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陶磁와 李朝陶磁
고유섭
우리는 대개 한마디로 도자(陶磁)라 말하나 그것에는 우리가 여러가치 구별을 세울 수 있다. 첫째로 그 도자 자체의 유물적(唯物的) 자체에 의한 구별이니, 말하자면 ① 그 배토 성진(坏土成質)에 의하여、② 그 소성방법(燒成方法)에 의하여、③ 유채(釉彩)의 종류에 의하여 ④ 형태의 수별(殊別)에 의하여 구별할 수가 있다. 이 구별이 가장 근본된 구별이라 하겠고 다시 둘째로 소성 지방별(燒成地方別)에 의한 구별, 세재론 소성공장(工匠)의 소속 계몽에 의한 구별、이러한 것이 모두 기물 그 자체에 의한 구별이라 하겠고 다시 이어 나가 문화사적 구별 정치사적 구별, 기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여기에 과제에 걸쳐진 <고려도자와 이조도자>의 구별이란 과제 그것으로선 곧 정치사적 구변이라 할 것이다. 즉 「고려시대 전반에 속하는 도자와 이씨 조선조(이것을 나는 그래도 조선조라 하여 두겠다) 시대에 속하는 도자의 구별을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제가 너무 광막(!廣漠)한 만큼 서술(敍述)에 있어 또한 추상적(抽象的)인 일반론으로 흐르기 쉬우므로 우리가 구체적 이해를 돕기 위하여서 설멸될 대상에 얼마만큼 재한을 가한 후 다시 그 인반론적 개관(槪觀)에로 미쳐 볼까 한다.
그러면 우선 문제의 대상울 어떻게 제한하겠는가?'우리는 일반이 고려도자라 해도 거기에는 여러 구별 여러 종별이 있음을 잘 알고、조선조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함을 잘 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시대의 특색을 가장 잘 보이고 그리함으르 헤서 또 두 시대의 구별을 잘 보이는 것으로 고려조 도자를 대표해서 청자기(,靑瓷器)를 조선조의 도자를 대표해서 그 소위 미지마데(三島手)라는 것과 청화백자기(靑畫白磁器)라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청자기는 고려도자를 대표하여 고려조 전반을 동하여 성행했던 기물이요 미치마데와 창화백자기는 조선조의 도자를 대표하여 조선조에 유행했던 것인데、특히 미치마대는 조선조의 전반기에 속하여 조선조의 도자를 대표하였고, 청화백자는 조선조의 초기부터 있기는 하였으나 그야말로 조선조것으로서의 특색을 보이기 시작하고 도자기의 대표적 특색을 보이게 된 것은 조선조의 후반기에서였다. 이리하여 우리는 청자 하나로써 능히 고려도자를 대표시켜 논할 수 있음에 대하여 조선조에 있어선 미지마대와 청자백자의 두 개를 대표시키지 아니할 수 없는 이유를 알 것이다.
