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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볕더위 이제 시작인데 벌써 지치면 안 되지요. 곧 장마가 시작된다니 잠시 쉬어갈 수 있습니다. 언제 여기까지 올라올지는 모르지만 분명 오겠지요. 하기야 포탄이 오가는 것보다는 태양열로 뜨거운 것이 낫기는 합니다. 괜스레 전쟁 위협 속에서 살게 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잖아도 하루하루 버티기도 힘겨운데 말입니다. 아무튼 시간은 흐르고 있습니다. 떠들거나 말거나 자기 갈 길 갈 줄 아는 것은 세월뿐입니다. 대단하지요. 시작부터(언제였는지 잘 모르지만) 앞으로 언제까지 일지도 모르지만 꾸준합니다. 끈기 하나 끝내주지요. 우리는 그 세월을 견디며 주름 하나씩 긋고 있는데 말입니다. 있든 없든, 잘 났든 못났든. 이것 또한 차별이 없습니다. ㅋㅋ
아직은 에어컨 틀지 않고 버티고 있습니다. 전기세 폭탄이 무섭기도 하지만 일단 몸의 적응력을 키워야 하니까요. 그래야 백세시대를 맞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ㅎㅎ 나에게도 가능할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도전하는데 돈 드는 일도 아닙니다. 해보는 거죠. 생명을 주관하시는 이는 따로 있겠지만 나름 개인적인 능력을 갖추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가만 앉아 땀만 흘리고 있다면 누가 눈 한 번 주겠습니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도 하니 말입니다. 일단 시작하였으니 그냥 달려가면 됩니다. 하루하루가 한주가 되는 것이고 한 달이 됩니다. 달리다 보면 6월이 가고 7월도 가겠지요. 좋을 것도 없지만 나쁠 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가던 길이고 가야 하는 길입니다. 이왕이면 신나게 행복하게 가기 바랍니다. ^)^
2024년 6월 22일 김종우 목사 드림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년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시편 90 : 14 - 15)
<원더랜드>
얼만 전 실제로 옛날 유명인이 등장하여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인공지능의 발전이 만들어준 선물(?)이었습니다. 너무나 놀랐습니다. 다시 보게 되니 조금은 익숙합니다. 그런데 실제 이런 일이 주변에서 일상화된다면 어떤 사태가 일어날까 궁금하기도 하고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얼마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눈앞에 나타나신다면 뭐라고 해야 하지요? 반갑습니다. 거기서 잘 계시나요? 어떻게 지내세요? 괜찮으세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실제 그곳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죽은 자가 있는 곳을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이곳 산 자들이 상상해서 만드는 것이지요. 종교를 떠나서 그곳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종교도 그곳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지 않습니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죽은 자가 중동이나 아프리카에 가서 고고학 연구를 위하여 유물 탐사를 한다고요? 자동차를 타고 사막을 횡단하고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합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냥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으로 지어내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실제 우리는 죽은 후 어디로 어떻게 가서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어떤 모습으로 변하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와 같은 복장을 하고 우리와 같은 생활을 합니다.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그냥 살아 있는 자들의 희망사항입니다. 잘 아는 대로 죽은 자들은 대부분 의상이 산 자들과는 다릅니다. 잘 아는 대로 ‘수의’를 입고 떠납니다. 혹 특별한 경우에는 그냥 평상복 입은 대로 장례를 치를 것입니다. 군인으로 전사하였다면 그냥 군복을 입었겠지요.
