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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2월10일 화요일 성녀 스콜라 스티카 동정 기념일
[수도회 사랑으로 써가는 내 삶의 법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창세 1,20―2,4ㄱ
†복음 마르 7,1-13
스콜라스티카 성녀는 480년 무렵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성 베네딕토 아빠스의 누이동생인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성인이 세워 그녀에게 맡긴 여자 수도원의 첫 번째 수녀이자 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성녀는 베네딕토 성인과의 영적 담화를 통하여 수도 생활에
대한 많은 격려와 도움을 받았다.
★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이렇게 해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터전에 사람을 창조하셨고, 그 목적이 당신의 피조물을
돌보는 것임을 선언하신다(제1독서).
★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나를 헛되이 섬긴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들려주시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고 질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학생들은 성현들의 가르침을 교과서로 배운다. 부처의 가르침은
‘자비’이고, 공자의 가르침은 ‘인’(仁)이며, 예수의 가르침은 ‘박애’
라고 쓰면 정답이다. 일반의 종교 이해는 그렇지만 교우들의 신앙생활이나
교회에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무엇일까? 사랑일까, 주일을 지키는 것일까?
아니면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일까, 단체 활동일까?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이며 가장 강조했던 가르침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내가 믿는 세상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하느님 나라’였다. 복음서에는 “하늘 나라가 다가왔다.”를 시작으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설명과 비유가 압도적으로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10) 하고 기도하라 하셨다. 그분께서 마침내는
하느님 나라 때문에 십자가의 죽임을 당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후
초대 교회의 상황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유업으로 증언하기보다는
‘당신들이 죽인 나자렛 사람 예수가 바로 하느님의 메시아였다.’는 진실
규명의 강조가 더 시급했다. 생사 존폐가 달린 박해 정국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느님 나라’보다는 주일 미사나 고해성사가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 교회 역사의 강조점이 하느님 나라에서 그리스도로, 성사
생활로 탈바꿈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강생 목적과 십자가
죽음의 이유는 강조점에서 저 멀리 가 버렸다. ‘각주구검’(刻舟求劍)이다.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마음은 내게서 떠나 있다. 너희의 전통을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는 이사야서의 말씀이 가슴을 아리게
찌른다. 나도 바리사이가 되어 버렸음이 부끄럽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존엄한 품위의 삶 -하느님의 자녀답게-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2월10일 화요일(성모영보수녀원 피정6일째),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창세1,20-2,4ㄱ- 마르7,1-13
제1독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20―2,4ㄱ
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13
존엄한 품위의 삶 -하느님의 자녀답게-
한 번뿐이 없는 삶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자체가 은총이요 축복입니다.
사람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행복하고 자유롭고 풍요한 삶입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숙제입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장엄한 사람 창조의 순간입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바로 은총이요, 하느님의 모습으로
계속 성장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평생숙제이자 공부입니다.
사실 사람이 되는 일보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힘든
일도 없습니다.
"내가 거룩한 것 같이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너희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바로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위대한 평생과제입니다.
'사람답게'를 분명하게 틀잡아 주는 것이 '하느님의 자녀답게'입니다.
세례성사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역시 하느님의 자녀로의 성장은 평생과정이자 평생과제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善) 삶, 참된(眞) 삶, 참 아름다운
(美)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닮은,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소개할 묵상 내용입니다.
소개에 앞서 여기 수녀원의 이양진 분다 수녀의 모친 최 세실리아
자매로부터 받은 카톡내용을 소개합니다. 최 세실리아 자매는 요셉수도원
초창기부터 약25년 이상을 대축일 때마다 수도원의 꽃꽂이 봉사를 해 준
놀라운 믿음의 자매이고, 이양진 분다 수녀는 어머니와 함께 중학교 때부터
요셉수도원을 다녔습니다.
"엘레강스 신부님, 환영 환영합니다. 보고파용“
"아, 여기 이양진 분다 수녀도 피정중입니다.“
제 귀국을 환영하는 자매에게 분다 수녀의 소식을 알렸고
면담 때 분다 수녀에게 엘레강스의 뜻을 물었습니다.
"젠틀하다, 신사답다, 멋있다, 미남이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아이패드 사진을 찾았더니 그 풍부한 내용에 아주 만족했습니다.
