻이다. 『주역』 태괘, 곤괘 등에서 유래한다. 태괘의 효사(爻辭)에서‘육오(六五)’를 설명하며 “육오는 제을(帝乙)이 여동생[어린 딸]을 시집보냄이니, 이로써 복을 받을 것이며 크게 선(善)하여 길(吉)하리라.”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본의』에서는 “음(陰)으로서 높은 지위에 거하여 태괘(泰卦)의 주체가 되고 유중(柔中)으로 자기 마음을 겸허하게 하여 아래로 구이(九二)에 응하니 길(吉)한 도(道)이다. 제을(帝乙)이 여동생을 시집보낼 때에도 일찍이 점을 쳐서 이 효(爻)를 얻었으니, 점치는 자가 이와 같이 하면 복(福)이 있어서 크게 선하여 길할[元吉] 것이다.”라고 하였다. 곤괘에서도 ‘원길(元吉)’과 관련된 내용이 육오 효사에 나온다. “육오는 황색(黃色) 치마처럼 하면 크게 선(善)하여 길(吉) 하리라.”라고 하였다. 『정전(程傳)』에서는, “황(黃)은 중앙의 색깔이요, 치마는 아래에 입는 옷이다. 중도(中道)를 지키고 아래에 거하면 크게 길할 것이니, 분수를 지킴을 말한 것이다. 원(元)은 크고 선(善)한 것이다.”라고 풀이했다.]
[경복궁 함원전(景福宮 含元殿)
경복궁 교태전의 서쪽, 흠경각의 북쪽에 위치한 전각이다. 전각의 명칭인 함원(含元)은 '원기(元氣)를 간직한다.'라는 뜻이고, 현판의 글씨는 1888년(고종 25)에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지낸 이명재(李命宰, 1838~1895)가 썼다.
역사
세종 때에 처음 지어진 건축물이다. 단종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 전 노산군(魯山君) 시절에 거처했던 곳이었으며, 세조는 이곳을 법당(法堂)으로 만들고 불교 법회(法會)를 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경복궁과 함께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새로 지어졌다. 1876년(고종 13) 경복궁 화재로 다시 한번 소실되었다가 1888년(고종 25)에 복구되었다. 이후 1917년 화재로 훼손된 창덕궁을 복구할 때 경복궁의 전각을 사용하게 되면서 1920년 함원전은 또 다시 철거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 경복궁 복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1995년 경복궁의 침전 영역과 함께 다시 복원되었다.
구조 및 형태
정면 6칸, 측면 4칸 규모의 건축물로,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만들었다. 방형의 주춧돌 위에 사각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익공 형식의 공포를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박공마루,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하였고, 망새와 용두, 잡상 등을 설치하여 지붕 위를 장식하였다. 전각의 중앙에는 대청마루를 두었고, 양 옆으로 온돌방을 설치하였다.]
[동궁(東宮)
목차
1) 계조당(繼照堂), 춘방(春坊), 계방(桂坊)과 그 주변 건축(周邊建築)
2) 비현각(丕顯閣)과 자선당(資善堂) 및 등촉방(燈燭房), 수라간[水刺間] 등
궁궐 내에는 왕세자의 궁인 동궁(東宮)을 마련하여 세자와 세자빈을 거처하게 한다. 궐내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정전, 편전, 침전의 전각들을 갖추어 작은 궁궐과 같은 모습을 이룬다.
1) 계조당(繼照堂), 춘방(春坊), 계방(桂坊)과 그 주변 건축(周邊建築)
근정전의 동쪽, 궁성의 동문인 건춘문(建春門)의 안쪽 터에는 계조당(繼照堂)과 '금무'(今無)라 표기된 춘방(春房), 주방 등 여러 채의 건물들이 〈북궐도형〉에 그려져 있다.
계조당은 남쪽과 동쪽에 행각을 두르고 서쪽과 북쪽에 담장을 쌓았는데, 그 평면은 정면 5간 측면 3간으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전후좌우에 툇간을 둔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계조당은 세자의 수조당(受朝堂: 세자가 신하들의 조하를 받는 곳)이다.
계조당의 북쪽에는 행랑과 담장으로 둘러쌓은 곳에 여러 채의 건물들이 각 마당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중 춘방(春坊)은 정면 4간 측면 2간으로 중앙 2간 폭은 대청이고 좌우 1간 폭은 방이라 추측되는데, 이곳은 왕세자의 시강원(侍講院)이다. 춘방 앞 남쪽의 계방(桂坊)은 익위사(翊衛司)의 별칭으로 세자의 시위를 맡던 관아인데 태조 때 두어 고종 32년(1895)에 폐하였다.
춘방과 계방의 서쪽에는 문기수청(門旗手廳)이 있는데, 훈련도감에 속하였던 군사인 문기수들이 있던 청으로 후일에는 궁내의 심부름을 맡아 하였다. 문기수청(門旗手廳)의 서쪽에는 궁궐문 옆에서 숙직하며 호위하던 무예별감(武藝別監)의 으뜸장수 통장(統將)의 관아인 통장청(統將廳)이 자리 잡고 있는데, '금무'(今無)라 명기되어 있다.
춘방의 북쪽 터에는 동에서 서로 나아가면서 행랑으로 둘러싼 3채의 건물이 나란히 서 있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원역처소(員役處所)이고, 세 번째가 오상방(五相房)이며, 모두 '금무'(今無)라 표기되어 있다. 원역(員役)은 이서(吏胥)의 하나인 아전(衙前)으로, 이들의 처소는 고종 때 복원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오상방(五相房)은 고종 때 악공(樂工)들에게 처용무(處容舞)를 가르치던 장악원(掌樂院)의 한 부서이다.
2) 비현각(丕顯閣)과 자선당(資善堂) 및 등촉방(燈燭房), 수라간[水刺間] 등
비현각과 자선당은 궁궐 동쪽 담장에 건립한 작은 대문인 연청문(延淸門)의 서북쪽이자 오상방의 북쪽인, 사정전(思政殿)의 동쪽 터에 자리 잡고 있다.
비현각(丕顯閣)은 정면 6간 측면 2간의 장방형 평면으로 동쪽에 앞뒤로 방을 두고 그 서쪽으로 정면 3간 측면 2간의 대청, 다음 정면 1간 측면 2간의 방, 다시 전후 방 1간씩을 두었다. 조선 초기의 비현각에 세조(世祖)가 납시어 세자로 하여금 성균관 유생들을 불러 강서(講書)하게 하고 또 질문도 하게 하였는데, 바로 이 당이 왕세자의 편전(便殿)이기 때문이다.
비현각의 서쪽 자선당(資善堂)은 정면 7간 측면 4간의 장방형평면을 이루는 전각으로 중앙에 대청, 그 좌우로 방을 두고, 주위를 툇마루와 협실로 둘러싸고 있는 동궁의 침전(寢殿)이다.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일차적으로 복원되었으나, 그 후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중건된 것이다.
비현각과 자선당의 외곽은 장방형 행랑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행랑은 방과 청, 아궁이부엌[廚]으로 구성되었다. 또 비현각 서쪽 행랑과 자선당 동쪽 행랑 사이에 측간(厠間)들이 3간 있고, 비현각 동쪽에 수라간(水刺間) 등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궁을 모신 궁중 나인들이 거처하던 곳이라 생각된다.
비현각 동쪽에는 건물 좌우와 남쪽을 둘러싼 3개의 마당을 형성하는 두 채의 건물이 남과 북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남쪽 동으로부터 장방(長房), 등촉방(燈燭房), 수라간(水刺間)이라 하고, 북쪽은 3개의 마당 모두에 장방(長房)이라 하였다. 이들은 방과 청, 부엌으로 구성되었는데, 장방은 서리(書吏)가 있던 처소이고, 등촉방은 궐내에서 쓰는 등촉을 관장하던 곳이며, 수라간은 동궁에 올리는 음식을 전담하던 곳이다.]
[경복궁 소주방(景福宮 燒廚房)
조선시대 임금의 수라와 궁중의 잔치음식 등을 장만하던 경복궁의 부엌이다.
경복궁에서 음식을 조리·보관·제공하던 공간으로, 흔히 수라간이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소주방과 수라간은 같은 의미로 쓰이지만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의 문헌에는 두 공간을 구분하여 소주방은 음식을 조리하는 기능, 수라간은 음식을 차리는 기능이 강하다고 기록하였다.
1395년(태조 4) 경복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다. 1867년(고종 4)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세워졌고, 일제강점기인 1915년 일제가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 일제가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개최한 일종의 박람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경복궁의 여러 전각과 함께 헐려 없어졌다. ‘경복궁 2차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11년 10월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2015년 1월 건물 17동의 복원이 완료되었고, 같은 해 5월 일반에 공개되었다.
소주방 복원은 2004년 주요 건물과 부속시설물의 배치상태와 규모 등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실시한 소주방지(燒廚房址) 발굴조사와 《조선왕조실록》, 《조선고적도보》, 《궁궐지》, 《왕궁사》, 《북궐도》 등의 고문헌 고증을 거쳐 이루어졌다. 한편 건물터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유물은 기와류 144점, 도자기류 227점, 금속류 46점, 기타 3점 등 총 420점에 이른다.
소주방은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 동쪽, 대비의 침전인 자경전 남쪽, 동궁인 자선당과 비현각 북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내소주방, 외소주방, 생물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소주방(內燒廚房)은 왕과 왕비 등이 먹는 아침 수라와 낮것상이라고도 하는 점심 수라, 저녁 수라 등 일상식을 만들던 공간으로, 안소주방이라고도 불린다. 일상 주식과 각종 찬품(반찬)을 만들고, 간식은 생과방의 협조를 얻어 같이 올렸다. 건물은 정면 9칸, 측면 2칸에 동·서행각 각각 5칸과 남행각 9칸이 연결되어 있는 구조이다. 그밖에 동외행각 6칸과 남외행각 15칸, 창고 2칸이 딸려 있고, 우물도 있다.
외소주방(外燒廚房)은 연회음식을 장만하던 공간으로, 밖소주방 또는 난지당(蘭芝堂)이라고도 불렀다. 정월, 단오, 추석, 동지 등의 명절과 궁 안 왕족 및 궁 밖 종친의 생일, 왕족의 관례나 가례 때 올리는 잔칫상을 준비했다. 건물은 정면 11칸·측면 2칸에 동·서행각 각각 5칸과 남행각 13칸이 연결되어 있는 구조이다. 그밖에 동외행각 13.5칸과 남외행각 15칸이 딸려 있다.
생물방(生物房)은 생과, 숙실과, 조과, 차, 화채, 죽 등 임금의 별식과 휴식을 준비하던 공간으로, 복회당(福會堂), 생과방, 생것방이라고도 불렀다. 왕가의 친척이나 손님이 왔을 때에도 다과상을 차려 올렸다. 건물은 정면 11칸·측면 2칸에 동·서행각 각각 5칸, 남행각 9칸이 연결되어 있는 구조이다. 그밖에 동외행각 23칸이 딸려 있다.]
[경복궁 자경전(景福宮慈慶殿)은 조선 후기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 재건사업을 하던 고종 4년(1867년) 대왕대비 조씨를 위하여 경복궁에 지은 전각으로, 고종 10년 12월 화재로 불탄 것을 고종 25년(1888년)에 다시 지었다.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 보물 제809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경복궁 자경전은 왕비의 정침인 경복궁 교태전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왕이 승하하면 교태전에 있던 왕비는 대비(大妃)로 승격되어 정침인 교태전을 새로 중전이 된 왕비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이때 대비가 주로 사용하던 곳이 자경전이다. 현재의 자경전은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고종 2년(1865년)에 자미당(紫微堂) 터에 조대비(趙大妃, 神貞翼皇后)를 위해 지은 것이다. 준공 후 고종 10년(1873년) 12월 화재로 인해 고종 13년 다시 세웠으며, 다시 불에 탄 것을 고종 25년(1888년)에 재건하였다. 현존하는 침전 가운데 옛 모습을 간직한 유일한 건물이다.
