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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암일집 제2권 / 기(記)
영호루 금방의 기문〔映湖樓金榜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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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1361, 공민왕10) 겨울 11월에 임금께서 난리를 피하여 복주(福州)에 이르렀다. 처음 광주(廣州)ㆍ충주(忠州)로부터 죽령(竹嶺)을 넘었을 때, 관리들과 백성들이 난리를 만나 당황하여 마치 놀란 노루와 엎드려 숨은 토끼처럼 손발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몰랐다. 비록 그들에게 명령을 내려도 걷잡을 수가 없어서, 임금께서는 마음속으로 근심하였다. 죽령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넓고 아득하기가 마치 천지가 가로놓인 것 같은 것이 경상도의 한 지역이었다. 죽령에서 북쪽으로 태백산(太白山)과 소백산(小白山)이 웅장하게 솟아 있고, 그 남쪽으로 구불구불 굽이진 곳에 10여 고을이 있다. 그중에 복주는 거진(巨鎭)으로, 산이 높고 물이 맑으며 풍속은 예스럽고 백성들은 순박하였다. 깃으로 장식한 큰 깃발이 엇갈려 하늘을 덮고 관면(冠冕)과 패옥(佩玉) 차림의 행렬이 이어지니 행궁(行宮)을 깨끗이 정돈하여 어가(御駕)를 인도하였는데 편안하고 침착하였다. 임금께서 마음속으로 기뻐하여 이곳에 어가를 멈추고 장수에게 적을 치도록 명령하였다. 얼마 있다가 경도(京都)를 수복하게 되자, 마침내 복주를 승격하여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삼고 조세를 감면해 주었다.
하루는 임금께서 복주의 영호루에 거둥하여 경치를 감상하였는데, 경도로 돌아온 뒤에도 멀리 떨어져 있는 영호루에 대한 생각이 그치지 않아 한가한 날 친히 붓과 벼루를 잡고 누의 현판으로 할 큰 글씨 세 자를 써서 하사하여 그 누에 걸게 하였다. 영호루는 호수를 굽어보고 있어 기둥과 서까래, 용마루의 그림자가 물속에 거꾸로 비친다. 무협(巫峽)이 그 왼쪽에 벌여 있고 성산(城山)이 그 오른쪽에 버티고 있으며, 큰 강이 옷깃과 띠처럼 둘러 있고 강물이 돌아 흘러들어서 호수가 되었다. 무릇 물의 근원과 지류가 머리를 동북쪽에 두고 꼬리를 서남쪽에 둔 것으로 하늘에 있는 것을 은하수라 한다. 그러므로 복주의 문사와 걸출한 인재가 때때로 이 기운을 받아서 그 사이에 태어나고는 했다. 대개 해와 달이 형상을 걸어 놓고 은하수가 문채를 이루는 것은 하늘의 문채이다. 이 영호루가 은하수를 당겨 누르고 서서, 하늘의 문채를 얻었으니 금벽(金碧)으로 새겨서 내세를 빛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임금의 빛나는 밝은 빛이 이곳에 임하여 천 년 동안 사모하여 바라보게 되었고, 나랏일의 기틀에 불행이 있었던 것이 도리어 영호루에는 다행이 되었으니,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옛날 우리 충렬왕께서 비록 태평한 시대를 만났지만, 여전히 동쪽 변두리에 일이 있어 이 지방을 순행하다가 이 고을의 영은정(迎恩亭)에 행차하여 또한 귀한 현판을 하사하셨으니, 또한 정자의 다행이 되었다. 앞의 일과 뒤의 일이 빛나서 모범이 되고 해와 달처럼 빛나서 아울러 한 고을의 영광이 되니, 아! 성대하도다.
이 영호루가 지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금빛으로 새긴 자획은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 같으니 영호루의 크기가 그 큰 현판에 걸맞지 않았다. 지정 무신년(1368, 공민왕17)에 고을의 수령인 신군 자전(申君子展)이 예전 제도를 고치니, 누각이 웅장하고 화려하여 바로 호수의 수면에 걸터앉게 되었다. 때로 누각에 오르면 아침 해가 올라올 때나 저녁달이 빛날 때에는 황금빛 현액(縣額)과 위에서 광채를 다투니, 곧 무지갯빛인 듯, 용이 싸우는 듯 갑자기 호수에서 변화가 일어날 것 같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울렁거리고 정신이 떨려 누각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이 편안할 것 같은 생각이 들게 한다. 진실로 그것을 바라보면 의젓하고 위엄이 있어 침범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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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집 제44권 / 기(記)
겸암정 기문 정축년(1757, 영조33) 〔謙巖亭記 丁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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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자는 하회(河回) 입암(立巖) 위에 있는데 겸암(謙菴) 유 선생(柳先生)이 평소 거처하던 곳이고 자신의 호를 삼은 곳이다. 안동(安東)은 예로부터 이름난 산수가 많아 동남 지역의 경승이 뛰어난 곳이라고 불리었는데, 그중에서도 낙동강 일대가 가장 뛰어나다. 강을 따라 수백 리에 걸쳐 맑은 못과 긴 여울에 기이한 암벽과 산기슭이 곳곳에 별처럼 뒤섞여 펼쳐져 있는데, 그중 하회 한 굽이가 가장 으뜸이다.
하회 아래위로 능파대(凌波臺)ㆍ달관대(達觀臺)와 옥연정사(玉淵精舍)ㆍ상봉정(翔鳳亭)ㆍ원지정사(遠志精舍)가 저 도화천(桃花遷)ㆍ만송주(萬松洲) 등 경승지와 더불어 모두 신령스럽고 범상치가 않아서 바라보면 마치 신선의 다른 세상 같은데, 그 가운데서도 이 정자가 가장 아름답다. 무릇 하회가 안동의 승경을 독점하였는데, 이 정자가 또 하회의 아름다움을 독차지한 것이다.
깨끗한 모래와 옥 같은 조약돌이 널리 퍼져 있고 짙푸른 절벽과 푸른 강물이 선명하게 연이어 펼쳐진 데다 짙게 깔린 운무와 울창하게 우거진 수목이 아침저녁으로 경치를 달리하는지라, 한번 눈길을 두면 뜰 안에서 한 발짝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모든 승경을 다 취하니 그 가진 바가 매우 풍부하고도 대단하지 않은가?
정자는 두 암벽 사이에 위치하였는데 골짝이 너르면서도 지세가 깊고 퍼져 있어서 집터는 그윽하고 지세는 막혀 있으니, 강기슭을 따라 지나는 자가 곁눈으로 보면 암벽의 우거진 덩굴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하여 종종 그곳에 정자가 있는 줄도 모를 지경이다.
서애 류성룡의형인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1539∼1601) 암석은 어디가고 토산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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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집 제44권 / 기(記)
농연서당 기문 병술년(1766, 영조42) 〔聾淵書堂記 丙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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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八公山)의 한 자락이 남으로 8, 9리를 달려 내려오다가 가파르게 끊어져서 암벽이 되었는데, 벽면이 모두 분을 바른 듯 희고 높이가 10여 길이나 된다. 시냇물이 용문(龍門)에서 나와 산을 돌아 내려오다가 암벽의 북쪽에 이르러 농연(聾淵)을 이루니, 양쪽에 큰 바위가 마치 삼태기처럼 옆으로 누워 있고 물이 그 가운데로 쏟아져 내리는데 짙푸른 물이 깨끗하고 차가워서 계곡 전체 중에서 가장 멋진 곳이다. 물소리가 시끄러워서 바로 옆 사람 말도 알아듣지 못하니 귀머거리 못〔聾淵〕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서 동쪽으로 수십 걸음을 내려가다가 또 남쪽으로 꺾이어 고연(鼓淵)을 이루는데, 큰 바위가 가로질러 솟아 있고 허공을 타고 내리치는 폭포가 뿜어내는 물보라로 한낮에도 물안개와 우렛소리가 등등하다. 물줄기가 흐르는 위아래로 수백 보 사이에 웅덩이가 되어 못을 이룬 것이 모두 구곡(九曲)이나 되는데 농연은 그 한가운데 위치하여 위아래를 모두 살펴볼 수 있다. 농연의 북쪽은 지세가 너르고 평탄하면서 깊고 그윽하여 정자를 지어서 굽어볼 만한 곳이다.
예전 숭정 경진년(1640, 인조18)에, 효묘(孝廟)의 대군 시절 사부인 대암(臺巖) 최공(崔公)이 인질이 된 대군을 심양관(瀋陽館)으로 배종(陪從)하기로 하였는데, 이미 길에 올랐지만 미처 따르지 못하게 되자, 이곳에 집을 짓고 은거하여 일생을 마쳤다.