'elegance: 세련된 취미를 밑바탕으로 하여 사치스러우나 화려하지 않은
완벽한 아름다움, 화려하게 장식된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자연히 우러나는
고상한 아름다움, 당당해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기품’
얼마나 풍부한 내용인지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부단히 닮아갈 때
바로 엘레강스 사람입니다. 오늘 저는 강론을 통해 하느님이 보시기에 참
좋은 엘레강스 사람이 되기 위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사랑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모두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참됨(眞)으로, 좋음(善)으로, 아름다움(美)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이웃형제를,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구는 사람
혼자만 살아가는 게 아니라 생명있는 모든 것이 함께 살아가는 곳입니다.
빈부격차의 불평등의 사회, 파괴되고 착취되는 자연이나 동물들,
이것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세상이 아닙니다.
사랑부재의 거칠고 험한 현실입니다.
생명 있는 모두가 살아야 하는 공존의 사랑, 공존의 세상입니다.
어제 수녀님들과 식사하면서 절절히 깨달은 것이 '함께'입니다. 잘난 이든
못난 이든 '함께 먹어야 하고, 함께 일해야 하고, 함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
결론하여 함께 살아야 한다.'는 깨달음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아름다운
정경은 그대로 하느님의 사랑 충만한 '공존의 세상'을 보여줍니다.
뉴튼수도원에서 일화가 생각납니다.
에제키엘 수사님의 소임은 닭과 오리를 키우는 일입니다.
사무엘 원장님이 나에게 정중히 부탁했습니다.
"신부님, 부탁이 있습니다.“ 잔뜩 긴장했습니다.
"닭좀 잡아 주시겠습니까?“
닭이 많아 제가 수도원을 떠나기전 잡아 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닭을 선뜻 잡겠다는 형제가 없어 그냥 나에게 던져본 말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할 수 있는 데 그것 만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닭을 안 먹으면 안 먹었지 잡지는 못하겠습니다.“
정중히 사양했고, 나중 다른 야무진 형제가 잡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비단 하느님 사랑, 사람 사랑에 머물 것이 아니라, 생명있는 모든 것에로의
사랑으로 끊임없이 확산되어야 할 우리의 사랑입니다.
매사 많이, 넓고, 깊게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체험의 지름길입니다.
둘째, '말씀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한 창조입니다. 오늘 창세기 천지창조 과정을 보십시오.
순전히 말씀을 통한 창조입니다.
말씀에 즉각 순종하여 창조된 질서와 조화의 세상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자 빛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합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 거듭 새롭게 창조되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공부하는 것은 우리의 평생의무입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실행하는 말씀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하여 '읽기- 묵상-기도- 관상-실행'의 시스템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
수행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이래야 주님의 마음을 닮아 사랑은 물론
분별력의 지혜도 선사받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은 후, 다음 말씀을 통해 그분이 얼마나 하느님의 마음에, 하느님의
말씀에 정통해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말씀공부와 말씀실행에 소홀할 때,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며 헛되이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은 누구나의 가능성입니다.
하여 평생 말씀을 사랑하여 말씀대로 '말씀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은 우리
모두의 거룩한 의무입니다.
셋째, '찬미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찬미의 종교, 찬미의 사람인 그리스도인입니다.
특히 우리 수도자들의 하느님 찬미는 각별합니다.
찬미의 기쁨으로 사는 수도자입니다.
사막 같은 세상에 찬미의 기쁨 없다면 무슨 기쁨으로 살 수 있겠는지요.
하느님 사랑은 말씀 사랑으로, 찬미의 사랑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깊어지는 찬미의 삶입니다.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사막인생을 낙원인생으로 만들어 주는
찬미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찬미는 수도자의 존재이유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찬미가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합니다.
주님과의 우정을 깊게 하며 사랑을, 믿음을, 희망을 증진시킵니다.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며 내적성장과 내적성숙을 이뤄줍니다.
바로 찬미와 감사의 미사와 시편전례기도가 '기쁨의 꽃'처럼 피어나는
여기 성전이 상징하는바 천상예루살렘이요 사막같은 세상의
오아시스입니다.
순경(順境)이든 역경(逆境)이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구히 '찬미의
사람'으로 살 때 주님의 한량없는 평화의 축복이요 참 좋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사랑의 사람, 말씀의 사람, 찬미의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주님, 저희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크시옵니까!"