구조와 쓰임새
자경전 서북쪽에 설비된 침방(寢房)인 욱실을 둔 복안당(福安堂)은 겨울을 위한 공간인데 정면 5칸 반, 측면 2칸이다. 중앙부에 있는 정면 10칸, 측면 2칸, 전·후 툇간의 자경전은 낮시간에 거처하던 공간이고, 동남부의 다락집 청연루(淸讌樓)는 누마루가 돌출되어 여름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곳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이며, 동쪽의 정면 6칸, 측면 2칸의 협경당(協慶堂)은 시녀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전면 마당 동·남·서쪽에는 각각 동행각·남행각·서행각이 일곽을 이루며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자경전 뜰 앞 좌측에는 돌짐승 조각상이 있고, 우측에는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건물의 중심되는 곳의 평면은 교태전과 같이 중앙에 커다란 대청을 두고 그 왼쪽과 오른쪽으로 커다란 온돌방을 둔 침전의 기본 형식을 갖추었다. 협경당 전면은 담으로 구획하여 자경전과 구분되지만, 후면은 건물이 한 몸으로 이어져 있다. 그러나 기단 높이와 지붕 용마루 높이를 자경전보다 낮게 하고 공포도 몰익공으로 간략하게 하여 자경전에 비해 격식을 낮추었다.
자경전 건물은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를 한 높은 기단 위에 네모뿔대의 다듬은 초석을 놓고 사각기둥을 세워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하였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직접 놓아 끝이 날카로운 수서를 낸 출목이 없는 이익공으로 결구되었고, 겹처마를 걸어 지붕을 받도록 하였다. 쇠서와 보머리에는 초각을 하였고, 안쪽으로는 조각된 보아지를 내었다. 주두 위에는 도리 방향으로 첨차를 놓아, 소로를 얹어 굴도리의 장혀를 받치고 있다. 도리 밑에 보 방향으로 화반을 놓아 도리를 받게 하였다. 가구(架構)는 앞면과 뒷면의 퇴주(退柱)와 안쪽의 고주 사이에는 툇보를 걸었으며, 내부의 두 고주 사이에는 대들보를 걸고 그 대들보 윗면에 우물천장을 가설하여 천장 속을 가리고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합각면은 전돌로 마감하였다.
전면 중앙 3칸은 전퇴(前退)를 개방하여 마루를 깔았고 기타 부분과 청연루·협경당의 외부 기둥사이에는 모두 띠살창호를 설치하였다. 청연루 누마루는 높직한 돌기둥이 받치고 있다. 전면 기둥에는 주련(柱聯)을 달아 운치를 돋구었고, 후면에는 단(段)을 둔 쪽마루를 두었다. 지붕마루는 모두 양성을 하였으며, 취두·용두·잡상을 얹었다.
자경전 전면(前面)을 둘러싼 동·서·남 행각은 무익공(無翼工) 3량 구조로 내정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띠살문을 설치하였고, 외측벽은 두벌대의 장대석 위에 사괴석으로 아랫부분을 쌓고 그 상부에는 광창을 달았다. 남행각 중앙에는 정문인 만세문(萬歲門)이 나 있다. 자경전 후원(後園) 북쪽 담과 이어진 굴뚝에는 왕족의 장수와 건강을 기원하는 십장생(十長生) 무늬가 베풀어졌고, 서쪽 벽돌담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길상문자가 액자처럼 조성되어 있다.]
[경복궁 흥복전(景福宮 興福殿)
흥복전은 원래 왕의 후궁들이 살던 공간인 빈궁嬪宮이었다. 신정왕후 조대비趙大妃(1808~1890)가 1890년(고종 27년) 4월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을 중건하기 위해 흥복전 일곽이 철거됐으며,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는 일본식 정원을 조성하였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1868년(고종 5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처음 건립했다. 완전히 새 건물을 지은 건 아니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창의궁의 함일재를 옮겨 지었다고 전한다. 경복궁 중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강녕전, 교태전 등 내전의 주요 건물들이 2차례에 걸쳐 불타 없어지자, 임금이 사용하면서 경연, 신하들과 외국 공사를 만나는 등 공식적인 업무와 행사를 하는 공간이 되었다. 이후 효명세자의 부인이자 고종의 양어머니 신정왕후 조씨가 머물렀고 이 곳에서 승하했다.
문화재청은〈경복궁 복원 2차 계획 사업〉의 일환으로 2015년 9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총 174억원을 들여 약 3년 3개월에 걸쳐 복원 공사를 진행했고 2019년 7월에 시범 개방했다.
궁궐 복원 역사상 처음으로 현대식 화장실과 빔 프로젝터, 전기 시설을 설치하여 화제가 되었다. 단순히 보존만 하는 게 아닌, 회의, 교육, 공연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하기 위함이라고. 사실 예부터 보존 된 건물을 건드린 것도 아니니 큰 문제는 없고, 박제된 궁이 아닌 시민들의 살아있는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전기 시설 등 화재 위험 요소와 관련하여 보다 철저한 관리 방안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현대시설 갖춘 ‘경복궁 흥복전’ 복원문화 새 방향 제시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세계일보 기사 입력일 : 2019-07-16
고종이 사신 접견했던 전각… 1867년 건립 / 1917년 창덕궁 재건때 목재 사용위해 헐어 / 10일 개방… 단청은 2022년 이후 칠하기로 / 냉·난방, 현대식 화장실, 빔프로젝터 설치 / 문화재 관리 원칙 원형보존 최선이지만 / 건축물 특성에 맞는 활용방안 마련 필요
지난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청와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경복궁을 찾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방문 장소 중 하나로 경복궁을 염두에 두고 사전 확인차 들른 것이다. 경회루 등을 둘러본 정 실장을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관계자들이 단청 작업을 제외하고 최근 복원을 사실상 마무리한 흥복전으로 이끌었다. 내부시설까지 꼼꼼하게 체크한 정 실장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일정 때문에 경복궁 행사가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정 실장의 경복궁 방문, 궁능본부의 흥복전 소개 등은 궁궐과 같은 고건축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최근의 인식과 방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흥복전이 냉·난방시설, 현대식 화장실, 전기시설, 빔프로젝터 등 고건축과는 어울리지 않는(?) 현대적 장비를 갖추어 복원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문화재 관리의 대전제인 원형에 다소 변형을 주어서라도 건축물의 성격에 맞는 활용을 적극 모색하겠다는 분명한 신호인 셈이다.
◆빔프로젝터 갖춘 궁궐 전각, 회의장 등으로 활용 기대
흥복전은 고종(재위 1863∼1907)이 외국 사신을 접견한 경복궁의 전각이다. 1867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건립됐으며, 고종의 등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신정왕후가 1890년 승하한 장소이기도 하다. 큰불이 난 창덕궁의 침전 권역을 재건할 때 경복궁의 전각 일부를 옮겨 사용했는데 1917년 교태전, 강녕전, 함원전, 만경전과 함께 흥복전도 헐렸다. 2015년 복원이 시작돼 2019년7월10일 시범개방된 흥복전은 현판을 달지 않았고, 단청도 2022년 이후에나 칠할 것으로 보이지만 경복궁의 전각으로서 위엄과 품격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외관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것은 언뜻 보면 궁궐 전각에는 어색해 보이는 내부의 현대적 장비다. 복원된 흥복전을 단순히 관람의 대상으로만 두지 않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설계단계부터 포함했다. 궁능본부는 교육장소나 세미나, 각종 회의 등의 장소로 이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흥복전은 본전과 행각(行閣·궁궐, 절 등의 주요 건물 좌우에 지은 행랑)을 합쳐 전체 615㎡이고, 회의장 등으로 활용 가능한 본전은 250㎡로 50여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게 궁능본부의 설명이다.
현대적 장치를 설치해 활용도를 높인 경복궁의 건물로 소주방이 있다. 1915년 일제가 훼손하고 꼭 100년 만인 2015년 복원된 소주방에는 전기설비를 복원 작업이 끝난 뒤 추가했다. 경복궁의 주방 역할을 했던 소주방의 특성을 살려 전통음식 시식행사 등이 자주 열리는데, 음식 준비를 위해 전기설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흥복전이 안성맞춤의 전통공연 장소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대청이나 방을 이용하면 무용의 호흡, 선 등을 생생하게 느끼며 관람이 가능하고, 마당에서 벌어지는 공연을 실내에서 감상하는 전통의 방식을 재현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구조라는 것이다. 한 전통공연 전문가는 “예전에는 마당에서 하는 공연을 실내에 앉아 보는 형식이었고, 발디딤새 하나까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공연자와 관람객의 거리가 가까웠다”며 “이런 방식을 구현할 수 있는 공연장이 없다시피 한 게 현실인데, 흥복전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건축물 특성 감안한 활용 방안 적극 고려해야”
복원된 전통 건축의 활용을 위해 현대적 장비를 갖추는 게 익숙한 시도는 아니다. 경복궁처럼 역사적, 문화재적 가치가 큰 곳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문화재 정책의 대전제인 ‘원형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보면 현대적 장비의 설치는 원형의 변화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경복궁 자선당이 이런 사례 중 하나다. 자선당은 세자의 생활·교육 공간으로 일제강점기에 훼철된 것을 1999년 복원했다. 궁궐 전각의 활용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했던 때라 건물을 본모습대로 되살리고, 그것을 유지하는 데 관심이 집중됐다. 활용을 위해 원형과 다른 설비를 하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었던 것은 당연지사. 자선당은 지금도 외부 관람만 가능할 뿐 내부 관람은 제한되고 있다.
물론 보수, 복원을 하는 전통 건축물 모두에 현대적 장비를 설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활용보다는 엄격한 원형 유지에 역점을 두어야 하는 대상도 많기 때문이다. 일단 흥복전처럼 없어졌던 건물을 새로 짓는 경우에는 활용을 위한 설비를 갖추는 것을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활용의 내용이 건물의 성격에 부합하는가도 살펴야 한다. 궁능본부 이정연 과장은 “해당 건물이 당대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감안해서 활용의 방식을 결정하고, 그에 맞는 최소한의 설비를 마련해야 할 것”이라며 “국보, 보물 등으로 지정돼 잘 보존되고 있는 건물에 변형을 가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한 고건축 전문가는 “건물의 원래 성격을 유지하는 범위에서 내부의 변형을 허용해야 한다. 예전처럼 원형만 고집할 경우 문화재 활용은 크게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보였다.]
[경복궁 함화당(景福宮 咸和堂)
후궁 권역에 있어 후궁들의 처소였다는 설도 있었다. 그러나 2007년 함화당 수리 도중 상량문을 발견하여 정확한 용도를 확인했다. 고종의 침전으로 지은 것이다.
함화당 · 집경당 일대는 당시 고종이 머물던 건청궁과 가까웠다. 왕의 침전을 후궁 영역에 굳이 지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함화당과 집경당을 후궁 권역보다는 건청궁과 하나로 묶이는 공간으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하다.
고종은 함화당을 신하들을 만나 나랏일을 의논하는 곳으로 사용했다. 1892년(고종 29년)부터는 외국 공사 접견소로도 활용했다.]