돌아보건대 이제 백 년이 지난 후이니 유적이 씻은 듯이 없어져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갑술년(1754, 영조30)에 5대손인 최흥원 여호(崔興遠汝浩) 씨가 탄식하여 그를 중건할 생각을 가지고 여러 족인과 더불어 옛터를 닦아서 작은 집을 지었다. 집은 모두 세 칸으로 동쪽의 두 칸은 재로 만들어서 ‘세심재(洗心齋)’라 하고, 서쪽의 한 칸은 마루를 만들어 ‘탁청헌(濯淸軒)’이라 하였으며, 뒤에 몇 개의 기둥을 세워 승방처럼 만들고 합하여 ‘농연서당(聾淵書堂)’이라고 편액을 걸었다. 못을 파서 연꽃을 심고 단을 쌓아서 국화를 옮겨 심었으며, 매화ㆍ대ㆍ모란ㆍ해당화와 여러 기이한 화초를 줄지어 심었다.
농연서당(聾淵書堂) : 현재 경북 대구시 동구 용두동에 있다.
대암(臺巖) 최공(崔公) : 최동집(崔東㠎, 1586~1661)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진중(鎭仲), 호는 대암이다. 1640년(인조18)에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사부로 제수되었으나 심양(瀋陽)에 따라가지 못하자 팔공산(八公山)에 은둔하여 강학으로 생을 마치니, 당시에 숭정처사(崇禎處士)라고 불렸다. 저서로 《대암집(臺巖集)》이 전한다. 《대산집》 권48에 그의 묘갈명이 실려 있다.
현재 구곡(九曲)은 이름만붙여놨을뿐 개울수준 문헌에나오는 농연과는 거리가아주멈 농연이라이름붙일만한 폭포를찾지못하니산악인도 제대로 찾지못할정도의 수준의 곳(허접한곳)에 농연구곡이라설정해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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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집 제45권 / 발(跋)
권 상사 계주의 〈유지리록〉 뒤에 쓰다〔書權上舍季周游智異錄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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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은 방장산(方丈山)이라고 부르기도 하니 바로 서복(徐福)이 칭한 삼신산(三神山) 중의 하나이다. 그 설이 진실로 황당하여 믿을 수 없지만 도사와 승려들의 소굴이요, 고인(高人)과 명사들이 즐겨 유람하는 곳으로 태백산ㆍ비로봉ㆍ묘향산과 백중을 이룬다. 남명(南冥) 선생의 “천 길 봉우리 위에 옥 하나를 더 얹고〔千仞峯頭冠一玉〕”라는 구절을 외울 때마다 늘 꿈을 꾸듯 마음이 치달려서 한번 가 노닐고자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다.
현재 한반도는도교와관련한 유물 유적조차남아있는곳이없네요
자작나무:위도가 높은 곳에서 자라기 때문에 시베리아나 북유럽, 동아시아 북부, 북아메리카 북부 숲의 대표적인 식물. 하얗고 벗기면 종이처럼 벗겨지는 수피, 목재는 아주 단단하고 곧기 때문에 여러 지역의 많은 민족이 영험한 나무라고 여기며 신성시 하였다.
한반도에는 함경북도에 만주자작나무(Betula platyphylla Siberian Silver Birch), 북부에서 중부지방에 걸쳐 자작나무(Betula platyphylla var. japonica, Japanese White Birch)의 두 아종이 분포한다. 자작나무속에 속하는 것 중에서 한반도에 자생하는 종류로는 박달나무(B. schmidtii), 개박달나무(B. chinensis) 등등이 있다. 다만 아종이라고 하더라도 외관은 꽤 달라 하얗고 부분적으로 검은 외관의 자작나무와 달리 박달나무는 어두운 표면의 일반적인 나무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그 외 북유럽, 동유럽에서는 B. pendula와 B. pubscens종을 자주 볼 수 있고 툰드라 지대에서는 아예 관목 수준으로 자라는 B. nana종도 존재한다.
북·동유럽에서는 일본의 삼나무처럼 애증의 관계이다. 관상적·실용적인 가치 때문에 사랑받기도 하지만, 꽃가루 알레르기의 주범으로 지목받기 때문이다. 핀란드나 러시아에서는 사우나 속에서 이 나무의 가지를(잎이 달린 것)을 자기 몸에 툭툭 치는 것으로 술기운을 없앤다고 하며 20세기 후반 이후로 자일리톨 성분을 추출하여 천연감미료로 사용하고 있다. 가공하지 않고 자작나무 수액을 그냥 주스처럼 마시는 경우도 많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이 나무를 이용해 공예품을 만든다. 껍질로 그림을 만들거나 팔찌나 모자, 장신구들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수피는 기름기가 많기 때문에 습기에 강하고 불에 잘 탄다. 때문에 옛날 결혼식때 신방을 밝히는 촛불의 재료로 사용되었기에 흔히 결혼식 첫날밤을 '화촉(樺燭)을 밝히다'라고 한다. 방수성이 우수하므로 북미 원주민들이 카누를 만들거나, 여진족들이 배를 비롯한 각종 생활 용구의 재료로 사용하였다. 과거 고구려나 신라에서 종이 대용으로 사용되었는데, 천마총의 천마도 그림도 이 자작나무 수피로 만든 것이다.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에 자작나무 숲이 우거져 있는데어느새부터인가 수도권 곳곳에서도 가로수로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수도권도 냉대기후이기 때문에 식재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전 이남에서 심으면 기후가 맞지 않아 대부분 오래 가지 못하고 말라죽는 것을 볼 수 있다. 추위에 약해 남부지방을 벗어나면 숲을 이루지 못하는 대나무나 귤나무와 정반대 . 인제군에서는 '자작나무 숲' 말고도 산의 풍경 곳곳에서 소규모의 자작나무 군락들을 볼 수 있다(인용 나무위키)
백석(1912~1995)이 1938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쓴 백화(白樺)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山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甘露(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山너머는 平安道(평안도) 땅이 뵈인다는 이 山(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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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계집 제4권 / 계(啓)
포조와 포졸의 병폐를 논하는 계〔論逋租逋卒弊瘼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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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남쪽에서 나고 자라면서 백성의 고통을 눈으로 보았고, 왕래하는 사이에 병폐를 연달아 들었습니다. 백성들 생활의 기쁨과 걱정은 전하께서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이 비록 장황하지만 청컨대 하나하나 진언하겠습니다. 도망하여 떠돌아 다녀 집이 비게 되면 그 해가 일족이나 이웃에 남겨지는 것은 하루 아침 하루 저녁의 일이 아닙니다. 30년간 권세를 가진 간신이 멋대로 하고 수령이 불법으로 재물을 착취해 왔는데, 변방의 장수가 침탈하는 것은 더욱 심한 점이 있습니다.
각 포구에서 받는 물건의 종류, 예를 들어 자작나무 껍질, 꿩의 깃, 잡물이 섞이지 않은 쇠, 아교, 사슴 가죽 등의 물품을 무비사(武備司)에 맡겨서 징수하게 하는 것은 오히려 말할 만합니다. 진(鎭)으로 수자리를 살러갈 때에 이르면 먼저 도방미(到防米)를 바치고, 또 소값〔牛價〕에 해당되는 무명, 날삼, 표백한 모시, 목면, 백색 풀솜, 참기름, 수유(水油), 꿀, 밀납, 장 및 모든 과일을 바칩니다. 모든 일용 물품을 거두지 않는 것이 없으니, 명분도 없이 지나치게 거두는 세금 또한 이미 많습니다.
변방의 장수에게 아침저녁으로 제공하는 것은 주진(主鎭)의 관청에서 밥 지을 쌀, 장을 담을 콩, 말먹이를 준비하여 지급해야 하지만, 이것은 자신들이 써버리고 군졸이 돌아가면서 공급하게 합니다. 변방의 장수가 첩이 있고 노비와 말〔馬〕도 있고 군관(軍官)도 있으며, 군관 또한 첩도 있고 노비와 말도 있습니다. 모든 필요한 물품은 모두 군졸이 가지고 있는 양식에서 요구하니, 마침내 자루가 모두 비기에 이르렀습니다. 의복을 제대로 입지 못해 도롱이를 걸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무릇 군역은 1년에 육군은 40일, 수군은 60일입니다. 수자리 서지 않는 달은 또 일족이나 이웃 때문에 침탈을 당하니 침탈당하지 않는 달이 없고, 곤궁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농사일에 부리는 소 및 전답을 모두 판 연후에 중이 되거나 품팔이하거나 또는 걸식하게 됩니다. 군대의 정원이 줄어드는 것은 오로지 이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매번 민간의 걱정과 탄식을 염려하여 간절하게 명령을 내리시는데, 이것이 이른바 ‘다른 사람에게 잔인하게 하지 못하는 마음’이니 진실로 나라의 만세의 복입니다.