청자란 무엇인가. 일반이 청색계몽의 자기(森器)를 청자라한다. tB.그범위도 대단히 넓은 것으로 유약의 원료에 의하여 소오다유(曹達釉)에 의한 것, 연유(鉛釉)에 의한 것 철염(鐵鹽)에 의한 것、등이 있으되 협의로서의 청자란 곧 최종의 철염에 의한 것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철염외 환원영(還元焰)에 의하여 깊이 있는 청색을 나타낸 것이니 이 청자가 고려조에서 시작된 그 세대는 확실치 못하나 일리보아 목·현종(穆顯宗)때 좀 내리켜보아 문종(文宗)전후에 두고 그후 이조 초까지도 그 여맥(餘脈)이 남아 있었으나 대개 고려 말까지 성행된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이사이에도 역사적으로 몇 단의 구별이 있어 충렬왕(忠烈王)이후 청자의 퇴락기(頹落期)로 들면서 환원염 소성(還元炤燒成)이 충분하지 못하여 다분의 산화(酸化)를 보이어 회황(灰黃)을 이룬 것이라든지, 회유(灰柚) 내지 소오다유등의 혼입(混入)이 보여 소위 미치마데라는 것에 가까와지는 경향의 것이 있고、또 시대를 통하여 정절완미(精絶完美)의 감번(甲燔-상품)기물과 하품 상사기(常砂器)로서의 조품기물(租品器物)이 없지 못하고 또 형태·형상에 조소기능(彫塑技能)을 발휘하면 기물과 상강기술(象嵌技術)이 특히 애호되던 시대와 철채(鐵彩)·진사(辰砂)·혹토·백토 등으로 화식(畵飾)을 마련한 기물 등이 있다. 대로써 말하면 형태·형상에 조소(影塾) 기능을 발휘하던 때는 예·인종(睿仁宗)전후가 가장 대표적 시대였던 듯하며 '상감술(象嵌術)이 발달되기는 의·명종(毅明宗)이후 고려 일대를 지나 조선조의 미치마데까지 이르렀으며、희채도자는 대개 충렬왕 이후 조선조에 까지 깊은 영향을 끼쳤다. 하자면 상형(象形)기북t.의 가장 우수한 발전은 고려 예·인 전후에 있어 고려진기(太祖代로부터 仁宗代까지)를_대표하였고 상감기순은 후기에(毅宗代로 부터말년까지) 성용되어 조선조의 전기(太祖代로부터 宣祖代까치)까지 성용되었고 , 회채(繪彩)수법은 고려말대(忠烈王이후)로부터 조선조의 미치마테를 지나 청화백자에서 (안료와 畫題 畫風은 다르다 하더라도) 더욱 크게 성용되었다. 이상의 세수법은 그러나 거기에 또한 시대적 차이가 없지 못하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있는 것인가. 이것을 설명하기 전에 우리는 우선 청자와 마지마데와 청자백자와의 차이를 말하여 둘 필요가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청자는 철염이 환원염(還元焰)에 의하여 소성된 청색자기인데 미치마데라는 것은 본래 이 청자의 계통 속에서 나온 것으로 청자가 퇴락(頹落)되어회유(灰和)·소오다유 동의 혼합 불충분한 환원염 즉 산화염(酸化焰)으로 화해가 들러기 그 자색이 회황(灰黃)·회청(灰靑)을 이루게 되고 다시 말기의 청자와 회고려(繪高麗)라는 희채기(繪彩器)의 수법이 혼합되어 분장(粉粧)수법이 가미된 데서 나온 기물이다. 분장수범이라는 것은 성배토질(成杯土質)이 거친데서 거친 그 면을 고루잡기 위하여 백토를 발라 수장한 것이니, 이 의미에서 미지마데라는 것은 의연변화는 어떠했든 간에 근본은 청자의 타락물(墮落物), 변화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본 다인(茶人)들이 맘대로 불인 의미 불확실한 미지마데라느니 보다 우리는 분장회청사기(粉粧灰 靑砂器)라함이 그 특색을 잘 보이는 것이 아닐까 한다. 