[경복궁 집경당(景福宮 緝敬堂)
경복궁 향원정 남쪽에 위치한 전각으로, 고종이 신하들과 경서를 읽거나 외국 공사를 접견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전각의 명칭인 '집경(緝敬)'은 《시경(詩經)》의 대아문왕(大雅文王)편에서 유래한 것으로, '계속 공경한다.'라는 뜻이다. 현판은 따로 걸려있지 않다.
역사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에는 없었던 전각으로, 1890년(고종 27)에 새로 지은 것이다. 고종이 신하들과 경서를 읽고, 외국 공사를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사무실로 사용되었고, 1924년에는 조선민족박물관의 전시관으로 활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함화당과 집경당 사이의 담장과 주변 행각이 철거되었으나, 2008년 함화당과 집경당 주변의 행각이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구조 및 형태
정면 3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온돌방이 있고, 건물의 가장 서쪽으로 누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기단과 계단을 만들었고, 누마루의 경우 하부에 장주초석을 설치하여 누마루를 지지하고 있다. 공포가 설치되지 않은 민도리집 형태의 건축물로, 건물의 가장 서쪽에는 함화당과 연결되는 복도각을 설치하였다.]
[경복궁 향원정(景福宮 香遠亭)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복궁에 있는 누각(樓閣). 2012년 3월 2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0 (세종로)
경복궁 건청궁 남쪽에 위치한 누각(樓閣)으로, 누각은 사방의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 여러 층으로 지어진 건축물을 말한다. 전각의 명칭인 '향원(香遠)'은 '향기가 멀리 간다.'라는 뜻으로, 중국 북송시대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 1017 ~ 1073)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에서 참고하였다. 현판의 글씨는 고종이 직접 썼다.
역사
1885년(고종 22) 즈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건립 당시의 모습이 오늘날까지 잘 남아 있다. 향원정의 연못을 건너는 다리인 취향교는 6.25 전쟁 당시 훼손된 것을 1953년에 복원하였으나, 그 위치와 형태가 다르게 복원되었다. 2017년 향원정 보수공사를 하면서 취향교를 원래의 위치에 본래 모습으로 다시 복원하기로 하였고, 2021년에 복원이 완료되었다.
구조 및 형태
2층 규모의 건축물로, 누각의 평면은 정육각형이다. 장대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위에 육각형의 장주초석을 올렸다. 1·2층을 한 나무의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4분합 창문을 두었다. 공포는 익공계로 1출목 2익공 형태이며, 바닥의 가장자리에는 온돌이 설치되어 있다.
가치 및 의의
향원정은 고종이 휴식을 취했던 공간으로 경복궁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대표 건물이다. 심미성과 비례감이 뛰어나며 주변의 풍경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3월 2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건청궁(乾淸宮)은 경복궁 후원에 있는 궁궐이다. 1873년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등을 보관할 목적으로 지어졌다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이 있기까지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을미사변 이듬해인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일제는 1909년 건청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었는데, 이 미술관은 해방 후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철거됐다. 2007년 10월 18일 일제가 철거한 건청궁이 복원돼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건청궁 복원공사는 경복궁 복원·정비사업의 5단계 사업인 광화문 및 기타 권역 복원·정비계획의 일환으로 2004년 6월에 시작돼 3년 4개월 만에 완공됐다.
고종은 건청궁을 왕의 사비인 내탕금으로 건립했다. 고종이 흥선대원군을 벗어나 친정을 선언한 1873년에 지어졌다는 점 등으로 인해, 건청궁 창건은 정치적 자립 선언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건청궁은 창덕궁 연경당 및 낙선재와 더불어 일반 사대부의 저택과 유사하게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된 건축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왕의 거처인 장안당과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 그리고 부속 건물인 복수당 등이 배치돼 있다. 뜰에는 고종이 즐겨 먹었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고종시' 감나무가 경상남도 산청군의 기증으로 식재되어 있다.
2007년 복원 이후 목재가 썩는 등의 현상이 보였고, 조사 결과 지붕이 잘못 지어져 누수되는 것으로 알려져 부실 복원 논란이 일었다.
장안당
장안당(長安堂)은 고종황제의 침전이다. 사랑채의 개념으로 지어졌다. '오랫동안 평안하다'는 뜻의 장안당은 27칸, 측면 3칸, 7량의 건물이다. 장안당에는 북행각과 동행각이 딸려 있는데 북행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전기회사가 발전기를 설치해 한국 최초로 전깃불을 밝힌 곳으로 유명하다. 을미사변 당시, 고종은 이 곳에 감금된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곤녕합
곤녕합(坤寧閤)은 명성황후의 침전으로 민가의 안채에 해당된다. 곤녕합 내부에는 문화재청이 의뢰해 무형문화재 장인들이 궁중유물기준에 따라 복원한 자개침대 등 궁중생활용품 3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장안당과는 복도각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곤녕(坤寧)은 '땅이 편안하다'는 뜻으로 왕비의 덕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자금성의 곤녕궁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곤녕합의 남쪽 누각인 옥호루(玉壺樓)는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옥호루의 명칭은 옥호루(玉壺樓)가 아닌 옥곤루(玉壼樓)라는 주장도 있다.
복수당
복수당(福綏堂)은 별채에 해당되는 건물이다. 궁인들의 거소로 추정된다.
관문각
관문각(觀文閣)은 고종의 서재로, 원래 전통적인 목조건물 관문당이었다. 그러다 1891년에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의 설계로 개축되었다. 경복궁 안의 유일한 서양식 건물로, 2층 규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관문각은 양관이라 불리며 주로 외국인을 접견하기 위한 장소로 쓰였다. 다만 공사 과정에서 관리들의 비리와 부실 공사가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결국 부실공사로 1901년 헐리게 되면서 그 존재 자체에 대해 알려지지 않아 경복궁 복원 계획에서 제외되었고, 이후 건청궁 복원 사업이 진행될 때도 복원되지 못하고 현재 터만 복원되었다. 1992년 1월 관문각의 존재가 사진첩 등을 통해 확인되었다.
향원정
향원정(香遠亭)은 경복궁 후원에 있는 누각이다. 2층 규모의 익공식(翼工式) 기와지붕. 누각의 평면은 정육각형이며, 장대석(長臺石)으로 단을 모으고, 짧은 육모의 돌기둥을 세웠다. 1층과 2층을 한 나무의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4분합(四分閤)을 놓았다. 특히 연못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는 향원정의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1867∼187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 나간다’는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다. 향원지를 건너는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이다. 취향교는 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지금은 남쪽에서 나무다리를 건너서 섬에 가게 되어 있지만,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궁처쪽에서 건널 수 있었다. 이 다리를 남쪽에 다시 지은 것은 1953년이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로 흘러 가도록 되어 있다.]
[경복궁 불타자 고종 머물었던 이곳…6년만에 개방한다는데
장주영 여행플러스 인턴기자(lunaj915@naver.com)
매일경제 기사 입력일 : 2023. 9. 5.
6년만에 경복궁 건청궁 특별 개방
고종과 명성황후의 생활 습관 따라 재구현
향원정, 집옥재 등 조선 숨결 느낄 수 있어
한국의 문화재나 고궁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경복궁’. 긴 시간 동안 서울의 중심을 우직하게 지켜온 경복궁은 한국인에게는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한국사의 중심지다. 세계 각국의 외국인은 물론 한국인들도 사계절 내내 찾는 경복궁에서 한정 기간 동안 특별한 나들이를 즐길 수 있다.
바로 경복궁의 끝자락, 가장 안쪽에 숨겨진 ‘건청궁’ 특별 개장이다. 건청궁은 경복궁의 화재 이후 고종과 명성황후가 생활하던 궁으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생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지난 2017년 특별 개장 이후로 6년간 문을 닫았던 건청궁이 오는 18일까지 다시 문을 열고 있다.
건청궁 외부만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명성황후와 고종이 생활하던 공간을 직접 관람하고 즐기며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기억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다만 관리 보존과 안전상의 이유로 딱 한 달 동안만 구경할 수 있다. 이후 재개방 계획은 아직 미정이기 때문에 놓치기 전에 얼른 방문해 보자.
현재 광화문 앞은 월대 복원 공사가 한창이라, 국립 고궁 박물관 옆 출입구로 입장하는 걸 추천한다. 서울지하철 3호선 경복궁 역 5번 출구로 나와 직진하면 금세 도착한다. 건청궁 관람 자체는 무료지만, 경복궁 입장권은 개별로 구매해야 한다. 고궁 박물관 쪽 입구에서 광장을 지나 맞은편에 매표소가 있다.
건청궁은 경복궁의 가장 안쪽에 있다 보니 입구부터 꽤 걸어야 한다. 근정전과 경회루를 지나 대략 15~20분 정도 걷다 보니 향원정(香遠亭)이 보이기 시작했다. 향원정은 넓은 연못 한가운데에 2층 누각이 있는 아름다운 호수 정원이다. 고즈넉한 정자 주위로 수면 위 일렁이는 수련이 가득 있어 여기저기 사진 찍는 관광객이 많다.
향원정은 향기가 널리 퍼져나간다는 뜻으로, 한자가 적힌 현판은 고종이 직접 썼다고 한다. 고종이 연못과 주변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지은 곳으로, 현재도 연못 주위 의자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다.
햇빛을 그대로 받으며 쉬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지만, 처서가 지나고부터 더위가 조금 걷힌 덕에 시원한 나무 그늘 밑에서 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향원정 뒤편에 바로 건청궁 입구가 있으니, 건청궁에 들어가기 전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연못을 바라보며 더위와 땀을 식히고 들어가 보자.
조선의 숨결이 그대로, 건청궁
경복궁 안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궁인 건청궁(乾淸宮). 고종이 개인 내탕금(임금의 판공비)을 들여 직접 건설을 명령해 조선 극 후기 경복궁 최북단에 지어졌다.
사실 건청궁은 고종과 황후의 생활관이 아니라 역대 임금의 초상화와 옥쇄, 글씨가 적힌 문서 등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경복궁 화재 이후 고종과 황후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1885년 건청궁에 다시 머물며 경복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공간이 됐다.
건청궁은 크게 장안당(長安堂), 곤녕합(坤寧閤), 복수당(福綏堂)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청궁 입구를 통과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전각이 바로 장안당이다. 화려하게 금빛 수를 놓은 알록달록한 일월오봉도와 용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용상에는 직접 앉아서 사진을 찍을 수도 있어 인증샷을 찍으려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용상의 오른편엔 과거 고종이 신하들과 집무를 보고 사신을 대접하던 공간이 있다. 건청궁은 최초로 전기를 들여온 곳인데, 그 고증을 그대로 재현한 전등도 함께 있다.
해가 진 후에도 국무에 열중한 고종의 방을 밝히던 것처럼 영롱하고 따뜻한 불빛까지 구현해 냈다. 전등과 용상, 병풍 등 모든 물건과 소품들은 무형 문화재 장인들이 하나하나 수공업으로 만든 작품이다.
장안당의 안쪽으로 더 들어오면 향원정이 내려다보이는 누마루에 들어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있다.
이번 건청궁 개방의 핵심이라고 할 정도로 아름다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사진까지 찍을 수 있어 길게 줄이 늘어졌다. 누마루는 촘촘한 나무 장판과 창문에 달아놓은 전통 장식품, 전통 탁상으로 깔끔하게 꾸며놓은 곳이다.
