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11. 예수비전교회 주일낮예배 주의 생명이 보배, 능력이다 유백선 목사
고린도후서 4: 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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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남부럽지 않는 삶을 살면 여유와 만족감을 갖고, 자신 있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육체가 고통을 겪으면 생각과 마음, 태도가 달라집니다. 김상영 님이 쓴 “통증(痛症)”이라는 시(詩)가 있습니다. “암 수술한 아내 / 손목뼈가 부러져 통증을 호소한 아내 / 질그릇 같은 인생 / 하나님 앞에 더 겸손해져 가는 모습이 애처롭다 / 극심한 고통으로 쓰러질 때도 /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뻗고 / ‘여호와여 도우소서.’ 부르짖었던 욥 / 하나님은 욥을 다시 일으키셨고 / 욥은 정금이 되었고 / 욥기를 남겼다 / 나는 죽음의 통증이 올 때 /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 욥처럼 / 아름다운 것을 남기는 / 인생이 되어야 하리라.”
여러분! 사람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통증입니다. 하지만 통증을 느끼는 것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통증은 육체에 상처와 염증이 있다는 것입니다. 통증은 해로운 물질에서 물러나게 해서 생명체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입니다. 통증이 느껴지면 자신의 몸을 돌아봅니다. 환자에게는 치유과정이 필요한 휴식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규슈공립대학 스포츠학과 통증전문치료사 기데라 에이시 교수가 쓴 <걷는 법을 바꾸면 통증이 사라진다> 에서 말했습니다. “걷기는 모든 인간 동작의 기본이다. 그런데 잘못된 방법으로 걸으면 몸에 무리가 간다. 사람은 다리부터 늙는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상체보다 하체의 근육 양이 더 쉽게 줄어든다. 걷기는 이를 예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세를 바꾸면 통증이 사라집니다. 짧아진 근육을 늘이고, 허리의 기능을 회복해야 통증이 사라집니다. 인간이 육체에 심각한 고통을 당하면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는 시간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만들었다. 육체의 고통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가 있다. 이유가 없는 고통이 없다.’ 인간은 육체의 아픔이 심하면 두뇌가 그 아픔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다른 일을 하지 못한 상태가 됩니다. 육체의 고통을 겪으면서 자신의 죄를 돌아보게 됩니다. 죄와 관계를 끊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현절 여섯 번째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이 질그릇(인간)의 보배다. 예수의 생명이 보배다. 생명의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말씀으로 그 하늘들과 그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성(性)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셨습니다.(창 1:27) 하나님께서는 그 땅의 흙으로 사람의 육체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체에 생기(니쉐마트 하임/םייח תמשׁנ/nishemath chayiym)를 그 코에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러자 사람이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창 2:7)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과 다른 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호흡하는 관계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앞을 떠나면 관계가 끊어지고, 은총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창 4:16) 하나님을 떠나면 죄에 구속되어 살면서 죄의 문화를 양산해냅니다. 스스로 부패하여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합니다. 하나님께서 격노하시고, 말세에 재앙을 당하게 됩니다.(신 31:29)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광야에 버리십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이 멸망하게 됩니다.(민 32:15)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다른 신들을 섬기고 살게 됩니다.(신 7:4) 다른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기면 마음에 염려와 독초와 쑥의 뿌리가 생깁니다. 그 땅에 재앙이 일어나서 작물을 심어도 결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땅에 유행하는 질병을 보게 됩니다.(신 29:18,22-23) 주를 버리는 사람은 다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결국에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흙에 기록됩니다.(렘 17:13) 반면에 하나님께 붙어서 떠나지 않는 사람은 오늘까지 다 생존하는 것입니다.(신 4:4)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하나님께서 앞서 행하십니다.(신 31:8)
