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경기도 인천은 7대 어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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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0. 20:29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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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7대 어향
장명이고개(경명현(景明峴))는 예로부터 도둑들의 소굴이었다고 하는데, 임꺽정이 이 산에서 산채를 열었다고 한다. 천 명은 되어야 넘을 수 있다고 해서 천명(千名)고개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에 인천의 진산이었던 계양산(桂陽山)을 이규보는 다음과 같이 썼다.
길이 사면으로 계양지경(계양산 근처)에 났는데, 오직 한 면만이 육지로 통하고 삼면은 모두 물이다. 처음에 내가 조정에서 쫓겨나서 이 고을 원이 되었을 때, 물이 푸르고 넓은 것을 사방으로 돌아보매 섬 가운데에 들어왔는가 의심하여 근심스러워 즐기지 않아서 문득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고 보려고 하지 않았다.
인천의 포구 풍경 © 유철상
조선 전기에 제물포(濟物浦)라 불렸던 인천항이 상업항으로서 개항한 것은 1883년으로,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이 종지부를 찍은 이후이다.
인천은 비류가 나라를 연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미추홀 주몽의 두 아들 중 맏아들은 비류요, 다음은 온조인데, 졸본부여에서 열 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향하니 백성들이 많이 따랐다. 드디어 한산 북악(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살펴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이 한남 땅은 북쪽으로 한수를 끼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악에 의지하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소택 지대를 바라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로 막혔으니 천연의 험함과 땅의 이로움을 얻기 쉬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돌아갔고, 온조는 열 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위례성에 도읍하였다. 오랜 세월 뒤에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으므로 비류가 온조의 위례성을 가보니 도읍이 정리되고 백성이 안정되었다. 비류가 부끄럽고 분하여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성으로 갔다.
이곳 인천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이자연과 그의 후손인 이자겸이다. 인천 출신인 이자연의 세 딸이 문종의 비가 되면서부터 인주 이씨의 외척 정치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자연의 할아버지인 이허겸의 딸이 김은부의 아내였다. 그때부터 왕실과 인척 관계가 이루어졌고 인주 이씨의 외척 정치는 문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 7대에 걸쳐 80~90년간 이어졌다. 그 시대에 인주 이씨는 왕실과 겹치기로 혼인 관계를 맺어서 당시 왕자들 중에 인주 이씨의 외손이거나 생질이 아닌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인주 이씨는 왕실과의 혼인뿐 아니라 당시의 이름난 성씨인 파평 윤씨, 평산 박씨, 해주 최씨, 경주 김씨 등과도 혼사를 맺어 커다란 벌족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견고했던 그들만의 세상은 이자겸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뒤 막을 내리고 말았다.
지금도 인천을 두고 ‘7대 어향(御鄕)’ 또는 ‘7대 지향’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기까지 7대가 이어지는 동안 임금의 외가이거나 왕비의 친정이 인주 이씨였기 때문에 붙여진 말이다. 그 예로 현종과 숙종의 어머니가 인주 이씨였고, 문종과 예종은 왕비가 인주 이씨였으며, 순종과 예종 그리고 인종은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인주 이씨였다.
여러 기록들로 보아 과거 인천에서 중국으로 가던 사람들이 많았으며, 인천도호부에 있던 대진에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떠났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여지도서』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정립하였을 때 백제에서 중국으로 가는 길을 고구려가 막았기 때문에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이곳에서 배를 띄워 산둥반도의 등주, 내주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천은 7대 어향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경기도, 2012. 10. 5., 신정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