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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장 무인지혼(武人之魂) 1 절정(絶情) 금릉(金陵). 금릉은 강소성(江蘇省)의 성도로서 양자강(揚子江) 남안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정립시대의 오(吳)나라가 여기에 도읍하여 건업(建業)이라 불렀고, 동진(東晋) 이후 남조(南朝)의 제도(帝都)로서 건강(建康)이라고도 불렸다. 그후 많은 변천을 거쳐 명(明)나라 초기의 제도였으나 영락제(永樂帝)가 도읍을 북평(北平)으로 옮겼으므로 이 지방을 남경(南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금릉의 종산(鍾山)은 신비스럽고 위엄이 있어 보였다. 종산은 금릉의 동쪽 장묘(將廟) 근처에 있는 산이었다. 그곳에는 아직도 예전 육조시대때 축성했던 궁전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집터의 흔적은 호화스럽고 번창했던 옛날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한데 언제부터인지 종산에는 과거 육조시대보다 더욱 거대하고 호화스런 돌담이 쌓이기 시작했다. 돌담의 높이는 이 장에 달했고 그 길이는 거의 측량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났다. 돌담이 세워진 것은 삼 년 전이었는데 많은 무림인들은 이 앞을 지날 때마다 호기심과 흥미, 그리고 외경(畏敬)의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하나 어느 누구도 돌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 볼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돌담이야말로 강호무림의 중추적 세력이며 무림인들의 꿈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무적검수맹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 * * 조자건 일행이 무적검수맹의 총단(總壇)으로 들어온 것은 미시(米時)경이었다. 그들을 안내한 사람은 서문금룡이었는데 사공릉은 화가 잔뜩 났는지 토라져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서문금룡은 그들을 무적검수맹의 서쪽 별관(別館)으로 데리고 갔다. 이곳은 전문적으로 무적검수맹에서 손님들을 접대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건물인데 얼마 전에 증축을 해서 더욱 크고 웅장해 보였다. 며칠 후에 시작될 무림대회에 인파들이 몰릴 것을 대비해서 확장 공사를 했던 것이다. 서문금룡이 조자건 일행을 데리고 별관으로 가자 별관에서 두 명의 시비들이 나왔다. "이분들을 이층으로 모셔라." 두 명의 시비는 공손하게 절을 하고 중인들을 별관의 이층으로 안내를 했다. "따라 오십시오." 중인들이 그녀를 따라 이층으로 올라갈 때 서문금룡은 제일 마지막으로 올라가는 조자건을 슬쩍 불러 세웠다. "귀하, 잠깐만 시간을 내줄 수 있겠소?" 조자건은 처음부터 서문금룡이 자신들을 이곳으로 초대한 것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문금룡이 자신을 따로 불렀을 때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좋소." 그는 중인들과 떨어져 서문금룡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서문금룡의 걸음은 별관 밖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별관을 나와 다시 우측으로 향했다. 조자건은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 동안 몇 번인가 숲속에서 호위무사들이 튀어나왔으나 서문금룡임을 알고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사라지곤 했다. 조자건은 대부분의 무사들이 철검에 백건을 한 것으로 보아 자신들이 철검백건대의 본채(本寨)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했다. 얼마쯤 가니 한 채의 정교한 누각이 나타났다. <검풍각(劍風閣)> 누각 위에는 용이 날아가는 듯한 필체로 '검풍각'이라 쓰여진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이름처럼 전체적으로 날카로우면서도 중후한 분위기를 풍겨 내고 있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검풍각의 앞에는 다른 장소와는 달리 아무런 호위무사도 서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서문금룡은 말없이 조자건을 데리고 검풍각의 안으로 들어갔다. 검풍각의 문을 들어설 때 조자건은 문득 전신에 따가운 기운을 느꼈다. 그것은 절정의 경지에 다다른 고수들만이 느낄 수 있는 무형의 살기였다. 조자건은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무서운 실력을 지닌 고수들이 이곳을 철통같이 경비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검풍각 안은 생각했던 대로 아주 단출하면서도 고아했다. 별다른 장식도 보이지 않았고, 집기는 꼭 필요한 것만 갖추어 놓았다. 단 한 가지, 대청의 중앙에 걸려 있는 커다란 벽화만은 들어오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웅대한 것이었다. 벽화는 다른 색을 전혀 쓰지 않고 오직 먹으로만 그린 것이었는데 수직으로 떨어지는 거대한 폭포를 아주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었다. 그 거대한 물줄기는 마치 실제로 살아 있는 것 같아서 그것을 보고 있자니 보는 사람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충동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 웅장한 벽화의 모습은 무언가 사람으로 하여금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느끼게 하는 호탕한 것이 있었다. 조자건이 벽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서문금룡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저것은 은하낙구천도(銀河落九天圖)라는 것이오. 웅장하지 않소?" 조자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구려. 누가 그린 것이오?" 