만약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의 살아있는 모습과 함께 살고 싶을까요? 사랑했던 사람이기에 그런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마당에 그게 실감날까요? 도무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혹 귀신과 함께 사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섬뜩한 이야기 아닐까요? 처음 얼마간은 혹시 상실의 아픔을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깨닫게 되면 그만큼 오히려 충격이 더 커지지 않을까 두려워집니다. 떠난 자는 그냥 떠나보내는 것이 도리이고 남은 자는 상실의 상태에 빨리 익숙해지는 것이 자신의 남은 삶을 유익하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어린 딸이 상처를 입을까 죽은 엄마에 대해 죽었다고는 이야기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업체와 계약하고 소위 인공지능으로 계속 살아서 활동하게 합니다. 물론 그 손녀를 돌보는 할머니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손녀에게 엄마는 일 때문에 멀리 해외 출장 중이라고 설득합니다. 그래서 수시로 영상통화만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엄마는 귀국합니다. 그리고 공항에서 만나게 됩니다. 만날 수 있습니까? 엄마는 사실 영상 속 가공의 인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지요? 할머니도 당황합니다. 업체는 그 엄마를 통해서 어떻게 해결할까요? 이 아이가 충격을 받지 않도록 배려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남자 ‘태주’가 사고로 인하여 인사불성이 의식을 잃고 입원 중입니다. ‘정인’이는 남친을 잃고 싶지도 않고 떨어져 있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업체에 의뢰합니다. 태주가 지구 밖 우주에서 일하고 있는 설정을 합니다. 아침 시간이 되면 휴대폰 알람으로 정인을 깨워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음성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지요. 우주선에서 일하는 애인은 멋진 설정입니다. 실물은 병원 입원실에 의식불명으로 누워 있습니다. 그 현실을 잊으며 날마다 좋은 아침을 맞는 것입니다. 태주 뒤로 보이는 아름다운 지구를 내려다보며 한 날을 시작한다니 멋집니다. 하기는 현실로 돌아오면 그만큼 아플 것입니다. 어쩌면 공상의 세계에서 사는 것이니 말입니다.
물론 아침만 통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고 싶을 때 하시라도 가능합니다. 정인이가 통화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태주가 걸기도 합니다. 그런데 태주가 하는 것은 업체의 프로그램으로 발생하는 것이겠지요. 어느 날 태주의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렇게 둘이 만났는데 문제는 현실과 가상의 세계가 섞인 것입니다. 정인이 태주와 데이트하는데 전화 벨이 울립니다. 언뜻 정인이가 전화를 끊고 피하는 것이 이상하여 왜 자꾸 피하냐고 핀잔을 주면서 의심합니다. 그래서 정인이가 핸드폰을 태주에게 넘겨줍니다. 그리고 핸드폰을 켠 태주가 그 속에서 자신을 보며 놀랍니다. 무슨 생각이 들까요? 왜 내가 여기에?
과연 이런 세상이 올까요? 이게 우리가 바라고 기다리는 세상일까요? 아직 당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항상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지만 가능하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가상의 인간도 똑같이 나이를 먹을까요? 물론 업체에서 그에 맞도록 설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모두 다 가상의 인간이 될 수는 없겠지요. 사실 한 사람은 실제 살아서 사용하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니까요. 그런 실제적인 문제를 떠나 죽은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이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닌 듯합니다. 그냥 추억으로 남겨두는 것이 긴 시간을 지내기에 오히려 유익하다 싶습니다. 영화 ‘원더랜드’(WONDERLAND)를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다르다
세상에 아버지 없이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부모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를 모를 수는 있어도 없을 수는 없습니다. 가끔 해외로 입양 갔던 아이들이 다 자라서 고국에 돌아와 부모를 찾는 일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었지요. 요즘이라고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단지 정말 부모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보다 빠르고 간편해졌습니다. 우리나라는 6.25 전쟁으로 헤어진 가족이 천만이라고 하였습니다. 약 반세기 전에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공원이 되었지만 옛날 여의도는 큰 광장이었지요. 근 백만이 모일 수 있는 그 광장을 온갖 현수막과 팻말과 전단지로 가득 채웠습니다. 왜요? 자기 가족 찾으려고. 이런저런 온갖 사연을 적어서 전시했습니다. 그런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는 겁니다. 서로 만나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 모든 사연을 종합하고 확인합니다. 그래서 과연 내 가족인지 친척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찾아내기도 힘들고 확인하는 작업도 쉽지 않지요.
오늘날 찾는 작업은 여전히 힘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 친족인지 확인하는 작업은 매우 간편하고 쉬워졌습니다. 이 사람이 내 자식인지 아니면 내 아버지인지 확인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습니다. 유전자 검사만 하면 됩니다. 쉽게 말하면 ‘씨’ 검사만 하면 된다 그 말입니다. 우리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맨 앞의 이름이 뭡니까? 성입니다. 그것이 바로 씨입니다. 김씨, 박씨, 이씨, 최씨 등등. 말 그대로 ‘씨’입니다. 그 씨가 내 씨냐 그 말이지요. 씨가 같아야 같은 가족입니다. 아무리 아버지라고, 자식이라고 우겨도 씨가 다르면 거짓입니다. 아저씨 정말 멋지게 생겼다, 그러니 우리 아버지 하세요, 한다고 해서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물론 양아버지는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어디까지나 ‘양아버지’입니다. 참 아버지는 아닙니다. 내 맘에 든다고 내 자식 되고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아버지 안 되고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씨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부모 자식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오래 전부터 약속하셨기에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이라도 하나님을 부르기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십계명에 보면 하나님을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출 20 : 7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제3계명입니다.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르신의 존함을 함부로 발설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존함을 함부로 말할 수 없지요. 그러면서도 하나님 백성은 종종 여호와를 부르며 부르짖습니다. 왜요? 아쉬우니까. 하나님도 약속하셨습니다. 렘 33 :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러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부르지 않겠습니까?
