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대 권상일의 관직 생활양반은 무위도식하는 존재?
하느님이 백성 내니, 그 백성은 넷이로다. 네 백성 가운데는 선비 가장 귀하다. 양반으로 불려지면 이익이 막대하다. 농사, 장사 아니하고, 문사(文史) 대강 섭렵하면, 크게 되면 문과(文科) 급제, 작게 되면 진사(進士)로다. 문과 급제 홍패(紅牌)라면 두 자 길이 못 넘는데, 온갖 물건 구비되니, 이게 바로 돈 전대(纏帶)요.(박지원, 『연암집』 「양반전」)
위는 박지원이 지은 「양반전」의 내용 일부이다. 양반은 대충 문사(文史)만 익혀 문과 급제해서 홍패를 갖게 되면, 두 자 길이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온갖 특혜를 받으며 마치 전대와 같이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박지원의 「양반전」은 허위의식에 젖어 있는 양반을 고발한 것인데, 현재 우리도 이 작품 수준에서 조선 후기 양반을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지원이 지은 「양반전」의 일부〉 (출처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사대부(士大夫)라는 표현은 학자적 관료를 의미한다. 사대부는 평상시에 ‘사(士)’로서 공부하고 연구하며, ‘대부(大夫)’가 되어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구현하려는 존재이다.
사대부의 이상적인 삶을 대변하는 표현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이다. 수신(修身)의 전 단계로서는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뜻을 성실하게 하며[誠意正心] 만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지극하게 이루어야 한다는[格物致知] 단계가 있다. 끊임없는 수신을 통해 도덕적 인간으로 완성될 때 치인(治人)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치인의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문과에 도전하였고, 이 관문을 통과하면서 문신으로 나아간다. 물론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은 문과 이외에도 무과나 음서, 그리고 천거 등의 방법이 있었으나, 문과는 다른 경로에 비해 가장 영예로운 방법이었다. 관직에 진출한 뒤에는 관료로서 소명의식(召命意識)을 가지고 국정에 참여하였다. 일례로 사관(史官)에 추천되었을 때 분향(焚香)하면서, 기록 임무를 맡은 관원으로서 하늘에 맹세하는 것은 겉치레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아래에서 조선 후기 경상도 상주 출신 권상일(權相一, 1679~1759)의 관직 생활을 살펴보자.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출간한 국역 『청대일기』〉 (출처 : 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출간한 전통생활사총서 5 『조선 후기 문신 권상일의 관직 생활』〉
(출처 : 한국국학진흥원)
붕새의 깃을 치며 날아오르리!
과거 급제와 출사
권상일은 어려서 가학(家學)을 습득하였는데, 대개 상주 지역 학풍을 주도한 서애학단의 학문적 풍토 속에서 성장하였다. 권상일은 성장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서원이나 산사에서 거접(居接) 생활을 하며 학문을 성숙시켰다. 그 과정에서 강회(講會)나 백일장(白日場)을 비롯해 각종 과거에 응시하며 학문을 연마하고 성과를 점검하였다.
〈권상일의 문집 『청대집(淸臺集)』〉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권상일의 과거 도전은 1702년(숙종 28) 2월 문과 초시 단계인 향시로부터 시작되었다. 권상일은 해당 과거 시험에서 불합격한 뒤 몇 차례 더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번번이 고배를 마시다가 1710년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권상일에게는 참으로 영광된 순간인데, 그 순간 권상일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한 공부 과정이나 경비 마련에 노심초사하였던 지난날의 자신이 떠올라 회한에 잠겼다. 권상일은 과거 급제 후 한동안 고향에 머물렀는데, 한 번은 친구들과 문회계(文會契)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권상일은 시(詩)를 통해 포부를 표현하기를,
만 리 큰 바다 내가 먼저 길을 나서니 滄溟萬里吾先路
차례대로 여러 붕새 깃을 치며 날아오르리 次第群鵬振羽毛
라 하였다. 여기서 붕새(鵬)는 원대한 꿈을 말하는데, 친구들에 대한 바람의 표시이자, 자신의 포부를 드러낸 것이다.