서문금룡은 짤막하게 말했다. "화군악." 조자건은 의외의 사실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서문금룡은 잠시 침음하다가 말을 계속했다. "삼 년 전 무적검수맹이 창립할 때 화군악은 종산의 뒤쪽에 있는 만화원(萬花園)에 은거를 했소. 저 그림은 그가 은거하기 직전에 그린 것이오." 조자건은 새삼스런 눈으로 그림을 바라보았다. 서문금룡의 설명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 그림은 단순히 떨어지는 폭포를 그린 것 같지 않았다. 마치 하늘에서 수많은 별들이 떨어지는 은하수를 연상케 했다. 물방울 하나 하나는 곧 별들이었고, 거대한 폭포의 흐름은 은하(銀河)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실로 그린 이의 웅혼(雄魂)한 기상을 느끼게 하는 장관이었다. 조자건은 새삼 화군악이란 한 인간에 대해 어떤 경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한 화폭에 거대한 은하의 흐름을 그려 넣는다는 것은 일반인들이라면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조자건이 은하낙구천도를 바라보며 한동안 상념에 잠겨 있을 때였다. "이 그림은 비록 웅장하나 살기가 너무 짙은 것이 흠이오. 그 살기마저 다스렸다면 더욱 훌륭한 그림이 되었을 거요." 그의 뒤에서 조용한 음성이 들려 왔다. 조자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사공척을 보았다. 사공척의 나이는 이십칠 세. 키는 조자건과 같았으나 체격은 조금 더 호리호리했다. 푸른 청삼을 입었고 철검백건대의 다른 고수들과 마찬가지로 머리에 백색 두건을 매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철검을 차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대신에 금빛이 번쩍이는 허리띠를 매고 있었다. 눈이 날카로운 사람이라면 그 허리띠가 단순한 요대가 아닌 연검(軟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공척의 얼굴은 매를 닮았다. 전체적으로 날카로우면서도 매서운 데가 있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흠잡을 데 없는 미남자이기도 했다. 조자건의 시선을 제일 끄는 것은 사공척의 눈이었는데 사공척의 눈은 물처럼 고요하게 정지되어 있었다. 하나 그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등골에 냉기가 서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자건은 그 냉기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검도(劍道)를 초상승으로 연마한 절정검수에게서 나타나는 무형지기(無形之氣)였다. 조자건은 출도한 이래 처음으로 무형지기를 발출 하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사공척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조자건의 앞으로 다가왔다. "화군악이 이 그림을 그렸을 때는 천하제일고수의 보좌(寶座)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소. 나는 가끔 그가 지금 이 그림을 다시 그린다면 어떤 모양이 될까 하고 궁금해하곤 했소. 당신의 생각은 어떻소?" 조자건은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옮겨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글쎄...... 아마 그림을 찢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구려." 사공척은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소?" "이 그림은 보는 사람을 충동질시키는 무엇이 있소. 화군악이 다시 나와 이 그림을 보게 된다면 아마 스스로의 마음을 참지 못하고 한 칼에 베어 버리고 말 것이오." 사공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지도 모르겠군. 나도 처음에 이 그림을 봤을 때 몹시 흥분해서 며칠 간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샌 적이 있었소." "아마 이 그림에 무도(武道)를 향한 무인혼(武人魂) 같은 게 서려 있어서 보는 사람을 들끓게 만드는 것일 게요." "무인(武人)의 혼(魂)이라......." 사공척은 나직이 중얼거리다가 수정처럼 맑은 눈으로 조자건을 힐끗 돌아보았다. "당신도 남을 흥분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조자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말이오?" 사공척의 눈에서는 기이한 열기 같은 것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당신에게서도 이 그림과 같은 무언가가 느껴지오. 무인의 혼이랄까 그런 것 말이오. 다른 사람들은 못 느낄지 몰라도 무도를 추구하는 무인이라면 느낄 수 있소." "......!" "당신은 상대로 하여금 당신에게 도전하고 꺾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묘한 분위기가 있소. 즉 사람의 호승심을 자극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단 말이오." 조자건은 묵묵히 사공척의 말을 듣고 있었다. 사공척은 별빛 같은 눈으로 조자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나는 당신을 조금 전 처음 보았을 때 왠지 손속을 겨루고 싶은 충동이 들었소. 그 이유를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당신은 모든 무림인들이 꿈꾸는 이상(理想)을 추구하고 있소. 바로 천하제일고수요." 조자건은 그의 말을 시인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인도 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는 무인들의 긍극적인 목표인 최고의 무도를 얻으려 하고 있었다. 그가 태극문에 뛰어든 것도, 난데없이 비무행을 시작한 것도 바로 진정한 무도를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진정한 무도를 얻으려는 목적은 화군악을 꺾기 위함이었고, 그것은 곧 천하제일고수를 쟁취하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아홉 살 때 천하제일고수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이후 그는 단 한번도 그 소망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의 이런 최고의 무도를 향한 집념이 보는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충동시키는 것이다. 