사도 바울이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사람의 속성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본문 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보배(떼사우론/θησαυρον/thesayron)”는 “보물, 부, 좋고 값비싼 것을 모아 둔 곳, 보물 창고, 보화”라는 뜻입니다. “이 보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비춰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그 빛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습니다.(고후 4:6)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있으면 우리의 얼굴에 예수님의 얼굴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주의 얼굴과 주의 힘의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힘의 영광을 떠나서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살후 1:8-9)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 화목합니다. 그래서 전능자가 내 보화가 되십니다. 하나님과 평안하면 복이 임합니다. 사람이 전능자에게 돌아가면 전능자를 기뻐합니다.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고 살게 됩니다.(욥 22:21,25,26) 지혜로운 입술이 더 귀한 보배가 됩니다.(잠 20:15) 사람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보배입니다.(사 33:6)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보배입니다.(벧전 2:7) 사람은 흙으로 빚은 질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질그릇(오스트라키노이스 스큐에신/οστρακινοις σκευεσιν/ostrakinois skeyesin)”은 “흙으로 빚은 그릇, 연약한 도구, 흙으로 만든 장비, 연약한 물건, 연약한 조력자” 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존귀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영이 있어서 존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육체를 가진 사람에 불과합니다. 사람의 육체가 흙으로 지은 질그릇과 같습니다. 육체의 질그릇은 그 자체가 힘을 오래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오래 사용하면 낡아지고, 패이고, 헐고, 부딪히면 깨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전능자의 큰 능력이 있습니다. 여기서 “큰 능력(위페르볼레 테스 뒤나메오스/‘υπερβολη της δυναμεως/hyperbole tes dynameos)”은 “탁월한 힘, 우월한 이적적인 능력, 더 우수한 능력, 현저하게 강한 힘, 탁월한 권능” 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베푸시는 전능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받은 사람을 통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즐겁게 부르며 기뻐하십니다.(습 3:17) 하나님께서는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구원하신 목적이 하나님만 경외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며 살라고 하십니다.(왕하 17:36)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으로 계셨다가 사람의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큰 능력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하나님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요 6:29)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큰 능력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은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집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을 보고 크게 기뻐하고, 나의 여러 가지 약한 것들에 대해서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에게 머물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후 12:9)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을 증거 할 때 나타납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연약한 것을 아시고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것을 알지 못할 때에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며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십니다.(롬 8:26)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큰 확신을 갖게 하십니다.(살전 1:5) 하나님의 백성이 항상 하나님의 큰 능력을 구하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와를 구하라. 여호와의 능력을 구하라. 여호와의 얼굴을 항상 구하라.”(시 105:4) 사람이 하나님의 큰 능력을 질그릇에 채워야 강하고, 힘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있는 아주 큰 능력이 왜 내 안에 있어야 합니까? 첫째는 사방에서 괴롭히고, 압박을 해도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 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여기서 “욱여쌈을 당하다(뜨리보메노이/θλιβομενοι/)”는 말은 “괴롭힘을 당하다, 에워쌈을 당하다, 강하게 눌림을 당하다, 제한을 받다, 편협하게 대하다, 학대를 당하다, 걱정시킴을 당하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사방에서 괴롭히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욥이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친구들이 찾아와서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 괴로웠습니다. 위로하러 와서 하는 말들이 학대와 괴롭힘이 되어서 말했습니다. “너희가 내 마음을 괴롭히며 말로 나를 짓부수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구나.”(욥 19:2-3) 친구가 위로한다고, 잘하라고 한 말이 도리어 학대하고 괴롭히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해로운 인간바이러스가 될 때 지혜롭게 퇴치해야 합니다. 어디서나 해충 같은 인간들이 공격할 때 살아남아야 합니다.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독수리처럼 나를 습격하기도 합니다. 내 마음을 압박하고, 아프게 하는 사람과 당당하게 맞서 싸우고, 물리쳐야 합니다. 허술한 방어력이 노출되면 사방팔방에서 괴롭히고 털어가기 때문입니다. 악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합니다. 악한 말과 행동이 다른 악한 말과 행동을 위한 길을 닦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몰려와서 괴롭히고, 압박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내 안에 있으면 멘탈이 강해집니다.