〈1710년(숙종 36), 권상일이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받은 홍패〉 (출처 : 문경시)
권상일은 과거에 급제한 뒤 5개월여가 지난 시점에서 승문원으로 분관(分館)되었다. 분관으로 고대하던 관직에 나갈 수 있었으나, 권상일은 생각이 많아졌다. 악명이 높은 면신례(免新禮)와 허참례(許參禮)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을 거쳐야 승문원 동료로 인정받게 된다. 권상일은 약 5일 정도를 전임 승문원 관직을 지낸 선배 관원 약 40집 이상을 돌며 면신례를 행하고, 이어 허참례를 하였다. 승문원 관원으로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지만,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승문원 생활이 고역이기는 하였지만 권상일은 “내가 감당해야 할 직무이다. 신하 된 자로서 단지 마음을 다하여 봉사할 뿐이지 털끝만큼이라도 모면하려는 생각은 있을 수 없었다.”라며 감당하겠음을 다짐하며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밤에 지쳐 쓰러져도 낮에는 분주하게!
고단한 관직 생활
권상일은 승문원에서 관료로서 분주한 생활을 보냈다. 결과적으로 여름을 지나며 몸이 여위고 병치레하면서 근력이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결국 권상일은 낙향하기로 마음을 먹고 1711년 6월 18일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고향으로 내려가는 과정에서 상급자에게 허가를 받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어 고향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서울로 왔다. 서울로 다시 들어온 뒤 권상일은 “낮에는 종일 분주하게 바쁘고 밤에는 지쳐 쓰러지는” 일상을 보냈다.
권상일은 관직에 나온 지 약 7년여를 지난 뒤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며 승륙(陞六)하였다. 이어 성균관 직강을 거쳐 1719년(숙종 45) 수령직인 강진현감의 말망(末望)에 올랐다. 말망이지만 권상일은 강진현감을 상당히 고대하였다. 부모 봉양을 위해 지방의 수령으로 보내줄 것을 청하는 걸군(乞郡)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권상일의 기대는 성사되지 않았다. 대신 권상일은 예조정랑으로 임명된 뒤, 예조의 현안이었던 장생전(長生殿: 국상 때 사용하는 재궁(梓宮)을 마련하여 보관하던 곳)의 수리를 마쳤고, 온 힘을 다해 숙종의 국상을 치렀다.
〈『숙종국장도감의궤(肅宗國葬都監儀軌)』〉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1720년 가을, 권상일은 근친(覲親)을 명분으로 낙향하였다. 맡은 직무를 이미 마쳤기에 어버이를 만나러 가는 근친으로 낙향한 것이다. 한 차례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가 다시 낙향했고, 이후 상당 기간을 고향에서 시간을 보냈다. 권상일이 낙향해서 생활하던 시기, 중앙의 정치는 격랑의 시간이었다. 신임옥사(辛壬獄事)로 노론에서 소론으로 정국 주도 세력이 바뀌고, 영조가 왕위에 오른 뒤 을사환국으로 노론이 다시 집권하여 소론에 대한 토역(討逆)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권상일은 고향에서 생활하면서 정국을 관찰하였다.
권상일은 1727년(영조 3) 3월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제수되었다가, 같은 해 7월 만경현령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외직을 나아갔다. 외직을 받은 권상일은 “가친(家親)을 봉양하기에 충분하다”라며 만족을 표시하였다. 권상일이 만경현령에 재임하던 1728년(영조 4)에 무신란(戊申亂)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전라도에서도 태인의 박필현(朴弼顯)과 담양의 심유현(沈維賢) 등이 반란에 가담하였고, 여기에 변산적(邊山賊)도 가담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변란이 일어나자, 일부에서는 권상일에게 가친을 모시고 피난을 가기를 권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권상일은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장정을 모아 반란 세력에 대비하였다. 후일 만경현 사람들은 그 공적을 기려 구리로 만든 비석을 세워서 칭송하였다.