맹자가 “좋은 마음이 있다고 해서 좋은 정치를 할 수는 없고, 좋은 법이 있다고 해서 자신이 법률을 행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잔인하게 하지 못하는 마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잔인하게 하지 못하는 정치를 행한 연후에 일반 백성은 은택을 입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어진 정치를 행하려면 또한 차마 하지 못하는 정사를 받들어 실행하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인재를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록 그 인재를 얻었어도 또한 걸림돌이 있습니다. 대개 공물과 세금 및 요역은 비록 확정된 규정이 있지만 답습하여 폐단이 생기고, 오랫동안 쌓여 고치기 어려운 폐단 또한 많습니다. 이러한 제도로써 수령에게 책임을 지우면, 수령은 비록 자신이 훔치지 않더라도 걸림돌이 있기 때문에 뜻에 맞게 행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지켜온 일은 경솔하게 고칠 수 없다.”라고 말하지만, 신의 소견으로는 이렇게 하는 것은 통상의 방법에 구애되어, 그때의 실정에 맞게 권도를 써서 중도를 조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종조에는 인물이 많고 창고가 가득 차서, 일을 만나 조치하는 때에 혹 문(文)을 지나치게 숭상하는 일이 있어도 오히려 정치에 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민가가 비고 재물은 고갈되었으니, 만약 한결같이 전례를 준수하면서 변통할 줄 모르면, 제반 경비를 귀신처럼 신속하게 운반할 수 없어서 반드시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데 이를 것입니다. 공자가 “은(殷)나라는 하(夏)나라의 예의 제도에 기초했으니 줄이고 더한 것을 알 수 있다. 주(周)나라는 은나라의 예의 제도에 기초했으니 줄이고 더한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삼강오상(三綱五常)은 예의 주요 내용이니 본래 증감할 것이 없으나, 제도나 문물은 때에 따라 증감하였으니,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가령 선대 임금이 지금 인민의 초췌함을 본다면 이미 정해진 원칙이라 할지라도 또한 고쳐야 할 것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전하의 마음이 곧 선대 임금의 마음입니다. 청컨대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여 그 폐단이 발생하는 곳을 고치면, 백성은 조금의 은혜를 입을 수 있을 것입니다.
포조(逋租) : 도망한 호(戶)가 미납한 조세, 즉 미납세(未納稅)를 말한다.
포졸(逋卒) : 군역(軍役)의 의무를 피해 도망한 사람이다.
무비사(武備司) : 조선조 때 병조(兵曹)에 속한 분사(分司)의 하나로, 군적(軍籍)ㆍ마적(馬籍)ㆍ병기(兵器)ㆍ전함(戰艦)ㆍ점열(點 閱)ㆍ군사훈련ㆍ방수(防戍)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았다.
주진(主鎭) : 각 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주재(駐在)하는 병영(兵營)이나 수영(水營)을 말한다.
◆덕계(德溪) 오건(吳健1521~1574)은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선비 출신의 관료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많은 선비 출신의 관료가 있었지만, 자신이 배운 바를 우직할 정도로 힘써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1521년(중종16) 경상도(慶尙道) 산음현(山陰縣 지금의 산청군(山淸郡)) 덕천리(德川里)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강(子强), 덕계는 그의 호, 본관은 함양(咸陽)이다.그는 어려서 부친으로부터 배운 가학(家學)의 바탕 위에서, 당시의 대학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남명의 대표적인 제자가 되었다. 그 뒤 다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남명과 퇴계의 장점을 두루 흡수
1572년(선조5) 남명이 서거한 뒤, 남명 문하의 장석(丈席)의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남명이 서거한 지 겨우 2년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남명의 뒤를 계승하여 남명학파에서 어떤 역할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덕계는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덕계가 남명을 처음 만난 것은 31세 때였고, 퇴계를 처음 만난 것은 43세 때였다. 남명이나 퇴계에게 의문나는 것을 질문하고 학문의 바른 방향을 제시받은 것이지, 구체적인 학문의 체재는 그 이전에 다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 1669~1745)은 숙종, 경종, 영조 세 왕대에 걸쳐 활동하던 정치가이자 문인 학자이다. 조부 이정악(李挺岳 1610~1674)이 파주 목사를 지낸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부친 우사(雩沙) 이세백(李世白, 1635~1703)이 관료로서 왕성하게 활동하여 좌의정에 올랐다. 세족으로서의 명망을 얻은 가문에서 출생한 도곡은 비교적 순탄하게 벼슬길에 올라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영의정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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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곡집 제25권 / 기(記)
이천(伊川)의 아름다운 경치를 유람한 기록〔伊川諸勝遊覽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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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은 예로부터 산수가 아름다운 경승(景勝)이 많았으나 모두 우리 고을에 있다 하여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아서 해를 넘기도록 유람하지 않았었다. 금년 봄에 우연히 조원(調元)과 함께 산수(山水)를 이야기하다가 흥이 일어서 나란히 말을 타고 유람하는 길을 떠났다.
몇 걸음을 가면서 마을의 집들이 산골짝에 드문드문 붙어있는 것을 보니, 자못 상쾌하고 시원하였다. 진담(陳潭)을 건너는데, 못물은 맑아 바닥이 보이고 바위틈에서 쏟아지는 물이 여울져 튀어오르며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또다시 몇 걸음을 가자, 산세가 우뚝하게 높은데 줄지어 선 여러 봉우리들이 다투어 말 앞에 기이한 모습을 드러내니, 경치가 각별함을 깨달았다.
또다시 몇 걸음을 가자 와룡대(卧龍臺)가 나오니, 고을의 아름다운 경관이었다. 매끄럽게 빛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높이가 거의 30여 길〔丈〕인데 구불구불한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으며, 벼랑 가득히 철쭉꽃이 때마침 피어 대 아래에 있는 못 전체를 밝게 물들여서 그 경치가 더욱 기이하니, 내가 일찍 이곳에 와서 감상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못의 넓이는 거의 수십 묘(畒)에 가까웠는데, 깊은 곳은 시퍼렇고 얕은 곳은 모래톱을 이루고 있었다. 못 가운데에는 많은 돌들이 어지러이 솟아있고 못가에는 또 모두 흰 바위들이 있었다. 못가에 대(臺)가 있는데, 대 위에 두 그루의 소나무가 구불구불 서려 있어 늙은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반석(盤石)이 굽이져 물속으로 들어가서는 움푹 패여 골을 이루고 불룩 솟아 대를 이루었으며, 혹은 평평하게 펼쳐져 평상(平床)과 같고 혹은 흩어져서 바둑알과 같으며 혹은 사람이 서 있는 것처럼 뾰족하고 혹은 짐승이 엎드려 있는 것처럼 괴이하니, 각양각색의 모습을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었다.
갈대와 억새풀이 바위 사이에 우거져 있는데 섣달에 내린 눈이 아직 다 녹지 않았다. 나무하는 아이가 소를 냇가에 매어놓고 물속에 들어가 작살로 물고기를 잡는 것을 보니, 호복(濠濮) 사이에 유유히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조원에게 이르기를,
“이 못이 만약 풍악산(楓岳山)의 만폭동(萬瀑洞)에 있었다면 화룡담(火龍潭)과 선담(船潭)과 구담(龜潭) 사이에서 우열을 다툴 만한데, 궁벽한 곳에 위치하여 그리 칭송받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라고 하니, 조원 또한 내 말이 옳다고 하였다.
또다시 보전천(甫田川)을 건너 고산(孤山)을 지났는데, 산 위에 수십 그루의 어린 소나무 숲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푸르고 연하여 사랑스러운 것이, 골짝에 우뚝 솟아 하늘을 찌르는 큰 소나무의 자태보다 도리어 나았다.
얼건담(嵲建潭)을 지나가노라니, 못에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데 콸콸대는 폭포 소리가 들을 만하였으며, 위에 세 그루의 소나무가 있어서 시야가 밝고 상쾌하였다. 또 그 위는 용연(龍淵)인데, 그 사이에 산마을이 그윽하고 외롭게 자리하고 있으니, 바로 초연히 진세 밖의 생각이 들었다. 용와암(龍卧巖)을 지나고 또다시 바위 하나를 지나가니, 도로 사이의 물소리와 산 빛 등 모든 것이 나의 흥을 돋우기에 충분하였다.
소림사(小林寺)에 들어가니, 절벽과 산이 굽이굽이 휘감아 돌아서 동구가 매우 깊었다. 사찰의 누대 이름은 강선루(講禪樓)이고, 십여 명의 승려가 있었으며 또 새로 세운 비석이 있었다.
남천(南川)의 상류를 건너서 오송암(五松菴)에 들어가니, 이 암자는 바위에 걸쳐 지었는데, 정결하여 앉을 만하였다. 바위 위에 대가 있는데, 옛날에 다섯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오송암이라 이름하였으나 지금은 두 그루만 남아 있다. 또 승려는 없으며 거사(巨師) 네 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오송암은 매우 높은 곳에 위치하여 읍내를 굽어보고 있어서 어지러이 펼쳐진 밭두둑과 산봉우리와 여울물이 시야 속에 숨었다 나타났다 하니, 비록 용암(龍巖)의 아름다운 경치에는 미치지 못하나 소소하게 아름다운 흥취는 있었다. 또다시 남천(南川)의 상류를 건너서 관아로 돌아오니, 경인년(1710, 숙종36) 2월 21일이었다.
이달 24일에 또다시 조원(調元)과 허환(許綄) 제경(濟卿)과 함께 배로 이수(伊水)를 건넜는데, 물의 왼쪽과 오른쪽에는 흰 돌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바위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그 위는 바로 옛 성산(城山)인데, 옛날에 돌로 쌓은 성터가 지금까지도 완연하다. 지나간 자취를 두루 둘러보노라니, 절로 옛날을 그리워하는 감회가 일었다.