자, 그런데 맏아들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주 친근하게 부르십니다. 뭐라고요? ‘아버지’라고 말입니다. 기도도 그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렇지요? 여태 하나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하나님은 친근하다기보다 오히려 가까이 하기에는 좀 두려운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 제자들도 하나님을 좀 더 가까이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아마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제자들도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까이 느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익숙해지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심히 불쾌하였지요. 왜 그랬을까요? 자기네 아버지를 웬 거지꼴을 하고 있는 젊은 녀석이 자기 아버지라고 하는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같이 곱상한 사람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을 어느 날 웬 거지가 와서 자기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기분 좋겠습니까? 얼마나 자존심 상합니까? 설마 이런 거지를 또 자식으로 가지고 계신 것은 아니지요? 내 아버지가 저 놈의 아버지도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 거지 자식과 동등하다, 또는 우리 높으신 아버지가 저 거지 자식과 동등하다는 것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습니까?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생긴 것입니다. 거지꼴을 하고 있지만 이 젊은이가 다니며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합니다. 꼴보기 싫은 사람이 놀라운 능력을 행하고 다니니 더 기분이 상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충돌이 생겼습니다. 이 보기 싫은 젊은이가 능력을 행하는데 안식일에 하는 겁니다. 그러잖아도 기분 상하는데 안식일까지 범하니 불쾌하고 속상하고 짜증이 납니다. 말이나 못하면 몰라, 답변하기 힘들게 대드니 더욱 화가 나지요. 자 그 현장으로 갑니다. 어느 안식일 날 38년 된 병자를 고쳐줍니다. 유대인들이 가만있을 수 없습니다. 요 5 : 15 - 16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그런데 한술 더 뜹니다. 17 - 18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무슨 말입니까? 유대인의 하나님을 이 젊은이가 자기 아버지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네는 두려워서 함부로 부르지도 못하는데 웬 거지 꼬라지를 한 젊은이가 자기 아버지라고 하는 겁니다. 기분 좋습니까? 자기네는 굽신거리며 그 앞에 나서기도 어려운데 이 젊은이는 당당하게 그 앞으로 나갑니다. 기분 좋겠습니까? 얼마나 자존심 상합니까?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가 어떻겠습니까? 좋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계속 원수지간이 됩니다. 그러니 죽일 생각만 하는 겁니다. 문제는 마땅한 구실이 없다는 것이지요. 무작정 죽인다면 살인자가 됩니다. 살인하면 율법에 의거하여 사형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니 무작정 죽일 수는 없습니다. 죄를 만들어서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안식일을 범했다, 율법을 범했으니 마땅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설명을 들으면 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죄라고 주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율법을 범했는데 죄라고 할 수 없으니 그게 또 화가 나는 겁니다. 자기들은 율법을 그렇게 대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해석은 그보다 한 차원 높습니다. 자기들보다 배운 것도 없는 젊은이가 자기네보다 유식한 것 같으니 더욱 자존심 상하지요. 그렇다고 대적할 말도 찾지 못하니 이래저래 짜증만 나는 겁니다.
