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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D. 루스벨트(1882년~1945년)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줄여서 'FDR'이라고도 한다. 20세기를 이끈 정치 거물 중에서도 단연 손꼽히는 인물이자,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3번 이상 대통령을 지낸 인물이기도 하다. 원래 미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연임 제한을 따로 명문화 해놓지 않았으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한 번 연임한 다음 다시 출마하지 않은 것이 관례화 되어 후임자들 또한 모두 단임하거나 한 번만 연임하는 암묵상 규칙이 있었다. 하지만 루스벨트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위기 상황 속에서 종래의 관습를 깨고 4연임이나 하면서 그의 사후 미국 연방정부 헌법에 3회 이상(2번까지만.) 중임을 제한하는 수정 제22조가 신설된다.
1882년 1월 30일, 뉴욕 주 하이드파크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아버지는 유복한 지주이자 델러웨어 앤 허드슨 철도의 부사장이었고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FDR은 학교를 다니지 않고 가정교육과 여행으로 견문을 쌓다가 14살 때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그후 하버드에 입학하여 3년간 역사학을 전공했고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뉴욕의 법률회사에 취직했다. 학창 시절은 큰 재미없이 보낸 듯 하다. 어려서부터 귀공자처럼 혼자 자라서 그런지 친구는 별로 없었다고. 다만 본인은 공부만 파는 체질은 아니었고 운동과 밖에 돌아다니는 옥외활동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1905년 3월 17일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이자 자기에겐 먼 친척뻘(13촌)인 엘리너 루스벨트와 결혼하였다.
1913년 해군 차관보 시절.
그러다 1910년 공화당 최강세 지역인 더치스 카운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한 후, 1913~1918년까진 제1차 세계대전도 겪으며 제프 대니얼스 해군 장관 아래에서 해군부 차관보를 역임한다. 이 때의 인연으로 그는 대통령 임기 내내 미합중국 해군에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이때부터 루즈벨트는 대니얼스 전 장관을 '보스'로 모셨는데, 이때 대니얼스는 루스벨트가 자기를 깐 적도 있지만 대인배스럽게 계속 그를 후원해주었다고 한다. 이래선지 혹자는 대니얼스를 둔 루스벨트가 천운의 소유자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이후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2차 세계대전 직전에 대니얼스를 멕시코 대사로 보내기도 한다. 또 이때 루스벨트는 '루이 하우'라는 비서 겸 동료를 얻게 되는데, 이 사람은 이후 루즈벨트의 킹메이커로 많은 정치적 조언을 해주게 된다. 해군차관보 시절 해군에서 일하는 일반 노동자들과 루스벨트가 친분을 맺게 해 이들을 루스벨트의 지지그룹으로 만든 것도 루이 하우의 작품이라는 말이 있다.
2.2. 장애와 시련 그리고 재기
1920년 오하이오 주지사 제임스 콕스와 러닝메이트로 민주당 부통령 후보에 지명되지만 당시 윌슨 대통령의 국제연맹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이를 강력히 지지하는 정강을 채택하여 유권자들의 지지를 잃어 워런 G. 하딩의 공화당에 참패하여 낙선한다.