옛 이주진(伊洲鎭)을 지나 사인암(舍人巖)에 이르니, 이곳은 또 용암과 기이함을 다투는 곳이었다. 푸른 절벽이 수려하게 솟아서 위로 일고여덟 개의 봉우리가 되었는데, 정교하고도 가파른 바위는 그 형세가 하늘을 능멸하듯 솟아 있고, 아래에는 반석이 층층이 쌓여 있고 앞에는 물이 흘러 어귀를 휘감아 돌고 있으며, 기암괴석(奇巖怪石)이 물 가운데에 흩어져 있었다.
폭포수는 부딪쳐 소리를 내고 물방울들이 튀어 오르는 것이 마치 싸락눈이 어지러이 날리는 듯하며, 물의 형세는 맑은 물결이 부딪치며 빠른 속도로 사납게 달려가니, 참으로 볼만하였다.
회현(檜峴)을 넘으니, 그윽한 시냇물이 숲과 바위 사이로 쏟아져 나오는데 그 소리가 쟁쟁하여 몇 리를 가도록 끊이지 않았다. 석용담(石龍潭)을 따라가자 못 가운데 두 개의 바위가 서로 마주하고 있으니, 이름이 형제암(兄弟巖)이다.
군지포(軍池浦)에서 점심을 먹고 산도현(山道峴)을 넘어서 사도(蛇島), 용연(龍淵)을 따라 응탄애(鷹灘厓)를 넘었는데, 절벽이 매우 길게 이어져 있고 맑은 여울과 흰 조약돌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경거리였다. 여울물이 흐르다가 돌을 만나면 콸콸 소리를 내며 내닫는데, 수십 리를 가도 물소리가 귓전에 남아 끊이지 않았다.
원현(院峴)을 넘으니, 옛날 광덕원(廣德院)의 터이다. 저녁에 추곡촌(楸谷村)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다음 날 일찍 출발하였다. 산허리에 남기(嵐氣)와 안개가 반쯤 덮여 있었는데 아침 해가 떠서 비추자 서로 광채를 발산하니, 광경이 매우 기이하였다. 추곡천을 건너 구준애(九蹲厓)를 넘으니, 또다시 절벽이 깎아지른 듯 서있고 맑은 시냇물이 굽이쳐 흘러서 완연히 사인암의 경치와 같았다.
왕봉담(王鳳潭)을 지나고 개연천(開蓮川)을 건너서 개연애(開蓮厓)를 넘었는데, 이후로부터는 암석과 여울과 폭포 등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아름다운 풍광이라 미처 다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 대암(臺巖)을 지나니, 바위틈으로 폭포수가 나란히 떨어져서 그 아래에 또다시 여울과 폭포를 이루었다. 용암을 지났는데 모습이 용과 같기 때문에 이름하였다고 한다.
식송촌(植松村)을 지나자니 낙락장송(落落長松) 여덟 그루가 빽빽하게 늘어섰는데, 나옹(懶翁)과 무학(無學)이 종자를 구해서 심었다고 한다. 송대(松臺) 아래에서 잠시 쉬었다.
또다시 푸른 물과 절벽을 만났다. 몇 걸음 거리에 석대(石臺)가 있고 곁에는 마치 인공으로 쌓아 놓은 듯한 천연의 푸른 돌이 있는데 낚싯대를 드리우는 바위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소리가 매우 우렁차서 사람의 말소리도 분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대벽(臺壁)의 위는 소나무와 삼나무가 아니면 철쭉이 자라고 있어, 만약 꽃 필 때를 만난다면 그 아름다움은 반드시 곱절이 될 것이다.
갈봉(葛峰) 아래에 이르니, 승려들이 남여(籃輿)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기에 남여를 타고 길을 떠났다. 산허리에 이르러 잠시 휴식을 취하노라니, 산 밖의 여러 봉우리들이 시야에 펼쳐져 있었다. 산 위에는 눈이 쌓여 있는데 길가에는 국화가 활짝 피어 있으니, 또 하나의 기이한 풍경이었다.
옛 귀락사(歸樂寺) 터를 넘어서 보살사(菩薩寺)에 들어갔다. 이 사찰은 무학이 지정(至正) 연간에 창건하였고 홍무(洪武) 2년(1369, 공민왕18)에 중수(重修)하였으며 지금의 사찰은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하는데, 거주하는 승려가 겨우 20여 명이었다.
대웅전(大雄殿)은 삼인봉(三印峰)과 마주 대하여 시야가 상쾌하니, 이른바 삼인봉은 또한 기록할 만한 고사가 있다. 앞에는 늙은 노송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데 푸르고 울창하였다.
이 사찰에는 고적이 많았다. 이름이 무애호(無碍瓠)라고 하는 굽은 병은 푸르고 붉은 비단으로 끈을 만들었으며, 무학이 양식을 구걸할 때 쓰던 물건이라고 하는데, 나무로 만든 표주박을 검게 칠한 것이었다.
푸른 종이에 은자(銀字)로 쓴 《화엄경(華嚴經)》 한 축(軸)과 《연생보명경(延生保命經)》 한 첩(帖)에는 상단에 그림이 그려 있는데 만력(萬曆) 정유년(1597, 선조30) 명나라 서안 장공주(瑞安長公主)가 쓴 것으로, 둘 다 알록달록한 비단과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표지를 하였다.
《금광명경(金光明經)》 한 첩과 금자(金字)로 쓴 《연화경(蓮華經)》 일곱 첩에도 상단에 그림이 그려 있는데 신묘하고 빼어나 감상할 만하였다. 이 가운데 두 첩은 하단에 “홍무 6년(1373, 공민왕22) 11월 10일에 공경히 쓰다.〔洪武六年十一月十一日敬書〕”라고 쓰여 있고, 또 “나의 죽은 배우자인 휘의노국대장공주(徽懿魯國大長公主)는 공로(功勞)나 덕업(德業)으로 보면 생존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추수(追修)함에 유감(遺憾)이 없으므로 이 묘한 불경을 얻어서 금자로 쓴다.”라고 하였다. 이는 분명히 공민왕(恭愍王)의 필적인데, 필법이 기묘하였다. 끝에는 “증명사보제존자(證明師普濟尊者)”라고 쓰여 있고 아래에 ‘나옹(懶翁)’ 두 글자를 새긴 도장이 찍혀 있었다.
또 《연화경》 한 첩이 있으니 흰 바탕에 인쇄한 책으로, 필법이 또한 묘하였다. 끝에는 “시주인 봉익대부 전 덕령부 우사윤 이영원과 함께 발원한 선녀 조씨 묘청과 전 낭장 문석기〔施主奉翊大夫前德寧府右司尹李英遠同願善女趙氏妙淸前郞將門碩琦〕”라고 쓰여 있었다.
또 《연화경》 한 첩은 금자로 그림을 그리고 아래에 경문을 썼는데, 그 글씨 또한 금자인 듯하였으나 색깔이 자못 달라서 마음으로 괴이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아랫단에 ‘손을 찔러 피를 내어 썼다.’는 내용과 ‘지정 9년(1349, 충정왕1) 기축년 9월 일에 손을 찔러 피를 냈다.〔至正九年己丑九月日出血〕’ 등의 글자가 있는 것을 보고서야, 피를 섞어 썼기 때문에 그 색깔이 이와 같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불전(佛殿) 왼쪽에 길이가 십여 길〔丈〕이 되는 아름드리나무가 있는데, 승려는 계수나무라고 하나 자세히 알 수 없다.
채진암(采眞菴)과 선주암(善住菴)의 옛터를 거쳐 부도령(浮圖嶺)을 지났는데, 네 기의 부도와 벽허(碧虗)ㆍ천곡(天谷)ㆍ취음(翠陰) 등의 비석이 있었다.
관음암(觀音菴)에 들어가서 만경루(萬景樓)에 오르니, 누대 아래에 또 맑은 샘이 있는데 돌방아가 저절로 방아를 찧고 푸른 노송나무가 울창하였으며, 운달산(雲達山)이 마치 손을 모으고 읍(揖)하는 것처럼 둘러서 있었다.
불전 위의 대에 영산전(靈山殿)이 있는데 붉은 색으로 단청을 입혀 휘황찬란하였다. 옥돌〔玉石〕로 만든 부처 25기가 있는데, 승려는 겨우 8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 위에 있는 작은 암자는 이름이 원명암(圓明庵)인데 바위산이 기이하고 빼어나서 푸른빛이 뚝뚝 떨어지는 듯하였다. 안장을 벗겨놓고 잠시 쉬니, 혼과 뼛속까지 시원하여 나도 모르게 속세에 찌든 마음이 다 사라지는 듯하였다.