따라서 앞으론 이 미지마데라는 것을 분장회청사기라 부르겠는데 이 기물의 외형적 특색은 베토(坏土)가 청자보다 거칠 뿐만 아니라 분장도식(粉扮裝塗飾)이 적극적으로 행해진 곳에 돈막(沌濁)한 감이 많은 것이며 색채가 회황·회청색을 이룬 것은 이이 말한 바이나 회청이 근본적으로 많으며 기물의 형태가 청자보다 매우 왜곡된 야취(野趣)의 것으로 되어 있고 말대나 대접 같은 것의 입(口邊)이 청자에서의 꼿꼿한 맛이나 안으로 굽은 듯한 맛이 사라지고 밖으로 입어진 형태로 되어있고 (즉 外彎曲線을 이룬 것이니 이것은 塑土工藝의 필연적 곡선이라 하겠고 靑瓷鉢의 곡선은 금속기물의 곡선으로 도자기 그 자체로서 타율적 곡선이라하겠다)、궁(雀口)이 형태에 있어선 초기의 청자는 월주(越州) 청자의 영향 아래서 발생된 것으로 일컬어지는 만큼 그 단면(斷面)형태가 사자형(厶字形) 단축광족(短足廣足)을 이루었지만 점차 원첨형(圓尖形)을 이루게 되였음에 대하여 분장회청사기에 있어선 질박둔후(質朴鈍厚)한 방자단면(方脚斷面)에 가까워졌다. 말하자면 자청의 굽은'발목이 드러나지 아니한 에쁜 여자의 발맵시이며, 분장회청사기에 있어선 발목이 드러난 순박한 농민의 발맵시이다. 뿐만 아니라 청자의 굽 밑은 대개가 유색이 곱게 돌고 장석삼족(長石三足)만이 곱 남아 있어 마치 삼각의자에 공계 앉아 있는 형태이며, 분장회청사기는 흙바닥얘 또는 모래바닥에 되는대로 앉아 있어 수세미가된 형태로 흙자리、모래알이 그대로 묻어 있다. 청자에서 세련된 몸맵시와 우아한 문아성(文雅性)이 있는데 분장회청사기는 야성과 토취가 다분히 보인다. 청자가 귀족적인 것이며 여성적인 것이라만 분장회청사기는 평민적인 것이며 남성적 특히 비문화적인 것이다.
분장회정사기에 있어서의 일반적 특색은 그 분장수법이 대쇄(帶刷)된 흔적이 심한 것을 들겠다. 아무런 무늬 장각(裝刻)이 없이 오로지 이 특색만 드러나 있는 것을 일본 다인(茶人)은 하께메 미지마(刷毛日三島)라 하지만 무늬장각이 베풀어진 것에서 그 수법에 의하여 몇가지구별을 할 수가 있다. 첫째는 선상감수법(線象嵌手法)에 의한 것이라 할 것으로 이것은 고려칭자에서의 그 화상 감수법(畫像嵌手法)이 계승된 것이라 하겠고、둘째로 인화상감수법(印花象嵌象手法)이라 할 것이니 이것도 맡기 고려청자에서의 인화상감 수법의 계승이라 하겠으나 그러나 분장회청사기에 있어선 그것이 청자에서와 같이 정제(整齊)되고 규칙적인 것이 아니라 난조(亂調)로 되어 있고 중복되어 있으며 기면전부에 베풀어져 있어 이것이 한 중요한 특색을 이루고 있다. 셋째론 회화수법(劃花手法)이라 할 것으로 이것은 청자기에 있어서의 음각화(陰刻합)와 같다 하겠으나 그것은 세선(細線)으로 화양(.화양)이 극히 정제되어 있고 분만 아니라 배토(坏土)에 깊이 회선(畵線)된 것이나、이것은 분장면(粉粧面)에 극히 자유로이 그려져 있어 거기에 확연한 구별이 서있다. 넷째로 이 역시 회화수법에 속할 것이니 화양(畵樣)의 배면(背面)을 긁어 깎아낸 것이니 소위 소학수법(搔落手法)이라는 것으로 청자에는 없는 것이며 (이것은 刻花라고 할것으로 宋瓷에는 많으나 고려에선 적었던 수법이다)、다섯째로 회개수법(繪彩手法)이 있는데 이것은 청자의 한 변형인 회고려(繪高麗)에서 발생된 것이나 분장회청사기에서의 화양은 회고려에서 의화양과 같은 페르시아 내지 서역 계몽의 본격적 아라베스크직 무늬가 아니라, 대단히 초략(草略)된 간소환달(簡素開達)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만 한것으로써 분장회청사기의 특색을 잡는다면 그것이 원본적(源本的)으로 비록 고려칭자에 통하는 맥(脈)이 있다하더라도 고려청자와의 특색 있는 구별은 이해할 것이라 믿는다. 뷴장회청사기에 있어서 기명의 공납소(供納所)、관아명(官衙名)내지 재조소의 지명, 관아명들이 많이 상감된 것도 그 트집거리논 고려말에 있다 하겠으나 한 특색으로 들 수 있겠고, 또 기명을 중첩하여 소성한 굽의 삼각대 흔적이 내면에 남아 있음도 한 특색으로 들 수 있지만 이러한 방면은 잠시 제략(除略)한다.