맨발로 들어가 앉아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향원정을 내려다보기도 하며 자연스러운 사진을 찍기 좋다.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녹음과 연못 덕에 대부분 창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누각으로 드는 바람으로 창문에 달아놓은 색색의 천이 휘날리는 것이 아름다우니, 바람이 부는 때에 맞춰 사진을 찍는 걸 추천한다.
장안당과 곤녕합은 작은 복도로 연결돼 있다. 곤녕합은 명성황후와 궁녀들이 생활하던 공간이다. 장안당의 복도를 넘어가니, 창가를 바라보며 잠시 앉아 갈 수 있는 작은 방이 나온다. 궁녀들이 머물며 일하던 공간으로, 주방으로도 사용했던 공간이다.
복도각을 따라 조금 더 이동하면 비극적인 참변이 일어났던 왕비 생활실과 알현실이 등장한다. 여기서부터 서구적인 소품과 병풍과 창살 등 한국의 전통이 어우러져 오묘한 분위기로 가득 찬다.
실제 외국 사신이나 외교관들의 기록을 따라 구현한 것이라고 한다. 흔히 실록에 기록되는 의례 공간은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적혀 있어 고증하기 좋지만, 생활공간은 그렇지 않아 사용하던 사람의 취향과 생활 습관, 몇몇 기록에 맞게 구현한 것이다.
서양식 소품들로 꾸민 방과 벨벳 의자에 앉아 알현했다는 기록이나, 커피와 케이크를 대접받았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공간의 성격까지 더불어 재현했다.
건청궁의 실내에서 조선의 숨결을 충분히 느꼈다면 외부로 이동해 보자. 안전을 위해 입장은 장안당, 퇴장은 곤녕합으로 나누어 놓았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필요는 없다. 곤녕합 전각 앞에는 궁녀들이 자고 생활하며 황제와 황후를 보필하던 거처로 추정되는 ‘복수당’이 있다.
사진 배경에 다른 사람이 나오는 게 싫다면 길게 이어진 복수당 전각에서 사진을 찍는 걸 추천한다. 북적이는 장안당과 곤녕합과는 달리 이곳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지나치기 때문에 고즈넉한 분위기와 가득한 해당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다만 햇빛이 잘 들지 않아 조도를 조절해야 한다.
건청궁의 왼쪽에는 고종의 개인 도서관이자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집옥재(集玉齋)’가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팔각형 모양의 2층 전각이다. 중국식 건축방식을 함께 사용했기 때문에 이국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공간이다.
이곳은 현재 일반 시민들에게도 개방하는 궁궐 속 북카페다. 무더위가 지속되는 7·8월에는 개방하지 않지만, 지난 1일부터 다시 문을 열었다. 고종이 실제로 사용했던 도서관에서 마음대로 책도 읽고 커피도 마실 수 있는 것이다.
한 번에 50명씩만 입장하기 때문에 쾌적하게 내부를 관람하고 책을 읽을 수 있다. 집옥재의 내부 천장은 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화려한 쌍용과 다채로운 색을 사용한 그림들로 빼곡해 밖보다 안이 더 아름답다.
집옥재 한쪽에는 ‘가배(커피의 옛말)’를 판매하고 있어 고종이 커피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흥미로운 공간일 것이다. 건청궁 개방 일자와 18일 정도 겹치니, 건청궁에 방문할 때 함께 방문하는 걸 추천한다.]
[옥호루(玉壺樓)
옥호루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 내에 있는 건청궁 곤녕합에 딸린 누각이다. 본래 1873년(고종 10)에 건청궁 건립 때 세워졌으나,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의 현장으로서 1909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헐렸다. 2007년 건청궁 복원 때 옥호루도 복원되었다.
본래 경복궁 내 고종의 사적인 거처인 건청궁(乾淸宮) 내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坤寧閤)에 딸린 누각이다. 1873년(고종 10)에 고종은 경복궁의 가장 북쪽 지역에 비밀리에 건청궁을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국가예산이 아닌 왕의 판공비인 내탕금으로 검소하게 집을 지어 완공하였다. 이는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 왕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한 뜻이었다. 건청궁은 크게 장안당(長安堂)과 곤녕합, 복수당(福綬堂)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된 양반가옥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장안당은 고종이 기거했던 사랑채이며 곤녕합은 명성황후가 기거했던 안채이고, 복수당은 상궁들의 처소와 생물방(生物房)과 곳간 등이 있던 부속건물이다.
장안당에서 고종이 신하를 만나거나 미국·영국·일본·러시아·프랑스 등의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기도 하여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장안당 서쪽에는 네 개의 돌기둥 위에 있는 누각 형태의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가 딸려 있다. ‘추수부용’은 가을 물속의 연꽃이란 뜻으로 연꽃의 은은한 향기가 느껴진다.
장안당 동쪽에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이 있다. 곤녕합 남쪽에는 기역자로 내어지은 옥호루라는 누각이 딸려 있다. 옥호루는 두 개의 사각 기둥 위에 세워진 누각의 형태를 띠고 있다. 실제로는 아래 돌기둥 사이의 공간을 나무 문을 달아 모두 막혀있는 구조이다.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온돌에 불을 지피던 아궁이가 보인다. 옥으로 만든 호리병이라는 뜻의 옥호(玉壺)는 본래 옥호빙(玉壺氷)의 준말로 옥병 안에 든 얼음을 뜻한다. 얼음과 같이 마음이 투명하고 깨끗함을 나타내는 뜻으로, 당나라 시인 왕창령(王昌齡)의 시 구절인 ‘한 조각 얼음 같은 마음이 옥호에 있다’에서 유래된 표현이다. 이 옥호루 건물의 동쪽면에 ‘사시향루(四時香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즉 옥호루 건물에 ‘옥호루’라는 편액과 ‘사시향루’라는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사시향루는 사시사철 꽃향기가 풍긴다는 의미이다. 고종의 처소인 장안당의 추수부용루와 왕비의 처소인 사시향루는 꽃의 은은한 향기가 느껴지면서 서로 대비가 된다.
곤녕합의 옥호루는 매우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다름 아닌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난 장소이다. 이날 일본 공사관 직원 및 낭인들이 건청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찾아내어 장안당과 곤녕합 사이 뜰에서 시해하고 왕후의 시신을 옥호루에 잠시 안치한 후 곧 명성황후의 시신을 건청궁 동쪽 옆에 있는 녹산(鹿山)으로 옮겨 시신을 불태워 잔여물을 향원지에 버렸다고 한다. 이때 명성황후의 나이는 겨우 45세이었다고 한다. 을미사변은 이 사건을 목격한 미국인, 러시아인 등이 각국의 외교관에게 사건의 진상을 폭로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고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역사적 사실이다. 건청궁은 이후 일제가 역사적 현장을 인멸하기 위해 1909년 강제로 건물을 헐어 내었다. 그 터에 박물관과 전시장을 지었다. 광복 이후 2007년에 건청궁이 복원되며 옥호루도 복원되었다. 고종이 건청궁을 사대부가의 집처럼 지었던 뜻에 따라 단청을 하지 않고 소박한 백골집의 형태로 복원되었다.
옥호루는 명성황후의 혼이 서려 있는 곳이다.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국모이면서도 치욕을 당한 우리 역사의 슬픈 현장이다. 명성황후의 처소로 쓰였던 곤녕합의 부속 누각인 옥호루는 현판명이 보여주듯 사시사철 은은한 꽃향기가 풍기는 명성황후의 체취가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녹금당(綠琴堂)
"녹색의 거문고"라는 뜻으로 복수당 서행각에 있다. ‘녹금(綠琴)’이란 ‘녹색의 거문고’라는 뜻이다. 푸른 숲이 내는 아름다운 소리를 거문고 소리에 비유한 것이다.]
[집옥재(集玉齋)는 고종이 개인 서재 겸 전용 도서실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신무문의 동쪽에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처마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를 달아 꾸민 겹처마에 건물의 측면 좌우 끝에 박공을 달아 벽면 상부가 삼각형으로 된 맞배집으로 도리가 7개로 된 지붕틀을 쓴 칠량 구조다.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다.]
[경복궁 태원전(景福宮 泰元殿)
경복궁 서북쪽에 위치한 전각으로, 국상(國喪)이 있을 때 발인하기 전까지 시신을 모셔두는 빈전(殯殿)으로 사용되었다. 전각의 명칭인 태원(泰元)은 하늘이라는 뜻이다.
역사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새로 지어진 전각이다. 1890년(고종 27) 신정왕후 조씨의 국상 때와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의 국상 때에 관을 모시는 빈전으로 사용되었으며, 태조와 원종의 어진을 모사하기 위해 영희전(永禧殿)에 있던 어진을 태원전으로 옮겨 잠시 봉안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태원전은 훼철되었고, 그 자리에는 일본인 관료들의 관사가 들어서게 된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수도방위사령부 제30경비단이 지금의 태원전 자리에 주둔하게 되면서 1996년까지 군부대 부지로 사용되었고, 2005년에 태원전 일부가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구조 및 형태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건축물로,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만들었다. 방형의 주춧돌 위에 사각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익공 형식의 공포를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박공마루,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하였고, 망새와 용두, 잡상 등을 설치하여 지붕 위를 장식하였다. 전각의 중앙에는 대청마루를 두었고, 양 옆으로 온돌방을 설치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國立古宮博物館,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은 궁중유물의 연구·조사·수집·보관 및 전시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대한민국 문화재청의 소속기관이다. 2005년 8월 16일 발족하였으며,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12(경복궁 내)에 위치하고 있다. 관장은 고위공무원단 나등급에 속하는 일반직공무원 또는 학예연구관으로 보한다.
조선, 대한제국 시대의 왕실 복식 및 생활 관련 유물 약 40,000여 점을 소장·전시하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경복궁 내에 위치하고 있다.
연혁
1908년 9월에 황실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문화재청은 1980년대 중반부터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복원하고 일제에 의해 헐린 경복궁 전각들을 복원해나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1992년 10월에는 4대 궁궐과 종묘, 능원 등에 흩어져 있던 궁중문화재를 모아 덕수궁 석조전에 궁중유물전시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하지만 덕수궁 석조전은 전시공간과 수장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규모조차 너무 작아 왕실문화를 홍보하고 연구 보존하는 데 수많은 어려움에 부딪혔기에 문화재청은 1993년 옛 국립중앙박물관이자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었던 자리에 왕궁박물관을 개관하기로 결정하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였다. 이후 철저한 준비 끝에, 광복 60주년인 2005년 8월 15일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경복궁 내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로 이전 개관하였다.
2004년 11월 '조선왕실역사박물관추진단'을 발족하여 박물관 설치를 준비했으며, 다음해 3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명칭을 확정하고 그해 8월 개관하였다. 이후 2007년 11월 전관개관하였다.
연표
1992년 10월 30일: 문화재관리국 소속으로 궁중유물전시관 설치.
1999년 5월 24일: 문화재청 소속으로 변경.
2005년 8월 16일: 국립고궁박물관과 덕수궁관리소로 개편.
조직
관장
기획운영과
전시홍보과
유물과학과
소장품
국보와 보물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으며, 이것 외에도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을 장지까지 운반했던 국가민속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된 남은들상여가 있다.