(시편8,2ㄱㄴ).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사랑으로 써가는 내 삶의 법
2015년 나해 2월10일 화요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기념 화 마르 7,1-13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마르 7,8)
사랑으로 써가는 내 삶의 법
오늘 복음에 나오는 씻는 인습에 관한 논쟁(1-7절)과 코르반 인습에 관한
말씀(9-13절)은 유대인들과 그리스도교인 사이에 있었던 충돌을 반영해
주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교인의 삶과 율법뿐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에
따라 사는 유대인들의 삶의 상이한 단면을 알 수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런 상황을 상기시키면서 하느님의 뜻에 일치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모세오경에 나오는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적인 윤리규범들을
삶을 위해 해석하고 적용해 왔다. 그런데 기원전 4-5세기 전부터
율법학자들이 등장하여 이런 도덕적 원칙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대하여
해석하고, 실생활에 세목별로 적용하고, 정의를 내리고 수많은 규칙을
만들어냈다. 이것이 구전되어오다가 서기 3세기에 이르러 집약해서
기술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율법에 따르면 오늘 복음의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하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손 씻는 것은 종교의식행위로 해야 하는데 초점이 있었다. “모든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하고, 요리가 바뀔 때마다 손을 씻어야 하며, 씻는 물을 특별히
큰 동항아리에 넣어 두어야 하며, 그 물은 정결 예식 외에 달리 쓰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손을 처음 씻을 때에는 양손은 손가락을 위로 향하게
하고, 그 위에다 달걀 껍질 하나 반 정도의 물을 부어 손목까지
흘러내리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양손이 젖어있는 동안 양손 각각을
주걱으로 문지른 다음에, 손과 손가락 끝을 아래로 하고 물을 손목에서
손끝까지 흘러내리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 앞에 부정하며
악령이 침범하고 가난해지며 파멸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형식보다 사람을 위하는 삶의 속살을 중요시하셨다.
‘크르반’은 히브리어로, 유대교인이 물품을 하느님께 바쳐 속인(俗人)이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서약문을 말한다. 그런데 부모와 사이가 나쁘면
코르반 서원문을 이용하여 부모 봉양을 저버리는 수가 있었다. 종교를
빙자하여 인륜을 짓밟는 짓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위한
법(2,27), 십계명 가운데 인간에 관한 계명(10,19), 하느님을 섬기고 사람을
아끼라는 사랑의 이중계명(12,28-34)을 강조하셨다. 그분은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에서 벗어나 재물을 사람보다 더 귀하게 여겨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바리사이들은 약속된 구원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해서 율법뿐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까지도 철저히 지키도록 백성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세심한
사람들은 복잡한 규칙을 엄수하느라고 하느님의 중요한 계명을
망각하거나 소홀히 하는 위험과 세칙을 엄수함으로써 자만에 빠지거나
교만해지는 위험도 없지 않았다(마태 23,23 참조). 이런 모습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곧 외적 형식과 규범
준수에만 몰두하여 성경 말씀의 실천에는 소홀하거나, 규범을 잘 지키고
있으니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자만하는 이들도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을 마음의 지향이요 순수한 마음으로 혼신을 다해 사랑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마음과 행동의 불일치,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
대신에 인습만을 고수하고 있는 잘못을 지적하셨다. 곧 하느님 계명의
엄수를 핑계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도
형식주의나 법규준수에 얽매이지 말고 그 속살인 법의 정신과 진실하고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하느님과 인간을 사랑하도록 하자! 법에 끌려가는
사람이 되지 말고 사랑의 삶으로 향기로운 법을 써가는 우리가 되도록
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서울]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2015년 나해 2월10일 화요일 성녀 스콜라 스티카 동정 기념일
제1독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20―2,4ㄱ
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13
손님이 찾아 왔습니다. ‘감기’입니다. 목이 따끔거리고, 코가 막히고, 힘이
없습니다. 손님은 제게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음주도
적당히 하고, 잠시 쉬라고 찾아 온 것 같습니다. 일정도 조절하고 감기와
며칠 친구하면서 지내야 할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내가 원하지 않았던
손님이 가끔씩 찾아 왔습니다. 유행성 출혈열로 한동안 병원에서 지내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병원에 있는 동안 함께 해 주셨습니다. 다리의
골절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통풍도 가끔 찾아와서 저를
쉬게 해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아름답게 만드셨는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고통’이라는 손님을 만나게 됩니다. 제 몸을 찾아 왔던
손님처럼 고통도 종류가 다양합니다. 불가에서는 고통을 크게 4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불가에서는 이런 고통은 집착에서 벗어나야만 비로소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교회도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두 가지 관점에서 고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박해의 시대에 고통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금과 은도 단련을 받듯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통을
통해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이 세상은 지나가는
것이고, 우리에게는 영원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세상의