고려청자와 조선조분장회청사기와의 구별을 이상에 두고 여기에 다시 조,선초청화백자기의 특색을 보자. 백자 그 자체는 이미 고려조에도 있었던 것이다. 예컨테 이 왕가 미술관에 있는 상감백자매병(象嵌白磁梅甁)은 그 대표적인 것이고 국립박"관 수장의 금강산월출봉(月出峰)서 발견된 홍무(洪武)24년 이성계(李成桂)발원(發願)의 장문(長文)이 있는 백자는 고려 말의 백자로 유명한 것이다. 기타 굽(雀口) 저면에 침대(針臺)가 있는 것이라든지 토질·유약 등 성분에서 고려작품으로 간주되는 기물이 적지 아니하며 전복무안(扶安)、경북양산(梁山)둥의 고려 요적(窯跡)에서 백자파편이 발견되어 고려백자도 이미 상당히 소성되었을 것이 상정되나 이 방면에 대한 조사보고가 아직 불충분한 까닭에 체계적 논설을 할 수 없고 더욱이 그것이 조선조백자와 어떻게 연락 되어있는 것인가도 불분명하지만 여기에 문제하려는 정화백자만은 고려조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요、신석조(辛碩祖)의 《수사종준기(受賜鍾樽記)》에 의하면
<前略) 舊有菁畵鍾一事品願奇絕 館{(成均館)中寶之及太宗卽位 追念舊物 命有司 匣而藏之 屢賜酒果 自是益賓之 歲久殘缺 儒林共惜之 丁卯秋八月 兼大司成吏曹判書 鄭公麟趾 從容具辭以 啓
이라 있어 중국전래의 보기(寶器)로 진중(珍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용제종화(傭齊叢話)》에 의하면 세종조(世宗朝)까지도 어기(御器)로 백자가 전용되었고 세조조(世祖朝)에 이르러 채자(彩磁)를 잡용(雜用)하되 회회청(回回靑) 즉 청화(靑華)의 안료를 중국에서 구하여 화준첩배상(畵樽疊盃觴)이 중국과 다름없이 되었다. 그러나 회청은 드물고 귀하여 중국에서 구하되 또한 많이 얻지 못하므로 조정이 의논하되 중국은 궁촌모점(窮村茅店)이라도 모두 화기(畵器)를 쓰니 이 이쩌 모두 회청으로 그런 것이랴、필시 다른 것으로 그린 것이리 하여 중국에 물은즉 그것은 토청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토칭도 또한 얻기 어려우므로 우리 조정에선 화자기(畵磁器)가 대단히 적다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토민(土民)은 주기(酒器)이외에 청화백자기를 사용함을 금하였고 일반 백성온 더욱이 전여 그 사용을 금하였으며 이후도 청화백자기는 귀한 물건이었는데 영조(英祖) 이후에 비로소 혼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이 영조조까지 청화백자가 귀했던 그 사이에는 선조조까지는 대개 분장회청사기 그 후는 철채화·진사화(辰砂畵) 등의 백자가 유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설명된다. 그러므로 조선조의 백자로서 이 철채화·진사화의 백자도 잊을 수 없는 중요한 특색거리의 하나지만、문제를 간단히 하기 위하여 청화백자에 한한다면 그 일반 사용은 영조 이후에 있다 하더라도 역시 조선조자기의 대표적 작품으로 묻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은 '앞에도 말한바와 같이 고려조에 그것이 없었던데 첫째 이유가 있고 둘째로 조선조에서 산출된 청화자기가 전기에는 비록 저와 같이 그 안료를 중국에서 구해와 근근이 조성(造成)된 것이라 해도 그간에 또한 조선조작품으로서의 특색이 있음으로서이다. 우리는 이 조선조 청화백자를 대범(大凡)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즉 일본 애호가들이 말하는 후루소에쓰제(古染付)、즉 고청화(古靑華)와 그 이후의 것이니 이는 청색 안료의 색의 선택에 따른 구별이라 하겠고 화법에서 말하면 회정을 절약하여. 회청을 절약하여 근근히 세선화법(細線畵法)으로서 표현된 것과 회청을 면적으로 다분히 사용하고 필적도 태선(太線)으로 회청은 남용한 것과를 구별할 수 있다. 따라서 화양(畵樣)에 있어서도 고청화는 전면을 회화화하지 않고 얼마만한 한계선과 안상(眼象)을 넣어 화면을 제한한데 대하여、그 후의 것은 이 화면의 제한이 없이 기물 전체를 후소(後素)로 사용하여 화제를 전폭적으로 채워 있음이 많다.