그를 처음 봤던 위지혼이 대뜸 그에게 목검의 결투를 신청했던 것도, 낮에 만난 손중화가 그에게 도전적인 태도를 보인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무인이라면, 적어도 천하제일고수를 꿈꾸는 무림인이라면 그에게 어떤 경쟁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공척의 칼날 같던 시선이 점차 처음의 냉정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변했다.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나려고 했던 것은 사실 당신에게 한 가지 물어 볼 말이 있어서였소." 조자건은 그에게 묻는 시선을 던졌다. "당신이 종남산에서 분양쾌검 곽회를 만났다고 들었소." 조자건은 그가 난데없이 곽회에 대해서 물어 오자 내심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소.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오?" 사공척은 잠시 허공을 응시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곽회는 내가 제일 아끼는 수하였소. 한데 내가 잠시 고향에 다녀온 사이 그는 배반자라는 낙인이 찍혀 철검백건대에서 추방당한 신세가 되어 버렸소." 조자건은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곽회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는 남들의 말을 믿고 그를 배반자로 인정했겠지만 곽회는 다르오. 나는 그를 잘 알고 있소. 그는 결코 남을 배반할 인물이 아니오." "......." "그래서 나는 곽회를 직접 만나 진실한 내막을 알고 싶었소. 그의 입으로 모든 사실을 듣고 싶었던 거요. 그런데 곽회는 종남산에서 당신에게 구원을 받은 후 종적이 사라져 버렸소. 나는 백방으로 그의 행방을 찾았으나 햇살을 받아 사라지는 아침 안개처럼 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소." 조자건은 곽회가 실종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별반 놀라지 않았다. 곽회와는 짧은 만남이었으나 그는 지금도 그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곽회는 아주 사나이다운 인물이었다. 비록 무공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으나 용기 있는 인물이었다. 조자건은 헤어질 때의 곽회의 모습과 왠지 그를 두번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던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사공척의 음성은 그의 눈빛만큼이나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마 곽회는 비극을 당했을지 모르지. 그래서 나는 그 일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알아야 하오. 그가 만약 누명을 썼다면 그 누명을 벗겨 주고, 참변을 당했다면 당연히 그 복수를 해줄 거요. 이게 내가 당신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였소." 조자건은 사공척의 마음을 이해했다. 믿고 아끼던 수하가 어느 날 갑자기 영문도 모르는 채 배반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그것을 해명할 기회도 없이 불의의 실종을 당했다면 마땅히 그 진실을 파헤치고 싶을 것이다. 조자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를 만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그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오. 하지만 헤어지기 직전 그가 당신에게 전하라고 한 말이 있었소." 사공척은 급히 물었다. "그게 무엇이오?" "그는 당신에게 배반자는 당신 주위에 있으며 당신이 가장 믿는 인물이 바로 배반자라고 말했소. 그는 만약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면 이 말을 꼭 당신에게 전해 달라고 했소." 조자건의 말에 사공척의 안색이 가볍게 굳었다. "그 말 외에 다른 말은 없었소?" "없었소." 사공척의 얼굴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곽회가 남긴 마지막 말은 그에게 숱한 의문을 가져다주었다. 자신이 가장 믿는 인물, 그가 과연 누구인가? 대체 그 주위의 누가 배반했단 말인가? 그리고 곽회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왜 곽회는 배반자의 이름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말하지 않고 그처럼 의혹에 가득 찬 말을 했을까? 대체 배반자는 누구란 말인가? 사공척은 자신이 가장 믿는 사람이 누구인가 생각해 보았다. 몇 사람의 얼굴이 거의 동시에 떠올랐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배반자라는 것은 절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상상만 해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곽회가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그것은 더 더욱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곽회는 생전 단 한번도 허튼 소리를 한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과묵하고 맡은 일에는 최선을 다하는 사나이였다. 사공척은 그의 그런 점을 높이 샀었다. 그렇다면 과연 자신의 측근 중에 배반자가 있단 말인가? 자신이 믿고 아끼는 그 누군가가 맹을 배반하고 곽회에게 누명을 씌우고 곽회를 제거했단 말인가?