국보
번호 등록명 한자명 등록일 위치
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天象列次分野之圖 刻石 1985년 8월 9일 과학문화실
310호 백자 달항아리 白磁 壺 2007년 12월 17일
보물
번호 등록명 한자명 등록일 위치
837호 복각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複刻 天象列次分野之圖 刻石 1985년 8월 9일 과학문화실
839호 신법 지평일구 新法 地平日晷 1985년 8월 9일 과학문화실
840호 신법 지평일구 新法 地平日晷 1985년 8월 9일 과학문화실
841호 간평일구·혼개일구 簡平日晷·渾蓋日晷 1985년 8월 9일 과학문화실
844호 창덕궁 측우대 昌德宮 測雨臺 1985년 8월 9일 과학문화실
845호 앙부일구 仰釜日晷 1985년 8월 9일 과학문화실
856호 소총통 小銃筒 1986년 3월 14일 과학문화실
860호 비격진천뢰 飛擊震天雷 1986년 3월 14일 과학문화실
932호 영조어진 英祖御眞 1987년 12월 26일 궁중회화실
1189-2호 박문수 초상 朴文秀 肖像 2006년 12월 29일 궁중회화실
1442호 일월반도도 병풍 日月蟠桃圖八 疊屛 2005년 8월 12일 궁중회화실
1443호 왕세자탄강진하도 병풍 王世子誕降陳賀圖十 疊屛 2005년 8월 12일 궁중회화실
1444호 은입사귀면문철퇴 銀入絲鬼面文鐵鎚 2005년 8월 12일 궁중회화실
1479호 유숙 초상 및 관련 교지 柳潚 肖像 및 關聯 敎旨 2006년 12월 29일 궁중회화실
1490호 이성윤 초상 李誠胤 肖像 2006년 12월 29일 궁중회화실
1491호 연잉군 초상 延礽君 肖像 2006년 12월 29일 궁중회화실
1492호 철종 어진 哲宗御眞 2006년 12월 29일 궁중회화실
등록문화재
번호 등록명 한자명 등록일 위치
318호 순종어차 純宗御車 2006년 12월 4일 대한제국실
319호 순종황후어차 純宗皇后御車 2006년 12월 4일 대한제국실
452호 은제이화문탕기 銀製李花文湯器 2009년 10월 12일 대한제국실
453호 은제이화문화병 銀製李花文花甁 2009년 10월 12일 대한제국실 ]
10:40~10:55 서울 종로구 사직로 161 번지에 있는 경복궁 광화문에서 서울 종로구 사직로 89 번지에 있는 사직단 대문으로 이동
[이동거리 989m, 15분 소요]
탐방지 : 서울 사직공원(社稷公園)
[사직공원(社稷公園)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1-48
정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공원.
면적은 168,000㎡이다. 조선왕조 사직단(사적, 1963년 지정)이 보호되어 있는 곳으로, 1395년 조선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뒤 가장 먼저 조영하게 한 것이 종묘와 사직단이었다 한다.
가운데 2좌의 사직단을 두고 넓은 뜰을 가꾸어 토벽으로 둘러싸고 잡인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1단 높은 장대석기단(長大石基壇) 위에 정문을 세워 성지임을 표시하였다. 동쪽에 있는 것이 사(社)인 토지신에게 제사드리는 것이고, 서쪽은 직(稷)으로 곡물신에 제사드리는 것으로, 양단 신좌는 국가의 대본(大本)으로 중대한 제사로 삼았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의 사직을 끊고 우리 민족을 업신여기기 위하여 사직단의 격을 낮추고 공원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1922년 12월 경성부에 이관되어 이곳에 순환도로ㆍ정자ㆍ벤치ㆍ조명 등을 설치하여 1924년 5월 공원으로 개설하였다. 1940년 3월 조선총독부고시 제208호 경성시가지 계획공원 제35호에 따라 정식으로 도시공원이 되었다.
공원 내부에는 어린이놀이터가 동서로 길게 마련되어 있고, 사직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신사임당(申師任堂)과 이이(李珥) 모자의 동상이 서 있으며, 그 뒤에 단군성전(檀君聖殿)과 김동인문학비(金東仁文學碑)도 세워져 있다. 서편으로는 여름철에 어린이들로 붐비는 수영장시설이 있고, 간이건물로 된 매점이 있어 산책 및 휴게소로 이용되고 있다. 북쪽에는 서울특별시종로구도서관이 있고, 공원의 배경에 인왕산이 있어 봄ㆍ가을의 경치가 아름답다.]
[사직동 단군성전(檀君聖殿)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인왕산의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곳에 사직단과 함께 위치한다.
입구에는 삼문을 세웠고 단군성전의 본전은 정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건립되었다.
성전의 내부에는 단군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안치되어 있다.
매년 한민족의 시조 단군이 개국한 날을 기념하는 개천절 기념행사가 열린다.]
탐방코스 : [사직단 대문~사직단~사직동 단군성전(檀君聖殿)~사직단 대문]
탐방일 : 2024년01월27일(토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 종로구 : 최저기온 영하 10도C, 최고기온 0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30분 소요)
* 10:55~11:25 서울 종로구 사직로 89 번지에 있는 사직단 대문에서 탐방 출발하여 [사직단 대문~사직단~사직동 단군성전(檀君聖殿)~사직단 대문]의 동선으로 사직공원을 탐방
11:25~11:45 서울 종로구 사직로 89 번지에 있는 사직단 대문에서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55 번지에 있는 경희궁 흥화문으로 이동 [이동거리 1.2km, 20분 소요]
탐방지 : 서울 [경희궁(慶熙宮)&이화박물관&구러시아공사관]
[경희궁(慶熙宮)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 조선후기 왕의 피우(避寓)를 위한 이궁으로 건립된 궁궐.
본래 경덕궁(慶德宮)으로 불렸다. 처음 창건 때는 유사시에 왕이 본궁을 떠나 피우(避寓)하는 이궁(離宮)으로 지어졌으나, 궁의 규모가 크고 여러 임금이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동궐인 창덕궁에 대하여 서궐이라 불리고 중요시되었다.
이 궁이 창건된 것은 1617년(광해군 9)으로, 당시 광해군은 창덕궁을 흉궁(凶宮)이라고 꺼려 길지에 새 궁을 세우고자 하여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仁慶宮)을 창건하였다. 그런데 다시 정원군(定遠君: 인조의 부친)의 옛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술사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 궁을 세우고 경덕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 궁에 들지 못한 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결국 왕위는 정원군의 장남에게 이어졌으니 그가 곧 인조이다.
인조가 즉위하였을 때 창덕궁과 창경궁은 인조반정과 이괄(李适)의 난으로 모두 불타 버렸기 때문에, 인조는 즉위 후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복구된 뒤에도 경덕궁에는 여러 왕들이 머물렀고, 이따금 왕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다. 즉, 제19대 숙종은 이 궁의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났고, 승하한 것도 역시 이 궁의 융복전(隆福殿)에서였다. 제20대 경종 또한 경덕궁에서 태어났고, 제21대 영조는 여기서 승하하였다.
제22대 정조는 이 궁의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고, 제23대 순조가 회상전에서 승하하였으며, 제24대 헌종도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 1760년(영조 36)경덕궁이던 궁명을 경희궁으로 고쳤는데, 그것은 원종의 시호가 경덕(敬德)이므로 음이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창건 때 정전·동궁·침전·제별당·나인입주처 등 1,500칸에 달하는 건물이 있었다. 그 창건 공역은 1617년에 시작되어 4년 뒤인 1620년에 끝마쳤는데, 이 공사를 위하여 전국에서 공장(工匠)과 자재가 동원되었다.
그 뒤 1693년(숙종 19) 수리가 있었으며, 1829년(순조 29) 큰불이 나 회상전·융복전·흥정당(興政堂)·정시각·집경당·사현각 등 궁내 주요 전각의 절반 가량이 타 버렸다. 이듬해서궐영건도감(西闕營建都監)을 설치하여 소실된 건물을 재건하였다.
1860년(철종 11) 전각의 부분적인 수리가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1902년(광무 6) 일부 전각의 수리가 있었다. 이렇게 궁궐의 하나로 중요시되던 경희궁은 일제강점기에 건물이 대부분 철거되고, 이곳을 일본인들의 학교로 사용하면서 완전히 궁궐의 자취를 잃고 말았다.
이미 1907년 궁의 서편에 일본 통감부 중학이 들어섰고, 1910년 궁이 국유로 편입되어 1915년 경성중학교가 궁터에 설립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궁내의 건물은 철거되어 없어지거나 다른 곳에 이전되기도 하였고, 궁역(宮域)도 주변에 각종 관사 등이 들어서면서 줄어들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이후 이곳은 서울중고등학교로 사용되면서 주변 대지 일부가 매각되어 궁터가 더욱 줄어들었다.
1980년 6월 서울고등학교를 서초구로 이전하고 전체 부지는 민간기업에 매각하였다가, 1984년 이곳에 시민을 위한 공원을 조성하기로 하여 이듬해 궁터의 일부를 발굴조사하였으며, 1986년부터 공원으로 개방하고 있다.
『궁궐지(宮闕志)』에 따르면, 건물의 배치가 외전과 내전이 좌우에 나란히 놓이고 전체적으로 동향을 하고 있어, 정궁(正宮)인 경복궁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나타냈다.
즉, 경복궁은 남향으로 외전과 내전이 앞뒤에 구성되었는데 그것과 다르며, 또한 궁의 정문이 바른쪽 모퉁이에 있는 점도 특이하다. 이런 점은 처음 이궁으로 지어졌던 창덕궁에서도 보이는 현상으로, 의도적으로 경복궁보다는 격식을 덜 차린 결과로 보인다.
각 건물의 구성을 살펴보면, 우선 외전에 있어서 정전(正殿)인 숭정전(崇政殿)은 궁의 서쪽에 동향하였고, 주위는 행각으로 둘러싸고 사방에 문을 두었다.
숭정전 뒤에는 후전인 자정전(資政殿)이 있고, 주변에 수어소(守御所)인 태령전(泰寧殿)이 있다. 숭정전의 오른편, 즉 북쪽으로는 왕이 신료(臣僚)들을 접견하고 강연(講筵)을 여는 곳인 흥정당이 있고, 주변에 왕이 독서하는 곳으로 존현각(尊賢閣)·석음각(惜陰閣)이 있다.
이상 외전을 구성하는 중심 전각들의 우편에 내전이 있는데, 그 정침이 회상전이다. 그 서쪽에 융복전, 동서에 별실이 있고 주변에 연못과 죽정(竹亭)이 있다. 융복전의 동편에는 대비를 모시는 장락전(長樂殿)이 있고, 주변에 용비(龍飛)·봉상(鳳翔)이라는 누각과 연못이 있으며, 동편에 연회장소인 광명전(光明殿)이 있다.
궁의 외부 출입문은 모두 다섯인데, 정문은 동북 모서리에 있는 흥화문(興化門)이다. 결국, 경희궁은 정문이 동북 모서리에 있어서, 정문을 들어서서 내전 앞을 지나 서쪽 끝의 외전 정전 일곽에 도달하게 되는 특수한 배치와 구성을 보여 준다.
경희궁에는 수많은 전각들이 들어서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궁 자리에 일본인 중학교를 세우면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지고, 일부는 다른 곳에 이건되어 지금까지 건물이 남아 있는 것도 있다. 우선, 현존하는 건물을 보면 정전인 숭정전의 정문인 흥화문,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黃鶴亭) 등이 있다.
숭정전은 1926년 조계사(曹溪寺)에 매각되어 현재 동국대학교 구내에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기와지붕을 한 주심포양식의 건물이다.
1618년에 창건된 이래 건물 자체가 재해를 입은 일은 없었으므로, 조선 중기 건축양식을 간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포는 외부 이출목이고, 내부는 양봉(梁奉)형식으로 보를 받치고 있으며, 주칸에 화반이 있어 장여를 받쳤다.
