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속 극기 훈련
전 호 준
어저께 지난 입추 절기가 무색하리만큼 뜨거운 날씨가 이어진다.
연일 삼십 오, 육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에 온열 환자가 천여 명을 넘어서고 이로 인한 사망자가 십여 명을 넘었다는 소식이 T.V 뉴-스 의 첫머리를 장식한다, 이들 중 대부분이 65세 이상 고령층이니, 노약자들은 외출을 자제 하고 물을 많이 마시라는 당부까지 덧붙인다.
오늘도 대구, 경북에는 어김없는 폭염 경보다. 지난밤 잠 못 이룬 기나긴 열대야는 고사하고라도 새벽까지 식지 않는 뜨거운 열기는 사람들은 물론 모든 동식물을 지치게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욕실로 들어가 물을 뒤집어 써보지만, 수돗물마저 미지근하다. 선풍기도 지쳤는지 조금만 돌며 후덥지근한 바람을 내뿜는다.
전기세 폭탄이라는 엄포 속에 에어컨 리모컨을 잡아보지만, 요금 고지서를 받아 보지 않았는데도 지레 주눅이 들어 잠깐 켰다 끄면서 어제께 본 모 일간지의 기사 내용을 떠올리며 불평 아닌 불만을 마음속으로 해본다.
선거철이나 유권자 앞에선 입만 열면 민생 민생 하시던 그 많은 선량들은 그동안 어떤 민생을 어떻게 살피고 해결했는지 묻고 싶어진다.
70년대 중반 나라의 전력사정이 여의치 못할 때 전기 절약을 유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제를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한 지금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니, 공기업의 존재 이유를 모르겠다.
폭염에 전기료 폭탄까지 뒤집어서야 하는 서민들의 울화통이 폭발하고 신문 방송이 누진제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해도 전력 수급상 어쩔 수 없다는 한전의 궁색한 변명은 우민 한 나로선 이해하기 어렵다.
심지어 이미 3년 전 감사원 감사에서도 시정권고를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도 국가 공기업이라는 한전이나 감독 기관인 산자부의 두둑한 배짱은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폭탄 맞은 서민들의 울화통이 터지고 이의 신청과 여론의 뭇매에 급기야는 대통령의 한마디에 그제 서야 일회용 땜질 처방으로 화난 민심을 달래보려는 얄팍한 꼼수가 폭염보다 더욱더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바닥을 맴도는 대통령의 국정지지도 때문이라면 기온에 따라 수은주는 자연 오르내린다는 평범한 이치를 모르는 것일까? 알고도 외면하는 것일까?
대경상록 자원봉사단 상록수필 반 문우들과 친목 나들이를 약속한 날이다.
아침부터 작열하는 뙤약볕에 밖으로 나가기가 겁이 난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꿀떡 같지만, 약속은 약속이니만큼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무더위에 무리하지 말고 조심해 다녀오라는 아내의 신신당부에 찰떡 대답은 했지만, 여름 내내 집안에만 틀어박혀 물바가지와 선풍기에 의지해 지내온 터라 폭염 경보에 야외 나들이 자체가 벌써 심적 부담으로 다가온다.
만나기로 약속된 지하철 2호선 종착점인 문양역에 내리니, 약속 시각 오전 10시 보다 30분 정도 이르다. 역 대합실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려니, 5분 또는 10분 간격으로 반가운 얼굴들이 모여들었다.지도 교수님을 포함 참석인원이 전부 5명뿐이다. 예상외로 참석률이 저조하다. 아마도 무더운 날씨 탓에 모두들 부담을 느낀 모양이리라.
문양역 에서 왼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5분 정도 걸어서, 마천산 등산로 입구에 다다랐다.
7.5킬로 올 코스에 비교적 평탄한 길이라 나이든 사람들에게 제격이라는 기 등산 경험이 있는 동료의 설명이다. 무더위에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조금 오르다가 시간이 되면 내려와 점심 식사를 하자는 중론을 믿고 물 한 모금 도 준비하지 않고 아무런 생각 없이 따라 나셨다.
눈먼 말 요롱소리만 듣고 따라간다는 옛말처럼 앞서가는 사람의 둿 모습만 바라보며 그래도 뒤처질세라 가쁜 숨을 참아가며 정신없이 걸었다.여느 등산로처럼 요소요소에 등산객을 위한 편의 시설과 운동기구가 잘 비치되어 있다. 전기료 폭탄 불만은 깡그리 잊은 채, 잘 정비된 등산로를 보며 우리나라도 정말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쉼터 의자에 둘러앉아 문우들이 준비해온 간식을 나누며 땀을 식혀 보지만 산등성을 넘나들던 그 흔한 산들바람도 오늘따라 나뭇잎 한 잎도 흔들지 않는다.
간혹 두어 명의 등산객이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비교적 무난한 산행코스라 주말에는 등산객들이 줄을 잇는단다. 오늘은 평일인 데다 폭염 경보까지 내렸으니, 산을 오른다는 것은 어쩌면 무모한 짓일지 모른다.
"그만 내려갑시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한마디가 더는 올라오지 못하고 사그라 들었다. 벌써 삼분의 일 지점을 넘었으니 뒤돌아 내려가기보담 조금만 더 오르면 마천산 정상인데, 그다음부터는 내리막길이라 한결 수월하다는 리더의 설명에 선뜻 되돌아 내려가자는 말을 할 용기가 나질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일행 중 한 명을 제외하곤 나 보담 선배님들로 이미 고희를 넘긴 분들이다. 모두들 묵묵부답 잘도 견디시는데 이제 겨우 내일 모래 육학년 졸업을 앞둔 나로서는 감히 입을 열 처지가 아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의 나무 그늘도 폭염을 식혀 주기는 역부족이다.