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지금 당장은 어느것 하나 정확한 해답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하나 사공척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일의 자세한 내막을 파헤쳐서 배반자가 누구인지 밝혀 내리라고 결심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안위를 위한 일이었고, 무적검수맹을 위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미 지하에 잠들었을지도 모를 분양쾌검 곽회의 원혼(寃魂)을 위로하는 일이기도 했다. 2 월광(月光) 조자건이 검풍각을 나왔을 때는 이미 저녁 때가 다 되어 있었다. 서문금룡은 처음 이곳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자건을 별관으로 안내했다. 서쪽 하늘에 붉은 노을이 비끼자 드넓은 무적검수맹의 돌담과 건물들은 흡사 누워 있는 거대한 공룡처럼 석양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서문금룡과 조자건이 별관이 빤히 보이는 곳까지 왔을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돌연 여인들의 까르르하는 웃음소리가 들리며 두 인영이 나타났다. 둘다 모두 여인들이었는데 자기들끼리 웃고 떠드느라 서문금룡과 조자건이 지척으로 다가올 때까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조자건은 그 중 한 사람이 사공릉임을 알고 내심 쓴웃음이 흘러 나왔다. 사공릉도 마침 그를 발견하고는 미소가 가득하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녀의 옆에서 걷고 있던 여인은 그녀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자 의아한 듯 물었다. "능매(菱妹), 왜 그래? 어디 아파?" 사공릉은 조자건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양손을 허리에 척 올려놓았다. "흥!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이곳이 아무나 막 나다닐 수 있는 곳인 줄 아나 보지?" 조자건은 이 입이 거칠고 성미가 급한 아가씨와 정말 아무런 시비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 대꾸도 없이 자신이 가던 길을 계속 가려 했다. 한데 이게 또 그녀의 비위를 더욱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눈초리가 갑자기 쭈욱 치켜 올라가며 날카로운 호통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말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내가 오늘 네 놈을 혼내 주지 않는다면 성을 갈아 버리겠다!" 이어 그녀는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조자건에게 달려들며 양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파파팟! 손 그림자가 장내를 뒤덮으며 조자건의 상체를 공격해 왔다. 조자건은 설마 그녀가 이토록 물불을 안 가리고 손을 쓸 줄은 몰랐는지라 내심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세상물정을 모르는 말괄량이라고 하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 싶기도 했다. 또 왜 그녀가 자신만 보면 이렇게 화를 내는지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공격을 해 왔으니 일단은 피할 수밖에 없었다. 조자건이 슬쩍 상체를 옆으로 움직이자 그녀의 매서운 일격은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녀는 일격이 빗나가자 더욱 분노가 치솟는지 입술을 꼬옥 깨물며 성난 암사자처럼 매섭게 공격해 왔다. 눈 깜박할 새 십여 초가 지나갔다. 그 동안 조자건은 단 한번도 반격을 하지 않고 피하기만 했다. 그녀는 맨손으로는 도저히 그를 상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양손을 등뒤로 가져갔다. 챙! 채앵! 날카로운 검명(劍鳴)이 울리며 그녀의 양손에 쌍검이 쥐어졌다. 그녀의 눈초리에 표독한 살기가 번뜩이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이번에 아예 사생결단을 낼 심산 같았다. 때마침 서문금룡이 잽싸게 앞으로 나서며 그녀의 공격을 제지했다. "능아야, 됐다. 이제 그만해라." "비키세요. 저 자를 요절내고야 말 테예요." 서문금룡은 엄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만해라." 사공릉은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리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나갔다. "흐흑...... 흑......." "능매!" 그녀와 동행했던 여인이 그녀를 불렀으나 이미 그녀의 몸은 노을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서문금룡은 그녀의 돌연한 행동에 어이가 없는지 한동안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곳을 보고 있다가 조자건을 돌아보며 쓴웃음을 날렸다. "이해하시오. 그녀는 너무 귀엽게만 자라 버릇이 없소." 조자건은 물론 이해를 했다. 그도 어렸을 때는 다른 어떤 아이들보다도 더 개구쟁이에 천방지축이었다. 하나 십여 년 전에 인생의 목표를 정한 이후부터 그는 다른 아이들과 달라지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다른 아이들이 누렸던 어린이들만의 특권과 자유를 스스로 포기해 버렸다. 비록 그때 일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끔씩 아련히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사공릉과 동행했던 여인이 서문금룡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서문호법(西門護法)님, 이분은......." 서문금룡은 그녀를 돌아보며 빙긋 미소지었다. "궁소저(宮小姐)! 인사가 늦었습니다. 이 사람은 요즘 한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조자건이라고 합니다." "아......! 풍운을 몰고 다닌다는 그......." 그녀는 조자건의 이름을 들은 듯 가볍게 탄성을 터뜨렸다. 조자건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궁장을 한 이십대 초반의 미녀인데 한 눈에 보기에도 굉장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조자건은 섭보옥과 견주어도 별로 뒤떨어지지 않는 용모라고 생각했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그녀의 별빛처럼 반짝이는 두 눈이었다. 