흥화문은 역시 1618년에 세워진 건물로 창건 때의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왔으나, 1932년에 이전되어 일본인 절인 박문사(博文寺)의 문으로 쓰이다가 1988년 경희궁복원계획의 일환으로 지금의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우진각 기와지붕이다.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의 정문이 모두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데 비하여 이 건물만은 단층으로 되었는데, 그 이유는 궁의 창건 때 이 궁이 피우처로 마련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황학정은 1890년(고종 27) 회상전의 북쪽에 지었던 정자로, 1923년 민간인에 매각되었다가 현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의 사직공원 뒤편에 옮겨져 있다.
본래 무인들의 궁술 연습장으로 세운 건물인데 갑오경장 이래 궁술이 폐지되는 바람에 민간에서 유기화(遊技化)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궁내에 세웠던 건물이다.
이 밖에 경희궁의 중요한 건물로는 회상전·융복전·집경당·흥정당 등이 있었다. 이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자취를 잃었는데, 『서궐영건도감의궤(西闕營建都監儀軌)』을 통하여 그 규모만을 살펴보면, 대내(大內)의 정전인 회상전은 정면 7칸의 팔작기와지붕 건물로, 창경궁의 통명전과 같이 지붕에 용마루를 두지 않은 건물이었다.
융복전은 정면 6칸으로, 왼쪽에 건물이 연접되어 ㄱ자형 평면을 이루었다. 그리고 집경당·흥정당은 각각 정면 5칸, 정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두 건물 모두 일종의 누각과 같이 건물 일부에 누하주(樓下柱)가 있고 높은 계단을 갖추었다.
현재 궁터에는 용비천(龍飛泉)이라는 샘터가 남아 있고, 숭정전 등 주요 전각의 기단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지역은 한동안 학교로 이용되어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주변의 조경이 변모되고 지하 방공시설이 구축되는 등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옛 건물의 기단이 일부 남아 있고 전체적으로 궁궐의 지형이 잘 남아 있으며, 뒤쪽에는 울창한 수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아직도 궁궐의 자취를 상당히 간직하고 있다.
경희궁은 일명 ‘야주개 대궐[夜照峴大闕]’로 불렸는데, 그것은 정문인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명필이었고, 글씨의 광채가 밤에도 훤히 비추었다고 해서 이 일대를 야주개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탐방코스 : [경희궁 흥화문(興化門)~숭정문(崇政門)~숭정전(崇政殿)~자정문(慶熙門)~자정전(資政殿)~태령전(泰寧殿)~경희궁 흥화문(興化門)~이화박물관~구러시아공사관]
탐방일 : 2024년01월27일(토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 종로구 : 최저기온 영하 1도C, 최고기온 6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1시간35분 소요)
11:45~12:25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55 번지에 있는 경희궁 흥화문(興化門)에서 탐방출발하여 [경희궁 흥화문(興化門)~숭정문(崇政門)~숭정전(崇政殿)~자정문(慶熙門)~자정전(資政殿)~태령전(泰寧殿)~경희궁 흥화문(興化門]의 동선으로 경희궁(慶熙宮)을 탐방
[경희궁(慶熙宮)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에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광해군 9년(1617년)에 건립한 이후, 10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서울시에 있는 5대 궁궐 중에서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렀으며, 새문안 대궐, 새문동 대궐, 아주개 대궐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의 이궁(離宮)으로, 경운궁(덕수궁)과 홍교로 연결되어 있었다.
부지 7만 2천 8백 평에 정전, 동궁, 침전, 별당을 비롯해서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으며 본래는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다.
그러나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으로서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에 의해 몇 채의 전각들을 제외하곤 전부 훼철됐고, 그나마 남아있던 부지 또한 일제강점기에 축소되어 현재 원 상태로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하다. 그나마 초석과 기단이 남아 있고, 뒤쪽에는 울창한 수림이 잘 보전돼 있어 궁궐의 자취를 잘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일제 강점기에 경희궁 부지에 경성중학교를 만들었으며, 해방 후에 서울고등학교가 위치하였다. 경희궁터는 사적 제271호로 지정되었고,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로 이전한 이후 서울시립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건물을 허물고 경희궁의 일부를 복원하였다. 서울고등학교의 별칭과 경희대학교의 명칭 등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궁의 이름
경희궁의 원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친 것이다.
역사
창건 후 고종 이전까지
경덕궁터는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정원군)의 사저가 있던 곳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뒤 재건된 창덕궁으로 들어가기를 꺼려했고, 인왕산 아래 새 궁궐인 인경궁(仁慶宮)을 짓다가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풍수설을 믿고 왕기를 누르기 위하여 그의 집을 빼앗아 1617년(광해군 6년)~1623년(광해군 15) 사이에 경덕궁을 세웠다. 그러나 1623년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경덕궁을 쓰지 못하였다. 인조가 즉위한 뒤에 창덕궁이 소실되고,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마저 불타버리자 인목대비를 받들어 이 궁궐로 이어하였다. 소실된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원하기 위해 인경궁을 헐은 반면, 경덕궁은 인조의 아버지의 사저가 있던 곳이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다. 이 곳에서 숙종이 태어났고, 숭정문에서는 경종, 정조, 헌종이 즉위하였으며, 숙종, 순조가 승하하였다.
경희궁은 경복궁 서쪽에 세워진 까닭으로 서궐(西闕)로 불렸고, 이 밖에도 새문안 대궐, 야주개 대궐, 새문동 대궐 등으로 불렸다. 인조는 재위 후 약 9년동안 경덕궁에 임어했다. 효종과 현종은 잠시 머무르는 용도로만 사용했을 뿐, 적극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숙종은 남인과 서인 사이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다루며 경덕궁 임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후 1760년 영조는 원종의 시호인 경덕(慶德)과 동음이라는 까닭으로 궁명을 경희궁으로 개칭한 뒤 19년동안 머물렀는데,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죽을 때 까지 거의 이 곳에서 지냈다. 정조는 숭정전에서 즉위하였지만 자객의 위협을 받고 궁을 옮겼다. 경희궁은 순조 29년(1829년) 10월 화재로 인하여 전각 대부분이 소실된 것을 1831년에 중건하였고, 이후 철종이 약 7개월간 머물렀다. 1844년 헌종의 가례 이후 더이상 활용되지 않았다.
폐궁
고종 초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고 고종이 그곳을 법궁으로 삼아 이어하자 경희궁은 경희궁은 더 이상 왕이 임어하지 않는 빈 궁궐이 되었고, 관청의 필요에 따라 창고나 다른 용도로 쓰였다.
경희궁은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자재를 모으기 위해 철거되었는데, 1865년에 작성된 《경복궁영건일기》에서는
“서궐(경희궁) 내에는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正心閤), 사현합(思賢閤), 흥정당(興政堂)만 남기고 그 나머지는 모두 헐었다. 목재를 가져오니 다수가 썩었다. 이 가운데 좋은 것을 골라서 나인간(內人間)과 각사의 건조에 사용했다. 이날부터 궁궐의 뜰에 깔린 전석과 층계석을 뽑아내어 먼저 광화문 역소에 사용했다.”라고 적고 있어 4월부터 8월까지 훼철한 경희궁의 자재로 경복궁을 짓는데 보탰음을 알 수 있다.
1868년(고종 5년)에는 경복궁 공사를 위해 경희궁 일부 전각들을 허물었고, 경희궁 내 빈터 일부를 밭으로 쓰도록 분배하였다. 또한 빈 터를 용동궁, 명례궁, 수진궁, 어의궁의 4개의 궁에 분배했다. 곧이어 터에 조폐소, 양잠소가 설치되었다. 이 때 양잠소는 1884년 9월 독일인인 마에르텐스(A. H. Maertens)를 고용해 운영을 맡겼으며 1886년에 청나라에서 뽕나무를 수입하여 양잠소를 설치했다. 1899년 독일의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왕자가 방문했을 때에 관명식을 진행하기도 했다. 1901년에 외국인이 제작한 지도에서는 뽕나무 공원(mulberry park)라 적히기도 했다.
비록 훼손을 당하기는 하였으나 이 당시만 하더라도 일부 시설이 유지되며 궁궐의 모습은 지키고 있었다. 또한, 광무 6년(1902)에는 경운궁에 연결된 운교를 놓는 등 대한제국기 광무연간까지는 경희궁의 모습은 유지되었다. 다만 1910년 경성부에서 발행한 《경성부사》에서 남아있는 건물이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흥화문, 황학정뿐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1910년 11월에 조선총독부중학교(후 경성중학교)가 들어서서, 숭정전을 포함한 일부 전각들이 학교 부지로 사용되었다. 1920년대에는 건물들이 매각되었다. 정전인 숭정전은 일본의 한 불교 종파인 조동종의 조계사 본전으로 쓰기 위해 1926년 남산 기슭으로 이건되었다가 지금은 동국대학교의 법당인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다. 회상전은 1911년부터 10여년 동안 일본인의 학교였던 경성중학교의 기숙사(교원 양성소)로 쓰였다. 1928년 회상전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사찰에 매각되었다가 1930년 화재로 소실된다. 흥정당은 1928년 광운사로 이건되었으며, 관사대(觀射臺)는 사직단 뒤로 이건되어[2] 현재 황학정(黃鶴亭)으로 쓰이고 있다. 흥화문은 1932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의 문으로 쓰였다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폐사되고, 이후 신라호텔 정문으로 쓰이다가, 1988년 지금의 위치(계양문:남문)로 다시 옮겨졌다. 본래의 위치는 구세군회관 자리이다.
1922년에는 경희궁 동쪽 부지에 조선총독부 직원 관사가 들어섰다. 1922년 6월, 경희궁의 동측에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그 부지로 21,500평을 떼어 냈고, 1927년부터 1928년까지 경희궁 남쪽 도로를 확장하면서 경희궁 일부를 도로로 편입시켰다. 북서쪽에는 1932년 경성측후소가 건설되었고, 1940년대에는 대동아 전쟁에서 미군의 폭격에 대비하기 위한 방공호가 숭정전 동쪽 행랑에 건설되었다.
광복 이후
경희궁터는 광복 후에 서울중ㆍ고등학교로 쓰이다가 1980년 6월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용도가 변경되었다. 1978년에 현대건설이 부지를 구매하여 사옥을 조성하려 하였으나, 공원 녹지를 조성해야한다는 여론에 서울특별시가 재매입하여 사적 제271호로 지정하였다. 이후 복원공사를 시작하였지만 그러나 서울시의회에서 경희궁 복원비용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복원공사는 중지되었다. 시에서 경희궁터에 서울역사박물관을 세우면서 다시 훼손되었다. 창건당시의 경희궁 규모는 무덕문지(북문)의 유구가 발견된 대한축구협회, 성곡미술관, 일조각출판사, 내수동교회, 구세군회관, 서울시교육청, 서울복지재단을 모두 경희궁에 지었으며, 기상청 서울관측소 일부도 포함된다. 또한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2가 일대가 경희궁 추정 궁역으로, 동측 매각 부지는 광화문 풍림스페이스본아파트 104동 일부, 축구회관, 성곡미술관, 아산정책연구원, 경희팔레스빌리지, 범한서적, 사우디아라비아대사관, 한국관광연구원, 서울시교원단체연합회, 교보생명보험 직장보육시설, 체코대사관, 세종로복지센나, 메트로신문사 등의 건물이 들어서있다.