더구나 1921년 8월, 캐나다 캄포벨로의 별장에서 쉬다가 찬물에 빠져 소아마비에 걸리고, 반신불수가 되어 통증에 시달린다. 이후 몇 년간 뼈를 깎는 재활훈련 끝에 완벽하진 않아도 부축없이 겨우 걸을 정도가 되자 사람들은 그의 의지에 찬사를 보냈고 이에 힘입어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어느 정도 병세가 회복되자 1924년 뉴욕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가했는데 이 때 버팀목에 의지하여 연단까지 스스로 올라가 군중들을 감동시켰고 뉴욕 주지사 앨프리드 스미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연설을 했다. 여기서 얻은 별명이 '뉴욕 주지사의 행복한 전사'였다. 그 후 1928년 정계에 완전히 복귀하여 민주당의 뉴욕 주지사 후보가 되어 당선되었고 1930년에 큰 표 차이로 재선되었다. 이 때부터 혁신 정책을 실행했는데, 대공황 시대를 맞아 주(州) 차원의 구호 프로그램인 산업보험, 자연보호 관련 일자리 창출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화로에 앉아 라디오로 연설을 한 이른바 노변담화(Fireside chat)를 실시한 것도 바로 이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도움이 필요했다. 일반 대중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병세는 훨씬 심각했지만 의도적으로 숨긴 감이 많았다. 훗날 대통령이 되어서도 하반신 치료를 계속 지속했으며 비공식 석상에서는 여전히 휠체어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뉴욕 하이드파크 자택에서 애견 팔라, 저택 관리자의 손녀와 함께. 참고로 이 사진에서는 다리가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반신이 찍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위 사진은 루스벨트가 휠체어를 타고 찍은 몇 안 되는 사진 중 하나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기자들이 대통령이 휠체어 탄 모습을 보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자동차나 열차에서 내리거나 걸으면서 힘겨워하는 모습을 찍지 말아달라는 일종의 보도지침 역시 기자들이 자발적으로 지켜주었다. 백악관 출입기자로 처음 발령받은 신참 기자가 대통령이 휠체어 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사진을 찍으려하자 동료기자들이 밀쳐서 카메라를 떨어뜨린 일화도 있다고 한다. 그의 장애는 잘(?) 숨겨졌는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맞아주었다고 기억한 방문객이나 지인이 많았고, 그가 죽고 나서야 대통령이 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안 국민들도 많았을 정도였다.
2.3. 대통령이 된 후
루즈벨트가 당선될 당시인 1933년 3월의 시사 잡지 뉴요커 표지. 왼쪽에 앉은 뚱한 표정의 남자는 루즈벨트와의 경합에서 떨어진 허버트 후버이며, 오른쪽에 앉아 씨익 웃고 있는 남자가 루즈벨트다.
1932년 1월에 대통령직에 도전했다고 발표했고 민주당의 지명을 받아 민주당 후보가 되었다. 그 결과 당시 대공황의 원흉으로 지탄받던 대통령 허버트 후버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1933년 2월 즈음 취임을 앞두고 마이애미에서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다. 범인은 시카고 마피아의 사주를 받은 주세페 잔가라(Giuseppe Zangara). 잔가라의 총알은 빗나가 그 옆에 있던 시카고 시장 앤턴 서맥의 가슴에 맞았고 결국 시장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참고로 이 암살사건에 대한 설이 몇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사건의 목표가 애초에 루스벨트가 아닌 서맥이라는 것이다. 서맥 시장의 전횡(?)에 화가 난 시카고 마피아들이 잔가라를 미끼로 하여 루스벨트를 암살할 것처럼 액션을 취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서맥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당시 잔가라의 총과 서맥이 맞은 총탄 구경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 내세워지기도 한다. 물론 지금에 와선 믿거나말거나 수준이라 어느 설을 신뢰할진 알아서 판단하자.
여하간, 한 달 뒤 그가 1933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할 때 했던 말은 엄청난 유명세를 탔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
노동자의 선택, 루스벨트.
-1936년 대선 포스터.
촬영 끝나면 손 떼 임마
대통령이 된 후 당시 대공황에 빠져있던 미국경제를 살리기 위해 우선 취임하자마자 바로 은행의 파산을 막기 위해 은행을 휴업시켰고, 공공사업 확대와 실업자 구제, 복지 확충과 금융 개혁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뉴딜(New Deal) 정책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유명한 것이 테네시 계곡 개발공사(TVA)로 대표되는 대대적인 공사 사업으로 일자리를 실업자들에게 제공한 것. 또한 당시 방임적인 기업정책을 수정하여 국가가 기업을 통제하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한 법인 와그너법의 제정과 오늘날 미국의 사회복지 체계를 만들어낸 사회복지법의 제정 등을 들 수 있다. 당시로써는 과감했던 이런 정책들의 시행으로 1936년 무렵에는 실업률이 줄고 국민소득이 올라가는 등 경제 상황이 호전된다. 이런 공적에 힘입어 1936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인 알프레드 랜든(Alfred Landon)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어 재선되었다.