그 눈빛은 지혜로운 빛이 가득해서 보고 있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문금룡은 낮게 헛기침을 한 후 그녀를 그에게 소개했다. "인사하시오. 이분은 본맹의 맹주이신 궁소천 대협의 따님이신 궁아영 소저이시오." 조자건도 그녀의 이름은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궁소천의 무남독녀 외동딸로 어려서 황산(黃山)의 벽운관(碧雲觀)에 가서 벽운사태(碧雲師太) 밑에서 사사(師事)를 했다고 한다. 벽운사태의 무공은 여인이 익히기에는 가장 적합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녀는 거의 십 년 동안 벽운사태에게서 무공을 배운 후 무림에 출도했다. 출도한 이후 그녀는 남 앞에서 무공을 펼친 적이 거의 없어 누구도 그녀의 진실한 무공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지 못했다. 하나 그녀의 재지(才智)가 절세적인 것만은 확연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래서 많은 무림인들이 그녀를 신기옥녀(神機玉女)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들은 신수궁의 신주홍안과 그녀를 함께 무림쌍염이라고도 했는데 미모는 신주홍안이, 지혜는 신기옥녀가 더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었다. 조자건은 담담한 표정으로 포권을 했다. "조자건이오." 궁아영은 그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아주 잠깐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별다른 말없이 몸을 돌려 갈 길을 갔다. 조자건은 서문금룡과 함께 별관으로 향했고 궁아영은 사공릉이 사라진 내원(內院)쪽으로 갔다. 그들의 만남은 아주 짧았다. 하나 그 만남의 여파로 인해 천하제일을 꿈꾸던 한 절세의 기재가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질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 * * 술은 강남의 명주인 금존청(金尊淸)이었다. 노인은 자신의 술잔에 담겨진 그 무색 투명한 금존청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 버렸다. 탁! 그가 술잔을 내려놓자 기다렸다는 듯 여인의 섬섬옥수가 다시 술잔 가득 금존청을 따라 부었다. 노인의 시선은 이번에는 그 섬섬옥수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손은 무척 아름다웠다. 노인은 수십 년 간 세상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여인들의 손을 보아 왔다. 하나 이렇게 아름다운 손은 본 일이 없었다. 여자의 손은 사실 대부분이 아름답다. 그러나 제아무리 아름다운 손이라도 거기에는 약간의 결점이 있기 마련이다. 약간 크다거나, 아니면 약간 작다거나, 피부가 거칠다거나 손톱이 조금 클 수도 있고 피부가 거무스름할 수도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라 할지라도 완전무결한 손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노인이 보고 있는 이 손만은 가히 완벽하여 결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볼 수가 없었다. 마치 백옥(白玉)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것과 같았다. 노인은 한동안 그 손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손의 주인을 응시했다. 손의 주인은 그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듯 나른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표정과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무척 특이했다. 어찌 보면 만사가 귀찮은 듯 권태로운 것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세상 일에 달관한 것처럼 초연(超然)해 보이기도 했다. 또 어찌 보면 아무런 뜻도 없이 그저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그녀의 나른한 미소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손과 전신에 걸친 착 달라붙는 흑의와 더불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움직이는 기이한 매력을 담고 있었다. 사람과 옷과 미소가 한데 어우러져 야릇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노인은 문득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안타깝군." 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안타깝다는 거죠?" 노인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절세가인(絶世佳人)과 월하대작(月下對酌)하건만 술잔 속을 들여다보면 백발 성성한 늙은이의 모습만 보이니 어찌 한숨이 나오지 않겠소. 내 머리에 백발이 이렇게 많은 줄을 예전에 미처 몰랐으니 이 또한 가슴 아픈 일이고......." 여인은 나직하게 웃었다. "호호...... 맹주(盟主)께서 스스로를 노인으로 자처하시나 제 눈에는 아직 젊음이 남아 있는 중년(中年)으로 보이는군요. 안보이던 백발이 눈에 많이 띄는 건 달빛이 너무 밝아서일 거예요." 노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의 말은 고마우나 사실 요즘 들어 부쩍 나이 먹은 것을 느끼고 있소. 아영이나 사공 대장 같은 젊은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내가 물러날 때가 머지않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곤 한다오." 그녀는 잠시 노인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은 결코 쉽게 늙지 않는 법이지요. 맹주께서도 자신이 생각하신 것보다는 훨씬 더 건재하실 거예요." "내 가슴이 뜨겁다고 보오?" 여인은 노인의 물음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입가에 예의 나른한 미소를 떠올렸다. 