2013년 1월, 서울특별시청과 종로구청은 경희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을 문화재청에 제출하였다. 제출된 계획은 문화재청과 서울특별시 공동으로 2014년부터 2023년까지 경희궁 2차 복원이 진행되는 것을 소재로 하였다. 정문인 흥화문을 원위치로 복원하고, 방공호를 철거한 후 융복전과 회상전을 복원 또한 서울시립 경희궁미술관을 철거한 후 흥정당을 복원하며, 현재 성곡미술관 주변에 남아있는 궁장을 포함하여 경희궁 궁장이 일부 복원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2단계에서는 서울역사박물관 이전과 궁지 내 민간 건물 매입이 추진된다.
2016년 11월에 서울시립미술관을 철거하였으며,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을 과거 서울시립미술관이 있던 위치에 새로 조성하고 기존 주차장 자리는 발굴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건축물
경희궁을 구성하는 전각들은 궁궐지, 서궐도안, 서궐영건도감의궤 등의 자료와 유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흥화문과 숭정문은 궁궐의 내외 출입문을 형성하였고,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융복전, 회상전, 흥정당, 자정전, 장락전, 집경전, 만학정 등 10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모두 파괴되거나 이전되었다. 현재의 터에 남아 있는 것은 건물터와 원래의 자리로 다시 이전된 흥화문뿐이며, 나머지는 새로 복원된 것이다.
경희궁의 배치 형태와 공간 구성은 다른 궁궐과 달리 매우 독특하다. 정전인 숭정전 영역이 서쪽에,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영역이 동쪽에 나란히 놓여 있으며, 정문인 흥화문은 궁궐의 남쪽에 있지 않고, 동남쪽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정문에서 내전으로 진입하는 길은 침전 앞을 지난 다음 북으로 꺾어 정전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흥화문
흥화문(興化門)은 광해군 8년(1616년)에 세워진 경희궁의 정문이다. 흥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이다. 원래 경희궁에는 동문인 흥화문 외에 흥화문 왼쪽에 흥원문, 오른쪽에 개양문, 서쪽에 숭의문, 북쪽에 무덕문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박문사(현재의 장충단 자리)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일제가 이전하여 경춘문(景春門)이라 불렀다. 광복 후 장충동 신라호텔의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1988년 경희궁터로 다시 옮겨왔다. 흥화문은 원래 경희궁터에 동남쪽 금천교 밖, 지금의 구세군회관 자리에 동향하고 있던 경덕궁 정문이었는데, 처음과 달리 지금 위치에 남향하여 세워졌다.
정전 영역
숭정문
숭정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상왕의 승하시 정전이 아닌 정전의 문에서 즉위하는데 경종, 정조, 헌종이 그러했다.
숭정전
숭정전(崇政殿)은 광해군 8년(1616년)에 세운 것으로, 경희궁의 정전이다. 숭정전 일곽은 남향한 경사지에 축대를 조성하여 그 위에 건물이 들어서 있다. 숭정전은 행각으로 둘러졌으며, 뒤로는 자경전이 있다. 동ㆍ서 행각은 남에서 북으로 가면서 바닥과 지붕이 단을 이루며 높아지도록 조성되었다. 숭정전은 이중 월대 위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이건되어 본래 건물은 현재 동국대학교 안에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다. 현 위치의 건물은 1989년 12월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1994년 10월 주변 행각과 함께 완공한 것이다. 2층 윌대 중 상월대의 답도는 정각원에 남아있고, 하월대의 답도는 복원된 경희궁의 숭정전에 있다. 상월대의 답도는 봉황, 하월대의 답도는 공작무늬이다. 철거전 경복궁못지 않게 큰 규모를 자랑했으나 흥화문,숭정전등 주요 건물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철거되어 경복궁의 10/1정도가 되었다. 경복궁을 비롯한 3대궁은 모두 복원을 시행하고 있으나 경희궁은 그 궁궐들과 함께 이름을 올릴지언정 복원 조차 되지 않았다.
편전 영역
자정전
현재 《서궐도안》에 따라 복원되어 있다. 이 건물은 주로 편전으로 쓰였다고 한다.
진전 영역
태령전
태령전은 발굴조사시 유구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서궐도안》의 자정전과 숭정전의 위치를 추정하여 복원하였다. 이 건물은 조선 영조의 어진을 모신 곳이었다. 2000년에 서울시에서 복원하였다.
기타 건축물
경희궁 방공호
1944년 초, 경성중앙전신국의 피폭에 대비하여 중요 통신 유지를 위해 설치된 지하전신국 겸 방공호이다. 왕과 왕비의 침전인 융복전과 회상전이 있던 자리에 콘크리트를 이용해 방공호를 만들었다. 방공호 건설에는 당시 체신국 직원들과 경성중학교의 근로보국대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경성중학교 내에 방공호를 조성할 것이 결정된 뒤 경성중학교 학생들 대부분은 교내 방공호 조성에 투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파작업은 조선군사령부 공병대가 담당하였고, 작업이나 실무 행정은 전부 체신국에서 담당했다. 서울특별시청은 방공호를 서울역사박물관의 근현대유물 수장고로 활용하기로 하고 2014년 수장고 준공을 계획하였으나, 2013년 수립된 '경희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에 따라 철거 후 융복전과 회상전을 복원할 계획이다.
황학정
원래 경희궁에 있었던 정자로 고종황제가 청-일-러 3국의 3파전을 근심해 이곳에서 활을 쏘며 피로를 풀었는데, 일제 때 팔려나가 현재 사직공원의 옛 등과정 자리에 있다.
미복원 영역
내전 영역
융복전
융복전(隆福殿)은 광해군 12년(1620년)에 경희궁 창건 때 세운 것으로, 경희궁의 침전이었다. 현종 시기 승하한 인선왕후 장씨의 빈소로도 사용했고 숙종이 승하한 장소이기도 했다. 1829년(순조 29년) 10월에 회상전에서 일어난 화재로 경희궁 내전 일곽 대부분이 불 탈 때, 함께 소실되어 1831년(순조 31년) 4월에 재건했고 이 때 기존과는 약간 변화가 생겼다. 1860년대 고종 시기 경복궁 중건을 위해 경희궁 건물들을 거의 전부 헐어 자재로 사용할 때 철거되었다. 서궐영건도감의궤을 보면 정면 6칸으로 되어있었고 지붕이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 형태로 되어 있었다.
회상전
회상전(會祥殿)은 광해군 12년(1620년)에 경희궁 창건 때 세운 것으로, 경희궁의 침전이었다. 1829년(순조 29년) 10월에 불 타 1831년(순조 31년) 4월에 재건했고 이 때 기존과는 약간 변화가 생겼다. 1860년대 고종 시기 경복궁 중건을 위해 경희궁 건물들을 거의 전부 헐어 자재로 사용할 때에도 숭정전, 흥정당, 흥화문 등과 함께 살아남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 경희궁 터에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교실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1928년에 남산 기슭에 있던 일본식 사찰에 팔려 옮겨가 주지 집무실이 되었다가 1936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회상전은 행각으로 둘러졌으며, 동쪽으로는 융복전이 남서쪽으론 집경당이 있었다. 대한제국 당시 찍은 사진과 서궐영건도감의궤을 보면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되어있었고 지붕이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 형태로 되어 있었다.]
[경희궁 관람시간 : 09:00시~18:00시]
[흥화문(興化門)은 광해군 8년(1616년)에 세워진 경희궁의 정문이다. 흥화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이다. 원래 경희궁에는 동문인 흥화문 외에 흥화문 왼쪽에 흥원문, 오른쪽에 개양문, 서쪽에 숭의문, 북쪽에 무덕문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박문사(현재의 장충단 자리)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일제가 이전하여 경춘문(景春門)이라 불렀다. 광복 후 장충동 신라호텔의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 1988년 경희궁터로 다시 옮겨왔다. 흥화문은 원래 경희궁터에 동남쪽 금천교 밖, 지금의 구세군회관 자리에 동향하고 있던 경덕궁 정문이었는데, 처음과 달리 지금 위치에 남향하여 세워졌다.]
[숭정문(崇政門)은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의 정문이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으로 들어와 금천교를 건넌 뒤 살짝 왼쪽으로 틀어 건명문을 쭉 지나다 동북쪽으로 꺾은 뒤 경사를 따라 올라가면 보인다. 이는 광화문에서 근정문까지 일직선으로 연결되어있는 경복궁과 다르다. 경복궁은 예법에 따라 반듯하게 구획된 정궁인 반면, 경희궁은 이궁인데다 인왕산 자락에 들어서 산세에 맞게 지었기 때문이다.
이름은 당연히 ‘숭정전의 문’이란 뜻이며 ‘숭정(崇政)’ 이름 자체는 ‘정사(政)를 드높인다(崇)’는 뜻이다.
역사
1617년(광해군 9년)에 경희궁 창건 당시에 착공하여 1620년 연간에 완공했다.
이후 여기서 왕과 신하가 함께 조회하는 조참, 과거합격자들의 시상, 외국 사신 접견 등 많은 행사를 거행했다. 1829년(순조 29년) 경희궁에 대화재가 일어나 내전 주요 건물들이 불탔으나 숭정문은 숭정전과 함께 다행히 피해를 면했다.
1860년대 경복궁 중건 때 대부분의 경희궁 건물이 철거되고 공사 자재로 쓰였다. 경희궁에는 건물 10여 채 정도만 남았는데 숭정전과 숭정문도 그 중 하나였다. 경희궁 영역에는 창고와 양잠소가 들어섰는데 이 때 세운 곡식 창고를 숭정문 밖에 두었다. 그나마도 1889년(고종 26년)에 숭정문의 일곽이 화재를 당해 곧 재건했는데, 1900년경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사진엔 숭정문과 행각이 없는 것을 보아 이마저도 그 사이에 철거한 듯 하다.
일제강점기에는 숭정전과 숭정문 언저리에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가 들어섰다. 8.15 광복 이후에도 경성중학교가 서울 중, 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을 뿐 학교 자체는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서울시가 '경희궁지 복원과 시민 사적 공원 조성 계획'를 세워 서울고등학교를 지금의 서초구 효령로로 이전시킨 뒤 1985년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하여 1991년 복원했고, 1993년과 1994년에는 행각 공사까지 완료하여 오늘에 이른다.]
[숭정전(崇政殿)은 광해군 8년(1616년)에 세운 것으로, 경희궁의 정전이다. 숭정전 일곽은 남향한 경사지에 축대를 조성하여 그 위에 건물이 들어서 있다. 숭정전은 행각으로 둘러졌으며, 뒤로는 자경전이 있다. 동ㆍ서 행각은 남에서 북으로 가면서 바닥과 지붕이 단을 이루며 높아지도록 조성되었다. 숭정전은 이중 월대 위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이건되어 본래 건물은 현재 동국대학교 안에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다. 현 위치의 건물은 1989년 12월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1994년 10월 주변 행각과 함께 완공한 것이다. 2층 윌대 중 상월대의 답도는 정각원에 남아 있고, 하월대의 답도는 복원된 경희궁의 숭정전에 있다. 상월대의 답도는 봉황, 하월대의 답도는 공작무늬이다. 철거전 경복궁 못지 않게 큰 규모를 자랑했으나 흥화문, 숭정전등 주요 건물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철거되어 경복궁의 10/1 정도가 되었다. 경복궁을 비롯한 3대궁은 모두 복원을 시행하고 있으나 경희궁은 그 궁궐들과 함께 이름을 올릴지언정 복원 조차 되지 않았다.]