여기에 우리논 화제의 변이를 보지 아니할 수 없다. 즉 그 필의(筆意)에 있어 회고려에서와 같은 서역적 페르시아적 아라배스크가 없는 만큼 펼치도 순동양화적일 뿐 아니라 화제 그 자체도 문인화적(文人畵的)인 것, 남화적(南畵的)인 것이 많다. (도안무늬등은 별문제하고). 이에 고려도자 즉 청자에 베풀어 진화재와 정화백자에 베풀어 진화제와를 비교한다면 청자에논 연화·모란' 작약·보상회(寶相華: 클레마체스-鐵線花)·국화·석류·운학(雲鶴)·포류수금(浦柳水禽)등이 가장 많은 편이며 그것들이 모두 소위 야마도화(大和繪)라는 이당(李唐)시대의 화법(그것은 육조화법에서 변화된 것이지만)에 의하여 대세(太細)의 변화가 적은 선으로서 가장 우아하계 그려져 있다. 우리는 이러한 공예품에 나타난 화법에서 흔히 야마도화(大和繪) 라는 화법·화양과 동일한 것이 고려조에도 유행되었던 것을 알 수 있고、따라서 이 유파(流派)가 고려화의 한 큰 연락을 이루어 수묵산수(水木山水)내지 문인화의 선구화법(先頭畵法)인 것과 동시에 유행되었음을 짐작하지만、청자에 있어서의 야마도화(大和繪)풍이 그 유청(柚淸)과 함께 특별한 귀족적 여성적 아치(雅致)를 내고 있음에 큰 특색을 보는 바이다. 그런데 정화백자에서는 문인화적 산수도·화조도(花鳥岡)'초목도(草木圖)·사군자도·십장생(十長生)·운용도(雲龍圖)·봉황도(鳳凰圖)등이 단연히 많다. 물론이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 화제(畫題) 그것으로선 청자의 그것과 공동된 것이 많으나 그러나 그 표현법 내지 화법' 화양이 전연 문인화적인 것이어서 청자애서의 저 야마 도화(大和繪)풍의 것과는 판이한 특색을 보인다. 영조 이후의 소위 고정화에 속할 것들은 아직은 문인화적인 것은 적으나 그렇다고 해서 저 청자에서와 같은 야마도화를 넘긴 것도 아니요、명·청(明淸) 기물의 영향을 받아 명칭적 도안 양식의 것이 거의 전반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대로 조·명·청의 것과는 구연되는 점도 있으니 말하자면 조선화(朝鮮化).를 충분히 입지 못한 흠이 있다. 이러한 소극적인 것으로의 조선적인 작품을 제하고는 고정화도 적극적으로 조선적인 것이 있으니 그것이 즉 위에 말한 일반적 특색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의 화양은 화원(畫員)이 그린 것이 많은 만큼 당시 조정s~ 화원둠의 화양과 공통된 특색이 있음온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리하여 청자가 곧 귀족사회로서의 고려정취 (情趣)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면、청화백자는 그대로 곧 유교사회 문인사회로서의 조선조의 상징인 것이안 이것은 기물의 종류로서도 볼 수 있는 특징인데 예컨대 청자에는 그대로 곧 불단에 놓였을 법한 불기(佛器) 같은 것이 않고 정화백자에는 펄통(筆筒)·연적(硯滴)등이 단연 우세하여 이러한 정경을 잘 보이고 있다. 고려의 청자가 불교적인 것이라면 분장회청사기는 민중적인 것이며 정화백자기는 문인적인 것이라 할 만하다. 이에 대하여 조선조의 순백자는 유교적인 것이니 이에는 제기가 단연히 많은 까닭이다.