무심(無心)한 것 같기도 했고, 복잡한 뜻을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야릇한 웃음이었다. "꿈이 있는 사람의 가슴은 항상 뜨겁지요." "꿈이라......." 노인은 잠시 괴이한 눈으로 여인을 응시하고 있다가 이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꿈이 없는 사람은 없겠지. 당신의 말을 들으니 내가 다시 젊어진 것 같소. 당신의 말은 알 듯 모를 듯하지만 듣는 사람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데가 있소." 허공을 올려다보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던 노인은 문득 시선을 내려 어느 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어둠 속에서 유난히 번쩍거렸다. "사공 대장이 오는구려." 여인은 천천히 노인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사람이 그들이 있는 누각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달빛이 그의 훤칠한 몸을 감싼 청의에 비추어 엷은 빛을 사방으로 뿌려 대고 있었다. 냉정하고 싸늘한 시선, 준수하면서도 날카로운 기상을 풍기는 얼굴, 바로 사공척이었다. 사공척은 누각으로 올라오자 두 사람을 향해 목례를 했다. "이토록 달 밝은 밤에 호젓하게 술잔을 기울이시니 두 분의 풍취도 대단하시군요."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허허...... 풍취는 무슨...... 달이 하도 밝아 잠도 오지 않던 참에 조낭자(爪娘子)께서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해서 나왔네. 자네야말로 월광(月光)의 풍취에 젖은 게 아닌가?" 사공척의 얼굴은 옥(玉)을 깎아 만든 듯 단정하고 고아했다. 하나 별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아 냉막해 보였다. 달빛 속에서 보니 그런 느낌이 더욱 강했다. "사실 저는 맹주님과 사고(師姑)께서 여기 계시다는 말을 듣고 왔습니다." 노인은 무적검수맹의 맹주인 낙영신검 궁소천이었다. 궁소천은 삼 년 전 무적검수맹을 세울 때 주도적 역할을 한 인물인데 비단 강호무림의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절세의 검객(劍客)일 뿐 아니라 인품과 덕망이 탁월해서 많은 무림인들의 숭앙을 받고 있었다. 무적검수맹이 불과 일 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무림의 가장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그의 실력과 개인적인 명망(名望)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여인은 사공척의 사문(師門)의 웃어른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조추음(爪秋音)이라고 했는데 이름 외에는 무림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신비한 여인이었다. 사공척의 사문이 어디인지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그녀의 무공이나 진실한 내력에 대해서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사공척조차도 그녀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나 사공척은 그녀를 대할 때 매우 공손하고 깍듯한 예절을 지켰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감히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궁소천은 사공척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사공척은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교교히 빛나는 월광을 받으며 텅 빈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몹시 고독해 보이면서도 칼날 같은 예리함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사공척은 한동안 그런 자세로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번 무림대회에 참석하려고 합니다." 궁소천의 눈에 흥미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사공척은 화군악에 대해 어떤 경의심(敬意心)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사공척이 경의심을 느끼는 유일한 인간이 화군악일지 모른다. 따라서 그는 화군악의 상대자를 선발하는 이번 무림대회를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참석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었다. 궁소천은 무엇이 그의 생각을 바뀌게 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가 참가한다면 이번 대회는 물론 더욱 빛이 날 걸세. 그런데 갑자기 생각이 바뀐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겠나?" 사공척의 눈빛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사공척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솜씨를 겨루어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단호한 데가 있었다. 궁소천이 보니 사공척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의 활활 타오르는 듯한 눈빛을 보자 궁소천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그는 무언가에 자극되어 불 같은 호승심(好勝心)을 일으키고 있구나......, 대체 누가 그로 하여금 이런 마음을 일으키게 한 것일까?' 