[자정문(慶熙門)
조선시대 궁궐인 경희궁의 편전 자정전(資政殿)으로 들어가는 정문으로,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의 서북쪽 뒷편에 위치하고 있다. 1868년(고종5) 철거되었다가 1998년 복원되었다.
숭정전과 자정문 사이의 길은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지형 때문에 가파르고 폭이 좁아 불편함이 있었으나 기단을 7단으로 쌓고 계단 8개를 두어 쌓아올림으로써 편전 정문의 위엄을 높이는 결과가 되었다.
자정문은 정면3칸, 측면 2칸 규모에 기둥 상부에는 익공이 짜여졌으며 겹처마에 팔작지붕집의 건축물이다. 자정문과 자정전 사이에는 원래 혼령이 드나드는 길인 복도각이 있었으나 현재 복원되지 않은 상태이다.]
[경희궁 자정전(慶熙宮 資政殿)
임금의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임금이 평상시에 머물면서 정사를 펼치던 곳이었다. 전각의 명칭인 '자정(資政)은 '정사를 돕는다'라는 뜻이다.
역사
1617년~1620년(광해군 9~12) 경덕궁(현 경희궁)을 창건할 당시 지어진 건축물이다. 1623년과 1624년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으로 인해 창덕궁과 창경궁이 모두 전소되자, 조선 왕실은 경덕궁을 임시 정궁으로 삼고 자정전을 편전으로 사용하였다. 숙종 때 부터는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보관하는 진전(眞殿), 시신을 안치하는 빈전(殯殿) 등으로 사용되다가, 영조 때에 다시 편전으로 이용되었다.
고종 때에는 경복궁의 중건에 필요한 자재를 충당하기 위해 경희궁의 전각을 헐어 경복궁 재건에 이용하였는데, 이때 자정전의 건물도 훼철되어 경복궁의 자재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자정전이 있었던 자리에 경성중학교가 들어섰고, 1980년 경성중학교의 후신인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 신축 교사로 이전하였다. 1980년 경희궁 터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1985년부터 경희궁 터의 발굴 조사 및 복원사업이 본격적으로 실시되었고, 2001년에 경희궁 자정전이 복원되었다.
구조 및 형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건축물로,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2단의 기단을 만들었다. 원형의 주춧돌 위에 원형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익공 형식의 공포를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박공마루,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하였고, 망새와 용두, 잡상 등을 설치하여 지붕 위를 장식하였다.]
[경희궁 태령전(慶熙宮 泰寧殿)
경희궁의 진전(眞殿)으로,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봉안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전각의 명칭인 태령(泰寧)은 '넉넉하고 편안하다'라는 뜻이다.
역사
영조 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건축물로,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던 곳이다. 1776년(영조 52) 영조가 승하하자 정조는 태령전을 혼전(魂殿)으로 삼아 이곳에 영조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태령전에 모셔졌던 영조의 어진은 경현당(景賢堂)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이후 1786년(정조 10) 정조는 사망한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혼전을 태원전에 두고,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재우제(再虞祭: 장사를 지낸 뒤 첫 제사를 올리고 나서 첫 번째 유일(柔日)에 지내는 제사)를 지냈다.
고종 때에는 경복궁의 중건에 필요한 자재를 충당하기 위해 경희궁의 전각을 헐어 경복궁 재건에 이용하였는데, 이때 태령전의 건물도 훼철되어 경복궁 전각의 자재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태령전이 있었던 자리에 경성중학교가 들어섰고, 1980년 경성중학교의 후신인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 신축 교사로 이전하였다. 1980년 경희궁 터가 사적으로 지정되고, 1985년부터 경희궁 터의 발굴 조사 및 복원사업이 본격적으로 실시되어 2001년에 경희궁 태령전이 복원되었다.
구조 및 형태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건축물로,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2단의 기단을 만들었다. 방형의 주춧돌 위에 사각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익공 형식의 공포를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박공마루, 추녀마루에는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하였고, 망새와 용두, 잡상 등을 설치하여 지붕 위를 장식하였다. 태령전의 내부는 통칸으로 뚫려 있으며, 정면 가운데에 영조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다.]
12:25~12:35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55 번지에 있는 경희궁 흥화문(興化門)에서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26(정동) 번지에 있는
이화박물관으로 이동 [이동거리 0.6km, 10분 소요]
12:35~13:00 이화박물관 관람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서울 梨花女子高等學敎 Simpson紀念館)은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1915년에 준공된 옛 이화학당의 교사(校舍)로 현재 이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3호 정동 이화여고심슨기념관으로 지정되었으나, 2013년 10월 30일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으로 등록문화재 명칭이 변경되었다.
역사
이화학당은 한옥 교사를 사용하다가 1899년에 양옥 교사인 메인 홀(Main Hall), 프라이 홀(Frey Hall) 등을 신축하였다. 하지만 교실난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여 새 건물을 신축할 부지로 정동 30번지 땅을 구입하였다. 미국 컬럼비아 리버 지회의 홀부룩이 희사한 기금으로 1914년에 기공하여 1915년 3월에 건물을 준공하였다. 홀부룩의 기부금은 그의 동생 새라 심슨(Sarah J. Simpson)이 세상을 떠날 때 위탁한 것이어서 심슨기념관으로 명명하였다. 1922년 건물 서편에 280평의 교사를 증축하였고, 이후 주로 고등보통학교에서 사용하였다. 해방 이후 이화여자중학교의 교사로 사용되었으며 한국 전쟁 때 건물 동편이 일부 불에 탔다. 현재 건물은 1961년에 증축한 것이다. 한편, 메인 홀은 한국 전쟁 때 파괴되고 프라이 홀은 1975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특징
고딕풍의 3층 벽돌조 건물로 창문 아치 중앙과 모서리를 흰 화강암으로 장식하여 벽면에 붉은 벽돌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13:00~13:05 이화박물관에서 서울 중구 정동 15-3 번지에 있는 구러시아공사관으로 이동 [이동거리 292m, 5분 소요]
13:05~13:15 舊러시아공사관 탐방
[舊 러시아 공사관
서울시 중구 정동 15–1번지에 있는 구 러시아 공사관은 러시아인인 사바탄이 설계한 르네상스 양식의 조선 말기 건축물이다. 조로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뒤 1885년(고종 22)에 착공하여 고종 27년인 1890년 준공되었다. 이곳은 고종이 1896년부터 그 다음해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피신했던 아관파천의 역사적 현장이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하다가 병신 되면 못 가리”라는 참요처럼, 19세기 후반 조선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 같았다. 갑오년(1894)에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고 그 다음해인 을미년에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해 병신년인 1896년 2월 11일 새벽에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한 나라의 국왕이 비밀리에 궁궐을 탈출하여 타국의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는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공관에 옮겨 거처하기 시작했다. 그 뒤 친러ㆍ친미파 인사들로 구성된 새로운 내각은 곧바로 민심 수습을 위한 조칙을 발표했다. “상투를 장려하지도 않지만 단발령에 대해서도 가부간 언급을 피해 민심을 자극하지 않는다. 의병항쟁의 책임은 불문에 부치며 병력은 조속하게 소환한다.” 이 사태가 바로 친러세력과 러시아공사가 공모하여 비밀리에 고종을 현재 정동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아관파천이다.
러시아 공사관의 방 한 칸을 빌린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기거를 하였고, 탈출을 도와준 엄상궁이 시중을 들었다. 당시 고종을 지켜본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국의 국왕이 방 한 칸에 거처를 마련했는데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모처럼 편안한 안색이었다고 한다. 고종의 경복궁 생활이 얼마나 불안한 나날이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아관파천으로 유명한 구 러시아 공사관과 고종이 집무를 보던 덕수궁 중화전과 대한문. 덕수궁과 정동 일대에는 대한제국의 근대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홍집을 필두로 한 친일내각이 무너지고 친러내각인 박정양 내각이 조직되었으며 일본은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조선의 보호국을 자처하게 된 러시아가 점차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고종이 머무르는 1년 동안 조선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공사와 친러파에 의해 좌우되었다.
수많은 경제적 이권이 러시아에 탈취 당했으며, 이에 질세라 구미열강들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여 경인 및 경의선 철도부설권 등 중요 이권이 값싼 조건으로 다른 나라에 넘어갔다. 이처럼 국가의 주권과 이권이 크게 손상되자 국내외적으로 왕의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그리하여 고종이 러시아공관을 떠나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환궁을 결심하였다. 그날이 1897년 2월 20일, 궁궐을 떠난 지 만으로 일 년째 되는 날이었다. 환궁 후에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하여 독립제국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아관파천의 현장인 러시아 공사관은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의 건물은 벽돌로 된 2층 구조로 한쪽에 3층짜리 탑을 세웠다. 탑의 동북쪽으로 지하실이 있어서 덕수궁까지 연결되었으며, 입구에는 개선문 형식으로 된 아치문이 있었다. 해방 후에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던 러시아 공사관 건물은 6ㆍ25전쟁 때 불타고 탑 부분과 지하 2층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1973년 현재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머물렀던 방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제일 좋은 방으로, 내부가 르네상스풍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곳에 머물던 고종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의 흐름을 따라 산천도 변하고 서울 도심 풍경도 변했지만 러시아 공사관 3층탑에 올라서면 서울 사대문 안이 그림처럼 내려다보였다는 말을 실감할 수가 있다. 이렇게 갈 때마다 애틋한 상념을 주는 것이 구 러시아 공사관이다.]
[러시아공사관은 조선말 한로수호조약이 비준된 1885년 직후에 착공되어 1890년에 준공되었다. 르네상스식의 우아한 2층 벽돌집으로 러시아인 사바틴(Sabatine)이 설계하였다고 한다. 공사관이 건립된 일대는 연산군이 도성 밖으로 놀러가기 편리하도록 설치한 3개의 마장 중 하나였다. 고종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미국과 영국의 영사관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을 덕수궁이 인접한 곳에 두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러시아 공사관은 아관(俄館)이라 불리는데,우리에게는 고종의 아관파천 사건으로 익숙한 이름이다.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일본군에 시해를 당한 후 친일내각에 들어서자 경복궁에 유폐된 상태에 놓여 있던 고종을 친러파의 범진 등과 러시아공사 베베르가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1896년 2월 1일 세자와 함께 아관으로 옮겨오게 하였다. 그 결과 친일 김홍집내각을 무너뜨리고 친로 박정양내각을 조직하는 등의 국정을 처결하다가 다음해 2월 20일 경운궁으로 환궁하였던 일련의 과정을 아관파천이라고 한다. 이 곳에 있는 동안 고종은 음식을 담당하던 엄상궁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엄상궁이 나은 아이가 영친왕이다.]
13:15~13:20 구러시아공사관에서 서울역사박물관.경교장.강북삼성병원 정류장까지 도보로 이동 [5분, 289m 이동]
13:20~13:30 서울역사박물관.경교장.강북삼성병원 정류장에서 연신내역.연서시장(중) 정류장으로 가는 741, 704 버스 승차 대기
13:30~13:58 741, 704 버스를 타고 서울역사박물관.경교장.강북삼성병원 정류장에서 연신내역.연서시장(중) 정류장으로 이동 [28분, 13개 정류장 이동]
13:58~14:03 연신내역 3번 출구까지 도보로 이동 [5분, 233m 이동]
14:03~14:13 연신내역에서 구산역으로 가는 6호선 지하철 승차 대기
14:13~14:15 6호선 지하철을 타고 연신내역에서 구산역으로 이동 [2분 소요]
경복궁 안내도
사직단 안내도
사직공원 지도
경희궁 지도
[이화박물관&구 러시아공사관]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