이때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 연설이 폭풍 간지다.
For twelve years this Nation was afflicted with hear-nothing, see-nothing, do-nothing Government. The Nation looked to Government but the Government looked away.
지난 12년 동안 이 나라의 국민들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일을 못하는 정부로부터 고통을 받았습니다. 국민은 정부를 바라보았지만 그 정부는 국민을 외면하였습니다.
Nine mocking years with the golden calf and three long years of the scourge! Nine crazy years at the ticker and three long years in the breadlines! Nine mad years of mirage and three long years of despair!
물신(금송아지 우상) 숭배에 눈이 멀었던 9년 그리고 재앙의 기나긴 3년! 주식 시세에 미쳤던 9년 그리고 식량 배급줄에서의 기나긴 3년! 신기루에 미친 9년 그리고 절망의 기나긴 3년!
Powerful influences strive today to restore that kind of government with its doctrine that that Government is best which is most indifferent.
오늘날 강력한 세력가들은 무관심한 정부가 최선의 정부라는 자신들의 교리를 앞세워 그러한 정부를 회복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For nearly four years you have had an Administration which instead of twirling its thumbs has rolled up its sleeves. We will keep our sleeves rolled up.
지난 4년 남짓 동안 여러분은 손가락만 빠는 대신 소매를 걷어붙이는 정부와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는 계속 소매를 걷어붙일 작정입니다.
We had to struggle with the old enemies of peace—business and financial monopoly, speculation, reckless banking, class antagonism, sectionalism, war profiteering.
우리는 평화의 오래된 적과 투쟁해야 했습니다 - 산업과 금융 분야의 독점, 투기, 무절제한 은행업, 계급간의 대립, 파벌주의, 전쟁으로 부당이득을 챙기는 이들 말입니다.
They had begun to consider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as a mere appendage to their own affairs. We know now that Government by organized money is just as dangerous as Government by organized mob.
그들은 미국 정부를 그저 자기 사업을 돕는 조력자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조직적 자금에 의한 정부는 조직폭력집단에 의한 정부만큼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Never before in all our history have these forces been so united against one candidate as they stand today. They are unanimous in their hate for me and I welcome their hatred.
우리들의 역사상 이제까지 한번도 이 세력들이 한명의 후보에게 이토록 대항해 힘을 모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저를 증오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의 증오를 환영합니다.
ㅡ 1936년 10월 31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연설.
한편, 이 1936년 대통령 선거는 선거 여론조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유명한 선례가 되기도 했다. 당시 잡지사인 리터러리 다이제스트(The Literary Digest)는 대규모 전화 여론조사 및 독자들에 대한 우편 설문을 통해서 랜든이 선거에서 이길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결과는 정반대로 루즈벨트의 압승. 그것도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2번째로 높은 전국 지지율인 60.8%(1위는 1964년 린든 존슨의 61.1%)를 기록하며 개망신을 당한 것이다. 하원의원 선거도 총 435석 중 334석을 쓸어담는 그야말로 압승.
사실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이전에 여러 번 선거 예측에 성공한 선례가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처참할 정도의 오판을 한 이유는 리터더리 다이제스트의 조사 방법 때문이었다. 뭔 소린가 하면 위에서 언급한 전화 및 우편 설문은 그 표본의 대표성이 크게 떨어졌다. 당시 리터러리 다이제스트의 독자는 잡지를 사서 읽을 정도가 되는 중산층 이상 계층이 주를 차지했고, 당시에는 꽤 고가품이었던 전화기를 집에 설치할 정도의 계층 역시 중산층 이상이 다수였다. 때문에 표본은 편파성을 띄게 되었고, 결국 잘못된 결과를 도출한 것. 그리고 이 실패로 인해 다이제스트는 신뢰성에 큰 타격을 입고 2년 후인 1938년 폐간하고 만다. 반면 조지 갤럽이란 언론인은 무작위 표본 추출을 통한 조사를 통해서 루즈벨트의 승리를 예측했고 이것이 맞아 떨어지면서 유명세를 타는데, 이 성공으로 갤럽은 독자적인 여론 조사기관을 만들었고 이게 바로 현대의 그 갤럽이다.