궁소천이 강호무림에 혁혁한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물론 그의 놀라운 검술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어떤 일을 당해도 절대 놀라지 않는 그의 침착함과 주도면밀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는 특히 사람을 보는 안목이 날카로워서 그의 앞에 서 있으면 누구도 속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지금도 궁소천은 사공척의 눈빛만 보고도 그의 마음 상태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궁소천이 궁금한 것은 사공척으로 하여금 솜씨를 겨뤄 보고 싶은 욕망을 일게 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하나 그는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궁소천의 노련한 점이었다. 물어 보았어도 사공척은 대답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설사 대답해 준다 할지라도 궁소천은 자신이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사공척에게 알리고 싶지가 않았다. 물어 보아야 할 때와 묻지 말아야 할 때를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지금까지 말없이 앉아 있던 조추음이 불쑥 입을 열었다. "능아한테 들으니 네가 오늘 어떤 사람을 데려왔다고 하던데......." 그녀의 나이는 사공척보다 그리 많지 않았다. 하나 그녀는 사공척의 사부와 배분(輩分)이 같기 때문에 그에게 스스럼없이 반말을 했다. 사공척 또한 그녀에 대해서는 공손한 태도를 취했다. "조자건이란 사람입니다." 조추음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렇다고 들었다. 그는 아직 젊겠지?" 사공척은 그녀의 돌연한 질문에 짙은 검미를 꿈틀거렸다. 하나 이내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조추음은 다시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그는 무공이 고강하고 괴이해서 아무도 진실한 무공내력을 알지 못한다고 하더구나." 사공척은 그녀가 말을 하는 의도를 몰라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그녀의 음성은 다시 이어졌다. "그는 또한 절정고수들을 찾아다니며 비무를 한다고 들었다. 통상적으로 비무행(比武行)을 하는 사람들은 무도(武道)를 추구하는 무리들이다. 조자건이란 인물도 그렇겠지?" 사공척의 대답은 조금 전과 동일했다. "그렇습니다." 조추음은 나른한 음성으로 말을 맺었다. "그렇다면 그는 너의 좋은 적수(敵手)가 되겠구나." 그제서야 사공척은 그녀가 말하는 의도를 알아차렸다. 사공척뿐 아니라 궁소천 또한 그녀의 말속에 담은 뜻을 알아차렸다. '그렇군. 사공척은 그를 만나고 나서 호승지심이 들었던 거로군.' 궁소천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젊은 나이에 무도를 추구하는 고강한 무공을 지닌 청년고수. 그런 인물을 만나게 된다면 사공척 같은 성격의 소유자라면 필시 자웅(雌雄)을 겨뤄 보고 싶었을 것이다. 고고하고 오만한 사공척으로 하여금 경쟁심을 느끼게 한 사나이! 궁소천은 문득 조자건이란 인물에 대해 짙은 호기심을 느꼈다. 하나 초조해 하지는 않았다. 그 자에 대해서는 가까운 시일 내에 좀더 자세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더구나 그 자가 무적검수맹 내에 있다면 머지않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만나게 된다면 궁소천은 무슨 수를 쓰던 상대의 무공내력을 알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자를 제거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그 다음에 결정될 것이다. 3 모략(謀略) 그는 전통적인 명문세가(名門世家)의 자손이었다. 광동(廣東)의 응가(應家)는 대대로 무림의 내노라 하는 명문일 뿐 아니라 그 부귀와 권세가 막강하여 지난 삼백여 년 동안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할 혁혁한 명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칠십 년 전, 광동 응가는 사상 유례없는 대 성세(聲勢)를 이루었다. 당시의 가주였던 편신(鞭神) 응구유(應九幽)는 무림사상 편법(鞭法)의 제일인자로 공인된 절세의 고수였고, 자타가 공인하는 강남무림계(江南武林界)의 제일고수였다. 개중에는 응씨세가의 인물들은 물론이고 응구유 자신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를 천하제일고수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응구유의 자신감은 한 사람의 등장으로 너무도 허망하게 깨어지고 말았다. 한 사람의 무림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무학(武學)의 천재(天才)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가 바로 태극문의 창시자인 태극천자 위지독고였다. 당시 위지독고는 혜성처럼 나타나 절대검왕 화무극을 제압하고 무림을 거의 석권하고 있었다. 응구유는 떠오르는 태양처럼 찬란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위지독고를 꺾고 천하제일의 보좌를 차지하기 위해 그에게 도전을 했다. 그는 내심으로 자신에게 육, 칠 할의 승산(勝算)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나 결과는 너무도 참담한 것이었다. 절대무적을 자랑하던 응구유의 대라혈편(大羅血鞭)은 위지독고의 손에 의해 썩은 새끼줄마냥 가닥가닥 끊어졌고, 응구유 자신은 단 오 초도 버티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간신히 광동으로 돌아온 응구유는 한 달 동안 피를 토하며 병상에 누워 앓다가 숨을 거두었다. 죽기 전, 그는 자신의 아들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위지독고의 무공을 꺾을 절학을 익힐 때까지는 누구도 무림에 나가지 마라....... 구천(九天)에서 내가 너희들을 지켜볼 것이다......! 응구유의 열두 아들은 피눈물을 뿌리며 고개를 수그렸다. 그 뒤로 광동 응가의 모습은 무림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나부산(羅浮山)의 깊숙한 산중에 칩거한 채 단 한 사람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 세월이 육십여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광동 응가의 찬란했던 명성은 점차 사람들의 뇌리에서 희미해져 갔고, 그들의 눈부셨던 채찍 솜씨는 몇몇 노강호들의 입으로 이따금 전해질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나부산의 깊숙한 골짜기에서 한 명의 사나이가 밖으로 나왔다. 