밤에 두 사리(闍梨)로 하여금 각각 범패를 노래하게 하고 이어서 가사(袈裟)를 입고 바라를 치고 법고(法鼓)를 두드리게 하였더니, 온갖 놀이가 일제히 펼쳐지는데 비록 어지럽고 떠들썩하여 법도가 없는 듯하였으나, 자세히 보니 나름대로 절도가 있었다. 평소에 익숙하게 익힌 자가 아니면 이렇게 잘할 수 없을 것이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름이 고달(高達)이란 사냥꾼이 산골짝으로 멧돼지를 쫓아갔는데, 멧돼지는 바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화신(化身)으로 화살을 맞고 동굴로 들어가서 본래의 모습인 관세음보살로 변신하였습니다. 고달은 이로 인하여 계율(戒律)과 선정(禪定)의 도를 닦아 부처가 되었으니, 동굴에는 아직까지도 화살과 화살촉이 남아 있습니다. 이 산의 본래 이름이 운달산(雲達山)이었는데 고달산(高達山)이라고 고쳐 부르게 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라고 하니, 그 말이 허황하기는 하나 산문(山門)의 한 옛 이야기가 될 만하였다. 거주하는 승려는 30명인데 함께 말을 나눌 만큼 문자를 아는 자가 제법 있었다.
이날 밤 내리기 시작한 비가 다음 날까지도 개지 않으니, 구름이 산을 감싸고 있어서 산마루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산 전체가 안개 사이에 숨었다 나타났다 하니, 이 경치는 진실로 그림으로 그릴 만하였다.
의상대(義相臺)가 절정에 있고 위에 보살암(菩薩菴)이 있는데, 벽곡승(辟穀僧)이 거처한다고 하나 길이 험하여 올라가지 못하였다. 제경(濟卿)이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올라갔는데, 별다른 기이한 경관은 없었다고 하였다.
암자의 승려가 돼지털로 만든 붓을 올리며 암자의 편액을 써달라고 부탁하기에 써 주었다. 비 때문에 그대로 머무노라니 무료하기에 늙은 승려인 계화(桂華)로 하여금 《능엄경(楞嚴經)》을 읽게 하고는 베개에 기대어 들었으며, 다시 승려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놀이를 하게 하여 구경하였다.
다음 날 날이 밝자 비가 잠깐 개었으므로 남여를 타고 출발하였다. 산꼭대기를 지날 적에 길이 매우 험하고 쌓인 눈이 허벅지까지 이르러서 거의 죽을 뻔하다가 겨우 편안해졌으니, 이 고개가 고달현(高達峴)이다.
영은암(靈隱菴)의 옛터를 지나고 나서 또 여러 번 아름다운 경치를 만났다. 범패를 잘하는 승려 학문(學文)으로 하여금 여울 가에 앉아 노래하게 하였는데, 마치 여러 악대(樂隊)에서 북을 치고 춤을 추는 것과 같아 바위 골짝이 모두 응하여 메아리가 숲 그늘 사이에서 나오니, 범패 소리가 기이하고 빼어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무량곡(無量谷)에 이르니, 바위산이 깎아지른 듯 높이 솟아 있는 것이 마치 고상한 사람이 우뚝 서 있는 듯하였고, 푸르고 밝아 아름다운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사방의 산이 모여들어서 아홉 겹의 비단구름을 펼쳐놓은 듯하여 그윽하고 기이하며 넉넉하고 온화하니, 붓으로는 다 서술하기 어려웠다.
바위가 있는 곳을 다 지나가자 곧바로 확 트여 넓은 곳이 나타나니, 또 하나의 특별한 경치였다. 이곳에 이르면 곡산(谷山) 땅이니, 고달산의 남은 지맥(支脈)이다. 산수(山水)와 여울과 물굽이가 굽이굽이마다 더욱 아름다우니, 두 사람과 함께 한참 동안 시를 읊조리고 구경하느라, 시간이 지났는데도 차마 버리고 떠나가지 못하였다.
초촌(梢村)에서 점심을 먹고 어염현(魚鹽峴)을 넘으니, 이곳을 지나면 다시 본부(本府 이천)의 땅이다. 마탄(麻灘)의 다리를 건너서 갈산(葛山)의 탕정(湯井 온천)을 구경하고 감로사(甘露寺)에 들어갔다. 옛날에는 탕정이 여덟 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다섯 개가 막혔고 나머지 세 개만 대나무 홈통을 통해서 탕정으로 들어가는데, 누린 냄새가 독하게 나고 유황(硫黃) 기운이 있었으며 물은 뜨거웠으나 심하지는 않았다. 고질병이 있는 자가 이 물에서 목욕하면 자못 효험이 있다고 한다.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이곳에 행차하여 행궁(行宮)을 두셨는데 지금은 허물어졌으니, 지금의 사찰 터가 바로 행궁이 있던 곳이라 한다. 갈산(葛山)은 사찰 앞에 바로 마주하여 병풍으로 가려놓은 듯한데, 지세가 자못 높고 넓게 트였다.
이튿날 광복동(廣福洞)으로 가려고 다시 한 여울물을 건너서 전탄(箭灘)의 다리를 건넜는데, 푸른 돌과 흰 모래가 또 다른 아름다운 경치였다. 자작현(自作峴)을 넘어 벽서정(辟暑亭)에서 잠시 쉬었는데, 마주 서있는 큰 소나무 아래로 세찬 여울물이 소리 내며 흘러가니, 문득 마음속이 탁 트여 후련해짐을 느꼈다.
또다시 작은 배로 현석진(玄石津)을 건넜는데, 큰 배들이 나루를 드나들고 있었다. 장인암(丈人巖)과 주암(酒巖)을 지나갔다. 주암에는 작은 구멍이 있고 구멍 가운데 물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 물을 떠서 마셔보니 그 맛이 술과 비슷하여 주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송애(松厓)를 넘어서 광복동으로 들어가니, 사면의 여러 산들이 빙 둘러 있어 마치 자물쇠로 잠가 놓은 듯하고 가운데에 큰 들이 열려 있었는데, 밭두둑이 종횡으로 교차하고 환하게 트여 넓어서 따로 한 굽이의 별천지를 이루고 있었다.
산마을이 듬성듬성 있고 개와 닭이 조용하니, 이곳에 오자 마음과 정신이 아늑하여 무릉도원(武陵桃源)도 이보다 낫지는 못할 것이라고 느껴졌다.
온 골짝의 가운데는 모두 깨끗한 물과 흰 돌이 있는데, 가장 기이한 것은 부담(釜潭)이었다. 부담은 큰 가마솥처럼 깊이 패여 있고 폭포수가 바위를 따라 내려와 부담에 떨어지는데 물이 치달리는 기세가 매우 웅장하였다. 못물이 안개를 이루어서 그 속에 음험한 짐승이 있는 듯하였고, 바위 위에는 학사(學士) 박사원(朴士元)이 직접 쓴 율시 한 수가 새겨 있었다.
나는 광복동이 이주(伊州 이천)의 절경(絶境)이라고 익히 들었는데, 지금 보니 참으로 그러하였다. 골짝이 매우 깊고 험하였으나 동구(洞口)로 들어온 뒤에는 비할 데 없이 탁 트이고 광활하였으며, 전원(田園)에는 또 귤주(橘洲)의 아름다움이 있으니, 충분히 세상을 피해 길이 은거할 만한 낙토(樂土)인데도, 일찍이 이곳에 와서 집을 짓고 산 자가 없고 유람하여 아름다운 경치를 기록한 자도 없으니, 이곳은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겨서 제대로 된 임자를 기다린 것이 아니겠는가.
돌아와 수문(水門)에 이르니, 반석과 샘물이 흐르는 것이 부담과 비슷하나 조금 작았다. 물 가운데 있는 선암(船巖)이라는 돌 위에 연달아 7, 8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옛날에 만든 석문(石門)이라고 한다.
또 사동(寺洞)에 이르러서 광덕사(廣德寺)의 옛터를 보았는데, 두 탑과 깨진 부도(浮圖)와 돌계단이 있고 돌들이 매우 많이 쌓여 있으니, 이 절이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양음산(陽陰山)을 올려다보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덮여 있었는데, 조금 뒤에 산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날리는 눈발이 얼굴을 때리므로 급히 마을 집으로 들어가 피하였다. 다시 배가 드나드는 나루를 건너 가리주촌(加里州村)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다음 날 아침에 사군암(使君巖) 아래를 지나가니 푸른 절벽이 있는데 그 앞으로 물이 감돌아 흐르고, 광현(廣峴)을 넘으니 고개 아래 바위 사이에 또 두 개의 폭포가 흘러내리는데 마치 흰 명주를 드리운 것과 같았다.
견탄애(犬灘厓)ㆍ문암(門巖)ㆍ원현(院峴)ㆍ응탄애(鷹灘厓)ㆍ산도현(山道峴)을 넘었다. 한지막촌(漢池幕村)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회현(檜峴)을 넘고 이수(伊水)를 건너서 관아로 돌아왔다.
중대사(中臺寺)는 학봉산(鶴峰山)에 있는데, 이천부와의 거리가 20리로 여기에도 볼만한 아름다운 경치가 있었다. 3월 초하루에 배를 타고 부단진(釜端津)을 건너서 중대사로 들어가 복흥루(福興樓)에 오르니, 아래로는 그윽한 시냇물을 굽어보고 위로는 비취빛 봉우리를 마주하고 있었다.