그렇게 루즈벨트는 집권 2기에 들어섰으나, 1937~1938년엔 뉴딜정책의 효력이 떨어졌는지 다시 불경기가 찾아왔고, 외교적으론 파시즘의 도래로 전운이 감돌던 유럽 지역에 적극 개입할 것인지 여부를 두고 고심하게 되었다. 당시의 불경기에 대해선 경제 주기상 찾아오는 일정 패턴이란 설도 있고, 현대에 와선 고전학파들의 분석과 달리 3년간의 호황이 지속되자 재정지출을 잠시 줄였더니 오히려 일어난 참사였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럼에도 루즈벨트는 1939년 주당 44시간 노동을 확립한 공정노동표준법을 제정했는데, 이 법은 시급 25센트 이상의 최저임금을 보장하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1940년, 루즈벨트는 조지 워싱턴 이래로 (명문화되진 않았지만) 지켜져오던 3선 금지의 룰을 깨고 대통령 선거에 3번째로 출마한다. 물론 이런 그의 행동은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에서도 반발이 있었고, 실제로 민주당 내에서 그의 3선을 반대하는 포스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허나 전쟁의 여파가 미국에도 서서히 드리워지는 상황 속에서 미국인들은 그를 다시 지지했고 지난 선거보단 낮았지만 여전히 넉넉한 표차로 공화당 후보인 웬델 윌키(Wendell Willkie)를 누르고 3선에 성공한다. 실제로 미국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후 1941년 공식 참전 선언을 할 때까지 개전 후 약 2년 정도 중립을 유지했는데 1940년이 딱 그 사이였던 것.
그리고 그의 3기 임기가 시작되던 무렵인 1940년경에는 미국의 1차대전 참전이 '잘못'이었다는 여론이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미국인들도 미국이 전쟁에 참전할 것을 지각하고 있었다는 정황이기도 하다. 또한 루스벨트 본인도 세 번째 취임 때 4가지 자유라는 연설에서 부분적으로 전쟁을 예고하기도 했다. 여기서 밝힌 4가지 자유란 '표현과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인데, 여기서 말하는 '공포'란 다름아닌 전쟁을 의미. 물론 방법적으론 세계적 규모의 군축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여튼 서서히 미국도 전쟁에 참전할 준비를 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1941년 일본제국의 진주만 공습 이후 루즈벨트는 일본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선언한다. 이른바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었다.
1941년 12월 8일 루스벨트 대통령 대일 선전포고 연설 영상. 앞 부분을 따서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my Speech)'이라고 불린다.
Yesterday, December 7,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앞으로 치욕의 날로 기억될 1941년 12월 7일인 어제, 미합중국은 일본 해군과 항공대로부터 고의적이고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The United States was at peace with that nation, and, at the solicitation of Japan, was still in conversation with its government and its Emperor looking toward the maintenance of peace in the Pacific.
미국은 일본 제국과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요청으로, 그들의 정부와 황제를 상대로 함께 태평양에서의 평화유지를 목표로 하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Indeed, one hour after Japanese air squadrons had commenced bombing in the American island of Oahu, the Japanese Ambassador to the United States and his colleague delivered to our Secretary of State a formal reply to a recent American message. And, while this reply stated that it seemed useless to continue the existing diplomatic negotiations, it contained no threat or hint of war or of armed attack.
사실, 일본 비행 편대들이 미국 오아후 섬에 폭격을 개시한 지 한 시간 후, 주미 일본 대사와 그의 동료는 우리의 국무 장관에게 미국 정부의 최근 서한에 대한 공식답변을 제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답변서는 외교 협상을 지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었지만, 군사적 공격 혹은 전쟁과 관련된 협박이나 암시는 포함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It will be recorded that the distance of Hawaii from Japan makes it obvious that the attack was deliberately planned many days or even weeks ago. During the intervening time the Japanese Government has deliberately sought to deceive the United States by false statements and expressions of hope for continued peace.