악이라는 관점에서 고통을 이해하기도 하였습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원하지 않는 것들이 함께 있다고
합니다. 세상의 악은 구조적인 경우도 있고, 인간의 탐욕과 집착 때문에
생기기도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악은 함께 연대해서 하느님의 뜻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못했고, 강한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을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전쟁의
역사이며, 비극의 역사였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그러한 행동을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불과 20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프리카의 흑인들,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피부와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소중한 전통이 파괴당했고, 그들의 전통은 사라져야 했습니다. 우리 민족도
제국주의 역사관에 의해서 희생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일본에 의해서
나라를 빼앗긴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잘못된 역사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다양한 생명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생명체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합니다. 서로 경쟁하고 싸워서 정복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맞도록 서로 이해하고, 조화를 이루며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살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의
율법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잘못되었다고 말을 합니다. 먼저 이야기를 듣고, 왜 그렇게
했는지 묻지도 않고 먼저 단죄를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들 역시 짧은 시간 이
지구라는 별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날까지,
우리는 머물다 가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인인 것처럼 사는
것은 교만입니다. 오늘 하루를 지내면서 옆에 있는 분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지, 비슷한 점은 무엇인지, 그러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2015.02.10.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창세 1,26)
여러분은 누구를 닮았어요? 엄마 닮았어요? 아빠 닮았어요?
어릴 땐 몰랐는데 나이 들어 갈수록 부모님 모습이 내 모습이죠?
세상 사람들 참 다양합니다.
다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들을 가보면 정말 사람들이 이렇게도
다양하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말입니다.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들 중에 사람은 가장 비슷한 종이랍니다.
그러니 나와 좀 다르다고 사람 차별하고 무시하면 되겠어요?
인종이 다르던
종교가 다르던
언어가 다르던
문화가 다르던
우린 어짜피 한 아버지의 자녀들이랍니다.
왜냐하면 우린 모두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당신과 비슷하게 만든
형제들이랍니다.
하느님을 닮은 여러분은 그러기에 나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청주] 겉보다 속이 중요하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2월10일 화요일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마르7,1-13)
2015년 나해 2월10일 화요일 성녀 스콜라 스티카 동정 기념일
제1독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20―2,4ㄱ
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13
겉보다 속이 중요하다.
우리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게 됩니다. 더러운 것을 만지지 않았어도
습관적으로 씻습니다. 위생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건강에 큰 영향을
줍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을 청결히 합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유다인의 전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관습이 있었는데 왜 손을 씻게 되었는가는
관심이 없고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것에만 마음을 둔 것을 지적해 줍니다.
사실 모든 음식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육적인 생명양식으로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합당한
마음으로 먹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였습니다. 위생적인 의미도 있지만 정화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미사전례 때에 참회예절이 있듯이,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예의로서
손을 씻고 음식을 먹었던 것입니다(유광수 신부).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그 내용은 잊은 채 전통을 고집하면서 손을 씻었느냐?
아니냐? 를 가지고 더러운 손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미사중에 사제는 예물준비를 하고 손을 씻으면서 혼자 기도합니다.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주소서.”
사실 겉보다 속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외적인 것을 통해 내면의 깊이에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사제들의 정체성에 있어서도 사목자는 곧 선교사임에도 불구하고
사목자의 관점에 더 큰 비중을 두기를 고집한다면 본래 복음 선포자로서의
소명을 소홀히 하는 오류를 범할 것입니다. 본당신부하려고 신부가 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사제가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기 지켜야 할 전통과 관습이 있지만 그것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재해석하고 쇄신할 수 있어야 미래에 희망이 있습니다. 과거에 집착하면
세상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마르7,6-7) 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알맹이보다도 껍데기에 마음을 빼앗긴다면 여전히 같은
꾸중을 들을 것입니다.