멀리 안협(安峽)의 여러 산들을 바라보니 강물은 좌우에 서로 비쳐 띠처럼 둘러 있고, 복흥루는 지극히 높고 밝고 환하여 시원한 바람이 저절로 불어와서 사람을 엄습하였다. 옛날에는 무주암(無住菴)이 이 사찰의 꼭대기에 있어 무학(無學)이 거주하였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져 쑥대밭이 되었다.
동구(洞口)에는 산석(山石)이 즐비하고 지나는 길이 구불구불하여 자못 그윽하고 깊은 정취가 있었다. 새로 만든 금부처를 별당에 모셨는데 아직 선실(禪室)에 봉안하지는 못하였다.
조원(調元)과 제경(濟卿)이 뒤쫓아와서 승려들로 하여금 법고를 두드리고 바라를 치면서 여러 가지 놀이를 벌이게 하니 회포를 풀기에 충분하였으나, 한스러운 것은 승려의 수가 너무 적고 사찰의 규모가 경치와 서로 걸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금년 봄 : 경인년(1710, 숙종36) 봄을 이른다. 도곡은 41세 되던 기축년(1709) 5월 26일에 이천 부사(伊川府使)에 제수되어 약 8개월간 근무하였다.
조원(調元) : 도곡의 생질인 권섭(權燮, 1671~1759)의 자로, 호는 옥소(玉所), 본관은 안동이며 권상명(權尙明)의 아들이다. 14세에 아버지와 사별하였기 때문에 백부인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의 각별한 보살핌과 훈도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 때에 19세로 소두(疏頭)가 되어 상소하는 등 한때 시사에 관심을 갖기도 하였으나, 우암 송시열 등이 사사되는 참극을 겪은 뒤로는 벼슬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일생을 전국의 명승지를 찾아다니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저서로는 간행본 《옥소집》이 있다.
호복(濠濮) …… 느낌 :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세속을 벗어난 무위 자적(無爲自適)의 심경이 우러나온다는 말이다. 호복은 호량(濠梁)과 복수(濮水)의 병칭으로 《장자》 〈추수(秋水)〉에 보이는데, 호량은 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가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해서 논한 곳이고, 복수는 장자가 초왕(楚王)의 초빙을 거절하고 낚시를 하던 곳으로, 모두 속세에서 벗어난 곳을 이른다. 진(晉)나라의 간문제(簡文帝)가 화림원(華林園)에 들어가서 좌우를 돌아보며 “마음에 맞는 곳을 찾으려면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울창하게 우거진 이 수목 사이에 들어서니, 호량과 복수 가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저절로 든다.〔會心處不必在遠, 峠然林木, 便自有濠濮間想也.〕”라고 한 데서 연유하였다. 《世說新語 言語》
[주] 거사(巨師) : 불교에서 계를 받은 남자 신도에 대한 존칭어로, 속가에 머물고 있지만 도를 이룬 큰 선생님이란 의미이다. 여자 신도를 높여서 보살이라고 칭하는 것과 같다.
[주] 허환(許綄) 제경(濟卿) : 1674~? 본관은 김해, 자는 제경(濟卿)이다. 도곡의 증조부 이후천(李後天, 1591~1664)의 사위인 허승(許昇)의 아들이다. 1711년(숙종37)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주] 나옹(懶翁)과 무학(無學) : 나옹(1320~1376)은 고려 말 선종(禪宗)의 고승이며 공민왕(恭愍王) 때의 왕사로 나옹은 법호이고 법명은 혜근(惠勤)이다. 21세 때 출가하여 회암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원나라 연경의 지공대사를 찾아가서 심법(心法)의 정맥(正脈)을 이어받고 1361년(공민왕10)부터 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는데, 왕명에 의해 밀양 영원사(瑩源寺)로 옮기던 중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하였다.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조선조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학(1327~1405)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명승으로 무학은 법호(法號)이고 법명(法名)은 자초(自超)이다. 18세에 출가하여 묘향산(妙香山)에서 수도하였다. 공민왕 때 원나라 연경(燕京)에 가서 지공대사(指空大師)를 찾아 불법(佛法)을 구하고, 이어서 법천사(法天寺)에 가서 나옹선사(懶翁禪師)의 제자가 되었으며, 조선 건국 후에는 태조(太祖)의 부름을 받아 왕사(王師)가 되어 한양 천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연경에 다녀온 후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머물다가 금강산 금장암(金藏庵)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주] 지정(至正) 연간 : 지정은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연호로, 1341년부터 1367년까지의 27년간을 이른다.
[주] 삼인봉은 …… 있다 : 삼인봉은 세 개의 관인(官印) 형상을 하고 있는 봉우리로, 이에 관한 고사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1권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 개국정도(開國定都)〉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태조가 즉위한 뒤 팔도(八道) 방백(方伯)에게 하교하여 무학을 찾게 하였다. 경기ㆍ황해ㆍ평안 3도의 방백이 함께 길을 나섰는데, 황해도 곡산(谷山) 고달산(高達山)에 고승이 홀로 거처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곳으로 가 세 방백의 인끈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 두고 짚신을 신고 걸어서 초암(草菴)에 당도하니, 한 늙은 중이 쇠코잠방이를 입고 몸소 남새밭을 매고 있었다. 3도 방백이 앞으로 나아가 ‘이 암자는 누가 처음 세웠습니까?’ 하고 물으니, ‘내가 손수 세운 것이오.’ 하였다. ‘무엇을 보신 바가 있어서 이곳에 자리를 잡았습니까?’ 하니, ‘저 삼인봉 때문에 자리 잡았습니다.’ 하였다. ‘어찌하여 삼인봉이라 합니까?’ 하니, ‘세 개의 봉우리가 앞에 있으므로 삼인이라 합니다. 만일 이곳에 집을 짓게 되면, 3도의 방백이 골짜기 가운데 있는 나무 위에 세 개의 인(印)을 걸어 놓을 때가 있을 것이니, 이것이 그 응험(應驗)입니다.’ 하였다. 3도의 방백이 ‘이분이 무학임에 틀림없다.’ 하고, 그와 함께 돌아와 태조에게 아뢰었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여 무학을 스승의 예로써 대우하고, 이내 도읍을 정할 땅을 물었다.” 방백은 관찰사를 이른다.
[주] 추수(追修) : 추선(追善)과 같은 말로,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행하는 불사를 이른다. 보통 49일까지는 매 7일마다, 그 뒤에는 1백 일과 기일(忌日)에 불사를 시행한다.
[주] 증명사 : 승려가 구족계(具足戒)를 받을 때 입회하여 증명해주는 고승(高僧)을 이르는데, 전하여 증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주] 흰 …… 책 : 저본에 ‘왈질인본(曰質印本)’으로 되어 있는 것을 문맥에 비추어 전사의 오류로 보고 ‘왈(曰)’ 자를 ‘백(白)’ 자로 수정하였다.
[주] 손을 …… 썼다 : 원문의 ‘자혈(刺血)’은 손을 찔러 피를 내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불도를 수행하는 사람이 자기 몸의 피를 뽑아 경문을 베껴 쓰는 것을 이른다.
[주] 벽허(碧虗)ㆍ천곡(天谷)ㆍ취음(翠陰) : 승려의 이름으로 보이나 자세하지 않다.
[주] 푸른 노송나무 : 저본에 ‘창회(倉檜)’로 되어 있는 것을 문맥에 비추어 전사의 오류로 보고 ‘창(倉)’ 자를 ‘창(蒼)’ 자로 수정하였다.
[주] 사리(闍梨) : 범어(梵語)인 ‘아사리(阿闍梨)’의 약칭으로 승려를 이른다.
[주] 범패 : 인도(印度)의 소리라는 의미로 범음(梵音) 또는 어산(魚山)이라고도 하는데, 불교의 의식을 진행할 적에 사용하는 염불을 포함한 모든 불가(佛家)의 노래를 이른다.
[주] 벽곡승(辟穀僧) : 곡식을 끊고 솔잎, 대추, 밤 등을 생식하며 수도에 전념하는 승려를 이른다.
[주] 무릉도원(武陵桃源) :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園記)〉에 나오는 말로, 이상향이나 별천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진(晉)나라 때 호남(湖南) 무릉의 한 어부가 배를 저어 복숭아꽃이 아름답게 핀 수원지로 올라가 한 동구에서 진(秦)나라의 난리를 피하여 온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그곳이 하도 살기 좋아 그동안 바깥세상의 변천과 많은 세월이 지난 줄도 몰랐다고 한다.
[주] 음험한 짐승 : 일반적으로 여우를 가리키나, 여기서는 용 또는 이무기를 이른 것으로 보인다.