하와이에서 일본까지의 거리를 고려한다면 공격은 수일 혹은 심지어 수주 전부터 고의적으로 계획되었음이 명백합니다. 그 준비 기간 동안 일본 정부는 평화유지를 희망하는 표현과 진술로 고의적으로 미국정부를 기만하였습니다.
The attack yesterday on the Hawaiian Islands has caused severe damage to American naval and military forces. I regret to tell you that very many American lives have been lost. In addition, American ships have been reported torpedoed on the high seas between San Francisco and Honolulu.
하와이 제도에 대한 어제의 공격은 미국 해군과 군사력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매우 많은 미국 국민들이 희생되었음을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덧붙여, 샌프란시스코와 호놀룰루 사이의 공해상에서 미국 군함들이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Yesterday the Japanese Government also launched an attack against Malaya.
어제 일본 정부는 또한 말레이반도(말라야)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Hong Kong.
어제 밤 일본군은 홍콩을 공격하였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Guam.
어제 밤 일본군은 괌을 공격하였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the Philippine Islands.
어제 밤 일본군은 필리핀 군도를 공격하였습니다.
Last night the Japanese attacked Wake Island.
어제 밤 일본군은 웨이크 섬을 공격하였습니다.
And this morning the Japanese attacked Midway Island.
그리고 오늘 아침 일본군은 미드웨이 군도(群島)를 공격하였습니다.
Japan has therefore undertaken a surprise offensive extending throughout the Pacific area. The facts of yesterday and today speak for themselves.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have already formed their opinions and well understand the implications to the very life and safety of our nation. As Commander-in-Chief of the Army and Navy I have directed that all measures be taken for our defense, that always will our whole nation remember the character of the onslaught against us.
그러므로 일본은 태평양 전역에 걸쳐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 벌어진 일들이 이를 스스로 증명합니다. 미국 국민들은 이미 뜻을 굳혔고 우리나라의 생명과 안전에 초래된 결과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미국 육군과 해군의 통수권자로서 본인은 국가 방위를 위한 모든 조치를 지시하였으며, 이 조치는 모든 국민이 우리에게 가해진 침략의 성격을 기억하도록 할 것입니다. (박수갈채)
No matter how long it may take us to overcome this premeditated invasion, the American people, in their righteous might, will win through to absolute victory.
우리가 이 계획적 침공을 격퇴하는 데에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미국 국민들은 정의로운 힘을 모아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박수갈채)
I believe that I interpret the will of the Congress and of the people when I assert that we will not only defend ourselves to the uttermost but will make it very certain that this form of treachery shall never again endanger us.
최선을 다해 우리 자신의 방위를 위해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이러한 식의 배신 행위가 앞으로 다시는 우리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는 나의 주장은 의회와 국민 모두의 뜻을 반영한 것이라고 믿는 바입니다. (박수갈채)
Hostilities exist. There is no blinking at the fact that our people, our territory and our interests are in grave danger.
이제 침략의 위협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 국민, 우리 영토, 우리의 이익이 심각한 위험 사태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With confidence in our armed forces, with the unbounding determination of our people, we will gain the inevitable triumph. So help us God.
우리 군대에 대한 신뢰와 우리 국민의 결연한 의지로써, 우리는 기필코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신의 가호를 빕니다. (박수갈채)
I ask that the Congress declare that since the unprovoked and dastardly attack by Japan on Sunday, December 7, 1941, a state of war has existed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Japanese Empire.
본인은 1941년 12월 7일 일요일에 일본의 일방적이고 신의 없는 공격이 개시된 시점에서, 미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전쟁 상태가 시작되었음을 의회에서 선언해줄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박수갈채)
직후 미국은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의 선전포고도 받으며 동시에 2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게 된다.
이렇게 전쟁을 지도하던 와중에 1944년에 공화당에서는 토머스 듀이가 대권에 도전하나 여기서도 또 승리하여 마침내 대통령에 4번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듀이는 루스벨트에게 있어서 제일 위협적인 상대였던 것도 사실. 훗날 해리 S 트루먼에게 역전패를 당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 FDR 4선 저지를 위해 반대진영에서 내놓았던 논리 중 하나가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알고 있었음에도 전쟁에 개입하기 위해서 일부러 모른 척 했다."라는 음모론이었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상 그런 것이 먹힐 리가 없었고 결국 4선 저지는 실패.