땀에 젖은 속옷은 몸에 착 달라붙어 불쾌감의 극치다. 숨이 가쁘고 골이 지끈거린다. 갈증이 나도 갖고 간 물병도 없다. 동료들이 건네주는 물병에 마른 혀를 적셔 보지만 귀한 물을 축낸다는 미안한 마음보다, 준비성 없는 나의 옹색했던 생각이 부끄럽고 후회스럽다.
샛길이 있으면 도망갈 궁리를 해보지만, 지름길도 없단다.
그럭저럭 산 정상 가까이에 다다랐으니, 뒤돌아 내려가기엔 너무 늦었다. 진퇴양난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가 보다.
이열치열이 아닌 폭염 속에 극기 훈련을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고 도전 정신으로 오기를 부려본다. 오히려 새로운 용기가 났다.
이제 남은 길은 내리막이니 스스로 위로하며 부지런히 동료들의 뒤를 따랐다.
내리막길도 만만찮다. 원래 산 능선을 따라 이어진 등산로라 한 등을 넘으면 한 등이 시작되고 계속 이어지는 지루한 구간이 파도타기를 하는 기분이다.
시간이 갈수록 무릎이 저리고 흘린 땀에 뱃속이 허전하다. 전신에 힘이 빠져 다리가 후둘 거리며 발자국이 제 자리에 들어가지 않는 느낌이다.
길섶에 새들새들 비틀어진 풀잎들이 따가운 햇볕에 모진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정말 경이로운 생명력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하찮은 길섶의 풀잎보다 약해서야 새로이 용기를 내어본다.
정상적으로 2시간 정도면 완주할 수 있는 등산코스를 3시간을 넘게 걸려 끝이 났다. 안도의 한숨과 연일 계속되는 폭염 경보에 지레 겁을 먹고 꼼짝 않고 집안에만 박혀 살던 나도 폭염 속 극기 훈련을 무사히 마쳤다는 자부심과 성취감에 지난 고통이 오히려 희열로 되돌아온다.
예약해 놓은 강정보 인근 식당에 도착하니, 일찌감치 빵빵하게 에어컨 심을 올려놓은 객실 안은 그야말로 별천지다.
얼큰한 메기 매운탕에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니, 만석꾼이 부럽잖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아내의 걱정이 담긴 당부를 잊고 오늘 있었던 산행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했더니,“누굴 과택이 만들려고 작정을 했나?” 폭염보다 더 뜨거운 폭탄 잔소리가 쏟아진다.
남편의 안위와 건강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고 아직도 나름대로 쓸 만한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자부심에 무한한 행복과 보람을 느껴보는 뜻 있는 하루였다. 끝. 2016. 8
첫댓글 폭염속 극기훈련을 했던 지난 8.8.이 새록새록 떠오르게 하는 글입니다. 정말 너무 고생이 많았습니다. 지나고 보니 아름다운 추억과 좋은 글을 남기게 되나 봅니다. 극기훈련 장소로는 마천산이 제격인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전선생님 고생하셨습니다.회장님과 마천산 등산글 넘 좋습니다. 저도 많이 후회하였습니다. 등산이 일상이라 다 나와 같은 준비와 복장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야산이지만 거리가 멀고 폭염기라 힘들었습니다. 사고없이 완주하여 경의를 표합니다.잘 읽었습니다.
그 재미에 산을 찾습니다. 산은 늘 거기에 그대로 있는데 찾는 사람이 제대로 준비만 한다면 몸도 마음도 즐거운 곳이라 생각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한번 더 계획하면 어떨까요? 폭염에 등산길 성공한 글을 몇편 읽고 공연히 혼자 낙오자가 된듯 합니다. 우리들이 살아온 과정 같습니다. 여기까지 온걸 성공으로 자위하면서 삽니다.수고 하셨습니다.
그날 우리 두사람이 가장 고생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은 나름데로 준비하고 나섰는데 우리 두사람은 물 한병도 들지 않고 있었으니 얼마나 무모한 행동인었는지 후회막급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인생의 갈림길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었고, 눈밭 선생님은 극기훈련정도로 생각했으니 가는 길은 같아도 느끼는 관점은 각각 다르군요. 글제가 같아도 작품은 다르듯이... 이 가을 다시 한번 도전해 봅시다. 준비 단단히 하고서.
그날 동참은 못했으나 현장에 같이 있은 듯합니다. 평소에 건강관리를 잘 하셨기에 완주하신 것 같습니다. 부럽습니다.
최근 어느 발표에 따르면 중년이 66~79세, 80~99세가 노인이랍니다. 100세이상이 장수노인이고요. 국어사전을 다시 감수해야겠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폭염속의 극기산행. 대단하심에 큰 박수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최상순드림
ㅎㅎㅎ 소리내어 웃으면서 읽었습니다. 에어컨 문제. "오늘은 참고 내일 부터 켜자." 그러곤 또 미루고. 우리 클 때 옛 어른들의 호령소리--" 부채두고 왜 선풍기 켜냐? 손목아지 뒀다 뭐할라고?"__가 아직도 들리는 듯 찔끔 놀라는데 감히 에어컨을 틀다니 . 스스로 시집살이 하느라 고생했습니다. 동료들과 여름방학 한 더위에 비슬산 따라 갔다가 (평소 단 한 번도 등산한 적 없었음) 다음날 일어나니 입안이 다 헐었었습니다. ㅎㅎㅎ. 즐거운 산행길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