내용보다도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며 거기에 얽매이다 보면
우리의 예배는 헛되고, 헛된 행위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을
중요시 하되 그 의미와 내용을 제대로 알고 시대를 앞서며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좋은 전통과 관습이라 하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좋은 것이 아니니 마땅히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간혹 “부득이 주일미사 참례를 못하여 주님의 기도 33번을 하였는데
고해성사를 봐야 되느냐?” “몸이 불편한데 미사전례 때 앉고 일어서고
꿇는 것을 따라 해야 하느냐?” “고해성사를 본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판공성사를 또 봐야 하느냐?” 라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을 일일이 해 드려야 합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행하는 것의 의미와 내용을 알고 거기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바에 얼마나 사랑으로
응답하느냐의 문제 입니다. 법은 함부로 무시하여서도 안 되고 내 입맛에
맞게 합리화시켜서도 안 되느니 만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전통과 관습을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행정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서울] 하느님이 정하신 10계명에 준해서
2015년 나해 2월10일 화요일 성녀 스콜라 스티카 동정 기념일
제1독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20―2,4ㄱ
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13
하느님이 정하신 10계명에 준해서
사람들이 정한 사항들은 틀릴 때가 많습니다. 국가행정부터 그렇지요.
그런가하면 가정문제도 결혼하고 달라지고 애 낳고 달라지고 또 있습니다.
부모관계도 아기 때부터 보면 청소년 청년 장년 결혼 후 매번 달라집니다.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게 우리 자신들인데도 큰 소리는 잘도 칩니다.
불변하는 진리와는 상관없이 마음 취향 따라 달라지는 사람들 한심하지요.
신앙인들은 하느님이 정하신 10계명에 준해서 구약부터 오늘까지 살고
있지요.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코 7,7~8)”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영혼의 정결예식
2015년 나해 2월10일 화요일 성녀 스콜라 스티카 동정 기념일
제1독서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20―2,4ㄱ
복음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13
영혼의 정결예식
요즘 다시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한 철학자의 표현이 있습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요즘 우리에게, 특히 우리 시대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말인 듯합니다. 시대의 고민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인간 삶에 대한 깊은
사유(思惟)는 뒷전입니다. 존재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나 공동선의 진작을
위한 노력 역시 안중에 없습니다. 그저 단 한치 앞의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대상들, 본능적이고 말초적인 대상들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한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념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청춘과 목숨을
아끼지 않던 순수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더 나은 세상의 건설, 더 큰
가치관을 위해 사랑도 젊음도 내어놓던 뜨겁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돌아봅니다. 자신의 내면을 돌보고 영혼을 살찌우려는
노력은 뒷전입니다. 그저 육체를 돌보기 위해 갖은 정성과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우리는 외모지상주의라는 정말 요지경 속 같은 특별한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천박한 문화는 예수님 시대에도 존재했습니다. 영혼과 정신은
썩어문드러져 가는데도 몸만 ‘빡빡’ 잘 씻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영혼이나 내면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정해진 규정에 따라 목숨 걸고 손과 발만 열심히 씻었고,
그게 신앙생활의 척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외모보다 마음을 더 소중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또한
이 세상 그 어떤 사람이든 생명이 붙어있는 한 그 자체로 존귀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입니다. 장애우든
임종직전의 환우든, 키가 크든 키가 작든, 평범한 외모이든 남과 다른
외모이든, 본국인이든 외국인이든 그 누구든 하느님 창조의 손길이
담겨있는 거룩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손과 발을 씻는 정결례 대신 이제 마음과 내면을 씻는 정결례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영혼과 정신을 씻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우리 정신이 형이하학적인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형이상학적인 차원으로
한 단계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더 순수하고 더 지고한 영혼의
소유자가 되기를 염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저 내 한 몸 잘 먹고 잘 사는 데 혈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
더불어-함께 잘 사는 세상을 추구하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더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하려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영혼의 정결예식을 위해 오늘 하루 더 인간답게
살지 못한 부분에 대해 더 깊이 성찰을 거듭해야겠습니다. 공동선의
증진을 위해 더 내 내어놓지 못한 것에 대해서 크게 가슴을 쳐야겠습니다.
더 이타적이고 더 희생적이고 더 충만하게 살지 못했음에 깊이
반성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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