고려청자는 5월 신록, 우후 청천(雨後靑天)의 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귀족적 흥미와 불교적 비애、여성적 센티맨탈한 것을 가지고 있으며、그러면서도 일종의 화려성(華麗性)을 띠고 있다. 만지면 꺼질 듯한 눈약성(嫩弱性)도 가지고 있다. 그 것은 한갓 도양에서뿐 아니라 형태에서도 그러하다. 누구는 너무나 고혹직(蠱惑的)이고 미태적(媚態的)이라고 까지 한다.
蔡松年의 詩
蛤蜊風味解朝醒 松頂雲凝雨不晴
悄悄重簾斷人語 碧壺春筍更同傾
晚風高樹一襟淸 人與鏢瓷相炤明
謝女微吟有深致 海山星月摠關淸
은 번역을 필요로 하지 않는 청자의 정취 그대로 그것이다. 시 가운데의 벽호(碧壺) ・표자(縹瓷)는 모두 청자의 별명이다.
청와백자에는 어떠한 시가 읊어졌는지 모르겠다. 점필제(佔畢齋)의 제기시(祭器詩)
棲睪稱梁器 外方內則圓 簋也實相反
四目更哻然 兩兩最着前 左右豆與簋
磻腹象鼻競 犧牛其角猾 唇非兒女制
蝦耳雙鉤迪 似聞雷公鼓 雲縛磬關闐
惟爵卓兩柱 順橢口自偏 豊齊可把注
不見尾越賭 几此煽局樣 毋Jt;泰漢先
若五且勿論 所貴在潔觸 陶人雖則匝
助我禮意虔 刻畵中規度 聊以望後賢
읊어진 대상은 순백의 재기이면서도 하지만 얼마나 의례적(의례적)이냐. 《이참봉집(李參奉集) 》에 보이는 백자연적시(白磁硯滴詩)
漂淌陶滴硯間參 不類僮力日i擔
獅瞬蟾蹲勢不同 星浮漏吸更西東
環環細聽初難歇 潮潮動信隨移改
展也磲月同千江 氣概i除乘妙·-無內
~J剜瓷膚卵包雛 獾裁泓玄賚不枯
滴乎名雖四友外 用時先登作螯弧
정금로(庭金鑪)의 백자연적시
饔院甲燔甆 齊言純色好
蟾蜍瀞似銀 上品權家造
이 모두 초기백자를 옳은 것으로 저 청자를 읊은 것과 같은 정취적인 점은 없고 의례적 근엄미(謹嚴味)、문인적 고담미(枯淡味)등이 드러나 있다. 정화백자기는 물론 이러한 순백자기와 동일에 논할 수 없으나 그러나 고담미, 청초미(淸楚味)에 있어선 역시 통하는 바 었고 그 위에 다시 문인화적인 맛이 있다. 고청화에 있어선 더욱이 고담미、청초미가 강하지만 .그후의 청화자기는 문인화적 의태(意態)가 강하다. :그것이 다시 일반화됨으로 말미암아 아주 민예적인 것으로 되고 말았다. 상형·무조(透彫)등애 있어서도 청자의 그것은 철기공예、소조(塑造)공예의 정선이 살아 있는데 조선조의 기명에는 화병 (花餠:꽃떡)·수연(壽宴).혼족(婚祝)등에서 화식용(華飾用)으로 쓰는 병제조화(餠製造花)수법과 공통되는 순후(純厚)한 마^이 있다. 청사화(鐵砂i畵)·진사화(辰砂畵)의 조선조 백자는 화양에 있어 거친 태(態)가 더 심하다. 그러나 거친 거기에 고려자기에서 불 수 없는 기박(氣迫)이 있다. 이 기박에 있어서는 조선조 도자가 확실히 고려도자 보다 우승한 것이다. 게다가 치졸한 면도 또한 있어 호인적(好人的) 일면이 없지도 아니하다.