한 예를 보겠습니다. 마 12 : 9 - 10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사람들 곧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이 질문을 한 것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다? 그르다? 잘못이다, 그 말입니다. 자 그런데 뭐라고 대답하나 보자 이겁니다. 이에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11 - 1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할 말 있습니까, 없습니까?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합니다. 결과 14절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세상에서도 옳은 일을 하면 적이 많이 생깁니다. 왜요? 세상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 악한 세상에서 그러면 우리도 악하게 살아야 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마귀의 사람입니다. 땅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 한 백년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자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들만이 하나님께로 택함을 받은 백성, 소위 ‘선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들의 하나님이고 자기들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요 8장에 보면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 온 사건이 나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현장에서 여인을 붙잡아 예수님께로 데려 옵니다. 그리고 판결할 것을 종용하지요.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압니다. 그 후 예수님은 당신을 책잡으려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이것입니다. 요 8 :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아멘! 유대인들이 반론을 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남의 종 된 적이 없는데 무슨 자유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32절에서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예수님 자신이 바로 진리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유케 해주어야 비로소 자유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지요. 그들은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들이니 진리와도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네가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의 자녀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지요. 38절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아버지와 유대인들의 아버지가 같다? 다르다? 다르다.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자 그러면 유대인들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이상하지요? 그들이 반항합니다. 41절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예수님이 너희 아비는 내 아버지와 다르다는 것을 은연 중 말씀하시니까 대뜸 반론을 이야기합니다. 자기네 아버지가 누구라고요?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그러지요.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한 마디로 너희 아버지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기막힐 일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똑같이 하나님을 불러도 전혀 다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함을 받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시내 광야에 당도하여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말씀을 받으려 하나님의 산 시내 산에 올라갑니다. 그 기간이 40일, 산 아래서 기다리다 지친 백성이 모세의 형인 아론을 졸라댑니다. 출 32 :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 무엇입니까? 4 - 5절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그렇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상을 만들어놓고는 하나님을 부르며 섬기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네 아버지라고 말하는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아비는 누구인가요?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들의 아비가 누구라고요? 마귀랍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네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아비가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라고 하십니다. 누구 말이 진실입니까?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말을 믿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믿습니까? 한 마디로 그들이 하나님을 자기네 아버지라고 우긴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지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바로 그겁니다. 그들에게는 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이지요.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는 하나님 말씀이 없다는 말입니다.
생각해봅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 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 없습니까? 오늘날처럼 성경이 흔한 때가 아닙니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가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네만이 성경을 가장 잘 알고 또 가장 성경대로 산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요 8 : 42 - 4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즉 깨닫지 못하고 들을 줄 모른다는 것이지요. 성경을 가지고 있고 아무리 읽고 암송까지 한다 해도 그 뜻을 모른다면 아무 덕이 없습니다. 읽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45 - 47절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예수님은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들은 들을 줄 모릅니다. 깨닫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아니라 마귀에게 속했다는 말입니다. 무엇으로 안다고요? 그들 속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44), 즉 거짓말을 하고 자기가 지어낸 것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행여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부르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는 네 아비가 아니다,’ 하신다면 어쩌겠습니까? 큰일 날 일이지요. 예컨대 아버지를 모르고 자랐는데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는 말을 듣고 찾아 갔습니다. 아버지가 쉽게 인정할까요? 모르지요. 그러면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유전자 검사를 하는 겁니다. 과연 김 씨인가? 그 씨가 들어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은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씨가 들어있으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씨가 무엇입니까? 눅 8 :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씨가 무엇이라고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 8 : 31 - 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멘!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고 또한 하나님 말씀 즉 진리가 우리 안에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아버지를 부를 수 있고 아버지께 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요 15 :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아멘!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손쉽게 구할 수 있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누구나 소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책을 가지고 있다고 다 하나님의 자녀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냥 배우려고 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옛날 유대인들 특히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갖기 어려운 성경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대로 산다고 발버둥도 쳤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의 아비가 마귀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왜요? 올바로 깨닫지를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아멘! 그렇습니다. 구약성경은 예수님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예언대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리가 없는 자들입니다. 씨가 없는 자들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자기네 아버지라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 말대로 될까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예언하셨습니다. 그것이 신약성경으로 지금 우리 손에 들려져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다시 오실 때도 교회를 다니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확신하며 신앙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그 모두를 당신의 자녀로, 당신의 백성으로 인정해주실까요? 그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본 것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씨를 가진 자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고 하나님의 집 곧 하늘나라 천국으로 입국하는 것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 부르짖는다 해도 씨가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씨는 하나님 말씀이고, 모르는 말씀이 아니라 아는 말씀입니다. 읽고 쓰고 외운다 해도 모르면 꽝입니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아버지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몰라도 믿기만 하면 된다고요? 그게 바로 마귀의 미혹하는 말입니다. 알고 신앙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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