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라는 나라의 스케일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룹투어의 두 번째 날 첫 여행지의 자금성(紫禁城, Purple Forbidden City)이었다. 현재는 그 성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 이름마저도 고궁박물관(古宮博物館)이라고 불리고 있는 이 성은 중국 명과 청대의 황실(皇室) 궁궐이었다. 동서의 폭이 750M, 남북의 길이가 1,000M, 그 면적인 약 72만 평에 이르는 장방형의 이 거대한 성채는 900여 개의 건물과 8,700여 칸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 앞쪽으로 천안문(天安門)이 보이는 단오문(端午門)을 필두로 태화문(太和門)을 거치면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 등의 대궐이 있는 외조(外朝, Outer Court)의 권역이 자리하고 있다. 중국의 황제가 정사를 보던 곳이었다.
그 위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건청문(乾淸門)을 들어서게 되는데 이 권역이 바로 황제를 비롯한 황실의 사람들이 기거하던 곳인 내정(內廷, Inner Court)이다. 그리고 이 내정의 중심 안쪽엔 성채 안의 또 다른 성채라고 할 수 있는 내궁(內宮), 말 그대로 금지된 하나의 도시 Forbidden City가 있다. 곤영궁(坤寧宮), 교태전(交泰殿), 건청궁(乾淸宮) 등으로 이루어진 내궁은 황제의 거처로 그야말로 엄중한 보호가 이루어졌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내정에는 황궁의 식솔들이 기거하는 건물 이외에도 양심전(養心殿)이라는 교육수련관과 어화원(御花園)이라는 정원이 있기도 하다.
자금성이라는 이 성채가 가지고 있는 온갖 역사와 그 역사의 뒤안길에 파묻혀 있을 그 역사보다도 더 파란만장했던 사연과 이야기들은 아마도 이루 말할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 화려하고 강했던 나라의 천운이 그 기운을 다하기 시작할 무렵 이 성의 모든 것들은 물론 중국 전체를 휘둘렀던 서태후(西太后)의 음모에 빠져 우물에 빠져 죽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진황비(瑨皇妃)가 목숨을 던졌다는 진비정(瑨妃井)이라는 우물의 이야기는 너무도 극적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가이드가 말해주지 못한 얼마나 깊고 깊은 역사의 숨결과 숱한 사연들이 이 넓고도 넓은 구중궁궐의 곳곳에 숨어 있을까? 10여 미터에 이르는 성곽의 높이도 높이려니와 또 다른 높은 담으로 가려진 내궁의 모습을 보면서 그 깊고 깊은 궁궐의 구조만큼이나 기구한 역사와 삶의 이야기가 그 속에 서려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금성을 주마간산 식으로 둘러본 뒤 우리가 찾았던 곳은 황제가 풍년과 백성의 화복을 빌던 곳이었다는 천단(天壇, Tientan)이라는 곳. 천신에게 제례를 올리는 장소로서는 역시 크지 않을 수 없다는 느낌 이외에는 특별한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둘째 날의 마지막 목적지로 찾았던 곳은 이화원(頤和園)이라는 역시 거대한 공원이었다. 이화원은 청대의 여름 별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때로는 ‘Summer Palace'라고도 불리는 인공정원이다. 곤명호(昆暝湖)라는 커다란 인공호수를 앞으로 끼고 만들어진 이 공원에는 공원 중심에 불향각(佛香閣)이라는 누각을 중심으로 호수 앞쪽으로는 지붕이 씌워진 긴 복도, 말 그대로 장랑(長廊)이 있어 700M가 넘는 길이의 그 긴 회랑을 따라 곤명호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여름 황실의 기능을 했던 여러 채의 웅장하고도 화려한 건물들이 많았다. 그 시설들의 일부는 서태후가 군함을 건조하기 위해 확보한 국방비를 전용하여 건설했다고 한다. 나라를 지켜야 할 자금을 엉뚱한 곳에 낭비했으니 나라의 운명이 그토록 쉽게 그 운을 다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매끼 마다 서태후에게 올리기 위한 120여 가지의 음식을 준비하고 그녀의 시중을 들기 위해 2,000명에 달하는 궁인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관광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말해주는 중국인 특유의 허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금성 왼쪽의 남해, 중해, 북해라는 이름의 호수로부터 연결되는 전해(前海)가 자금성 북서쪽의 후해(后海), 서해(西海)로 이어지면서 그곳으로부터 10여 Km가 떨어져 있는 이화원의 곤명호와 연결돼 있으며, 이들을 연결하는 수로가 모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서는 베이징이라는 옛 도시가 만리장성을 만들었던 중국의 후손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그들의 거대한 인공축조물, 위대한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히 알려진 중국의 거대함, 그 스케일의 장대함에 대해서 중국을 여행하기 전부터 어느 만큼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하면서도 그러한 사실들을 실제로 확인하게 되면서는 또다시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으로부터 더욱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은 내가 사흘째의 또 다른 그룹투어에 참여해서 베이징 옛 시가지 중에서도 가장 창연한 고색을 간직하고 있는 호동(胡同, Hutong)지역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북경호동문화발전공사(北京胡同文化發展公司, Beijing Hutong Tourist Agency)라는 여행사가 주선하는 그룹투어에 참가하여 그들이 ‘도호동거(到胡同去)’라고 이름붙인 후통(Hutong)지역을 답사했다. 여행사의 가이드인 바이(Bai, 白)씨의 안내로 이루어진 소규모 그룹투어에는 나를 비롯하여 홍콩에서 온 대학생 두 사람, 호주에 온 데이비드와 안나,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왔다는 역시 대학생 크리스티나 등을 합해 모두 8명이 참여했다. 곧 알 수 있었던 일이지만 좁은 골목을 돌며 답사를 안내하기에는 이 정도의 작은 인원이 알맞았다.