둘째는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답답한 일을 당하다(아포루메노이/απορουμενοι/aporoymenoi)라는 말은 ”빠져나갈 길이 없다, 어리둥절하게 되다, 의심 속에 있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 방법이 없다, 곤경에 빠지다, 부족한 채로 있다, 돌아갈 길을 알지 못하다, 당황하다, 혼란스럽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답답한 일을 당하면 걱정과 염려가 가득 차게 됩니다. 사람이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생각하면 낙심합니다. 의심 속에 있으면 믿음이 흔들립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면 당황하게 됩니다.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면 절망합니다. 의심하면 행동하지 않습니다. 의심이 화를 초래하게 됩니다. “낙심하다(엑사포루메노이/εξαπορουμενοι/eksaporoymenoi)”는 말은 “극도로 당황해하다, 절망하다, 매우 적다, 아주 없다, 모든 희망을 포기하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낙심을 하면 살 소망까지 끊어지게 됩니다.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인생을 정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의 큰 능력이 내 안에 있으면 자기를 의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고후 1:8-9)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내 안에 있으면 답답한 일을 당해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에 빠져나갈 방법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 앞에 섰을 때 답답하고 막막했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고, 투덜대면서 말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다. 그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원망하고, 불평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바다가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할 것이다.”(출 14:10-16) 만약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지팡이를 바다 위로 내밀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큰 능력을 믿는 사람은 답답한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행동합니다. 부족한 채로 당황할 때 기도하는 사람에게 기적을 행하십니다.
셋째는 박해를 받아도 버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박해를 받다(디오코메노이/διωκομενοι/diokomenoi)”는 말은 “날려 보내다, 쫓아버리다, 괴롭히다, 고통을 주다, 추적하다.” 라는 뜻입니다. 전 세계 기독교인 7명 중 1명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박해와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하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차별하여 교육, 취업, 정부 서비스에서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법적으로 괴롭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사형을 선고합니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에 대한 나쁜 소문과 편견을 가지고 박해를 합니다. 마지막으로 타락한 사회를 성결하고 공의를 행하는 것을 박해하였습니다. 신분을 차별하는 제도를 무너뜨린다고 박해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교회와 성도는 모진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더 견고해집니다. 교회가 영적으로 거듭나고 더 성결하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한국교회도 수많은 박해를 이기고 성장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이 복이 있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악한 말로 박해하고 욕할 때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상이 클 것이다.”(마 5:10-12)
넷째는 거꾸러뜨려도 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거꾸러뜨림을 당하다(카타발로메노이/καταβαλλομενοι/kataballomenoi)”는 말은 “아래로 던지다, 내려가다, 밑으로 던지다, 땅에 던지다, 기초를 놓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왜 거꾸러뜨리려고 합니까? 그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래로 던져서 자기를 증명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거꾸러뜨려서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거꾸러뜨리기 위해서 모함하고, 노략질을 합니다. 사탄의 최고 전략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시기심과 세상 권력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여 거꾸러뜨리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서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에 계셔서 심판주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내 안에 있으면 예수님과 함께 일으켜주십니다.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실 것입니다.(엡 2:6)
여러분! 하나님께 있는 큰 능력이 내 안에 있으면 예수님의 생명이 내 몸에 있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내 몸에 나타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으면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본문 1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내 안에 있으면 항상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우편에 계시기 때문에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도 즐거워합니다. 내 육체도 안전하게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생명이 있고, 거룩한 사람을 멸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주의 앞에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주의 우편에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시 16:8-11) 이제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내 안에서 역사하여 충만한 기쁨과 즐거움이 가정에, 가족에게, 교회에 영원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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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비전교회91 원문보기 글쓴이: bsy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