[주] 박사원(朴士元) : 박태보(朴泰輔, 1654~1689)로 사원은 그의 자이고 호는 정재(定齋), 본관은 반남(潘南), 시호는 문열(文烈)이며 박세당(朴世堂)의 아들이다. 1677년(숙종3)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벼슬이 홍문관 응교(應敎)에 이르렀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여 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珍島)로 유배 도중 옥독(獄毒)으로 노량진에서 별세하였다. 시문에 능하고 서법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주] 귤주(橘洲) : 중국의 호남성(湖南省) 장사시(長沙市) 서쪽 상강(湘江) 가운데에 위치한 비옥한 지역으로, 예로부터 귤이 많이 생산되었고 또 풍경이 아름다워 송(宋)대에는 8경 중 하나로 꼽혔다. 두보(杜甫)의 〈악록산도림이사행(嶽麓山道林二寺行)〉 시에 “무릉도원 인가는 그 구조가 단순하고 귤주 지역 전토는 변함없이 기름지네.〔桃源人家易制度, 橘洲田土仍膏腴.〕”라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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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은집 제4권 / 문(文)
추흥정기〔秋興亭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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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龍山)은 평소에 호산(湖山)의 즐거움이 있는 곳으로 일컬어져 왔으며, 토지도 비옥해서 오곡이 모두 잘되었다. 게다가 물로는 배가 다니고 땅으로는 수레가 다녀서 밤과 낮을 두 번만 지나면 경도(京都)에 도착하기 때문에 귀인(貴人)들이 이곳에 별업(別業)을 많이 경영하곤 하였다.
여말(麗末)의 문인인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그 당대부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장과 병칭될 정도로 높이 평가되었다. 이색은 “우리 동방의 문사 가운데 도은에 비견할 만한 이가 드물다.”라고 칭찬하였고 정몽주(鄭夢周)는 “목은을 이어 홀로 문장을 천단하니, 찬연한 별들이 가슴속에 벌여 있는 듯하다.”라고 찬상하였으며, 권근(權近) 역시 “고려의 문헌 가운데 세상에 이름난 것으로 목은의 성대한 시문과 도은의 우아한 시문만 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특히 후대의 최립(崔岦)은 “목은의 문과 도은의 시가 우리 동방의 시문 가운데 으뜸이다.”라고 하여 도은 시의 가치를 한층 높이 평가하였다. 이러한 평가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도은은 문장가, 특히 시인으로서 후세에 알려졌다 . 문장가로서만이 아니라 정치가, 사상가, 교육가로서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성주 몽송루기〔星州夢松樓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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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洪武) 기원(紀元) 8년(1375, 우왕 원년)에 의성(義城)의 정후(丁侯)가 조정의 선임(選任)을 받고 경산(京山)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부임한 뒤로 정사가 형통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생업을 즐겼다. 이에 치소(治所) 북쪽에 누대를 세웠는데, 재목을 자르고 기와를 굽는 것을 때에 맞게 하고, 공사는 손을 놀리고 있는 자들을 동원하였으며, 누대의 규모는 서까래를 높이 하여 전망이 트이게 하고, 단청을 질박하게 하여 검소함을 드러내었다.
공사가 마무리되자 여러 노선생들을 누대 위에 초청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낙성을 축하하는 한편, 그 자리에서 누대의 이름을 정하려고 하였다. 술이 몇 순배 돌았을 적에 정후가 일어나서 말하기를 “누대가 이루어졌으니, 그 이름을 여러 선생들에게 부탁드립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공(諸公)이 이 누대는 정후를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하면서 몽송(夢松)이라는 두 글자를 들어 현판으로 걸게 하였으니, 이는 또한 옛사람의 사업(事業)과 명위(名位)를 정후에게 기대하는 뜻으로 그렇게 명명한 것이었다.
이에 정후가 주위를 돌아보다가 나에게 말하기를 “여러 선생들이 누대의 이름을 지었으니, 기문은 그대가 써 주어야 하겠소.”라고 하였다. 내가 사양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누관(樓觀)과 대사(臺榭)를 설치하는 목적은 낙(樂)을 붙일 곳을 두기 위해서이다. 낙은 형체가 없는 것이니, 반드시 어딘가에 붙여야만 형상화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른바 낙이라는 것은 사람이 각자 얻는 것인데, 낙으로 삼는 그 대상을 보다 넓게 확대하면 모든 사람이 우리의 형제요 만물이 우리의 벗이 되면서〔民同胞物吾與〕 화기가 훈훈하게 우러나오고 한 몸으로 융화되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저 유람하고 관광이나 하는 저 사람들은 낙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협소하다고 하겠는가. 그런 까닭에 목민관(牧民官)이 된 자는 자기가 낙으로 삼는 것이 어떠한지 잘 살펴보아야만 할 것이다.
지금 정후가 이 누대에 올라서면, 산봉우리가 끝없이 이어지고 험준한 산이 겹겹이 에워싼 가운데 강물이 길게 흐르고 평야가 넓게 펼쳐지면서 안개와 구름이 아득히 뒤덮인 사이로 그 광경들이 숨었다 비쳤다 나왔다 들어갔다 할 것인데, 이를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마치 궤안(机案) 위에 놓여 있는 것처럼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가령 저 나무꾼들은 숲 속에서 노래할 것이요, 농부들은 들판에서 구가(謳歌)할 것이요, 여행객들은 그늘에서 휴식할 것이며, 나아가 우마(牛馬)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금조(禽鳥)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등 만물이 모두 자기의 낙을 즐기고 있을 텐데, 이는 정후가 만물과 함께 공유하는 낙일 것인 만큼 역시 한번 굽어보고 한번 우러러보는 사이에 유연(悠然)하고 이연(怡然)한 낙을 누릴 수가 있을 것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정후가 지금 여기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대개 문서를 처리하는 일과 같은 것을 잘할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뒷날 정후가 순리(循吏)로서 최고의 성적을 거두고 조정에 들어가서 공경(公卿)과 승상(丞相)의 직위에 오른다면, 제공(諸公)이 이 누대를 몽송(夢松)이라고 명명한 것이 더욱 징험될 것이다. 나는 정후의 정사가 원래 아름다운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지금의 이 거조 역시 다른 사람들과 낙을 공유하는 뜻이 들어 있기에 기문을 짓는 것을 한사코 사양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춘추》에서는 무슨 토목 공사를 일으킬 때마다 반드시 기록하곤 하였는데, 이것은 허여하지 않는다는 뜻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대가 지금 이 기문을 지은 것은 무슨 뜻에서인가? 전(傳)에도 ‘시대가 어려운 때에 사치스러운 일을 행한다.〔時詘擧嬴〕’라고 비난하지 않았던가.”라고.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있어서도 똑같은 문자로 똑같이 기록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아름다운 것도 있고 추악한 것도 있었다.”라고.
창룡(蒼龍) 병진년(1376, 우왕2) 단오(端午) 전 3일에 봉상대부(奉常大夫) 전(前) 전리 총랑(典理摠郞) 보문각직제학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寶文閣直提學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이숭인은 쓰다.
위쪽 지형그림정도는되야 첩첩산중이죠
몽송(夢松)이라는 …… 하였으니 : 앞으로 삼공(三公)의 지위에 오르기를 축원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삼국 시대 오(吳)나라 정고(丁固)가 자기 배 위에 소나무가 자라나는 꿈을 꾸고는 말하기를 “송(松) 자를 파자(破字)하면 십팔공(十八公)이 되니, 18년 뒤에는 내가 공(公)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뒤에 그대로 되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三國志 卷48 吳書 孫皓傳 裴松之注》
모든 …… 되면서 : 송유(宋儒)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첫머리에, 우주 만물 모두가 천지(天地)를 부모로 하여 태어난 만큼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형제요 만물은 우리의 벗이다.〔民吾同胞 物吾與也〕”라고 전제하고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한 말이 나온다. 《古文眞寶後集 卷10》
시대가 …… 행한다 : 《사기(史記)》 권45 〈한세가(韓世家)〉에 ‘시출거영(時絀擧贏)’이라고 나오는데, 《자치통감(資治通鑑)》 주 현왕(周顯王) 35년 조에서는 ‘시굴거영(時詘擧贏)’으로 인용하였다. 이 말을 진(晉)나라 서광(徐廣)이 해설하기를 “당시 쇠모한데도 사치를 일삼는다는 뜻이다. 즉 국가에 어려운 일이 많아서 형세가 여의치 않으니, 이런 때에는 백성의 급한 상황을 돌보아야 마땅한데, 거행하는 일을 보면 거꾸로 여유가 있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국가를 다스리는 도를 잃었다는 말이다.〔時衰耗而作奢侈 言國家多難而勢詘 此時宜恤民之急 而擧事反若有贏餘者 失其所以爲國之道矣〕”라고 하였다.