〈『만경현읍지(萬頃縣邑誌)』, 「명환(名宦)」 마지막 부분에 정미년[1727년, 영조 3]에 부임한
‘권상일’의 이름이 보인다.〉 (출처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만경현령 이후 권상일은 사헌부 장령과 양산군수, 군자감정 등에 제수되었다. 대부분은 출사하지 않고 고향에 있었다. 권상일은 고향에서 자신의 학문적 기반의 종사(宗師)인 퇴계 이황이나 서애 류성룡 등을 만나는 시간을 보냈다. 예산-풍산-예안 등을 다니며 병산서원과 이황이 태어난 고택 등을 돌아보았다.
“원로로 삼은 뜻을 보이라”
기로소 입소와 치사
1735년(영조 11) 3월, 권상일은 57살의 나이로 울산부사에 부임하였다. 울산부사로 부임한 권상일은 지방관으로서 동분서주하며 바쁜 일상을 보냈다. 이런 점은 이 시기 권상일의 일기 기록이 이전과 다르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울산부사로 부임한 권상일의 일기에는 월별로 절기를 기록하였는데, 2월의 청명이나 3월의 곡우, 입하 등이다. 이는 수령칠사(守令七事) 중 하나인 농상을 성하게 할[農桑盛] 책임을 맡은 수령으로써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울산부사로서 권상일은 부역을 균등하게 하거나 관내 유생의 교육을 위해 구강서원의 동재(東齋)를 세우고 『퇴계집』을 비치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울산의 구강서원(鷗江書院), 권상일이 울산부사로 서원의 동재를 세웠다〉 (출처 : (사)한국서원연합회)
울산부사를 마친 권상일은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친 뒤 1747년(영조 23) 9월 국왕의 비서실격인 승정원 동부승지에 올랐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어 형조참의를 거쳐 다시 승지직에 제수되어 관직에 나아갔다. 승지 자리에 있으면서 권상일은 궁궐에서 직숙(直宿)하기도 하였는데, 불시에 국왕의 부름에 응해 입시해서는 지역 사정이나 당대 현안 등에 대한 의견을 국왕에게 전달하였다.
1748년 1월, 권상일은 승지의 자리에 있으면서 치사(致仕)를 요청하는 상소를 제출하였다. 이때 권상일의 나이가 70세에 이르렀다. 치사 상소에 대해 국왕은, 권상일을 승지직에 둔 것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며 기각하였다. 권상일을 발탁한 영조의 의도를 짐작게 한다. 얼마 후 다시 낙향했다가 1749년 8월 이조참의에 제수되었다. 권상일은 “매우 떨리고 두려우면서도 꿈 밖”이라며 의외의 조치로 생각했는데, 이는 영조가 추진하던 탕평의 성과였다. 그러나 권상일의 이조참의 제수에 대해 당시 집권 세력 내에서 견제가 있었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체차(遞差)되었다.
〈1790년(정조 14), 권상일에게 ‘희정공(僖靖公)’의 시호를 내린 교지〉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이후에도 여러 관직이 계속해서 내려왔으나, 권상일은 나아가지 않았는데, 80세가 되는 1758년(영조 34) 권상일에게 명예로운 특전이 주어졌다. 정2품 자헌대부로 승진되어 지중추부사로 임명되면서 동시에 기로소에 들어갔다. 영조는 승지를 통해 “나이를 존중하여 원로로 삼는 뜻”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기로소에 들어간 권상일에게 국왕은 정기적으로 물품을 보냈다. 권상일이 문과 급제 후 약 50년 가까이 관직에 있었던 노고에 대한 보답이었다.
집필자 소개이근호국민대학교 대학원에서 『영조대 탕평파의 국정운영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조선후기 정치사 연구와 함께 지역사 연구를 하고 있다. 대표 논저로는 『조선후기 탕평파와 국정운영』, 『경기도의 세거성씨』, 『조선 후기 문신 권상일의 관직 생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