이 기박 문제에 있어 가창 대표적 작품은 분장회청사기다. 거환·박력·기우(氣宇)·활달 이 모든 점이 들어 있는 것이 곧 분장회청사기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가장 분완전 한 작품이다. 그것은 일면에 데카당한 점도 있다. 일본에서의 선(禪) 무가(武家)정치 형태와 가장 잘 합치되어 있고 다시 그것이 다도(茶道)를 내었는데 일본의 다가들이 다도구로서 가장 많이 주장(推獎)하고 있는 것은 이 분장회청사기다. 그둘이 이것을 미지마데(三島手)라 한 것도 다인들에게서 명명된 것이다. 그들이 미치마데라 한 것은 이 분장 회청사기 중에서도 특별한 일련의 작품만을 두 말한 것인데, 그 특별한 일련의 작품이란 무엇인가. 또 미지마데란 명명은 어찌하여 붙여졌나, 이러한 점은 오늘 날 도무지 알 수 없이 되었지만 따라서 분장회청사기를 모두 미지마대 또는 미지마대란 것에 이 분장회청사기를 전적으로 대치시킬 수 없는 것이지만 오히려 또 그러함으로 해서 마지마데라는 칭호를 도자기 분류의 한 장으로서 내세울 수 없는 것이매、이유형 분류의 칭호로선 분장회청사기라 함이 가한 것이지만 하여간 일본다인들이 진상(珍賞)하는 미지마데란 것이 이 분장회청사기 중에 있음은 결국에 있어 이 분장회청사기의 박력·기우. 황조(荒祖)・활달・불완전 등에 큰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선(禪)이탄 결국 불완전한데서 완전을 찾으며 활달한데서 박력을 얻고자 함이니(이는 특히 일본의 禪)' 분장치청사기가 그들에게 애호됨이 무리가 아니다 하겠다. 청자,정화백자 등은 순전히 미적 입장에서 환언하면 감상 대상으로서 볼 수 있지만 분장회청사기는 이러한 일종의 데카당한 점이 있는 데서 미술적 가치보다도 그 사상적·종교적 가치에서 내다 피어지게 된다. 청자·청화백자 등은 전반적으로 말한다면 민예적인 것이라 할 수 없다. 즉 다분히 상층 계급의 지도, 수요에 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분장회청사기는 완전히 민중적인 것이요、상층계급에 대한 미태(媚態)를 가지지 아니 하였다. 구애 없는 민중의 순재(純材)、대담한 활개짓이 그대로 상징 되어 있다.