전신을 칠흑 같은 흑포로 감싼 사나이의 왼쪽 팔에는 아홉 매듭으로 이루어진 기이한 채찍이 칭칭 감겨져 있었다. 흑의사나이는 제일 먼저 광동의 제일고수인 용호도(龍虎刀) 고원(古原)을 찾아갔다. 고원의 용호십삼도(龍虎十三刀)는 천하무림에서 가장 무서운 열 가지 도법(刀法) 중 하나였다. 하나 흑의사나이의 왼팔에서 아홉 매듭의 채찍이 풀려지는 순간 고원은 어느새 머리통이 박살난 채로 바닥에 쓰러지고 있었다. 흑의사나이가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강서(江西)의 명숙(名宿)인 번천장(飜天掌) 유월천(柳月天)의 유가장(柳家莊)이었다. 유월천 또한 삼 초를 견디지 못하고 양팔이 부러진 채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때부터 그의 명성은 강호를 진동하기 시작했다. 두 달 사이에 그는 무려 스물다섯 명의 절정고수들을 구절편(九節鞭) 아래 쓰러뜨려 확고한 명성을 구축했다. 사람들은 그를 칠십 년 전의 편신 응구유를 능가하는 무림사상 최강의 편법(鞭法)의 고수라고 칭송했고, 그의 아홉 매듭이 지어진 채찍은 강호에서 가장 무서운 열 가지 기문병기(奇門兵器)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응구유의 친손자이며 광동 응가의 제 이십칠 대 가주(家主)임을 천하무림에 밝혔다. 구룡편(九龍鞭) 응천성(應天星)! 이 이름은 삽시간에 강호무림의 살아 있는 신화(神話)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구룡편에는 마디마디마다 하나씩의 무서운 절초들이 숨겨져 있고 그 구룡편이 모두 펼쳐지면 천지(天地)가 번복(飜覆)하고 풍운(風雲)이 변색(變色)한다는 말이 천하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의 휘하로는 구름 같은 고수들이 모여들었고, 엄청난 부귀(富貴)와 권세가 구축되었다. 과거의 영화(榮華)를 되찾은 강남 제일의 명문세가(名門勢家)인 광동 응가의 가주, 무림사상 편법의 최강고수, 그리고 우내십대기문병기 중의 하나인 구룡편의 주인. 숱한 찬사가 그에게 쏟아졌고, 그의 명성은 조부였던 편신 응구유를 능가하여 그야말로 중천에 떠오른 태양처럼 혁혁한 것이 되었다. 그는 단시일 내에 무림인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을 모두 얻은 것이다. 하나 그런 그에게도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조부인 응구유의 피맺힌 원한을 아직 갚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응구유를 비통 속에 죽게 한 태극천자 위지독고의 태극문은 지리멸렬하여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고 위지독고의 무공을 익혔다는 인물 또한 전무(全無)했다. 응천성은 수하들을 풀어 위지독고의 후예들에 대한 행방을 탐문했으나 위지독고의 태극문은 동곽선생 냉북두를 끝으로 그 명맥이 끊긴 것 같았다. 그것이 못내 응천성을 아쉽고 억울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은 유난히도 화창하고 맑은 아침이었다. 응천성이 잠자리에서 눈을 뜬 순간 그는 자신의 침대 머리맡에 하나의 서신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서신의 겉봉에는 누가 보낸 것인지에 대한 어떤 서명도 없었다. 하나 응천성은 엄밀하기 짝이 없는 광동 응가의 호위망을 뚫고 자신의 침상 위에 서신을 남긴 인물의 능력을 존중해서 서신을 펼쳐 보았다. 서신의 첫 부분을 읽었을 때 그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나 다음 순간 그는 안색이 대변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눈빛을 번뜩이며 단숨에 서신을 다 읽어 버렸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이나 허공을 노려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안색이 딱딱하게 굳은 채로 몸을 날려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가 떠난 침상 위에는 서명도 없는 편지 한 장만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응대협(應大俠) 친전(親展) 본인은 평소 응대협의 신기(神技)에 가까운 채찍 솜씨를 흠모해 온 사람 중의 하나요. 그런데 얼마 전에 나는 우연히 길을 걷다가 누군가에게서 몹시 괴이한 말을 듣게 되었소. 그 자는 응대협의 구룡편이 비록 대단하지만 자신에게만은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며 큰소리를 치는 것이오. 나를 비롯해 당시 그 자의 곁을 지나던 몇몇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자 그 자는 광동 응가의 대라편은 이미 칠십년 전에 그의 사문(師門)에 의해 처참히 깨어진 절기이기 때문에 응가의 채찍으로는 결코 자신을 당해 낼 수 없다고 주장했소. 나는 몹시 화가 나서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고 물었소. 그랬더니 그 자는 자신은 태극문의 유일한 전인(傳人)인데 지금이라도 응대협이 눈앞에 있다면 십 초 내에 무찔러 버리겠다고 큰소리를 치는 게 아니오? 나는 비록 광동 응가의 식솔은 아니지만 평소 응대협을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울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소. 그래서 이렇게 나마 서신을 띄우게 된 거요. 알고 보니 그 자는 요즘 일수풍운이란 이름으로 제법 명성을 떨치고 있는 조자건이란 인물이었소. 내가 그 자를 만난 것은 안휘성(安徽省) 근처였는데 아마 금릉에서 열리는 무적검수맹의 무림대회에 참가할 예정인 듯하오. 부디 응대협께서는 그 버르장머리없는 녀석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 주어 정통무림세가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나타내 주시기 바라오. 대협의 무운(武運)을 빌겠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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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ㅎ늘 감사 히 잘읽고 갑니다
즐감 하고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