춘추필법(春秋筆法)에 …… 있었다 : 《춘추》 장공(莊公) 4년 조 경문(經文)에 “겨울에 노(魯)나라 장공이 제나라 사람과 고(郜)에서 수렵하였다.〔冬 公及齊人狩于郜〕”라고 하였는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의 해설에 “공이 어째서 미천한 자와 수렵하였는가. 사실은 미천한 자가 아니고 제나라 임금인 양공(襄公)이다. 제나라 임금이라면 어째서 사람이라고 칭했는가. 원수와 수렵한 것을 휘했기 때문이다. 이 앞에도 그런 일이 있었고 이 뒤에도 그런 일이 있는데, 어째서 여기에서만 유독 기롱했는가. 원수에 대해서는 단 한 번만 기롱하여 비난하는 것이 춘추필법이다. 그래서 중한 경우를 가려서 기롱하는 것인데, 원수와 수렵한 것이 가장 중했기 때문이다. 원수에 대해서는 어째서 단 한 번만 기롱하는 것인가. 원수와 어느 때고 만날 가능성이 있는데, 만난다고 하는 것 자체가 큰 기롱이라고 할 것이요, 또 만날 때마다 모두 기롱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 한 번만 기롱할 뿐이요, 그 나머지는 똑같은 문자로 똑같이 기록할 따름이다.〔公曷爲與微者狩 齊侯也 齊侯則其稱人何 諱與讎狩也 前此者有事矣 後此者有事矣 則曷爲獨於此焉譏 於讎者將壹譏而已 故擇其重者而譏焉 莫重乎其與讎狩也 於讎者則曷爲將壹譏而已 讎者無時焉可與通 通則爲大譏 不可勝譏 故將壹譏而已 其餘從同同〕”라는 말이 나온다. 또 은공(隱公) 7년 조 경문에 “등나라 임금인 후작(侯爵)이 세상을 떠났다.〔滕侯卒〕”라고 하였는데, 《춘추공양전》의 해설에 “어째서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가. 미소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미소한 나라라면 어째서 후라고 칭했는가. 나라의 크고 작은 것을 상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춘추필법에서는 임금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똑같은 호를 쓰는 것을 혐의하지 않으며, 아름답거나 추악하거나를 따지지 않고 똑같은 문자로 표현하는 것을 혐의하지 않는다.〔何以不名 微國也 微國則其稱侯何 不嫌也 春秋貴賤不嫌同號 美惡不嫌同辭〕”라는 말이 나온다.
이모지가 청주목으로 부임하는 것을 전송한 시의 서문〔送李慕之赴清州牧詩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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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촌(桃村 이교(李嶠)) 선생이 경자년(1360, 공민왕9)에 감시(監試)를 주관하였는데, 그때 세상에서 인재를 얻었다고 일컬었다. 그중에서 정사(政事)로 뚜렷이 드러난 자를 거론한다면, 충주(忠州)의 김 통헌(金通憲), 전주(全州)의 황 통헌(黃通憲), 영광(靈光)의 유 조봉(柳朝奉), 그리고 청주(淸州)의 우리 이 봉순(李奉順) 모지(慕之) 씨 같은 분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이 동시에 묘당(廟堂)에서 선발되어 외방에 나가 백리(百里)의 수령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성황을 이루었다고 하겠는가. 교유하는 친구들이 모지 씨를 전송하면서 노래하고 시를 지어 시권(詩卷)을 이룰 즈음에, 모두들 내가 동년의 대열에 끼었다는 이유로 시권의 첫머리에 서문을 쓰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지 씨는 감시에 입격한 뒤로 책을 읽고 글을 지으면서 예부(禮部)의 시험에 계속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털끝만큼도 마음속으로 동요하지 않아서 날이 갈수록 그의 학문이 진보하였는데, 재상이 그의 사람됨을 알아보고서 “호걸지사(豪傑之士)가 꼭 모두 진사(進士)를 통해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조정에 천거하여 시재어사(試才御史)가 되게 하였다. 얼마 뒤에는 여흥(驪興)의 수령이 되었고 또 전라도의 안렴사(按廉使)가 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눈부신 성적(聲績)을 거두었다. 이번에 나가서도 그동안 배운 실력을 더욱 발휘할 것이니, 나처럼 구구하게 일득(一得)의 이름을 주워 모은 사람과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의 차이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런 나의 말을 어디에다 쓰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오늘날의 주목(州牧)은 옛날 제후(諸侯)의 유제(遺制)로서, 한 경내(境內)의 정령(政令)을 자기가 뜻한 대로 행할 수 있으니, 그 소임이 얼마나 중하겠는가. 선비가 벼슬을 해서 이 정도에 이른다면 이 또한 벼슬의 꿈을 이루었다고 말할 만도 한데, 옛사람이 벼슬의 꿈을 이루게 되면 태만해지기 쉽다는 훈계를 했고 보면, 내가 모지 씨에 대해서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없다고도 하겠다.
청주 고을은 실로 동남(東南)의 교통의 요충지로서 그 땅이 넓고 그 백성이 많으며 그 일이 번잡하기 때문에, 국가가 그곳을 다스리는 관리를 보내는 데에 어려움을 느껴 왔다. 더군다나 지금은 해구(海寇)의 난리를 겪은 뒤라서, 땅이 넓은 것은 옛날 그대로이고 일이 번잡한 것도 옛날 그대로인데 유독 남아 있는 백성만은 옛날에 비해서 열에 둘이나 셋도 되지 않으니, 그곳의 관리 노릇하기가 어려운 것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모지 씨가 태만해지기 쉽다는 훈계를 생각하고서 자족(自足)하지 않고 한결같이 여흥의 수령과 전라도의 안렴사 때처럼 행해 나간다면, 묘당에서 선발한 뜻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요, 교유하는 친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내가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불행히도 도촌(桃村) 선생이 일찍 하세(下世)하시어 우리 동년들이 정사로 뚜렷이 드러나 이와 같이 성황을 이루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셨다는 점이다. 모지 씨가 어찌 더욱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처럼 …… 사람 : 도은이 어쩌다가 운 좋게 예부(禮部)의 문과(文科)에 급제했다는 뜻의 겸사이다. 일득(一得)은 “아무리 바보라도 일천 가지 생각을 하다 보면 한 가지쯤 좋은 꾀를 낼 수 있다.〔愚者千慮 必有一得〕”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옛사람이 …… 보면 :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설원(說苑)》 〈경신(敬愼)〉에 “관직은 벼슬의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면서 태만해지게 되고, 병은 조금 나아지면서 더치게 되며, 화는 게으름에서 생겨나고, 효는 처자 때문에 쇠해진다. 이 네 가지를 잘 살펴서 처음 시작할 때처럼 끝까지 신중히 해야 한다.〔官怠於宦成 病加於少愈 禍生於懈惰 孝衰於妻子 察此四者 愼終如始〕”라는 말이 나온다.
도촌(桃村) 선생이 …… 점이다 : 이교(李嶠)는 1361년(공민왕10)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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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유집 제14권 / 잡저(雜著)
한성부 중수 상량문〔漢城府重修上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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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두성은 북쪽에 있어 밝게 늘어선 별들이 그곳을 향하고, 왕도는 중앙에 자리잡아 주위의 팔방을 거느린다. 이곳 한성부는 큰 관청으로 실로 경기(京畿)의 근본이다. 이 때문에 내사(內史)라는 명칭이 먼 옛날 주(周)나라 때 시작되었고, 빙익(馮翊)이라는 호칭도 한(漢)나라에서 계속 듣게 되었다. 역대 왕조에서 수도를 정한 일을 찾아보면 대부분 윤(尹)의 직임을 두어 교화를 펼쳤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찬란히 천명에 응하여 큰 기업을 받았다. 두 번 거북점에서 모두 길조가 나온 것은 한(漢)나라가 받았던 복이었고, 지도와 호적을 한 관서에 거둔 것은 국초부터 시작되었다.
세 명의 정승을 두어 다스림을 관장하게 하고, 네 명의 연사(掾史)를 나누어 정무를 돕게 하였다. 하소연을 들어주어 선량한 백성에게 원통한 일이 없도록 하고, 금지하는 일을 관장하여 모진 풍속을 개혁하여 순종하게 하였다. 다스림은 가까운 곳부터 시작해야 하니, 그 직임이 중요하지 아니한가.
동강(東江) 신익전(申翊全, 1605~1660)
동강유집 제15권 / 응제록(應製錄)
충청도 관찰사 이후원에게 내리는 교서〔敎忠淸道觀察使李厚源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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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대한 계책을 누구와 함께 도모하겠는가. 항상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을 급히 구해야 하고, 위태로운 때에는 특출한 인재에게 의지하여 특별히 한 지방을 다스리는 중임을 맡겨야 한다. 내 뜻이 가는 바이며 여러 사람이 입을 모아 추천하였다.
저 백제의 옛땅을 돌아보니 실로 삼보(三輔)와 같은 근기 지역에 인접하였다. 어염과 토지가 넉넉하여 남해의 이익을 독차지하고, 가옥과 인구가 번성하여 부유하기가 동한(東韓)의 으뜸이다.
한반도 충청도는 소금의이익도없고 서해에서 이익을얻고 가옥과 인구도 많지않죠
역사왜곡은 중공이나 우리나라도마찬가지 근대때엔 백두산과 장백산은 다른 2개의산으로 썼다가 지금은 백두산=장백산같은 하나의산이라하고있음 산명은너무너무많은데 끼워맞출만한 산이부족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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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차대전당시 영국외무부장관이었던 조지 커즌은 20대에 조선을 방문하고 기록한 책에서, 마포에서 한양도성까지 30mile(48km)의 거리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용산은 마포의 옆이었으니 2틀거리가 틀림없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