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섭디 매서운 강추위...
그 날밤도 우린 한옥집 안방,
래디오 앞에 모여 '전설따라 삼천리' 라는
가끔은 무섭기까지한 방송을 듣고 있었다.
밤 열시가 넘은 시간...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나가본 엄마는 얼마지 않아
어떤 아줌마 한 분을 모시고 들어왔다.
한눈에도 임신한 모습을 하고 있던
그 아줌마는 많이 지치고 힘들어 보이셨다.
엄마 또한 ,
막내 동생을 임신한 상태였으므로
그냥 돌려보낼수 없었던 모양이셨던지
복조리를 잔뜩 끈에 엮은 자루를
마루에 내려 놓게 하시곤
보기에도 안스러울 정도로
퉁퉁 부은 발을 이끌어
안방 아랫목으로 들어오라 하셨다.
워낙 친정 아버지께서
흰 가래떡을 좋아하셨던지라
정초에 떡국을 끓인다고
미리 뽑은 떡이 있었기에
쫄깃한 가래떡과 꿀물,
찬 동치미 국물을 엄마는 내어 오셨다.
먹은지 얼마 안되었는데도 또 모여 앉는
동생들을 미루어 놓으시며
아줌마 드시기를 권하셨다.
손등이며 , 볼이며 성한데 없이
트고 얼어버린 아줌마...
아줌마의 눈에 글썽이던 눈물...
그리고 , 꺽꺽 삼키시던 그 모습,
그 시간, 엄마의 눈에도
같은 눈물이 맺히고 계셨다.
조금 몸을 녹히며 쉬신 아줌마가 나가시며
복조리 하나 두고 가겠노라 하셨는데
엄마는 극구 그냥 가라 말리시는것이었고
실랑이를 하던 아줌마도 지치셨는지
발길을 돌려 행상을 떠나시는것이 보이셨다.
'엄마, 복조리 받으시지 그랬어요.'
'그거 팔아 얼마 남겠니? 이 추운날...
아저씨가 니어카에 다치셔서
산모가 산달 앞두고 저리 다닌다는데...
아까 그 아줌마가 잘 먹고 간것만도 엄마는 고맙다...
많이나 팔고 들어감 좋겠네만... '
그 다음날 새벽...
엄마의 손에 전날 밤 눈에 익은 복조리가
두 개가 들려 있었다.
'그 니가 이걸 두고 갔네...
뭐 그리 남았을거라구...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팔아준대도 극구 사양터니...'
엄마는 아무도 없는 대문밖을 한 참 보고 계셨고
나도 유난히 크다 느낀 복조리를
두 개나 손에 들어 보게 되었다.
내 나이 아홉살 ...
그 해 겨울 엄마가 되었을 그 아줌마와
새해, 봄 막내를 낳으신 우리 엄마.
아직도 친정에 가면
지하실 한 쪽 벽에 걸린 두 개의 복조리.
제 위치에서 당당히 걸려있진 못하지만 ...
그래도 버리지 못하고 내내
아빠의 애장품으로 남은 복조리.
막내를 낳고는 차츰 우리집도
아빠의 사업이 1호, 2호, 확장을 해나가셨고...
막내동생을 복둥이라고도 했던것처럼...
어쩜 우리집에 잠시 들러가신
그 아줌마의 따스한 맘씨 때문에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부자가 된것은 아닐까?
그래서 언제나 따스하게 남은 기억 한 쪽 ~
우리 님들께 직접 전하지는 못하지만 ...
마음에 담아, 행복 가득 걸러 담아가시라고
복조리를 나눠드리려 합니다.
모두 모두 받아 가세요.
▶ 복조리는...
섣달 그믐날 자정 이후부터
정월 초하룻날 아침 사이에 사서 걸어 놓는 조리.
섣달 그믐날 자정이 지나면 조리 장수들은
복조리를 사라고 외치면서 돌아다닌다.
각 가정에서는 밖에 나가
1년 동안 쓸 만큼의 조리를 사는데
어느 집은 식구 수대로 사서
가족의 머리 맡에 놓아 두기도 한다.
식구 수가 적은 집은 한쌍을 사서
'ㅅ'자 형으로 묶은 뒤
방문이 마주 보이는 방벽이나
부엌의 물동이가 놓인 벽 위 기둥에 걸어둔다.
섣달 그믐날 밤에 사지 못한 집은 설날 아침에 사는데
이것은 일찍 살수록 좋다고 믿기 때문이다.
몇 개를 한데 묶어
방 귀퉁이나 부엌에 매달아 두었다가 쓰는데
손잡이에 예쁜 색실을 매어 모양을 내기도 하며
그 안에 돈이나 엿 등을 넣어두어
일년 동안의 원화소복을 기구하는
정성의 징표로 삼기도 한다.
조리는 쌀을 이는 도구이므로
그 해의 복을 조리와 같이 긁어 모아 건진다는 뜻에서
이 풍속이 생긴 듯하며
복조리를 문 위나 벽에 걸어 벽사진경하는 풍속은
조리의 무수한 눈이 신체의 눈과 같이
광명을 상징하는 데서 온 것으로 추측된다.
▶ 아낙네는 복조리, 남정네는 복갈퀴
섣달 그믐날. 발을 가늘게 짠 복조리를
이웃집 마당에 던져두고 세배 겸 조리값을 받으러 다녔다.
조리값은 깎지도, 무를 수도 없다.
복을 깎고, 복을 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는 용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사람들은 설날 새벽 복조리를 기둥에 걸어놓고
무사안녕을 빌었다.
복조리는 정월 보름까지 사고 팔았다.
복조리는 쌀을 일듯 복을 일어주고
재앙을 걸러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고 팔 았다.
"해동죽지"에는
「예로부터 습속에 섣달 그믐날의 해가 저물면
복조리 파는 소리가 성안에 가득하다.
집집마다 사들여서 붉은 실로 매어 벽에 걸어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농경문화가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복조리가 나왔음을 추측할 수 있다.
복조리는 아낙들이 복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것이고
남정네들은 복갈퀴를 사고 팔았다.
새해들어 처음 사는 갈퀴가 바로 복갈퀴.
경상도에서는 정월 첫장이 열리는 날 복갈퀴를 샀고,
전라도에서는 정월이나 2월중에 복갈퀴를 샀다고 한다.
요즘은 복조리를 만드는 마을이 거의 없다.
돌을 골라내야 할 때는 생활필수품이었지만
이제 조리 자체가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다.
지리산 동당마을과 함께 백아산 자락의
송단마을 정도가 겨우 맥을 잇고 있다.
동당마을에서는 현재 36가구 전세대가 복조리를 만들어 판다.
복주머니도 비슷한 개념으로 복을 담을수 있게
정월달에 선물을 하는 물건중 하나였다한다.
또 같은 주머니를 만들어 숯을 담아 두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