후통답사는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앞에서 페달을 밟는 방식으로 되어있는 런리츠어(Renliche)라고 부르는 인력거(人力車)를 타고 북해(北海, Beihai)공원의 후문지역을 출발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분홍색으로 예쁘게 단장된 인력거의 모습이 자카르타나 하노이에서 보고는 했던 남루한 모습과는 달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의 기분이 내려앉지는 않았다. 약 500m쯤의 거리를 달려간 인력거가 바퀴를 멈추고 좀 더 좁은 골목길로 걷는 답사를 시작한 것은 고루(鼓樓, Drum Tower)라는 높다란 목조 건축물이 있는 곳이었다. 베이징의 사람들에게 저녁 시간을 알려주는 북을 쳤다는 곳, 북이 있는 곳으로 오르는 계단은 가파른 층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 계단은 종을 치는 한두 사람 정도가 겨우 오를 수 있는 정도의 폭이었다. 지금은 종을 치는 사람이 아니라 그곳을 올라 그의 시계를 과거의 시간으로 한참 되돌린 뒤 북소리로 시간을 짐작하고 살았을 사람들과 그 시대를 한 번쯤 그려보기도 하고, 한눈에 들어오는 베이징 시내를 조망해보기도 하는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아주 비좁은 통로가 되고 있었다.
높다란 누대에 오르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가파른 층계를 오르며 솟아났던 땀이 숨을 죽이게 해주었다. 누대의 난간 남쪽으로는 하루 전에 보았던 자금성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도를 보니 자금성의 중심을 남북으로 잇는 일직선 위의 적당한 자리에 고루가 위치하여 있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는 북을 쳐서 저녁 시간을 알려주었던 데 비해, 아침 시간을 알려주었던 것은 이 고루의 북쪽 난간에서 멀지 않게 바라보이는 비슷한 높이의 건물인 종루(鐘樓, Bell Tower)의 동종(銅鐘)이라고 했다. 각각의 다른 자리에서 아침에는 종을 치고, 저녁에는 북을 쳐서 이곳의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시간을 알리는 데 있어서도 그들은 이른바 인양(Inyang), 즉 음양(陰陽)의 조화를 찾고 아침과 저녁의 느낌과 마음을 가려 살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25개의 북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때 그 고루에는 가죽이 찢어진 북 하나만이 버려진 듯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경고(更鼓, Watch Drum)라는 설명과 함께 그 북의 직경이 1.4m이며 서양의 24시와는 달리 중국의 시간은 오(午), 주(朱), 신(申), 진(辰), 사(巳) 등의 12시로 되어있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다른 북들이 있었을 공간 한쪽에는 1996년 중국 전국의 북대회에 출품된 북 중에서 가장 큰 북이라고 하는 북 하나가 전시되고 있었다. 북의 직경이 2m쯤 되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때마침 그곳에서는 쑤동(Xudong)이라는 사진작가의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북경생활인적역사박물관-북경호동(北京生活人的歷史博物館-北京胡同)’이라는 이름으로 고루의 내벽에 결려 전시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장시간 그곳에서 전시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호동 지역을 소재로 하여 찍은 흑백의 사진 101점은 급속하게 변화해가는 북경의 옛 모습을 부분적으로나마 사진으로 간직할 수 있는 귀중한 예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내리는 모습을 담은 첫 번째 사진 ‘우중호동(雨中胡同)’은 더욱 오래된 과거의 느낌이 물씬한 것이었다. (계속...) (2003.9.24.)
첫댓글 외국관광은 주마간산식 눈요기인데 관광지 한 지역을 이렇게 세밀하게 관찰하고 기술한다는 것은 메모와 사진의 덕이라고 생각이되는군요. 글 잘 쓰는 요령은 그림을 그리듯이 마음의 스케치가 필요함을 느께게 하는 글입니다. 기행문을 쓸 때마다 나름대로 고심했던 과정을 되새기며 미처 보지 못했던 유적지를 잘 돌아보았습니다.
수 년 전에 북경에 패키지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어서 순우의 글을 대하니 대략 둘러본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한 번 여행한 곳을 잘 기록하시고, 사진까지 준비하여 소개할 수 있는지 경이롭습니다.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인데 왠지 중국은 용기가 필요한 것 같아서 순우의 기행문으로 대신해야 할까 봅니다. 다음 편 기대합니다.
2012년인가 겨울에 베이징 여행을 했었는데 얼어죽을 뻔 했습니다. 위에 기록한 곳 대부분 방문하여 보았는데 어찌나 추웠던지...이런 추위에 자금성 안에 있는 널찍한 방의 난방을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더군요.
중국이 큰 나라이긴한데 그 언행이 그에 따르지 않으니 ㅡ 특히 우리 한반도로서는 ㅡ 십여년간 중국 생활을 하였지만 치사하고 무례한 정치인에 대해 늘 실망하죠. 그런 자들애게 복종 당하는 백성들이 불쌍하죠. 그러나 다수의 백성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거나 느껴도 반항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