다만 당시에도 3선과 달리 4선은 내부적으로도 논란이 많았다. 3선은 미국 내에 루스벨트만한 대안이 없는 상황인데다 외부 분위기도 별로 좋지 않아서 일단 대통령으로 뽑고 나중에 생각해 보자는 인식이 강했으나, 4선 당시에는 이야기가 달라서 이미 일본도 독일도 망해가는 상황이라 전쟁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어차피 전쟁은 공화당이 재집권해도 계속 수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굳이 루스벨트가 4번이나 대통령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루스벨트는 이미 건강 상태가 매우 안 좋은 상황이었는데 자칫 사망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다면 미국 전체가 난리가 날 수도 있었다. 트루먼이라는 유능한 후계자의 등장으로 큰 문제 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이 문제는 루스벨트 사후에도 논란이 되면서 1951년 수정헌법 개정에 따라 미국 대통령의 3선 이상 연임을 무조건 금지하게 되었다.
1945년 2월이 되어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영국의 윈스턴 처칠,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전후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얄타 회담을 가지기도 했고, 국제연합의 창설모임을 4월 25일 가지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의회에 제출한다.
2.4. 승리를 눈앞에 두고…
얄타에 모인 20세기를 풍미한 세 정객들.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오시프 스탈린. 삼대장
1945년 3월 말, 루스벨트는 휴식을 위해 웜스프링스의 별장에 있었다. 그리고 4월 12일 여기서 애견 팔라와 산책을 하고 벽난로 앞에서 자신의 안락의자에 앉아 비서와 농담을 하면서 테이블의 여러 서류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옆에서 한 화가가 그리고 있었는데, 오후 1시 15분 뇌출혈로 루즈벨트는 갑자기 "뒷머리가 너무 아프군"이란 말을 남기고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쓰러졌다.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1945년 4월 12일 오후 3시 35분,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난다. 이미 얄타 회담 당시 루스벨트를 찍은 영상들을 보면 이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은걸 알 수 있다. 얼굴은 수척한데다 악수도 몹시 힘들어하던 상태였다.
이 때문에 아돌프 히틀러는 잠시 동안 멸망 직전에 러시아 옐리자베타 여제의 사망으로 기사회생한 프리드리히 2세의 전례의 재현을 꿈꾸지만…현실은 시궁창. 후임은 당시 부통령이었던 해리 S 트루먼이 맡았다. 이 때 트루먼은 영부인 앨리너의 전화를 통해 대통령의 부고를 접했는데 앨리너가 "트루먼 씨, 대통령이 돌아가셨어요."라고 말하자 한참을 침묵하던 트루먼은 "제가 부인을 위해 무엇을 해 드려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앨리너는 "아니오. 제가 당신을 위해 뭘 해드려야 할까요? 앞으로 골치 아프실 일이 많을 테니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루스벨트가 남겨 놓은 과제가 많았다는 소리다. 그래서 트루먼은 대통령 취임 직전에 "달, 별, 그리고 모든 유성이 나에게 떨어지는 기분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의 부고를 접한 윈스턴 처칠 총리는 눈물을 흘리며 당시 미국의 라디오 특파원으로 있던 에드워드 머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언젠가 이 세상과 역사는 당신네 대통령에게 큰 신세를 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3. 평가
FDR은 수렁에 빠진 미국 경제를 살려내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위대했던 미국 대통령들 중 한 명으로 손꼽히며 지금도 많은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미국은 FDR의 집권기를 거치며 명실상부한 세계 제1의 초강대국이 되는데, 사실 미국의 경제규모와 국력은 1차세계대전 당시 기존 세계 제1의 세력이었던 서유럽 국가들과 맞먹을 정도로 성장했으나, 국제 인지도나 금융, 외교 등의 일부 분야에선 여전히 서유럽의 영향력이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대공황과 2차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미국은 모든 분야에서 서유럽을 앞지르게 되었고, 종전 후에는 명실상부한 세계 제1의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된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 교과서에도 자주 나오는, 상기된 얄타 회담 당시 정중앙에 앉은 루즈벨트의 모습이다. 좌 처칠 우 스탈린을 이끄는 세계 외교 무대의 수장 루스벨트 사실 미국인 뿐만 아니라 유럽인, 더 나아가 인류 입장에서도 그나마 다행인게 만약 루스벨트의 경제회복이 없었다면 미국은 고립주의 노선으로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그랬다면 당시 연합군은 나치와 일제에 패해 최악의 경우 유럽, 아시아 일대가 전체주의화되는 헬게이트가 전개되었을 수도 있다. 달리 말하면 히틀러나 무솔리니, 도조 히데키의 어리석은 야욕을 꺾은 인물.
