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5월하고도 둘째 금요일, 바로 전우님들의 모임인 "이금회(二金會)" 날이다. 어서,빨리 그리운 전우님들을 만나뵈야지.
"페암 3기"로 엊그제 재퇴원하신 K회장님을 비롯 많은 환자들의 모임인것이다. 모두가 지팡이 등을 의지하여 모이지만~
보훈병원을 위시하여 일산 암센터 등 큰병원에 다 등록들하고 부지런히 다니고 있건만 그레도 전우모임엔 모두 최우선순이다.
모두가 국물있는 "연포탕"을 시키잖고 맵고 얼큰한 "낙지볶음"을 시킨것만봐도 내일 어찌되드라도 오늘은~ 과연 무적의 용사다.
Apt.현관까지 사모님의 부축으로 나오신 회장님께선 옛날엔 태권도 사범으로 "무덕관"을 운영, 프레쓰센터에서 "영웅칭호"도
받으셨고 美정부로 부터 훈장도 받으셨다.친구로 지내시는 김정식선배님은 "십자성부대" 로 파월하시어 '나트랑'에서 근무
하셨다. "나트랑" 이면 홍하사와도 인연이 있다. 홍하사가 우연한 기회로 월남의 보매(父母)와 인연을맺고 맹호가 갈 수 없는
나트랑으로 특수교육을 갔다. 5통신단이면 1971년 의정부 가능동 "107통신대대" 와도 깊은 관계가있다. 오늘도 그 먼길을
자전거 타신 김정식선배님은 배구선수로 평판이 자자하시다. 사진은 한미1군단서 미군들과 배구했던(앞 좌에서 3번째 홍중사)
이 식당을 택한 이유는 언제나 식사후 시간이 자유롭게 넉넉히 무용담(젼쟁터의 자랑?)을 맘껏 뽐낼 수 있기 때문이다.
"꽁가이 이야기"---(5) (2008/1/20일) www.vietvet.co.kr "살아가는 이야기" 中에서 부분펌.
6월초-우기철로 막 접어든 계절이기도 했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1소대는 일찍 단독군장 챙겨(단독 군장이레도 고국에서의 완전군장보다 더 무겁다.) 중대내에 있는 취사장에서 A-Ration으로 식사를 서둘러 끝내고 도로정찰을 끝냈다. 물론 중대에 보고하면 중대에선 대대로, 대대에선 연대로, 연대에선 사단으로--- 그럼 모든 차량이 왕래가 시작된다.
이제부턴 경계만 서면되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군인이 더우기 전쟁터에서 비가 온다는것은 초연 해야될터이지만 우린 그래도 우선은 비 피하기가 급급했다. 어느집 처마밑에 웅크리며 피하게 되었는데 맞은편 집에 있던 어떤 민간인이 우릴 손짓해 부른다. 처마끝에 쭈그리고 피해있는 모습이 측은한 모양인지 자기 가게를 들어오란다.
내가 들어간 사이에 다른 전우들은 뒷뜰로 해서 혹시나~ 하고 철저히 조사를 물론한다. 이상없음을 확인하고 그가 따라주는 따끈한 차한잔씩 마시니 그는 종이쪽지와 연필을 갖고와서 한문으로 장문의 글을 쓰기시작했는데 상하로 한장을 빼곡히 썼는데 대충 내용이
"대한민국 군인이 이국땅 월남까지와서 자유수호를 위해서 공산주의를 쳐 부수어 주기를 기대한다. 우리도 평화를 사랑한다. 어서 빨리 자유통일이 되고 싶다. 한국사람들도 극히 몇사람은 좋지않지만 대개는 다 좋은 사람이다."
글 쓰는 솜씨가 마치 한학자같은 타입이었다. 오래 전 야간중학 다닐때 동아일보 배달하면서 신문에 난 한자를 감독님께 물어물어 한두자 알은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먼 우리나라까지 와서 수고해줘서 감사하다. 그리고 맹호를 만호라고 발음하고 백마는 반마라고 했다. 우리는 고마움의 표시로 식량을 주었더니 밥을 내 온다.
그곳은 "슝앙"마을로 우리 2중대에서 불과 사오백 여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곳이라 오면서 항시 고맙다고 인사하고 손도 흔들고 가끔은 먹을것을 비롯해 받은이상으로 되돌려주는 홍하사의 습관처럼 자주 다녔고,
그분은 어느날 내게 팬티하날 선물했는데 자신이 직접 바느질해서 만든옷이라고 하며 혹시 치수가 맞는지 입어보라한다.
월남여자들이 흔히 입는 통바지(검은 아오자이용 빤질빤질한)옷감으로 하나 서비스했다.
그러자 우리분대원들 모두 너, 나 할것없이 하나씩 유행처럼 그집에서 다 맞춰 입었다. 양장점이랄까? 양복점이랄까? 나중에 이분들이 결국엔 홍하사의 양부모가 되셨다.
그곳 사람답지않게 딱 남매만 두었는데 솔직히 난 그분의 그게 맘에 들었다. 왜냐하면 주렁주렁 연연생으로 낳은 다른집관 달리 상당한 인텔리란 느낌을 받었기에 말이다. 덕분에 자동으로 나에겐 "봄"(길게 발음)과 "새우" 라는 내동생들도 생겼다.
특히 "봄" 은 가끔 학교가 파하고 아이들과 집으로가다 내가 서고 있는 앞을 지나는데 "엠" 하고 부르면 수줍은듯 볼이 발그레 지면서 걸음을 재촉한다. 아마도 국민학교 졸업반 쯤이될까한 사춘기의 소녀였다.
---계속---
Mina Mazzini/L'immensita(눈물속에 피는꽃)
나는 믿어요 지금 흘러내리는 눈물 눈물마다 새로운 꽃이 피어날 것을... 그리고 그 꽃잎 위에 나비가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어요.. 영원속에서 나를 생각해주고 나를 잊지 않을 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그래요 언젠가 나는 찾을거예요. 내 일생동안 혼자는 아닐거예요 나는 알아요 보잘 것 없는 나를 위해 영원속에 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그래요 내 일생동안 혼자는 아닐거예요 나는 알아요 이 하늘보다 더 높고 넓은 영원속에 작은 마음이 살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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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째 사진이 홍하사가 맺은 월남의 양부모와 동생들이며 거리에서 양복점(양장점)을 하고 있었으며 분대원 대부분
그집에서 팬티를 맞춰입었다. 가슴에는 "레콘도 마크" , 탄창엔 실탄이, 왼손엔 라디오(전투,매복 언제나 어디서나)가 들려있다.
첫댓글 L'immensita(눈물속에 피는꽃)은 이태리 노래로 1967년(홍하사가 입대하던 해) "쌍레모 가요제"
에서 처음 Johnny dorelli 가 부름으로 세계적으로 힛트했으며 우리나라엔 1969년 배호가 처음 번안하여~
Mina Mazzini 등 많은 가수가 불렀으며 홍하사는 역시 처음부른 Johnny Dorelli 가 부른걸 가장 선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