요업(窯業)은 본디 분업적인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도공한 사람이 전부 조성해 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청자나 분장회청사기에서는 이 분업 작용이란 것이 눈에 띄지 아니 한다. 성배(成杯)·조형·회양(繪樣)이 모두 한사람 손에서 된 듯하다. 말하자면 성배· 조형·회양 간에 통일된 호흡이 보인다. 속담에 고려의 사기장(砂器!ii:)은 기술을 극히 비밀히 하여 죽을 때에나 그 자손에게 비전(秘傳)하고 갔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순전히 와전(訛傳)이다. 기술 그 자체의 골수(骨髓)를 취득한다는 것은 물론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 평생을 두고서 전심(專心)된 노심초사(勞心焦思)를 요하는 것이다. 이는 몰론 어떤 기술이라도 다 그러한 것으로 부재임사(父在臨死)의 시각적 훈전(訓傳)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임사전수(臨死傳授)가 전통에 대한 권리의 양도 '상속적 전수는 될지언정 기술 그 자체의 전수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소위 불가(佛家)의 전발(傳鉢)이란 것 역시 그러한 것이다. 그 것은 권위의 전수일 뿐이요 도의 전수 기술의 전수가 아니다.
도의 체득, 기술의 체득은 평생의 사업이다. 고려요업에 대하여 그러한 와전이 있는 것은 결국 청자를 일운(一云) 비색(秘色)이라 하는 중국의 소위 문자에서 온 연문생의적(演文生義的) 설명이요、또 기물 그 자체가 성배·색형·회양의 완전통일에서 설명적 수단으로 작위(作爲)된 전설이다. ((경덕진도록(景德鎭陶錄)》에는 (안(按)컨대 비색이라함은 당시 자색(瓷色)을을 특히 지위(指謂)함이라 하였고 오오다니(大谷光瑞師)도 ^비색이란 문자는 창취(蒼翠)한 유색(柚色)이 타의 기급추종(企及追從)을 불허함으로써이라>'하여 이설이 대체로 믿어지고 있다. 필자는 강희자전(康熙字典)에 비(秘)를 포결정음(蒲結切音)이라하여 향초야(香草也)란 설명에 의하여 비초(秘草)에 무슨 인연이 있지 아니할까 하는 상상설까지 쓴 적이 있다.
하여튼 고려자기나 조선조 분장회청사기는 그 조성이 분업적이 아닌 즉 개성적인 점이 있는데 청화백자는 분업직인 특색이 완연하다. 즉 화양과 기형이 반드시 통일되어 있지 않다. 이는 사실에 있어서도 화원이 분원에 나가 화식(畵飾)을 분담하고 있어 그러하였던 것이지만 고려조에 있어서도 그렇치 아니 하였으리라는 법은 없으되 결과에 있어 그 분업의 소치(所致)가 드러나고 아니 남의 구별이 있음은 결국 시대의 문화가 계급적으로 분화되었는가 아닌가 한데문제가 있을 듯하다. 즉 고려조에 있어서의 예술문화의 배경은 불교이었고 조선조에 있어서의 예술문화의 배경은 (반드시 그것이 예술을 위하여 助資가 되었건 아니 되었건 간에) 유교란 것이 상층에 있어 불교는 대체로 계급적 차별이 없이 민중 간에도 숨어 있었음에 반하여 유교는 확실히 민중으로부터 분리되어 상층계급에만 있었던 까닭이 아닌가 한다. 이리하여 고려도자에는 도자 그 자체 안에는 별로 대립된 두 개의 요소가 없지만 조선조 도자 특히 청화백자에는 민중적인 요소와 문화적 계급적 요소와의 두 가지 대립이 성립한 듯하다. 다만 같은 조선조에 속하는 것이지만 분장희청사기에 이 대립이 없는 것은 실제에 있어 그 기물이 상층계급에도 유통되었다 하더라도 기물 그 자체는 근본적으로 민중 속에서 자라난 까닭일까 한다. 말하자면 분장 회청사기는 계통적으로 따질 때엔 불교 신앙의 기물의 연장(즉 고려자기의 연장)으로 철저히 민중적인 것으로 남게 되고 유교정신이 아직 지배성을 얻지 못 하던대、족과도기 적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이 소략하다면 하지만 고려 도자와 조선조도자와의 현저한 차이점이 아닌가 한다. 다 기술적인 점에서의 세부적 구별은 그 길의 전문 인사가 따로 있겠기로 이로써 과제에 응해 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