한편, 루즈벨트의 안티들은 뉴딜정책의 성과가 생각만큼 크진 않으며, 불황 탈출도 전쟁 특수가 한몫했다는 지금도 논란이 분분한 논리와 함께 자유시장경제를 왜곡했다는 비판도 한다. 또한 2차 세계대전 당시 바로 개입하지않아 유럽이 초토화되고, 유대인들도 홀로코스트를 당하는 등 너무 수수방관한 것 아니냔 주장도 있다. 그 외 소련의 힘을 과대평가해 스탈린에게 많은 부분을 양보해줘 이후 냉전 체제의 빌미를 줬다는 시각도 있다. 이런 점을 들어 매카시즘으로 유명한 조지프 매카시 같은 그 시절 미국내 극우파 인사는 루스벨트와 후임 트루먼 정권을 싸잡아 '반역의 20년 정권'(...)이라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이외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하여 2차 세계대전 당시 엄연히 미국적자였던 일본계 미국인들을 비롯한 적국 출신 자국 이주민들을 강제 수용한 것도 그의 오점으로 꼽히는데, 다만 반일감정은 몰라도 루스벨트 시절은 인권운동가로 유명했던 영부인 엘레너 루스벨트 등의 활약으로 인종주의는 오히려 어느정도 해소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4선을 하며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장기집권의 씨앗을 낳을 뻔한 점도 비판을 받는다. 이전까진 명문화되어 있지 않아도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2선을 하고 물러났기 때문에 알아서들 2선까지만 하고 말았는데, 루스벨트가 관례를 깨고 4선을 해서 그의 사후 3선 이상을 금지하는 헌법조항이 명문화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결국 4기 도중 루스벨트는 사망하는데 이렇게 건강이 안좋은 상태에서까지 집권한 것이 제2차 세계 대전 등의 어떤 책임감 때문인지 권력욕 때문인지 아님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본인만이 알 일. 물론 루스벨트 본인은 드골이 독재자가 될 인격을 갖추고 있기에 민주주의에 걸맞는 지도자가 아니라고 평가하는 등 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신념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리버럴 진영에서는 뉴딜 정책이 가축 대량살처분 같은 부작용도 일부 남겼지만, 이때 추진한 여러 정책 중 상당수는 이후 서구권에서 수십년간 이어진 자본주의 황금기를 만드는 토대가 되었고, 실제 뉴딜 정책 이후 경제학계의 주류로 올라선 케인지언들만 봐도 알 수 있듯 세계 경제학의 기조 자체를 바꾸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이는 지금도 많은 좌우 인사들이 공감하고 있는 부분으로 이후 공화당 정부도 뉴딜 정책 당시 수립된 정책들을 상당수 계승했고, 심지어 지금도 사회보장제도 등 이어지는 정책들이 있다. 또 루스벨트 행정부 2기(1937~1938) 경기침체의 경우, 뉴딜정책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견해와 오히려 재정지출 감소 때문에 즉 뉴딜정책을 지속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정반대의 견해(크루그먼)가 대립한다.
사실 뉴딜 정책이 갖는 중요한 의의는 정책의 호불호를 떠나, 미국이 방임주의로 대공황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지만, 대중들에게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사회내 극단주의자들의 성장을 억제하고 큰 틀에서의 기존 체제를 지켜낸 점이라고 평가하는 이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뉴딜이 사회주의 정책이라는 일부의 시각과 달리 실제론 되레 사회주의로부터 자본주의를 수호한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돈지랄 정책이라고 폄하하는 이도 있지만 사실 정부의 돈지랄 끝판왕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다. 그리고 전쟁은 대개 특수보단 경제 파탄내는 지름길로 간 케이스가 훨씬 많다.
하여튼 이렇게 다양한 평을 남긴 대통령이지만, 결과적으로 대공황을 극복하고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오늘날 초강대국 미국의 기반을 마련한 대통령이었다는 것에는 대부분이 공감하기에, FDR은 오늘날에도 조지 워싱턴과 에이브러햄 링컨 등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통령 업적 평가나 인기 순위를 조사하면 세 손가락 내로 드는 경우가 많은데, 2010년 시에나 대학의 업적 평가에선 마침내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한편, 루즈벨트의 집권은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치 성향 및 지지 기반이 서로 바뀌는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한다. 루즈벨트가 일명 '뉴딜 동맹'이라 하여 소수인종-유태인-이민자-노동자-농민 지지층을 확보하게 되었고, 21세기 현재까지도 비백인 이민자 계열(특히 흑인 및 히스패닉)은 민주당의 강력한 지지층으로 자리잡아있다. 반면 공화당은 링컨 이후 강력한 지지기반이었던 흑인 집단의 지지를 상실했다. 정치적 성향 또한 뉴딜 정책을 계기로 민주당은 시장 개입 및 복지 정책의 확대에 관심을 기울이고 리버럴 성향이 강해진 반면, 공화당은 보다 자유방임주의에 근거한 시장친화적 성향으로 바뀌게 된다.
관련 어록
"So, first of all, let me assert my firm belief that 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 Fear Itself. Nameless, unreasoning, unjustfied terror which paralyzes needed efforts to convert retreat into advance."
"우선, 제가 굳게 믿고 있는 점을 하나 강조하자면, 그것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막연하고, 이유도 없고, 정당하지도 않은 두려움이야말로 후퇴를 전진으로 전환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을 마비시킵니다."
"I should like to have it said of my first Administration that in it the forces of selfishness and of lust for power met their 'match'. I should like to have it said.. Wait a minute! I should like to have it said of my second Administration that in it, these forces met their 'master'."
"저의 첫 번째 임기를 말하자면, 저 권력을 탐하는 이기적인 세력들이 적수를 만나게 된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군중 환호 후) 그리고! 저의 2번째 임기는 저 자들이 임자를 만나는 시기가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 1936년 10월 31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대선 연설.
"The test of our progress is not whether we add more to the abundance of those who have much, It is whether we provide enough for those who have little."
"진보의 시험대는 많이 가진 자에게 더 얹어주고 있느냐가 아니라, 적게 가진 자에게 충분히 보태주고 있느냐이다."
"In the truest sense, freedom cannot be bestowed, it must be achieved."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는 수여될 수 없으며, 쟁취해야 한다."
"They (who) seek to establish systems of government based on the regimentation of all human beings by a handful of individual rulers...call this a new order. It is not new and it is not order."
"몇몇 개별 통치자로 하여금 모든 인간의 획일화에 기반을 둔 정부체계를 만들려는 사람들은 이것을 '새 질서'라고 부른다. (허나) 이것은 새롭지 않고, '질서'도 아니다."
"We must be the great arsenal of democracy We must apply ourselves to our task with the same resolution, the same sense of urgency, the same spirit of patriotism and sacrifice as we would show were we at war.I believe that the Axis powers are not going to win this war "
"미국은 거대한 민주주의의 병기창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전쟁과도 같은 비상사태에 있습니다. 전쟁에서 보여주는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가지고 우리의 임무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나는 추축국이 결코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 1940년 12월 29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우리만 행복하고 풍요로운 오아시스가 되려해선, 미국은 결코 존속할 수 없다."
- 독립기념일 연설.
"스스로 일을 처리하려면 당신의 머리를 사용하고, 다른 사람을 움직이려면 당신의 마음을 사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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